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2023년 1월 기준 인구는 23,301,968명*이다. CIA의 World Factbook을 바탕으로 한 2016년의 출산율은 1.12명으로, 도시 국가를 제외한 전세계 최저 출산율이었다.
인구밀도 순위가 도시 국가를 제외하고 세계 2위일 만큼 매우 높다. 1위는 방글라데시인데 방글라데시는 국토 대부분이 평야 지대인 반면, 대만은 한국 이상으로 국토 대부분이 험준한 산지이기 때문에 가용 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전세계 최고다.
인구의 2%는 한족이 타이완에 진출하기 전부터 살고 있었던 다양한 대만 원주민들이며, 나머지 98%는 한족이다. 이들 중 중국 푸젠성에서 이주한 사람 70%와 객가(客家)인 14%를 묶어 본성인(本省人)이라고 하며, 나머지 14%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외성인(外省人)이라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사정 때문에 '대만 원주민 = 대만인', '외성인 = 한족', '본성인 = 대만인 = 대만 원주민'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외성인과 본성인은 한족이며, 대만 원주민은 한족이 아니다. '대만 원주민(臺灣原住民, Taiwanese Aborigines)'은 한족인 본성인과 구별되며, 이들은 본래 대만 섬에서 기원한 민족으로 한족이 아니다.
타이베이와 신베이 등 북부 지역은 외성인 비율이 높고, 가오슝과 타이난 등 남부 지역은 본성인 비율이 높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율의 차이일 뿐, 대만 어느 동네에 가나 인구 과반 이상은 본성인이다. 하카인은 신주시, 먀오리 등 중북부 지방에서 주류를 이루며 대만 원주민은 동부 지역에서 높은 인구밀도를 보인다.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은 대부분 대만에도 살고 있다. 그러나 대만 원주민 외의 소수민족은 사실상 한족으로 잡힌다. 그리고 명나라나 청나라 시절에 대만으로 온 사람의 후손이면 본성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의 후손이면 외성인으로 간주한다.
대부분의 인구가 평야 지대인 대만 서부에 몰려 있어 상당히 편중된 인구분포와 높은 인구밀도를 보인다.
동부는 해발 3,000m급 산이 수두룩하여 평야가 좁아 교통이 불편하기에 거주 인구가 150만 명이 채 안 된다. 그래서 도서부를 제외한 2,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모두 대만 서부에 몰려 있다.
대만에도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미국인, 일본인, 몽골인, 그 외에도 베트남인, 인도네시아인, 태국인들도 대만에 거주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처럼 전 세계에서 드물게 일반적인 외국인을 상대로 한 귀화 제도가 없는 나라이다. 영주권만 발급한다. 물론 대만인과 결혼해서 대만에 거주하는 경우는 예외다.
대만은 출산율이 굉장히 낮은 편이라서 한국, 일본, 홍콩, 마카오,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의 심각한 저출산 국가이다. 1985년을 기점으로 출산율이 2명대 아래로 떨어졌으며 이후 1990년대에는 1998년과 99년도를 제외하면 1.6~1.8명 안팎을 유지했으나 2001년부터 20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출산율이 급감하여 2003년도에 1.24명으로 초저출산국이 되었으며, 2010년에는 합계출산율이 0.90명으로 떨어지며 세계 최초로 출산율이 1명대 이하로 떨어진 국가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이후 잠깐 반등하여 2012년에 1.27명이 되었지만 다시 하락하여 1명대 초반을 유지하였다. 2020년에 0.99명을 찍음으로써 1명대 이하로 재진입하였고, 인구도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뚜렷한 반등의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감소세가 심화되는 중이며 2022년 출산율은 0.87명을 기록했다. 올해 1~4월 출생아수는 작년 동기에 비해 7.6% 감소하였다. 대한민국과 함께 전세계 저출산 1~2위를 다투고 있는 셈이다. 1950년대에 7명대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걸 생각하면 상전벽해. 이렇듯이 대만의 출산율 전망은 상당히 암울하다. 대만정부가 재추진하고 있는 징병제 계획에 악영향을 끼칠 것은 자명하다.
