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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9 2025. 4. 8.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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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년대 대중음악

 

 

1979년, 디스코 폭파의 밤 이후 디스코 음악의 인기는 말그대로 폭락해 버렸지만, 이 디스코 음악의 여러 요소들은 당연히 사라질 수 없었고 이에 디스코가 한 번 계량된 게 포스트 디스코이다 포스트 디스코는 1979년 말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해 1980년부터 전성기를 맞았다. 1980년에 히트한 포스트 디스코 곡은 저메인 잭슨의 Let's Get Serious, 샬라마의 "The Second Time Around", 더 브라더스 존슨의 "Stomp!", 조지 벤슨의 "Give Me the Night", 프린스의 I Wanna Be Your Lover, 더 위스퍼즈의 "And the Beat Goes On", 포인터 시스터즈의 "He's So Shy" 등이 있다.

 

 

 

주로 대중음악계 내에서, 댄스 음악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장르들이 등장한 시기이다. 1970년대 후반기에 기원하는 댄스 록이 정립됐고, 얼터너티브 댄스와 댄스 펑크 등이 등장했다.

 

 

 

록 음악은 196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일렉트로닉 록도 시대를 거치며 더 발전하여 1980년대 초반기까지 크게 흥한다. 후에 등장할 글램 메탈에 기원이 되기도 하며, 1983년에는 글램 메탈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헤비 메탈의 황금기를 이끈다. 글램 메탈을 비롯한 다양한 헤비 메탈들과, 펑크 록에서 파생된 뉴웨이브, 고스 록 등도 등장한다.

 

 

 

뉴 웨이브는 1978년부터 유행하여 1980년대 초반까지 크게 유행했던, 펑크 록의 후속 장르로, 신디사이저를 적극 차용하는 등 일렉트로닉 요소를 도입하고, 당대에 유행하던 디스코와 같은 말랑말랑한 팝 사운드와 펑크 록을 결합한 음악이다. 미국에서는 블론디, 토킹 헤즈, The Go-Go's 등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듀란 듀란, 더 폴리스, 엘비스 코스텔로 등이 있었다.

 

 

 

1980년에 토킹 헤즈의 걸작, Remain in Light가 발매되면서 뉴 웨이브의 전성기가 시작됐음을 알린다. 각종 장르 융합과 혁신적인 음향과 리듬, 펑크(Funk) 사운드의 재해석으로 하여금 음악 저변을 개척했다는 성과를 거두며, 토킹 헤즈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기도 한다. 실험 음악계 및 일렉트로닉 뮤직, 힙합, 비트 등 다방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대가 지나며 평가가 더욱 올라가고 있는 앨범이다.

 

 

 

그 외에도 싱글로는 듀란 듀란의 The Reflex, 더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 A-ha의 Take On Me 등의 유명한 곡이 있다. Every Breath You Take는 빌보드 핫 100 올타임 차트/1958년-2018년에도 31위에 올라와 있는 등, 상당한 히트곡이다.

 

 

 

신스 팝은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장르로 신디사이저가 주 악기로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 종반의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일렉트로닉 뮤직, 디스코와 크라프트베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크라우트 록 등을 기원으로 둔다. 1970년대 종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이나 영국의 포스트 펑크 시대에서 뉴 웨이브 음악의 중심적인 장르이기도 했다. 신스 팝은 그 이후 등장한 다양한 일렉트로니카 장르와 록 음악, 댄스 뮤직 장르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 신스 팝은 듀란 듀란, 디페쉬 모드, 펫 샵 보이즈, 뉴 오더 등이 이끌어 갔다.

 

 

 

뉴 오더는 1983년, Blue Monday와 Power, Corruption & Lies를 통해 1980년대에 본격화된 신디사이저 댄스 음악을 밴드라는 옛 형식과 조화하는데 성공했다는 호평을 얻어냈으며, 이후 Low-Life와 Brotherhood를 발표하면서 신스 팝, 얼터너티브 댄스라는 장르의 대부로 칭송받는다. 일렉트로니카라는 장르가 지금같은 위치에 올라간 것에 이들의 많은 기여가 있었다.

 

 

 

디페시 모드는 1984년, Some Great Reward로 논란을 일으키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가사 역시도 BDSM, 페티시, 신성모독, 간통과 같은 매우 불건전한 주제를 내세워 대중 음악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이들의 핵심 주제이다. 한편, 이 시기에 이들은 공산주의 진영인 동구권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링크 당시는 냉전 시대라 서방 서계의 음악이 금지되었음에도 이들은 1985년에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첫 공연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Music for the Masses라는 그들의 명반 중 하나를 발매한다.

 

 

 

펫 샵 보이즈는 1986년 데뷔 곡 West End Girls로 빌보드 핫 100 1위, UK 차트 1위를 동시에 석권하는 등, 화려하게 데뷔해서 1986년 데뷔 앨범 Please를 발매했고, 이후 1987년 부터 1988년까지 각각 UK 차트에서 1위를 달성한 자신이 어릴 적 다녔던 가톨릭 학교를 비판하는 내용의 곡인 It's a Sin, 1972년에 발표되었던 엘비스의 노래를 커버한 곡인 Always on My MInd와 Heart로 총 UK 차트 1위 싱글 4곡을 뽑아냈고, 이들의 최고의 수작 앨범이라 평가받는 Actually와 Introspective를 각각 1987년, 1988년에 발표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시기였다.

 

 

 

이 시대는 다음 시대에 판도를 뒤집은 얼터너티브 록이 창시된 시대이기도 하다. R.E.M.은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장르의 창시자중 하나로, 미국에서 지방 인디 밴드가 라디오를 통해 인지도를 쌓아 주류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은 특이한 케이스였다. 1983년, Murmur를 발매하는데, 컨트리/포크 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 미국 펑크(PunK) 영향도 강하게 영향을 받아 단순하고 반복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전반적으로 비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강하고, 보컬이나 가사 역시 으르렁거리기 보다는 추상적인 '중얼거림'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헤비 메탈이나 팝하고는 완전히 다른 가능성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의 전성기였다. 이전의 주 음반 매체였던 LP는 부피가 크고, 재생 매체마다 음질차가 큰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개발되었다. 개발 후에 필립스의 '표준 매체' 정책이 효과를 거두어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게 됐다. 그 뒤로 테이프 자성체 개선 노력 및 소니에서 낸 워크맨 덕분에 1980년대~1990년대를 대표하는 음반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나중에 나온 미니디스크, CD보다 훨씬 일반화되었던, 즉 당시로서의 첨단 기술이 필요 없었던 제작 공정과 재생 기기가 저렴했던 덕분에 1980년대~1990년대의 대중 음악 시장의 급속 팽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82년에 들어서 CD가 상용화하기 시작한다. 또한, 1984년 Apple에서 만든 Macintosh 128K를 필두로 컴퓨터의 대중화가 가속되면서 마스터링과 프로듀싱이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포스트 디스코에 1980년대 초 들어 인기를 끌기 시작한 뉴 웨이브, 신스 팝 등이 결합하며 새로운 형태의 댄스 음악이 등장했는데 그게 바로 댄스 팝이다.

 

 

 

이런 장르들이 결합해 탄생한 댄스 팝은 1980년대 들어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이 함께 이끌었으며, 컨템퍼러리 R&B와 힙합이 주도하던 1990년대~2000년대 중반에는 인기가 없다가 200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다시 맞고, 2010년대 중반부터 힙합을 비롯한 기존 흑인 음악들이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며 지금은 침체된 장르다. 물론 단독 장르로 봤을때 사장됐다는 것이고, 20년대 현대에 와선 록 음악, R&B, 팝 음악 등등 장르 구분이 그렇게 의미가 있지 않다는 평이다. 당장 가장 최근 크게 히트한 노래로 해리 스타일스의 As It Was 가 있는데, 뉴 웨이브, 팝 록으로도 분류되는데 또한 신스 팝, 컨템퍼러리 R&B, 인디 팝, 펑크로도 장르가 속해있다. 현대에는 장르 구분이 크게 의미 없는 음악들이 많이 있다고 보고 있다.

 

 

 

198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미국의 대표적인 뉴 웨이브 밴드 블론디의 명곡 Call Me가 1위를 수상하고, The Wall이라는 명반으로 저력을 보여준 핑크 플로이드가 막대한 히트를 거두면서 수록곡이 2위를 달성했고, 앞으로 대중음악계에 파란을 일으킬 걸작을 내놓을 마이클 잭슨의 "Rock With You"가 4위로 당당히 성적표를 내민다.

 

 

 

디스코 폭파의 밤이 발생한 후인 1980년에도 흑인 음악 장르는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98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의 100위권 안에 진입한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총 29곡이었다.

