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강국은 '우수한 IT(정보기술)를 보유한 나라'를 뜻하는 말이다.
한국에서의 사용
2000년대 이후 많은 한국인이 자국을 가리켜 부르는 찬사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이 IT, 즉 정보 기술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앞선다."는 뜻이다. 실제 당시 IMF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새로운 신산업을 찾던 김대중 정부는 그에 따른 일환 중 하나로 IT 업계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키웠고, 덕분에 2000년대까지 한국은 확실히 다른 나라 대비 많이 빠른 정보화 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경쟁국 대비 10여년 정도 빨랐던 정보화 시대의 진입은 이후 한국이 여러 산업에서 앞서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시절 IMF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서 IT 산업이 부각되면서 대대적으로 네트워크망이 개설되고, 국민PC 사업 등을 통해 가정용 컴퓨터가 대거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정보화 시대에 진입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전에도 시도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말 인터넷 네트워크망 기초를 쌓은 바 있었다. 허나 당시엔 시대적 한계로 대중화되기엔 한계가 있었다. 문민정부 시절에도 인터넷 인프라의 건설과 보급에 주력하였지만 이 당시에는 인터넷과 PC통신의 느린 속도, 그리고 이용요금이 종량제로 인해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았고 야간정액제 조차 1997년 4월 1일에 시행됐기 때문에 전파되는데 한계기 있었다.
국민의 정부 들어 ADSL 기반의 초고속 인터넷을 보급함으로써 한국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2001년 8월에 특집기사 ‘초고속 인터넷의 미래’에서 한국의 ADSL 성공에 대해 상세히 보도하고 한국을 세계 1위 초고속 인터넷 국가로 평가했다. 앞서 OECD도 5월 ‘신경제에 관한 OECD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을 세계 1위로 인정했었다. 이 때문에 당시 한국이 IT산업의 ‘테스트 베드(Test Bed)’로 떠오르며 IT 관련 장관들과 세계적인 IT기업 CEO들의 방한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 시절 IMF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기치 아래 제시한 방향이 위기에 민감한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서 벤처기업붐으로 대표되는 민간사회의 대대적인 관심과 투자로 이어졌고, 정부 차원에서도 주요국 가운데서는 선도적으로 전자정부(e-government) 시스템 구축을 시작한다. 덕분에 2020년대까지도 상당수 나라에선 수기와 우편으로 처리해야 하는 웬만한 행정, 민원 처리를 이미 이때 컴퓨터로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당연한 소리지만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엄청난 인적, 물적, 시간 절약 효과를 가져왔고, 인터넷 대중화에 따른 검색과 포털 시장의 성장은 한국 사회를 기반 정보가 넘치는 정보화 시대로 진입시킨다.
또한 이 당시에는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이 현저히 빨라서 이 당시에는 인터넷 사용률이 70%대에 달하는데다가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이라는 나라에 갔다가 동영상도 보기 힘든 느린 인터넷 속도와 업무처리 수준에 실망하는 일도 이때부터 빈번해지게 되었다. 이를 가리켜 공무원들이 'IT 강국'이라는 용어를 홍보 차원에서 쓰기 시작했으며, 언론과 매스미디어에도 소개되면서 국민들 역시 널리 쓰는 말이 되었다.
당시엔 대중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통용되던 단어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2010년대 들어선 정치권이나 언론사, 공적인 자리 등에서 주로 쓰는 단어가 되었다. 실제 2010년대 이후 한국의 IT 역량이 이전보단 내려오면서, 2020년대에 들어와서는 칭찬의 의미가 아닌 대한민국 IT 환경의 문제점이나 갈라파고스화 등을 역으로 비꼬아서 쓰는 반어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참고로, 2010년대 중반에 관련 학계 기준으론 IT에서 ICT(정보통신기술)로 용어가 변경되었기 때문에 IT 강국이라는 말 자체가 지금은 정확한 단어는 아니지만,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IT가 통용되고 있는지라 그냥 쓰는 경우가 많다.
