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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9 2024. 8. 1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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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동북, 東北地方, とうほく地ちほう, Tōhoku region

일본 혼슈 동북부에 있는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아키타현, 야마가타현, 후쿠시마현의 6개 현 지방을 말한다.

인구는 8,596,801명, 인구밀도는 129.68명/km²이다. 면적은 66,949.44km²로 혼슈 전체 면적의 약 30%, 일본 전체 면적의 약 17% 정도를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로 도도부현별 면적 랭킹에 도호쿠 6현은 모두 상위권에 자리한다. 이중 이와테현은 홋카이도를 제외한 1도(都) 2부 43현 중에서 가장 넓다. 오우 지방(奥羽地方)이라고도 한다. 

최대 도시는 미야기현의 현청소재지 센다이시이다. 지역 내 압도적 최대도시이자 유일한 정령지정도시이다. 제2도시는 행정구역으로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도시권으로 같은 후쿠시마현의 코리야마시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센다이와는 인구 규모로 3배 정도 차이난다. 보통 동일본으로 분류되지만 기후나 역사지리학 등에서는 홋카이도와 함께 북일본으로 분류된다.

 

지리 및 기후
동쪽의 해안가와 내륙의 사람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산지가 상당하다. 단순히 겉모습만 멋진 것뿐만 아니라 현 여러 개에 걸치는 정도로 넓다. 각각 산리쿠 부흥 국립공원과 도와다 하치만타이 국립공원, 세계유산인 시라카미 산지로 지정되었다. 

도호쿠 일대가 위도가 높아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서늘한 대륙성 기후에 가까운 특성을 가지나 지역별로 차이가 크다. 크게는 도호쿠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오우산맥을 경계로 동해쪽 해안과 내륙분지, 태평양 쪽의 내륙분지와 해안 지역으로 분류한다. 이 중 야마가타나 아키타같이 동해에 인접한 지역 중 분지에 위치한 동네는 푄 현상으로 인해 기온이 많이 올라가기 때문에 마냥 서늘한 건 아니며 세계적으로도 눈이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반대로 미야기나 이와테 같은 태평양에 근접한 지역은 여름에 태평양 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 일명 야마세 때문에 여름에도 서늘한 기후를 자랑한다. 도호쿠 일대에서는 5월 초중순이나 돼야 반팔이 보이기 시작하고 9월 중하순부터 긴팔을 입는다. 

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홋카이도도 눈이 많이 오는 편이지만 도호쿠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많이 온다. 웬만한 곳은 연강설량이 1m를 넘기며, 그중 무츠, 아오모리, 아키타시와 같은 곳은 5m를 넘으며, 산간 지방에는 10m 이상인 지역도 드물지 않다. 이런 곳은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가장 강설량이 많은 지역에 꼽힌다.

지질학적으로는 일본 열도가 올라타 있는 3개 주요 지각 판이 맞물리는 위치가 간토-도호쿠 사이에 위치하는 연유로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발생했다. 이외에 이와테 미야기 내륙 지진, 니가타 추에쓰 지진 등도 발생한 전적이 있다. 

 

역사
옛날부터 역사적 중심지인 긴키에서 떨어져 긴 기간 변방이었다. 지금이야 도쿄가 수도이니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지만 일본사를 통틀어서 간사이가 일본의 중심이었던 때가 더 길고, 19세기까지만 해도 천황과 조정이 있었던 곳은 나라와 교토를 위시한 긴키 지역이었다.

 