지역별로는 과학단지가 있는 신주시가 출산율이 높고, 자이현이 노인 인구가 많다.
야구
야구는 대만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1999년부터 발행되는 500 신 대만 달러 지폐에 원주민 학생들로 구성되어 전국대회를 제패한 리틀야구팀을 도안의 상징으로 삼은 것만 봐도 그 인기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웬만한 구기 종목들은 인구, 경제적 규모, 외교적 문제로 인해 거의 다 중국에 뒤지고 있지만 야구만큼은 확실하게 중국을 압도한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야구는 일본인의 스포츠라고 해서 대만 사람들이 배척하던 스포츠였지만 문화와 스포츠를 통한 동화 작업을 진행함에 따라 야구를 대만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31년 대만의 가의농림학교 야구단이 고시엔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대만에서의 야구붐은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고시엔에 참여하던 내지 밖의 조선, 만주, 대만 팀과 달리 가의농림학교 야구단에서는 대만인과 일본인 사이의 주전/비주전 차별이 없었기에 이러한 붐이 일게 된 것이다. 가의농림학교 야구단의 이야기는 KANO라는 영화로 2014년 제작되어 히트를 쳤다.
일제가 패망하고 중화민국이 대만을 통치한 이후로 일본의 스포츠였던 야구는 자연스레 정부로부터 홀대를 받게 되었다. 대신 국민당 정부는 축구와 농구를 '중국인의 스포츠'라면서 대대적으로 밀어줬다. 원산야구장이 미군 현지 주둔 부대에게 공여가 되면서 1959년까지는 타이베이 시내에 야구장이 없는 상태가 지속될 정도로 야구는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며 1960년대부터 FIFA와 FIBA에 심한 간섭과 압박을 가해 결국 대만이 국제 대회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8년 타이둥의 한 초등학교 야구팀을 주축으로 한 팀이 일본 간사이 대표를 꺾으면서부터 장제스 정권은 야구를 프로파간다로 삼기 시작한다. 또한 야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미국과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여기에는 설마 소년체육에 정치적인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불참을 강요하겠냐는 계산도 있었다. 대만의 리틀야구 실력은 아시아 최강의 수준을 자랑했었다. 한때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17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야구 종주국 미국 리그팀에 이어 대만은 역대 2번째 우승국으로 만만치 않은 성적을 거뒀었다. 그러나 1996년 대회 이후 2009년에 오랜만에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을 거뒀던 것이 2000년대 와서 거둔 이 대회 결승 진출 기록이고, 1996년 이후 20년째 우승을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리틀리그 강호였으며 왕젠민이나 천웨이인 같은 메이저리거도 배출했고, 국제대회에서 나름 내세울 수 있는 성과라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준우승이 있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도 리틀리그 우승은 1996년이 마지막이고 올림픽도 1992년 이후로 다시는 메달을 따지 못했다. 아시안 게임 역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이후 금메달을 딴 적이 없다. 아시안 게임만 나가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밀려 매번 은메달 아니면 동메달을 땄는데 2006년 대회는 한국 국가대표팀이 심하게 삽을 푸는 바람에 대만이 금메달을 땄다. 그래도 실력으로는 대한민국,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 빅3 수준에 들기는 한다.
야구가 인기종목이라 프로리그인 CPBL도 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야구계의 대규모 승부조작사건으로 인기가 크게 떨어졌으나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이 2013 WBC에서 사상 첫 8강에 오르며 자국 프로야구의 인기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대만 동부 지역에는 프로야구 팀이 없어서 주로 전국구 인기를 지닌 퉁이나 중신을 응원한다.
