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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 Les bourgeois de Calais, 노블레스 오블리주, 진위 여부

Jobs 9 2025. 3. 1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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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

 

칼레의 시민은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에서 벌여진 사건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를 소재로 하여 오귀스트 로댕은 '칼레의 시민'이라는 작품을,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는 1917년에 이 소재를 바탕으로 3막 희곡을 선보이며 독일 표현주의 시대의 스퍼트를 끊기도 했다.

 

 

1347년,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거리였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다른 해안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상의 이점 덕분에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이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영국군에게 대항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처음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들을 껄끄럽게 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칼레 측의 여러 번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결국 그 말을 취소하게 된다.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에게 다른 조건을 내걸게 되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된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평가

이 일은 '그들이 상류층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에 대한 도덕성의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행한 주요한 예로 꼽히고 있다.

 

진위 여부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전쟁의 여파를 부각시키기 위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목적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당대의 문건들은 모두 약 20여 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었다고 적고 있다. 에드워드 3세는 당초부터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그 무렵에는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대 많은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루아사르의 해석은, 16세기에 이 사건이 다시 프랑스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면서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게 되었다. 특히 19세기로 접어들어 민족주의가 발호하자 역사 교과서들은 칼레의 시민 대표들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민족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그래서 칼레의 시민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창조된 신화라는 주장이 있다.

 



 

칼레의 시민, Les bourgeois de Calais

 

유럽사의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거의 모든 역사책에 실려 있고, 특히 저명한 조각가 로댕이 1895년에 이를 소재로 걸작을 제작한 이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8월 4일, 유럽 대륙으로 건너와 공세를 펼치던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포위 공격에 맞서 1년 동안 강력하게 저항하던 칼레 시민들이 드디어 항복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저항에 격노한 영국 국왕은 칼레 시민들을 전원 몰살하려 했다. 그의 부하들과 특히 필리파 왕비가 간곡히 설득하자 왕은 6명의 부자 시민들이 자원하여 사형을 당하면 나머지 시민들의 목숨을 구해주겠노라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시장인 외스타슈 드 셍-피에르와 5명의 부유한 시민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기로 하고, 왕이 말한 대로 목에 밧줄을 두르고 셔츠 바람에 맨발로 걸어 나왔다(로댕의 작품은 이 순간 그들이 겪는 죽음의 고뇌를 드라마틱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때 다시 왕비가 탄원하여 용감한 시민들의 목숨을 구해준다.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 의심해 왔다. 이미 18세기에 볼테르는 "원래 영국 국왕은 시민들의 목에 두른 밧줄을 세게 죌 생각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최근 프랑스의 한 연구자는 이 이야기의 실제 의미가 왜곡·과장되었으며, 그것을 주도한 인물이 14세기의 연대기작가인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칼레의 사건을 기록한 당대 문건들은 모두 20여 개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시민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적인 의식(儀式)이었다고 적고 있다. 말하자면 6명의 시민 대표들은 처음부터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던 것이다. 원래 죄인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들의 행위는 여기에서 발전해 나왔으리라는 점도 밝혀졌다. 애국적인 작가 프루아사르만이 이 사건을 숭고한 행위로 미화하며 민족 정서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16세기 이후 이 사건이 다시 알려지면서 프루아사르식의 해석이 대중의 감성을 지배했다. 특히 민족주의의 시대인 19세기에 역사학 교과서들이 칼레의 시민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영웅으로 크게 부각시켰고, 문학과 예술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몰랐던 진실을 새로 알게 되는 희열보다도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신화가 깨졌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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