 

 

 

블론디의 인기는 끝나지 않았는데, 1981년 역시 블론디의 해였다. 이 해 발표한 싱글 Rapture는 또다시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해 이들의 3번째 1위 곡이 되었으며 3년 연속으로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 곡은 미국 힙합 역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곡이다. 왜냐하면 이 곡이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랩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드 록을 고집했던 Foreigner도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1981년 4에 수록된 곡이자, 싱글로도 발표한 "Urgent"가 빌보드 핫 100 5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이 노래에는 유명한 모타운 출신 색소폰 연주자 주니어 워커(Junior Walker)가 참여했다. 기존의 정통파 하드 록이 아니라 중간에 색소폰 솔로를 더하며, 사실상 디스코 및 흑인 음악의 영향을 디스코 시대가 지난 이 곡에서야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82년 이들은 하드 락 사운드를 벗어나, 소프트 락 곡들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가 "Waiting For A Girl Like You"로 빌보드 핫 100에서 10주 연속 2위를 기록했다.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이 곡에 이용했고, 1984년/1985년 소프트 락 싱글 "I Want to Know What Love Is"가 빌보드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신디사이저라는 기계는 거의 일본이 대중화시킨 것으로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이것에 지대한 기여를 한 인물이 사카모토 류이치다.

 

 

 

동일한 1982년에 개봉한 영화 록키 3가 엄청난 흥행과 함께 수록 영화 사운드트랙도 큰 성공을 거둔다. 바로 서바이버의 Eye of the Tiger이다. 지금까지도 복싱을 상징하는 노래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 열리니 1981년, 24시간 음악 관련 전문 방송 채널 MTV가 개국한다. 1980년대 이후 MTV가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강력하다. 세상의 사물을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해석하거나, 기성세대적인 가치관을 깨뜨리게 만들었다. 괜히 MTV 세대라는 시사용어가 나온게 아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음악을 듣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만든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1982년 11월 29일, 마이클 잭슨은 커리어 최고 역작을 내놓는데, 바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불리는 Thriller다.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하나의 음반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극소수의 사례이며 동시에 Billie Jean과 Beat It 등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함과 함께 이것이 최다 시청 뷰를 만들어내면서 대중음악계에서 이전 시대보다 뮤직 비디오의 비중이 커짐과 함께 MTV의 발전과도 연결되었다. 마돈나, 밴 헤일런, 다이어 스트레이츠 등이 MTV 부흥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때부터 댄스 팝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한다.

 

 

 

1980년대는 팝 음악의 황금기이자, 동시에 수많은 팝스타들이 세계로 쏟아져 나온 시기이다. 그럼에도 마이클 잭슨은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했는데, 이러한 음악적 영향력은 그를 한 시대에 국한하지 않고, 20세기 가장 거대한 문화적 유산을 가진 인물 중 하나로 만들었다. 마이클 잭슨은 Thriller로 전작을 완전히 뛰어넘으며, 커리어상 음악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엄청난 대성공을 거둔다. 무려 현재까지 약 6,6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현대 대중음악의 흐름을 변화시킨 혁명적인 작품 중 하나다. 과거 브리티시 인베이전 당시, 비틀즈의 Meet the Beatles! 앨범을 시작으로 음악시장에 대호황이 왔던 것 처럼, 이 Thriller 앨범으로 1980년대 음악시장에 대호황을 부르기 시작한다. 또한 그때까지 남아있던 흑백장벽을 깨부수기 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는 흑인 뮤지션들의 차트 진입이 활발했지만 1981년이 되자 그 열기가 식으면서 이전에 비해 차트에서 흑인 뮤지션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 예로 196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와 196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의 100위권에 진입한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각각 35곡, 36곡이었지만 198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와 198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의 100위권에 진입한 흑인 아티스트들의 곡은 각각 15곡, 17곡이었다. 잭슨이 Thriller 앨범을 내기 전, 1981~1982년 2년간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한 흑인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빌보드 핫 100에서는 흑인 뮤지션의 곡은 단 4곡만이 1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이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은 1970년대에 비해 거의 바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위대한 흑인 뮤지션들이 많았고, 민권법 통과와 무하마드 알리, 마틴 루터 킹 목사, 해리 벨라폰테 같은 인권 운동가들의 활약 등등 흑인들의 입지는 이전보다 넓어지고 있었으나, 흑인 음악은 크나 큰 침체기에 있었다. 그러나 Thriller로 다시 흑인 음악의 전성기가 열린다.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기고했다. Thriller는 빌보드 200에서 37주 비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 198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도 1위에 올랐고 1984년 10월 30일까지 미국에서 2,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의 첫 싱글 "The Girl Is Mine"은 빌보드 핫 100에서 3주 연속 2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9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Billie Jean"은 핫 100에서 7주 연속 1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위, 세번째 싱글 "Beat It"은 핫 100 3주 연속 1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위, 네번째 싱글 "Wanna Be Startin' Somethin'"은 핫 100 2주 연속 5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8위, 다섯번째 싱글 "Human Nature"는 핫 100 2주 연속 7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89위, 여섯번째 싱글 "P.Y.T. (Pretty Young Thing)"은 핫 100 10위, 일곱번째 싱글 "Thriller"는 핫 100 2주 연속 4위, 198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8위를 기록하는 등 앨범의 모든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결정적으로 이 시기부터 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과 같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며 음악의 흑백장벽이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라이오넬 리치의 솔로 데뷔 앨범 "Lionel Richie"는 1982년 10월 6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3위, 198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6위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은 1982년 12월 9일까지 미국에서 100만 장, 1984년 10월 19일까지 4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의 첫 싱글 "Truly"는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7위, 두번째 싱글 "You Are"은 핫 100 2주 연속 4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9위, 세번째 싱글 "My Love"는 핫 100 5위, 198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3위를 기록하며 앨범의 모든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1983년 10월 11일에 발매된 라이오넬 리치의 2집 앨범 "Can't Slow Down"은 전작 "Lionel Richie"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빌보드 200에서 1983년 12월 첫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 3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3위, 198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2위에 올랐다. 앨범은 1984년 10월 19일까지 미국에서 800만 장, 1985년 12월 19일까지 1,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의 싱글들도 모두 크게 히트했는데, 첫 싱글 "All Night Long (All Night)"는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 198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2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Running with the Night"은 핫 100 2주 연속 7위, 198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3위, 세번째 싱글 "Hello"는 핫 100 2주 연속 1위, 198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위, 네번째 싱글 "Stuck on You"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3위, 198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2위, 다섯번째 싱글 "Penny Lover"는 핫 100 2주 연속 8위, 198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96위를 기록했다.

 

 

 

King of Pop이 마이클 잭슨이라면, Queen of Pop이라는 칭호의 주인은 마돈나다. 밴드와 남성 가수들이 지배하던 80년대 빌보드 차트에 혜성처럼 등장해 거의 사회현상이다 싶을 만큼 화제거리를 몰고 왔다. 사실상 오늘날 여가수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컨셉은 다 해봤다고 무방하며, 그녀의 성공에 고무받은 많은 여가수들이 댄스 디바로 데뷔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여가수가 성이나 종교, 정치 같은 민감한 소재를 건드리는 것이 금기시되던 그 시절에 노골적으로 해당 이슈들을 거론하고, 담론을 나누는 것에 거리낌 없었는데 이는 오늘날 소셜테이너의 시초라고 봐도 무방.

 

 

 

마돈나하면 이전 시대보다 중요성을 부각한 엄청난 콘서트 규모와 화려한 퍼포먼스를 빼놓을 수 없다. 최초로 성공한 댄스플로어 디바라는 타이틀을 가진 아티스트답게 뛰어난 안무와 무대 매너로 큰 호응을 얻었고, 이는 오늘날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마돈나의 영향력은 음악 뿐 아니라 헐리우드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Blond Ambiton 투어의 제작 과정과 실황을 담은 다큐영화 '진실 혹은 대담'은 엄청난 성공과 더불어 헐리우드 최초의 리얼리티 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리얼리티 쇼가 얼마나 엄청나게 대형화되었고, 미국 문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거의 업계 자체를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

 

 

 

마돈나는 1984년, 역사에 남을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마돈나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 준 전설적인 앨범 Like a Virgin를 발매한다. 당시 발매 초기엔 상업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음악성 면에선 별 볼 일 없는 앨범으로 평가당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굉장한 수작으로 재평가 되었는데 음악 자체로 호평을 받기보단, 1980년대 시대상의 금기에 정면으로 맞서 문화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980년대를 분석하는 방송, 책에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앨범과 함께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그 문화적 파급력이 워낙 엄청나서 대중문화, 음반 업계, 여성 인권(페미니즘) 분야에서 무조건 언급될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나다.