대만 출신의 유망주들은 과거부터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던 일본으로 어릴 때부터 유학을 가는 케이스가 많다. 야구가 인기종목인 데 반해 프로리그가 생긴 게 1989년으로 늦어서 그 이전 시대에는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해서 이름을 날린 선수들도 꽤 있었고, 2000년대 승부 조작으로 자국 리그가 크게 인기가 떨어지자 선수 유출은 과거보다도 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닛폰햄 파이터즈를 거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만 대표팀의 에이스 양다이강도 청소년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후쿠오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렇게 고교/대학 시절에 유학을 나온 선수 외에도 대만에서 학업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케이스의 선수로는 궈쥔린, 쏭자하오, 천관위, 왕이정 등이 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의 외국인 선수 보유제도와 관련이 있다. 일본프로야구는 외인 선수 보유가 무제한인데다가 대만 출신 선수들을 저렴한 비용에 스카우트해서 육성하는 것이 가성비 좋고 검증된 방식이다. 고교시절 유학을 떠난 선수들까지 포함하면 대만 유망주들의 유출이 심각한 편이다. 또한 일본 말고 메이저에 도전하는 선수들도 한국에 비해서 많은데 이 역시 고교/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직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자국 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가는 일본, 직행파와 자국 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가는 파가 모두 존재하는 한국과는 달리 대만에서 자국 리그를 뛰다가 상위 리그에 도전한 자국 선수는 왕보룽이 유일하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것은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고. 2024 WBSC 프리미어 12에서 우승하는 등 나름의 존재감은 보이고 있다. 한편, 의외라면 의외로 상당수 대만 야구 팬들은 한국 야구에도 관심이 있다고 한다. 대만 선수가 진출한 영향도 있어보이는데, 대만 출신으로는 최초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뛰었던 왕웨이중이 2018년 KBO 리그 NC 다이노스에서 활약했을 때 KBO 리그 경기가 대만에 중계되기도 했다. 2020년대 들어선 한국 치어리더들의 대만 진출이 눈에 띄고 있다.
축구
결론부터 말하면 세계 제일의 인기 스포츠임에도 대만에선 인기가 별로 없다. 프로는커녕 생활스포츠로서의 축구도 인기가 매우 떨어지는 편인데 학교 운동장에도 축구장 대신 농구장을 만들어 놓은 곳이 많아 대만 학생들은 축구 대신 농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공원에 축구장을 만들어놔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
다만 20세기부터 이랬던건 아닌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끝에 1950년대 대만에 밀려난 국민당 정부의 눈에 야구는 그저 일본의 스포츠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당시 정부는 일본 색채를 지우기 위해 축구와 농구를 적극 장려하였다. 덕분인지 1950~60년대에는 세계구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던 적도 있었다. 1954년 필리핀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을 5:2로, 1958년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도 대한민국을 3:2로 이기고 금메달 2개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대만축구협회는 중국과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아시아 축구 연맹(AFC)에서 축출되었고, 1975년에는 오세아니아 축구 연맹으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지역예선부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까지 오세아니아에서 지역 예선을 치렀다. 그러다가 1989년이 돼서야 다시 AFC로 복귀했다.
이 기간 동안 대만 축구는 경기수가 급속히 줄어들며 실력이 급속히 퇴보했고 AFC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아시아의 동네북 신세로 약해져 있었다. 한때는 실력이 비등비등했던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중위권 국가들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2019년 들어서는 요르단, 쿠웨이트 등 중하위권 중동 팀들에게 각각 5-0, 9-0으로 시원하게 박살나고, 2021년에는 무려 네팔에게 2-0으로 깨지는 등 사실상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아시아 전체로 봐도 최하위권 수준. 게다가 최근에 출전한 국제대회인 2023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2-0으로 박살나, 키르기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4-1로 아주 시원하게 개박살이 나버렸고 결국 3전 1승 2패로 대회를 마무리 하였다.