김대중 정부, 정보 고속도로 세계 최초 건설
김대중을 경제적으로 평가한다면, 미국의 하버드대학 경제학 교과서로 쓰였던 ‘대중 경제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이다. 그는 경제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 시절에 김영삼 정권의 무능에서 시작된 ‘IMF 경제 파탄 위기’ 라는 초유의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했고, 무역 적자 상태를 무역 흑자 상태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성공한 경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대중이 정보통신 산업의 기초를 튼튼하게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이 글로벌화가 되면서 한국이 세계적인 디지털 선도 국가로 자리 메김하고, 정보통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의 삶까지도 모두 디지털 정보 사회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 모든 기초 인프라를 김대중 정부 시절에 만들어 놓았다.
21세기에 한국이 IT선진국으로 세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 초반에 미국도 망설이던 Information Highway를 세계 최초로 전국적으로 깔았고, 미래 산업에 적극적으로 집중 투자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당시 세계 최초로 ‘디지털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전자 정부’를 건설하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는 일본을 추월하는 대한민국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김대중, 초강력 정보화 산업 국가의 토대 마련
2001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에게 거액의 비싼 돈을 주고, 한국의 미래 산업 개발 보고서를 요청했다. 그리고, 2001년 06월 30일 도착한 110 페이지 분량의 ‘위기를 넘어서, 21세기 한국 비전’ 이라는 보고서를 토대로 정보화 통신 기술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 미래 한국의 장기적인 먹거리로 정보통신 IT 강국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는 IMF 금융 위기 상태라서 국가적으로 상상도 못할 만큼 어려움에 직면했던 시기이다. 2001년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오찬을 하며 의견을 나눴다. 그는 2001년 한국 방문 당시 한국의 15년 후를 예측하는 보고서를 냈다. 그의 보고서에는 “한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있다. 저임금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종속국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경쟁력을 확보하고 세계 경제에서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는 선도국으로 남을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이 앞서 겪은 “잃어버린 10년” 실수를 답습하지 않을 것을 촉구하며, “인터넷과 새로운 통신 서비스의 공공 활용을 확산시키는 것이 국익을 창출하는 길이다”고 조언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그의 조언 대로 실천했다. ★ 또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강경한 전쟁광이었던 미국 행정부를 설득했고, 남한 단독으로 남한 홀로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서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남북 간 화해 협력과 IT 교류 협력의 물꼬를 텄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문화 강국의 꿈, 한류 문화, K-POP의 태동, 바이오 산업 육성 등의 미래 선도 산업의 기초 초석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미리 닦아 놓았다. 미래 산업 육성의 발목을 잡을지, 계속 앞으로 나아갈지, 이제, 그 다음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삶은 고난과 인내, 극복의 연속인 ‘굴곡의 대하 드라마’였다. 대권 4수(四修) 끝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 그는 지식 정보 강국 구현에 매진했고, 정보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82년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었고, “만일, 국가를 경영하게 되면, 지식 정보 강국을 만들겠다!” 라고 다짐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산업 혁명 시대에 근대화 지체로 100년 동안 고생을 했다. 정보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 산업은 미리 앞서 나가자!” 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IT와 관련해 “정보 강국의 토대를 마련하자!” 라고 선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는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 정보화 사회로 나가고 있다.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 정보 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 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이다. 벤처기업을 적극 육성하여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벤처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 문제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라고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 곧바로 범국민 정보화 운동을 전개했다. ‘사이버코리아21’ 운동을 시작으로 ‘e코리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집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07월 24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벤처기업 (주)비트컴퓨터를 방문했다. 대통령 취임 후 첫 기업 방문이었다. 그는 이날 "21세기는 각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벤처기업과 전문 중소기업 발전이 더욱 중요하다. 