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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 아프가니스탄, 거문도 사건, 영국, 러시아

Jobs 9 2021. 8. 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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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

그레이트 게임(영어: The Great Game) 또는 그림자의 토너먼트(러시아어: Турниры теней)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이자 냉전을 총칭하는 의미이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페르시아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일부에서는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을 종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식민지 시기가 끝난 이후, 이 용어는 중앙아시아의 강대국과 지역 강국의 지정학적 권력과 영향력에 대한 경쟁을 의미하는 말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레이트 게임이란 용어는 영국 동인도 회사 웨일스 기병대의 6대 대공의 정보 장교인 아서 코놀리(1807년 ~ 1842년)의 말에 기인했다.
19세기 내내 영국의 정치가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한 것은 러시아라는 거인에 대한 공포였다. 러시아의 남하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와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위협이 가중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제프리 브룬, 《19세기 유럽사》


"영국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다른 국가가 인도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 즉 수에즈 지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국은 오스만 정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인도로 향하는 또 다른 육로가 있다. 수에즈 지협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직 러시아만이 이 길을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길을 이용하지 않고 단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등의 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는 영국령 인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보리스 치체린(Boris N. Chicherin. )

 


나폴레옹 전쟁 이후 반프랑스 동맹군의 승리를 이끈 주역인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소위 4대 전승국이 형성된다. [3][4] 이들 중에서도 영국과 러시아가 전쟁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폴레옹 1세의 패망 이후에는 영국과 러시아 간의 대결구도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특히 영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유럽 대륙 내에서 패권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저지해왔기 때문에 러시아의 팽창에 대응해야 했다.

러시아로서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해양 진출이 제한적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국방과 전쟁수행에 있어서 병력의 이동은 내선 전략에 의지해야했다. 이 점은 유럽 대륙의 다른 강대국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우에는 국토가 워낙 광대한데 반해 험난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수송에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철도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공군이나 공수군과 같은 신속대응 부대로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있지만, 19세기의 러시아 제국에서는 병력을 재배치하는데만 해도 몇 개월에서 심지어는 연단위로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광대한 국토를 커버해야되는데 해양력이 제한적이니 유사시 병력을 신속하게 재배치하거나 집중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외국, 특히 영국과의 분쟁에 있어 전략적 방어자라는 부담을 가져야 했다.

크림 전쟁에서는 이같은 취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 남부가 직접 위협받고 있는 위기상황에서도 곳곳에 병력의 분산 배치를 강요받았다.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근해의 발트해에도 침공 위협 때문에 300,000명이나 되는 병력이 배치되었고, 동시기 카프카스에도 200,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묶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의 참전 가능성까지 대비해야해서 폴란드 방면으로도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했다.[5] 여기에 추가적으로 앞선 곳들보다 규모는 작아서 수천~수만 정도이지만 국내 곳곳에 치안을 위해 병력을 주둔해야했다.

크림 전쟁 결과, 잘나가는 놈은 일단 다구리 놓는 유럽의 역사적인 전통(...)을 따라 영국이 주도하여 다른 강대국과 함께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려 들면서 러시아가 생각보다 몹시 취약하다는 점이 새삼스레 확인되었다. 1870년 당시에 러시아 전쟁부는 여기저기에 고정적으로 배치해야되는 병력을 제외하고, 러시아 제국이 유럽 방면에 가용가능한 병력은 600,000명 정도로 결론지었다. 분명 적은 규모가 아니지만 같은 시기 유럽 대륙의 다른 강대국들은 단독으로 그 이상의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평가되었다. 영국이 주도하는 잠재적인 연합을 상대해야 된다고 상정했을 때 상당히 암울한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제시 된 것이 바로 인도를 공격한다!였다. 당시 러시아 지도부는 인도를 실재적으로 정복한다기보다는 영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특히 유럽 방면에서의 부담 해소를 목적으로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일종의 군사적 시위뻥카라 볼 수 있다. 겸사겸사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도 강화하고.

군사-외교 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파탄난 경제가 전통이라 할 정도로 여러모로 맛이 가있는 나라였고 농업•산업 전반면에서 빈약한 입지에 있었지만, (비록 당시엔 제대로 개발하진 못 했어도) 천연자원은 많았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당시 돈 잘 벌리는 물품들(차, 커피, 담배, 고무 따위의 환금작물Cash Crops)에 접근할 수 있는 신대륙이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진출할 방도가 없었다. 발트해에 어느정도 진출하긴 하였으나, 그쪽 항구는 겨울이면 얼어버리기 십상에, 발트해 넘어가 봐야 나오는 건 영국 뿐(...)이었다.

