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왕 신화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수장(首長)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백호 7만 5천명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A.D.42) 3월 상사일(上巳日)에 (그들이)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이것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거북이 엎드린 형상과 같으므로 구지라 했다.-에서 수상한 소리가 불렀다.(구간들과) 마을 사람들 2,3백명이 거기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었다. “여기 누가 있느냐?" 구간들은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데이냐?" “여기는 구지입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 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래서 내려왔다. 너희들은 이 산 꼭대기를 파며 흙을 집으면서 ‘신이여, 신이여, 수로(首露)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하늘에서)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그 말을 따라 마을 사람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후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이 쌓여 있었다. 열어보니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는데 해처럼 둥굴었다. 여러 사람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고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서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두고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갔다. 12일을 지난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이 모두 화하여 어린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심히 컸으며, 이내 평상(平床)에 앉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고는 극진히 공경했다. (어린이는) 나날이 자라 열 며칠을 지나니 키가 9척임은 은(殷)나라 천을(天乙-탕왕)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임은 한(漢)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두 눈동자를 가짐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하고 혹 수릉(首陵)-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다.-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혹은 가야국(伽倻國)이라고 일컬으니 곧 육가야(六伽倻)의 하나이다.
<삼국유사,권2, 기이, 가락국기(駕洛國記)>
해설
우리는 흔히 ‘가락국기'보다는 <구지가(龜旨歌)>에 더 익숙해있다. 그래서 ‘가락국기'도 일부만이 소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본문에서도 <수로신화>가 나타난 ‘가락국기'의 일부만을 전재했다. 우리 교과서에서도 <수로신화>에 대한 다양한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김수로왕 강림 신화>, <가락국 신화>, <가락국 건국신화> <수로왕신화> 등이다. 따라서 학교 교육에 관한 한, <김수로왕 신화>에는 거의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사적인 , 신화적인 접근보다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시가 중의 하나인 <구지가>의 배경설화 정도로만 취급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수로신화>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신화적 요소와 제의적인 요소는 비록 그것이 전설화되었다고 해도 신화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게 한다.
<수로신화>는 고려 제11대 문종 때에 김해지방의 관리를 지낸 문인이 남긴 글을 일연이 ‘삼국유사'에 옮겨 실었다고 한다. 다른 어떤 건국신화보다 수식이 많은 것은 , 대체로 일연의 글이 사실적인 것에 반해서, 그 문인의 글은 문예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영웅의 일대기를 건국사실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건국신화에서 죽음의 과정이 극화되고, 전체 줄거리의 및 상징적 의미에 상응하는 내용을 보이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지만 일연이 옮긴 자료는 문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신화성이 많이 제거되었다.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수로신화>는 크게 4개의 에피소드로 정리된다. 첫째는 구지봉에서의 수로의 등장이다. 구간(九干)의 요청에 즈음하여 수로는 하강하게 된다. 일반적인 남방계 신화처럼 난생(卵生)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초자연적 공간 이동이라면 아도간의 집으로 옮기는 것은 문화적 이동을 의미한다. 수로는 줄과 금보자기에 싸여 내려온다. 줄은 통과의례에서 탯줄을 의미하고, 금보자기는 그만큼 귀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는 탈해와의 왕위쟁탈전이다. 탈해는 역시 알에서 태어난 신성한 존재였다. 즉 신성성의 대결이 이루어진다. 탈해가 매가 되면 수로는 독수리가 된다. 마치 해모수와 하백의 대결이 연상된다. 결국은 수로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셋째는 수로의 배우자가 되는 허황옥의 출현이다.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이 그녀의 부모와 살고 있을 때, 부모가 꿈을 꾸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허황옥을 왕후로 보내라는 내용이다. 꿈은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종종 꿈으로 국면이 전환되게 된다. 넷째는 신성출현을 한 수로와 허황옥이 만나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수로가 배우자가 없다는 것은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는 문제의 제기이다. 만약 수로가 구간의 딸 중에서 배우자를 선택하였다면 신화의 논리와 부합하지 않는다. 허황옥이 배에서 내려 들어올 때 비단 바지를 벗어 산령(山靈)에게 주는 것은 여성성을 확인하는 행위이며 결혼을 전제로 한 행위이다.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우리나라의 신화에서 여신(女神)이 필수이나 여기서는 인간화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러면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수로신화>는 처음에 수로의 강림 및 건국 사실을 설명하고, 그 다음 건국의 신성성과 수로의 정통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허황옥의 신분을 설명하고 신성한 결혼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신화로 보면 파행이다. 왜냐하면 신화에서 나타나는 ‘신성한 결혼'과 ‘등극'이 순서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사후 이적(異蹟)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보자. 허황옥이 불탑을 싣고 가락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는 불탑연기설화로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것이 묘하게도 수로대에 벌어진 사건이고 보면, 이미 기원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 왔다는 말이 된다. 가락에서 쫓겨난 탈해가 신라에 가서 알로 태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가락국기'는 <수로신화>, <탈해신화>, <불탑연기설화>가 한데 어우러져 비대화 되어있다. 그리고 <수로신화>에도 우리 신화에 나타나는 기마 민족의 흔적이 있다. 수로(首露)라는 말 자체가 ‘머리' 또는 ‘몰'과 통한다는 점에서 말(馬)과 관련되고, 수로가 죽어 수릉(首陵)이라고 한 것은 오늘날 민속현상으로 찾아지는 말무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재의 상징성
이 신화에서 중요한 소재는 아마 거북일 것이다. 거북은 고래로 수명이 길고 수륙양생이라는 면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주몽신화>에서 자라, <초공 본풀이(무가)>에서 거북(용왕)이 다 같은 것이다. 또 거북은 그 모양으로 인하여 동양에서는 우주적인 심상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스스로 자기의 집을 짓고 사는 모양으로 서양에서는 가정적(家庭的) 미덕이나 신중함, 보호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문학에서는 거북이 제비와 더불어 보은(報恩)의 상징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우둔함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신도에서 보는 현무(玄武)는 거북과 뱀이 어우러진 형태로서 북방의 호위신이다.
한편 거북의 머리는 남근(男根)처럼 생겨서 남근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거북의 머리를 ‘생명'으로 보는 것이나, 남근을 귀두(龜頭)라고 하는 것이 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 <구지가>를 원시인의 성욕(性慾)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논리는 이 상징성에 바탕을 둔다.
구지가의 성격
이 신화 속에 삽입된 <구지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구지가>는 4구체 향가와 비슷한 것으로 수로를 맞이하기 위하여 부른 집단적 , 주술적인 4구체의 무요(巫謠)이다. 그래서 <영신군가(迎神君歌)>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 땅을 파며 노래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노동요라고 보기도 한다. [구지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잡귀를 쫒는 주문, 영신제(迎神祭)의 희생무용에서 불려진 노래,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 거북점을 칠 때의 노래 등이 있다. 그러나 배경설화와 함께 보면 남녀의 격렬한 애정 속에서 한 인간의 출생을 상징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핵심정리
* 형식: 건국신화
* 주제: 수로의 강림과 가락국의 건국
* 성격: 문예적, 신화적
* 의의: ① 최고(最古)의 집단무요를 삽입가요로 가지고 있다.
② 일반적 신화형태에서 이탈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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