 

 

 

영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조지 마이클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대중음악 역사상 손꼽히는 전성기를 가진 가수로 평가받는데, 다른 아티스트들은 한번도 하기 힘든 빌보드 연말 차트 1위를 2번(Careless Whisper, Faith)이나 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한번은 Wham!으로, 한번은 솔로로 달성했다. 개인 최고기록은 폴 매카트니의 3회이며, 그 다음 기록이 바로 조지 마이클의 2회임을 감안하면 조지 마이클이 마이클 잭슨-마돈나-프린스 3인방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 최고의 듀오 Wham! 출신으로, 대부분 히트곡의 메인 보컬뿐 아니라 작곡과 프로듀싱까지 거의 도맡았다. Careless Whisper, Last Christmas, Wake Me Up Before You Go-Go 등의 히트곡으로 Wham! 활동만으로 이미 세계적인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는데, 솔로로는 그것 또한 초월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1집 《Faith》가 미국 등 세계에서 1위에 올랐고 판매량은 2,500만 장 이상으로 집계됐으며,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등 대중음악계 주요 상까지 석권했다. 이 앨범 안에서 빌보드 1위 곡만 4개가 나왔다. Faith, Father Figure, One More Try, Monkey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로 유명한 프린스도 이 시기부터 전성기를 맞았다. 1979년 8월에 발매된 싱글 I Wanna Be Your Lover, 1982년에 발매된 그의 5집 앨범 1999을 시작으로 성공가도를 달렸고 1984년 6월 25일, 커리어 최고 작품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앨범 Purple Rain를 발매한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프린스뿐만 아니라 마이클 잭슨, 브루스 스프링스틴, 라이오넬 리치, 휘트니 휴스턴, 마돈나,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 다이어 스트레이츠, 필 콜린스, 더 폴리스, 멘 앳 워크, 티어스 포 피어스, 보스턴, 왬!, 자넷 잭슨, 브라이언 아담스, USA for Africa, 밴 헤일런, 샤데이 등의 레전드 아티스트들이 빌보드 200 1위 자리를 두고 다투던, 차트 경쟁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Purple Rain은 발매되자 빌보드 순위에 오르더니, 급기야 한 달 뒤에는 Born in the U.S.A.를 누르고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했다. 무려 1984년 8월 첫째 주부터 1985년 1월 둘째 주까지 24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등 인기가 상당했다. Purple Rain은 1984년 11월 13일까지 미국에서 800만 장, 1985년 1월 16일까지 900만 장, 1996년 5월 16일까지 1,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75] 이 외에도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다. 첫 싱글 "When Doves Cry"는 빌보드 핫 100에서 5주 연속 1위, 198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Let's Go Crazy"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 198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1위, 세번째 싱글 "Purple Rain"은 핫 100 2주 연속 2위, 네번째 싱글 "I Would Die 4 U"는 핫 100 8위, 다섯번째 싱글 "Take Me with U"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25위를 기록했다.

 

 

 

티나 터너의 5집 앨범 "Private Dancer"는 1984년 5월 29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3위, 198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39위, 198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고 1985년 6월 5일까지 미국에서 400만 장이 팔렸다. 앨범의 두번째 싱글 "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은 빌보드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 198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고 세번째 싱글 "Better Be Good to Me"는 핫 100 2주 연속 5위, 198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9위, 네번째 싱글 "Private Dancer"는 핫 100 2주 연속 7위, 198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93위를 기록했다.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프린스, 티나 터너 다음으로 1980년대의 미국의 앨범 시장을 점령한 미국 흑인 아티스트였다. 휘트니 휴스턴의 데뷔 앨범 Whitney Houston은 1985년 2월 14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14주 비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9위, 198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 198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2위, 빌보드 200 1980년대 총결산 차트에서 3위에 올랐다. 앨범은 1986년 9월 18일까지 미국에서 700만 장,[85], 1987년 2월 24일까지 800만 장,[86] 1995년 4월 5일까지 1,200만 장이 팔렸다.[87]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두번째 싱글 You Give Good Love는 빌보드 핫 100에서 3위, 198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7위, 세번째 싱글 Saving All My Love for You는 핫 100에서 1주 1위,[88] 198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3위, 다섯번째 싱글 How Will I Know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89]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6위, 여섯번째 싱글 Greatest Love of All은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90]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1위를 기록했다.

 

 

 

1986년 2월 4일에 자넷 잭슨의 3집 앨범 Control이 발매되었다. 초창기 뉴 잭 스윙을 대표하는 앨범으로, 빌보드 200에서 1986년 7월 첫째 주부터 둘째 주까지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6위, 198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에 오르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의 첫 싱글 "What Have You Done for Me Lately", 두번째 싱글 "Nasty", 세번째 싱글 "When I Think of You", 네번째 싱글 "Control", 다섯번째 싱글 "Let's Wait Awhile", 여섯번째 싱글 "The Pleasure Principle"은 빌보드 핫 100에서 각각 4위, 3위, 1위, 5위, 2위, 14위를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다. What Have You Done for Me Lately는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3위, Nasty는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8위, When I Think of You는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2위, Control은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7위, Let's Wait Awhile은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8위에 올랐다.

 

 

 

슈게이징을 대표하는 밴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 데뷔한 시기다. 1990년대 가장 영향력있는 밴드 중 하나로 꼽히며, 이들은 대중음악 역사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소닉 유스와 함께 노이즈를 팝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밴드 중 하나로,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슈게이징 장르를 정의한 밴드로 평가받는다. 이들의 독특한 사운드는 이 밴드 이후의 나온 밴드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며, 수많은 팔로워 밴드들이 등장하게 된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Isn't Anything을 시작으로 활동을 알린다. 자극적인 기타 노이즈에 팝적인 멜로디를 곁들인 좋은 의미의 괴작이다.

 

 

 

한편으로 1980년대는 헤비 메탈의 황금기로 80년대 초 영국에서 도래한 NWOBHM을 시작으로 여러 메탈 장르가 등장한다.1970년대 후반 잠시의 침체기를 겪은 헤비 메탈은 영국을 중심으로 NWOBHM, 즉,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영국 헤비 메탈의 새로운 물결)이라 불리는 음악적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초기에 이어 후발주자들이 나선 것이다. 대표주자로는 모터헤드,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 색슨, 다이아몬드 헤드 등이 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일찍이 70년대부터 활동했지만, 80년대에 나온 British Steel로 자신들을 헤비 메탈로 알렸기에 여기로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British Metal"이 헤비 메탈의 방향성을 새로 정립했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반 취급을 받으며 Metal God이란 노래를 부를 정도로 자신들을 메탈 그 자체와 동일시 시켰고, 그들이 제시한 패션코드인 가죽 자켓과 달라붙는 바지, 무쇠징이 박힌 옷가지(일명 stud & leather), 육중한 모터 사이클 등의 이미지는 헤비메탈의 시각적 이미지를 확립시켰다. 또한 기존 하드 록의 끈적함과는 선을 긋는 롭 핼포드의 무자비한 철혈 보컬은 메탈이 가지는 마초성에 더욱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아이언 메이든과 다른 음악스타일은 이후 스래시과 이후 파생되는 익스트림 계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이언 메이든은 스티브 해리스의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사운드를 바탕으로, 악곡의 구성력을 차츰차츰 강화해 갔다. 7분이 넘어가는 식의 대서사시를 써내기까지 시작한 아이언 메이든의 소재는 실로 다양해졌다. 그들은 기존의 블랙 사바스의 어둠 뿐만 아니라 전쟁, 신화, 민담 등의 보다 넓은 세계로 가사 소재의 장을 확장시켰다. 보컬인 브루스 디킨슨은 파워풀하면서도 단어 하나마다 딱딱박히는 테누토를 선보이는데다, 라이브 공연장에서 군복을 입고 영국의 국기를 흔들며 열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이들의 이런 사운드, 세계관의 노선은 헬로윈을 거쳐 거의 현재의 유러피안 메탈, 파워 메탈의 전형을 제시하였고 셀 수 없이 많은 후배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러한 밴드들은 스래시 메탈, 블랙 메탈, 글램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등 80~90년대 유행하는 장르들의 단초를 제공했다.

 

 

 

NWOBHM 사운드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중적인 멜로디와 화려하고 섹슈얼한 연주가 특징인 글램 메탈(팝 메탈/LA 메탈)이 등장하였다. 머리를 화려하게 기르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은 헤어 메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70년대 영국 글램 록과 미국 특유의 마초성이 어우러진 특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명곡 Living After Midnight이나 데프 레파드의 Bringin' On The Heartbreak 등의 곡에서 영향을 받아 팝적이고 대중적인 멜로디와 메탈의 강렬한 사운드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밴드들이 많아졌으며, 미국의 전설적인 헤비메탈 밴드 밴 헤일런의 직접적인 음악적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간혹 국내의 이상한 사짜들이 글램 메탈(팝 메탈)의 기원에 대해 헛소리를 하나, 국내 팬덤 커뮤니티에서나 도는 평이므로 가볍게 무시하길 바란다.