지금이야 바렌츠 해 쪽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동항인 무르만스크가 있지만, 이곳은 지리적 위치상 신대륙이나 동남아 방면으로의 진출이 쉽지 않고, 이 시기만 해도 무르만스크 일대는 거의 개발되지 않은 오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반쯤은 있으나마나 한 땅이었다.

한편 크림 반도를 통해 장악한 흑해 또한, 결국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지 못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걸 건넌다 처도 지중해를 지나 지브롤터를 거처 대서양으로 나온다는 것도 무리였다. 나온다 처도 신대륙은 어떻게 가고 희망봉은 또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수에즈 운하가 생긴 이후엔 이야기가 좀 다르지만 그건 프랑스가 만들고 영국이 관리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반도로 진출해서 갈망의 도시를 따버리는 것도 방책이긴 했지만, 바로 그 갈망의 도시를 러시아가 낼름하게 가만히 둘 유럽 나라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방법은 아예 지중해와 발트해, 대서양을 안 거처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페르시아로 밀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험준한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9] 어떻게 페르시아까지 갈 것이며, 가는 길에 만나는 길막용 환자 오스만 제국은 또 어찌할 것이며, 페르시아도 더럽게 넓고 험준한데 그건 또 어떻게 다 따먹을지 답이 안 나왔다.

결국 눈길은 중앙아시아로 쏠리게 되었다. 희대의 똥땅 취급받는 척박한 동네지만, 이걸 뚫고 내려가면 바로 인도양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신장-위구르 지역을 뚫고 내려가서 버마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뚫고 말라카 해협에 갈 수도 있을 노릇이었다.

한편, 이런 러시아의 행보를 보는 영국은 "저 커다란 러시아 놈들이 중앙아시아 고속도로(?) 타고 인도에 처들어온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당시 대영제국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열강이었으나, 국력도 쎄고, 지하자원도 많고, 땅도 넒고(당시 2위), 인구도 많은 러시아 제국은 언젠가 영국에 맞먹을 수 있는 잠재적인 경쟁자로 꼽혔고,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을 영국은 전 세계 각지에서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결국 크림 전쟁에서 양측이 정면충돌을 벌였고, 뒤떨어진 기술력과 산업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러시아 제국이 패배하게 되었다. 자타공인 유럽의 경찰국가였던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는 큰 충격에 빠지고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한편 영국은 방심하지 않고 곳곳에서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외교적 공작을 벌이고 다녔다.

그나마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떼어가서 마침내 제대로 바다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저 멀리 서쪽에서 연해주까지 함대가 날아서 갈 수도 없었고, 당시엔 북극항로 같은 것이 없었으며, 지금도 북극항로는 말로만 존재하는 전설 속 무언가 취급 받는 수준의 개노답 뻥 항로 상태를 못 벗어나고 있다.[17] 심지어 연해주를 통한 확장도 러일전쟁에서 깨지면서 처참히 박살났다. 결국 러시아는 2차대전 이후 쿠릴열도를 획득하면서 대양진출에 성공하게 된다.[18]

물론 당대 열강 중 산업화면에서 제일 후발주자였던 일본 제국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고, 실제로 인명피해도 매우 많았으나 영국의 엄청난 지원 덕에 승리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최강 발트 함대를 비롯한 해군력은 일본에 완전히 박살난 상황이었고, 더 이상의 해양 진출을 노릴 수단 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영국은 큰 피해 없이 일본을 통해 러시아의 해군력과 극동의 거점을 박살낼 수 있었으므로 실제론 영국의 완승이었던 셈.

