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선전(金神仙傳)
박지원
줄거리
김신선의 속명 홍기(弘基)로 16세에 장가들어 단 한번 아내를 가까이 해서 아들을 낳았으며 화식(火食)을 끊고 벽을 향해 정좌한지 두어 해 만에 별안간 몸이 가벼워졌으며 그 뒤 각지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다. 하루에 수백 리를 걸었으나 5년 만에 한번 신을 갈아 신었고 험한 곳에 다다르면 더욱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밥을 먹지 않아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 속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남들은 그런 그를 신선이라 불렀다. 키는 7척이 넘었으며, 여윈 얼굴에 수염이 길었고 눈동자는 푸르며 귀는 길고 누른빛이 났다. 술은 한 잔에도 취하지만 한 말을 마시고도 더 취하지는 않았고 남이 이야기하면 앉아서 졸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빙긋이 웃으며, 조용하기는 참선하는 것 같고, 졸(拙)하기는 수절과부와 같았다. 어떤 이는 김홍기의 나이가 백여 살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쉰 남짓 되었다고도 하며 지리산에 약을 캐러 가서 돌아오지 않은지가 수십 년이라고도 하고 어두운 바위 구멍 속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그 무렵 박지원은 마침 마음에 우울병이 있었는데 김신선의 방기(方技)가 기이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 보고자 윤생과 신생을 시켜 몰래 탐문해 보았으나 열흘이 지나도 찾지 못하였다. 윤생은 김홍기가 서학동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으나 그는 사촌집에 처자를 남겨둔 채 떠나고 없었다. 그 아들에게서 홍기가 술, 노래, 바둑, 거문고, 꽃, 책, 고검(古劒 )따위를 좋아하는 사람들 집에서 놀고 있으리라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았으나 아무데도 없었으며 창동을 거쳐 임동지의 집에까지 찾아갔으나 아침에 강릉을 떠나갔다는 말만 듣는다. 다시 복(福)을 시켜서 찾아보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 박지원이 관동으로 유람 가는 길에 단발령을 넘으면서 남여를 메고 가는 어떤 스님으로부터 “선암에서 벽곡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또한 그 날 밤 장안사에 승려들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여러 날을 지체하여 선암에 올랐을 때에는 탑 위에 동불(銅佛)과 신발 두 짝이 있을 뿐이었다.
등장인물
김신선 : 이 작품의 주인공 김홍기로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는 아내에게 다시 접근하지 않고 수년만에 신선과 같은 행동을 하여 김신선이란 별명을 얻는다. 생김새도 특이했고, 신선과 같은 행세를 한다.
기 타 : 김신선의 아내, 김신선의 아들, 윤생, 신생, 김신선의 친구들과 동복자, 강원도 관찰사와 그를 따르는 수령들.
전문읽기
김신선의 이름은 홍기다. 나이 열 여섯 살 때에 장가들어서, 한 번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런 뒤에 다시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곡식을 물리치고 벽만 바라보고 앉았더니, 두어 해 만에 몸이 별안간 가벼워졌다. 국내의 이름난 산들을 두루 찾아 노닐면서, 늘 한숨에 수백 리를 달리고는 해가 이르고 늦음을 따졌다. 다섯 해 만에 신을 한 번 바꿔 신었으며, 험한 곳을 만나면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가 언젠가 말하기를
“옷을 걷고 물을 건너거나 달리는 배를 타면, 내 걸음이 오히려 늦어진다."
하였다. 그는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내가 예전에 우울증이 있었다. 그때 마침 ‘김선생의 방기(方技)가 가끔 기이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를 더욱 만나고 싶어했다. 윤생과 신생을 시켜서 남들 몰래 서울 안에서 그를 찾았지만, 열흘이 지나도 찾지를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번에 ‘김홍기의 집이 서학동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지금 가 보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촌 형제들 집에다 자기 처자식만 부쳐 두었더군요. 그래서 그의 아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우리 아버지는 한 해에 서너 번 다녀가시곤 하지요. 아버지 친구 한 분이 체부동에 사시는데, 그는 술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김봉사라고 한다오. 누각동에 사는 김 첨지는 바둑 두기를 좋아하고, 그 뒷집 이만호는 거문고 뜯기를 좋아하지요. 삼청동 이만호는 손님 치르기를 좋아하고, 미원도 서초관이나 모교 장첨사 그리고 사복천에 사는 병지승도 모두들 손님 치르기와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里門) 안 조봉사도 역시 아버지 친구라는데 그 집엔 이름난 꽃들을 많이 심었고, 계동 유판관댁에는 기이한 책들과 오랜 된 칼이 있었지요. 아버지가 늘 그 집들을 찾아다녔으니, 당신이 꼭 만나려거든 그 몇 집들을 찾아보시오.”
