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어휘, 한자

고사성어, 사자성어, 한자성어 유래 #01

Jobs 9 2024. 4. 2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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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박명(佳人薄命)

아름다운 여인은 운명이 기박함.
아래 시의 작자 소식이 항주, 양주 등의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 우연히 절에서 나이 삼십이 이미 넘었다는 예쁜 여승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웠을 소녀시절을 생각하며 미인은 역사적으로 운명이 기박하였음을 시로 쓴 데서 전하여졌음.

두 볼은 엉긴 우유와 같고 머리는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고,
눈빛이 발에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난다.
본디 흰 비단으로써 선녀의 옷을 지으니,
입술연지는 천연의 바탕을 더럽힌다 하여 바르지 않았네.
오나라 사투리의 애교 있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애띠고,
무한한 사이의 근심 다 알 수 없네.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
문을 닫고 봄이 다하니 버들꽃 떨어지네.

이 시는 1086년부터 8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가인박명’은 어린 승려를 노래한 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 각주구검(刻舟求劍)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생각만 고집하며 이를 고치지 않는 어리석고 미련함을 비유하는 말.

戰國時代, 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유사어】수주대토(守株待免)

 

 

●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진심으로 사귐.

당송팔대가 중 당대의 두 명문 대가에 한유와 유종원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고문 부흥 운동을 제창한 문우로서 세인으로부터 ‘한유(韓柳)’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당나라 11대 황제인 헌종때 유주 자사로 좌천되었던 유종원이 죽자 한유는 그 墓誌銘을 썼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인 파주 자사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라야 비로소 절의가 나타나는 법이다. 평소 평온하게 살아갈 때는 서로 그리워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놀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부르곤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이며[肝膽相照]’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한다. 말은 제법 그럴 둣하지만 일단 털끝만큼이라도 이해 관계가 생기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꾼다. 더욱이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쳐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이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유사어】피간담(披肝膽)

 

 

● 거안제미(擧案齊眉)

밥상을 눈썹과 가지런하도록 공손히 들어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을 깎듯이 공경함’을 이름.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이란 학자가 있었다. 뜻이 있어 장가를 늦추고 있는데 같은 縣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못생긴 맹광이라는 처녀가 서른이 넘은 처지에서 “양홍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소문을 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는 이유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하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생활을 하자 양홍도 그녀와 둘이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 시 속에 왕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잡으려 하자 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 지기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고백통이 양홍 내외를 보통으로 보지 않고 도와서 양홍은 그 후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 건곤일척(乾坤一擲)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 걸이로 승부나 성패를 겨룸.

이 말은, 당나라의 大文章家인 한유가 河南省 內의 鴻溝를 지나다가 그 옛날, 한왕 유방에게 ‘乾坤一擲’을 촉구한 張良 · 陳平을 기리며 읊은 회고시 <과홍구>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에 있다.
용은 지치고, 호랑이는 피곤하여 이 강을 가르니,
억만 창생들은 성명이 있다.
누가 군왕을 권하여 말머리를 돌릴 수 있을까?
진정 한 번 던짐을 이루어 건곤을 건다.
항우가 齊·趙·梁 땅을 전전하면서 전영·진여·팽월 등의 반군을 치는 사이에 유방은 관중을 합병하고 이듬해 의제 弑害에 대한 징벌을 구실로 56만 대군을 휘몰아 팽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급보를 받고 달려온 항우가 반격하자 유방은 아버지와 아내까지 적의 수중에 남겨둔 채 겨우 목숨만 살아 하남성 內의 형양으로 패주했다.
그후 병력을 보충한 유방은 항우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싸움을 멈췄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고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다. 이어 유방도 철군하려 하자 참모인 장량과 진평이 유방에게 진언했다.
“漢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고 제후들도 따르고 있사오나, 楚나라는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는 데다가 군량마저 바닥이 났사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楚나라를 멸하려는 천의이오니 당장 쳐부숴야 하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꼴’[養虎遺患]이 될 것이옵니다.”
여기서 마음을 굳힌 유방은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하였다. 이듬해 유방은 한신·팽월 등의 군사와 더불어 安徽城 내의 垓下에서 楚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四面楚歌’ 작전을 폈다. 참패한 항우는 안휘성 내의 烏江으로 패주하여 자결하고, 유방은 천하 통일의 길로 들어섰다.