 

 

 

글램 메탈은 멜로디나 기타 연주에 있어서 화려함을 중시하였고, 동시에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전의 하드 록 밴드들이 이에 자극받은 팝 메탈 스타일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할 정도였다. 대표적인 밴드로 건즈 앤 로지스, 본 조비, 스키드로우, 콰이어트 라이엇, 머틀리 크루 등이 있다.

 

 

 

1983년 콰이어트 라이엇의 "Metal Health" 앨범이 빌보드 200에서 1위를 달성하면서, 본격적인 글램 메탈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동년에는 데프 레파드의 Pyromania 앨범이 빌보드 2위를 찍고 싱글 "Photograph"와 "Rock of Ages"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미국에 글램 메탈을 전파하였다. 뒤이은 1984년에는 밴 헤일런의 Jump가 빌보드 핫 100 5주 연속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글램 메탈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전미에 글램 메탈의 열풍이 불어닥쳤다.

 

 

 

본 조비는 198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미국의 록 밴드이자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설이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글램 메탈(팝 메탈) 밴드로 꼽힌다. 헤비 메탈계에 대중화의 바람이 불던 1983년에 결성되어 이듬해 데뷔 앨범 Bon Jovi로 정식으로 음악 씬에 등장했다. 그후 팝 메탈의 주역으로 올라서고,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대부분의 밴드들이 모습을 감춘 지금까지도 여전히 음악 씬의 중심부에 서있다.

 

 

 

1985년, 2집 7800˚ Fahrenheit 으로 골든 레코드(!)를 기록하고 히트 메이커인 프로듀서 데스몬드 차일드를 영입하고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1986년, 데스몬드 차일드가 프로듀서 겸 작곡가로 참여한 3집 Slippery When Wet 앨범은 You Give Love a Bad Name과 Livin' on a Prayer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다. 앨범도 대박을 쳐서 빌보드 차트 8주 연속 1위를 기록하고 1987년 8월 21일까지 미국에서 800만 장, 1995년 10월 10일까지 1,200만장을 팔아치워 일약 톱스타가 되었다. 1988년에 발매한 4집인 New Jersey 앨범도 차트 정상에 오르고, Bad Medicine과 I'll Be There for You 두 곡의 넘버 원 싱글을 만들었다.

 

 

 

세계 투어를 돌고, 5집 앨범을 내기까지의 휴식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존 본 조비는 혼자서 영화 영 건스 2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하게되는데, 여기서 작업하다가 나온 앨범이 1990년에 나온 Blaze of Glory 앨범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서도 타이틀 곡인 Blaze of Glory가 빌보드 싱글 차트 넘버 원을 달성하고 아카데미상과 그레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데프 레파드도 본 조비와 함께 글램 메탈을 끌었던 밴드이다. 1981년 'High 'n' Dry'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1983년작 Pyromania에서는 좀 더 노력을 기울여 내놓은 앨범이었다, 앨범 판매량도 미국에서만 1,000만장을 판매하며 여러 성과를 거둔다. 그리고 1987년, Hysteria(음반)으로 빌보드 앨범 1위를 거두고, 수록곡 Love Bites(데프 레파드)가 빌보드 핫 1위에 오르며 나머지 수록곡들도 흥행한다.

 

 

 

건즈 앤 로지스는 가히 아메리칸 하드 록의 자존심으로 꼽히는 밴드이다. 1987년 7월 21일, 첫 공식 음반이자 메탈 역사뿐 아니라 대중음악 전체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앨범인 Appetite for Destruction을 발매한다. 그리고 1988년 Sweet Child O' Mine의 히트로 앨범 발매 50주 만인 8월 6일 빌보드 200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다. 88년 8월 발매된 Sweet Child O' Mine 싱글은 9월 10일 핫 100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다. 곡은 1988년 연말 결산에 5위에 랭크된다. 현재 Appetite for Destruction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으로 기록되어있다. 발매 후 1989년 7월 26일까지 미국에서 800만 장, 2008년 9월 23일까지 1,800만 장, 전 세계적으로는 3,000만 장이라고 한다.

 

 

 

스키드로우는 데뷔 시점이 1989년도로 웬만한 메이저급 글램 메탈 밴드중에서는 가장 늦기 때문에 글램 메탈 최후의 불꽃이라고도 불린다. 스키드로우의 등장 이후 글램 메탈은 변변한 스타를 찾지 못하면서 양산형 음악만을 배출하다가 결국 1990년대 불어닥친 얼터너티브 열풍에 맥 없이 무너지고 만다. 머틀리 크루, 건즈 앤 로지스와 함께 유럽 투어를 돌 정도로 큰 밴드였지만, Skid Row(음반)을 끝으로 1996년 세바스찬 바흐가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하여 밴드를 탈퇴한 이후 별 활약이 없었다. 이 밴드의 보컬이었던 세바스찬 바흐는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가수라는 별명이 있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는 미국과 영국, 독일 등지에서 펑크와 하드코어의 영향을 받아 메탈리카 등의 스래쉬 메탈 밴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메탈리카는 스래시 메탈의 빅4 중 하나이며, 메탈리카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 Master of Puppets 앨범과 타이틀 트랙이 유명하다. 북미의 인디 장르라는 인식이 강했던 스래시 메탈의 대중화에 기여한 앨범 중 하나이기도 하다.

 

 

 

U2는 1970년대에 데뷔하며 활동했는데, 1983년 낸 앨범 "War"가 영국 차트 1위에 올랐고, 이후 투어에서 매진 공연을 잇따라 만들어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U2는 불후의 걸작, The Joshua Tree를 내놓았다. 전작들에 비해 더 잔잔하고 차분해졌으며,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완성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를 석권하면서 세계적인 밴드로 떠오르게 된다. 앨범에 수록된 "With or Without You"는 세계적인 명곡으로 자리잡았고 그 후로도 널리 불려지는 U2의 대표곡으로 남았다. 뿐만 아니라 또다른 빌보드 핫 100 넘버 원 히트곡인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앨범의 포문을 여는 곡이자 U2 팬들에게는 최고의 명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등의 곡들도 수록되었으며 이 앨범을 통해 U2는 명실공히 80년대 최고의 록밴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밴드로 전 세계적으로 2억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했으며 역사상 단일 투어로 110회의 공연하여 100% 전석매진에 총 720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는 아티스트는 U2만이 유일하다.

 

 

 

다만, MTV의 등장으로 외모만 훌륭하고 음악적 실력이 떨어지는 가수들이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Money for Nothing이 이런 세태를 비판하는 노래였다. 세계 최초로 3D 애니메이션을 사용해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으며, 뮤비 자체로도 가치가 크다. 이 노래는 한창 MTV가 전성기를 달리던 1985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MTV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뮤직 비디오들로 피터 가브리엘의 Sledgehammer와 노르웨이 3인조 밴드 A-ha의 Take On Me가 있다. 이 뮤비들 모두 역사적인 뮤직 비디오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하의 Take On Me는 80년대 뮤비 중 최초로 10억뷰를 넘겼고, 현재 19억뷰 이상으로 80년대에 공개된 뮤직비디오 중 조회수 1위이다.

 

 

 

다이어 스트레이츠는 70년대부터 활동하던 록 밴드로, 'Love over Gold (1982)' 앨범으로 UK 차트를 정복하더니, 1985년작 Brothers in Arms 앨범으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다. 앞서 언급한 Money for Nothing도 이 앨범에 속해있다.

 

 

 

1986년 7월 15일에 발매된 라이오넬 리치의 3집 앨범 "Dancing on the Ceiling"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빌보드 200에서 1986년 9월 넷째 주부터 10월 첫째 주까지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99위, 198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8위에 올랐다. 1986년 10월 16일까지 미국에서 300만 장, 1987년 5월 21일까지 4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다. 앨범의 첫 싱글 "Say You, Say Me"는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99]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Dancing on the Ceiling은 핫 100 2주 연속 2위,[100]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9위, 세번째 싱글 "Love Will Conquer All"은 핫 100 2주 연속 9위,[101] 198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97위, 네번째 싱글 "Ballerina Girl"은 핫 100 7위,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95위, 다섯번째 싱글 "Se La"는 핫 100에서 20위를 기록했다.

