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계획하는 뇌가 만든 ‘나’라는 내적 표상
뇌는 생존에 필요한 보상을 얻고 위협을 피하는 운동을 계획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우렁쉥이는 살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는 유생 시기에는 신경계를 가지지만, 한 곳에 터를 잡은 이후에는 문자 그대로 ‘뇌를 소화시켜’ 버리는데, 이는 뇌가 ‘움직이는 생물’의 전유물임을 보여준다.[2] 뇌는 감각기관에서 얻은 정보를 사용하여 보상과 위험에 대해 예측하고, 혹시 수행할지도 모르는 동작을 끊임없이 예측하며 알맞은 신체운동을 일으킨다.
따라서 감각기관은 외부 세계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운동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와는 다른 생태적 위치를 점유하며, 우리와는 다른 진화적 역사를 겪은 물고기, 잠자리, 독수리, 박쥐나 개가 보는 세계와는 다르다. 우리의 시각 시스템은 십중팔구 잠자리나 독수리의 생존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외부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는 감각기관에 따라 다르다.[3] 시각 정보는 청각 정보보다 느리게 처리되며, 촉각은 시각보다 더 느리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들어온 각기 다른 정보를 통합하여 ‘나’에게 일어난 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고 하는 통합된 내적 표상이 있는 것이 편리하다. 고무 손 착시에서 고무 손을 ‘나’의 일부로 인식하게 된 것은, 붓질을 보는 시각과 붓질을 느끼는 촉각이 뇌에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도구에 대한 내적 표상을 활용해서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해보며 도구의 사용 방법을 계획하듯이, ‘나’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계획하고 ‘나’의 행동을 반성하고 수정하려면, ‘나’라고 하는 내적 표상이 필요하다.[2] 실제로 ‘나’에 대한 내적 표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기억은 미래를 계획하고 상상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경험을 기억하는 데에 핵심적인 뇌 부위인 해마(hippocampus)가 손상된 환자들은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미래의 일을 상상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이들은 “내일 뭐할 거예요?”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다.
뇌의 여러 부위는 컴퓨터처럼 순차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동시다발로 작동하므로 한순간에 온갖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 두번째 연재 글 참조, ‘뇌를 모방하는 인공지능의 약진’).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내적 표상은 이런 욕구와 사고를 어떻게 조율하고 통합하여,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5][6] 실제로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예컨대 친구, 가족, 또는 열정을 바치는 일 등)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과정(self-affirmation; 자기 가치 확인)을 제때에 실행하면, 작심삼일이 되기 쉬운 운동이나 학업 등 여러 방면에서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행동 수정이 일어난다고 한다.
일관되고 통합된 인격은 집단생활에도 유용했을 것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협력이 가능하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뿐만 아니라, “쟤는 어떤 사람인가, 쟤랑은 어떤 종류의 일을 어떤 식으로 함께할 것인가”도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일관된 인격은 ‘나’와 ‘너’에 대한 내적 표상을 만들고, ‘‘나’와 ‘너’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가능케 함으로써 정교한 협력을 기획, 수정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우리’와 ‘너희’에 대한 내적 표상은 ‘우리’라는 집단과, ‘우리’라는 집단의 구성원인 ‘나’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너희’를 대할 것인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라는 내적 표상의 유연함
지난 연재 글에서, 사람들도 인공 신경망의 표상 학습처럼 고양이 같은 물리적 대상과 도덕처럼 무형적인 대상에 대한 표상을 경험을 통해 학습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자연에는 구분선이 없어 스스로 그러할 뿐인데 사람들이 내적 표상에 따라 구분 짓는 것이며, 표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험에 따라서 바뀌어 감을 살펴봤다. 나, 너, 우리, 너희도 이런 내적 표상들이다. 심지어 자아, 즉 ‘나’라는 내적 표상조차 여타의 내적 표상들과 마찬가지인 걸까?