 

 

●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함.

四書의 하나인 《大學》은 유교의 교의를 간결하게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으로서 그 내용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요약된다.
팔조목 중 여섯 조목에 대해서는 《大學》에 해설이 나와 있으나 ‘격물’과 ‘치지’ 의 두 조목에 대해서는 해설이 없다. 그래서 宋代 이후 유학자들 사이에 그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설이 나와 유교 사상의 근본 문제 중의 하나로 논쟁의 표적이 되어 왔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宋나라 주자의 설과 明나라 왕양명의 설을 들 수 있다.
① 朱子의 說 : 萬物은 모두 한 그루의 나무와 한 포기의 풀에 이르기까지 각각 ‘이(理)’를 갖추고 있다. ‘이(理)’를 하나하나 궁구해 나가면 어느 땐가는 활연히 만물의 겉과 속, 그리고 세밀함(精)과 거침(粗)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② 왕양명(王陽明)의 說 : 격물(格物)의 ‘物’이란 사(事)이다. ‘事’란 어버이를 섬긴다든가 임금을 섬긴다든가 하는 마음의 움직임, 곧 뜻이 있는 곳을 말한다. ‘事’라고 한 이상에는 거기에 마음이 있고, 마음 밖에는 ‘物’도 없고 ‘理’도 없다. 그러므로 격물의 ‘格’이란 ‘바로 잡는다’라고 읽어야 하며 ‘事’를 바로잡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格物’이다. 악을 떠나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사람은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양지를 명확히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지(知)를 이루는(致) 것이며, ‘致知’이다.

 
  

● 결초보은(結草報恩)

죽어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춘추시대 晉나라의 위무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이 들자 본처의 아들 과(顆)를 불러 “네 서모를 내가 죽거들랑 改嫁시키도록 하여라.”하였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들 과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는 반드시 순사케 해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는 “사람이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르리라.”하고는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改嫁시켜 드렸다.
그 후 진환공이 晉나라를 침략하여 군대를 보씨에 주둔시켰다.
보씨의 싸움에서 위과는 晉의 장수로 있었기 때문에 秦의 大力士 두회라는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위과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두회의 발 앞의 풀을 엮어(結草) 그가 넘어지게 하여 위과가 두회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改嫁하여 잘 살고 있소.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고자 한 것이오.”

 


●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 안에 으뜸가는 미인. 임금이 혹하여 나라가 뒤집 혀도 모를 만한 미인.
‘傾國’이 ‘傾城’과 아울러 美人을 일컫는 말로 쓰여지게 된 것은 이연년의 다음과 같은 詩에서 유래한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세상을 끊고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을 기울이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기울게 하네.
어찌 성을 기울이고 나라를 기울임을 알지 못하랴.
아름다운 사람은 두 번 얻기 어렵네.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여 보니 더없이 예뻤고 춤도 능숙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이부인이다. 傾國이란 말은 李白의 「名花傾國兩相歡」 구절과 백거이의 ‘장한가’의 「한왕은 색(色)을 중히 여겨 傾國을 생각한다.」라는 구절과 항우에게서 자기 妻子를 변설로써 찾아준 후공을 漢高祖가 「이는 천하의 변사이다. 그가 있는 곳에 나라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고 칭찬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 계륵(鷄肋)

무엇을 취해 봐야 이렇다 할 이익은 없어도 버리기는 아까움의 비유.

삼국 정립 시대가 나타나기 1년 전,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고 한중을 평정한 다음 위나라 조조의 군대를 맞아 한중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은 여러 달에 걸친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유비의 兵站은 제갈량의 용의주도한 확보로 넉넉한데 반하여 조조는 兵站을 소홀히 하여 내부의 질서가 문란하고 거기에다 탈영병이 속출하여 공격도, 수비도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막료 한 사람이 현황을 보고하고 후퇴 여부를 묻자 닭고기를 뜯고 있던 조조는 닭갈비[鷄肋]를 들었다 놓았다만 했다. 그 막료가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나오는데 주부인 양수가 듣고 長安으로 귀환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참모들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닭의 갈비는 먹으려 하면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내버리기도 아까운 것이오. 한중을 여기에 비유한 것은 승상께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겠소?”라고 답했다.
과연 양수의 예상대로 조조는 그 이튿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조조는 이익이 없다고 하여 한중에서 후퇴하고, 그곳을 확보한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위나라는 촉한과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後漢書》 楊修傳에 실려 있으며, 오늘날 <닭의 갈비[鷄肋]>는 그다지 쓸모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는 비유로 쓰여지고 있다.

