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공화국, Bundesrepublik Deutschland, 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
약칭 독일, Deutschland 도이칠란트
Bundes(연방, 연방의)
중앙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다. 인구는 2023년 기준 84,607,016명으로 유럽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유럽 연합(EU) 회원국 중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북쪽으로 발트해, 북해와 남쪽으로 알프스산맥의 사이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덴마크,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는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와 접해 있다. 영토는 357,021km2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그 외에 소수 민족들의 언어인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 등도 쓰인다. 독일의 수도이자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베를린이고, 주요 금융 중심지는 프랑크푸르트, 가장 넓은 도시권은 루르이다.
현대 독일 지역에 대한 정착은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신석기 시대 이후로는 주로 켈트족이 정착하였다. 이후 고대 시대부터는 다양한 게르만 부족이 현대 독일의 북부 지역에 정착했으며, 이 지역은 기원전 100년 이전부터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962년에 형성된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16세기에 북독일 지역은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에 독일에서는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1866년 8월 18일의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통해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은 현대의 국민 국가로의 공식적인 통일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과 11월 혁명 이후, 제국은 대통령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나치의 집권은 독일의 전체주의 독재,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만들어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동시에 성립된 연합국 점령지 기간이 끝난 후 독일 전체는 일반적으로 서독이라고 불리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동독으로 불리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제한된 주권을 가진 두 개의 개별 국가로 조직되었다.[h]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와 유럽 연합(EU)의 창립 회원국이었고,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동구권 국가이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회원국이었다. 동독에서 공산주의 정부가 몰락한 이후 독일이 재통일되어 이전 독일의 주들은 1990년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여 독일은 연방 의회 공화국이 되었다.
독일은 강력한 경제를 가진 강대국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명목 GDP로 세계 3위,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세계 5위인 경제를 가지고 있다. 산업, 과학과 기술 분야의 글로벌 강국으로서 세계 3위의 수출국이자 수입국이다. 선진국으로서 사회보장제도, 의료 서비스와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독일은 유엔, 유럽 연합(EU),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유럽 평의회(CoE), G7, G20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다. 또한 독일은 세 번째로 많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국명
독일 자국 내에서의 표기인 Deutschland(도이칠란트), 원래 diutisciu land(독일의 땅)은 deutsch(Cf. Dutch)에서 유래되었다. Deutsch는 베르나쿨라를 라틴어, 로망스어군와 그 후대 언어들로부터 구분되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써 인도유럽조어의 tewtéh₂(사람들)과 þeudō에서 유래된 게르만조어의 þiudiskaz(사람들의)에서 유래되었다.
독일 국외에서 독일의 국명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하게 불린다. 대표적으로 영어로 '절머니(Germany)'[i], 프랑스어 '알마뉴(Allemagne)'[j], 폴란드어 '니엠치(Niemcy)'[k], 중국어 '더궈(德国)'[l], 네덜란드어 '다위츨란트(Duitsland)' 등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일본어: 独逸ドイツ)'[m]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 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이는 문화어에서는 원어의 표기와 비슷한 '도이췰란트'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독일의 역사
Geschichte Deutschlands
인류 이전의 조상인 '다누비우스 구겐모시'는 1,100만 년 전에 독일에 살았으며, 직립보행하는 가장 초기의 사람과 유인원 중 하나로 이론화되었다. 고대 현 인류는 최소한 60만 년 전에 독일에 존재했다. 최초의 현 인류가 아닌 화석(네안데르탈인)은 독일 네안데르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인 약 4만 2천 년 된 플루트, 약 4만 년 된 사자 인간, 약 3만 5천 년 된 홀레 펠스의 비너스 등을 포함하여 유사한 연대의 현 인류의 증거들이 슈베비셴 알프(Schwäbischen Alb)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네브라 하늘원반은 독일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게르만 부족과 프랑크 제국
게르만족은 북유럽 청동기 시대 혹은 초기 청동기 시대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와 북독일에서 그들은 남쪽, 동쪽, 서쪽으로 확장하여 켈트족, 이란족, 발트족, 슬라브족과 접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부족들이 거주하는 땅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 게르마니아 속주를 만들었다. 서기 9년, 세 개의 로마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해 게르마니아를 지배하려는 로마인들의 야망을 단념시켰고, 따라서 이는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서기 100년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의 기원과 현황》을 썼을 때, 게르만 부족들은 라인강과 다뉴브강(리메스 게르마니쿠스)을 따라 정착하여 현대 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덴뷔르템베르크, 남부 바이에른, 남부 헤센과 서부 라인란트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260년 경에 게르만족이 로마가 지배하는 땅에 침입했다. 375년 훈족의 침공 이후인 395년부터 로마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게르만 부족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곳에 정착한 게르만족들은 프랑크 왕국을 설립하고 작센과 바이에른을 정복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현대 독일의 동부 지역에는 서슬라브족이 거주했다.