정부는 이를 위해 벤처기업의 창업에서 성장까지 과정을 적극 지원해 육성할 계획이다" 라고 밝혔다. ‘IMF 금융 위기’ 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투철한 기업가 정신과 도전정신, 창의력을 내세운 젊은이들이 벤처 기업에 도전해서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2월2일 각 부처 장관들에게 “앞으로 장관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가 인터넷과 전자 우편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 정부 정책을 알리는 양방향 소통을 통해 전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정부가 앞장 서야 한다” 라고 지시했다. 2001년 02월 25일 정부중앙청사에서 과천청사를 연결하여 사상 첫 ‘영상 국무회의’를 열었다. 국무위원들이 정보화에 대한 자극을 주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게 최초로 ’전자정부 시스템‘을 본격 개발 추진했다. 2001년 01월 29일 민관합동의 ‘전자정부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2002년 11월 13일 ‘전자정부’를 완성하고, 청와대에서 ‘전자정부 기반 완성 보고 대회’를 갖었다. 전자정부는 행정 혁신의 획기적 수단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전자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근대화 이후, 한국이 일본을 앞지른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의 IT 산업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정부(2008-2013)가 ‘정보통신부’를 없애자, 김대중 대통령은 탄식했다.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 살릴 정부 부처를 폐지하다니, 그 사고가 의심스럽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추진한 ‘정보 뉴딜 정책’은 경제 위기를 정부 주도의 정보 통신 분야 육성을 통해 정면 돌파한 사례로 꼽힌다.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발표한 '사이버 코리아 21'은 향후 4년간 118조원의 생산 유발 효과를 일으켰고, 2002년까지 10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결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유엔(UN)이 발표하는 전자 정부 지수는 2002년 15위에서 2011년 1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세계 경제 포럼(WEF)의 네트워크 준비 지수는 2002년 20위에서 2011년 12위로 상승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11월 06일 초고속인터넷 1,000만 돌파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날 치사를 통해 “이제 우리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5천년 역사에 처음 있는 세계 일류 국가 도약의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토대로 계속 노력해 나가면 가까운 장래에 세계 일류 국가의 꿈을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감을 가집시다. 세계 최선두의 지식경제 강국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갑시다!” 라고 당부했다. 정보화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1000만 정보화 교육’을 함께 실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남 신안 하의도 섬마을 소년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빗길을 하나씩 건넜다. 그리고, 2009년 08월 17일 오후 1시 43분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향년 85세. 그의 삶은 뜨겁게 타오르는 횃불과 같았다.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 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 전두환 8억 달러 흑자, 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 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 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 등이다. 김대중(1998~2003) 대통령은 김영삼(1993-1998) 정부로부터 1997년 IMF 경제 파탄 상황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5년 동안에 846억 달러라는 최고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으니, 경제 운영을 매우 잘 한 것으로 평가된다.
2001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당시 '부품소재 전문기업 육성 등에 관한 특별 조치법' 제정과 함께 2010년까지 모두 2조원을 투입한 결과, 2010년 부품 소재 수출은 2001년 대비 3.7배 증가한 2천 290억 달러로 집계됐다. 2010년 우리나라의 부품 소재 세계 시장 점유율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제치고 2001년 세계 10위에서 2009년 세계 6위(점유율 4.6%)로 상승했다. 2001년 ‘부품 소재 개발 정부 지원법’이라는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완제품 중심의 생산 체제에서 부품과 소재 개발에 역점하고, 정부가 이의 산업화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01월 01일 신년사에서 “2002년을 국운(國運) 융성의 해로 만들자!” 라고 강조한 후, ‘재료 연구소’를 경남 창원에 확대 운영하여 부품 소재 기술 관련 분야의 연구 기술 개발 업무를 적극 지원했다. 그 후, 한국의 수출 상품 내용이 완제품 중심에서 부품 소재 중심으로 무역 구조가 건실화 되었다. 2005년을 정점으로 부품 소재 산업이 전체 산업의 무역 수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커졌다. 2007년에는 364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고, 전체 산업 흑자 143억 달러의 2.5배 수준에 달해 수출 산업의 주력으로 부상했다. 그 후, 부품 강국인 일본(日本) 회사가 한국 전자 부품 기술을 배우러 오고 있다. 1990년대까지 전자 부품에 관한 한 일본(日本)은 자타 공인 세계 넘버(number) 원(one)이었다. 