그래서 그 집들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어느 집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녁나절에 한 집에 들렸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뜯고 두 손님은 잠자코 앉아 있더군요. 흰머리에다 갓도 쓰지 않았습디다. 저 혼자서 ‘아마 이 가운데 김홍기가 있겠지.' 생각하고 한참이나 서 있었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길래 앞으로 나아가서,
“어느 어른이 김선생이신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이 거문고를 놓고는
“이 자리에 김씨는 없는데 너는 누구를 찾느냐?”
하더군요.
“저는 몸을 깨끗이 하고 찾아 왔으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십시오.”
했더니 주인이 그제야 웃으면서
“너는 김홍기를 찾는구나. 아직 오지 않았어.”
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제 오나요?”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해 주더군요.
“그는 일정한 주인이 없이 머물고, 일정하게 놀러 다니는 법도 없지. 여기 올 때에도 미리 기일을 알리지 않고, 떠날 때에도 약속을 남기는 법이 없어. 하루에 두세 번씩 지나 갈 때도 있지만, 오지 않을 때에는 한 해가 그냥 지나가기도 하지. 그는 주로 창동(남창동, 북창동)이나 회현방(회현동)에 있고, 또 동관. 이현(梨峴), 동현(銅峴:구리개), 자수교, 사동, 장동, 대릉, 소릉 사이에도 가끔 찾아다니며 논다고 하더군. 그러나 그 주인들의 이름은 모두 알 수가 없어. 창동의 주인만은 내가 잘 아니, 거기로 가서 물어 보게나.”
곧 창동으로 가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거기서는 이렇게 대답합디다.
“그이가 오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소. 장창교에 살고 있는 임동지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김씨와 더불어 내기를 한다던데, 지금까지도 임동지의 집에 있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그 집까지 찾아갔더니, 임동지는 여든이 넘어서 귀가 몹시 어둡더군요.
그가 말하길.
“에이구, 어젯밤에 잔뜩 마시고 아침나절 취흥에 겨워 강릉으로 돌아갔다우.”
하길래 멍하니 한참 있다가
“김씨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지요. 임동지가
“한낱 보통 사람인데 유달리 밥을 먹지 않더군.”
하기에
“얼굴 모습은 어떤가요?”
물었지요.
“키는 일곱 자가 넘고, 여윈 얼굴에 수염이 난 데다, 눈동자는 푸르고, 귀는 길면서도 누렇더군.”
하기에,
“술은 얼마나 마시는가요?”
물었지요.
“그는 한잔만 마셔도 취하지만,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아. 그가 언젠가 취한 채로 길바닥에 누웠었는데, 아전이 보고서 이레 동안 잡아 두었었지. 그래도 술이 깨지 않자, 결국 놓아주더군.”
하더군요.
“그의 말솜씨는 어떤가요?”
물었더니
“남들이 말할 때에는 문득 앉아서 졸다가도, 이야기가 끝나면 웃음을 그치지 않더군.”
합디다.
“몸가짐은 어떤가요?”
물었더니,
“참선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수절하는 과부처럼 조심하더군.”
하였습니다.
나는 일찍이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다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신생도 수십 집을 찾아보았는데, 모두 만나지 못하였다. 그의 말도 윤생과 같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홍기의 나이는 백 살이 넘었으며, 그와 함께 노니는 사람들은 모두 기인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홍기는 나이 열 아홉에 장가들어서 곧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그 아이가 겨우 스물밖에 안 되었으니, 홍기의 나이는 아마 쉰 남짓일 거야."
하였다. 어떤 사람은
“김신선이 지리산에서 약을 캐다가 벼랑에 떨어져 돌아오지 못한 지 벌써 수십 년이나 되었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도 그 어둠침침한 바위틈에서 무엇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게 있다."
하였다. 그러자 또 어떤 사람이
“그건 그 늙은이의 눈빛이야. 그 산골짜기 속에선 이따금 길게 하품하는 소리도 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 김홍기는 ‘오직 술이나 잘 마실 뿐이지, 무슨 술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그의 이름만을 빌려서 행할 따름이다.'는 소문만 들린다. 그래서 내가 또 동자(童子) 복을 시켜서 그를 찾아다니게 하였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 때가 계미년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에 내가 동쪽 바닷가에서 놀다가, 저녁 무렵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일만 이천이라고 하는데, 그 산빛이 희었다. 산에 들어가니 단풍나무가 가장 많아서, 바야흐로 붉어가고 있었다. 사리, 느릅, 여자 따위가 모두 서리를 맞아 노랗게 되었고, 으루나무와 전나무는 더욱 푸르렀다. 그 밖에 사철나무가 많았는데, 산 속의 기이한 나뭇잎들이 모두 누렇고 붉었다. 둘러보면서 즐기다가 가마를 멘 스님에게 물었다.
“이 산속에 혹시 도술을 통달한 이상한 스님이 있는가요? 더불어 노닐고 싶소."
“그런 스님은 없고, ‘선암에 벽곡(辟穀)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남에서 온 선비라고 하는데, 알 수 없습니다. 선암에 이르는 길이 험해서, 그곳까지 가 본 사람이 없답니다."