 

 

● 계명구도(鷄鳴狗盜)

행세하는 사람이 배워서는 아니 될, 천한 기능을 가진 사람.

전국시대 중엽, 齊나라 孟嘗君은 왕족으로 재상을 지낸 정곽군의 40여 자녀 중 서자로 태어났으나 靖郭君은 자질이 뛰어난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설 땅의 영주가 된 맹상군은 선정을 베푸는 한편 널리 인재를 모음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떨렸다.

이 무렵, 맹상군은 대국인 秦나라 소양왕으로부터 재상 취임 요청을 받았다. 내키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수락했다. 그는 곧 3,000명의 식객 중에서 엄선한 몇 사람만 데리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에 도착하여 소양왕을 알현하고 값비싼 호백구를 예물로 진상했다. 그러나 소양왕이 정작 맹상군을 재상으로 기용하려 하자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제나라의 왕족을 재상으로 중용하심은 진나라를 위한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 약속은 깨졌다. 소양왕은 맹상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은밀히 죽여 버리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맹상군은 궁리 끝에 소양왕의 총희에게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내게도 진상한 것과 똑같은 호백구를 주시면 힘써 보지요.”

당장 어디서 그 귀한 호백구를 구한단 말인가. 맹상군은 맥이 빠졌다. 맹상군을 수행한 식객 중 도둑질에 능한 특기를 가진 ‘구도’란 자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날 밤 궁중으로 잠입해서 전날 진상한 그 호백구를 감쪽같이 훔쳐 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소양왕은 총희의 간청에 못 이겨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맹상군은 일행을 거느리고 서둘러 국경인 함곡관으로 향했다. 한편 소양왕은 맹상군을 놓아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추격병을 급파했다. 한밤중에 함곡관에 닿은 맹상군 일행은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첫닭이 울 때까지 관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일행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동행한 식객 중에 소리 흉내내기에 특기가 있는 ‘계명’이 인가 쪽으로 사라지자 이내 첫닭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네 닭들이 일제히 따라 울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병졸들이 눈을 비비며 관문을 열자 맹상군 일행은 함곡관 문을 나와 말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격병이 관문에 닿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고 한다.

 

 

● 고복격양(鼓腹擊壤)

‘태평성세를 즐김’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


먼 옛날 중국에 성천자로 이름난 요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났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요 임금은 정말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복을 하고 민정을 살펴보러 나갔다.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 곳에는 머리가 하얀 한 노인이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鼓腹]’, 발로 ‘땅을 구르며[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요.

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 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정치가 잘 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요 임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동의어】격양지가(擊壤之歌), 격양가(擊壤歌)

 

 

● 고성낙일(孤城落日)

남의 도움이 없는 몹시 외로운 정상의 비유.
이 詩는 왕유의 칠언절구인 <送韋評事-위평사를 보냄>에서 읊은 것이다.
장군을 따라서 우현을 취하고자 하니,
모래밭으로 말을 달려 거연으로 향하네.
멀리 한나라 사자가 소관 밖에 옴을 아니,
근심스러워 보이는구나, 고성낙일의 가여.
이 詩에서는 직접 세력이 쇠퇴하여 도움도 기대도 할 수 없는, 마음이 안 놓이는 상태에 있음을 비유하여, 「孤城落日」이 불려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요새 밖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한 것이며, 그곳에 간 친구가 그곳에서 겪을 안타까운 처지를 상상하여, 그 처지를 위로하는 기분으로 읊은 것이다.
요새 밖에서의 안타까움을 ‘孤城’과 ‘落日’이라는 사물에 집약시킨 왕유의 필치도 멋지지만, 이것을 홀로 쓸쓸하게 완전히 썩어버릴 일에 마음이 안 놓이는 것에다 연관지어 사용하는 후세 사람들의 말 부리는 법도 또한 묘미가 있다.

 


● 고침안면(高枕安眠)

근심없이 안심하고 잘 잠.

