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사 흐름
년 도 | 사 건 | 내 용 |
1860 | 동학창시 | 서세동점, 최제우(경주) * 1864년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대원군이 처형 |
베이징조약 | 영불의 북경점령, 러의 연해주 획득(우리나라와 국경선이 맞닿는 계기) | |
1863 | 고종즉위 | 흥선대원군 집권 [경 고 임] |
1866 | 병인박해(6月) | 천주교 금압령, 프랑스 선교사 9명 처형 |
제너럴셔먼호사건 | 미국인 프레스톤 | |
병인양요(8月) | 프랑스 로즈호 강화도 점령(한성근의 문수산성, 양헌수의 정족산성) | |
1868 | 메이지유신 | 정한론 대두←일본의 근대화(막부타도,입헌군주제,봉건제타파) |
오페르트도굴사건 | 독일인 주도 다국적 범죄단체조직: 서양에 대한 쇄국강화 | |
1871 | 신미양요 | 어재연ㆍ어재순 형제, 광성진ㆍ갑곶진, 미국 로저스제독 |
척화비건립 | “병인작 신미립” 강한쇄국 의지 | |
1873 | 대원군하야 | 최익현의 상소 |
1875 | 명성황후정권성립 | |
운양호사건 | 춘일호사건 → 운양호 사건 | |
1876 | 강화도조약 | 신헌 - 구로타, 통리기무아문 설치 |
1882 | 임오군란 | 제물포조약(외국군대 주둔, 태극기 사용), 상민수륙장전(청의 내정간섭 강화) |
조미수호통상조약 | 최혜국대우조항ㆍ관세조항 최초 | |
1884 | 갑신정변 | 한성조약(조-일), 텐진조약(청-일), 신정부강령14개조 [갑신한텐] |
1885 | 거문도사건 | 러의 남하대비, 중립론대두(유길준, 부들러) [임ㆍ거ㆍ 러] |
1894 | 갑오농민전쟁 | [삼복보 고백황장전집 교궁청갑 공주2차] |
청ㆍ일 전쟁 | 일본승리(시모노세키 조약,1895) *러일전쟁(포츠머스조약) | |
갑오개혁 | 교정청 → 군국기무처, 홍범14조, 개국기원 | |
1895 | 춘생문사건 | 미국공사관 피신실패, 삼국간섭 |
을미사변 | 명성황후 시해 | |
을미개혁/을미의병 | [을미군 단종건 태우소],단발령이 계기 | |
1896 | 아관파천 | 러ㆍ일 협상 [베로니] |
열강의 이권침탈 | [미운 영은 일직 독당] | |
독립협회 | 입헌군주제(중추원), 만민공동회(헌의6조) | |
1897 | 대한제국 | 광무개혁“구본신참”, 전제왕권강화 |
위에서 아래로 개혁: 갑신정변, 갑오개혁, 광무개혁 아래에서 위로 개혁: 동학농민운동(농민), 독립협회(지식인), 만민공동회(서울소시민) 청의 종주권 부인: 강화도조약, 갑신정변, 갑오개혁, 마관(시모노세키)조약 [강갑세키] 입헌군주제 주장: 초기개화파, 갑신정변, 독립협회, 헌정연구회 [독신개헌] 입헌공화제 주장: 신민회, 대한광복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실현) [임신복] |
● 흥선대원군 집권과 개혁정치
등 장 |
안으로는 세도정치로 사회모순이 격화, 밖으로는 열강의 도전으로 위기의식 고조 철종이 급서하자 고종이 12세로 즉위, 국왕의 생부인 대원군이 섭정하여 정권을 잡음 대원군의 집권: 고종즉위(1863~1873년), 임오군란(1882), 갑오경장(1894) [경고임] |
개 혁 정 책 |
≪ 왕권 강화책 ≫ ① 인재등용: 세도가문의 축출과 당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사색 등용 ② 비변사 혁파: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회복(=정치와 군사 분리, 상대적 왕권강화) ※ 의정부와 삼군부 → 왕권 약화, 비변사 → 왕권 더욱 약화 ③ 대전회통ㆍ육전조례 편찬 ④ 서원정리(왕권+애민):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용서하지 않는다. 하물며 서원은 선현에게 제사지내는 곳인데 어찌하여 도적이 숨는 곳이 되겠느냐?” 47개소만 남김. 만동묘가 있던 화양서원(폐단이 가장 심함) 등을 철폐 → 국가 재정 확충 ⑤ 경복궁중건: 영건도감 설치, 경비조달(당백전 발행, 원납전ㆍ결두전 징수), 양반의 묘지림까지 벌목 ⑥ 청을 통해서 서양의 화포기술을 도입(개화운동×, 서양에서 수용×) |
≪ 애민정책ㆍ민생 안정 ≫ ① 전정: 양전사업 실시, 토지겸병 금지 → 지방관과 토호들의 반발 (※지계발급은 광무개혁)[무지계] ② 군정: 호포법(동포법) 실시 → 인두세였던 군포를 호세로 전환하여 양반에게도 군포 징수(군역의 완전한 평등실현) ③ 환곡: 사창제 실시 → 주민이 자치적으로 운영(사수라는 인망있는 사람을 임명), 지방관의 반발 ④ 도고의 매점매석 금지, 검정가죽신과 큰 갓을 줄이고 도포를 늘이는 것 장려 * 양전사업은 경기도내에서만 부분적으로 실시, 사창제 후에도 폐단은 있었으나 국가 재정수입은 증가 |
|
대 외 정 책 |
≪쇄국정책강화≫ ① 병인박해(1866.6):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관대(러시아 세력의 남하견제), 천주교도들의 실책으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신부9명과 수천 명의 신도처형) ②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7): 평양민군이 미국의 상선을 불태움. 박규수의 대응 ③ 병인양요(1866.8): 병인 박해 때 프랑스 신부 처형과 통상 요구를 구실로 침입(로즈 프랑스) 한성근(문수산성)ㆍ양헌수(정족산성)활약,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왕조 의궤 등의 문화재약탈 ④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 서양에 대한 배척과 쇄국정책 강화 (*왕오천축국전 직지심체요절과 함께 프랑스에 현존, 약탈 X) ⑤ 신미양요(187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침입(로저스 미국), 어재연 형제(광성진과 갑곶) ⑥ 척화비건립(1871):“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강한 쇄국의 표현, 기정진등이 상소하여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음 |
※ 통상요구
- 영국(로드암허스트,최초,1832)→ 프랑스(세실,1845)→ 러시아(1846)→ 독일(1866)→미국(제너럴셔먼호, 1866)
※ 근대 민족운동의 성격과 배경
• 이양선 출몰, 영ㆍ불의 북경점령 • 러시아 국경선(연해주획득) • 천주교 유포ㆍ동학 확산 • 세도정치의 부패와 삼정의 문란 |
위 기 의 식 서 세 동 점 |
• 위정자(대원군): 쇄국정책→ 반외세 봉건적 개혁적 • 양 반(유 생): 위정척사→ 반외세 봉건적 보수적 • 선각자(중 인): 개화사상→ 외세의존 반봉건적 개혁적 • 하층민(농 민): 동학사상→ 반외세 반봉건적 개혁적 |
※ 어재연 장군 帥자기
일명 수자기(帥字旗)로 알려진‘어재연 장군기’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이 사용한 군기로써,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이끄는 미군이 광성보를 점거하고 전리품으로 강탈된 후 그동안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애나폴리스 소재)에 소장되어 있었다. 문화재청은 당초‘어재연 장군기’의 영구 반환을 추진하였으나, 미국 해군사관학교 측이 관련법령이나 절차상의 사유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우선 장기대여하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
● 위정척사운동
1. 개념: 바른 것(전통적인 성리학적 사회질서)은 지키고, 사악한 것(서양문물ㆍ일본문화)은 물리치자 !
2. 사상적 배경
이기론 → | 주기론 → 실학 → | 중농 → 애국계몽 |
중상 → 개화사상 | ||
주리론 → 위정척사사상 → 항일의병운동 → 무장독립전쟁 |
3. 주도인물
이항로 | 척화주전론(병인양요), 화서아언, 내수외양, 의병조직주장 |
기정진 | 양물금단론 [납량사의][노사문집]“저 교활한 오랑캐는~” |
홍재학 | [개화반대론][만언척사소]-통리기무아문혁파,5위제부활 |
이만손 | [영남만인소]⇒조선책략비판 |
최익현 | [오불가소1876], 을미개혁 때 단발령반대,을사조약체결 때 의병[창의토적소1905] |
곽기락 | 상소문-외국의 교(敎)는 즉 사(邪) |
4. 위정척사운동 전개 [ 통 개항 개 항 ]
시 기 | 주요운동 | 주도인물 | 운동내용 |
1860년대 | 통상반대운동 | 이항로, 기정진 | 척화주전론,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 지지 |
1870년대 | 개항반대운동 | 최익현, 유인석 | 왜양일체론, 개항불가론(최익현 5불가소) |
1880년대 | 개화반대운동 | 이만손, 홍재학 |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 영남 만인소ㆍ만언척사소 |
1890년대 | 항일의병운동 | 유인석, 이소응 | 무력투쟁에 의한 항일운동 |
5. 한계: 긍정적(반침략ㆍ반외세), 부정적(역사발전 가로막음)
① 조선 왕조의 전제적 정치체계 ② 지주 중심의 봉건적 경제체제
③ 양반중심의 차별적 사회체제 ④ 성리학적 유일사상체제
6.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운동 비교
위정척사운동 | 개화운동 |
성리학의 주리론(이기일원론)에 기초 | 북학파의 실학사상 계승(주기론) |
유생층 중심 : 보수적(전통적) 유생층 | 중인층과 개혁적 양반 |
성리학 이외의 사상배격(봉건적) | 개항이전부터 활동(반봉건적) |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유지=지주전호제의 긍정 | 외세 의존적이며 민중의 지지 미약 |
* 영남만인소“수신자 김홍집이 가지고 와서 유포한 황쭌셴의 사사로운 책자를 보노라면 어느새 털끝이 일어서고 쓸개가 떨리며 울음이 북받치고 눈물이 흐릅니다. 청(중국)과는 200년 동안 교류하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새로 친하게 지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일본은 우리에게 매어 있던 나라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러시아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입니다” - 일성록(1881) - |
* 최 익 현(이항로의 제자) - 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려 대원군을 하야시킴(만동묘ㆍ서원을 다시 흥기시킬것 주장, 원납전 폐지를 주장) - 개항반대론자로 왜양일체론의 5불가소 상소, 을미개혁때 단발령 반대 - 을사늑약때“포고팔도사민”격문을 발표, 임병찬과 전라도 지방 의병장, - 1906년 대마도(쓰시마섬)에서 순국 |
● 한말 의병
을미의병(1895) | 을사의병(1905.11) | 정미의병(1907) | 한일합병의병(1910) |
근왕주의, 봉건주의 ← | → 반봉건적, 반제국주의(공격대상: 일본군) | ||
• 원인: 명성황후시해 단발령 • 단발령철회, 고종해산 권고로 모두해산 (근왕주의, 봉건주의) • 의병장: 유생(봉건적) 문석봉(보은)최초 유인석(제천) 박준영(여주) 이소응(춘천) 허위 (적성) |
• 원인: 을사늑약체결 • 본격적 항일항전으로 발전 → 병오의병(1906) • 의병장: 유생 > 평민 원용팔(원주) 정용기(영천) 민종식(정주) 신돌석(영해, 평민) 최익현(전라, 동족과X) |
• 원인: 군대해산, 고종퇴위 • 항일의병의 전쟁화 (해산군인의 가담으로 전투력 강화, 본격적 전쟁양상) • 의병장: 평민 > 유생 신돌석(경상도, 평민) 홍범도(삼수갑산, 평민) 안중근(간도) 이범윤(북간도) |
• 원인: 주권 상실 • 남한대토벌작전 ⇒만주연해주 무대변경 • 마지막의병 채응언 체포 (1915)까지 의병투쟁 국내 면면히 이어감 |
1. 임진왜란
1) 의병장 : 북인(조식학파)에서 다수 배출, 유생 > 전직관리, 승려. 평민×
- 정문부(함경도): 현직관리로써 의병장이 됨, 북관대첩비에 업적을 기록
- 유 정(포로 송환), 곽재우(최초의 의병장, 김시민과 함께 진주대첩, 홍의장군이라고 불림)
- 권율(행주대첩), 조헌(금산), 신립(청주), 김천일(진주혈전)
2) 의병은 농민이 대다수(의병장은 유생이 대다수), 자발적(중국의 원조×, 국왕의 권유×)
2. 항일의병
1) 의병장 : 유생 > 전직관리, 군인, 평민 (승려×) ☜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보수적 유생층이 주도,
2) 한계성 동학농민군 참가세력이 가세
- 양반 유생층이 봉건적 지배질서의 유지 고집 → 대다수의 농민의병과 유생의 갈등유발
-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이 상실되어 국제적으로 고립
3) 을미의병(1895)
⑴ 원인: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 단발령의 반포
⑵ 의병장: 유생이 대부분 - 허위(선산)는 지속적으로 활동
⑶ 위정척사사상의 전통을 계승, 유생층이 주도, 항일의병의 발단
⑷ 단발령의 철회와 국왕의 해산권고조조치로 대부분 해산, 활빈당, 영학당 등으로 계승되어 발전
⑸ 동학잔당의 항일의병: 남학당(1898, 방성칠의 난, 제주도), 영학당(1899,전라도),
동학당(1900,황해도), 활빈당 항쟁(1900~1905, 전국적, 반봉건ㆍ반외세, 대한사민논설13조 №125)
4) 을사의병(1905)
⑴ 원인: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⑵ 의병장: 평민의병장의 등장(신돌석)
① 최익현: “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 → 대마도에서 순국
② 민종식: “일본을 토벌하고 5적을 몰살하여.. ”, 홍산에 의병을 집결 시킨 후 홍주성까지 점령
③ 신돌석(태백산 호랑이라 불림): 부하인 김상렬에게 피살. 평민의병장 → 홍범도, 차도선
5) 정미의병(1907)
⑴ 원인: 고종의 강제퇴위, 군대해산,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
⑵ 해산 군대의 의병화: 의병의 전투력 강화 → 항일 의병 전쟁화, 제천의병 대학살(1907)
⑶ 의병 전쟁의 확산: 전국 확산(경기도의 김수민, 황해도의 홍범도 등) → 간도와 연해주까지 확대
⑷ 서울 진공 작전(1908)
① 의병연합부대의 형성(13도 창의군): 이인영(총대장), 허위(군사장). 양주집결(1907.1)
② 독립군으로 자처: 각 영사관에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
③ 서울진공작전의 전개 →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자 불효는 불충이라고 가버리자 해산, 실패
6)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의 전개(1909. 9~11) → 위축
→ 호남의병전쟁, 국외(간도, 연해주)로 이주
→ 국내에서 유격전의 전개 : 마지막 의병장이 채응언이 1915년에 체포
● 개화사상
1.개화파의 형성 (이기론 →주기론 → 실학 → 중상 → 개화사상)
① 북학파의 실학사상 ② 청의양무운동 ③ 일본의 문명개화론 ④ 중상학파 (중농X)
2. 초기 개화론자(19C)
1) 주장자: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강위, 최한기, 이규경
2) 주장내용: 입헌군주제, 외국어교육, 국한문혼용, 우편제도, 종교자유, 공장제도, 철도ㆍ증기선 도입
3. 개화사상의 성숙(1860~1870)
1) 박규수(제너럴셔먼호(1866)사건을 겪으면서 강화도 조약시에 문호개방의 필요성 강조)
2) 오경석(역관, [해국도지][영환지략] 소개), 유홍기(중인, 의관, 백의정승, 급진개화에 영향)
4. 개화정책 추진
1) 박문국 설치: 한성순보(갑신 정변후 중단→85년 다시 재개, 1886년 한성주보로 바뀜)를 간행.
2) 일본에 유학생 파견. 우정국 설치, 기기국(병기제조), 전환국(신화폐주조)
5. 개화당의 시련 : 차관 도입 실패, 민씨 정권의 탄압
6. 개화파(1870) [온 도 영하 민 집 중 식]
온건 개화파(수구당, 사대당) | 급진 개화파(개화당, 독립당) | |
중심 인물 |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조영하, 민영익 |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
성 격 | 집권 세력의 일부, 민씨 정권과 결탁 | 소장파 관료 |
정치적 입장 | 친청 사대 정책 | 정부의 사대 정책과 청의 간섭 반대 |
개혁 방안 | 동도 서기론에 바탕을 둔 점진적 개혁 | 변법개화론(문명개화)을 바탕으로 급진적 개혁 |
개혁 모델 | 청의 양무 운동 =화혼양재(日) =중체서용(中) | 일본의 메이지 유신→갑신정변 주도 |
7. 개화파 인물
1) 김옥균: [기화근사]를 저술, 충의계(1878) 조직- 비밀결사체로 유생, 내시, 궁녀, 보부상등이 포함
2) 유길준: 81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 보빙사 일행으로 미국에 파견된 한국최초의 국비유학생
- [서유견문]저술: 국한문혼용체, 개화사상 체계적 정리제시, 각 나라마다 독자적인 개화길 있다.
실상개화ㆍ허명개화ㆍ개화단계설(미개→반개→개화)로 소개, 정치(법치민주주의)ㆍ경제(자유자본)
- 사회진화론 처음소개, 거문도사건 직후 중립론 주장(1895)
- [社會說]: 한성순보, 근대적 상업체제 전환 강조
- 최초 근대적 국어문법서[조선문전 1895]저술, [대한문전 1909] 재저술
3) 어윤중: 청ㆍ일 전쟁 시 총리 교섭 통상사무, 서북경략사(1883), 탁지부대신(1894,갑오개혁)
● 조선책략과 김홍집 내각
1. 조선책략(1880年대): 일본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조선책략(황준쎈)ㆍ이언(정관응)갖고 들어옴
- 러시아 남하저지 & 조선독립을 위해 親중국ㆍ結일본ㆍ聯미방의 4국 동맹을 주장
- 고종은 조선책략에 관심을 보였고, 개화세력은 정부의 개화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출판보급 함
- 야소교(기독교)의 周公ㆍ孔子등 성현 모독 부분에 유생들 반발
- 영향: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에 영향, 위정척사운동 가열(이만손,이항로,최익현,기정진 상소)
2. 김홍집 내각(명성황후 시해 후 등장한 내각) [ 군 홍 삼 을 ]
군국기무처 설치 | 홍범14조 | 삼국간섭 | 을미개혁 |
1894 | 1894.12~1895.7 | 1895.7~1895.10 | 1895.10~1896.2 |
친일내각 | 친일내각 | 친러내각 | 친일내각 |
대원군참가 | 홍범14조 | 3국 간섭 후 | 을미사변 후 |
제1차 | 제2차 | 제3차 | 제4차 |
3. 개화시책에 영향을 준 책
- 일동기유(김기수) 이언(정관응, 기술+정치제도 모두수용) 조선교육론(서광범, 개화ㆍ자강의 필요성)
- 해국도지(위원, 포대ㆍ무기제작), 영환지략(오경석이 해국도지와 함께 갖고옴)
- 지구전요(최한기, 문호개방 필요성), 인정(최한기, 실학과 개화사상 교량적 역할)
● 강화도 조약
1. 배경
1) 서원정리에 대한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의 하야(1873)
2) 통상개화론자의 대두: 문호개방을 위한 내적 준비가 되어있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개항이 불가피함을
주장(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 최초 통상요구(영국), 최초 서구 조약체결(미국 1882)
3) 일본의 정한론 대두로 외교단절 → 운요호 사건(1875, 춘일호사건 = 함포외교)
4) 체결 반대: 대원군일파ㆍ최익현(오불가소) vs. 찬성: 민씨정권ㆍ박규수ㆍ오경석등 개화파
2. 강화도조약(조·일 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 1876) < 신헌 - 구로타 >
1)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 일본과는 평등한 권리 ⇒ 청의 종주권 부인, 일본의 침략을 용이
2) 부산 이외의 2개항 개항 ⇒ 경제적(부산,1876), 군사적(원산,1880,러시아견제), 정치적(인천,1883)
3) 일본국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 ⇒ 영해주권 침해, 해안 측량권을 인정
4) 민간무역활동에서 관리의 무간섭 ⇒ 조차지 설정, 일본상인이 마음대로 장사를 할 수 있게 됨
5) 항구에서 범죄시 모두 일본관원이 심판 ⇒ 영사재판권(편무적 치외법권)을 인정
3. 조 · 일 수호조규부록(1876.7)
1) 일본 외교관의 여행자유,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 유통 허용(일본상인 특권인정) *국내시장은 갑오개혁
2) 개항장에서 거주 지역을 설정(부산10리, 그외100리) → 수호조규속약 시(개항장50리, 2년후 100리)
4. 통상장정( =조·일 무역 규칙, 1876.7 → 1883년에 수정)
1) 일본인은 모든 항구에서 쌀과 잡곡을 수출(무제한 양곡 유출)
2) 상품에 대한 무관세: 강화도조약에는 관세규정이 없었으나 83년 조약 개정 후에는 10%로 규정
3) 일본정부 소속의 모든 선박은 무항세
5. 개정된 조ㆍ일 통상 장정(1883.7) < 민영목 - 다케조에 >
1) 수입세 선박세를 10%로 규정, 개항장 밖에서의 과세는 일체부인
2) 방곡령 실시시 사전예고 조항(1月전 통고) → 방곡령이 반포 때 일본에게 배상금 지불의 근거가 됨
3) 조선 화폐에 의한 관세 및 벌금 납입
4) 최혜국 대우 규정 삽입 (※ 최초는 조·미 수호통상조약)
5) 임오군란 이후 혼란한 틈을 타 제물포 조약과 함께 조일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하여(82.7) 간행이정의 확대
(개항장 50리, 2년 후 100리)를 규정 하였으나, 1년후(83년) 일상인의 활동범위를 100리로 확대시킴
6. 평 가
1) 최초의 외국과 맺은 근대적 조약이나 불평등 조약
2) 관세조항이 없었으며(무관세ㆍ무항세), 최혜국 조항도 없었다.