자국 농구 대표팀이 국내에서 매회 국제대회를 개최하면서 꾸준히 실전 감각을 익혀가고 제레미 린 등 NBA 스타도 꾸준히 배출되는 반면, 축구 대표팀은 아시아 각국에서 열리던 국제축구대회에 불참한 것도 컸다. 태국 킹스컵이나 코리아컵 등 소위 아시아 3대 대회 참가 기록이 전무하다. 므르데카컵에 참가 기록은 있으나 홍콩 프리미어 리그 선발팀이나 홍콩리그에서 뛰던 홍콩 태생 중화민국 국적 선수 선발팀이 1968년까지 중화민국으로 참여한 기록이다. 대만이 원하기만 했다면 현재도 민간교류가 아주 활발한 싱가포르나 아시아 유일의 수교국인 대한민국에 요청하여 해당국에서 개최하는 국제축구대회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콩이 꾸준히 구정컵을 연 것이나 자국 농구협회를 보면 대만 정도의 경제력이면 스스로 국제 축구대회를 충분히 개최할 수 있었는데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국제정세 탓만 할 수도 없는 법.
2014년까지는 지금은 폐지된 대회들인 AFC의 최하위 수준 대회인 AFC 챌린지컵(국대)과 AFC프레지던트컵(클럽)이나 나가고 있는 신세였다. 2011년에는 처음으로 프레지던트컵에서 자국 클럽인 타이완전력이 우승을 차지했지만, 대회를 개최한 이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축구 약체들이 대부분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대만이 축구에서는 미래의 발전 가능성 면에서 나은 게 없다. 과장 좀 보태서 대만에서 태어난 사람이 축구선수가 되길 원하면 대만 해협 건너 중국으로 이민가서 거기서 축구선수 생활을 하거나, 본인이 대륙이 영 꺼려진다면, K리그, 홍콩 프로축구 리그나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 등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의 다른 리그로 가서 선수로 뛰는 방법밖에 없다.
이제 와서 대만에 프로축구리그가 출범하고 유소년 축구인재 육성 시스템을 만든다고 해도 미래의 발전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는 게 거기서 훌륭한 선수들이나 발전 가능성이 있는 유소년 유망주가 나온다고 해도, 중국 슈퍼 리그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기 때문에 대만 자체의 축구 리그가 활성화되기 어렵다.
2017년 새로운 실업리그인 대만 축구 프리미어 리그(Taiwan Football Premier League)가 출범했다. 프로 리그는 중국어로 職業이라는 명칭이 붙는 반면, 이 리그는 台灣企業甲級足球聯賽라고 칭한다. 실제로 대학팀들도 기업들의 스폰서를 받아 참가하고 있다. 축구 뿐만 아니라 대부분 종목의 실업 리그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것은 대만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을 참고할 것. 2009년부터는 타이베이 시립경기장과 가오슝 국립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A매치 관중 수는 적은 편인데 가오슝 국립경기장이 규모가 큰지라 주로 타이베이시립경기장을 사용하는 중.
여자축구는 남자축구에 비해 조금 나은 편이다. 월드컵에 1회 출전한 바 있으며 AFC 여자 아시안컵에도 단골로 출전했었고 초창기 3회 연속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는 아시아에서 꾸준히 4강에 들어가는 나름 강호였으나 이후로는 남자축구처럼 실력이 퇴보하는 모습으로 최근 3회 연속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한국과의 역대 경기를 보면 빠르게 몰락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대만에 0-7로 대패하였고, 1991년 아시안컵 조별 라운드에서는 0-9로 대패를 당할 정도로 대만은 아시아에서 상위권이었으나, 1997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에게 1-0으로 승리한 이후 한국에게 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2001년 아시안컵에서는 대만이 한국에게 첫 패배를 당하게 되었고, 2017년 동아시아 축구 대회 예선에서는 대만이 9-0으로 제압당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1999년 아시안컵에서 준우승 한 이후 조별 예선에만 머물더니 2010년대부터는 지역 예선에서 미얀마, 태국에 밀려 본선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 축구 대회는 일본과 북한이 최다우승 국가에 중국과 한국이 고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북한이 불참하는 대회에만 출전하고 있다. 그래도 아시안 게임에는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2001년에는 아시안컵을 유치하여 개최한 바 있다. 대부분의 경기는 반차오에 위치한 반차오경기장에서 열렸으나 홈 개최라는 이점에도 한국에 밀려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여담으로 한국이 대만과 맞붙은 대만 대회 1라운드가 한국이 처음으로 대만에게 승리한 경기다.
