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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비트겐슈타인

Jobs9 2023. 8. 1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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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는데,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는 철강업계의 큰 손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에 의해 비트겐슈타인은 베를린 공대에서 항공공학 분야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깊숙한 곳에 내재한 철학적 열정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케임브리지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버트런드 러셀이 고안한 ‘러셀의 역설’에 강한 흥미를 느끼게 되고, 러셀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버트런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처음 접했을 때, 적잖이 당황한 듯하다. 러셀의 표현에 따르면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이상하리만치 열정적이었고, 드높은 러셀의 명성 앞에서도 저돌적인 도전을 서슴지 않았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마왕의 자존심을 가졌다.’고 표현했을 정도인데, 따라서 이 사제 간의 대화는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만한 도전 앞에서 러셀이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고 평가한다. 이와 관련하여, 러셀은 그의 애인이었던 ‘오톨라인 모렐(Ottoline Morrell)’에게 보낸 편지에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 글의 중요한 부분을 그에게 소개했소. 그는 내 글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였소. 그리고 나의 견해가 옳지 않다고 하였소. 그런데 나는 그의 반론을 이해할 수 없었소. 그의 반론은 이해하기에 다소 모호하였지만, 나는 그의 견해가 틀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소. 내가 무엇을 빠뜨렸는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나의 즐거움은 모두 무너져버렸소.” 

 

위의 글은 러셀의 편지를 요약한 것이다. 러셀은 편지에서 자신이 비트겐슈타인의 반론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반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크게 상처를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중 한 명이었던 러셀이, 어린 제자를 만나 자신의 사유에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는 편지의 내용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애인에게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는 짐작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비트겐슈타인과 한동안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혁명적인 저서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을 써 주기도 했고, 이 책은 러셀의 서문 덕에 출간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논리철학논고』가 러셀의 서문 없이는 출간이 불가능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역시 러셀의 서문이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의 친밀한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고 하며, 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성향 때문이었으리라.  

서양의 논리철학에서 중요한 획을 그었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이 둘의 만남은 서양 지성사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임은 분명하지만, 갈등을 전제로 시작한 비극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젠틀한 귀족, 버트런드 러셀과 젊고 오만한 비트겐슈타인이 만나면서 발생하는 갈등의 불꽃은 서양 근대 지성사의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다. 




러셀은 철학적 문제가 논리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전기 비트겐슈타인도 이 점에서 러셀과 일치한다. 철학의 문제는 논리적 혹은 언어적 문제이다. 러셀은 논리를 통해서 세계의 구조를 명백하게 만드는 것을 철학의 임무로 보고 있다. 이 세계의 구조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언어가 아니라, 그런 의도에 맞게 구성된 인공 언어, 기호 언어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 안에 이미 완전한 논리적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철학의 임무는 이상적인 논리적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우리 언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논리적 구조와 질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파악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헛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했던 이런 의도와 생각을 잘 이해하지 않거나 혹은 무시하였기에 러셀뿐만 아니라 프레게도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적어도 러셀이나 프레게에 있어서 언어는 세계의 존재 구조를 드러내는 수단이거나 논리 계산을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우리가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 혹은 우리가 그 안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언어는 개조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이러한 언어는 진짜 그 논리적 관점에서 완전하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이러한 언어는 부분적 개조를 허용할 정도로 신축적이다. 그럼에도 우리 일상언어의 질서는 완전하다. 이것에 대해 엄슨(J.O. Urmson)은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에 대한 경험 독립적 확실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철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부정적이며 소극적 태도가 나타난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며 설명적이며 가설적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서술적이다. 따라서 철학은 무엇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것을 서술하는데 만족해야 한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이 주어진 것이 일상언어 안에 내재한 논리적, 경험 독립적 구조였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이 주어진 것은 일상언어의 규칙들이거나 문법들이다. 비록 주어진 것의 특성이 전기와 후기에 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동일한 것은 이 주어진 것이 경험적이거나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게임에 비유한다. 게임으로서 언어는 놀이나 장난, 혹은 유희의 대상이다.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로티이거나 로티가 파악한 데리다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와 게임의 유비는 놀이와 유희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규칙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언어나 게임 모두 규칙 지배적이다. 언어를 놀이나 유희로 파악하고 있는 로티가 언어를 자연의 거울, 표상체계로 바라보는 생각에 비판적이듯이, 후기 비트겐슈타인도 때로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했다고 주장되는 것처럼 표상적 언어, 그림 언어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표상적이며 그림적 언어는 세계를 바라보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그림 언어 속에 존재하고 있다. 

 
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며, 그것은 논리의 한계이다. 적어도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 세계, 논리는 서로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언어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런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며, 논리적 공간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실책이라고 바라보았던 것은 바로 이런 언어가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따라서 마찰이 없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런 수정과 같이 맑은 언어는 논리의 숭고함에 의존해 있다. 그러나 이 맑은 언어는 사용되지 않는 언어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은 언어가 우리 활동의 일부분이라는 것, 달리 말하면 사용되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분명히 러셀이 그러했듯이 언어를 세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도구로 간주한다면 우리 일상언어는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러셀이 지적하듯이 그것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그러나 이 애매하고 모호한 언어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나아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이 모호한 경계선도 이미 경계선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언어가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생각들을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 언어, 사유는 수정 같이 맑은 경험 독립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문법적 규칙은 경험 독립적이지만, 어떤 규칙은 경험적 명제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우리 언어나 개념은 명료하게 파악될 수 있는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명료하기 짝이 없는 가족 유사성으로 되어 있다. 러셀이 논리적 고유명사에 대해 주장하듯이 그 자체 독립적으로 의미를 가진 것이라곤 없다. 러셀을 비판하는 스트로슨처럼 그러한 고유명사조차 이미 사용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이 언어의 형이상학적 사용, 혹은 철학적 사용으로부터 일상적 사용으로 되돌려 놓은 것, 이러한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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