동프랑크와 신성 로마 제국
1483년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도전하여 종교 개혁과 개신교를 일으켰다.
카롤루스는 800년 카롤루스 제국을 세웠으나, 이 제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동쪽의 후대 왕국은 서쪽으로는 라인강에서 동쪽으로는 엘베강까지, 북쪽으로 북해에서 남쪽 알프스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 그 후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하였고, 오토 왕조 시기(919-1024)에 여러 주요 부족공국들을 통합했다. 996년 오토 3세는 자신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한 직후 자신의 친척 그레고리오 5세를 교황으로 임명해 그레고리오 5세는 최초의 독일계 로마 교황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잘리어가 시기(1024-1125)에서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를 흡수했지만 이 시기에 서임권 투쟁으로 인해 황제는 권력을 잃었다.
호엔슈타우펜가 시기(1138-1254)에서 독일 왕자들은 남쪽과 동쪽으로의 독일인 정착을 장려하는 동방식민운동을 벌였다. 대부분의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으로서 무역의 확장을 통해 번영했다. 그러나, 이후 인구는 1315년 대기근으로 인해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뒤따라 1348~1350년 흑사병이 퍼졌다. 1356년에 발표된 금인칙서는 제국의 헌법 구조를 정립하였으며, 7명의 선제후에 의한 황제 선출을 성문화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유럽에 활자 인쇄술을 도입하여 지식의 민주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개신교 종교 개혁을 선전하였으며, 그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언어의 표준화를 불러 일으켰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복음주의' 신앙(루터교회)을 용인했으나, 동시에 '군주의 신앙이 신하들의 신앙이 되어야 함(라틴어: Cuius regio, eius religio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을 선언했다. 쾰른 전쟁부터 30년 전쟁(1618-1648)에 이르는 종교 분쟁은 독일의 땅을 황폐화시켰고 인구를 크게 줄였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국 영지의 통치자들 간의 사이의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 대부분의 독일어권 영지 통치자들은 로마 카톨릭교회나 루터교회 또는 개혁 신앙을 공식 종교로 선택할 수 있었다. 일련의 '제국 개혁'(약 1495-1555)에 의해 시작된 법률 체제는 상당한 지방 자치권과 강력한 제국 의회를 만들었다. 합스부르크가는 1438년부터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할 때까지 제국의 황제 직위를 가졌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샤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후로 황제가 된 남편 프란츠 1세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다.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군주국과 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이원론이 독일의 역사를 지배했다. 1772년, 1793년, 1795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폴란드 분할에 동의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국 의회의 최종 회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자유제국도시는 왕조의 영토에 합병되었고, 교회의 땅도 마찬가지로 세속화되고 합병되었다. 끝끝내 1806년 제국은 해체되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독일 내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독일 연방과 제국
1815년의 독일 연방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의 빈 회의는 39개의 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느슨한 동맹인 독일 연방을 수립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연방 의장으로 임명한 것은 프로이센의 영향력 증대에 대한 의회의 거부 의사를 반영한 것이다. 복원된 정치 내의 의견 충돌은 부분적으로 자유주의 운동의 부상으로 이어졌고, 이 운동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에 의한 새로운 탄압을 받았다. 독일의 관세동맹(Zollverein)은 체제가 확립된 후 독일의 경제적 통합을 촉진시켰다. 유럽의 혁명 운동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과 평민들은 독일 문제를 제기하면서 독일의 여러 국가들에서 1848년 혁명을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의 칭호를 받고도 권력을 잃었고, 이에 반발한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한 왕관과 헌법을 거부했으며, 이는 독일에서 자유주의 운동의 일시적인 중단이었다.