3) 조약 시에는 거주지역 설정이 없었으나, 수호조규 부록에 규정 후 차츰 확대
4) 침략야욕을 내포하고 정치ㆍ경제적 예속화의 계기, 결국 침략의 발판을 용이하게 만들어준 사건
※ 각 국과의 조약체결 순서 [ 일 미 영 독 이 러 서 ]
일 본 | 미 국 | 영 국 | 독 일 | 이탈리아 | 러시아 | 프랑스 |
1876 | 1882 | 1882/1883(단독) | 1883 | 1884.5 | 1884.7 | 1886 |
최초ㆍ직접 | 청 알 선 | 직접ㆍ단독 | ||||
신헌-구로타 | 신헌-슈펠트 | 민영목-파커 | 민영목-자페 | 김병시-루카 |
- 영국(치외법권의 인정문제로 지연되었으나, 이듬해인 83년10월 청의 중재없이 단독으로 다시 체결,
아편수입문제로 미국보다 늦음), 독일(순조롭게 체결)
- 프랑스(천주교의 선교인정 문제로 늦음, 천주교 선교의 인정을 공식적으로 선언)
-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2, 임오군란의 결과, 조선에서 중국 상무 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 개화정책과 미국과의 조약
1. 개화정책
1) 외교사절파견 (1 2 조 영 보)
① 1차수신사(1876, 일본, 김기수 [일동기유]저술)
② 2차수신사(1880,일본, 김홍집[조선책략]유포)
③ 3차수신사(1882, 박영효ㆍ김옥균)
- 임오군란 후 사과의 뜻을 표하기 위해 사죄사 파견, 태극기를 (처음) 사용
- 일본에서 차관교섭을 벌이고, 구미외교사절과 접촉
④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 1881, 일본, 어윤중ㆍ박정양ㆍ유길준)
⑤ 영선사(1881, 청 , 김윤식, 기기창(1883)
⑥ 보빙사(1883, 미국, 민영익ㆍ유길준, 농무목축시험장, 우편제도도입): 주미공사 방한의 답례로 파견
2) 관제 개편
① 의정부ㆍ6조와 별도로 통리기무아문(1881, 개화정책전담기구), 그아래 12사를 두어 외교ㆍ산업ㆍ군사등의 업무 분담
② 5군영을 2영(무위영ㆍ장어영)으로 개편, 별기군 설치(일본모방 신식군대)
* 별기군(왕친위병): 300(일반생도) + 100(사관생도←양반자제)로 구성 * 통리기무아문: 중국의 총리아문을 모방, 영의정이 총리대신 겸임, 임오군란 후 외아문인 통리교섭통상아문(외교ㆍ통상)과 내아문인 통리군국사무아문(군국ㆍ내무)로 세분 |
2. 조ㆍ미 수호통상조약의 체결(1882) = 서양과 체결한 최초의 조약
1) 배경: 조선책략의 유포(개항이후 1880), 청나라의 알선 (※ cf. 신미양요×)
2) 한 나라가 제3국 압박을 받을 경우에 서로 도와주겠다고 규정 - 미국은 단순 외교우의 표시로 해석
3) 치외법권(영사재판권), 최혜국대우(최초, 서양에 공통으로 인정한 불평등조약, 열강 이권침탈 근거)
4) 조차지설정, 관세조항 처음 규정(종가세10%, 사치품30%), 아편무역 금지규정, 홍삼밀매 금지
● 임오군란과 청의 내정간섭
1. 원인: 개화와 보수의 대립, 별기군에 비해 구식군대(2영=무위영, 장어영)의 차별, 이재선사건
2. 경과: 명성황후의 피신(=도봉소사건), 흥선대원군의 일시 재집권(첫번째 재집권)
3. 결과
1) 민씨 일파가 청에 요청으로 흥선대원군의 청압송, 적극적인 사대정책 실시 ⇒ 민씨 정권의 재집권
2) 제물포조약 체결(1882.7.17): “조선 - 일본”
- 손해배상. 일본공사관의 경비병 주둔 인정
- 3차 수신사(1882.9): 사죄단을 파견, 박영효가 사죄사로 가면서 태극기의 제작사용
(cf. 최초의 태극기 창안자는 4개월전 82년 5월 조미조약 체결당시 역관이었던 이응준이 처음제작)
- 수호조규속약: 일본공사관의 관리와 상인들의 행동구역을 넓혀주었다 (10→50리, 2년후 100리)
3) 조ㆍ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1882.7.10) “조선 - 청”
-‘조선은 청의 속국이다.’ 치외법권을 인정(불평등조약) ⇒ 반청감정 증대, 개화정책의 후퇴
- 청 상인의 특권 허용(10리→100리): 최혜국 대우로 인해 조약맺은 타국에도 동등하게 적용
- 청과 일본 상인의 충돌,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는 상대적으로 위축
- 청과 무역 성장세 급상(대일:대청=80:20 ⇒35:45)
4) 청의 내정간섭 강화, 통리기무아문의 폐지
- 군대주둔: 위안스카이가 병권을 장악하여 군제를 4영으로 개편, 조선 군대를 청국식으로 훈련시킴
- 고문파견: 마젠창ㆍ묄렌도르프(외교, 당오전 발행), 하야트ㆍ마젠창(세정), 원세개(군사), 천슈탕(경제)
5) 중립화론 제기: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벨지움식 중립화론을 제기
※중립화론 제기: 임오군란직후(1882,일본)ㆍ거문도사건이후(1885, 유길준,부들러), 러일전쟁 직전 고종의 영세중립화(1904.1.21) [ 임 거 러 ] |
● 일상과 청상의 경제침투
1. 일상인 경제적 침투 (간접수출, 소상)
1) 강화도조약 후 개항지를 중심으로 불평등조약의 특권을 이용하여 조선상인을 매개로하는 거류지무역
2) 조·일 수호 조규 부록에 따라 일본 상인의 활동 범위는 개항장으로부터 10리 이내로 제한
→ 임오군란후 1880년대 중반에는 활동 범위가 개항장 100리까지 확대, 외국상인이 내륙까지 진출
3) 중계 무역을 통해 영국산 면직물과 공산품을 가지고 와서 팔고 곡물, 쇠가죽, 금 등을 매입
→ 국내 식량의 부족과 쌀값 폭등, 국내 면직 수공업의 타격
4) 청ㆍ일전쟁(1894)승리 후 일본상인 조선시장을 독점적 지배
5) 아관파천 후 열강의 이권침탈, 러ㆍ일전쟁 승리후 본격적인 토지약탈ㆍ차관강요ㆍ화폐정리
6) 일본상인이 가지고 오는 상품은 조악품이 많았다.
7) 일본의 토지 약탈
- 청·일 전쟁 이후: 전주·군산·나주 일대에서 대규모의 농장을 반강제적으로 약탈하여 경영
- 러·일 전쟁 이후: 철도부지의 확보, 황무지의 개간,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설립(1908)
2. 청의 경제적 침투(직수출, 거상)
1) 조ㆍ청 상민수륙무역장정(1882)이 체결되면서 청상인의 활발한 조선진출 → 일본은 상대적으로 위축
2) 개항장 100리까지 활동 범위 확대. 이후 외국과의 조약을 통해 외국 상인들의 내륙진출도 점차 허용
3) 1892년을 기점으로 청ㆍ일 간 무역 거의 대등 → 청·일 전쟁의 간접적 원인 → 전쟁승리 후 일본상인 조선시장 독점(1894)
4) 텐진조약(갑신정변)이후 청의 위안스카이가 주차관 명목으로 서울에 남아 간섭, 차이나타운 설치
5) 국내 중계 상인과 국내 산업의 몰락: 서울 상인들은 철시로써 저항
6) 청상인은 거상ㆍ부상인으로 직수출(영국→상해→조선) (※日은 간접수출)
7) 수입품(영국산 면포)ㆍ수출품(주로 인삼과 해산물)
8) 1899년 한청통상장정이 체결되어 조청상민수륙장정은 폐기되고 청상인은 이전보다 많은 제약.
3. 일본의 재정 장악과 금융 지배
1) 배경 : 제1차 한일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다 파견
2) 전개
- 제일은행 설치(1878):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첨병 역할
- 농공은행 설립(1906): 전국에 설립된 지방은행 → 한일 병합 이후 동양척식회사의 업무를 대행 →조선 식산은행에 흡수
- 재정 정리 사업 : 식민 시설 유지를 위한 조세액을 증가
- 화폐 정리 사업(1905) : 재정 고문 메가다가 주도, 국내 중소 상공업자들에게 큰 타격
- 차관 제공 :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이후 내정간섭과 식민지 지배의 목적 → 국채보상운동(1907) 전개
4)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설립(1908) : 약탈 토지를 관리. 일본인의 이주 장려
4. 경제적 침탈에 대한 저항운동 = 경제적 구국운동
1) 열강의 경제 침략에 대한 대응 * cf.황국협회x
- 시전상인: 80년대 철시(시장없애기)로써 대항, 90년대 황국중앙총상회(상권수호운동)ㆍ종로직조사(근대적 생산공장) 조직
- 경강상인: 증기선을 도입(빼앗긴 운송권 회복 노력)→실패
- 개성상인: 인삼 재배 판매권을 침해당하자, 종삼회사를 설립하여 조직적 저항을 계획
- 객주, 여각, 보부상: 상회사(창신상회, 태평상회)를 설립(자본축적에 성공한 일부 상인들)
2) 근대적 회사의 설립
- 1880년대: 평양에 대동상회, 서울에 장통회사 등의 상회사가 나타나기 시작→점차 주식회사도 설립
- 1890년대 후반 이후: 대한제국의 상공업 진흥책으로 내국인 기업활동 활발
• 일본 자본가들의 해상과 육상의 운수업 독점에 대항해 민족 해운·육운 회사 설립, 증기선 구입
• 이권 침탈 이후 민족 철도, 광업 회사 등을 설립하여 민족 자본의 토대를 굳히고자 노력
3) 근대적 산업 자본의 성장
- 유기 공업: 서울에 조선유기상회(합자회사) 설립
- 면직물 공업: 대한직조공장, 종로직조사 등 직조 공장 설립
4) 금융자본에 대한 저항
- 조선은행(1896): 최초의 민간은행. 영업부진으로 폐쇄(1901)
- 한성은행, 천일은행 설립 → 화폐정리사업(1905)을 계기로 몰락 → 3.1 운동이후 삼남은행의 설립
5) 대한제국의 상공업 육성 정책: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농상회사가 설립
5. 조선정부의 대응
1)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1882), 보부상 보호를 위해 혜상공국 설치
2) 국내상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회사 건립유도, 기선회사, 이운사등 관영 운송회사 설립
3) 조일통상장정 및 시행규칙에 관세자주권, 곡물수출 사전통고조항 규정
● 갑신정변(1884)
1. 원인: 청의 지나친 내정간섭, 민씨 사대경향, 청불사변으로 주둔 청군 절반 철수, 일본의 지원 약속
2. 경과
1) 우정국정변 → 개화당 정부 수립: 개혁 정강 제정 발표
2) 신정부 강령 14개조 마련 (김옥균의 갑신일록)
- 청에 잡혀간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고, 청에 조공을 폐지 → 청과의 사대관계의 폐지추진(자주적) - 문벌을 폐지 →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 - 지조법을 개혁 → 조세제도의 개혁 (토지제도의 개혁×, 지주전호제는 인정 ← 민중과 유리) - 내시부를 없애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 - 내각의 강화, 탐관오리 엄벌 - 환상미는 영구히 면제 → 많은 문제점이 있는 환곡제도의 폐지 주장 - 규장각을 폐지 → 양반귀족문화의 제도인 규장각을 폐지하여 일반국민 중심의 신교육 실시 주장 - 혜상공국을 혁파 → 자유상업의 추진 - 급히 순사를 두어 두둑을 방지 → 경찰제 실시를 추진 -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근위대를 급히 설치 -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 → 재정의 일원화 추진 -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 → 입헌군주제 실시 주장 ⇒ 내각중심의 정치 실시 = 입헌군주제 추진 (≒ 독립협회, 갑신정변, 초기개화파, 헌정연구회) |
3. 결과 및 영향: 한성조약(조-일) + 텐진조약(청-일) + 청의 내정간섭강화 [ 갑 신 한 텐 ]
1)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3일 천하로 끝남
2) 한성조약의 체결(1884): 일본공사관의 신축비를 부담. 손해배상금 지불
3) 텐진조약의 체결(1885): 양국의 조선 주둔 군대철수, 파병시 미리 서로 통지, 일본은 청국과 동등하 게 조선에 대한 파병권 얻음 → 동학농민운동 때 청군과 일본군의 파병 근거, 일본의 국제적 지위 상승
4) 청의 내정간섭이 더 강화 cf.일본의 내정간섭 강화(×)
5) 개화세력의 위축 (정변이후 보수 개화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개화 운동은 상대적으로 위축)
6) 조선의 자주와 개화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4. 의의: 입헌군주제를 바탕으로 근대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근대적 정치개혁운동(갑신정변)
1) 정치적: 청에 대한 의례적 사대관계 청산,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려 함
2) 사회적: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함으로서 봉건적 신분 제도를 타파하려 함
3) 한계: 일본에 의존적, 토지개혁이 없어 민중과 유리, 위에서 아래로 개혁 ⇒ 농민의 지지X
* 갑신정변에 대한 분석 : 신채호 “궁중에서 일어난 지배층 내부의 일시적 활극”
박은식 “수재들이 일본에 이용당해 큰 착오를 저질렀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5.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구 분 | 임오군란(1882) | 갑신정변(1884) |
배 경 | 개화파(민씨)와 보수파(대원군)의 대립 일본에 대한 민족적 항거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 대우 이재선사건 |
온건개화(사대당)와 급진개화(개화당)의 대립 청의 내정간섭에 대한 반발 일본 공사의 지원 약속 청불 사변 |
과 정 | 구식군인과 도시빈민의 반란 ⇒ 정부고관살해, 일본공사관 파괴 ⇒ 청군의 진압 | 우정국 축하연 정변 ⇒ 신정부 강령 14개조 발표 ⇒ 청군의 개입 ⇒ 삼일천하 |
결 과 | 일본과 제물포 조약체결 청과 상민 수륙무역장정 체결 청의 고문파견 등 내정간섭 계기 일본의 한반도 중립화론 제기 |
일본과 한성조약 체결 청과 일본의 텐진조약 체결 청의 진압직후 내정간섭 강화 조러통상조약 체결 추진 |
공통점 | 조선에서의 청과 일본의 대립, 청의 내정간섭 강화, 개화정책 후퇴 |
● 동학의 추이와 성격 ㆍ 12개조 폐정개혁안
삼례집회(1892) | 삼례에 모여 1차 교조신원운동(최초의 집회), 탄압의 금지는 약속 받았으나 실패 | ||
복합상소(1893) | 40여명이 한성에 모여 2차 교조신원운동 → 교조신원 상소, 외국인철수 요구 → 실패 | ||
보은집회(1893) | 약 2만여 명이 보은에 모여 3차 집회, 탐관오리 처단과 제폭구민ㆍ반봉건ㆍ반외세ㆍ 척왜양창의 주장 → 정치적 색체 → 정부가 회유책과 강경책으로 진압 → 호우와 식량의 부족으로 자진 해산 |
||
고부민란(1894) | 정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 축출ㆍ만석보 파괴(1.16), 10여일 만에 해산 | 1기 | 1차 봉기 (남접) 정치적 반봉건 사회개혁운동 |
백산봉기 | 무장조직화, 창의문, 사발통문 | ||
황토현 전투 | 절정기, 전주 감영군(지방군)을 격파 (4.7) | 2기 | |
장성 황룡싸움 | 관군(홍계훈)을 격파하고 전주성 점령, 장태사용 (4.27) | ||
전주화약 | 청군(5.5)ㆍ일군(5.9)이 개입하자 정부가 휴전을 제의해 전주화약 성립 (5.8) | 3기 | |
집강소 설치 | 총본부인 대도소를 중심으로 전라도 군현 단위에 집강소가 설치 폐정개혁 12조의 추진 |
||
교정청 설치 | 온건개화파가 왕명으로 설치 (6.11) | ||
궁궐 침입 | 일본이 무력으로 경복궁 점령 (6.21) | ||
청ㆍ일 전쟁 | 텐진 조약이 배경(6.23) →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1895.3) | ||
1차 갑오개혁 | 군국기무처 설치(6.25) | ||
공주우금치전투 | 항일구국운동,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남접(정치)+북접(종교) → 대패 | 4기 | 2차 봉기 |
2차 갑오개혁 | 홍범14조(12) |
농민국의 폐정개혁 12개조 | ||
1. 동학도은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 ⇒ 정부는 동학을 심하게 탄압하여 왔다 | |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 ⇒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였다 | |
3. 횡포와 부호를 엄징한다 | ⇒ 봉건지배층에 대한 타파의지 | |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 ||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 ⇒ 신분제 타파의지 | 갑오개혁때 그대로 반 영 |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의 평량갓을 없앤다. | ⇒ 백정,기생,노비,승려,무당,판수,광대 | |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 ⇒ 봉건적 폐습폐지 주장 | |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 ⇒ 세금징수의 폐단 | |
9.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 ⇒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 |
10.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 ⇒ 많은 농가들이 부채를 지고 있었다 | |
11.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 ⇒ 일제의 침탈에 대한 항일감정 있었다 | |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 ⇒ 정부가 들어주기 가장 어려운 조건 |
1. 교조신원운동: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을 공인받고자 하는 합법적 운동
1) 삼례집회(1차, 1892): 최초의 집회, 탄압의 금지는 약속 받았으나 교조의 신원은 실패함.