 

 

 

휘트니 휴스턴의 2집 앨범 "Whitney"는 1987년 6월 2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1987년 6월 넷째 주부터 9월 첫째 주까지 11주 연속 1위, 198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3위, 1988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2위를 기록하고 1988년 4월 18일까지 미국에서 600만 장,[102] 1995년 11월 29일까지 900만 장이 팔리는[103]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첫 싱글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가 빌보드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04]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Didn't We Almost Have It All"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05]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2위, 세번째 싱글 "So Emotional"은 핫 100 1주 1위,[106]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위를 기록했고 네번째 싱글 "Where Do Broken Hearts Go"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07]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3위를 기록했고 다섯번째 싱글 "Love Will Save the Day"은 핫 100에서 9위를 기록했다.

 

 

 

마이클 잭슨의 7집 앨범 "Bad"는 1987년 8월 31일에 발매되었는데, 이는 마이클 잭슨의 1980년대 두 번째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1987년 9월 넷째 주부터 10월 다섯번째 주까지 6주 연속 1위, 1988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고 1988년 6월 1일까지 미국에서 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108] Bad의 첫 싱글 "I Just Can't Stop Loving You"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109]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5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Bad"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10] 198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59위, 세번째 싱글 "The Way You Make Me Feel"은 핫 100 1주 1위,[111]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6위, 네번째 싱글 "Man in the Mirror"는 핫 100 2주 연속 1위,[112]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1위, 다섯번째 싱글 "Dirty Diana"는 핫 100 1주 1위,[113]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1위를 기록했고 여섯번째 싱글 "Another Part of Me"는 빌보드 핫 100에서 11위, 일곱번째 싱글 "Smooth Criminal"은 핫 100에서 7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93위를 기록하는 등 앨범의 7개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결과적으로,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 단 두 장의 앨범으로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평정하였고, 동시에 "King of Pop"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시대를 뛰어넘어 대중음악사에 기록될 음악적 유산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 태동하던 힙합 음악 역시 Run-D.M.C., LL Cool J, 비스티 보이즈, 퍼블릭 에너미, 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를 필두로 메이저로 급부상하여 어엿한 대중음악의 일부로 자리매김한다. 이 외에도 슬릭 릭, 쿨 모 디, 라킴, 빅 대디 케인 등등 전설적인 래퍼들이 힙합을 크게 발전시켰다.

 

 

 

80년대 말에는 프리스타일과 뉴 잭 스윙 등 흑인 음악에서 유래한[114] 새로운 댄스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 중 뉴 잭 스윙은 압도적인 인기를 끌며 90년대가 R&B와 힙합의 시대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자넷 잭슨, 바비 브라운, 밀리 바닐리, 폴라 압둘, 캐런 화이트, 키스 스웨트 등 수많은 뉴 잭 스윙 가수들이 미국 대중음악계의 정상을 차지했으며, Babyface와 테디 라일리,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등의 프로듀서들은 수많은 뉴 잭 스윙 히트곡들을 만들어냈고 이 중 Babyface는 세련된 스타일의 뉴 잭 스윙을 선보여 90년대 R&B의 밑거름을 다진다.

 

 

 

1988년에 발매된 바비 브라운의 2집 앨범 Don't Be Cruel은 빌보드 200에서 6주 비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9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에 올랐고 1990년 3월 9일까지 미국에서 600만 장이 팔리는[116]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첫 싱글 "Don't Be Cruel은 빌보드 핫 100에서 8위, 198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9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My Prerogative"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위, 세번째 싱글 "Roni"는 핫 100에서 3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80위, 네번째 싱글 "Every Little Step"은 핫 100 3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8위, 다섯번째 싱글 "Rock Wit'cha"는 빌보드 핫 100에서 7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95위를 기록했다. 이 외에도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2 사운드트랙 앨범의 첫 싱글로 발매된 바비 브라운의 "On Our Own"이 핫 100에서 2위를 기록하고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9위에 오르는 등 크게 히트했다.

 

 

 

1989년에 발매된 자넷 잭슨의 4집 앨범 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는 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1위를[117] 기록했고 1990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은 1990년 12월 14일까지 미국에서 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118] 앨범의 첫 싱글 "Miss You Much"는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119]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5위를 기록했고 앨범의 두번째 싱글 "Rhythm Nation"은 빌보드 핫 100에서 2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8위를, 세번째 싱글 "Escapade"는 빌보드 핫 100에서 3주 연속 1위,[120]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5위, 네번째 싱글 "Alright"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4위, 다섯번째 싱글 "Come Back to Me"는 핫 100에서 2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9위, 여섯번째 싱글 "Black Cat"은 빌보드 핫 100 1주 1위,[121]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9위, 일곱번째 싱글 "Love Will Never Do (Without You)는 핫 100에서 1주 1위,[122]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9위를 기록하는 등 앨범의 모든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밀리 바닐리도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에 발매된 이들의 데뷔 앨범 "Girl You Know It's True"는 빌보드 200에서 7주 비연속 1위를 기록했고[123] 1990년 1월 16일까지 미국에서 600만 장이 팔렸다.[124] 앨범의 첫 싱글 "Girl You Know It's True"는 빌보드 핫 100에서 2위,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8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Baby Don't Forget My Number"는 핫 100에서 1주 1위,[125]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28위에 올랐다. 앨범의 세번째 싱글 "Blame It on the Rain"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126]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6위를 기록했고 네번째 싱글 "Girl I'm Gonna Miss You"는 핫 100 2주 연속 1위,[127] 198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1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6위를 기록했다. 다섯번째 싱글 "All or Nothing"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를 기록했고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9위에 올랐다.

 

 

 

 

 

 

1990년대의 대중음악

 

무너진 흑백장벽과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가속화된 장르화와 계속된 크로스오버가 더욱 강해지며, 1990년대는 대중음악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특히 1990년대에는 '세계 3대 디바'로 불리는 대형 여가수를 필두로 여성 아티스트들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는 머라이어 캐리, 자넷 잭슨, 보이즈 투 멘, 셀린 디옹, 마돈나, 휘트니 휴스턴, 너바나, 마이클 잭슨, 투팍, 에미넴, TLC, 오아시스, 가스 브룩스, 마이클 볼튼, 토니 브랙스턴, 등이 있다. 빌보드 선정 1990년대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는 1위 머라이어 캐리, 2위 자넷 잭슨, 3위 가스 브룩스, 4위 보이즈 투 멘, 5위 셀린 디온, 6위 마돈나, 7위 TLC, 8위 휘트니 휴스턴, 9위 마이클 볼튼, 10위 토니 브랙스턴이었다.

 

 

 

1980년대를 이어서 U2, 메탈리카, 건즈 앤 로지스, 본 조비, 에어로스미스 등이 인기를 끌었으며, 또한 기존의 록 음악의 주류로 자리 잡았던 헤비 메탈이 저물고, 너바나를 필두로 얼터너티브 록이 새롭게 부상하며 대중음악계에 충격을 몰고 온다. 이로 인해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부상과, 기존의 메탈계에서도 변화가 왔는데, 글램 메탈이 저물고 새로이 뉴 메탈, 얼터너티브 메탈 등이 떠오르고, 기존의 메탈 밴드들과는 다른 얼터너티브 록을 주류로 하는 록 밴드들이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너바나와 스매싱 펌킨스,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사운드가든, 스톤 템플 파일럿츠 등이 그렇다. 이전부터 활동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도 전성기를 보낸다.

 

 

 

너바나로 시작된 그런지 열풍은 포스트 그런지를 낳았으며, 후바스탱크, 니켈백, 푸 파이터스 등이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 너바나, 펄 잼으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록/그런지에 대항하여 언론들이 60, 70, 80년대를 바탕으로 한 소위 영국색 짙은 음악들을 띄워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브릿팝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 브릿팝은 오아시스, 블러, 펄프, 스웨이드, 버브 등이 이끌었다. 또한, 침체기에 머물고 있던 펑크 록 계열도 얼터너티브 록으로 인하여 네오 펑크(팝 펑크)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대표적으로 그린 데이가 있다. 네오 펑크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수많은 빅스타들을 등장시킨다.

 

 

 

소프트 록에서도 또한 1990년대 초반기에 큰 히트작들을 몰고 왔는데, 미스터 빅, 제네시스, 익스트림, 에릭 클랩튼 등의 곡들이 그랬다.

 

 

 

이외에도 정말 수많은 가수들이 90년대 중후반에 메인스트림에 등장하였는데,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NSYNC, 스파이스 걸스, 백스트리트 보이즈, 98 Degrees 등의 10대 취향의 가사와 댄스를 내세운 틴 팝 아티스트들, 브랜디, 모니카, 알리야, 몬텔 조던, 어셔 등의 신생 R&B 가수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힙합 음악 분야에서도 훗날 레전드로 등극하는 에미넴과 JAY-Z, 스눕 독, 로린 힐 등이 등장하였다. 알리야와 브랜디는 1994년부터, 모니카와 몬텔 조던은 1995년부터 전성기를 누렸고, 틴 팝 아티스트 중 대부분과 어셔는 1990년대 후반부터 전성기를 맞아 이 중 몇몇은 2000년대 초반이나 중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으며, 몇몇은 2010년대까지 꾸준히 인기를 얻으며 롱런하기도 했다.