전국시대 소진과 장의는 종횡가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합종, 장의는 연횡을 주장했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 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 문왕 10년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애왕에게 말했다.
“전하, 만약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쳐들어 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禍만 없다면 전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주무실 수 있사옵고[高枕安眠]’ 나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애왕은 결국 진나라와 화목하고 합종을 탈퇴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방문, 설득하여 마침내 주나라 난왕 4년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 곡학아세(曲學阿世)

정도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함.

한나라 6대 황제인 경제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에 사는 원고생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 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가 어지러워져서 속설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를 알아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유사어】어용학자(御用學者)

 

 

● 공중누각(空中樓閣)

공중에 누각을 짓는 것처럼 근거나 토대가 없는 사물을 이르는 말.

송나라의 학자 심괄이 저술한 일종의 박물지인 《夢溪筆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등주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성시누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해시라고 이른다.
훗날 청나라의 학자 적호는 그의 저서 《통속편》에서 심괄의 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이처럼 ‘空中樓閣’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海市’라는 것은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史記」의 ‘천관서’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기는 누대를 본뜬다. 넓은 들판의 기운이 궁궐을 이룬다.

【유사어】과대망상(誇大妄想)

 

 

● 과혁지시(裹革之尸)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시체.

마원은 후한 광무제 때 복파장군으로 지금의 월남인 교지를 평정하고 돌아온, 용맹과 인격이 뛰어난 맹장으로 다시 계속해서 남부지방 일대를 평정하고 수도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환영인파 속에는 지모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맹익도 있었는데 그도 판에 박은 듯한 인사말을 하자 마원은,

“나는 그대가 남다른 충고의 말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남과 똑같은 인사만 한단 말인가. 옛날 복파장군 노박덕이 남월을 평정하고 일곱 군을 새로 만드는 큰 공을 세우고도 겨우 수백 호의 작은 봉토를 받았다. 지금 나는 별로 큰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작은 공에 비해 상이 너무 크네. 이대로 영광을 오래 누릴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대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가?”

맹익이 좋은 꾀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자 마원은,

“지금 흉노와 오환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사나이는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그가 자청하여 다시 싸움터에 나가게 되자 광무제는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마원을 다같이 환송토록 명했다고 한다.

 

 

● 관포지교(管鮑之交)

중국의 관중과 포숙아 같은 친교라는 뜻으로, 친구 사이의 다정한 교제를 일컬음.

춘추시대 초엽, 제나라에 관중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한다.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유사어】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 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반의어】시도지교(市道之交)

 

 

● 괄목상대(刮目相對)

괄목하고 대면함. 남의 학식이 부쩍 는 것을 일컬음.

삼국시대 초엽, 오왕 손권의 신하 장수 중에 여몽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券]’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사 노숙이 전시 시찰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 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함.

유교는 북송 중기에 주돈이가 나와서 《태극도설》과 《통서》를 저술했고, 그 뒤에 정호와 정이 형제가 사서를 정하여 성도를 밝히었으며, 주자가 이것을 집대성하여 형이상학으로서의 경학을 수립하여 소위 송학을 대성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풂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은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애련설> 한 편은 글 안에 도학의 향기도 풍기지만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식과 함께 북송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황정견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춘릉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속이 담박 솔직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고 평하고 있다.

「광풍제월」이란 앞에서 말한 뜻이거니와,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에 비유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

공자는 아첨꾼에 대해 《論語》 ‘학이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에는 ‘인(仁)’이 적다.

말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또 공자는 ‘자로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직 의연하고 질박 어눌한 사람은 ‘인(仁)’에 가깝다.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은 ‘인(덕을 갖춘 군자)’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라도 ‘인(덕을 갖춘 군자)’ 그 자체는 아니라고 공자는 ‘옹야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질 빈빈한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

즉, 문(文:형식)과 질(質:실질)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군자라는 뜻이다.

【반의어】강의목눌(剛毅木訥), 성심성의(誠心誠意)

【참 조】눌언민행(訥言敏行)

 

● 교주교슬(膠柱鼓瑟)

고지식하여 조금도 변통성이 없음의 비유.

조나라에 조사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 괄이라는 아들이 있어 병서를 가르쳤는데 매우 영리하여 뛰어나게 병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조사는,

“전쟁이란 생사가 달린 결전이므로 이론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병법을 이론적으로만 논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괄이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가 큰 변을 당할 위험이 있다.”

하며 부인에게 나라에서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도록 말려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뒷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첩자를 보내 流言蜚語를 퍼뜨렸다.