2) 복합상소(2차, 1893): 40여명의 동학교도들이 광화문에서 교조시원을 상소 → 실패
2. 정치운동
1) 보은집회(3차, 1893) : 최초의 정치적 집회, 탐관오리 처단과 일본과 서양세력의 축출. 정부가
회유책과 강경책으로 진압 하였으며, 호우와 식량의 부족으로 자진 해산함.
2) 금구집회(1893): 전봉준, 서장옥 등 남접이 개최한 집회.‘보국안민’,‘척왜양창의’
3. 동학농민운동 전개: 농민봉기(민란)에서 항일운동으로 발전, 종교운동보다 사회운동의 성격이 강함
1) 제1기(고부민란): 정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축출, 만석보의 파괴, 10여일 만에 해산
2) 제2기(제1차 농민전쟁, 1894.3~4): 동학 농민 운동의 절정기(남접중심)
- 균전사(개간사업을 위해 파견한 관리)의 혁파
-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었던 시기 : 반봉건, 반외세적 창의문과 격문, 4대 강령 발표
-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1894.4.7) →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격파(4.23), 전주성 점령(4.27)
- 지휘군은 대개 동학인들이 맡았으나 참여자는 일반농민들이었다.
3) 제3기: 전주 화약(1894.5.8)과 집강소 설치(1894.6) ⇒ 폐정개혁안의 실천기
- 정부가 농민군을 진압할 능력이 없어 청에 파병요청, 청군 파병결정(1894.4.29): 아산만에 상륙(5.5)
- 텐진조약을 구실로 일본군이 조선에 군대 파견(1894.5.6/5.9): 인천에 상륙
-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받고,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여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음(1894. 5. 8)
- 집강소 설치: 총본부인 대도소를 중심으로 전라도 군현 단위에 집강소가 설치됨
• 동학의 민정기관, 농민자치 기구(*군사적 기능, 군사훈련은 담당하지 않음)
• 나주ㆍ남원을 제외한 전라도 52개군에 설치 = 전라도 등에 설치(충청도, 경상도 일대에도 설치)
• 폐정개혁 12조의 추진
4) 청·일 전쟁 발생(1894.6.23)
-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 거부
- 조선 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에야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교정청을 설치
-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 점령(1894. 6.21) → 갑오개혁의 발생(음1894. 6.25)
- 선전포고 없이 청군을 공격 → 청일전쟁을 일으킴 → 청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냄(1894. 9.26)
-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1895), 조선의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 → 청은 조선의 문제에 관여하지 못함
- 강화도조약, 갑오개혁과 함께 청의 종주권부인
5) 제4기 - 제2차 농민 전쟁(1894.10.21): 동학농민군의 재봉기. 남접과 북접의 연합
- 원인(정부의 폐정 개혁안 불이행, 일본의 경복궁 점거 → 청일전쟁 승리후 내정간섭 강화)
- 전개: 남접(전봉준)과 북접(손병희)의 연합 부대를 형성
- 결과: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11.11) → 농민군(김개남)의 청주성 함락 실패 →
양반ㆍ부호ㆍ관료ㆍ이서층으로 조직된 민보군에 의해 철저하게 괴멸
4. 성격과 영향 * 동학은 청의 군대에게 탄압을 받지 않았다.
1) 반봉건적: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였으나 성리학적 질서의 붕괴에는 기여
2) 반외세적, 민중적, 민족적 *조선왕조는 부정X
3) 잔여 세력이 영학당을 결성하고, 을미의병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
4) 전통적 민족적 신앙을 바탕으로 유교·불교·도교 물론 천주교의 교리까지 일부 흡수한 종합적 성격
5) 농민층의 의식성장과 조직력을 갖춘 정치적 지도층의 출현으로 민란의 국지성ㆍ분산성이 극복
5. 한계성
1) 근대적 사회의식으로 직결되지 못함 = 국가조직, 국가재정, 상공업, 과학기술 등은 없음
2) 지지 기반의 미약: 농민층 이외의 지지기반을 확보치 못하여 당시 집권 세력과 개화 세력이 모두 외면
남접(전봉준) | ① 전라도 ② 강경한 정책투쟁의 선호 |
북접(최시형, 손병희) | ① 충청도 ② 종교운동의 성격 ③ 최시형: 전봉준을 사문의 도적놈이라 비판 |
보국안민 창의문 (백산창의문): 반봉건적, 반외세적 |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중에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자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 무리를 쫒아 내몰고자 함이다... - 전봉준, 1894 - |
* 동학(1860, 경주, 최제우→최시형)[동경대전-한자]<포덕문,논학문,수덕문,불연기연> [용담유사-한글]<용담가,안심가,교훈가,권학가,도덕가,흥비가> ☞철학(주기론),종교(샤머니즘, 도교), 사상(인내천, 天人合一) ⇒ 외세배척, 양반사회부정 |
* 동학농민군의 4대 행동강령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②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라(보국안민) ③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반외세적) ④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반봉건적) |
* 전봉준 장군의 공초 “고부에서 기포한”, “고부민란 때 동학이 많았는가. 원민이 많았는가.”, “원통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민간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공포 함이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밤중에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
●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제1차 갑오 개혁 (1894) |
1차 김홍집내각, 군국기무처(온건개화당, 국왕간섭X, 초정부적) 개국기원사용, 8아문, 과거제 폐지, 신분제도 폐지(공사노비제도의 폐지 과부의 개가허용) 조혼 금지, 고문금지와 연좌제 폐지, 경무청 설치 경제: ①재정일원화(탁지아문관장) ②은본위제 ③조세금납화 ④도량형정비(척관법시행) |
제2차 갑오 개혁 (1984.11~1985.4) |
2차 김홍집내각: 홍범14조(최초헌법), 군대개혁은 소홀 [ 홍 군 의 관 교 사 지 ] 의정부의 8아문→7부, 지방관제(8도→23부, 소지역주의채택), 경찰권일원화 고종의 교육입국 조서발표(1895), 신교육실시와 관립학교 설립, 한성사범학교설립 군대의 통합과 일원화(소극적), 사법권독립(지방관은 행정권만, 재판은 2심재를 채택) |
을미 개혁 (1895) |
제4차 김홍집 친일내각 (*3차 김홍집내각은 친러내각, 삼국간섭) [ 을미 군 단 종 건 태 우 소 ] 군제개편(친위대2개,지방-진위대) 단발령, 종두법(광제원,지석영), 건양(개국기원→건양) 태양력, 우편사설치, 소학교령 공포(수업연한 6년의 관공립 소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 |
* 개혁기구 [ 강 통 갑 군 광 교전 ]
• 강화도조약 - 통리기무아문(1881) → 임오군란 때 폐지
• 갑오개혁 - 교정청(스스로설치 유명무실), 군국기무처 → 2차 갑오개혁 때 폐지(홍범14조)
• 광무개혁 - 교전소 (*교정소X)
* 화폐제도
• 1차 갑오개혁(은본위제 실시)→ 광무개혁(금본위제시도)
• 1905년 화폐정리사업
• 1905년 메가다(1차 한일 협약에 따른 재정 고문) 금본위제 확립
* 도량형 (=척관법)
• 1차 갑오개혁 때 통일
• 동시전(신라)→경시서(고려) → 평시서(조선) → 평식원(1902, 대한제국)
* 과거제도
• 신라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인재등용을 시도했으나 진골의 반발로 실패
• 고려시대 광종 때 시작하여 조선까지 실시되었으나 1차 갑오개혁 때 폐지
• 근대적 관리등용문은 군국기무아문에서 마련한 선거조례ㆍ전고국조례를 통해 문무반상의 차별을 없앰
* 연호추이
고구려 | 광개토대왕(영락) |
신 라 | 법흥(건원) 진흥(개국) 진평(건복) 김헌창(경운) |
발 해 | 대조영(천통) 무왕(인안) 문왕(대흥) 선왕(건흥) |
후고구려 | 궁예(무태-성책-수덕만세-정개) |
고 려 | 태조(천수) 광종(광덕,준풍) 묘청(천개) |
조 선 | 갑오(개국기원) 을미(건양) 대한(광무) 순종(융희) |
1.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정부에서 자주적 개혁추진을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갑오개혁을 추진
2. 갑오개혁(1894)
1) 1차 갑오개혁(음1894.6.25) : 김홍집 내각, 친일내각
-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킴
- 군국기무처의 설치 :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초법적 기구
2) 2차 갑오개혁(음1894.11.21) : 김홍집 내각, 더 친일내각
-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 더욱 본격화됨
- 흥선 대원군 퇴진 / 군국기무처의 “폐지” /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구성
- 홍범 14조의 반포 : 최초의 헌법적 성격, 고종이 공식 발표
* 홍범 14조 [홍 탁 끊고 분리] 1. 청의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과 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5. 의정부 및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백히 한다.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 조세법정주의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의 관할에 속한다.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근본을 확립한다 - 미실현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
3) 성과 : 내각의 권한 강화 = 입헌군주제의 추진(성공하지는 못함)
4) 한계 : 군사면에서의 개혁이나 농민들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음
3. 을미개혁(음1895. 8.24 ~ 양1896. 2.11) *삼국간섭→을미사변→을미개혁→을미의병→아관파천
1) 삼국간섭(1895. 4):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차지한 대련(요동 반도)을 러시아, 프랑스, 독
일이 개입하여 청에 반환하도록 요구 → 일본의 대련 반환 : 일본세력 후퇴, 조선에 친러 세력 등장
2) 제3차 김홍집 내각: 친러내각,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제휴하여 박영효를 축출. 이범진, 이완용 등용
3) 을미사변(음1895.8.20): 명성왕후를 일본 침략자들이 시해
- 결과 : 항일의병의 전개(을미의병), 김구의 치하포사건(1896)
4) 제4차 김홍집 내각(친일): 김홍집, 유길준 등의 친일 세력 중심
5) 춘생문사건(음1895.10.12): 고종이 친위대를 이용하여 피신하려다 실패. 친러, 친미파의 붕괴
6) 을미의병(1896.1)
7) 아관파천(1896.2.11):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러파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 친러 정권의 수립
4. 갑오개혁·을미개혁의 성격과 한계성
1) 자율적: 개화인사와 농민층의 개혁요구가 일부 반영, 신분제도의 폐지,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를
금납화, 외국어 학교 관제를 반포하고 한성 사범학교를 설립.
2) 타율적: 화폐제도 개혁 등 일본의 침략의지가 반영
3) 한계성: 군사제도 개혁이나 농민이 요구한 토지제도 개혁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아관파천과 열강의 이권침탈
1. 국제관계 흐름
청ㆍ일 전쟁(1894) → 마관조약(1895.3.23) → 삼국간섭(1895,3.29 러ㆍ프ㆍ독) → 을미사변(1895.8) → 춘생문사건(1895) → 을미개혁→ 을미의병 → 아관파천(1896, 친러내각수립) → 열강의 이권침탈
(최혜국조관 근거) → 독립협회(1896~1898, 이권침탈저지) → 대한제국(광무개혁)
2. 러•일간의 세력 균형 협상 [ 베로니 ]
베베르ㆍ소촌각서(러>일) → 로마노프ㆍ산현의정서(러=일) → 니시ㆍ로젠협정(러<일)
3.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 아관 파천을 계기로 본격화
국가 | 연도 | 이권의 내용 |
미국 | 1896 | 경인선 부설권(모스, 일본에 양도) |
갑산 광산·운산 금광채굴권 | ||
전등·전화·전차부설권(콜브란) | ||
러시아 | 1896 | 경성ㆍ종성 금광채굴권 |
두만강·압록강·울릉도 삼림 채벌권 | ||
프랑스 | 1896 | 경의선 부설권(일본에 양도) |
독일 | 1897 | 당현 금광채굴권 [ 미운 영은 일직 독댱 ] |
영국 | 1900 | 은산 금광채굴권 |
일본 | 1897 | 경인선 부설권을 미국으로부터 인수, 완공 |
1898 | 경부선 부설권(경인선, 경부선= 러·일 전쟁 목적) | |
1900 | 직산 금광채굴권(통상장정이 수정되면서 일본에게 최혜국대우 인정) | |
1903 | 경의선 부설권을 프랑스로부터 인수, 완공 | |
1904 | 경원선 부설권 |
* 마관조약: 청(이홍장) - 일본(이토히로부미) ⇒ 일본의 요동 점령이 러ㆍ프ㆍ독의 삼국간섭으로 좌절 ①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② 청국은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및 펑후 섬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 청의 종주권 부인(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노력) 강화도 조약, 갑신ㆍ갑오개혁, 시모노세키조약 * 청의 내정간섭 강화(임오군란, 갑신정변) ⇒ 청의 내정간섭 소멸(청ㆍ일 전쟁에서 패배하고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후) * 고문파견 • 임오군란(1892.청): 마젠창, 뭴렌도르프 • 아관파천(1896.러): 알렉세프(재정고문) • 1차 한일협약(1904.일): 메가다(재정고문), 스티븐스(외교고문) |
● 독립협회(1896.7.2 ~ 1899) (독립협회와 1년겹침)
1. 배경
1)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짐
2) 열강의 이권침탈 격화: 철도부설권(=교통·통신시설 부설권), 광산ㆍ산림채벌권
3) 러·일 협정의 체결: 베베르·고무라 각서,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 로젠·니시 협정
2. 독립협회의 창설
1) 서재필, 윤치호 등은 독립신문을 간행(1896.4)하고 독립협회를 창립(1896.7)
2) 공식기관지[대조선독립협회회보]발간, 정부의 지원으로 비공식기관지[독립신문] 간행
3) 구성(관료중심→민중중심): 서재필(급진개화파), 이상재ㆍ윤치호(온건개화파), 남궁억ㆍ정교(진보적 유학자)
3. 독립협회의 활동
자주국권 | 자주독립의 확인 자주적 중립 외교 전통문화계승 |
• 자주독립 정신고취: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하여 독립문 건립,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 • 만민 공동회 개최: 최초의 정치적 민중 집회 • 자주국권 운동의 확대: 러시아 절영도조차(빌림) 요구 저지, 러시아 재정고문철수, 한ㆍ러 은행 폐쇄, 프랑스ㆍ독일 광산채굴권 요구 저지 (주로 러프독 반대) |
자유민권 | 기본권 운동 국민의 권리 신장 (참정권 확대) |
• 신체 자유, 재산권 보호,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의 보장 • 국민 참정권 운동: 중추원을 개편하여 최초의 의회설립 추진 • 정부의 연좌법 부활에 반대하여 저지 |
자강개혁 | 입헌군주제주장 신교육 산업개발 |
• 입헌군주제 실시 추진: 민중과 개화운동의 결합(독립협회가 이전의 개화운동과 다른점), 황제권강화 주장, 유생ㆍ농민층ㆍ보부상의 지지X, • 관민 공동회 개최하여 헌의 6조(1898) 채택(백정 박성춘의 연설) • 중추원 관제 반포, 영국의 상원의원을 모방한 의회설립 추진(실패) • 개혁적 박정양 내각의 수립 |
* 참정권운동 - “종이 상전의 경제와 상정을 자세히 알아야 그 상전을 잘 섬길 터인데, 조선은 거꾸로 되어 백성이 정부와 관의 종이 되었으니”, “어찌 우습지 아니하리요” |
4. 독립협회의 해산(1899)
1) 원인: 입헌 군주제를 추구로 보수 관료 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함 → 보수세력은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추구한다고 모함하여, 결국 보수 세력에 의해 개혁적 박정양 내각이 붕괴 →대한제국에 의해 독립협회도 정식으로 해산. 수구파 내각 성립
2) 대한제국의 탄압과 독립협회의 해산: 황국 협회(보부상)와 군대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킴→ 3년 만에 완전히 해산됨(1899.3). (*cf. 황국중앙총상회: 시전상인 조합)
5. 독립 협회의 의의와 한계
1) 의의: 민중을 바탕으로 국권 수호와 민권 신장에 기여한 자주적 근대화 운동, 민중의 참정권을 강조
민중을 기반으로 한 운동이지만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지방의 유생과 농민층,보부상같은 소상인의 지지를 얻지 못함
2) 한계: 외세 배척 운동이 주로 러시아ㆍ프랑스ㆍ독일을 대상 ⇔ 친일ㆍ친미ㆍ친영적 성향이 매우 강함
군대란 외국침입을 막기위한 것이 아닌 동학이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여 자주국방에 대한 중요의식이 결여, 의병ㆍ동학을 비난,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결여.
3) 협회의 근대화사상은 이후 대한제국 말기의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 애국계몽사상으로 계승
* 중추원의 역사적 변천 고려(왕명출납), 조선(왕명출납ㆍ군사기밀), 대한제국(최초 국회설립단체), 일제시대(총독부 자문기관, 3ㆍ1운동 때까지 회합X) |
● 대한 제국과 광무개혁
1. 대한제국 성립
1)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 (※ 경복궁 X)
2) 환구단(원구단)에서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라 칭하여 자주국가임을 선포 →교전소(황제직속입법기구)와 사례소를 설치하여 개혁 작업에 착수
* 우리나라의 대표적 궁궐 1) 경복궁: 정도전이 이름을 지음, 대원군 복원 2) 창덕궁: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유산에 지정, 돈화문, 비원 3) 창경궁: 왕실의 오락장(왕실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이 창경원으로 만듦) 4) 덕수궁(경운궁): 최초 사회극장인 석주정이 있고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 장소였다. 5)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사저 |
2. 광무개혁의 추진
1) 성격: 구본신참 = 정치는 복고적, 경제는 근대적 (광무개혁은 동도서기, 중체서용과 같은 맥락)
민국건설(국민의 기본권보장이 아니라, 영ㆍ정조 이후 성숙되어온 소민 위주의 국가 건설)
2) 교전소의 설치(1897.3): 신구 법제의 절충과 새 법제 및 칙령의 제정을 위해 중추원 내부기구로 설치.
⑴ 구성: 보수파 각료(김병시,조병세,이완용) + 외국인 고문(그레이트 하우스) + 독립협회 인사(서재필,이상재)
⑵ 보수파와 개화파 간의 갈등 격화 → 독립협회 해산 후 황제 직속 입법기구로서 법전교정소(교정소)로 전환
3) 주요내용
정치ㆍ외교 | • 전제 왕권의 강화: 교정소라는 특별입법기구를 통해 대한국 국제 발표 • 궁내부 내장원 강화: 종래 탁지부에서 관할하던 업무를 궁내부로 이관 • 독립협회 탄압: 황국협회(보부상) 이용 • 자주적 외교: 북간도에 간도 관리사(이범윤)파견, 러ㆍ일 전쟁시 중립외교 선언 •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의 관할, 한ㆍ청 통상 조약 체결(1899):청과 대등 |
경제ㆍ산업 | • 양전사업: 근대적 토지 소유 문권이라 할 수 있는 지계발급(양지아문ㆍ지계아문) 전국토의 약 2/3인 218군에서 시행되다가 양전을 완료하지 못하고 중단. • 평식원 설치: 상행위에 대한 통제 강화, 도량형 관장 * cf. 탁지아문X • 상무사조직: 보부상과 육의전을 통합, 특권을 부여받은 상인단체로 영업세의 징수업무 • 근대적 공장 설립, 대한 철도 회사, 전화ㆍ전차, • 금본위제 시도, 백동화 발행, 1899년 만국우편 연맹에 가입 • 근대적 사회 복지시설 확충: 광혜원, 혜민원 • 이용익은 정부의 국고구실을 한 천일은행을 운영하고 중앙은행의 설립준비 • 한성판윤 이채연이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추진하면서 방사상 도로체계도입 |
군사 | • 원수부 설치(육군 헌병대 설치) *갑신정변(근위대),갑오(친위대),광무(원수부시위대) • 서울에 시위대, 지방에 진위대 증설, 황제호위 위해 친위대 증설 |
교육 | • 신교육령 발표(1897.10): 소학교ㆍ중학교ㆍ사범학교 설립 *교육입국조서 반포X • 근대적 실업학교와 기술학교 설립, 양잠기술발전 위해 잠업시험장 설치 |
3. 광무개혁의 한계
⑴ 복고적 개혁으로서 전제군주제의 강화 등은 오히려 전근대적인 면이 있었다
⑵ 독립협회 등 진보적 개혁운동을 탄압하였다.