예전 국가대표팀 홈 그라운드는 1989년 개장하여 2008년 폐장한 20,000석 규모의 타이베이 중산축구전용구장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야구장이었다가 1945년 이후 미군기지로 사용되었으며 미군 철수 후 축구전용구장을 세웠다. 구장의 외관 자체가 중국 전통양식을 차용해서 스포츠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독특한 구장이며 전광판마저도 중국식 기와를 얹혀놓은 특이한 모습이다. 조명탑 또한 관중석 바깥이 아닌 코너 플래그 쪽에 위치해 있던 여러가지로 독특한 구장이었다.
시내 한복판에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20년된 경기장이라기에는 관리상태도 안 좋았고, 무엇보다도 쑹산공항에 착륙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 심판의 호각소리조차 잘 안 들리는 문제가 있었다. 막상 이 문제는 구장 폐쇄시점에는 고속철도 개통으로 국내선이 대거 사라지면서 문제가 해결되긴 했다. MRT 위안산역 플랫폼에서 바로 보이는데 현재는 위안산엑스포공원의 일부로 남아있다. 그라운드를 철거한 거 외에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독특한 외관을 구경할 수 있다. 2007년 아시안컵 예선 경기 때 이 곳에 원정응원 갔던 후기들이 아직도 인터넷에 제법 있으니 궁금하면 검색해 볼 수도 있다.
농구
그나마 축구와 달리 농구는 대만에서 살아남았다. 전반적인 성적이나 인기도 축구보다 좋으며, 야구가 프로 위주의 인기라면 농구는 생활체육 측면에서 (축구 대신) 일종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현재도 고교 농구와 대학 농구 리그가 스포츠 채널의 주요 겨울 컨텐츠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농구에 대한 인기는 좋은 편이다.
올림픽 본선에도 출전했으며 1959년 FIBA 월드컵에서 출전국 13개 중 4위를 차지했다. 1989년 ABC컵에서도 15개국 중 3위를 기록할 정도. 농구의 인기가 저하된 현재도 윌리엄존스컵 대회를 매회 개최하는 정성을 들이고 있다.
허나 2000년대엔 아시아 동네북 수준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중국에게 101-50 정도로 선전했지만 카타르에게 98-37, 요르단에게 102-35 로 진 적까지 있다. 필리핀과 친선전에서도 81-42로 졌다.
2010년대에는 농구에 투자를 해서인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0년 아시아 18살 청소년 농구대회에선 중국-한국 다음으로 3위에 올랐는데, 만만치 않은 상대인 이란을 이기기도 했으며 한국과도 9점차 패배라는 선전을 벌였다. 그리고 윌리엄 존스 컵에서 한국을 이겼으며 2013년 필리핀 아시아 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압도적 응원을 받던 안방팀 필리핀을 조예선에서 84-79로 이겼으며 예상을 뒤엎고 중국을 96-78로 8강에서 탈락시켰다. 비록 준결승전에서 우승팀 이란에게 60-79, 3-4위전에서 한국에게 57-75로 패배했지만, 확실히 예전 동네북 시절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겨우 2년 만인 중국에서 열린 2015 남자 아시아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카타르, 카자흐스탄, 레바논에게 모두 져서 13-16위 순위 결정전으로 나가 13위를 차지하면서 부침이 심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여자농구 쪽은 과거 중국, 한국과 비등할 정도의 실력을 가졌으며, IMF가 터져 여자농구팀이 반토막이 나던 시절에 대만리그로 진출한 유망주들이 몇몇 있었다. 요즘은 일본이 급부상한 상태에서 중국, 한국 그 다음 위치에 있다. 그런데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4강에 오른 1986년 이후로 30년동안 14번동안 연이어 4강에 오르고 있긴 한데 3위가 최고성적으로 1번도 결승에 올라본 적이 없다. 게다가 2007년 대회부터 5회 연속 4위를 차지하는 중. 참고로 한국이 12번으로 최다 우승, 중국이 11번, 일본이 3번(1970년 우승 이후로 2013, 2015년 우승)하면서 세 나라가 우승을 차지하는 가운데 대만은 우승이 없는 유일한 4강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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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리그인 P.LEAGUE+(PLG)와 T1 LEAGUE(T1)가 있으며 세미프로리그인 SBL(Super Basketball League)이 있다.