이런 일본 회사들이 한국(韓國)의 핵심 부품 기술을 라이선싱하거나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 한국 부품 업체의 기술 경쟁력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라보게 강해졌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세계 정상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도 한국산 부품이 없으면, 고급형 전기차 제조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이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출한 ‘위기를 넘어서, 21세기 한국 비전’ 이라는 보고서를 통해서 한국이 미래의 선도국가가 되기 위한 여러 제언을 했는데, 지금 보아도 새삼 그의 혜안에 놀랄만한 내용이 많다. 먼저 그는 생명공학과 정보통신 기술은 경제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두 분야의 강력한 힘은 서로 융합되어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이러한 융합이 건강서비스, 자가진단, 첨단 의료기술 분야 등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보통신 기술분야(IT)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가진 우리의 기술력과 인프라,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위기에서 확인된 바이오 분야의 경쟁력이 K-방역의 성과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요인들임을 고려한다면, 그의 예측이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 앨빈 토플러는 수출의 중심이 기존의 제조업에서 영화나 TV 프로그램, 제약 연구, 방송 경영 등 무형 자산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역설했다. 2020년 방탄 소년단이(BTS) 빌보드 차트 수위를 차지하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상 4개 부분을 수상했다. 그리고, 넷플릭스에 선보인 한국의 드라마들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제안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다. 한국은 미국. 일본. 유럽을 목표로 삼아 단숨에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변신했지만, 그 이후에는 따를만한 검증된 모형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富)의 미래는 지식재산에서 창출될 것이므로 지식재산의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이와 관련된 국제협상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의 지식재산 보호 수준이 획기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지식재산의 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받고 보호받아야만, 창의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책적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의적 특허 침해에 대한 3배 배상을 적용한 것이나, 특허권자의 생산능력을 초과한 부분의 침해에도 배상 원칙을 확립한 것 등은 정당한 보호를 통해 지식재산이 제값으로 거래되고 투자되는 지식재산 금융투자 시장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2020년 한국은 세계 5대 특허청 회의의 회원국으로 건강한 글로벌 지식재산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특허권자의 보호와 글로벌 리더십, 토플러가 지식재산에 대해 강조한 내용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한국이 미래를 선도할 것이라 했다. 모든 나라에 위기일 수밖에 없는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한국의 가능성과 기회를 확인했고, 우리가 미래를 선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품게 됐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고, 상상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그는 남겼다. 미래를 상상하는 힘은 결국 지식재산이라는 권리로 체화되기 마련이다. 지식재산을 더욱 각별하게 인식해야 할 이유이다. ★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1982년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컴퓨터에 의한 정보화 시대를 예견하면서 세계 최고의 미래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미래사회가 정보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은 수천 년에 걸쳐 진행됐지만,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은 300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제3의 물결’인 정보화 혁명은 20-30년에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 처음으로 재택 근무, 전자 정보화 가정 등의 용어가 출현했다.
집권 초기인 1998년 6월18일 청와대에서 빌 게이츠와 손정의씨를 만났다.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그날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한국 경제가 살아나갈 길이 무엇인지 물었다. 손 사장이 대뜸 말했다. ‘첫째도 브로드밴드, 둘째도 브로드밴드, 셋째도 브로드밴드입니다. 한국은 브로드밴드에서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빌 게이츠 회장도 동의했다. 나는 정보통신부에 초고속 통신망을 빠른 시일 안에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손정의 회장의 기억도 비슷하지만 좀 더 구체적이다. 손 회장이 몇년 뒤에 기자들에게 설명한 내용은 이랬다. “김 대통령이 한국이 망할 거 같다면서 직설적으로 조언을 구했다. 나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첫째 브로드밴드, 둘째 브로드밴드, 셋째 브로드밴드.’ 빌 게이츠도 동감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두 사람이 모두 그렇게 말하면 한번 그렇게 해보겠다’고 말하더니 ‘그런데 브로드밴드가 뭔가요?’라고 물었다.” 손 회장은 “일주일쯤 뒤 한국 정부가 초고속 인터넷 정책을 발표하는 걸 보고 한국이 인터넷에서 세계 최고가 될 것임을 알아챘다”고 덧붙였다.