 

 

 

장르로는 1980년대 중후반에 전성기가 시작된 컨템퍼러리 R&B가 1990년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를 기점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 앨범 "Mariah Carey"는 1990년 6월 12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11주 연속 1위,[24] 1990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32위, 1991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앨범은 1991년 9월 13일까지 미국에서 600만 장,[25] 1994년 9월 27일까지 8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26]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첫 싱글 "Vision of Love"는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27]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6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Love Takes Time"는 핫 100 3주 연속 1위,[28]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6위,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9위, 세번째 싱글 "Someday"는 핫 100 2주 연속 1위,[29]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3위, 네번째 싱글 "I Don't Wanna Cry"는 핫 100 2주 연속 1위,[30]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6위를 기록했다.

 

 

 

80년대 중후반부터 대중화가 되어가던 힙합은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 완전히 음악계의 중심에 자리 잡고 황금기를 맞게 된다. 1990년 MC 해머가 발매한 Please Hammer Don't Hurt 'Em이 전 세계적으로 1,870만 장 팔리면서 힙합의 시대를 알렸고 뒤이어 바닐라 아이스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 2월 12일에 발매된 MC 해머의 3집 앨범 Please Hammer Don't Hurt 'Em은 빌보드 200에서 21주 비연속 1위,[31] 1990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 1991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7위를 기록했고 1991년 4월 15일까지 미국에서 1,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32] 앨범의 세번째 싱글 "U Can't Touch This"는 빌보드 핫 100에서 8위,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55위를 기록했고 네번째 싱글 "Have You Seen Her"는 핫 100에서 4위,[35] 1990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7위를, 다섯번째 싱글 "Pray"는 핫 100에서 2주 연속 2위를 기록했다.

 

 

 

뉴 에디션의 멤버 리키 벨, 마이클 비빈스, 로니 디보는 1989년에 벨 비브 디보(Bell Biv DeVoe)를 결성했는데 이들의 싱글 "Poison", "Do Me!"가 1990년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 두 곡이 수록된 이들의 데뷔 앨범 "Poison"은 1990년 3월 20일에 발매되어 1990년 12월 18일까지 미국에서 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전 시대에 인지도를 올려온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1991년 발매한 앨범 Blood Sugar Sex Magik으로 크게 성공한다. 해당 앨범의 트랙 Under the Bridge은 얼터너티브 록 역사상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가장 성공한 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해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도 8위라는 성적을 거둔다.[37]

 

 

 

이 시기에 소프트 록도 빅 히트를 한다. 당시 최고의 세션맨들로 구성된 슈퍼 밴드였던 미스터 빅의 2집 "Lean into It"에서 마지막 트랙, To Be with You가 큰 성공을 거둔다. 빌보드 핫 100에서 1위,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2위를 거두었다. 그리고 앞서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도 크게 성공하며, 199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7위에 올랐었다. 이 곡은 빌보드 핫 100 올타임 차트/1958년-2018년에 296위에 올라와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에릭 클랩튼의 Tears in Heaven도 1991년에 발매됐다. 에릭 클랩튼의 네 살 난 아들 코너 클랩튼의 죽음에 대해 쓴 곡이다. 1991년 3월 20일, 코너 클랩튼은 맨해튼에 있는 아파트 침실에 열린 창문 사이로 떨어져서 추락사했는데, 무려 53층의 높이였다. 그리고, 에릭 클랩튼과 친하게 지낸 스티비 레이 본이 1990년 8월 27일,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죽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헬리콥터를 원래 에릭 클랩튼이 타려고 하다가 양보한 것을 타고 가던 길에 죽은 거였다. 에릭은 스티비의 명복을 빌며 이 노래를 작사, 작곡을 준비했는데 어린 아들이 저런 참사를 당하여 더더욱 노래가 애절하게 되었다.

 

 

 

해당 곡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2위,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6위에 올랐다. 그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영국 싱글 차트에서 5위에 올랐으며 전 세계 20개 이상의 국가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그래미에서는 최고의 남성 팝 보컬,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를 차지하였다.

 

 

 

마이클 잭슨의 8집 앨범 "Dangerous"는 1991년 11월 26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1위,[39] 1992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위,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38위를 기록했고 1992년 1월 21일까지 미국에서 400만 장,[40] 1994년 9월 29일까지 600만 장,[41] 2000년 5월 30일까지 7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42]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앨범의 첫 싱글 "Black or White"는 빌보드 핫 100에서 7주 연속 1위,[43]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4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Remember the Time"은 핫 100 4주 비연속 3위,[44]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9위, 세번째 싱글 "In the Closet"은 핫 100 6위,[45] 1992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6위, 네번째 싱글 "Jam"은 핫 100 26위, 다섯번째 싱글 "Who Is It"은 핫 100 14위, 여섯번째 싱글 "Heal the World"는 핫 100 27위, 여덟번째 싱글 "Will You Be There"는 핫 100 3주 비연속 7위,[46]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7위를 기록했다.

 

 

 

한편, 너바나는 마지막 록의 아이콘이자, 시대의 아이콘 중 하나를 가진 밴드라 평가된다. 너바나는 상업성과 매너리즘에 찌든 당시 록 씬을 60년대의 순수성으로 초기화시킨 밴드이자, 모든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은인으로 꼽히며, 너바나는 당시 매너리즘에 찌들어 위기에 처해있던 록 씬을 개혁하고 록 음악의 수명을 훨씬 연장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당대 록 음악의 가장 큰 문제는 주류 장르였던 헤비 메탈, 특히 글램 메탈 같은 장르가 제대로 음악적 변혁을 이루지 못하고 너무 오래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47]

 

 

 

그리고 1980년대에 잉베이 말름스틴의 등장 이후 헤비 메탈씬에서는 클래식의 작법이 거의 완전하게 메인스트림에도 녹아들고, 그 영향을 받은 하위 장르들인 파워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등 스케일이 다른 록 사운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등장한 고민이 갈수록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록 음악에 대한 문제였다. 더이상 1960~70년대 개러지 록 시대처럼 음악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서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점점 고도의 테크닉과 정확도, 조화에 신경쓰다보니 마치 현대의 클래식 음악처럼 점점 '록 음악은 하는게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당시 정체에 힘입어 록의 대항마들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가장 급부상한 장르는 다름 아닌 힙합으로, 이 신생 장르는 흑인들의 거리 음악으로 시작해 록 음악의 영역이었던 공격적인 사운드와 록의 정신이라고 일컫는 '자유', '저항', '퇴폐' 같은 시대정신의 대변이라는 장점을 빼앗으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록 위기론은 슬슬 정설이 되기 시작한다. 기존의 글램 메탈 밴드들이 점차 추락하기 시작하고, 고유의 음악색을 유지하며 호평을 받던 메탈리카와 퀸스라이크 같은 메탈 밴드들이 기존작에 비해 훨신 대중적으로 타협한 작품 Metallica와 Empire를 발매했다. 이는 밴드에게 전에 없던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 주지만 메탈 팬들에게는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점차 시대가 바뀌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 9월 24일, Nevermind가 발매되었다. 세계를 바꾼 신호탄이었다.

 

 

 

처음에는 인디 음반다운 지극히 미미하게 시작됐으나, 시간이 지나며 사태는 점차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 앨범과 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단일곡 중 하나인 리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49]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큰 신드롬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약 4개월간의 역주행 끝에 1992년 1월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를 이어 빌보드 200 2주 비연속 1위를 차지한다.[50] Nevermind의 총 판매량은 미국에서 1,000만 장,[51] 전 세계적으로 약 3,000만 장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 사건은 시대를 바꾸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불리는 Nevermind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수많은 밴드들이 너바나를 이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대중들은 이 새로운 록 밴드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고, "록 음악의 쇠퇴설"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영국에서는 훗날 너바나와 함께 90년대 최고의 록 밴드로 기록될 라디오헤드가 시애틀 그런지의 영향을 받아 데뷔 앨범 Pablo Honey를 발표했으며, NME 등 영국 인디씬은 그런지 열풍에 대항해 국가 단위로 블러, 오아시스 등의 브릿팝을 육성해냈으며 펑크 록이 네오 펑크로 부활했고 그런지의 큰 인기는 포스트 그런지가 이어갔다. 순식간에 수많은 록 음악의 하위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메탈 역시 이에 반응해 시대에 밀려난 기존 메탈을 대신할 얼터너티브 메탈, 뉴 메탈과 같은 하위 장르들이 탄생해서 인기를 끌었으며 이에 맞서는 기존 메탈 층에서는 데스 메탈, 블랙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이 부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들 기존 메탈 장르는 뛰어난 음악적 성과를 얻기는 했으나 대중적인 지지는 얻지 못하고 과거의 예측대로 듣는 사람만 듣는 매니악한 장르로 남았다.