앞의 고무 손 착시 실험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어도, 뇌가 인식하는 내 몸의 범위는 도구를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변한다. 원숭이가 손으로 무언가를 잡을 때 활성화되는 대뇌 운동 피질(motor cortex)과 전운동 피질(premotor cortex)의 신경세포들은 원숭이가 집게로 물건을 잡을 때에도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아래 그림 A). 이 신경세포들은 손을 벌려야 물건을 잡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특수한 집게를 사용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활성화되었다.[7] 사람의 경우에도 손을 사용할 때나 도구를 사용할 때 전운동 피질의 활동은 다르지 않았다.[8][9]
이런 변화는 대단히 빠르게 일어난다. 피험자들에게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물건을 집게로 잡는 훈련을 10~15분 정도 시킨 뒤 맨손으로 물건을 잡아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훈련하기 전보다 느리게 팔을 뻗는다.[10] 도구의 사용을 통해 자기 팔이 실제보다 길다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중요한 요소인 ‘내 몸’에 대한 내적 표상은 의외로 대단히 쉽게 바뀐다.
뇌는 나와 타인의 몸을 헷갈려 하기도 한다. 거울 뉴런으로 널리 알려진 전운동 피질의 신경세포들은, 내가 직접 동작을 취할 때, 그 동작을 취하는 것을 준비하거나 상상할 때, 타인이 그 동작을 취하는 것을 볼 때, 똑같은 활동 패턴을 보인다.[1][11]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동작에 반응하는 뇌 활동은 정작 나의 동작을 방해할 수 있다. 피험자에게 일정한 박자에 따라서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라고 하고, 실험자가 피험자 앞에서 팔을 (1) 위아래로 움직이거나 (2) 좌우로 움직이는 실험을 상상해보자. 피험자들은 자기와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1번), 다른 동작을 취하는 사람을 볼 때(2번)보다 안정적인 동작을 보였다.
» A: 운동 피질(motor cortex)와 전운동 피질(premotor cortex)의 위치. B: 섬(insula)의 위치. 전측 (anterior) 섬(insula)란 섬 영역 중에서도 얼굴쪽 부분 (전측, 뒤통수에서 더 먼 부분)을 뜻한다. 그림은 뇌를 얼굴 면과 수평이 되게 자른 단면. C: 전측 대상회 (ACC; anterior cingulate cortex)의 위치. 통증 공감에 관련된 영역은 이 중에서도 정수리쪽 부분(dorsal)이다. 출처/ wikipedia.org
타인의 감정을 공감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전측 섬(anterior insula) 영역과 전측 대상회(ACC; anterior cingulate cortex)의 활동은 고통의 감정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위 그림 B, C). 이들 영역은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표정을 보거나 다른 사람이 아픔을 겪는 영상을 볼 때, 내가 아픔을 느낄 때와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느낄 때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타인의 감정처럼 느끼기도 한다.[12] 자신에게 용납하기 힘든 생각이나 감정이 있을 때,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런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다고 지각하곤 하는데 이를 투사(projection)라고 한다.
분명하다고 여겼던 내 안팎의 경계는 이토록 선명하지 않고, 나에 대한 표상은 의외로 쉽게 바뀐다. ‘나’의 모호한 경계는 도구를 사용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타인의 동작을 모방 학습하는 데에도 유리하며, 공감을 통해 사회생활을 풍요롭고 부드럽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고무 손 착시나 투사의 경우처럼 혼란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운동을 보조하도록 진화한 뇌는 나는 물론이고, 타인과 우리, 너희에 대한 표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자아는 허상일까?
바다는 바람이 없을 때는 잔잔하지만, 바람이 불면 파도가 생겨난다. 바람의 세기, 표면장력, 부유물, 중력과 해류의 흐름, 먼저 일어난 파도 등에 따라 파도의 모양과 위치는 달라진다.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의 어디까지 일러 그것을 파도라고 말할 수 있을지 경계도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밀려드는 파도라는 현상을 허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내 안팎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자아가 허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작 2분 간의 붓질로 착각이 일어난다고 해서, 내 손이 내 손이라는 지금의 내 지각을 허상이라 할 수 있을까?