⑶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국민적 결속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⑷ 위정척사파는 복고적 전제군주 강화를 목표로 한 광무개력을 지지O
● 근대개혁안 비교
갑신정변(1884) | 동학운동(1894) | 갑오경장(1894) | 을미개혁(1895) | 독립협회(1896) | 대한제국(1897) |
신정부강령14개조 | 폐정개혁안12개조 | 홍범14조 | 헌의6조(1898) | 대한국제9조 | |
호조(재정) | 탁지아문(재정) | 탁지부(재정) | 궁내부 내장원(재정) | ||
지조법 改 상환미X |
무명의 잡세폐지 토지평균분작 |
조세금납제 은본위제 교육입국 조서발표 |
[군단종건태우소] | 민회설치 중범죄공판 예산공포 |
중추원설치 양전사업,지계발급 신교육령반포 |
외세의존 쿠데타 |
외세의존배격 반봉건반제국적 |
청종주권x 타율적 |
갑오개혁의 연장 타율적 |
외세의존X 자율적 |
피상,허구적 자율,주체적 |
신분제도 타파, 조세제도 개혁 | |||||
재정개혁, 평등사회구현 |
갑신정변 신정부 강령 14개조 | 동학 농민군의 폐정개혁 12개조 |
1.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고, 청에 조공을 폐지 2. 문벌을 폐지 3. 지조법을 개혁 4. 내시부를 없애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 5. 내각의 강화, 탐관오리 엄벌 6. 환상미는 영구히 면제 7. 규장각을 폐지 8. 혜상공국을 혁파 9. 급히 순사를 두어 두둑을 방지 10.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근위대를 급히 설치 11.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 12.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반포(공포) |
1. 동학도은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와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 백정의 평량갓을 X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 10.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함 11.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
갑오개혁 홍범 14조 [홍 탁 끊고 분리] | 독립협회 헌의 6조 [공 탁 중] |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자주 독립 2. 왕실전범 제정, 대위계승과 종척의 분의를 밝힘 4. 왕실사무와 국정사무 분리 5. 의정부 및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백히 함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거두지X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탁지아문의 관할. 10.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 제한 12. 장교 교육ㆍ징병 실시하여 군제의 근본 확립 13. 민법 형법을 제정하여 생명과 재산을 보호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 |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해당 부처의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날인하여 시행 3. 국가재정은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 5. 칙임관(고급관리)은 정부에 그 뜻을 물어 과반수가 동의하면 임명할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
광무개혁 대한국 국제 9조 | 대한사민논설13조 (황성신문 1900.10.8) |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이다. 제3조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한다. 제4조 신민이 황제의 군권을 침손할 경우는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본다. |
①요순의 법을 행할것 ②선왕의 복제를 본받을것 ③나라의 흥인을 꾀할것 ④상하의 원망없는 정법을 행할 것 ⑤철도부설권을 허락하지 말것 ⑥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채용할것 ⑦소 도살을 엄금할 것 ⑧시장에 외국상인의 출입을 엄금할 것 ⑨악형의 제 법을 혁파할 것 ⑩행상에 징세하는 폐해를 제거할것 ⑪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⑫사전을 혁파하고 균전법을 시행할 것 ⑬곡가를 낮추어 안정시킬 것 |
● 교통, 통신, 구호시설
고려 | 교통 | 역원제, 조운제 |
구호 시설 |
의창(성종) 상평창(성종~조선까지, 물가조절기구, 개경ㆍ서경ㆍ12목에 설치) | |
의료 | 동서대비원(문종, 개경, 국립의료기관), 혜민국(약국, 백성의 의료담당) 구제도감ㆍ구급도감(예종, 재해를 대비하여 설치된 임시관서) |
|
기타 | 계(상부상조), 제위보(빈민구제, 광종), 학보(교육, 태조) | |
조선 | 봉수 | 봉수제(병조관리) |
역원 | 역원제(병조관리), 역마 사용시 상서원에서 마패 | |
파발 | 파발제(임난때 역원제 무너지자 선조가 마련, 공조관장) | |
구호 시설 |
의창(빈민구제) 사창(곡물대여) 상평창(물가조절기관) 구휼청, 전의감(의료기관) 혜민국(민간치료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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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 개항 전 | 17c 실학자(중상)관심, 흥선대원군- 서양무기 제조기술 관심(해국도지,수뢰포) |
개항 후 | [동도서기]1880 무기제조술외 산업기술의 수용에도 관심 1890 교육제도(철도학교, 경성의학교) |
|
근대 시설 수용 |
근대 시설 |
① 박문국(1883,인쇄소,한성순보발행), 광인사(1884,최초민간출판사, 농정신편) ② 기기창(1883,무기제조) ③ 전환국(1885,화폐발행) |
교통시설 (달리는것은 999) |
① 경인선(최초철도,미→일) ② 경부선(러일전쟁중 일본이 완성) ③ 경의선(프→일) ④ 전차(한성전기회사설립, 황실과 미국인 콜브란 합자): 서대문~청량리(1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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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시설 |
① 전신- 전보국설치(1883) → 1885 청에 의해 가설 ② 전화- 경복궁내 처음 가설(1889), 서울민가(1902) ③ 우편- 우정국설치(갑신정변때 중단, 을미개혁때 부활) → 만국우편연합 가입(1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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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시설 |
① 광혜원(1885, 알렌, 최초근대식병원) → 제중원으로 개칭 ② 광제원(1889, 국립병원, 지석영) → 대한의원(의료요원)으로 개편 (제는 대한제국 연관) ④ 자혜의원(1909,도립병원) ⑤ 세브란스병원(1904, 에비슨이 설립, 의요요원 양성) |
● 근대교육의 발전
1. 근대 교육 기관의 설립
1) 원산학사(1883): 평민자제들에게 외국어ㆍ자연과학ㆍ국제법 등 근대학문과 무술교육을 한 최초의 근대“사립”학교 *고구려의 경당과 비슷(= 화랑도, 고려예종 7제의 강예제)
2) 동문학(1883): 묄렌도르프가 설립. 외국어 교육기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설치
3) 육영공원(1886):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관립”학교, 헐버트ㆍ길모어 등의 미국교사초빙
상류층 자제를 뽑아 영어ㆍ수학ㆍ지리학ㆍ정치학등 근대학문 교육 (국어ㆍ국사ㆍ무술교육 X)
2. 갑오개혁 이후 고종의 교육입국조서(1895.2) 반포
1) 내용: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적 교육 제도를 마련, 학무아문 설치(1894.6), 교육입국조서 반포
2) 결과: 한성사범학교 관제 규칙 반포 → 최초의 사범학교 설립 →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의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 설립 → 새로운 교과서도 선보임
3) 을미개혁이후 소학교령 공포(수업연한 6년의 관공립 소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
4) 을사조약이후 애국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수많은 사립학교들이 전국각지에 설립되기 시작
* 교육입국조서(고종, 1895, 갑오개혁 이후) “국민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덕과 건강과 지식을 기를 지어다”“교육은 그 길이 있는 것이니, 헛된 이름과 실용을 먼저 분별하여야 할지로다..왕실의 안전이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고, 또 국가의 부강도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도다.” * 고려(성종): “교육이 아니면 인재를 얻을 수 없다.” |
원산학사 | 1883년 | 함경도 덕원주민들과 개화파 인사들이 합자로 세운 최초의 근대사립학교 |
동문학 | 1883년 | 묄렌도르프가 정부지원으로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서 설립한 영어강습기관 |
배재학당 | 1886년 | 1885년 아펜젤러가 수업 시작, 고종이 1886년 6월에 교명과 간판을 하사 |
이화학당 | 1886년 | 최초의 여성, 1910년에 대학부를 설치 |
육영공원 | 1886년 | 최초의 근대관립학교, 헐버트, 길모어 등의 미국인 교사를 초빙 |
경신학당 | 1886년 | 최초의 전문 실업 교육 기관 |
정신여학교 | 1887년 | 앨러스 |
흥화학교 | 1895년 | 민영환이 외국어와 선진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 심상과ㆍ특별과ㆍ양지과, 영어ㆍ일어ㆍ측량술의 강좌를 개설 |
숭실학교 | 1897년 | 최초로 지방 사립 교육 기관, 대학 교육의 시작 |
휘문의숙 | 1905년 | 고종이 직접 이름 하사 |
서전서숙 | 1906년 | 국외 항일 교육 기관. 북간도. 이상설 설립 |
대성학교 | 1907년 | 신민회와 관련. 안창호. 평양에 설립 |
오산학교 | 1907년 | 신민회와 관련. 이승훈. 정주에 설립 |
신흥강습소 | 1911년 | 신민회와 관련. 이시영. 서간도에 설립 |
3. 근대교육의 시련: 일제의 사립학교령(1908)으로 모든 사립학교의 운영이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됨
4. 학회의 활동: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정치와 교육을 결합시킨 구국 운동 단체
5. 관립학교보다 사립학교가 많음
6. 민립 대학 설립 운동
1) 배경
- 1차 조선교육령(1911.8)ㆍ2차 조선교육령(1922.2) 발표, 개량서당, 사립학교 및 야학에서의 민족교육
- 조선교육회 창설(1920.6): 한규설, 이상재
2) 민립 대합 설립 운동(민족주의 우파에 의한 실력양성 운동)
- 민립대학기성회 조직(1922.11): 이상재, 한용운, 이승훈. 국내·외 모금 운동 전개
- 결과: 모금활동의 중단으로 결국 좌절 → 일제의 경성제국 대학을 설립(1924)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취지문 “우리들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그보다는 급선무요, 가장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알고야 동(動)할 것이요, 알고야 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능히 유능유위의 인물을 양성하려면 최고 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반지 한 쌍에 1원씩만 셈하면 1천만원이 여인의 수중에 있다“ |
● 근대 국문학과 민족사학자
1. 국문법연구 ⇒ 조선문전(유길준,1895):최초국문법서, 국어문법(주시경,1906), 대한문전(유길준,1909)
2. 국어연구
국문연구소(1907) | 조선어연구회(1921) | 조선어학회(1931) | 조선어학회사건(1942) |
주시경ㆍ지석영 최초로 학부에 설치한 국어연구 기관 |
이윤재ㆍ최현배 [한글]잡지 간행 가갸날 제정(1926.9.29) |
이승희ㆍ최현배, 맞춤법 통일안ㆍ표준어 제정, 우리말큰사전 편찬착수 → 완성(1957 한글학회) |
치안유지법, 학술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로 기소, 이윤재옥사 |
3.국학자와 민족주의사학자
단재 신채호 |
낭 | 고대사 연구 →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 확립,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문> 작성 [독사신론]- 우리 역사의 주체는 우리 민족 [조선사연구초]-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찬양 [조선상고사]- 역사를“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정리 [최도통전][을지문덕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조직, 신민회회원으로 활동 낭가사상(화랑정신): 고조선에서 기원(신라X), 독립군기지건설에 참여 임시정부 활동: 우파세력에 의해 주창되던 외교론, 준비론, 문화 운동론, 자치론 등을 비판하고 민중중심의 철저한 반일 민족 해방 투쟁을 전개 강조 |
백암 박은식 |
혼 | 양명학 연구 → 대동교창시 [유교구신론] [대동고대사론], 실천적 유교를 강조 10년에 대종교적 역사의식을 수용하여 근대사 연구에 치중하여 역사의식을 정립 근대사 연구 → [한국독립지혈사] 3ㆍ1운동 등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 [한국통사]-“나라는 형(形)이요, 역사는 신(神)이다”일본의 침략과정을 밝힌 최초의 한국근대사 조선 광문회에서 [연개소문전][안중근전][스위스건국지]등의 민족고전을 정리하여 민족의식고취 동제사에서 활동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 황성신문ㆍ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with 신채호) |
위당 정인보 |
얼 | 신채호의 사학계승 → 고대사 연구에 주력 [조선사연구][5천 년간 조선의 얼] 양명학과 실학사상 연구ㆍ정리- 실학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 |
호암 문일평 |
심 | [호암집][한미50년사],근대사연구“조선학은 조선글의 발명에 의하여 비로소..” ⇒ 세종을 대표자로 훈민정음과 실학을 조선사상ㆍ조선심의 핵심으로 강조 |
육당 최남선 |
밝 | 조선광문회 조직: 박은식과 함께 민족 고전을 정리ㆍ간행 [조선독립운동사][소년] 불함문화론(백두산을 동양문화의 중심지)⇔일선동조론(조선과 일본 근원 같다) 3·1운동이후 친일화: 조선의 일본화가 최대의 급선무라 주장 |
민세 안재홍 |
[조선상고사감] 신채호의 사학계승, 신민족주의 사학자(안재홍ㆍ손진태ㆍ이인영ㆍ홍이섭) 신간회에서 적극적 활동, 신간회 해소에 반대, 정인보와 함께 정약용의[여유당전서]간행 45년 조선국민당 창설, 미군정의 민정장관 역임 |
|
전형필 | 문화재수집, 간송미술관 | |
이광수 | [민족개조론][민족적경륜] ⇒ 민족주의우파 | |
한용운 | [조선독립의서][불교유신론] | |
현 채 | 유년필독(역사교과서)- “자기 나라라 함은 타국이 있기 때문이요, 자기 몸이라 함은 타인이 있기 때문이며..타인이 감히 빼앗지 못할 바이다.” |
|
백남운 |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변증법적 역사발전 법칙으로 서술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식민사관의 봉건제 결여론(정체성론)에 대항 양심적 지주자본가들과 함께 새나라 건설을 추구한 연합성신민주주의 제창 |
● 근대의 신문 [ 순 한 독 황 제 매 매 만 대 경 ]
순 | 한성순보 (1883~1884) |
박문국에서 발간, 정부의 개화정책 지지목적, 관보성격 최초신문, 10일주기, 순한문 갑신정변 때 폐간 → 한성주보(1886) * 한성주보(1886)- 최초의 국한문 혼용 신문. 우리나라 최초로 상업 광고를 게재 |
한 | ||
독 | 독립신문 (1896~1899) |
서재필, 최초의 근대적일간지, 순한글판, 영문판 간행 → 독립협회 해산 후 폐간 띄어쓰기 도입, 1957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맞아 신문의 날 제정(매년4월7일), 동학과 의병을 토비(도적떼),의병장을 괴수라 표현 |
황 | 황성신문 (1898~1910) |
남궁억 중심, 유림층 대상,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국한문 혼용의 일간지 동도개화파의 대변지, 민족주적 성격, 대한제국의 기관지로‘구본신참’표방 * 경성신문(1898) → 황성신문(1898) → 한성신문(1910) |
제 | 제국신문 (1898~1910) |
이종일, 순한글의 일간지, 서민층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계몽활동(=암신문) |
매 | 매일신문 | 순한글 일간지 |
매 | 대한매일 신보 (1904러일전쟁때 취재차 들어온베델 ~1910) |
베델이 창립,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 베델병사 → 총독부매수(매일신보) 항일운동의 선봉(日人不可入) 간판 붙이고 활동, 신채호가 시일야우방성대곡을 실음 신민회의 기관지, 국채보상운동 참여, 고종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 발표, 순한글로 창간 → 국한문혼용으로 간행 → 한글판과 영문판의 간행 * 대한매일신보(1904) → 매일신보(1910) → 서울신문(1945) |
만 | 만세보 (1906~1910) |
손병희, 천도교기관지 → 일진회의 공격 → 재정난으로 대한신문으로 개칭 (1907, 이완용) → 친일 내각의 기관지화 |
대 | 대한민보 (1909~1910) |
순한글, 대한협회 ⇔ 국민신보대항 |
경 | 경남일보 (1909~1914) |
순한글, 최초의 지방 신문 |
* 한말5대 민족지: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민보 * 친일신문: 국민신보, 한성신보, 경성일보, 대한신보, 매일신보, 법정신문 |
● 경제자립운동(물산장려운동)
1. 민족 자본의 성장 (상업자본 → 산업자본 → 민족자본)
1) 열강의 경제 침략에 대한 대응
- 시전상인: 황국중앙총상회를 만들어 상권수호운동 전개. 종로 직조사 등 근대적 생산공장에 투자
- 경강상인: 개항후 증기선을 도입하여 정부의 세곡운송에 참여(빼앗긴 운송권 회복 노력)
- 개성상인: 인삼 재배 판매권을 침해당하자, 조직적 저항을 계획
- 객주, 여각, 보부상: 상회사(창신상회, 태평상회)를 설립하여 자본축적에 성공, 개항 직후 거류지무역으로 크게 활기를 띔
2) 근대적 회사의 설립
⑴ 1880년대: 평양에 대동상회, 서울에 장통회사 등의 상회사가 나타나기 시작→점차 주식회사도 설립
⑵ 1890년대 후반: 대한제국의 상공업 진흥책으로 내국인 기업활동 활발
- 일본 자본가들의 해상과 육상의 운수업 독점에 대항해 민족 해운·육운 회사 설립, 증기선 구입
- 이권 침탈 이후 민족 철도, 광업 회사 등을 설립하여 민족 자본의 토대를 굳히고자 노력
3) 근대적 산업 자본의 성장 → 1920년대 사회진화론을 계승하여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경제적 자립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민족기업의 성장으로 나타남
- 유기 공업: 서울에 조선유기상회(합자회사) 설립, 면직물 공업: 대한직조공장, 종로직조사 설립
- 경성 방직 주식회사, 백산상회: 대지주·상인 자본 중심 기업
- 평양 메리야스 공장, 고무신 공장: 서민 출신 기업
4) 금융자본에 대한 저항
- 조선은행(1896): 한국인(김종한)이 설립한 최초의 민간은행. 영업부진으로 폐쇄(1901)
- 한성은행, 천일은행 설립 → 화폐정리사업(1905)을 계기로 몰락 → 3.1 운동이후 삼남은행의 설립
5) 대한제국의 상공업 육성 정책: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농상회사가 설립
2. 경제적 구국 운동의 전개
1) 방곡령 시행(1889): 함경도(원산) 관찰사 조병식 → 조일통상장정(1883)에 근거하여 배상금 지불
2) 서울 시전상인의 상권 수호운동: 철시(1880년대), 황국중앙총상회(1890년대) *황국협회: 보부상단협회
3) 독립협회의 이권 수호운동 ⇒ 러시아, 프랑스, 독일에 대해서만 반대. 친일,친미,친영적 성향 강함
- 러시아 재정고문(알렉셰프) 철수(1897.5) : 취임도 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감
-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1898.3), 러시아의 목포부근 도서매입 요구 저지, 한·러 은행 폐쇄(1898. 7)
- 프랑스의 광산 채굴권 요구 저지. 독일이 차지한 이권에 대한 반대 운동 전개
4) 황무지 개간권 요구 철회 운동(1904.7) → 성공!