고대
도호쿠는 소위 일본 본토 중 가장 핵심인 혼슈에 속하지만 야마토 정권에 복속된 시기는 비교적 늦은 편으로 상당기간 동안 에미시라고 불려지는 조몬인 계통이 별개의 독자 세력을 형성했다.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부터 야요이 문화가 번성한 일본 서부 지역과 큰 차이가 있고, 일본 서부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자체적으로 제철기술 및 선진농법을 전수받아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중세
일본 조정은 에미시와의 기나긴 싸움 끝에 헤이안 시대 초기인 9세기 초에 아키타 중부와 이와테 남부 이남을 점유했고, 헤이안 시대 중기인 1070년에는 ‘엔큐 에조 합전(延久蝦夷合戦)’을 통해 츠가루 해협까지 진출하며 혼슈 전역이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오늘날 일본 영토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에는 히라이즈미에 거점을 둔 오슈 후지와라씨가 한세기 동안 반독립적인 정권을 구축한 바 있다. 오슈 후지와라 정권은 금광 채굴을 통해 번성하였고 히라이즈미는 당대 교토에 버금가는 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오슈 후지와라 정권이 몰락한 이후 도호쿠는 다시 주류 역사에서 멀어졌다. 11세기에 편입되었음에도 느슨한 중세의 행정력으로 인해 점진적인 통합이 이루어진 문명의 변경 지대였다. 실제 도호쿠 일부 지역, 특히 최북단의 아오모리현 산악 지대에서는 에도 시대 중반인 18세기 무렵까지도 동화되지 않은 에미시 계통이 소수나마 남아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근세
일본 편입 이후에도 도호쿠는 여전히 농업생산력이 떨어지고 자연재해가 빈번하는 변방 지대였다.

가령 오늘날 아오모리현과 이와테현을 포함하는 넓은 영역에 위치했던 난부 가문의 영지인 모리오카 번에서는 상술한 북동풍 야마세 때문에 제대로 된 소출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작물이 한창 자라야 하는 여름마다 야마세가 주기적으로 오호츠크해의 차가운 바람을 몰고 오는 바람에 벼가 냉해를 입고 죽어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특히 이와테 내륙지방은 훨씬 북쪽에 있는 홋카이도의 대부분의 지역보다도 추운 혼슈 최한지였기에 문제가 심각했다. 게다가 남하하는 러시아인들로부터 북방 홋카이도를 방위하기 위해 번의 군사가 자주 차출되곤 했다. 잦은 출병 명령은 안 그래도 최악을 달리는 번의 재정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때문에 모리오카 번은 에도 시대 내내 만성적인 기근에 시달렸으며 툭하면 농민들의 잇키가 벌어졌다. 화전민들 역시 많았다.  

사실, 모리오카 번에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이와테의 난부 철기나 광산, 벌목업이나 어비 제조, 목마장, 산리쿠 해안의 어업과 센다이로 이어지는 기타카미 강의 수운 등 썩 나쁘지 않은 특산물들이 산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쌀을 기준으로 삼는 에도 시대 경제 체계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모리오카의 영민들과 상인들은 번 내에서 거의 생산되지 않는 쌀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센고쿠 시대부터 이어진 고세율은 경제적 어려움을 악화시켰으며 번 정부 차원의 대응은 무능했다. 이 와중에 옛 가신이었으나 난부 가문을 배신하고 독립한 아오모리현 서부 히로사키 번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쓸데없는 재정 지출이 이어졌다. 모리오카와 그 지번인 하치노헤번은 텐메이 대기근 당시에도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였다. 기근으로 인한 식인 사건 역시 주로 이 지역에서 터졌다.