강력한 대통령 의지를 담은 정보화 정책은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2000년 12월, 전국 144개 주요 지역을 광케이블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하는 정보고속도로를 개통했다. 1999년 37만가구에 불과했던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는 2002년 10월 1천만가구를 넘었다. 2001년 말 기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은 100명당 17.1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로 올라섰다. 송희준 교수는 “초고속 통신망은 일종의 고속도로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깐다고 해서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건 아니다. 자동차가 달리도록 해야 한다. 김 대통령은 그걸 성공적으로 했다. 굉장히 싼 가격으로 국민이 초고속 인터넷을 쓸 수 있게 하고 학생과 군인, 주부, 노인을 대상으로 무상 정보화 교육을 하는 등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 투자했다. 세계가 놀란 인터넷 사용자 폭발은 그렇게 나왔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박선숙씨는 이것이 김대중 정부만의 공은 아니라고 말했다. 박 전 수석은 “김영삼 정부 때 정보통신부를 발족하고 정보화추진 기본계획을 세웠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두환 정부 때 전자교환장치(TDX)를 도입해 피시통신이 가능해졌다. 그 씨앗을 활짝 피운 게 김대중 정부”라고 말했다. 디제이의 공은 국가 경쟁의 성패가 정보화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이 사안을 대통령의 어젠다로 끌어올려 직접 챙기고 집중 투자를 한 것이다.
디제이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했다. 군사독재의 오랜 감시 아래서 중요한 메모는 꼭 손으로 쓰는 습관을 들였다. 국정노트에 꼬박꼬박 손글씨로 정책을 정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바꿀 세상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감옥에서의 많은 독서와 전문가 조언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긴요한 자질을 키웠다.
인터넷 사용자 2,500만, 기반시설 구축으로 첨단 정보화 기틀 마련
김대중 정부의 5년을 IT 관점에서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터넷 5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정부에서도 정보통신 산업은 미래 산업으로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정책이 수립되거나 집행되지는 못했다. 그저 세계적인 IT화 조류에 편승해 정보통신 정책을 추진한 면이 강했다. 반면, 김대중 정부는 출범할 때부터 IT 선진화의 청사진을 그리고 정책을 구체화 했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 김대중 대통령은 후보시절 1인 1PC 시대 실현, 중‧고교에 정보화 과목 배정, 효율적인 전자정부 구현, 개인의 사생활 정보보호,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등 구체적인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5년의 정보통신 산업을 되짚어봤다.
인프라 투자 주도, 혁명적 변화 가져왔다.
김대중 정부가 진행했던 여러 가지 정책 가운데서 IT 정책은 햇볕정책과 더불어 훌륭한 공적으로 꼽힌다. 두 분야 모두 이전 정부와는 차원이 다른 변화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현재 인터넷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정부의 인터넷에 대한 투자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당시 ‘창조적 지식기반 국가의 미래상’을 만들어간다는 큰 틀을 짜고 ‘사이버코리아 21’이라는 정보화추진 2차 계획을 수립했다. ‘사이버코리아 21’의 주요 내용은 △인프라 확충 △DB 확보 △산업 육성이었다. 특히 인프라를 지식정보화 사회의 기반으로 인식하고 정보통신망의 고속화‧고도화를 적극 추진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5년 후인 2002년에 100배 빠른 인터넷을 구현한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인프라를 지식정보화사회의 기반으로 인식
김대중 정부는 출범 당시 2001년 인터넷 가입자 1천만 명 시대를 열고 98년에 33.8Kbps였던 보편적 서비스의 속도를 2002년에는 2Mbps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골자로 한 정보통신 4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2001년 국내 인터넷 가입자 수는 2,438만 명, 초고속 인터넷 이용가구 수는 781만에 이르러 목표를 훌쩍 뛰어넘었다. 2002년 6월말 기준으로 가입자 2,565만 명에 초고속 인터넷 이용가구 921만을 기록했다.
당시 정보통신부 정보화기획실 나승식 서기관은 “종합적인 시각에서 DB구축, 설비 투자, 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인프라 측면에서 강해지게 됐다”고 말했다. 나 서기관에 따르면 2002년까지 정보통신망의 고속화‧고도화에 배정된 예산만 10조 4천억 원 규모였다.
인터넷 정책은 크게 인프라와 콘텐츠로 구분해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대중 정부시절 인프라 부분은 목표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부작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인프라에 적극 투자한 결과, 생활 속에서 그 효과가 빛을 발했다는 점은 당시 높게 평가받았다.
