러시아 내전(러시아어: 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в Росси́и Grazhdanskaya voyna v Rossiyi; 1917년 11월 – 1922년 10월), 또는 적백내전은 옛 러시아 제국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벌어진 직후 발생한 여러 당파 간의 전쟁이다. 이는 러시아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여러 파벌들이 다투면서 발생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소련이 성립하게 되었으며 러시아 혁명이 종료되었다.
러시아 내전의 양대 교전 당사자로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사회주의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 그리고 군주제,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주의 및 반민주주의 세력이 느슨하게 연합하여 형성된 백군이 있었다. 이에 더해 이념이 없는 녹색 군단과 사회주의에 대립하는 여러 군벌들이 볼셰비키와 백군에 맞서 싸웠다. 러시아를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에 복귀시키고 지배 체제에 직접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사회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연합군 8개국이 내전에 개입했으며, 연합군에 대항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 제국 등 동맹국들과 친독일파 군벌들도 이 내전에 개입했다.
혁명 직후 정권을 획득한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군과 급히 강화하였다. 이에 반해 1918년 5월 러시아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시베리아에서 봉기하였고, 이에 호응해 연합군이 북부 러시아와 시베리아에 개입했다. 이 와중에 혁명에 반대하는 임시 러시아 정부가 성립되었고, 11월에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쿠데타로 임시 러시아 정부의 정권을 잡았다.
백군은 1919년 3월에 동부, 7월에 남부, 10월에 서부에서 공세를 진행했으나 붉은 군대의 반격으로 실패하였으며 북부와 서부 러시아에서 연합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붉은 군대는 1919년 우크라이나에서 남러시아군을 격파했고 시베리아에서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를 안겨주었다. 남아있는 백군은 표트르 브랑겔이 지휘했지만 1920년 말 크림반도에서 패배했고 이후 이곳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은 약 2년간 더 이어졌고, 붉은 군대와 백군 잔여 세력간의 충돌은 러시아 극동에서 1923년까지 이어졌다. 전쟁은 1923년 붉은 군대가 소련을 수립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1934년까지 반군이 활동했다. 7,000,000명에서 12,000,000명의 사상자가 전쟁 중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거의 대부분이 민간인으로 예상된다. 러시아 내전은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 중에서 가장 큰 국가적 재앙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러시아 내전에서의 독립운동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 등장하였고, 독립 세력은 전쟁에 참전했다. 러시아 제국의 옛 영토였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제2공화국이 독립 전쟁과 내전 이후 한때 독립했다. 구 러시아 제국의 남은 영토는 그 이후 소련에 합병되었고 발트3국도 다시 합병했다.
러시아 내전 결말
볼셰비키를 주축으로 한 적군이 승리했고 백군과 간섭군은 패배했다. 그리고 민족주의 세력들 중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그리고 훗날 국민투표를 걸쳐 루마니아에 병합되긴 했지만 몰다비아까지 총 6개국은 분리독립에 성공했다. 한편 볼셰비키가 세운 각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1922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을 결성했다.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까지 적군에게 패배했고 이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최후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펠랴예프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패배했다. 페펠라예프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러시아 바깥에서는 러시아 조계지였던 중동철도의 드미트리 호르바트 장군이 하얼빈과 중동철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나(하얼빈 혁명) 외부 지원도 다 끊긴 상황에서 동북군벌도 이기지 못할 약소 세력으로 전락한 상황인지라 중화민국이 소련을 승인하면서 가차없이 중국군에게 축출당했다. 다만 호르바트는 신강으로 달아났다가 소련으로 송환당한 다른 백군 장군들과 달리 북경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마지막 외부 간섭군이었던 일본군도 1925년 초 북사할린에서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고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에 괴뢰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행동에 '저것들이 땅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허나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하여 그 빈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국군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 더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쪽으로 향했고 1920년 반혁명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부농, 무슬림 등 러시아 제국 시대부터 통치받다가 독립한 세력은 바스마치 운동을 일으켜 1940년대 초반까지 산발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하지만 대세는 기울어서 적군과 이후의 소련군에게 진압되었다.
러시아 내전 영향
러시아 내전은 백군의 완벽한 패배와 신생 강대국 소련의 성립으로 끝났다. 러시아 내전에선 적군은 '군대'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병력과 패권을 획득했으나 백군은 완전히 찢어져 군벌 집단으로 변해 버리고 결국 러시아 백군 파벌 인사들은 도망가거나 죽었거나 추방당했다. 내전 중 백군 인사들이 유럽 국가들로 대규모 망명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맹목적인 공포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럽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켰고 이를 넘어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소련군 포로들이나 반공 러시아인들을 긁어모아 만든 러시아 해방군 등의 친독 부역자 세력들은 백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소련은 소련 나름대로 이때 세계 열강들의 침공을 일시에 받은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두고두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공을 우려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적으로 공업화에 집착하였다. 또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 실패와 러시아 내전의 위기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혁명 확산론을 좌절시키고 자국 공업화 및 생존을 주장한 스탈린의 주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불러들여 많은 폐해를 일으켰다.