 

 

 

얼터너티브 록은 '얼터너티브'라는 모호한 용어 아래에서 기존의 관습적인 록 장르를 거부하고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여 새로운 음악의 흐름을 창출해냈으며, 여기에 더해 대중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음악적, 상업적으로 다시금 록 음악을 도약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얼터너티브 록 혁명은 다른 장르에도 영향을 끼쳐, 주류 팝 시장은 잠깐 주춤하며 인디 음악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되었고, 일렉트로닉 음악은 이들의 실험을 받아들여 또다시 변화했으며, 힙합은 JAY-Z가 언급했듯이 얼터너티브 록의 전성기로 인해 성장을 멈추고 '잠시' 기다려야 했다. 너바나로 인해서 얼터너티브 음악이라는 형태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너바나가 Nevermind를 발매한 해에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도 loveless라는 걸작을 발매한다. 슈게이징이라는 장르를 상징하는 명반이자, 포스트 록의 시발점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피치포크 미디어의 경우에는 이 앨범을 90년대 최고의 앨범 1위에 올리기도 하는 등 앨범이 나올 당시보다 현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앨범이다. 아방가르드 록의 Pet Sounds라는 평을 받았다.

 

 

 

휘트니 휴스턴과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은 영화 보디가드의 사운드트랙 앨범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은 휘트니 휴스턴과[52] Various Artists가[53] 맡은 앨범이다. 1992년 11월 17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20주 비연속 1위,[54]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위, 199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7위, 빌보드 200 1990년대 총결산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고 1993년 11월 3일까지 미국에서 1,000만 장,[55] 1995년 7월 31일까지 1,500만 장,[56] 1999년 11월 1일까지 1,700만 장이 팔렸다.[57] 앨범의 첫 싱글인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는 빌보드 핫 100에서 14주 연속 1위,[58]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앨범의 세번째 싱글로 발매된 휘트니의 "I'm Every Woman"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4위,[59]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9위, 네번째 싱글로 발매된 휘트니의 "I Have Nothing"은 핫 100에서 5주 연속 4위,[60]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0위를 기록했다.

 

 

 

MC 해머와 바닐라 아이스는 대중성 짙은 랩 장르인 팝 랩 아티스트였는데 이 흐름은 1992년 12월 15일에 발매된 닥터 드레의 The Chronic으로 인해 완전히 깨진다.

 

 

 

더 크로닉의 성공으로 팝 랩은 침체되었고 G-funk 장르의 웨스트 코스트 갱스터 랩이 힙합 씬의 주류가 되었다. 서부 힙합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투팍 샤커, 스눕 독, 워렌 G, 네이트 독, 아이스 큐브, 이지 이, 닥터 드레가 이 흐름을 이끌었다.

 

 

 

특히 1993년 11월 23일에 발매된 닥터 드레가 프로듀싱한 스눕 독의 데뷔 앨범 Doggystyle은 빌보드 200에서 3주 비연속 1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3위를 기록했고 1994년 1월 11일까지 미국에서 300만 장, 1994년 5월 31일까지 400만 장, 총 700만 장, 전 세계적으로 1,100만 장이 판매되며 서부 힙합 전성기를 대표한다.

 

 

 

한편으로 힙합의 본고장인 뉴욕에서도 주권을 되찾고 있었는데 1993년 발매된 우탱 클랜의 데뷔 앨범 Enter the Wu-Tang (36 Chambers)를 시작으로 1994년 나스의 데뷔 앨범 Illmatic과 The Notorious B.I.G.의 데뷔 앨범 Ready to Die, 1996년 JAY-Z의 데뷔 앨범 Reasonable Doubt과 버스타 라임스의 데뷔 앨범 The Coming 등이 발매되며 동부 힙합 역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1993년 5월 18일에 발매된 자넷 잭슨의 5집 앨범 "janet."은 빌보드 200에서 6주 연속 1위,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4위, 199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8위, 199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70위를 기록하고 1993년 12월 17일까지 미국에서 500만 장,[65] 1994년 4월 12일까지 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66]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앨범의 첫 싱글 "That's the Way Love Goes"는 빌보드 핫 100에서 8주 연속 1위,[67]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If"는 핫 100 2주 연속 4위,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9위, 세번째 싱글 "Again"은 핫 100에서 2주 연속 1위,[70]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74위,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2위를, 네번째 싱글 "Because of Love"는 핫 100 10위,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8위, 다섯번째 싱글 "Any Time, Any Place"는 핫 100 2위,[73][74]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0위, 일곱번째 싱글 "You Want This"는 핫 100 8위,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4위를 기록했다.

 

 

 

머라이어 캐리의 3집 앨범 "Music Box"는 1993년 8월 31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8주 비연속 1위,[77] 1993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40위, 1994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위, 199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24위를 기록하고 1994년 6월 29일까지 미국에서 700만 장,[78] 1995년 1월 19일까지 800만 장,[79] 1997년 11월 5일까지 1,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80] 앨범의 첫 싱글 "Dreamlover"는 빌보드 핫 100에서 8주 연속 1위,[81] 1993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8위, 두번째 싱글 "Hero"는 핫 100 4주 연속 1위,[82]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위, 세번째 싱글 "Without You"는 핫 100에서 3위,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16위, 네번째 싱글 "Anytime You Need a Friend"는 핫 100 12위, 199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7위를 기록하는 등 앨범의 모든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그린 데이의 2번째 정규 앨범 《Kerplunk》가 미국에서만 5만 장이 팔리며 언더그라운드 등지에서 히트를 치자, 메이저 레코드 회사들은 그린 데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4년 그린 데이는 메이저 레코드 회사들 중 'Reprise Records'와 계약을 맺게 된다.

 

 

 

3주 간의 레코딩 작업 이후 1994년 2월 1일, 그들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이자 메이저 레이블 데뷔 앨범 《Dookie》가 발매된다. 이 앨범으로 그린 데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데, 미국 내 1190만 장 이상 판매, 앨범 발매 5년만에 RIAA 인증 Diamond, 전 세계 2,500만 장 이상 판매를 한다. 이렇게 대성공을 거두며 그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수록곡 Basket Case는 팝 펑크(네오 펑크) 대표작 중 하나로, 현재 세계적으로 10억회 이상 스트리밍된 곡 중 하나이다.

 

 

 

컨템퍼러리 R&B와 힙합 음악의 결합이라는 장르적 실험은 90년대 초부터 TLC, 메리 제이 블라이즈를 통해 서서히 시도되다가 90년대 중반에는 퍼프 대디의 음반사 배드 보이 레코드와 머라이어 캐리, SWV, Xscape, 브랜디, 모니카, 몬텔 조던에 의해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90년대 말이 되면 이는 대중음악계의 보편적인 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1994년 11월 15일에 발매된 TLC의 2집 앨범 CrazySexyCool은 빌보드 200에서 3위, 1995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5위, 199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2위를 기록했고 1996년 6월 26일까지 미국에서 1,000만 장,[83] 1999년 7월 2일까지 1,100만 장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84] 앨범의 첫 싱글 "Creep"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주 연속 1위,[85]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위, 두번째 싱글 "Red Light Special"은 핫 100 3주 연속 2위,[86]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8위, 세번째 싱글 "Waterfalls"는 핫 100 7주 연속 1위,[87] 1995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2위, 네번째 싱글 "Diggin' on You"는 핫 100 3주 연속 5위,[88] 199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45위를 기록하는 등 앨범의 모든 싱글들이 크게 히트했다.

 

 

 

미국이 너바나를 필두로 한 그런지 열풍으로 들썩이는 동안,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로 록의 재구성이 일어났다. 이러한 90년대 영국 록의 주류를 브릿팝이라고 부른다. 브릿팝은 미국의 그런지와 마찬가지로 얼터너티브 록으로 분류되기는 한다. 그러나 묘하게 유행한 시기만 같았을 뿐, 영국의 브릿팝 열풍은 미국의 그런지와 거의 개별적으로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90년대 초 미국의 그런지 열풍이 휩쓸었을 때에, 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브릿팝이라는 음악이 유행했다. 이 음악은 60~70년대의 비틀즈와 킹크스를 비롯한 록 음악과, 파워 팝 같은 기타 팝 음악을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가까이는 80년대 영국 인디 밴드인 더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장르적 특징으로는 기타와 멜로디 중심의 편곡과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오아시스, 블러, 펄프, 스웨이드 네 밴드가 브릿팝의 대표 주자로 뽑힌다. 브릿팝은 90년대 초 유행하던 미국의 록 음악의 대항마로서 영국 매스미디어의 의해 발굴되어 큰 푸쉬를 받았으며, 브릿팝 전쟁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낳았다.