인프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콘텐츠도 조금씩 꽃을 피우고 있는 단계였다. 한국인터넷이용자포럼 대표였던 한양대학교 윤영민 교수는 “3~4년 전만 하더라도 콘텐츠도 없는데 인프라만 깔면 뭐하냐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깔아놓은 인프라로 인해서 우리는 드디어 제대로 된 콘텐츠라는 것들의 혜택을 맛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을 겪어왔기에 미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3~4년 전과 비교하면 당시의 모습은 혁명적인 변화였다.
인터넷이 가져다준 믿기지 않는 변화
김대중 정부가 구축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정보화의 성과는 사회 곳곳에서 나타났다. 단순히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콘텐츠가 많아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이들은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한 분야로 공공기관을 꼽았다. 공공기관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대국민 서비스를 개선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인터넷을 활용한 것이다. 한 예로 정부에서는 해마다 공공혁신과제 우수사례를 선정했는데 99년과 2000년에는 IT와 관계가 있는 사례가 전무했다.
그러나 2001년에 신청한 600여건의 혁신 우수사례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정보기술과 관련된 것이어서 이 분야의 전문가가 심사위원에 합류하기도 했다. 특히 본선에 올라온 30건 사례가운데 약 40%가 정보기술 기반의 혁신사업들이었다. 2002년에는 이 비율이 60%로 높아졌다. 정부기관의 혁신 사례 가운데 절반 이상이 온라인을 이용한 사업들이었다.
이런 변화는 중앙부처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나타났다. 경북 달성군에서 농작물 전자상거래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이 달성군에 있는 것으로 느낄 정도로 고품질의 그래픽을 이용했다. 또 부천에서는 버스 정류장에 다음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고 몇 분 뒤면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간 부문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강의를 듣고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저렴하게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전화나 자기 PC 화면을 보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직원들과 회의를 할 수도 있었다. 이 또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고속인터넷 구축 경험 수출로도 이어져
김대중 정부에서 구축한 인프라는 세계 각국 기업으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모뎀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용자가 훨씬 많은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고속 인터넷 망이 깔린 우리나라 네트워크 장비와 콘텐츠 제공업체들이 자사 제품이 이상없이 운영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우리나라가 수많은 인터넷 장비와 애플리케이션, 콘텐츠들의 시험무대가 됐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시험무대가 됐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었으나, 이로 인해 국내 IT기업들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한발 앞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등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부의 주도로 짧은 시간에 초고속 인터넷 환경을 구축한 것은 세계 각국의 부러움의 대상이 됐으며 각종 통신 장비를 수출할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동남아 지역에 국산 ADSL 장비들이 수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KT는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한 경험과 국산 ADSL 장비를 한데 묶어 베트남, 중국 등에 수출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초고속 인터넷의 전사회적 확산을 기반으로 한 첨단 정보화의 실현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당시 OECD 전자정부 워크숍에서 한양대학교 윤영민 교수가 전자정부를 주제로 한 발표를 한 내용에 대해, 참석한 다른나라 관계자들이 발표한 내용들이 실현가능하냐는 의문을 보일 정도로 우리나라의 인터넷에 대한 기반 기술이 앞서 있었다.
IT산업 경쟁력 높이는 토대 마련했다
김대중 정부는 전국 어디서나, 국민 누구나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정보통신 인프라를 구축했다. 초고속 인터넷 가구당 보급률을 보면 한국은 54.3%로 영국(0.8%), 일본(6.3%), 미국(13.1%) 등의 나라들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 기간 동안 정보 소외계층의 인터넷 이용도 수십 배가 늘어났다.
물론 미흡한 점도 있었다. 일반 사용자들이 생활 속에서 인터넷을 좀 더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 부족했고 사회‧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선도적인 응용기술을 제대로 개발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정부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과제들 또한 안정된 인프라 위에서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초고속 인터넷 부문의 전략적인 투자로 정보이용의 저변을 확대하고 정보통신 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인터넷 정책은 많은 성과를 남긴 것으로 평가됐다.
새로운 세상, 인터넷을 인정하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화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 새로운 공간에서 이용자들의 권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오프라인에서 그 세계를 어떻게 규정할지 원칙을 정하고 이것을 기초로 한 필요한 법률과 관습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 정부에 쏟아졌던 비판과 질책은 이 과정에서 출발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졌다는 데서 비롯됐다.