밤중에 장안사에 앉아서 여러 스님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같은 대답을 하였다. 또
“벽곡하는 사람이 백 일을 채우면 떠난다고 하는데, 이제 거의 구십 일은 되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 이가 아마도 신선이겠지' 싶어서, 매우 기뻤다.
밤중에라도 곧 찾아가고 싶었다. 이튿날 아침 진주담 밑에 앉아서 같이 놀러 온 친구들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았다. 마침 관찰사가 여러 고을을 순행하는 길에 금강산까지 들어와, 여러 절간에 묵으며 노닐고 있었다. 수령들이 모두 찾아와 음식을 장만하고, 나가 놀 때마다 따르는 스님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선암까지 이르는 길이 높고 험해서 나 혼자는 갈 수 없으므로, 늘 영원암 백탑 사이에만 오가며 마음이 서운했다. 마침 비가 오래도록 내리므로 산 속에서 엿새나 머물렀다. 그런 뒤에야 선암에 이르게 되었다.
선암은 수미봉 아래에 있었다. 내원통에서 이십 여리를 가면 천길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가 깍은 듯이 서 있는데, 길이 끊어져서 쇠사슬을 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올라갔다. 그곳에 이르자 빈 뜨락에는 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탑(榻) 위에는 조그만 구리 부처가 있고, 다만 신 두 켤레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못내 섭섭해서 어정거리며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바위 벽에다 이름을 쓰고는 한숨을 내쉬면 떠났다. 그곳에는 언제나 구름 기운이 둘러 있었고, 바람조차 쓸쓸했다.
어떤 사람은
“선(仙)이란 산에 사는 사람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게 바로 선(仙)이다."
하였다. 선(僊)이란 선선(僊僊)케 가벼이 공중으로 들려 오른다는 뜻이니 만큼, 벽곡하는 자라도 반드시 신선은 아닐 것이다. 울울(鬱鬱)히 뜻을 얻지 못한 자가 바로 신선일 것이다.
핵심정리
* 작가: 박지원
* 연대: 18세기말
* 성격: 풍자적
* 형식: 한문소설, 단편소설, 풍자소설
* 주제: 신선사상의 허무맹랑성
* 출전: 방경각외전
박지원(朴趾源)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소설가, 문신, 학자로서 1737년(영조 13) 2월 5일 서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烟湘),열상외사(列上外史)이다.
고려말의 문호 박상충, 이조 때의 박동량, 박미와 같은 시문의 대가 등이 배출된 명문가인 반남박씨 사유(師愈)와 함평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에게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경기도 관찰사, 예조참판, 지돈녕부사를 지낸 조부 박필균(朴弼均)에 의해 양육되었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옛사람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15세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752년 (영조 28) 16세에 전주이씨(全州李氏) 처사(處士)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으며, 특히 홍문관교리인 이양천에게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적 등을 교훈 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는 등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다.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더불어 평생의 문우로 지냄과 아울러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755년 19세에 이르러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스승 이양천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연암별집>> <방경각외전>에 실린 <마장전>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과 원문이 전하지 않는 <봉학사대전> <역학대도전>을 포함한 구전(九傳)의 작품을 지었다.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그 사이 1765년에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다.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후로 과거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며 박제가(朴濟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 깊은 교우를 가졌다. 이때를 전후하여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는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 하였으며, 이 무렵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당시의 국내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어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화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1780년(정조 4)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과 함께 청에가서 (1780년 6월 25일출발. 10월 27일귀국)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며 이 속에는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뒤늦은 1786년에 음사(蔭仕)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사복사주부(司僕寺主簿), 1791년에는 한성부판관, 1792년에는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에는 면천군수(眄川郡守), 1800년에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안현감 시절은 북경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이 때에 그의 마지막 소설인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다.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設)>> 등을 남기게 되었다. 1801년 신유사옥 사건을 계기로 실학자들의 공개적 활동이 엄금되자 그는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저술을 계속하다가 1805년(순조5) 12월 10일 69세를 일기로 필전의 일생을 마쳤다.
해설
이 소설은 소문에만 등장하던 신선이 작자의 끈질긴 추적으로 그 신비로움에서 벗겨지게 되는 것으로, 신선이란 허구를 타파하려는 작자의 실학사상을 엿볼 수 있다. 작자 스스로도 방경각외전 자서에서 “홍기는 대은(大隱)이란 유희 속에 몸을 숨겼다. 맑거나 흐리거나 실수가 없고 탐내거나 구하는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하여 그를 착한 은자로 이해한다. 이처럼 <김신선전>을 통한 신선의 부정은 그의 현실적. 실학적 정신의 기저가 된 것이라 하겠다. 서술이 매우 사실적(寫實的)이며, 문장이 기굴(奇崛)하고, 특히 문답식 전개가 찬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와 비슷한 선행작품으로, 허균의 <장산인전(張山人傳)>이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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