- 보안회 : 원세성ㆍ송수만, 일제로 하여금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
- 농광회사 : 이도재, 황무지를 우리 손으로 개간할 것을 주장
5) 국채보상운동(1907) : 신민회 + 언론사(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 계몽단체의 적극적 지원
- 배경: 일제가 정부로 하여금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게 함 → 총 1,300만 원의 외채
- 전개: 양기탁, 서상돈, 김광제 등이 주장으로 대구에서 시작 →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 조직되어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 부녀자들 반지빼기 모임 (반지 한쌍 2원씩만 셈하면 1천만원~)
- 결과: 일진회를 이용한 일제의 간교한 탄압으로 모금 활동이 중단, 통감부의 방해로 결국 좌절
- 한계: 일반민들만 참여 (상층민ㆍ명문가ㆍ부호 등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정부의 호응X)
6) 물산 장려 운동:‘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
- 배경: 회사령 철폐로 일본자본의 물밀듯한 유입, 일본의 관세철폐 추진
- 물산장려운동의 시작(1920.8):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시작
- 조선물산장려회 발족(1922.6.22)으로 더욱 조직화, 국산품애용ㆍ근검절약ㆍ생활개선ㆍ금주ㆍ금연운동 전개
- 일제의 한일 관세 폐지 발표(1922,10)이후 전국적으로 확산→자작회의 활동(국산품애용, 자급자족)
- 결과: 시장가격 생필품가격 상승→상인이나 자본가에게 대부분 이득이 돌아감
- 한계: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단순 경제적 운동으로 전락. 전국적인 조직화 실패 → 1923.9 와해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부르주아 운동이라 하여 불참ㆍ비난
대부분의 원료가 일본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에 일본 원료공장은 타격X → 총독부는 방조
일제와 타협한 기업이 성장하기도 함 경성방직 주식회사
● 근현대의 외국인
1. 묄렌도르프(독일출신, 임오군란의 결과 등장, 조선정부에 고용된 최초 외국인, 동문학)
2. 헐버트(육영공원의 외국어 교사,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동반)
3. 스티븐슨(미국외교관, 1차한일협약 때 외교고문, 일본의 보호정치 환영 망언 ⇒ 전명운,장인환에게 死)
4. 알렌(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광혜원 설립, 주한미공사)
5. 데니(청의 내정간섭을 비난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키려 함, 청한론 저술)
* 현대사 중요 선언 * 1. 빈센트선언(1945): 미국은 조선을 신탁관리제 실시 2. 트루먼선언(1947):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우방국에 군사ㆍ경제적으로 원조약속 3. 에치슨선언(1950):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킴, 6.25의 발발을 묵인하는 결과. 4. 브라운각서(1966): 한국군의 월남파병 조건으로 한국군의 현대화 및 경제지원 을 약속 5. 닉슨독트린(1969): =괌독트린, 미국의 동맹국에 군사적 개입을 않겠다는 발표 데탕트(화해평화) 자주국방의 계기, 72년 7ㆍ4남북공동성명의 계기 |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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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역사왜곡
1. 간도(間島)
* 백두산정계비 내용 [지도상의 “나” 지점(북간도)] -“西爲鴨錄(서쪽으로는 압록강) 東爲土門(동쪽으로는 토문강)” ·청의 요청으로 숙종38년 청(목극등)과 조선(박권)이 백두산에 세운 경계비 · 1880년에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 우리는 송화강 상류 라고 주장 - 어윤중(1883): 서북경략사로 임명, 이중하(1885): 토문감계사로 파견 - 이범윤(1902): 간도관리사, 함경도에 편입시켜 군면제 정리 실시 - 간도파출소(1907): 통감부가 용정촌에 출장소를 두고 관리 - 간도협약(1909): 불법적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일제와 청간의 간도 협약을 통해 청은 간도를 차지하고 일본은 안봉선철도 부설권을 차지함 |
2. 동북공정(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
1)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아 중국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이 연합해 추진하는 중국국책사업
2)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여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
3) 중국은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고조선사와 발해사까지도 한국사영역에서 제외
4) 향후 북한정권이 붕괴된다면 북한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들고자 하는 작업의 발판
5) 동북공정의 핵심
중국측 주장 | 쟁점 | 우리측 반박 |
한족인 고이왕의 후예(통일적다민족국가론) | 고구려 종족 | 고조선, 부여와 같은 예맥족(漢족≠韓족) |
고구려는 중국땅에서 건국, 중국 영역 내에서 존재 | 건국과 강역 |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잡은 것은 영토패권주의 불과 |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중국황제에게 조공을 바침 | 조공ㆍ책봉성격 | 조공은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외교형식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증거 |
변방의 소수민족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중국의 통일 전쟁 |
수ㆍ당과의 전쟁 | 고구려와 중국의 국가간 전쟁으로 아시아 세계대전이었음 |
고구려 멸망 후 다수 지배층이 중국 한족과 융합됨 | 유민의 거취 | 다수가 신라로 가거나 발해건국에 기여 |
고구려와 고려는 별개국가 | 고려와 연계성 |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 |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해외 속국 | 기자조선 실체 | 학계는 기자를 역사로 인정하지 않음 |
말갈이 세운 당의 지방정권 | 발해 건국 | 고구려 유민이 세운 독립국가 |
조선이 마음대로 세운 것 | 백두산 정계비 | 간도 영유권이 한국에 유리한 데 대한 억지주장 |
● 일본의 역사왜곡 (독도) [사고팔매은세통신]
1. 관계문헌: 삼국사기 지증왕본기, 고려사, 팔도총도, 매천야록, 은주시청합기(1667,日,독도가 고려영토), 세종실록지리지(강원도울진현), 통항일람, 신증동국여지승람(강원도울진현) 2. 일제가 독도 자국영토 편입시기: 1905.2(러일전쟁 中 시네마현 고시를 통하여 독도를 귀속시킴) 3. 역사적 지위 - 지증왕6년에 이사부장군의 울릉도 복속, 13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삼국사기 기록 - 태종 때 공도정책 - 세종 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울릉도와 별도로 우산도의 존재를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 - 안용복의 활약: 숙종 대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옴 - 울릉도 경영: 19세기 말에 적극적으로 울릉도 경영에 나서 주민의 이주를 장려(개척령, 1882) - 대한제국(광무개혁)때 울릉도에 군을 설치(1900)하여 독도를 관할하게 함 - 1900년 고종의 칙령에 의해 강원도 울진현에서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 편입하여 세계에 공포 - 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 처음 사용, 1914년 경상북도에 편입 - 일제의 독도강탈: 일제는 독도가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 호에 의해 처음 발견(1849)된 암초로 간주하고 한일의정서(1904.2)를 통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불법 점령하였고, 이후 러·일 전쟁 중에 시마네현 고시를 통하여 자기들의 영토로 불법 편입시켰다. - 2차대전 후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1946년 독도를 한국에 반환하는 군령을 발표(SCAPIN),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에서 독도는 한국영토라고 명기. -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시 불법편입영토반환 문서에 독도가 빠져있음을 근거로 일본이 자기영토 주장 - 삼국접양지도(1785) 는 일본에서 그려진 지도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 색인 노란색으로 색칠하였고, ‘조선의 것’으로 명시하였다. |
● 국권침탈 과정 [ 시영용 러의협 가영포을 정기경 ]
시모노세키조약 | 1895.3 | 청일전쟁이후에 체결(일본에 의한 한국지배의 승인), 日의 요동반도점령 | |
1차 영일동맹 | 1902.1 | 군사적 동맹(러시아 견제), 영국(청)과 일본(한국)의 우월권 인정 | |
용암포사건 | 1903.4 | 러시아가 한국의 용암포를 강제점령하고 조차를 요구. 러일전쟁을 유발 | |
러일전쟁 | 1904.2 | 원인: 러의 남하정책, 영일동맹, 용암포사건 ⇒ 결과: 포츠머츠 조약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의 중립화선언(1904.1) |
|
한일의정서 | 1904.2 | 황무지개간권 요구, 군사시설이용권, 충고권, 항해권 [의황사충고] | |
한일협정서 | 1904.8 | 제1차 한일협약, 고문정치(외교:스티븐스ㆍ재정:메가다) 화폐정리사업(1905.6) [협고] | |
가쓰라ㆍ태프트 밀약 | 1905.7 | 미국(필리핀)과 일본(한국)에 대한 지배권 인정 |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 조약 |
2차 영일동맹 | 1905.8 | 영국(인도)과 일본(한국)의 지배권 인정 | |
포츠머츠강화조약 | 1905.9 | 러-일, 일본의 한국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 | |
을사조약 | 1905.11 | 제2차 한일협약, 통감정치(통감부설치), 외교권박탈, 헤이그밀사사건(1907.6), 을사오적(박제순,권중현,이지용,이근택,이완용) ⇔ 한규석,민영기,민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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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7조약 | 1907.7 | 제3차 한일협약(=한일신협약), 차관정치, 군대해산, 고종퇴위 [정차관군대해산] 통감의 권한확대 명문화, *헤이그특사(이상설,이준,이위종)가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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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각서 | 1909.7 | 사법권박탈(사법부와 재판소가 폐지), 감옥사무이관 [기사감] | |
한일합방(경술국치) | 1910.8 | 주권박탈(총독정치), 경찰권강탈(6월), 헌병경찰제도 도입 [경주총독] |
*고문파견: 임오군란, 아관파천, 1차 한일협약 |
* 을사조약의 체결에 대한 저항운동
1) 민간
- 민영환ㆍ조병세 상소ㆍ자결, 나철ㆍ오기호 등이 5적 암살단의 조직 → 대종교의 창시
-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시일야우방성대곡 발표
- 최익현ㆍ민종식ㆍ신돌석 등 의병장의 활약(을사의병),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 사살(1909)
※ 황현의 절명시:‘매천야록’을 남기고 자결 → 한ㆍ일 합방조약 후(1910.8)
2) 정부
- 고종황제의 노력: 대한매일신보에 무효를 선언한 친서의 발표, 워싱턴에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
- 헤이그특사 파견(1907):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특사로 파견, 이준 분사
⇒ 결과 : 고종의 강제 퇴위(양위), 한·일 신협약의 체결(1907), 차관통치의 실시,
군대의 해산 → 시위대장 박승환자결, 일본군과 해산군인의 시가전, 해산군인 위병 합류
● 일제식민지 문화정책과 친일문학가
1. 조선교육령
1차 1911(우민화정책) | 2차 1922(유화정책) | 3차 1938(황국신민화정책) | 4차 1943(말살정책) |
①일본어학습강요 ②사립학교ㆍ서당억제 ③보통교육,고등보통교육 ④실업교육,전문학교교육 ⑤교육연한단축(6→4년) ⑥대학ㆍ전문학교는 미설치 ⑦충량한 황국신민육성목표 |
①사범학교설치,대학허용 (민립대학설립운동⇔경성대학) ②교육시설 3면1교 ③수업연한연장 (보통학교6년, 고등보통학교5년) ③조선어 필수과목 지정 ④전문학교 교육의 강화 ⑤복선제 도입 (일인ㆍ한인분리교육) |
①교명변경(보통학교→심상소학교/고등보통학교→ 중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고등여학교) * 소학교 → 국민학교(41년) ②초등학교 확충 1면1교 ③국어국사 폐지(필수→수의) ④황국신민서사 제정암송 강요 ⑤일본어 보급 확대 ⑥국제명징,내선일체,인고단련 |
①민족교육기관탄압 ②군사능력배양 목적 ③조선어, 조선사의 완전 폐지 ④수업연한 축소 ⑤교과목 통폐합 |
2. 종교탄압
1) 유교: 60세이상 유생에게 상치은사금을 지급,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편, 유도진흥회 대동사문회조직
2) 불교: 승려법 제정, 사찰령(1911)공포, 총본사(조선불교중앙교무원)를 두고 총독이 사찰 주지 임명
3) 기독교: 안악사건, 105인사건, 일본조합교회와 조선기독교를 합병하려 했으나 실패.
4) 민족종교인 천도교ㆍ대종교 등은 일제의 탄압이 특히 심하여 종교활동의 자유가 제한됨.
3. 친일문학가 (40년대 초 일제의 징용과 징병을 부추기며 선동하는 글 작성)
1) 최남선: 미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정신을 떨치라고 징병 독려, 조선사편수회 편찬위원,
제헌의회 반민특위 체포, 사이토총독의 후원하에 동명잡지간행, 조선총독부 참의 역임
2) 이광수:「민족적 경륜」에서 자치론을 지지하여 독립운동에 좋지 않은 영향
일제 말기 학생들에게 ‘공부는 나중에 하고 당장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등의 친일시 씀
3) 주요한: 잡지 「신시대」와 「대한매일신보」에 친일시 발표
4) 서정주: 매일신보에 시의 이야기ㆍ인보정신ㆍ송정오장송가 발표,‘나는 그때 일본이 200년은 갈 줄 알았다’
5) 기타: 모윤숙, 김억, 정비석, 이인직, 김동인, 채만식, 노천명, 최린
4. 저항문학가(저항시인): 윤동주[별을헤는 밤], 이육사(청포도ㆍ광야ㆍ자오선), 한용운(님의 침묵)
5. 각계각층의 친일활동
1) 친일경찰: 김태석(강우규의사 고문), 노덕술(고문경찰 대명사)
2) 친일예술인: 이면상(종군 간호부의 노래작곡), 홍난파(정의의 개가작곡), 현제명(정성의 파수작곡)
3) 친일자본가: 김성수(경성방직회사 사장),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
4) 교육인: 김활란(이화여대 전 교장)
● 식민사관 VS. 민족사관
실증사학 (진단학회 ⇔ 청구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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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민족사관 | 우 | 식민사관 |
사회경제사학 (유물사관) 백남운 |
신민족주의사학 (정신사관) 신안손이 |
민족주의사학 (정신사관) 신박정문 |
1. 타율성론 - 남한경영설, 반도사관,만선사관, 외인론 2. 일선동조론⇔최남선(불함문화론) 3. 정체성론⇔백남운(사회경제사학) |
1. 민족주의 사학자와 활동(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문일평): 우익의 특수성
1) 20년대 일제의 식민주의사하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한국사 주체성과 우리문화의 우수성 강조
2)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정신적 투쟁의 중요성 강조
3) 역사발전에 있어 정신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 물질을 중시하는 사회경제사학과 대립, 실증사학의 비판을 받음
4) 조선학 운동(1934): 백남운,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이 <여유당전서>의 간행을 계기로 시작
- 정약용서거 99주기를 맞이하여 민족주의학자들이 모여 운동 시작. [ 조운백정문안 ]
- 기존의 민족주의 역사학이 국수주의적이었음을 비판, 우리 학문의 주체성을 찾으려 노력.
- 조선후기 실학을 주목하고, 고대사 뿐 아니라 조선시대를 발전적으로 이해
2. 신민족주의 사학자와 활동(1940~1950년대 등장): 좌ㆍ우 양극단을 배제, 좌ㆍ우협진, 국제협력 도모
1) 학자 (안재홍, 손진태, 이인형, 홍이섭) [신안손이]
- 해방직후 한국사의 역사적 전환기에 대응해서 당면과제인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모색하는 방안으로 제기.
