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死靈)
김수영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는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덜릐(正義)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수영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비판적, 참여적, 반성적, 자조적
어조 : 자유와 정의가 실종된 상황에서 침묵해야 하는 자신을 반성하는 어조 / 혐오감과 수치심이 느껴지는 자조적인 어조
구성 : 수미상관(반복과 변조)
1연 활자로만 존재하는 자유와 죽어 있는 나의 영혼
2연 침묵만 지키고 있는 자아에 대한 반성
3연 거짓된 고요와 평화에 대한 불만
4연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만
5연 죽어 있는 나의 영혼에 대한 자조와 자괴
제재 : 부도덕한 현실과 지식인의 죽은 영혼
주제 : 불의에 적극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자기 반성(自省) / 부당한 현실을 비판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자기 반성
표현 : 책을 작중 청자로 의인화
출전 : <달나라의 장난>(1959)
내용 연구
사령(死靈)[죽은 사람의 영혼(靈魂)이라는 뜻으로 정의와 자유가 활자로만 존재하는 부도덕한 현실을 비판하지 못하는 인간의 영혼을 말함.]
……활자[진리와 정의를 담은 책]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시적 화자의 소망]를 말하는데[행동을 촉구함]
나의 영(靈)[영혼]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자유가 억제된 독재 정권에 항거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
벗[인쇄된 활자, 책 속의 진리]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행동의 이상을 실천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부끄러움 - 비겁함과 소심함에 대한 자책]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결단력 없는 삶을 치욕으로 받아들임]
마음에 들지 않어라[침묵만 지키고 있는 자아 반성]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그렇게 만든 현실과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도치법)]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현실의 거짓된 평화]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소시민적 삶과 행동력의 상실에서 오는 거짓된 평화 / 부당한 현실에 대한 침묵]
그대의 정의도[현실과 동떨어진 책 속의 정의] 우리들의 섬세(纖細)도[나약함]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책 속의 진리와 같이 살지 못하는 현실로 자유와 정의가 부재하는 거짓된 공간, 타락한 사회]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죽음의 현실에 절망 / 소시민적 삶에 대한 혐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히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자조적인 감정의 집약]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죽어 있는 나의 영혼에 대한 자괴감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죽은 영혼에서 깨어나자는 강한 의지를 반복을 통해 보여줌 - 비판적 지식인의 자기 반성(반어법) /수미상관의 수법을 통해 무기력한 삶에 대한 반성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며 독자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을 촉구함.]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자유와 정의가 활자로만 존재하는 부도덕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자신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현실 세계의 부도덕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행동하지 못하고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분노는 결국 현실과 자신 모두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현실에 뛰어들어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겠다고 다짐해 보기도 하지만, 그 행동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수반하는 것임을 아는 화자는 다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라며 절망하고 있다. 이 시는 화자의 솔직한 자기반성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지식인 모두의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1
일반적으로 김수영의 작품은 정직과 사랑과 자유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세 개념은 별개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상보적(相補的)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는 독자에 따라 정직으로 자유와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자유로써 정직과 사랑을 포괄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핵심어는 ‘자유’이다. 그런데 그 자유는 시인이 일상 생활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의 활자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근대 민주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규범 가운데 하나인 자유가 활자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비민주적 사회라는 지적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화자는 자유가 억제된 독재 정권에 항거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을 죽은 것으로 여긴다. 흔히, ‘예언적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작가와 시인은 독재자의 부도덕성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다. 그러나 현실은 독재 정권에 기생하여 개인의 부귀와 영달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사회이다. 자유를 말하는 벗 앞에서 고개 숙이고 있는 화자는 자신의 비겁함을 고백한다. 이것은 자신의 비겁함과 소심함을 자책하는 의미로 읽힌다.
화자가 파악하고 있는 현실은 자유와 정의가 부재(不在)한 거짓된 공간이다. 거짓된 공간은 외면적인 고요로 위장되어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따라서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수반한다. 이런 현실에 화자는 절망하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희망하는 자유와 정의가 보장된 사회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일까? 제 1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면서 종결되는 이 시의 결구는 화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 그것은 나와 우리의 영혼이 죽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음으로써 현실 개혁의 운동에 앞장서자는 비판적 지식인의 솔직한 자기 반성의 태도이다. 이런 자기 반성적 태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자유와 정의는 책 속의 관념에서 현실의 가치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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