국민의 정부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나 이 분야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의 대답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화 공간, 새로운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다”였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라도삼 박사는 이 같은 정부의 입장에 대해 우리 정권이 그동안 ‘문화’라는 분야를 어떻게 다루어왔는지에 이미 그 해답이 나와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해방 이후에 제대로 된 문화정책이란 것이 없었다. 문화를 정치 이데올로기의 선전 수단으로나 쓰던 상황에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기자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정보통신부가 정작 중요한 문제들에서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정보문화센터라는 사이버 경찰을 앞세워 인터넷 공간과 맞부딪히면서 규제에만 매달려 왔다”고 지적했다.
문화연대 이동연 사무차장은 “인터넷이라는 변화된 문화환경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적재산권 문제가 불거지고 개인의 알권리를 놓고도 서로 다른 견해가 대립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용자 권리는 뒷전, 규제에만 바빠
수많은 네티즌들과 시민단체, 학자들은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인터넷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이용자 권리를 지켜준 데는 관심이 없고 부처 이기주의와 행정편의를 중심으로 각종 제도와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꼽았다. 이 때문에 실제 소비자인 네티즌의 의견이 정책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권적 측면에서도 위험한 기획들이 많았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비판의 중심에는 정보통신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정통부가 정보사회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몫 챙기기에만 바쁘다는 원성은 이미 하루이틀 지적되고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소비자보호원 강성진 박사는 “한마디로 정책의 과잉이었다고 본다. 정부에서 세계 최초라는 여러 법률을 만들었지만 이러한 법률들이 시장의 활성화나 사업자들의 불이익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법적 영역을 확보하거나 기구 설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꼬집었다. 그는 전자상거래내용법을 예로 들면서 “그 내용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정부의 시책을 못 박고 위원회의 존재 근거만을 만들어주고 있다. 전자상거래와 관련해서 가장 잘못된 것들을 압축해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국민의 정부의 인터넷 정책은 ‘기반을 구축하고 사회적으로 흐름을 바꿔놓은 것은 크게 평가할 만하지만 그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 노력은 부족했다’는 성과와 한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인터넷 정책은 이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5‧6공화국 시절에도 정보통신 산업이 미래 산업이었다. 전 세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비하려는 준비가 다분이 추상적이었다.
능동적인 IT 정책 추진
김영삼 정부는 이보다는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정보화 계획을 추진했으나 이것이 스스로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통신부 나승식 서기관은 “김영삼 정부의 정보화 추진은 93년 미국의 엘 고어가 주창한 ‘인포메이션 하이웨이’에 자극받아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IT 인프라 확충에 뛰어든 것에 동참하면서부터”라고 평가했다.
이로 인해 94년에 초고속 정보통신망구축기획단이 생겼고 이 때부터 정보화 정책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 기획단에 재경원, 예산처, 행자부, 과기부, ETRI, 전산원까지 다 참여하고 있었는데 95년 말 정보통신부가 탄생하자 96년에 정보화 기획실로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당시 기획단에 참여했던 나 서기관은 “김영삼 정부 때는 외국의 정책을 모방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이 저렇게 나가고 다른 모든 나라들도 다 하니까 우리도 해야 된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부터였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하면서부터 IT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정부는 빠르게 변해가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96년부터 2000년까지 실행키로 했던 제1차 정보화촉진 기본계획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93년 3월 2차 기본계획인 ‘사이버코리아 21’을 발표했다. 이 정책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93년 이후 미국의 장래를 위해 지식정보사회에 대비한 10대 분야별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SW개발, 정보인프라 조기 확충 등에 집중 투자하기로 한 것에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 회복’ 목표 아래 빠르게 성장
‘사이버코리아 21’은 인프라 확충, DB 확보, 산업 육성이라는 세 분야에 역점을 둔 정책이었다. 특히 IMF가 생기면서 정보화를 통해 경제를 뒷받침할 방안을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것이 ‘사이버코리아 21’을 만든 계기 중 하나였다. 특히 인터넷 인프라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전 사회적인 정보화 분위기를 만들면서 IMF로 모든 분야가 침체되는 가운데서도 IT 분야만은 고속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나승식 서기관은 “‘사이버코리아 21’을 내놓으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놓은 것을 계기로 사회 전 분야가 이를 따라오게 됐다. 완전히 민간에 맡겨놓았던 나라들에서 투자가 위축됐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경기침체로 운영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기업들이 IT 기술에 눈을 돌린 것도 한 몫을 한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버코리아 21’의 정책 기조에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국민의 정부가 정보기술을 중요하게 인식하기는 했지만 결국 경제를 재건하고 산업기반을 첨단화시키는데만 주목했다는 점에서 김영삼 정부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김영삼 정부의 강봉균 장관과 현 정부 초기의 안병엽 장관이 모두 경제기획원 출신이었다”며, “정부가 정보통신부 장관에 IT 전문가를 배치하지 않고 경제전문가를 내세운 것은 IT 분야에서 경제개발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그 결과 정책 전반에서 공급자를 중심에 놓게 됐으며 이는 이용자의 권리를 축소하고 규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는 것이다.