- 안재홍: 신민족주의사학의 이론적 기초 제공, 신채호의 사학계승. 중도우파적견해 대변[조선상고사감]
- 손진태: 역사를 통한 민족의 단결과 계급화해ㆍ민족균등 강조. [조선민족사개론],[조선민족설화의 연구] 저술
“단결하면 흥하고, 분열되면 망한다”,“평등하면 단결하고 불평등하면 분열한다”강조
2) 한계: 사실의 역사에 대한 의의를 이해하기 어렵고, 지나친 현재적 관심에 가치판단의 중점
3. 사회경제사학(1930년대): 좌익의 보편성
1)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깨려고 노력, 민족사학을 비판, 봉건주의의 강조(유물사관과 관련)
2) 한국사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
3) 백남운: 우리역사를 세계사적 발전법칙에 따라 체계화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조선사회경제사] 저술
4) 이청원 [조선사회사독본] [조선역사독본], 전석담 [조선사교정][조선경제사]
4. 실증주의 사학(1934~1942)
1) 이병도: 객관적 역사 서술 지향. [한국고대사연구]
2) 진단학회 조직(1934): 청구학회의 한국사 왜곡에 반발. 손진태, 신석호, 이윤제, 이병도 중심. <진단학보> 발행
3)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의 정확하고 충실한 이해를 중시, 역사를 위한 역사를 강조, 랑케사관을 강조
4) 유물사관, 민족주의사관을 모두 거부민족운동의 운동으로서의 역사연구를 거부
5) 독립운동에는 직접 기여하지 않았지만, 문헌고증의 역사연구를 통해 우리역사 연구의 새지평을 여는데 기여
6)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폭로하여 독립을 쟁취해야하는 시기에 현실역사인식이 부족
5. 식민사관(고대사 부분을 왜곡, 가장 심함) [타일정당]
1) 타율성론 (남한경영설, 임나일본부설, 반도사관, 만선사관, 사대외교, 지정학적 숙명론)
- 우리민족의 독자적ㆍ자주적 발전을 부정, 우리역사가 주체적이지 못하고 주변국가에 종속되어 전개됨을 주장
- 우리역사는 시작부터 기자, 위만, 한의4군현 등 중국에 의하여, 삼국시대에는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일본에 의해 지배
2) 일선동조론(동조동근론, 내선일체, 단군조선부정, 조선 일본 민족적 근원 같다.) ⇔ 불함문화론
3) 정체성론(봉건제결여론)
- 한국의 개항기는 일본의 10C에 불과, 한국사는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에 참여하지 못함
- 우리민족사 자체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왔다
- 정체성론의 반박 ⇒ 세계사적 보편성을 중시하는 유물 사관에 입각하여 연구(사회경제사학)
4) 당파성론: 학연 지연 등이 역사현실로 반영된 것이 당쟁 때문, 당파성이 조선왕조멸망의 결정적 원인
● 한말 애국계몽ㆍ독립단체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민족 2대 운동 | |||
좌파 | 우파 | ||
독립전쟁론 - 의병전쟁 - 무력투쟁 - 생존권사수 - 양기탁, 이동휘 |
애국계몽운동 - 국권회복 - 실력양성 - 산업,교육 - 안창호 중심 |
스티븐스死 | 이토死 | 이완용 | 사이토 | 종로서 | 일왕궁성 | 동ㆍ척 | 일 왕 | 시라카와 | |
1908 | 1909 | 1909 | 1919 | 1923 | 1924 | 1926 | 1932 | 1932 | |
장 | 전 | 안 | 이 | 강 | 김 | 김 | 나 | 이 | 윤 |
장인환 | 전명운 | 안중근 | 이재명 | 강우규 (실패) |
김상옥 | 김지섭 | 나석주 | 이봉창 | 윤봉길 |
의열단 | 애국단 |
의열단(1919): 3.1운동이후 개별적 폭력투쟁. 만주에서 김원봉(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조직, 파괴와가살의 행동목표를 지침 ⇒ 신채호‘조선혁명선언’강령- 민중.혁명.폭력 김상옥(23, 옥이 있는 종로경찰서)ㆍ나석주(26,(주)동척)ㆍ김지섭(24,황궁이중교)ㆍ김익상(21,총독부폭파) ----------->폭탄던지니 한계를 느낌. 그래서 중국시스템배우러 황포군관학교 들어감. 그리고 조선혁명간부학교 세움. 애국단(1926): 임정이 계속위기 후 최후로 던진카드 상해에서 김구가 조직, 한ㆍ중양국의 우의증진과 일본요인 암살 목적, 독립노선의 갈등 으로 인한 임시정부침체를 극복하기위해 조직 만주사변후--이봉창(실패)--상하이사변--윤봉길(32,중국국민당의 지원 강화 → 한국 광복군 창설) |
연도 | 명칭 | 지역 | 인물 특징 |
1896 | 독립협회 | 서울 | 서재필ㆍ남궁억 ⇔ 황국협회 |
1904 | 보안회 | 서울 | 송수만ㆍ원세성, 황무지개간 철회성공, 농광회사(이도재) [황보] |
1905 | 헌정연구회 | 서울 | 일진회에 대항, 입헌군주제 수립과 민권확대 주장 [ㅇㅈㅎ] |
1906 | 대한자강회 | 대한민보발해, 고종퇴위 반대운동 [자퇴] | |
1906 | 대한협회 | 대한자강회+대한구락부 → 친일변질 | |
1907 | 신민회 | 서울 | - 안창호ㆍ양기탁등 ⇔ 105인사건 - 최초공화주의주장, 비밀결사, - 대한매일신보(기관지) 대성학교(평양)ㆍ오산학교(정주)ㆍ태극서관(대구)ㆍ자기회사(평양),→ 흥사단(LA) → 수양동우회로 발전(26) |
1909 | 국민회 | 미국 | 이승만 신한민보발행, 한인합성협회+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로 발전 |
1910 | 성명회 | 연해주 | 유인석ㆍ이상설 광복의 그날까지 피의 투쟁을 다짐, 한일합방의 부당성 비판(일왕에게 편지) |
1910 | 경학사 | 삼원보 (=서간도) |
이상룡, 경제적 자립을 위한 민단, 부민단 → 한족회로 발전 * 신흥강습소(백서농장) → 신흥무관학교(독립군양성기관) |
1911 | 중광단 | 북간도 | 서일, 대종교단체, 대한정의단 → 북로군정서(김좌진) |
1911 | 동제사 | 상하이 | 신규식, 상해유학생조직 |
1912 | 독립의군부 | 전국적 | 임병찬(최익현과 다르게 대마도에서 도망쳐온), 고종의 밀지(고종의 반환요구서제출/어이없게→거절당하자 의병전쟁계획), 복벽주의(전제군주제 회복), 비밀결사 국권반환 요구서 제출 → 거절 당하자 의병전쟁 계획 |
1913 | 대한광복단 (풍기광복단) |
만주 | 채기중 주도 박상진ㆍ김좌진, 공화주의, =1915 조선(대한)광복단(회) 군대식으로 조직, 만주에 독립군 사관학교설립(독립군간부양성)--친일부호 찾아다니며 의연금 or 처단 ==> 향후 조선국권회복단 일부와 합류해서 대한광복회로 발전 |
1914 | 대한광복군정부 | 연해주 | 이상설ㆍ이동휘, 독립전쟁을 준비한 최초의 국외정부, 공화주의 권업회가 모체, 노령정부로 불림, 임시정부수립의 계기 제공 |
1915 |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
대구 | 서상일ㆍ이시영, 단군신앙을 바탕, 시회로 가장 -->대한광복회로 발전(1915, 대한광복단+조선국권회복단) 오인은 대한의 독립된 국권을 광복하기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함에 공함은 물론.. 국권을 회복하기까지 절대 불변하고 일심육력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함 |
1917 | 신한혁명당 | 상하이 | 신채호ㆍ박은식, 대동단결선언, 공화주의, 임시정부수립 주장 |
1918 | 신한청년당 | 상하이 | 김규식ㆍ여운형ㆍ김구, 파리강화회의 김규식파견 <독립청원서> ⇒ 실패 |
1919 | 대한국민의회 | 연해주 | 손병희, 정부수립선언, 이후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 |
복벽주의: 대한제국(봉건질서) 회복 ⇒ 민단조합, 대한독립의군부, 대한독립단 [임신복] 공화주의: 왕정X, 민주정(국민주권) ⇒ 신민회(최초주장), 대한광복단, 신한혁명당, 임정(실현) ----->신민회와 대한광복회 느낌 비슷 조소앙의 삼균주의: 균부(국유제)ㆍ균권(보통선거)ㆍ균학(공비교육)의 평등강조 무오독립선언서(1919, 만주),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 충칭) |
3.1 운동이후 국내 무장단체: 구월산대(1920,황해도) 천마산대(1919,평북의주) 보합단(1919,평북의주) |
- 이들까지 합법으로 해줄순 없음. 게릴라전이라.. 불법
북만주: 밀산부의 한흥동(최초의 독립운동 기지, 이상설ㆍ이승희)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신한민촌),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공화주의)ㆍ대한독립단(복 (신민회활동) 벽주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육군주만 참의부 북간도(만주길림): 용정촌(서전서숙, 이상설), 명동촌(명동학교, 서일), 간민회→대한국민회→국민회군(안무), 대한독립군(홍범도, 군무도독부(최진동), 중광단(서일) → 대한정의단 → 북로군정서(김좌진) 상하이: 동제사 → 신한혁명당 → 신한청년당, 대동보국단(시베리아 간도 국내의 연락기능)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한민회(해조신문, 한민학교), 성명회, 권업회, 13도의군, 대한광복군정부, 대한 국민 의회 (연 해 주), 신민단, 경비대, 혈성단 미 국: 대동보국회(1945, 신규식, 박은식), 한인합성협회+공립협회=대한인 국민회(미 국)(신한민보발행), 흥사단(1913,안창호,LA,[동광]잡지발행), 공립협회(안창호,SF), 신민회(하와이,1903, 홍승하ㆍ윤병구 중심, 동족단결ㆍ민지개발ㆍ국정쇄신) |
● 신민회와 독립군 기지건설
신민회(1907~1911) | 신간회(1927~1931) |
• 카멜레온 단체 • 비밀(항일)결사 단체 • 목표: 공화정체 국권회복과 독립 자주 국가 건설 * 최초 민주공화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 구성: <대한매일신보> 중심의 구국단체. 다양한 세력참여, 엄격한 심사를 통한 입회 허용(안창호,이동녕,김구,신채호,양기탁) • 이념 :‘선실력 후기회론’ • 4대 강령(신민회 활동목표) ①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것 ②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역량을 축적할 것 ③ 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 진흥 ④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부력 증진 • 활동 - 기관지: <대한매일신보> 국채보상운동 참여(후원) 기관잡지: 최남선의 주도 하에 <소년> 간행 -대성학교(평양,안창호)ㆍ오산학교(정주,이승훈), 양산학교(안악) [ 안대 이오 ] - 민족산업의 육성:자기 제조 주식회사(평양), 태극서관(평양ㆍ서울ㆍ대구,국민계몽),협성동사 - 삼원보(신한민촌, 신흥강습소): 이동녕, 이회영 - 안악사건(1910)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1911)으로 확대,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직 와해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 건설시도 좌절 - 애국 계몽 운동이 항일 의병 운동과 연대하는 계기 마련, 3·1운동 이후 독립군 부대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의 기초가 마련. - 해외의 독립군 기지건설 주력 • 후신: 흥사단(LA,안창호,1913) |
•“신간출고목”이라는 말에서 취하여 명칭을 정함 • 합법적 단체로 승인 (→합법과 비합법노선 사이의 모순) (20년대는 합법이 많음) • 창립배경: 자치운동론대두, 중국의 제1차 국ㆍ공합작, 북경촉성회 창립, 조선민흥회 조직, 정우회 선언, 6ㆍ10만세운동, 코민테른의 승인 •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목표로 합법적 단체로 승인받으면서 일제치하 최대의 항일 단체로 발전 • 구성: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이상재, 안재홍) 사회주의가 결합하여 결성 • 조직: 1929년 전국 144개의 지회 설치. 일본까지 확대. • 3대 강령 (후에 수정발표: 민족운동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활동노선을 제시) ①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② 우리는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함 ③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 활동 (중앙: 비타협적민족주의, 지회: 사회주의) ① 항일 운동의 전개 -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진상 조사단 파견 -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 진상 규명 운동 - 원산총파업(1929)ㆍ단천농민투쟁(1930) 지원 ② 청년, 여성, 형평 운동과도 조직적으로 연계 ③ 민중 대회와 연설회 개최(광주학생운동 도중) • 신간회 해체(1931.5.15): 자진해산 - 본부가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주장하는 등 우경화경향을 보이자 해소론 등장 - 9월테제에서 코민테른은 일제와 타협하는 개량주의적 단체로 규정하여 해산을 종용 - 최초로 개회된 신간회 전국대회에서 해소가 결의 * 좌우합작(1920년대) 민족유일당촉성회, 신간회, 전국연합진선협의, 건국동맹, 상해촉성회(27), 조선청년동맹(1924),조선민흥회, 근우회, 국민부, 북경촉성회(26) |
민족주의(우익) - 우파: 자치론ㆍ타협론ㆍ기회주의ㆍ실력양성 →이광수, 송진우 - 좌파: 반자치ㆍ비타협ㆍ절대독립→ 안재홍, 권동진 사회주의(좌익)- 무정부주의 → 박헌영, 김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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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의 해외이주
북만주: 밀산부의 한흥동(최초의 독립운동 기지, 이상설ㆍ이승희)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신한민촌),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공화주의)ㆍ대한독립단(복 (신민회활동) 벽주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육군주만 참의부 북간도(만주길림): 용정촌(서전서숙--최초의 국외학교, 이상설), 명동촌(명동학교, 서일), 간민회→대한국민회→국민회군(안무), 대한독립군(홍범도), 군무도독부(최진동), 중광단(서일) → 대한정의단 → 북로군정서(김좌진) 상하이: 동제사 → 신한혁명당 → 신한청년당, 대동보국단(시베리아 간도 국내의 연락기능)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한민회(해조신문--해삼위의 조선신문, 한민학교), 13도의군, --국권피탈 후-- 성명회,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최초의 국외정부, 1914), 대한국민의회, 신민단, 경비대, 혈성단 미 국: 대동보국회(1945, 신규식, 박은식), 한인합성협회+공립협회=대한인국민회(신한민보발행), 흥사단(1913,안창호,LA,[동광]잡지발행), 공립협회(안창호,SF), 신민회(하와이,1903, 홍승하ㆍ윤병구 중심, 동족단결ㆍ민지개발ㆍ국정쇄신) |
1. 생활터전을 찾아 만주와 간도로
1) 1910년대: 일제의 토지국유화정책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업에 의해 토지 잃고 이주(북간도 용정촌)
항일운동 전개ㆍ독립운동기지 건설(남만주 삼원보, 북만주 한흥동)
2) 1920년대: 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 간도참변(1920)
3) 1930년대: 만주국 성립으로 만주개발을 위한 조선인 강제 이주
2.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1) 1905년 이후: 러시아 변방개척위해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 허용, 한인 집단촌 형성(원호인)
2) 1910년대: 13도 의군 결정, 대한광복군 정부(블라디보스톡), 대한국민의회(1919)(손병희), 권업회, 성명회
러시아 혁명 이후 볼세비키 군대와 연합하여 항일투쟁 전개
3) 1920년대: 자유시 참변→ 민족운동 약화
4) 1930년대: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1937년)
3. 일본 이주
1) 19C 말: 일본의 선진학문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 이주
2) 1910년대: 산업 노동자로 취업(노동착취, 민족차별)
3) 1920년대: 관동대학살(1923)
4) 1930년대: 전시 동원 정책에 의해 강제 징용→ 현재 재일동포 사회구성의 토대
4. 미주 이주 (현재 재미동포는 100만명으로 이주동포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5. 우리 민족의 인구분포
일제 강점기 | 1910년 | 1313만명 (이천만 넘는 시기: 30년을 전후로) |
1930년대 후반 | 중일전쟁 후 강제연행으로 해외 이주자 급증 | |
1943년 | 2439만명 | |
해방직후 | 해외의 귀환 인구는 주로 남한에 집중되어 인구 압력을 가중 | |
한국전쟁 |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남한에서 베이비붐 현상이 일어나 인구 급증 |
- 이회영: (경부신)- 경학사(발갈며 공부하자), 부민단,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 중간에 서명 북간도 - 중광단(대종교계열), 간민회, 서전서숙(헤이그간 이상설),-->명동학교
- 연해주(헤이그갔다온 이상설) : 석명회(소리내서 울다), 권계민 권업회, 계동학교, 한민학교// 러시아는 정치적자유가 좀 있기에.....대한광복군정부(이상설, 이동휘-한인사회당;좌파)// 대한국민의회
● 3ㆍ1운동
국외적 배경 | ⇨ | 3ㆍ1운동 | ⇦ | 국내적 배경 |
베르사유 체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동경 2ㆍ8독립선언 만주 무오선언 |
⇩ | 고종 독살설 국내운동침체에 대한 반성 동경 2ㆍ8독립선언에 충격 국제정세에 유리함 신한청년당의 활동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파견 |
||
3ㆍ1운동의 영향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무단통치 → 문화통치 - 외국의 민족운동에 영향 (중국의 5ㆍ4운동, 인도의 스와라지운동) |
- 3ㆍ1운동의 과정 -
단계 | 1단계(점화기) | 2단계(도시 확대기) | 3단계(농촌 확산기) |
주체 | 학생과 민족대표자(종교계) | 학생이 주도, 상인과 노동자 가세 | 농민이 적극 참여 |
지역적 범위 | 주요도시 | 도시를 중심으로 확대 | 농촌과 국외로 확산 |
전개양상 | 독립선언의 만세시위 비폭력주의 |
만세시위의 확산, 파업과 철시, 비폭력주의 | 무력적 저항, 폭력적 |
무오독립선언서 (1918.11.13) |
2ㆍ8독립선언서 (1919.2.8) |
기미독립선언서 (1919.3.1) |
천도교자주독립선언서 (1922) |
*우리나라 최조 독립선언 *만주길림, 중광단인사 중심 *[대한독립선언서] 조소앙집필 *우리 같은마음 같은덕망의 2천만 형제자매여~, 무장투쟁주장 |
*일본 유학생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받아 *이광수집필 *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을 선포하게 될 따름이다 |
*본문 최남선, 공약삼장 한용운 집필 *오등에 자에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일절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 |
*천도교의 제2의 3ㆍ1 운동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 *존경하는 천도교인과~ 다시 기미년의 감격을 재현하기위해 |
1. 배경
1) 러시아 혁명(1917) : 레닌은 제국주의 하에서 고통 받는 식민지 국가를 지원하겠다고 선언
2)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 승전국의 식민지는 해당×, 일본은 승전국 ⇒ 우리의 현실과는 무관
3) 상해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
4) 고종의 독살설 : 고종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1919.1.22) → 일본 독살설 유포 → 민족운동 분위기 조성
5) 국외의 활발한 독립 운동
- 대한 독립 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1918.11) :“무장 투쟁을 통해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 2ㆍ8 독립선언(1919년) : 일본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발표
2. 경과
1) 독립 선언(1919. 3. 1):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문을 발표
2) 일제의 무력탄압 :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3) 제1기: 비폭력주의 → 제2기: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 → 제3기: 전국의 농촌으로 확산
→ 제4기: 국외로 확산 무력 저항 운동으로 전환
4) 민족대표들은 대중적 시위를 지도하지 못함
3. 의의
1) 중국의 5 · 4운동, 인도의 비폭력·무저항운동에 영향을 줌
2) 각지의 임시정부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1919.11) :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
3) 무장독립운동의 본격화
4)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꿈
4. 한계성 : 비현실적 낙관주의, 열강의 지지를 받지 못함, 민족 대표의 소극적 자세
※ 국외에서 만세시위
• 연해주(국민의회주최), 미국(대한인국민회,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식 거행)
일본(도쿄유학생 중심, 조선청년독립단)
● 대한민국 임시정부
1. 3ㆍ1운동 이후 독립노선
절대독립론(선독립) | 선독립 후실력 양성론, 민족주의 좌파, 반자치론ㆍ무력투쟁으로 연결 독립전쟁론: 노령정부, 신민회 등 다수 단체의 독립노선 |
실력양성론(후독립) | 민족주의 우파, 애국계몽과 민족산업ㆍ교육진흥에 노력, 자치론ㆍ외교론과 연결 외교독립론: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노선 |
2.개헌(제정당시ㆍ1차개헌ㆍ5차개헌 때 3권 분립이 지켜짐, 3차 개헌헌법이 가장 오래 지속) [ 대 내 집 주 부 ]
임시헌장제정 (1919.4) |
임시의정원 중심(의정-이동녕, 국무총리-이승만) | 현행헌법과 비교 | ||
제1차 개헌 (1919.9) |
대통령중심제(이승만,박은식) → 삼권분립 | 1공화국 | 대통령제 | 이승만 |
제2차 개헌 (1925.7) |
국무령중심의 내각책임 지도제(김구) → 사법권 조항 삭제 | 2공화국 | 내각제 | 윤보선/장면 |
제3차 개헌 (1927.3) |
국무위원중심의 집단지도체제(김구,이동녕 등 10명), 14년간 | 3공화국 | 대통령제 | 박정희 |
제4차 개헌 (1940.10) |
주석중심의 강력한 지도체제(김구) | 4공화국 | 유신 | 박정희 |
제5차 개헌 (1944.4) |
주석(김구),부주석(김규식)중심체제 → 사법권조항 부활 | 5공화국 | 대통령제 | 전두환 |
6공화국 | 대통령제 | 노태우 |
3. 임시정부의 통합(1919.11)
1) 3ㆍ1운동이후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하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여 통합정부인 상해에서 수립
* 한성정부: 3. 1운동 이후 국내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하여 수립, 임시정부의 법통정부
2)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충칭에서 광복 : 초기에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입증
3) 임시 의정원(입법), 국무원(행정), 법원(사법)으로 구성된 3권 분립에 입각한 최초 민주공화제 정부
4) 대통령 지도 체제 : 대통령(이승만). 국무총리(이동휘)
5) 대한민국임시정부 선포문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여 한성에서 의를 일으킨 이래...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 헌장을 선포하노라”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6) 이동경로: 상하이(1919~32) → 항저우 → 난징 → 한커우 → 광저우 → 류저우 → 충칭(40~45)
4. 활동
1) 군자금 모금: 애국공채 발행, 의연금 모금, 백산상회(부산, 1927년 완전해산)ㆍ이륭양행(만주, 1922년 와해)
2) 군자금의 전달: 연통제(1921년 붕괴, 국내외 연결하는 비밀행정 조직망)
교통국(비밀 통신망. 군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
3) 사료편찬소 설치: 안창호[한일관계사료집], 기관지[독립신문] 간행(이광수 주필)
4) 외교활동과 군사활동
초기: 외교활동 전개 | 군사활동으로 전환 |
국제연맹으로 부터 독립을 보장받고 그것에 가입 하는데 일차적 목표를 두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조소앙을 스위스만국사회당회의에 파견했으나 모두 실패, 2차 목표로 미영중소 등 각국으로부터 개별적 승인을 얻고자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설치(이승만),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서재필), 파리에 파리위원회를 두었으나 역시 실패. 국제사회의 외면 → 1923년 국민대표회 개최요구 |
북로군정서,서로군정서,대한독립군의 지지선언 (→ 직할 부대로 통합하는 데 실패) 소련과 공수동맹(1920) 광복군 총영이라는 직할부대를 편성(1920) 육군무관학교를 상해에 설치(독립군양성), 그 후 1940년에 중경으로 옮기고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복군을 조직, 대일선전포고 후 대일전에 참가 *임시정부 직할부대(광복군 사령부ㆍ광복군 총영ㆍ육군 주만 참의부ㆍ한국광복군) |
5. 국민대표회의(1923.1)----4년동안 뭐했냐?