한편, 독일 제국이 엄청나게 팽창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페르시아에선 민중 봉기가 일어나던 상황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 제국을 견제하고 페르시아 지역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상황이었다. 결국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양측이 영러협상을 맺게 되었고, 양측이 프랑스와 더불어 동맹을 체결하면서 그레이트 게임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그레이트 게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리스 제국, 무슬림들의 칼리프 제국, 징기스칸의 몽골 제국, 대영 제국, 붉은 군대의 소련, 그리고 미국에 이어 이제 중국이 ‘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의 초대를 받고 있다. 앞서의 제국들이 아프간에서 모두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아프간을 전격적으로 점령했지만, 현지의 거센 저항에 시달리다가 제국의 힘이 쇠잔하는 재앙을 맞았다.특히 근대 이후 영국과 소련,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것은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할 아프간에서 세력 공백이 생겨서 안보 위기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남진하는 러시아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소련은 아프간의 사회주의 정권 붕괴가 야기할 안보 위기를 막기 위해, 미국은 9·11 테러를 감행한 알카에다를 응징하고 아프간의 테러 기지화를 막기 위해 침공했다가, 모두가 참담한 재앙을 겪고 철수했다.이제 아프간에서 미군 철수로 다시 세력 공백이 조성되고 있다. 이번 세력 공백은 중국을 초대하고 있다. 중국에 위기와 기회가 모두 어른거린다.소련의 침공 이후 아프간은 중국에 완충지대였다. 미국이 기획한, 아프간에서 벌어진 반소련 무자헤딘 항쟁에 중국은 무기를 공급하는 등 적극 가담했다. 이 과정은 중국이 아프간을 통해서 중앙아시아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소련이 철수하고, 엄혹한 탈레반 통치하의 카불에서도 중국 매춘 조직이 먼저 진출했다.미국의 아프간 침공도 중국에게는 아프간 안팎의 이슬람주의 세력 제어 등 안정화 노력은 미국에 맡기고, 자신들은 이를 향유하며 영향력을 확장하는 기회였다. 중국은 아프간에서 메스아이나크 구리 광산, 아무다리야 분지의 유전 개발권 등을 따냈다. 중국의 세력 확장인 일대일로 사업에서 아프간은 필수적인 국가가 됐다.아프간 안팎에서 편익만 누리던 중국은 이제 비용도 지불하게 됐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 5월 “아프간에 주둔군을 두고 있는 외국이 책임 있는 방식으로 철수해 아프간 국민에게 더는 불안과 고난을 주지 않길 호소한다”고 논평한 것은 중국의 불안과 불편을 말해준다. 반면,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아프간 철군 결정은 중국과 코로나19 같은 도전에 자원을 집중하려는 목표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성을 비워서 적을 유인하는 ‘공성계’이다. 아프간을 비워줘서, 중국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비워진 성이 반드시 공성계의 덫은 아니다. 비워진 성인 아프간의 주인이 될 것으로 보이는 탈레반은 중국을 “환영받는 친구”라고 초대하고 있다. 탈레반 대변인은 <월스트리트 저널> 등 외신들에 “우리는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신장위구르 지역의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중국의 단속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중국도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프로젝트로 고속도로·철도·파이프라인 등을 연결하는 620억달러(약 71조1500억원) 규모의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을 아프간까지 연결하는 협상을 미군 철수 발표 이후 아프간과 진행 중이다.비워진 성인 아프간이 중국에는 덫이 아니라 기지로 접수된다면, 유라시아에서 새로운 세력균형이 이뤄질 수 있다. 중국 주도로 아프간 안팎이 안정화되고, 중앙아시아가 인도양 연안 등 유라시아 초승달 지역으로 연계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미국 패권에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로 평가한 중국-러시아-이란의 반미 연대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하지만 아프간의 안정을 주변 국가 모두가 반드시 원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간의 반소련 무자헤딘 투쟁 지원을 주도한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 전 대통령은 “아프간이라는 땅은 항상 적당히 끓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프간의 분쟁을 통해 인도와 영유권 다툼을 하는 카슈미르 지역의 정세를 유동화시켜서 인도에 안보 부담으로 작용시키겠다는 의도이다.이번에는 중국과 경쟁하는 인도가 아프간 분쟁을 유동화시켜야 할 이유가 커지고 있다. 아프간 안팎의 불안정은 이제 인도보다는 중국에 더 부담이다. 인도는 아프간 내전 때 반탈레반 세력인 타지크 중심의 북부동맹을 러시아, 이란과 함께 지원했다. 러시아와 이란이 중앙아시아의 안정을 바라기는 하나, 탈레반과 중국의 영향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터키도 미군이 철수하는 카불 국제공항의 운영을 맡겠다고 나서고 있다.‘비워진 성’ 아프간은 또 다른 제국 중국을 초대하며, 다시 ‘제국의 무덤’이 될지를 가늠하는 21세기의 그레이트 게임을 점화하고 있다,

 


동아시아판 그레이트 게임, '거문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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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의 흔적은 한반도에도 남아 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바로 그것이다. 거문도 사건은 1885년 당시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불법 점거했다가 2년 뒤인 1887년에 철수한 사건으로 동아시아판 그레이트 게임의 서막이며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1815년 워털루 전쟁 이후 나폴레웅이 퇴장하자 유럽의 강자로 부상한 영국은 지중해 한 가운데의 말타섬과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출구인 지브롤터를 차지하고, 수에즈운하와 싱가포르의 말라카해협, 홍콩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사실상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봉쇄했다.