“조나라 염파 장군은 늙어서 싸움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진나라는 조괄이 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流言蜚語에 빠진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상여가 극력 반대하면서,

“임금께서는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마치 기둥을 아교로 붙여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괄은 한갓 그의 아버지가 준 병법을 읽었을 뿐, 때에 맞추어 변통할 줄을 모릅니다.”[膠柱鼓瑟]

그러나 임금은 그토록 신임하던 인상여의 말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하였다.

조괄은 대장이 되는 그날로 병서에 있는 대로 하여 전부터 내려오는 군영들을 뜯어고치고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대로만 작전을 전개했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은 이론만으로 작전을 감행한 끝에 40만이라는 대군을 몽땅 죽이는 중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참패를 가져왔다.

거문고의 기둥을 풀로 붙여 고정해 두고 거문고를 타니 조율을 할 수 없게 되어 소리가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 교칠지심(膠漆之心)

아교[膠]와 옻칠[漆]처럼 끈끈한 사귐이란 뜻으로,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교분을 이르는 말.

唐나라때 백낙천과 원미지는 교서랑시절의 동료요, 천자가 친재하여 등용하는 과거에 함께 급제했고, 詩의 혁신에도 뜻을 같이 해서 漢나라 시대의 민요를 토대로, 시대의 폐단인 백성들의 분노와 고통과 번뇌를 담은 악부에 유교적인 민본사상을 맥박치게 하는 신악부를 지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두 사람 다 시골로 좌천되었다. 서로 떨어져 있게 되니 그리워서 백낙천이 원미지에게 편지를 썼다.

“4월 10일 밤에 낙천은 아뢴다.

미지여, 미지여,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이미 3년이 지났네. 그대의 편지를 받지 못한 지도 2년이 되려고 하네. 인생이란 길지 않은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니 말일세. 하물며 아교와 옻칠 같은 마음으로써 북쪽 오랑캐 땅에 몸을 두고 있으니 말일세. 나아가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물러

서도 서로 잊을 수 없네.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어, 각자 흰머리가 되려고 하네. 미지여, 미지여,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실로 하늘이 하신 것이라면, 이것을 어찌하랴!“

 



● 구밀복검(口蜜腹劍)

말로는 친한 체하나 속으로 해칠 생각을 가짐.

장량과 제갈량, 강태공 등이 좋은 방면의 모사였다면, 당 현종 때 재상을 19년 지낸 이임보는 나쁜 방면으로 그들과 맞먹는 모사였다. 간사하기로는 조조와 필적할 인물이나 조조는 대인에 속하지만 임보는 소인 가운데 소인이었다.

당나라를 뒤엎을 만한 반란을 일으켰던 안록산도 이임보가 두려워 그가 죽은 지 3년 후에 반란을 일으킬 만큼 그를 두려워했다. 《십팔사략》에 기록된 이임보의 평을 보자.

이임보는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성격이 음험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口蜜腹劍]’라고 말했다. 서재에 앉아 깊이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다음은 반드시 주살이 있었으며 가끔 큰 옥사를 일으켰다. 태자로부터 이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재상 지위에 있던 19년 동안에 천하의 난리를 길러내었으나, 현종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안록산도 이임보의 술수를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유사어】소리장도(笑裏藏刀), 소중유검(笑中有劍)

 

 

● 구우일모(九牛一毛)

많은 가운데서 가장 적은 것의 비유.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때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 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옵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한 후 궁형에 처했다. 세인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라 일컫고 있다. 사마천은 이를 ‘임안에게 알리는 글’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 적고, 이어 착찹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 녕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유사어】창해일속(滄海一粟), 창해일적(滄海一滴), 대해일적(大海一滴)

 

 

● 군계일학(群鷄一鶴)

평범한 사람 가운데의 뛰어난 사람을 이름.

죽림칠현 중 위의 혜강의 아들로 혜소가 있었는데 10살 때 아 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에서 벼슬하던 산도가 무제에게 상주하였다.

“《서경》에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혜강은 도륙당했음)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뛰어납니다. 그에게 비서랑 벼슬을 시켜 주십시오.”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가 처음으로 낙양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

“그것은 자네가 그의 부친을 애초부터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네.”