1) 배경 : 독립운동에 대한 노선 갈등(외교 독립론 대 무장 투쟁론), 비밀행정 조직망의 붕괴 등
2) 원인 : 이승만의 위임 통치안 제출, 임시 정부의 무력함에 대한 비판 대두
3) 전개 :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
태도 | 대표자(운동 노선) | |
개조파 | 임정 인정 |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은 임시정부이므로 임정을 중심으로 운동전개. 안창호등 선실력 후독립론을 주장 |
창조파 | 임정 불신임 | 박은식ㆍ신채호등 민족주의 좌파계열과 노령종산주의자들 지지(무장투쟁론),임정해체 후 새 정부 수립주장 |
현상유지파 | 임정 인정 | 이동녕ㆍ김구등이 주장, 2대대통령 박은식, 내각책임제로 2차개헌 |
국민대표회의 소집 이에 본 주비회는 시세의 움직임과 민중의 요구에 따라 과거의 모든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하고 확실한 방침을 세워서, 우리들의 독립운동이 다시 통일되어 조직적으로 진행하도록하고자 한다. 이에 국민대표회의 소집 사항도 주비하여 책임지고 성립시킨 것이다 <주비위원회 선언서> |
- 25년이후 김구중심의 현상유지파가 이끌면서 민족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
- 정부 옹호파의 대두: 윤기섭, 김구 등을 중심으로 협성회 조직. 임시정부 지지 선언
- 이승만의 태도: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한 후 미국으로 떠남.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키려 함
4) 결과 :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1923. 6)
- 이승만 파면(25. 3), 제2대 임시 대통령 박은식 선출(4개월만에 병사),국무령중심 내각책임제로 전환(25.7)
- 이후 침체된 상황에서 명맥만 유지, 임시정부체제 급격히 약화
5) 무장 투쟁의 전개
- 한인애국단 조직(1931): 국민대표회의 결렬후 임시정부의 침체를 극복하고,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한ㆍ중 사이의 악감정 우호증진을 위해 김구가 조직 →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이 지원.
- 1932년 상해 사변으로 인해 임시정부는 항주(항저우)로 이동
-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주장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받아들여 41년에 대한민국건국강령 발표, 충칭에서 중국국민당의 지원하에 광복군을 창건하고 중국내의 군사작전에도 참가
● 6ㆍ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 항일운동
1. 6·10 만세 운동(1926):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 → 거족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실패
- 주도세력 : 학생과 사회주의자
- 각급 학교에 독서회 등의 비밀 항일 결사가 조직, 신간회가 결성(1927)되는 데에 직접적 영향
-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가 함께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 제시
- 사회주의계는 격문을 배포하다 발각되어 제2차 조선공산당이 해산되는 계기
2.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년 10월 ~ 1930년 3월까지 5개월간 지속)
1) 배경: 식민지 노예 교육, 6ㆍ10만세운동 이후 각급 학교에 항일결사ㆍ동맹휴학 전개
신간회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 고양
2) 발단: 일본 남학생의 한국 여학생(박기옥) 희롱사건(박준채) → 메이지절(11.3. 메이지 일왕의 생일)
3) 전개
① 일제의 편파적 수사로 광주시민과 학생들 분노
② 신간회: 조사단 파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전국화를 위한 지원 활동 시작
4) 전국적 확대: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산 → 신간회의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시도 → 실패
5) 역사적 의의: 3ㆍ1운동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학생운동 (* 6ㆍ10 만세운동X)
6·10 만세 운동 때의 격문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의 격문 |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이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
학생 대중들이여 궐기하라! 검거된 학생은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언론·결사·집회·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식민지 교육 제도를 철폐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를 확립하라! 용감한 학생, 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고 궐기하라. 전사여! 힘차게 싸워라 |
● 일제의 식민정책
무단통치(1910~1919) | 문화통치(1920~1930) | 민족말살통치(1930~1945) | ||
• 헌병경찰제 (제복ㆍ칼착용, 즉결처분권) • 조선총독부(총독정치) • 중추원(총독부자문기구) • 민족억압(언론,출판,집회x) • 105인사건(안악사건) • 조선태형령(1912) • 보안법(애국계몽단체ㆍ일진회 해산) |
⇰ |
• 보통경찰제(유화정책) • 문관총독임명 제도화 • 치안유지법(1925) • 친일분열정책(친일파양성) • 조선ㆍ동아일보 발행 허가 *신문지법은 1907년 제정 |
⇰ |
• 궁성요배ㆍ신사참배강요(1936) • 황국신민화(1938) • 창씨계명 • 국어ㆍ국사 금지 • 조선어학회사건(1942) • 민족 언론의 폐간(1940) • 병참기지화 정책 •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
• 토지조사사업(1912~1918) • 회사령(허가제, 1910) • 어업령(1911),산림령1911) • 광업령(1915), 임야조사령(1918) • 전매제도 시행 • 문화유적 파괴 (창경궁→창경원,경희궁 철거) |
3.1 운동 |
• 산미증식계획(日공업화정책) • 회사령 철폐(신고제=계출제) • 관세철폐(1923) • 신은행령(1927) • 조선농회령(1926) →[조선농회]:지주중심 • 중공업투자시작(부전강 수력 발전소, 흥남질소비료공장) |
세계경제공황 ㆍ 만주사변 |
• 남면북양정책 • 징용ㆍ징병ㆍ정신대 • 국가총동원령(1938) • 농촌진흥운동(32~40) → 어용운동(허구적관제) • 농산물수탈과 통제 ㉠공출과 배급제 실시(39) ㉡신조선 미곡증산계획(40) ㉢조선식량 관리령(43) |
제1절 식민통치 체제의 변화 - 무단통치(1910~1919) = 헌병경찰통치
1. 통치방법
1) 조선총독부 설치(1926, 경복궁 근정전 앞에 청사 건립완공)
- 총독은 무관으로 임명(3·1 운동 이후 문관으로 임명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한명의 문관총독도 없음)
- 총독부 산하기구: 정무총감(행정사무), 경무총감(경찰사무), 철도국·전매국·임시토지조사국, 직속 재판소
2) 중추원(자문기구) - 조선인에 대한 일종의 회유책(3ㆍ1 운동 때까지 소집된 적이 없음)
3) 일반교원, 관리에게 제복을 입힘. 칼을 차게 함(공포분위기 조성)
4) 사립학교와 서당의 통제 -> 1920년대에는 폐쇄
5) 조선태형령(1912) : 조선인에 한해 적용
6) 헌병에게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고, 모든 정치결사를 해산시키고 민족적 신문·잡지의 발행 금지
7) 3ㆍ1 운동을 계기로 문화 통치로 바뀜
2. 경제약탈 : 토지의 약탈, 산업의 침탈
1) 토지약탈 - 토지조사사업(1912~1918)의 실시(기한부 신고제)
⑴ 배경: 임시 토지 조사국 설치(1910) → 토지 조사령 공포(1912) cf)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1908)
⑵ 목적: 식민 통치를 위한 지세 확보, 한국인의 토지 약탈과 지주층 회유(친일지주 양성--도지권 부정해주니..), 식민지주제를 통한 조선의 일본식량공급지화, 일본인의 토지소유
⑶ 주체: 총독부 + 지주 ⇒ 지주는 몰락하지 않음(대부분의 한국인 지주들은 기한내 신고하여 자기토지를 지킬수 있었다O)
⑷ 한계 : 짧은 신고기간, 절차복잡. 소유권만 인정(도지권X, 입회권X, 경작권X) ⇒ 지주에게 유리
⑸ 결과 : 영구경작권 상실, 자작농 몰락, 식민 지주제 강화, 농민들의 해외유랑급증(1920년대)
① 지주의 권리만 인정, 경작권 부정 → 지주수 증가. 대부분 농민은 기한부 소작농으로 전락(그래서 국외로)
② 전 농토의 40%가 총독부 소유(동척과 총독부가 최대 지주) ⇒ 자영농↓, 소작농↑, 임노동자↑, 지주수↑
③ 조선총독부로부터 넘겨받은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불하 (→ 미군정 때 신한공사로 바뀜)
④ 소작농이 늘어나자 소작쟁의 발생, 급속도로 증가(*노동쟁의는 30년대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급증)
2) 민족산업의 통제
- 회사령(1910)의 제정, 공포 : 허가제 → 문화통치 때 신고제로 바뀐다.
- 전매사업(인삼, 소금, 담배 등)의 실시, 기간사업의 독점(철도, 항만, 도로, 통신 등)
- 농공은행, 조선 식산 은행, 각종 금융 조합을 통해 한국의 산업 경제권이 통제
3) 임야, 산업의 침탈 : 산림령, 임야조사령, 어업령, 광업령의 공포
제2절 문화통치(1919~1931) = 보통경찰통치(고등경찰통치) =>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시작함
1. 성격 : 근본적 변화는 없음(기만성)
2. 통치방법
1) 소수의 친일분자를 양성 → 우리민족의 분열
* 사이토의 조선 민족 운동의 대책 ㄱ. 일본에게 절대 충성하는 자에게 관직을 준다 ㄴ. 친일적 인물을 찾아내어 각 계층 마다 침투시켜 친일 단체를 만든다. ㄷ. 친일파를 각종 단체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둔다. ㄹ. 농민을 통제 조종하기 위해 유력한 인사가 이끄는 친일 단체를 만들어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 주고, 수목 채취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
2) 보통경찰제의 실시 = 고등경찰통치 → 경찰의 수와 관서의 수는 이전보다 크게 증가
3) 언론·출판자유의 제한적 허용: 한글신문과 잡지가 간행, 사전검열, 정간, 삭제 등으로 제 역할 못함
4) 총독의 임명 제한을 철폐 → 문관 총독의 임명“가능”, 실제로는 1명의 문관총독도 없었음
5) 교육기회의 확대(제2차 조선교육령): 초급학문과 기술교육만을 허용 → 민립대학 설립 운동 전개 → 일제가 경성제국대학(1924) 설립, 사립학교와 서당을 탄압ㆍ폐쇄시킴
6) 치안유지법의 공포(1925) - 독립운동을 탄압
7) 도·부·면에 협의회를 설치 - 의회를 설립하여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명목 아래 지방행정기관인 도·부·면에 협의회를 설치하여 친일 인사들을 위원으로 임명 하였다.
8) 관동대지진 → 관동대학살
9)만보산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만주사변을 계기로 민족말살통치로 바뀜
만보산사건 - 1931년 7월에 중국 지린 성(吉林省) 완바오 산 부근에서 관개 수로 때문에 한국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난 분쟁 사건. 일본은 경성일보를 통해 사건을 확대보도, 동아일보가 정정 보도하여 사건수습, 일본의 책동으로 일어나 국내에서 화교에 대한 박해 사건으로 발전하였으며,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
3. 경제약탈 : 식량의 약탈(일본의 공업화 정책에 따른 자국내 식량부족의 대안)
1) 산미증식계획실시(1920~26/26~1934): 증산량은 계획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수탈량은 계획대로 추진
- 식량부족의 심화 → 미곡소비량 감소, 잡곡 소비량 증가, 대지주 이익 증가, 자ㆍ소작농 몰락
- 조선농민은 쌀수탈 + 비료대금ㆍ곡물운반비ㆍ수리조합비까지 부담하는 이중고통으로 인해 유랑민화
- 30년에 공황기의 미가하락으로 인한 수리조합의 경영악화, 정부알선자금의 급격한 감소 때문에 수탈량 감소
- 33년에 일본내 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탈 중단
2) 회사령의 철폐(1920) : 신고제
- 일본인의 투자는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전환, 일본의 회사가 침투해 오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민족자본이 성장되는 경우도 있었음 경성 방직 주식회사, 평양 메리야스 등의 회사 설립
3) 일본상품의 관세 철폐(1923) → 일본상품의 유입 → 물산 장려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
4) 신은행령(1927) : 중소 규모의 은행을 모두 강제로 일본 은행에 합병
제3절 민족말살통치(1931~1945) - 1940년대부터 본격화
(3시기로 나눠봐야한다)
1. 배경: 만주사변(1931)// 중일 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을 도발 → 한반도를 전쟁의 병참 기지화
2. 통치방법
1)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 : 일선동조론, 내선일체
-‘황국신민서사’암송 강요. 신사 참배(36년)ㆍ궁성 요배 강요
- 신교육령 제정(1938): 우리말과 글의 사용 금지, 우리 역사 교육 금지
- 일본식 성명 강요: 창씨개명
- 민족 언론의 폐간(1940)
2) 경제약탈: 중공업 중심의 투자 시작(1926년 흥남 조선 질소 비료 공장)으로 경제약탈의 본격화
1) 1930년대 중반까지 *흥남 질소 비료공장: 친일파가 아닌 일본인이 직접 설립.
- 병참기지화(1930년대 이후): 중화학 공업, 광업 생산에 주력 → 소비재 부족 현상. 공장이 북부에 집중(지역간 불균형 초래)
- 남면북양(南綿北羊)정책: 일제의 공업 원료 증산 정책을 실시
- 농촌진흥운동(1932): 농민의 반발을 무마하고 농촌 통제를 강화하기위해 농민경제의 안정화를 명분
2) 중·일 전쟁(1937) 이후(1937~1945): 전쟁 동원과 군 위안부 징용, 국가총동원령의 반포(1938)
⑴ 물적 자원 수탈
① 국방헌금징수, 쇠붙이 공출제, 가축증식계획 실시, 산미증식계획 재개(40~45. 각 개인에까지 할당)
② 경제생활의 규제: 국내 식량사정 극도악화 → 식량 배급제 실시.
⑵ 인적 자원 수탈 (지원병제 → 국가총동원 → 국민징용제 → 학도지원병제 → 징병제 → 정신대)
① 강제 징병제: 지원병 제도(1938) → 학도지원병 제도(1943) → 강제 징병제(1944)
② 강제 징용제: 국민 징용령(1939) 공포 ⇒ 탄광, 철도, 군수 공장 노동자로 한국인을 동원 → 국내 농촌의 농업 생산력이 급격히 하락. 대략 170여 만명이 강제 징용에 동원
③ 종군 위안부: 국민정신총동원 연맹(1938) 조직 → 여자 정신대 근무령(1944)
● 일제에 저항한 종교활동
개신교 | ① 선교초기: 애국계몽운동에공헌 ,알렌,서재필, 1903황성기독교청년회(YMCA) ② 일제말기: 신사참배운동(1935)거부 |
천주교 | ① 사회사업(양로원, 고아원) ② [경향] 잡지 ③ 무장항일투쟁(의민단) [천주의] |
천도교 | ① 손병희 창시 ② 제2의 3ㆍ1운동 계획 ⇒ 1922년 자주독립선언문 ③ 기관지[만세보] ④ 조선농민사 ⇒ 개간운동, 저축운동, 소비조합운동 등 개량적 운동 청소년운동: 방정환, 어린이날제정, 잡지[어린이]발간(1923) ⑤ 1919년 개벽사 설립 ⇒ [개벽]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⑥ 동덕여학교 [2천만조손동개청] |
대종교 | 나철ㆍ오기호, 단군숭배, 중광단(1911) → 북로군정서조직, 해외항일운동 정신적 지주 |
불교 |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1913), 만당결성(1930, 항일비밀조직, 卍黨) |
유교 | 박은식, 유교구신론(1909) ⇔ 일제대동학회 |
원불교 | 박중빈, 개간사업, 저축사업, 새생활운동(남녀평등ㆍ허례허식폐지ㆍ미신타파) |
1) 천주교
- 조·프 수호 통상 조약(1886)을 통하여 선교의 자유를 얻음
-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 경향신문 등을 간행, 의민단(1919)을 조직하여 무장항일 운동을 전개
2) 개신교
- 교육운동과 의료사업의 전개: 알렌, 에비슨 등
- 한글 보급, 미신타파, 근대 문명의 소개, 남녀평등 사상의 보급, 신사참배의 거부하는 운동 전개
- 천도교와 함께 3ㆍ1 운동에 적극 참여, 105인 사건, 안악사건 등으로 탄압받음
3) 천도교(민족종교) ↔ 시천교(친일종교)
-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 보성사, <만세보> 발간 <어린이>, <개벽>, <학생>, 어린이날의 제정, 3ㆍ1 운동 주도
- 제2의 3ㆍ1운동의 계획: 자주독립선언문(1922)을 발표 “~으뜸 국민임을 재차 선언합니다.~”
4) 대종교(민족종교)
- 나철ㆍ오기호 등이 단군신앙을 발전시켜 창시, 국수주의 성격이 가장 강함(보수적)
- 중광단 조직 → 3·1운동 직후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무장항일운동을 전개(청산리대첩 등에 참여)
- 해외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
5) 유교 : 박은식이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유교구신론의 저술 → 대동교의 창시
* 박은식의 유교구신론: 유교가 대발전을 하지 못함은…3대 문제를 들어 개량 구신의 의견을 바치 노라…우리 유가에서 쉽고 정확한 학문(양명학)을 구하지 아니하고 질질끌고 되어가는대로 내버려 두는 공부(성리학)를 전적으로 숭상함이라. |
6) 불교
- 한용운이 <조선 불교 유신론>의 저술 →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추진(민족불교의 강조)
- 만권당의 조직과 민족종교의 전통유지에 노력
7) 원불교 : 개간사업과 저축운동을 전개, 남녀평등,“허례허식의 폐지”등에 앞장섬, 새생활운동
* 종교의 친일화: 대동학회(유교), 동양전도관(기독교), 본원사(불교) |
● 일제에 저항한 민족문화
1. 연극: 3․ 1이전(신파극), 3․ 1이후(극예술협회(1921)ㆍ극예술연구회(1931)), 민중계몽수단
토월회(1923~1926): 박승희ㆍ김기진, 본격적 근대극
2. 영화: 나운규 아리랑(1926), 조선 영화령 발표(1940)
3. 미술: 전형필(간송미술관, 문화재수집보호) * 친일: 조선문인협회, 조선음악가협회, 조선연극협회조직
4. 문학
1910년대 이전 (개화기) |
신소설 신체시 번역문학 |
①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장르가 등장,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중간단계인 과도기적 특성 ② 창가: 개화가사+찬송가+일본음악의 영향 독립가,권학가,경부철도가(최남선) ③ 신체시: 개화사상+창가와 근대시의 과도기적 형태 - 최남선(해에게서 소년에게): 언문일치 확립의 선구자 ⇒ 발전: 신채호(천희당시화) ④ 신소설: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과도기적 형태 - 이해조(자유종,모란병,새댁) - 안국선(금수회의록) - 이인직(혈의누,치악산,귀의성,모란봉) - 최찬식(안의성,추월색) |
1910년대 | 계몽문학 | ① 최초의 현대시(주요한[불놀이])와 소설(이광수[무정])탄생 ② 계몽주의 문학과 2인 문단시대 (이광수ㆍ최남선) ③ 신파극 유행과 창작 희곡의 등장(조중환의 병자삼인) |
1920년대 | 반계몽주의 신사조 등장 |
① 3ㆍ1운동 이후 동인지가 간행되고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경향 등장 ② 계몽성 탈피와 다양한 문예사조 전개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③ 20년대 중반 현실과 생활의 반영을 강조하는 신경향파 문학 대두 1925년 KAPF(조선프롤레타리아동맹) 결성: 프로문학(박영희,김기진) ④ 20년대 중반이후 프로문학에 반대하는 국민문학운동ㆍ시조부흥론 (최남선[백팔번뇌]), 한용운(님의침묵), 김소월(진달래꽃) 등 ⑤ 동인지 활성화 *동인지순서 [창개 폐장백 금영 조해문] - 창조(19,자연주의,김동인,전영택) - 개벽(20,사실주의,현진건,염상섭) - 폐허(20,퇴폐주의,염상섭,김억) - 장미촌(21,낭만주의,박종화,변영로) - 백조(22,낭만주의,박종화,나도향) - 금성(23,낭만주의,양주동,이장희) - 영대(24,민족주의,주요한,김소월) - 조선문단(24,민족주의,이광수) - 해외문학(27,외국문학번역,김진섭) - 문예공론(29 민족+사회주의,양주동) |
1930년대 이후 | 저항문학 순수문학의 부흥 |
① 사실주의ㆍ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작품 창작(청록파, 시문학파, 생명파, 전원파) ② 브나로드운동의 영향으로 계몽운동 재등장 ③ 중ㆍ일전쟁 이후 일제가 간접적ㆍ우회적인 항일표현도 금지 ④ 친일(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김활란, 노천명, 최린, 김억, 모윤숙) ⑤ 저항시인: 이육사(청포도ㆍ광야ㆍ자오선),윤동주(서시ㆍ별을 헤는 밤), 한용운(님의침묵) |
● 일제에 저항한 사회적운동
일제의 식민 정책 (민족 탄압책) |
⇔ | 사회적 저항 운동 |
농민ㆍ노동자 운동 | • 소작쟁의, 노동쟁의 • 조선노농총동맹(1924) → 조선농민ㆍ노동총동맹(1927)(분리됨) -->원래 같은 필드가 아닌데..힘이없어서 합침 |
청년운동 | • 지식개발과 사회교화 →자주독립의 기초 • 좌ㆍ우 청년의 통합(조선청년총동맹,1924) • 6ㆍ10만세운동, 광주학생 항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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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ㆍ여성운동 | • 꿈, 희망, 용기→ 애국심(천도교) • 여성계몽, 여성지위 향상, 근우회(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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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 | • 사상적 단합, 조직면에서 효과적 • 타 운동에 영향을 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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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유일당 운동 | • 독립운동노선의 통일 → 신간회(1927) | |||
기타운동 | • 형평사운동(1923), 수양동우회(1926), 문맹퇴치운동(1930) |
1. 사회적 민족 운동의 전개
1) 청년 운동: 조선청년총동맹 결성(1924) : 청년계의 민족 유일당
2) 소년 운동: 중일전쟁 이후 1937년 해산
- 천도교 소년회의 조직: 어린이날(1922.5.1) 제정 → 조선소년연합회 조직
3) 여성 운동: 부인회, 조선여자교육회, 조선여자청년회,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
- 20년대 초반: 여성 계몽적 성격의 실력 양성 운동
- 20년대 후반: 여성 해방을 계급 해방, 민족 해방의 문제로 간주하여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전개
- 근우회(1927.5): 신간회 출범 후 김활란 중심, 여성노동자의 권익옹호와 새생활 개선을 내걸고 여성계
민족 유일당 운동전개 → 1931년 신간회 해산과 함께 해산
근우회취지문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의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
4) 형평운동
- 조선형평사(1923.4.25): 백정 이학찬, 진주에서 조선형평사를 창립, 전국으로 확대
- 사회적 차별의 철폐를 통한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구현
→ <형평>이라는 잡지가 발간, 형평사의 운영을 위한 피혁공장이 설립
- 형평사조선대회 개최(1925.4) → 신파, 구파의 노선 대립으로 갈등 심화로 형평운동 분열
- 1935년 대동사로 개칭: 사실상의 기능을 상실 → 이후 순수 경제적 이익향상운동으로의 변질
-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 지금까지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압박을 받아왔던가?