본래 1994년에 출범하여 2000년까지 운영된 프로리그인 중화직업농구리그 CBA가 있었는데 리그 해체 후 2003년 세미프로리그인 SBL이 출범했다. 프로리그였던 CBA의 경기 시간은 48분이었던 반면, SBL은 국제 룰을 적용하여 경기 시간이 40분으로 진행되고 있다. 다만, 세미프로임에도 외국인 선수를 기용하고 있다. 본래 SBL은 7개 구단으로 출범하였으나 2018년 시즌 직후 푸방브레이브스가 아세안농구리그에 참여를 선언하고 다싱 타이거즈가 순수 아마추어인 사회인(실업)팀으로 전환 및 팀 해산을 통해 현재는 4개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019년까지는 세미프로리그인 SBL이 최상위리그였으나 2020년과 2021년에 각각 프로리그인 PLG와 T1이 출범하게 되었다. 두 리그 모두 NBA와 동일하게 경기시간이 48분이다. PLG와 T1은 현재 각각 6개팀이 참여하고 있는데, 무려 5개 도시에서 두 리그간 연고가 겹친다. 과거 야구가 리그를 두 개 돌렸다가 둘 다 망한적이 있어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2022년 시범경기 격으로 프로팀인 PLG, T1 및 세미프로인 SBL이 참여하는 인터리그를 출범하였으며, 현재는 두 리그의 합병 이야기가 꾸준하게 나오고 있다. 동아시아 슈퍼리그에는 PLG 우승팀이 참여한 바 있다.
두 개의 프로리그가 동시에 출범했지만 선수 수급이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본래 연봉이 훨씬 높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수들이 제법 있어 농구계도 대륙으로 인재 유출이 심했다. 하지만 두 리그가 출범하던 시점에 코로나19의 창궐로 중국 리그가 중단되면서 일부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대만으로 돌아와 프로리그의 흥행을 주도하게 되었다.
현재는 프로리그인 PLG와 T1 뿐만 아니라 세미프로 SBL 그리고 대학농구, 고교농구까지 모두 스포츠채널을 통해 중계되고 있다. 여자 실업리그는 2004년 새로 출범한 WSBL이 4개팀으로 근근히 운영되고 있다.
현재 PLG에 참여하고 있는 포모사 드리머스는 최초 창단시 대만 리그가 아닌 아세안 농구리그(ASEAN Basketball League)에 참여했으며 2019/20 시즌에는 푸방 브레이브스가 SBL을 탈퇴하고 ABL에 참여했다. ABL은 대만, 홍콩, 마카오, 필리핀,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클럽이 참여했고 전부 홈앤어웨이로 진행됐다. 정규리그 경기수는 20경기 정도에 불과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2019-2020 시즌 중 중단되어 사실상 해산되었다.
여담으로 WKBL 부산 BNK 썸에 대만 출신의 진안(秦安) 선수가 뛰고 있다. 대만 협회로부터 2년간 출전정지라는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날 중징계를 받고 고등학생 때 한국으로 귀화하여 WKBL에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으며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드와이트 하워드가 대만 T1리그의 타오위안 시노펙은행 레오파즈로 오면서 다른 나라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상황이며 코로나로 부침을 겪는 중국 리그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워드가 오고 2년 뒤에는 드마커스 커즌스마저도 타이완 비오 레오파드로 오면서 NBA 스타가 추가되었다. 차후 다른 NBA 스타들을 종종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리고 비록 미국에서 태어났고 NBA에서만 활동했지만 대만 국적을 갖고 있는 제레미 린의 인기도 대만에서 높다. 당장 대만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으로 제레미 린을 뽑는다.