 

 

 

오아시스는 1994년에 Definitely Maybe를 발매한다. 전 세계적으로 1,500만장이 팔렸으며, 이 앨범은 매드체스터의 영향이 아주 강하게 반영된 음반이다. 사운드적으로 정돈되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이 강하여, 보통 인디 록, 펑크 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슈게이징의 영향이 느껴지는 노이지한 기타 사운드 또한 이후 앨범들과 구분되는 특징.

 

 

 

'Supersonic', 'Shakermaker', 'Live Forever' 등의 싱글이 연달아 흥행한 다음 이 앨범이 발매되었는데, 1994년 발매 당시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데뷔앨범이라는 기록을 얻었으며, 후에 이 기록은 만 18살에 데뷔한 괴물 신인 악틱 몽키즈의 2006년 데뷔 앨범 Whatever People Say I Am, That's What I'm Not에 의해 깨지게 된다. 그리고 1994년, 같은 해에 블러가 발매한 Parklife은 대중들과 평론가 모두를 사로잡으며 블러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1995년에는 오아시스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라는 명반을 발매하며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Don't Look Back In Anger, Wonderwall 등이 수록된 앨범이다. 특히 Wonderwall은 영국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영국에서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Spotify에서 90년대 곡들 중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된 곡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20세기 곡들 중 2번째로 많이 스트리밍 된 곡이다.[91] 20세기에 가장 많이 재생된 곡 1위는 영국의 록 밴드 퀸의 Bohemian Rhapsody이다.

 

 

 

동일 1995년에, 펄프는 Common People를 발매한다. 서민들처럼 되고 싶어하지만 서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잣집 소녀를 서민인 화자가 신랄하게 디스하는 곡이다. 이 곡은 코커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학교[92]에서 영화 공부할 때 만났던 조각 전공 여학생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코커 본인 말로는 별일 없었고 단지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런던 이스트엔드[93]에서 살고 싶다."는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NME 선정 90년대 최고의 곡 1위, 피치포크 미디어 에서 뽑은 90년대 명곡 순위에서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브릿팝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1996년에는 스웨이드의 Beautiful Ones, 그리고 1997에는 버브의 명곡 Bitter Sweet Symphony가 발매된다. Bitter Sweet Symphony는 곡 내내 반복되는 아름다운 현악기 반주와 씁쓸한 가사가 인상적인 곡으로 발매 이후 각종 매체에서 매우 호평하였다. 펄프의 Common People, 오아시스의 Wonderwall 등과 함께 브릿팝[94]을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오아시스와 블러, 이 두 밴드의 관계는 브릿팝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크게 대립했다. 그러던 중 발매된 오아시스의 3집 Be Here Now는 상업적인 면에서는 크게 성공했지만, 오아시스 찬양 일색이던 언론들 마저도 혹평할 정도였고, 블러 또한 브릿팝 전쟁에 지친 나머지 브릿팝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미국 음악으로 눈을 돌리면서 짧지만 찬란했던 브릿팝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96년 6월 18일에 발매된 토니 브랙스턴의 2집 앨범 "Secrets"는 빌보드 200에서 2위, 1996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3위, 199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9위를 기록했고 미국에서 1997년 4월 16일까지 500만 장,[95] 2000년 10월 3일까지 8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96]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는데 앨범의 첫 싱글 "You're Makin' Me High"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주 1위,[97] 199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9위,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98위를 기록했고 두번째 싱글 "Un-Break My Heart"는 핫 100에서 11주 연속 1위,[98] 1996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81위,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4위, 빌보드 핫 100 1990년대 총결산 차트에서 4위를, 세번째 싱글 "I Don't Want To"는 핫 100 2주 연속 19위,[99]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59위를 기록했다.

 

 

 

서부의 투팍, 동부의 비기가 사망한 후 미국 힙합씬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는데, 퍼프 대디로 대표되는 동부의 팝 랩, 마스터 P의 노리밋 사단으로 대표되는 남부 힙합이었다. 이 둘을 통해 대중음악계에서 힙합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고, 이는 00년대 초중반의 힙합 최전성기로 이어진다.

 

 

 

퍼프 대디의 데뷔 앨범 "No Way Out"은 1997년 7월 22일에 발매되어 1997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10위, 1998년 빌보드 200 연말 차트에서 23위를 기록했고 1997년 12월 19일까지 미국에서 400만 장,[100] 1998년 12월 21일까지 600만 장,[101] 2000년 9월 7일까지 7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102] 대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의 싱글들도 크게 히트했다. 첫 싱글 "Can't Nobody Hold Me Down"은 빌보드 핫 100 6주 연속 1위,[103]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5위, 두번째 싱글 "I'll Be Missing You[104]핫 100에서 11주 연속 1위,[105] 1997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 3위, 빌보드 핫 100 1990년대 총결산 차트에서 10위를, 세번째 싱글 "Been Around the World"는 핫 100 2주 연속 2위,[106] 199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19위, 네번째 싱글 "Victory"는 핫 100 19위,[107] 1998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68위를 기록했다.

 

 

 

1998년에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Californication를 발매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1,5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앨범은, 멤버들의 결혼, 그리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점에서 이전 앨범보다 성숙한 음악세계를 보여주었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286위에 랭크되었다. 라우드니스 워 논란의 시발점이 된 앨범이다. 정말 뛰어난 앨범이지만 음량이 지나치게 크다는 비판이 있다. 수록된 모든 곡에서 소리의 뭉개짐과 클리핑이 발생했고, 비전문가의 귀로도 명백하게 음량이 과하게 높은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니켈백도 같은 해에 그들의 2집 앨범, "The State"가 큰 흥행을 몰고온다. 그들의 이름을 메인스트림에 올라오게 해준 앨범으로, 다음 해에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앨범의 초석이 된다.

 

 

 

1998년에는 셰어의 히트 싱글 "Believe"가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발매 이후 이 노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 또한 셰어는 52세의 나이로 차트 정상에 올라 빌보드 핫 100 역사상 여성 최연장자 1위 기록을 갱신했다. 이 노래는 199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선 1위, 빌보드 핫 100 1990년대 총결산 차트에선 31위를 기록했다.

 

 

커지고 커지던 음악 시장은 1999년에 절정을 맞았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해이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

 

메탈리카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자넷 잭슨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Kool & the Gang

 

Earth, Wind & Fire

 

바비 브라운

 

스티비 원더

 

라이오넬 리치

 

티나 터너

 

Run-D.M.C.

 

퍼블릭 에너미

 

LL Cool J

 

Fresh Prince & DJ Jazzy Jeff

 

슬릭 릭

 

신디 로퍼

 

쿨 모 디

 

라킴

 

빅 대디 케인

 

브루스 스프링스틴

 

비스티 보이즈

 

조지 마이클

 

마돈나

 

홀 앤 오츠

 

필 콜린스

 

 

다이어 스트레이츠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

 

폴 매카트니

 

듀란 듀란

 

폴라 압둘

 

밀리 바닐리

 

The Go-Go's

 

벨린다 칼라일

 

New Edition

 

포리너

 

밴 헤일런

 

건즈 앤 로지스

 

데프 레파드

 

본 조비

 

The Bangles

 

뉴 키즈 온 더 블록

 

컬처 클럽

 

엘튼 존

 

데비 깁슨

 

티파니

 

 

 

 

1990년대

 

 

너바나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

 

보이즈 투 멘

 

마돈나

 

라디오헤드

 

앨라니스 모리셋

 

휘트니 휴스턴

 

자넷 잭슨

 

토니 브랙스턴

 

Color Me Badd

 

Jodeci

 

TLC

 

En Vogue

 

브랜디(가수)

 

Monica

 

알리야

 

베이비페이스

 

마이클 잭슨

 

프린스

 

알 켈리

 

MC 해머

 

닥터 드레

 

스눕 독

 

아이스 큐브

 

오아시스

 

블러

 

이지 이

 

아웃캐스트

 

Bone-Thugs-n-Harmony

 

투팍 샤커

 

The Notorious B.I.G.

 

우탱 클랜

 

Nas

 

퍼프 대디

 

JAY-Z

 

로린 힐

 

미시 엘리엇

 

릴 킴

 

버스타 라임스

 

마스터 P

 

에이스 오브 베이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스파이스 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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