‘나’라는 내적 표상은 마치 파도와 같다. 깊은 수면 단계인 비-렘(Non-REM) 수면 단계에서는 많은 뇌세포의 활동이 동기화된다. 이것이 진폭이 크고, 주파수가 낮은 뇌파(EEG, 뇌전도) 신호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의식이 발현될 수 없다.[3] 사고로 인해서 뇌 속 에너지 대사량이 크게 감소했을 때에도 의식이 없는(coma) 상태가 생겨난다. 이처럼 ‘나’라는 내적 표상과, 이를 가능케 하는 의식은 몇 가지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아가 허상이 아니냐 하는 물음이 주는 충격은 애초에 자아의 실상을 상정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는 아름다움을 가정하지 않고는 추함을 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구에서는 분명하게 경계 지을 수 있고, 주변과 떨어져 독립해 존재하는 자아의 실상을 오래도록 믿어왔다. 이는 현상의 경험을 통해 내적 표상을 구축했다고 여기는 대신에, 현상계의 소음에서 독립된, 순수하고도 절대적인 속성인 이데아를 상정하는 서구 세계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주변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자아의 실상에 대한 믿음은 ‘자유 의지’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자유 의지’에서 ‘자유’는 외부 영향으로부터 독립적(independent)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진화의 과정 동안 인간이 보여준 뛰어난 적응성(fitness)은, 인간이 주변의 영향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영향을 받아 스스로 변화하는 데 대단히 탁월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자아의 ‘실상’을 깊이 믿었기에, 자아의 특성이 ‘실상’의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발견은 “자아는 허상일까?”라는 충격을 던졌다. 이는 인간이 생명의 나무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는 다윈의 진화론과, 의식 이상으로 무의식이 중요하다는 프로이트의 발견이 서구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13] 애초에 서구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인간 중심주의와 그 당시 만연한 합리주의가 아니었다면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발견은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아의 작용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일어나는 파도처럼, 자아는 실상도 허상도 아닌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절벽을 깎아내는 파도처럼, 자아도 분명한 작용을 일으킨다. 앞서 설명한 자기 가치 확인(self-affirmation)은 “무엇이 나에게 진짜 중요한가”를 중심으로 상황 인식과 자기 이미지를 재편하는 과정이다. 자기 가치 확인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부정적 현실에서 도피함으로써 ‘나’라는 내적 표상을 보호하려는 자아의 방어적인 작용을, 나에게 소중한 가치를 향해 움직이는 적극적인 작용으로 전환시킨다. 이처럼 ‘현상’인 자아는 스스로 보호하는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변모시킬 수도 있다.[14]
나아가 ‘자아’라는 의식은 뇌의 물리적인 작동 방식까지 바꿀 수 있다. 사람을 비롯한 유인원에게 특정 뇌 영역(혹은 특정 신경세포)의 활동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이 영역의 활동을 증가시킬 때마다 음식이나 돈 등 보상을 주며 훈련시킨다.[15][16] 그러면 곧 이 영역(혹은 특정 신경 세포)의 활동을 바꿔내는 방법을 어떻게든 학습해 낸다.
이처럼 실시간으로 신경 활동을 보여주는 것을 신경 피드백 (neuro-feedback)이라고 하는데 실시간의 기능성 자기공명영상(real-time fMRI)으로 특정 뇌 영역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도 신경 피드백의 하나이다. 심한 만성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통증의 인식에 관련된 뇌 영역 중 하나인 등쪽 전측 대상회(dACC)의 활동 크기를 줄이도록 훈련시키면, 전측 대상회의 활동 크기가 줄어듦에 따라 통증 또한 줄어든다고 느낀다고 한다.[16][17]
» A: 피험자들에게 등쪽 전측 대상회 (dACC; dorsal anterior cingulate cortex)의 활동 정도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어떻게든 줄여보라고 하였다. 이 등쪽 전측 대상회는 위에서 통증에 공감을 다룰 때도 나왔던 영역이다. B: 훈련단계가 진행함에 따라 등쪽 전측 대상회의 활동 정도가 줄어든 정도를 보여준다. C: 훈련단계가 진행함에 통증이 줄어드는 정도를 보여준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 출현한 어떤 현상이 자기 만의 내적 질서를 보존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동시에 자신과 주변을 바꿔나가는 작용을 하는 현상은 곳곳에서 일어난다.[18][19] 물은 많은 경우에 아래로 흐르며 담는 그릇에 맞추어 그 모양을 바꾸는 유연한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자연 조건이 갖추어져 일어난 파도나 식물, 동물의 몸이라는 현상 안에 있을 때는 다른 양식으로 움직인다. 파도, 식물, 동물의 경계부터가 모호하기에 태어남과 죽음, 안팎의 경계 또한 모호하지만 그것은 절벽을 때리고, 그늘을 드리우고, 환경을 바꾸는 분명한 작용을 한다. 파도의 모양이 바뀌어가고, 식물이나 동물이 변해 가듯이, 우리 몸의 물리적 구성과 구조도 매일 조금씩 바뀌어 간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