게다가 1858년부터 인도를 직접 통치하게 되자 인도에서 다량으로 생산되는 목면으로 맨체스터의 방직공업이 호황을 누려 영국은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영국이 독보적인 존재로 부상하자 러시아가 먼저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아우르는 제국이 되어 있었으나,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 전략의 첫 번째 목표는 크림반도가 있는 흑해였다.

그리스정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가 흑해 남쪽의 오스만 터키에게 시비를 걸어오자,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터키를 지원하고 나섰다. 이 전쟁이 바로 나이팅게일이 크게 활약했던 크림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했다.

흑해를 통한 남하정책이 좌절되자 러시아는 인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국들과 토후국을 흡수하면서 인도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인도와 러시아 사이에 놓여 있는 아프가니스탄이 두 세력 간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된다.

1885년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작은 오아시스 '판데'를 점령하자, 영국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부르크 주재 대사를 통해 러시아가 '판데'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격할 경우 즉각 전시상황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북서 인디아(이하 인도)에 주둔 중이던 2만 5천의 영국군은 출동 태세에 돌입한다.

그리고 동북아 지역에 있던 영국 해군에게 거문도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왜 갑자기 거문도를 점령하라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1883〜1885년 사이에 조선과 러시아가 맺은 '조러 비밀협약' 때문이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민비 세력은 청나라가 대원군을 다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과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불러들였다.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흑심을 품고 있던 러시아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유사시에 거문도를 러시아 해군의 석탄보급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비밀협약을 맺게 된다.

조선이 러시아와 밀약을 맺었다는 일본 주재 영국대사관의 보고가 전해지자, 영국에서는 러시아의 야심을 경계하는 책이 수만 부씩 팔리며 러시아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은 영러전쟁에 돌입하기 직전에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러시아의 '판데' 점령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 불과 일주일만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허를 찔린 러시아는 제주도나 원산을 점령하거나 조선으로 출병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과의 전면전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러시아 황제는 '판데' 너머로까지 진출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렇게 아프카니스탄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졌던 긴장은 2년여가 지난 1887년 마침내 양국이 외교적으로 아프카니스탄 국경을 설정하는데 합의함으로써 해소된다. 그리고 영국 해군도 같은 해 거문도에서도 철수하게 된다.

흑해와 중앙아시아를 통한 남하정책이 영국에 의해 좌절되자, 러시아는 이제 극동 아시아지역을 통한 남하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만주와 한반도였다.

1888년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통되자 남하정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바다를 통하지 않고 아시아로 물자와 장비를 실어 나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가 컸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중국의 요동반도를 확보한다. 하지만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혀 요동반도를 다시 중국에 반환하는데 이것을 '삼국간섭'이라 한다.

그러자 영국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고 군함의 설계도와 건조방법 등을 일본에 넘긴다. 영일동맹은 장차 일본과 러시아가 싸울 때 독일과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할 경우, 영국은 일본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영국 편을 들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일본이 마음놓고 러시아에 선제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러일전쟁이었다.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비용은 영국과 미국 시장에서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되었고, 결국 독일과 프랑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려다 크림전쟁에서 패하고, 다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로 진출하려다 실패했다. 마침내 만주와 조선반도를 통해 나오려다가 러일전쟁에서 패하여 결국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이렇게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은 실패로 돌아가고 영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철통 봉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바턴을 이어받은 구소련은 남하정책의 야욕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1979년 겨울 구소련의 탱크부대가 드디어 '판데'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침공해 들어갔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다.

1978년 왕정을 타도하고 등장한 아프간의 무신론 공산정권이 유신론 이슬람 세력과 치열한 내전을 벌이다 세불리를 느끼자 구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 아프간 10년 전쟁의 발단이었다.

영국의 바턴을 이어받은 미국은 구소련에 대해 대거 보복조치를 취했다. 1980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전략무기협정의 미국의회 비준을 무기한 연기했으며, 대소 곡물 수출 금지, 파키스탄에 대한 대규모 군사 경제 원조 등의 조치를 취했다.

결국 구소련의 아프간 전쟁은 미국의 월남전처럼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원조를 받은 이슬람의 무자헤딘 세력을 진압하는데 실패하고, 나아가서는 구소련이 1991년 일거에 해체되는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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