빌헬름 1세는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했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며, 결정적으로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그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북독일 연방을 수립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한 이후, 독일의 군주들은 1871년에 독일 제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로이센은 새로운 제국 내에서 제국을 지배하는 성격의 구성국이었고, 이로 인해 프로이센의 국왕이 독일의 황제였으며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에 독일 총리로서의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은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고 전쟁을 피하여 강대국 독일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치하에서 독일은 신제국주의적 노선을 취하며 주변국과 마찰을 빚었다. 이 시기 독일은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이중 동맹을 구축하였고 1882년 삼국 동맹을 구축하면서 이탈리아를 동맹으로 끌여들었다.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3국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이익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간섭, 혹은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간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독일은 동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토골란드(토고)와 카메룬을 포함한 여러 식민지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나중에 독일은 식민 제국을 확장하여 태평양과 중국의 영토를 얻었다.[59]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식민 정부는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현지 헤레로인과 나마인들을 말살했으며,[60][61] 이것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를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을 개전할 구실을 제공했다. 약 2백만 명의 독일인이 사망한 4년 간의 전쟁 끝에, 일반적인 휴전이 전쟁을 종식시켰다. 1918년 11월 독일 혁명에서 빌헬름 2세와 집권 제후들은 직위를 포기했으며 독일은 연방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의 새로운 지도부는 1919년 연합국으로부터의 패배를 인정하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독일인들은 이 조약을 굴욕적이라고 생각했고, 역사가들은 이러한 분위기가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63] 독일은 유럽 영토의 약 13%를 잃었고 아프리카와 태평양에 있는 모든 식민지 영토를 승전국에 할양했다.[64]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이 부분의 본문은 바이마르 공화국 및 나치 독일입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1919년 8월 11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했다. 이어지는 권력 싸움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다른 곳의 보수 세력들은 카프 폭동을 일으켜 공화국을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의 거리 전투, 벨기에와 프랑스군에 의한 루르 점령에 더해 초인플레이션 기간이 뒤따랐다. 부채 구조 조정 계획과 1924년의 새로운 통화 생성은 예술적 혁신과 자유로운 문화 생활의 시대인 '황금의 20년대'를 열었다.
1929년 전 세계적인 대공황이 독일을 강타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 정부는 재정 긴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구하며 1932년까지 거의 30%의 실업률을 초래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1932년 특별선거 이후 독일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이 되었고 이내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했다.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이후, 새로운 법령은 기본적인 시민권을 폐지했고 최초의 나치 강제 수용소가 열리게 만들었다. 1933년 3월 23일, 전권 위임법은 헌법을 무시하고 히틀러에게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하여 나치 독일의 시작을 알렸다. 히틀러의 정부는 중앙 집권화된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으며 재무장을 선언하며 군대를 극적으로 늘렸다. 공공 사업에 중점을 둔 경제 재건을 위한 정부의 후원 프로그램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라이히스아우토반(Reichsautobahn) 정책이었다.
1935년 히틀러 정권은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유대인과 기타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뉘른베르크법을 도입했다. 또한 독일은 1935년 자르의 통제권을 다시 획득했고 1936년 라인란트를 재무장시켰으며,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같은 해 뮌헨 협정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였다. 1939년 3월 협정을 위반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에 히틀러 정권은 시나고그를 불태우고 유대인 기업을 파괴하며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체포했다.
1939년 8월, 히틀러 정부는 동유럽을 소련과 독일의 세력권으로 나누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봄,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프랑스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프랑스 정부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통해 독일군의 공습을 격퇴했다. 1941년에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와 소련을 침공하였다. 1942년까지 독일과 그 동맹국들은 유럽의 대부분과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고 북아프리카를 연합국에게 다시 빼앗기고, 1943년 연합국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이후 독일군은 반복되는 군사적 패배를 겪었다. 1944년 소련은 동유럽을 점령했고, 서방 연합국은 프랑스에 상륙하여 독일의 마지막 반격을 이겨내고 독일에 입성했다. 베를린 공방전 도중 히틀러가 자살한 후, 독일은 1945년 5월 8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여 유럽과 독일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나치 관료들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았다.
나중에 홀로코스트로 알려지게 되는 나치 독일 정부의 정책은 독일 내의 소수 민족들을 유럽 전역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에 억류하는 것과 같이 소수 민족을 박해했다. 총 1,700만 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당했는데, 여기에는 유대인 600만 명, 롬인(집시) 최소 13만 명, 27만 5천 명의 장애인,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수천 명, 정치와 종교적인 반대자 수십만 명이 포함된다. 독일 점령지에서 독일의 정책으로 인해 폴란드인 약 270만 명, 우크라이나인 130만 명, 벨라루스인 100만 명, 소련의 전쟁 포로 350만 명이 사망했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530만 명으로 추산되며, 독일의 민간인 약 90만 명이 사망했다. 약 1,200만 명의 독일인들이 동유럽 전역에서 추방되었고 독일은 전쟁 전 영토의 약 4분의 1을 잃었다.