5) 문맹 퇴치 운동
⑴ 1920년대: 문맹 퇴치 운동(학생, 지식인) 농촌계몽운동(언론사)
⑵ 1930년 전후: 언론사를 중심
① 문자 보급 운동(1929): 조선일보“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② 브나로드 운동(1932): 동아일보. 문맹 퇴치와 구습 타파, 생활 개선 목적. 한글 보급 운동
③ 조선어 강습회(1932): 조선어학회 주도
⑶ 일제의 탄압(1935): 엄격히 금지시킴
2. 경제적 민족 운동의 전개
1) 농민 운동(소작쟁의 ⇒ 소작권이동반대 > 소작료인하요구)
⑴ 1920년대 초반: 소작인조합 중심(농민은 노동자와다르게 계층있기에). 생존권투쟁이기에. 암태도소작쟁의(1923),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작쟁의(1924)
⑵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 영향으로 조선농민총동맹(전문화)(1927.9) 결성 → 전국에 농민조합 결성(조직적 전개)
⑶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반제국주의적 항일 민족운동 성격(폭발적 증가), 전반은 총독이 우가끼.
① 혁명적 농민 운동(비합법)으로 방향 전환
② 쟁의 수 산발적으로 증가(35년:2만5천건, 37년:3만2천건). 실제 참여하는 농민 수 감소(31~34)
③ 1935년 이후에는 급격히 줄어듦: 30년대 후반에 일제의 강경탄압으로 잠복기
2) 노동 운동(노동쟁의)
⑴ 1920년대 초반: 생존권 투쟁의 합법적 양상
⑵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사상 유입으로 조선노동총동맹(1927) 결성 → 노동운동 조직화
영흥 노동자 총파업(1928),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석유회사
⑶ 1930년대 이후: 반제국주의족 항일 민족 운동. 비합법 투쟁(폭력투쟁)
→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1930~1935년 노동쟁의가 집중적으로 발생 →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1936년 이후 급감 → 1940년 이후 거의 소멸
3. 민족 협동 전선 운동
1)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
- 배경 : 레닌의 약소민족 독립운동 지원약속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
- 국내 사회주의 단체 활동 : 서울청년회, 무산자동지회, 신사상연구회, 화요회, 북풍회
- 1차 조선공산당(1925.4) → 2차 조선공산당(1925.12) → 3차 조선공산당(1926.9) → 4차 조선공산당
- 2차조공(6.10만세운동의 격문살포시도 탄로되어 해체), 3차조공(정우회가 중심이 되어 신간회 결성에
영향, 신간회와 긴밀한 관계), 4차조공(반제국주의 혁명노선)
- 12월 테제(1928.12):= 코민테른, 인텔리 중심의 당 해체와 노동자·농민 중심의 당 재건을 명령, 식민지하에
서의 투쟁에 있어서 공동연합전선에 대한 포기를 촉구하고, 계급해방 전선을 강조(좌우연합에 대한 지원철회)
- 9월 테제(1930.9):= 프로핀테른, 신간회를‘소부르주아적 정당조직’으로 간주, 신간회 해소와
소시민적 노동운동을 혁명적 노동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지령
- 결과: 민족주의 운동과 대립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이 분열. 민족유일당의 필요성 대두 → 민족유일당 운동
2) 민족 유일당 운동(서울청년회 + 조선물산장려회)
- 자치운동론의 대두(1923) → 중국의 제1차 국공 합작(1924) → 북경촉성회의 창립(1926.10) →
6·10만세운동(1926) → 조선민흥회 조직(신간회 창립의 중요한 계기) → 정우회 선언(1926.11)
- 신간회(1927~1931) : 이상재, 안재홍‘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제창
정우회 선언 “우리가 승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건을 충분히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종래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싸워야 할 것이다.” |
● 독립군에서 광복군까지
1.독립군 활동 추이 [ 봉 훈 산 간 단 자 부 미 , 독 호로 쌍 대 ] (보훈청 간 군자3 미쓰3 만나서 연합)
봉오동전투 (+) | 1920.6 | 홍범도(대한독립군)+최진동(군무도독부군) |
훈춘사건 (-) | 1920.10 | 일제가 중국 마적(馬賊)과 짜고 간도지방의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 |
청산리전투(+) (봉오동의 10배) |
1920.10 | 김좌진(북로군정서군)+대한독립군(홍범도)+국민회군(안무), 이범석 |
간도참변(-) | 1920.10 | =경신참변, 봉오동ㆍ청산리전투에 대한 보복 |
대한독립군단조직(+) | 1920.12 | 간도참변후 독립군은 좀더 위로 올라가서 밀산부(이상설이 만든)에 집결후 대오 재정비, 대한독립군단(서일)(싹다 모아서) |
자유시참변(=흑하참변)(-) | 1921 | 소련 영내에서 적색군에 속아 내전에 참가 후 내전끝난후 무장해제 요구에 저항, 전투참변 |
3부 성립(+) 참정신 |
1923~5 | 참의부(압록강,23)ㆍ정의부(남만주,24)ㆍ신민부(북만주,25), 민정+군정 (하나하나가 자치정부 임시정부표방은 안함. ) (북간도 없는건...간도참변때문) |
미쓰야협정(-) | 1925 | 만주군벌 장작림과 미쓰야 협정(3부인사탄압, 독립운동단속, 체포자인도) |
3부 통합(+) | 1929 | (((1924: 중국 1차 국공합작----민족유일당 운동 영향 1925 치안유지법----계속 국내에서 저항하던 사회주의도 직격탄맞음 1926 순종 인산일--- 6 10 만세운동-----신간회 탄생배경))) 북만주에서 혁신의회(28)한국독립당(지청천- 한국독립군)조직 후 일부 → 남만주에서 국민부(29)조선혁명군(양세봉- 조선혁명군) (3부 하나로 통합은 실패) 북만주(28): 혁신의회는 참정신에서 탈퇴한 개인이 한번에 모인것 남만주(29): 국민부는 참정신이 단체로써 한번에 모인것 |
만보산사건(+) | 1931 | 일 이간질, 만주사변의 원인 |
만주사변(+) | 1931 | 만보산사건과 유조구날조사건에서 비롯, 독립군분산과 광복군편입 야기 |
한중연합작전(+) 한조 (윤봉길의거 계기) |
1932~3 | 한국독립군(지청천) + 중국호로군 ⇒ 쌍성보ㆍ대전자령 사도하자 전투 조선혁명군(양세봉) + 중국의용군 ⇒ 흥경성ㆍ영릉가 전투 (((의용은 징병의 반대말. 즉 자원. 의용은 다 빨간색.))) but 34년에 일제가 만주차지 |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혁명당 |
1935 | 김원봉, 민족주의계 + 사회주의계 (조선 민족 통일 전선), 조소앙 3균주의 바탕(임정계열 불참) |
광복진선 | 1937.8 |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민족주의 우파계열 단체 |
조선민족전선연맹 | 1937.12 |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 (근데 조선민족혁명당이 워낙유명해서 그냥 조선민족혁명당이라고 불림) 좌익단체 연합 |
조선의용대 (국민당의 도움있음) |
1938 | 조선민족혁명당산하부대 조선의용대(김원봉)→ 광복군에 흡수(1942) *조선의용군X (장제스가 일본어로 포로심문만 시킴. 무력을 못쓰게하고. 그래서 상당수는 화북으로 감. 그곳엔 중국공산당이 있었음. 즉 중국공산당과 연대.) 화북지대의 조선의용대는 조선독립동맹산하 조선의용군(김두봉)에 흡수1942) --->이 팀은 진짜 빨갱이. 그래서 한국광복군도 안들어옴.-->국공내전에 참전후--->북 인민군 그리고 남침. |
전국연합진선협회 | 1939.9 | 광복진선(김구) + 민족진선(김원봉) ⇒ 실패 |
한국독립당 | 1940.5 | 김구, 조소앙, 이청천, 조소앙의 삼균주의 바탕 |
한국광복군 (지청천) 창설 |
1940.9 | 중국 국민당 정부 승인을 얻어 충칭에서 창설. 대일선전포고. 영국과 연합(인도 미얀마 참전) 미국 oss 과 연합--> 정진군 준비(그러나 일왕 항복으로..끝) |
2.공산주의계 무장 투쟁
춘황ㆍ추수 투쟁 | 1931 | 소작료 인하ㆍ농민의 생존권 및 자치권 확보 요구 |
항일 유격대 | 1931 | 조국 광복회 국내 조직의 지원을 받아 국내진공작전 단행 (만주에 남아서 레지스탕스하던..) |
동북인민혁명군 | 1933.8 | 한인 항일 유격대+중국 공산당 유격대 |
동북항일연군 | 1936.1 | 시안사건을 계기로 이념ㆍ노선ㆍ사상에 관계없이 연합, 재만한인 조선광복회 산하 |
조국 광복회 | 1936.5 | 동북항일연군+민족주의자 계급ㆍ성별ㆍ당파의 차별을 묻지않고 일치단결 |
보천보전투 | 1937.6 | 동북항일연군 내 항일 유격대가 보천보에 침투, 김일성 |
화북조선청년연합회 | 1941.1 | 화북지역 공산주의자+조선의용대 화북지대 |
조선독립동맹 | 1942.7 | 김두봉ㆍ최창익중심, 조선의용군 조직, 중국팔로군과 연합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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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역별 독립군 활동
1) 서간도(=남만주)
1. 서로군정서(1919.5, 공화주의) → 대한통군부에 흡수(1922.1) 1) 신흥강습소 → 신흥중학 →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독립군 간부 양성) 2) 예하부대: 의용군 → 육군주만 참의부에 편입(임시정부 직할부대) 3) 광한단: 서로 군정서를 이탈하여 새로이 조직, 적극적 군사행동 주장 2. 대한독립단(1919. 복벽주의) ┬민국독립단(조병준을 따르는)┬광복군 사령부(1920)(총영) └기원독립단(계속 복벽주의인)┘ 3. 광복군 사령부(1920):임시정부의 통제를 받는 직속기관, 대한통군부(1922.1)에 흡수. 정예전투부대로 광복군 총영(1920) 설치 4. 대한통의부(군정+민정) ┬ 통의부(공)와 의군부(복)대립 → 정의부(1923.11)(의군부 아예 제거함) └ 육군주만참의부(1923.8)(같은편끼리 암살이 싫어서 나옴) 1) 군대 : 대한통의부 의용군 2) 광동학교 등 9개의 소학교 운영, <경종보> 등의 기관지 발행 |
2) 북간도
1. 북로군정서(1919.8, 김좌진):대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 인사들이 조직 청산리대첩, 간도참변 이후 대한독립군단으로 발전, 자유시 참변 후 해체 2. 대한독립군(1919.12, 홍범도)┬봉오동전투(20.6)→ 청산리대첩(20.10)→ 간도참변(20.10) ⤵ + 국민회군(안무) │ 자유시참변(1921.6.28) ← 대한독립군단(1920.12) ⤶ 군무도독부군(최진동) ┘ ↳ 신민부(북만주.1925.3)북간도는 일본손에 들어감. |
3) 3부 성립 후 전개 (만주사변후)
30년대 이후 관내로 들어옴
1. 3부의 성립 1) 구분 : 서간도-육군 주만 참의부ㆍ정의부 북만주-신민부(김좌진) 2) 성격 : 군사조직(군정기관) + 행정조직(민정기관), 3권 분립체제 → 사실상 3개의 정부 형태 2. 미쓰야 협정(1925.6) : 만주의 군벌 장쭤린과 총독부의 미쓰야 사이에 현상금을 건 협정 3. 3부 통합 운동(1927): 통합 회의 결렬 후 3부 해체(1929.12)(머니까 남쪽이랑 북쪽이랑 나누자 여부로) 1) 혁신의회(북만주.1928.12) → 한국독립당(1930.7, 예하부대: 한국독립군) 2) 국민부(남만주.1929.4)→ 조선혁명당(1935, 조선혁명군) 4. 만주사변(1931.9) → 만주국 수립(1932.3) (1932 윤봉길 의거) 5. 한중 연합 작전 수행 1) 조선 혁명군(양세봉, 국민부)+ 중국 의용군 → 영릉가 전투(32), 흥경성 전투(33) 2) 한국 독립군(지청천, 혁신의회)+ 중국 호로군 →쌍성보 전투(32),사도하자, 경박호, 대전자령 전투(33), 동경성 6. 한중 연합 작전의 약화 1) 한국독립군 해체(1933.10)→강제로 무장해제(그때 호로군이 사회주의 쿠데타로 바뀜). 잔여세력은 동북인민혁명군, 조선의용대로 흡수 2) 조선혁명군의 해체(1937.3) ┬→ 일부는 동북항일연군(중국이 볼때 동북)에 흡수되어 투쟁을 계속 └→ 일부는 조신민족혁명당의 산하부대인 조선의용대에편입 |
- 독립군은 호로군
- 지청천 쌍사자대동 어흥
4) 민족 연합 전선의 형성 노력
조선민족 혁명당(1935.6) ───→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1937) ────┐ │ └ 김원봉. 만주지역 민족유일당 ↳ 조선의용대(1938.10) ↓ │ 전국연합진선협회(1939.9) ↓조소앙, 박창제, 이청천 탈퇴 ↑ 한국국민당(1935.11) ─────→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1937)─-┘ 조선의용대(1938)┬ 조선의용대(화북.1941) → 조선독립동맹에 흡수(1942.8) └ 조선의용대(충칭.1941) → 한국광복군에 흡수(1942.10) |
1. 조선민족 혁명당: 만주일대의 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혁명당, 조선혁명당, 광복단이 참여. 1)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 계열 한국독립당의 경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의견이 분열 2) 민족주의계, 사회주의계 모두 참여한 통일 전선 단일 정당(민족혁명당)으로 성립 3) 목적: 토지 국유화를 바탕. 민주공화국 수립 4) 분열: 김원봉(공산주의 이념)이 조선민족혁명당의 전권장악→ 조소앙·박창세 탈퇴(1935.9) 2. 한국국민당: 분열되었던 임시정부세력(한국독립당)이 다시 통합되어 결성. 김구, 이동녕 등 한인애국단과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하지 않은 임시정부 고수파 중심의 우익통합체 1) 목표: 일제의 완전 박멸, 민주공화국 수립 2) 성격: 공산주의와 무산계급 혁명론 배격. 삼균주의를 강령으로 채택 3.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1937.8.17) (나간세력들이 사회주의보고 니네가 들어와) 1) 중일전쟁 이후 민족주의 우파 계열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 -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대한인국민회(미주지역) 등 9개 2) 의의: 중일 전쟁 이후 독립 전쟁의 체제 기반을 구축음 3) 한계: 좌·우 연합에는 소극적. 완전 통합시키지 못하고 연합단계에 머묾 4. 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민전.1937.12) (한커우: 한의대) 1) 계급혁명보다 민족독립을 강조 2) 조선의용대 조직(1938.10): 조선 민족 혁명당의 직할 부대 - 분열(1940년 이후) ㄱ. 조선의용대(화북지대)+홍군=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 조선독립동맹에 흡수(1942.8) ㄴ. 조선의용대(충칭본대) → 김원봉이 임시 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 흡수(1942.10) 3) 한계 : 임시정부를 부정. 광복진선과 대립 5. 전국연합진선협회(1939.9.22): 민족주의+사회주의 1) 중국 국민당 정부는 광복진선의 김구와 민족전선의 김원봉에게 연합할 것 종용. 2) 단일당 결성을 위한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 개최. 이념의 차이로 일주일도 안 돼 와해 |
- 민혁 조민혁 한(한커우/우한)의대 조똑똑
5) 1940년대의 독립 전쟁
1. 한국 독립당(1940.5.9): 임시정부 그 자체 1) 전국연합진선협회의 해체 후 우파 3당만의 통합추진. 충칭에서 단일대당으로 창당. 2) 이념: 조소앙의 삼균주의(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완전한 균등) 3) 한국광복군(1940.9): 충칭(중경), 김구와 지청천 중심으로 조직 ① 태평양 전쟁(1941)이 발발하자, 대일·대독 선전포고문을 발표(1941.12) ②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 : 인도, 미얀마 등지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1943)→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동 작전(1944)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내진입작전 시도 ③ 국내 정진군 편성(1945) → 일제의 패망으로 국내진입계획이 무산 4) 건국강령의 반포(1941.11) :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독립을 위한 건국강령 반포 5)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 정부ㆍ조선의용대 합류(1942.10) ⇒ 민족주의계 + 사회주의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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