쌀농사로 유명한 아키타현의 구보타 번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아키타는 푄 현상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더운 지역에 속했으나, 고위도인 것은 다른 도호쿠 지방과 매한가지였던데다 지형에 따라 야마세가 방해 없이 그대로 도달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작물들이 냉해를 입곤 했다. 거기다 새 번주 가문인 사타케 가문이 원래 영지였던 이바라키현 일대에서 전봉되어 오는 과정에서 기존의 가신단을 거의 그대로 끌고 오는 바람에 문제가 심화되었다. 그들의 가신단은 당시 아키타 일대의 생산력으로는 지탱하기 힘든 규모였는데, 사타케가는 새 영지를 개발하기 위해 이 많은 가신들에게 번의 곳곳을 식읍으로 내렸다. 이는 다시 자영농 숫자를 감소시키고 농민들의 생활을 악화시켜, 기후적 요인과 함께 아키타에서 주기적으로 기근과 잇키가 벌어지는 원인이 된다. 아키타 농업의 명성 역시 근현대, 특히 1980년대 이후 냉해에 강한 아키타 코마치 품종이 지역 농업연구소에 의해 개발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에도 시대 도호쿠에서 농업 생산량이 평균을 웃돈 곳은 사실상 오늘날 미야기현에 위치했던 다테 가문의 센다이 번 뿐이었다. 센다이 평야는 원래 간토처럼 인구도 부족하고 기후까지 서늘한 저습지였으나, 센고쿠 시대 말기에 이 지역으로 전봉되어 온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가 적극 개발한 이래로 에도를 먹여살리는 동북 최고의 곡창지대로 이름났다. 막부 말 기준으로 천령이라 불리던 막부 직할령을 제외한 나머지 번령 중에서 2위의 석고를 자랑했을 정도다. 마사무네는 스페인 제국과의 동맹을 맺기 위해 유럽식 갤리온인 '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건조하곤 유럽으로 하세쿠라 츠네나가를 필두로 한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는데,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는 자신을 도호쿠의 왕이라 칭했다.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막부의 그리스도교 탄압 및 쇄국 정책과 스페인 상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통상 수교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번영을 구가하던 센다이였으나, 막상 주민들의 생활은 썩 좋지 않았다. 번 정부 차원에서 쌀을 전매했기 때문이다. 현대처럼 농업 보조와 국방 및 복지를 위해 정부가 남아도는 쌀을 수매하여 비축하는 것이 아니라, 수확기에 추수된 쌀 자체의 처분 권한이 각 농민이 아니라 센다이 번에 있었다. 센다이 번은 이렇게 쌀이 생산되는 족족 전국의 소비재들을 빨아들이던 에도에 팔아치워 쏠쏠한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하지만 그 이익은 번과 번주인 다테 가문의 이익이었지 주민들의 이익이 아니었다. 수탈 수준으로 쌀에 집중하던 다테가의 정책 때문에 센다이의 자체적인 산업 역시 미비해졌으며 번의 경제는 타지인인 에도의 상인들이 장악했다. 다시 말해, 당시 센다이는 그 높은 농업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야마세가 불어오는[ 등의 재난이 닥친다면 비축미가 없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실제로 텐메이 대기근과 같은 18세기 소빙하기로 인해 벌어진 여러 기근 때마다 센다이에서는 큰 인명피해가 나고는 했다. 이 와중에도 번 정부와 에도 상인들은 낮은 쌀값으로 인한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에도에 쌀을 팔았으며 이는 다시 센다이 주민들의 고통으로 돌아왔다.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가 겪었던 일이 일본에서는 센다이에서 벌어졌다.

그래도 야마세가 닿지 않고 일본의 중심 지역과 가까운 남쪽의 미나미도호쿠 지역은 사정이 괜찮은 편이었다. 요네자와 번의 경우 다이묘 우에스기 요잔의 적극적인 개혁 정책으로 인해 오랜 기간 누적된 재정 적자를 해소하였고, 심지어 텐메이 대기근 당시 인접한 번에서 사람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센다이 남쪽 후쿠시마현 일대에 위치했던 아이즈 번의 경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여러 차례 재정을 개혁하고 각종 구휼 제도를 마련하여 기근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다. 그 옆에 위치한 야마가타 번 역시 번주 가문의 잦은 교체로 인한 혼란을 겪었지만 그래도 호쿠리쿠 지방과 유사한 온난한 기후와 홋카이도와 교토를 잇는 기타마에부네 항로의 중간 기착지에 있다는 장점을 살려 꽤나 번성하였다.

 

근현대
도호쿠는 보신 전쟁 시절에는 아이즈 번을 주축으로 '오우에쓰 열번 동맹'(奥羽越列藩同盟)을 결성하고 막부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던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근대에도 출세길이 완전히 막히는 등 엄청난 불이익을 받았다. 주요 경제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여러 개발 사업에서 뒷전으로 밀리곤 했으며, 오히려 제국 정부가 산업혁명을 위해 도시의 물가를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농산물들을 도시에 헐값에 팔아야 했다. 그래서 근대 시기에는 오키나와와 함께 해외로 이주가 많은 지역이었다.