이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훈은 소련식 기동전에 대한 교리가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때 러시아 내외의 반볼셰비키 세력을 제거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첩보 능력이 발달해 냉전 시기 소련의 첩보전 능력에 일조하기도 했다. 강제수용소가 처음 설치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지만 당시 수용자들은 내전 후 대부분 석방되었다. 또 소비에트 적군이 실전을 거치면서 기존 군 내의 합의적·민주적 분위기가 약화되고 일사불란한 군대식 관료체제가 대세가 된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의 성격을 바꾸었고 이것이 소련의 관료독재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연해주 일대와 중국 일대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일본의 뒤를 봐주던 미국의 반감을 사게 되어 1930년대에는 미일관계가 전쟁만 없을 뿐이지 서로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게 되었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러시아 내전에서 많은 극동 지방의 한인들이 적군에 많이 가담했다. 일본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연해주 일대로 들어와 적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탄압받던 한인들은 주로 사상적인 이유보다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적군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적군 내에서도 이들 한인 부대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증언이 많았다. 다만 이들은 의도치 않게 소비에트 정부의 지휘에 따라 백군과도 전투해야 했다. 만주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가담했던 한인들도 국공내전에서 국민혁명군과의 전투에서 소모된 경우가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적군뿐만 아니라 백군에 가담한 한인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시가 국군 제5보병사단의 초대 사단장이었던 김상겸 대령. 그는 내전 이후 폴란드군에서도 복무했던 특이 경력자였다.
또 이 전쟁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진영의 분열을 일으킨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유시 참변. 당시 좌우 할 것 없이 수많은 독립군들이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이후 국민혁명군과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으로서 중일전쟁과 6.25 전쟁에서 일본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는 김홍일 중장도 불과 21세의 나이로 적군에 가담해 대한의용군을 지휘하며 시베리아 전역에서 백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 철수전을 수행했다. 다만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적군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서 자유시에 독립군들이 집결하니 휘하 병력을 데리고 자유시로 가라는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중간쯤 왔을 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근처 러시아 한인촌에서 백군측에 일본군이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적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고 소련측이 한국 독립운동을 영 돕지 않자 배신감에 치를 떨며 미련 없이 러시아를 떠나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 위에 언급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선박으로 귀국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측에 매각하였다.
백계 러시아인 유민
이 시기에 반볼셰비키 세력들이었던 러시아 귀족들과 기존의 지주층, 러시아 정교 사제, 반공산주의자들이 난민이 되어 이스탄불, 파리, 베를린, 뉴욕 등 전 세계 각지로 망명했다. 이들은 당연히 극도의 반소·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 미국의 반공 정서 형성에 기여했다. 일부 학자들은 나치를 지지했던 반공주의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일부 백군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독일이 조직한 러시아인 부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일례로 백군 장군 중 하나인 표트르 크라스노프는 백군이 망하자 독일로 탈출했고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SS 카자크 군단을 지휘했다.
그 외에 살아남은 백군과 반공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중앙아시아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로 숨어들어서 도적이 되거나 중화민국의 땅이었던 만주와 신장 중가리아로도 많이 넘어갔다. 이들을 '백계 러시아인'이라고 하며 중화민국에만 8만 명이 넘게 망명했다. 전직 백군 출신들은 중국 군벌들의 용병이 되어 중국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는데 특히 장쭝창이 이들을 편애하였다. 백계 러시아인 여성들은 이들의 정부나 첩이 되기도 했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도 백계 러시아인들 묘사가 나온다. 만주 최대 도시였던 하얼빈에는 이들만 거주하는 디아스포라가 형성될 정도였다. 성스차이가 장악한 신장성에서는 소련군 장교가 백군 출신 병사들을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백계 러시아인은 만주 전략 공세 작전,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될 때 다시 제3국으로 피난가거나, 일부는 국공내전 전후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러시아계 중국인이 되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중화민국에서 살다 죽은 어떤 백군 장군의 묘비는 수십 년 후 문화대혁명 당시 지나가던 홍위병들에게 뜬금없이 폭파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어떤 백계 러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나 멀리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영국 식민지까지 가는 등 세계로 탈출한 백계 러시아인들은 결국 무국적자로 떠돌아야 했다. 일부 백계 러시아인 난민들은 일제강점기 조선까지 들어왔는데 상당수는 다시 미국이나 호주 등지로 떠났으나 일부는 조선 땅에 그대로 남아 생활하였다. 1936년 당시 서울에 73명을 포함해 전국에 203명이 거주했는데 주로 약장수, 화장품 장수, 양장점을 운영하거나 포수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지역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송환되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서울에 남아 있던 러시아인들은 6.25 전쟁 때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핏 생각하기에 모두 소련으로 보내졌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압록강변의 만포로 끌려갔다가 종전협정 직후 1954년에 교환으로 8명이 남한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때 돌아온 백계 러시아인들은 거의 미국 등지로 이민갔지만 1961년까지 서울에 남아있던 찌호노프 노인 같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의 증언 중에는 한반도 북부 함경도까지 와서 함경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딱하게 여긴 함경도 사람들이 고등어를 갖다주자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날것으로 먹었다고 할 정도라 했고 처음 보는 새파란 눈을 가진 하얀 사람들을 보며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으며 파란 눈이 이쁘다는 말을 했다던 사람도 있었다 했다. 이후에는 함경도에서 밍기적거리며 지내다가 돌아가거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이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소련이 내려와 눌러앉아 살던 백계 러시아인들을 잡아갔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한국 문학계의 '소냐' 니 어쩌니 하는 러시아계 백인 여성들이 나오는 작품들도 백계 러시아 피난민들의 영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