동독과 서독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연합군은 베를린과 남은 독일의 영토를 4개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했다.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부 지역은 1949년 5월 23일 독일 연방공화국(독일어: Bundesrepublik Deutschland)이 형성되면서 하나로 합쳐졌고, 1949년 10월 7일 소련이 점령한 지역은 독일 민주공화국(독일어: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으로 재편되었다. 이 국가들은 각각 비공식적으로 '서독'과 '동독'으로 불렸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서독은 본을 임시 수도로 선택하여 두 국가 분할은 일시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서독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가진 연방 의회 공화국으로 설립되었고, 1948년부터 서독은 미국의 마셜 플랜에 따라 재건을 위한 원조를 받는 주요한 국가가 되었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1949년 독일의 첫 연방총리로 선출되었으며, 독일은 1950년대 초부터 장기적인 경제 성장(Wirtschaftswunder)을 누렸다. 서독은 1955년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고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창립국이었다. 1957년 1월 1일, 자르는 서독에 가입하여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동독은 소련으로부터 점령군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통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통제받는 동구권 국가였다. 동독이 자신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주장했지만 모든 정치적 권력은 비밀 정보 기관인 국가보안부의 지원을 받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폴리트뷰로)에 의해서만 행사되었다. 동독의 선전이 동독의 사회 프로그램의 혜택과 서독의 침략 위협에 근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독의 시민들은 자유와 번영을 위해 서독을 찾았다.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았고 나중에 이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동독과 서독 사이의 긴장감은 1960년대 후반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Ostpolitik)에 의해 완화되었다.[102] 1989년 헝가리는 철의 장막을 해제하고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기로 결정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동독의 시민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기적인 대중 시위들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동독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독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동독 당국은 국경 제한을 완화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이 완전한 주권을 되찾은 2+4 조약으로 분수령이 되는 개혁 과정이 가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1990년 10월 3일 구 동독의 재건된 5개의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허용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몰락, 소련의 붕괴, 독일의 재통일과 전환점(Die Wende)의 상징이 되었다.
통일 독일과 유럽 연합
1989년 붕괴된 베를린 장벽과 브란덴부르크 문은 냉전 종식의 첫 번째 발전 중 하나였으며 이는 최종적으로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통일 독일은 서독의 확장된 연장선으로 여겨지며 각종 국제 조직의 회원 자격들을 유지했다.[105] 1994년 '베를린-본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되었으며, 본은 일부 연방 부처를 유지하는 연방직할시(Bundesstadt)라는 독특한 지위를 얻었다.[106] 정부 이전은 1999년에 완료되었고, 동독 경제의 현대화는 2019년까지 지속되었다.
통일 이후 독일은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2007년 리스본 조약에 서명하고[109] 유로존을 공동 설립하는 등 유럽 연합(EU)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10] 독일은 발칸 반도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견했고, 탈레반 축출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NATO의 노력의 일부로 독일군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했다.[111][112]
2005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은 최초의 독일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2009년 독일 정부는 500억€(유로) 규모의 경기 부양 계획을 승인했다. 21세기 초 독일의 주요 정치 프로젝트 중에는 유럽 통합의 진전, 지속 가능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에너지 전환(Energiewende), 균형 잡힌 예산을 위한 부채 억제, 출산율 증가 정책, 인더스트리 4.0으로 요약되는 독일 경제의 전환을 위한 첨단전략 등이 있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동안, 독일은 백만 명 이상의 난민과 이주민을 받아들였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동안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많은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자연 환경
독일의 면적은 357,021km2로, 육지 면적 349,223km2와 내수면 면적 7,798km2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럽에서 7번째로 영토가 넓은 국가이다. 독일은 북쪽으로 덴마크,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남서쪽으로 스위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북서쪽으로 네덜란드와 맞닿아 있다. 북서쪽으로는 북해를, 북동쪽으로 발트해와 마주하고 있다.
독일의 해발고도는 남쪽의 고도가 높은 알프스 산맥(최고점: 추크슈피체산의 2,962m)에서 고도가 낮은 북서쪽의 북해 해안과 북동쪽의 발트해까지 다양하다. 독일 중부에 숲이 우거진 고지대와 북부의 저지대(최저점: '빌슈테르마르슈, 노이엔도르프-작센반데', 3.54m)에는 라인강, 다뉴브강, 엘베강 등의 주요한 여러 강이 가로지른다. 독일의 주요한 천연 자원들에는 철광석, 석탄, 칼륨, 목재, 갈탄, 우라늄, 구리, 천연 가스, 소금과 니켈 등이 있다.