배구
배구도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있다. 배구 리그로는 2004년에 출범한 TVL(Top Volleyball Leauge)가 있다. 2004년 출범해 남자부와 여자부에 각각 4개씩의 구단이 참여하고 있으며 농구와 마찬가지로 지역연고 없이 몇몇 도시를 순회하며 경기가 치러진다. 아직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리그 레벨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로 리그로 전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017년부터 대만 FOX스포츠에서 경기를 중계한다.
2019 대통령배 전국남녀중고배구대회(대한민국, 여자부) 여고부에 대만 타이중시의 동산고등학교(臺中市立東山高級中學)가 출전했다. 동산고는 전 경기에서 목포여상과 제천여고를 3:0으로 이겼으나, 전주근영여고에 2:3으로 패배했다(7월 20일) . 경기 직후 대만 동산고의 감독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기 팀 선수의 뺨을 때렸다.
2023년 7월 13~20일에 전남 영광군에서 개최한, 제56회 대통령배 전국남녀중고배구대회에, 대만 타이중시(臺中市)의 배구 명문 풍원상업고등학교(臺中市立豐原商業高級中等學校) 배구부가 출전했다. 19세이하 남자부 A조에서 3개 학교와 3세트 2선승으로 친선 경기에 임하여 2승 1패를 기록했다.
태권도
태권도가 의외로 제법 인기가 있다. 이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천스쉰 선수가 태권도로 대만 역사상 첫 금메달을 딴 덕분이라고 한다. 다만 최초로 천스쉰 선수가 금메달을 땄음에도 국가 연주와 국기 게양이 되지 않아 해당 선수는 물론이고 대만 전체가 탄식에 빠졌었다. 태권도에 관련된 드라마도 만들고, 태권도 물품 수입도 많이 한다고 한다.
아시안 게임 태권도에서도 강호로 금 11, 은 9 ,동 15개로 한국(70개), 이란(39개), 중국(금 9개, 10개, 동 18개로 37개)에 이어 태권도 아시안 게임 메달 4위이다.
대만, 일본 잡고 사상 첫 프리미어12 우승
프리미어12 한국 대표팀의 첫 상대였던 대만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일본을 잡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대만이 프리미어 12 대회에서 우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만은 24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결승전에서 일본을 4-0으로 잡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일본, 쿠바, 도미니카공화국, 호주 등과 함께 조별리그 B조에 속했던 대만은 일본에 이어 조 2위로 상위 4개국만이 출전하는 슈퍼라운드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한국을 꺾었던 대만이지만, 결승전에 진출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A조에서 올라온 미국과 베네수엘라, 같은 조에서 올라온 일본과 맞붙었고, 1승2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1승2패를 기록해 대만은 ‘(득점/공격이닝)-(실점/수비이닝)’ 공식으로 계산하는 TQB(Team Quality Balance)에 따라 결승전이 진출할 수 있었다.
조별리그와 슈퍼라운드에서 일본에 전패했던 대만이었지만, 결승전만큼은 달랐다. 대만의 선발 린여우민은 일본의 선발 도고 쇼헤이와 대결에서 밀리지 않았다. 조별리그에서 한국 타선을 봉쇄했었던 린여우민은 이날 4회까지 일본 타선을 1피안타 2볼넷 3탈삼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도고 역시 4회까지 무실점으로 대만 타선을 막았다.
양 팀 간 투수전 양상은 5회부터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5회초 선두 타자 린자정이 우월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선취점을 뽑았다. 일본은 투수 교체를 하지 않았고, 대만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1-0 상황에서 전전웨이의 안타와 린리의 볼넷으로 1사 1·2루를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전제셴이 도고와 풀카운트 승부 끝에 쓰리런을 쏘아오려 4-0을 만들었다. 2019년 프리미어12 슈퍼라운드부터 이어온 일본의 국제대회 27연승에 마침표를 찍는 결승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