새로운 청사진, ‘e-코리아 비전2006’
정부는 2002년 3차 기본계획인 ‘e-코리아 비전2006’을 내놓았다. 국민의 인터넷 활용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국제 협력에 적극 나서 21세기 지식정보 사회의 글로벌 리더로 도약한다는 비전이 핵심내용이었다.
정통부 나승식 서기관은 “지금까지 인프라 확충에만 집중하다보니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그것이 내 생활에 어떤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잘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이제는 사용자가 좀 더 풍족하게 인터넷을 쓰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수요자 입장에서 편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등본은 대부분 공공기관과 금융기관, 공공기관과 공공기관 사이에서 필요한 것인데도 내가 그것을 발급받아서 다른 쪽에 제출해야 한다. 이런 불편을 없게 하겠다”는 것이 나 서기관의 설명이었다.
이에 따라 ‘e-코리아 비전2006’은 정부가 어떤 좋은 시스템을 구축했는가가 아니라 국민이 얼마나 편리한가라는 측면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온라인 민원 서비스 확산, 정보화를 통한 정부업무의 지속 혁신, 재정 및 사업 과학기술 행정의 정보화 확산, 복지‧환경 행정서비스의 확대, 교육‧문화정보 서비스의 고도화, 정보화를 통한 외교‧사법 및 안전관리 업무의 효율성 제고 등 공공분야에 크게 역점을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당시 정부는 이와 함께 동북아 협력을 통한 세계시장 선도, 국제기구에서 주도적 역할 수행, 글로벌 정보격차 해소 지원, 국제 IT 인프라 구축 확대, IT 기업 해외진출 지원 강화 등 글로벌 정보사회를 향한 국제협력 강화에도 방점을 찍었다. 이를 위해 연도별 실행계획 및 세부과제 관리계획을 만들어 수시로 점검하고 2006년까지 약 70억 원을 투자한다는 구체적인 추진전략도 세웠다.
새로운 의사소통 시대에 어울리는 의식 필요
나승식 서기관은 “이번 정책이 또다시 내년에 수치상의 목표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수위는 달라져야 하겠지만 기본 골격은 흔들리지 않아야 된다는 점에 신경 썼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정보화의 실생활 적용이 가장 앞서 있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외국의 모델을 참고할 수 없기에 국내외의 모든 전문가들의 의견을 총망라해서 만든 것이 바로 ‘e-코리아 비전2006’이라고 했다. “남들은 이제 고민을 시작하고 있는 것들을 이미 다 가져가고 있는 상태에서 한 치원 앞으로 내다보고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새로운 정책을 내세우기보다 정부와 IT 담당자들의 마인드가 바뀌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충고했다.
한국인터넷이용자포럼 대표였던 한양대학교 윤영민 교수는 “민간 영역과 공공 영역의 경계, 개인 사이의 경계. 조직과 조직과의 경계가 쉴 새 없이 무너지고 있는데 유독 정부나 정책 담당자들이 그 상황에 잘 적응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새로운 의사소통 공간에 맞는 새로운 규범, 새로운 관습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 안되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
정부의 의식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정권이 큰 힘을 쏟고 있는 전자정부 추진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함께한 시민행동의 김영홍 정보정책 2팀장은 “각급 기관이나 자치단체의 마인드를 보면 홈페이지만 있다고 전자정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 정부가 임기 안에 꼭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