기후
독일은 북쪽과 서쪽의 해양성 기후부터 대륙성 기후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온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겨울에는 일반적으로 강수량이 많지 않은 흐린 날씨로 남쪽의 알프스의 추운 날씨부터 서늘한 날씨가 있으며,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부터 시원하고 비가 오는 날씨까지 다양하다. 북부 지역은 북해에서 습한 공기를 받아 기온을 낮추고 강수량을 증가시키는 편서풍이 우세하다. 반대로, 남동부 지역은 더 극단적인 일교차를 보인다.
2019년 2월부터 2020년까지 독일의 월평균 기온은 2020년 1월 최저 온도 3.3 °C (37.9 °F)에서 2019년 6월 최고 온도 19.8 °C (67.6 °F)까지 다양했다. 월 평균 강수량은 2019년 2월 4월 제곱미터당 30리터에서 2020년 2월 제곱미터당 125리터까지 다양했다. 월 평균 일조시간은 2019년 11월 45시간에서 2019년 6월 300시간까지 다양했다.
생물
독일의 영토는 대서양 혼합림, 발트 혼합림, 중앙유럽 혼합림, 알프스 혼합림과 서유럽 활엽수림 등으로 5개의 생태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독일 국토의 51%는 농업 지역으로, 30%는 숲으로, 14%는 주거지와 기반 시설들을 포함한 도시로 덮여 있다.
독일에 있는 식물과 동물은 일반적으로 중앙유럽에 흔히 분포한 것들이다. 독일 국립산림목록에 따르면 숲의 60%는 대부분 가문비나무속과 소나무속으로 이루어진 침엽수로 덮여 있으며, 나머지 40%는 대부분 너도밤나무속, 참나무속과 기타 낙엽성 나무들이 차지한다. 또한 독일에는 많은 종류의 양치류, 꽃, 균계와 이끼류 생물들이 있다. 독일의 야생동물로는 노루, 멧돼지, 무플런, 여우, 오소리, 토끼와 소수의 비버가 있다. 푸른색 수레국화는 과거 독일의 국화였다.
독일의 국립공원은 모두 16개[r]이다. 이에 더해 17개의 생물보전지역, 105개의 자연 공원과 400개 이상의 동물원[이 독일에 위치해 있다. 1844년부터 운영된 베를린 동물원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의 동물을 가지고 있다.
정치
독일은 의원내각제와 대의 민주제를 채택한 연방공화국이다. 연방공화국의 입법권은 독일 연방의회(Bundestag)와 독일 연방상원(Bundesrat)[c]으로 구성된 의회가 가지고 있다. 연방의회는 직접 선거를 통해 혼합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연방상원은 16개 연방주 정부에 의해 임명되며 각각의 연방주를 대표한다. 독일의 정치 체제는 독일 기본법(Grundgesetz)으로도 불리는 1949년 제정된 헌법에 명시된 틀에 따라 운영된다. 기본법 개정안은 일반적으로 연방의회와 연방상원 모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이루어지며, 기본법에서 인간의 존엄성, 권력 분립, 연방공화국의 구조와 법치주의를 보장하는 조항은 영원히 유효하다.
현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는다. 대통령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서만 소집되는 연방총회(Bundesversammlung)에 의해 선출된다. 연방공화국의 두 번째로 높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은 연방의회 의장(Bundestagspräsident)으로,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며 연방의회의 각종 회의를 감독하는 책임을 갖는다. 세 번째로 높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이자 정부수반은 총리로, 연방의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보유한 정당이나 연립정당에 의해 선출되어 임명된다. 현재 올라프 숄츠 총리는 정부수반으로서 연방내각을 통해 행정권을 행사한다.
1949년 이후 정당 체제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장악한 채로 유지되었으며, 지금까지의 모든 총리는 이 두 정당의 하나에 속해 있었다. 그럼에도 소규모 정당인 자유민주당(FDP)과 동맹 90/녹색당(GRÜNE) 등은 연립정부의 하급 구성 파트너로서 정부에 속했다. 반면 2007년 이후에 연방의회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잡은 민주사회주의 정당인 좌파당은 정부에 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201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처음으로 의석을 얻어낼 만큼 많은 표를 얻었다.
행정 구역
독일은 연방제 국가이며 전체적으로 16개의 연방주(Länder)로 구성되어 있다. 각 연방주는 각각 자체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연방주 내의 조직과 관련해 주로 자율적인 권한을 갖는다. 2017년 독일은 401개의 군(Kreise)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은 294개의 지역군(Landkreis, 농촌 지역)과 107개의 군급시(Kreisfreie Stadt, 도시 지역)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