일본 경제가 성장하며 이촌향도 현상에 따라 도호쿠 인구의 다수는 간토나 간사이, 주부 일대 등으로 흡수되었다. 도호쿠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 이후로도 개발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센다이시를 제외하면 정령지정도시가 없다. 그리고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발생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2020년대엔 미야기현을 제외한 5개 현은 경제권역이 축소됨에 따라 TV아사히의 경우 5개 현의 지역민방을 통합하려고 준비중이고, topo라는 플랫폼을 만들어 사실상 홈페이지와 VOD를 통합 운영중이다.

 

정치
55년 체제 초창기에는 센다이를 비롯한 중대도시를 제외하면 전형적인 자민당 텃밭이었지만 오자와 이치로가 1993년에 자민당을 탈당한 뒤로 지지기반을 가져갔고 이와테와 바로 인접해있는 미야기에선 홋카이도 및 도카이 지방과 같이 야당세가 강한 편이다. 그러나 야마가타, 아키타, 아오모리 등 동해에 면한 지역들은 주고쿠-시코쿠 일부 지역이나 호쿠리쿠 정도는 아니어도 자민당의 지지세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2009년 때 전체적으로 민주당 계열의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이 때를 제외하곤 그래도 자민당 세가 강했던 편이다. 그러나 최근 2016년, 2017년에도 도호쿠 대지진의 영향 때문인지 혁신계열 후보가 지방선거에서 연속으로 당선되며 점점 야당화가 되어가는 추세였지만 49회 총선에서 오자와가 낙선하면서 다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참고로 일본 최장 집권 총리이자 자민당의 정신적 지주인 아베 신조의 조상은 무츠국(지금의 이와테현) 출신인 아베노 무네토이다.

 

 

경제
도쿄부터 후쿠오카를 잇는 지역의 경우에는 온난한 기후와 긴 문명 경험으로 충분한 배경 인구가 있으며, 입지의 이점까지 더해져 이를 바탕으로 농업 및 공업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도호쿠 지방은 다른 지방 대비 기후가 냉랭했고 오랜 시간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에 있던 편이라 배경 인구가 부족했고, 전술한 정치적 배경까지 영향을 미치며 오랜 기간동안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소외 지역으로 꼽힌다. 게다가 상술했듯 도호쿠 동부 지방은 불안정한 오호츠크 판에 위치하고 동쪽으로 최악의 지진 지대인 일본 해구를 끼고 있으며 지진과 쓰나미가 매우 빈발해 발전이 더뎠다.

그렇다 보니 아이리스 오야마(アイリスオーヤマ株式会社) 및 도호쿠전력 혹은 대형 지방은행에 속하는 77은행 정도가 도호쿠 지방 최대 기업으로 꼽힐 정도로 대기업 본사가 적다. 도호쿠 대지진 이후로는 주택 및 해안 지역 복구 및 개발 사업이 많이 시행되고 있는데, 자연재해로 인한 복구 비용까지도 경제 효과에 반영되는 GDP의 맹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도호쿠가 서일본 지역 대비 갖는 장점으로는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방과 지리적으로 직통 연결되기 쉽다는 이점이 있다. 실제로 도호쿠 모든 현 및 현청소재지에는 미니 신칸센 등 어떤 형태로든 도쿄와 직통되는 신칸센이 들어오고 있으며, 남부의 미나미토호쿠 지역은 아예 지리적으로 인접해있어 수도권의 경제적 영향을 받기도 한다. 또한 1인당 GRDP 및 실제 소득 수준에서는 규슈와 비슷하거나 약간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센다이의 경우, 삿센히로후쿠로 불리는 일본 내 2티어 대도시권 중에서는 도쿄와의 거리가 가장 가까워 도시 발전의 모멘텀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서일본에는 케이한신이나 나고야 도시권 등 독자적인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 도호쿠 지역의 센다이 도시권은 경제적으로 간토 대도시권에 종속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마냥 장점으로 보긴 힘들다.

다만 도호쿠 북부의 기타토호쿠 지역의 경우 혼슈 지역 내에서는 산인 지방 다음으로 낙후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기후 특성상 홋카이도처럼 농업과 축산업에는 적합하다. 실제로 아키타에 대해서는 쌀 같은 작물이 유명할 정도로 이 지역의 식재료는 좋은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에는 그러한 이미지가 상당히 퇴색되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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