【동의어】계군일학(鷄群一鶴)

 



● 권선징악(勸善懲惡)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노나라 성공 14년 9월에 제나라로 공녀를 맞이하러 가 있던 교여가 부인 강씨를 제나라로 데리고 돌아왔다. 교여라고 높여서 부른 것은 부인을 안심시켜 슬며시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이보다 앞서 선백이 제나라로 공녀를 맞이하러 갔었을 때는 선백을 숙손이라고 불러 군주의 사자로 높여 부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렇게 말한다.

“춘추 시대의 호칭은 알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알기 쉽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뜻이 깊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으면서도 정돈되어 있고, 노골적인 표현을 쓰지만 품위가 없지 않으며,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한다.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지을 수 있겠는가?”

‘권선징악’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 권토중래(捲土重來)

한 번 패했다가 세력을 회복해서 다시 쳐들어옴.

이 말은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의 詩 <제오강정>에 나오 는 마지막 구절이다.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

수치를 싸고 부끄럼을 참음이 남아로다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권토중래’는 아직 알 수 없네

오강은 초패왕 항우가 스스로 목을 쳐서 자결한 곳이다. 한왕 유방과 해하에서 펼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에서 패한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가 정장으로부터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항우는 “8년 전 강동의 8,000餘 子弟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 부형들을 대할 것인가?”라며 파란만장한 31년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항우가 죽은 지 1,0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두목은 오강의 객사에서 일세의 풍운아―단순하고 격한 성격의 항우,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는 장사 항우, 사면초가 속에서 애인 우미인과 헤어질 때 보여준 인간적인 매력도 있는 항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가 많은 곳이므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한 항우를 애석히 여기며 이 시를 읊었다. 이 시는 항우를 읊은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참 조】선즉제인(先則制人), 건곤일척(乾坤一擲), 사면초가(四面楚歌)

 

 

● 극기복례(克己復禮)

과도한 욕망을 누르고 예절을 좇음.

공자의 대표적 사상은 ‘인(仁)’이었다. 《논어》에는 “仁은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누가 仁한가? 모든 사람이 仁 때문에 살면서 仁을 모르고 仁을 외면한다”고 하시며 “仁 좋아하기를 색(色) 좋아하듯 한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다” 라고도 했다.

극기복례도 인(仁)의 정의 중의 하나이다.

어느 날,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감이 인(仁)이 된다. 하루동안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인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

안연이 그 조목을 묻자,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했다.

 

 

● 금란지교(金蘭之交)

① 다정한 친구 사이의 정의 ② 다정한 친구 사이의 교제

“사람들과 한가지로 하여 먼저는 울부짖고 뒤에는 웃는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혹은 나가 벼슬하고 혹은 물러나 집에 있으며 혹은 침묵을 지키지만 혹은 크게 말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몹시 친밀한 사이를 「金蘭之交」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친구 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을 「金蘭之交」라고 하는 말은 白樂天의 시구에도 나온다.

【참고】 금란부(金蘭簿)

 

 

● 금상첨화(錦上添花)

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을 더함.

왕안석은 북송 중엽, 군사비 팽창에 의한 경제적 파탄을 구하려고 획기적인 신법을 실시한 정치적 귀재일 뿐 아니라 송나라 시대의 시풍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다음 시 <卽事>는 그가 만년(晩年)에 정계를 떠나 남경(南京)의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은 남원을 흘러 언덕 서쪽으로 기우는데

바람엔 맑은 빛이 있고 이슬에는 꽃의 화려함이 있네.

문앞의 버들은 옛 도령의 집이요

우물가의 오동은 전날 총지의 집이라.

좋은 모임에서 술잔을 거듭 비우려 하는데

아름다운 노래는 비단 위에 꽃을 더한 듯

문득 무릉의 술과 안주를 즐기는 손이 되어

내 근원에 응당 붉은 노을이 적지 않으리라.

 

 

● 금성탕지(金城湯池)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

진나라 시황제가 죽고 어리석은 2세 황제가 즉위하자 전국시대 6강국의 후예들이 군사를 일으켜 고을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관청을 점거했다. 그 무렵, 무신이라는 사람이 조나라의 옛땅을 평정하고 무신군이라 일컬었다.

이를 본 모사 괴통은 범양 현령 서공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는 지금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말대로 하시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공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엇이 위급하다는 거요?”

“사또께서 현령으로 재임한 지난 10년 동안에 진나라의 가혹한 형벌로 인해 부모를 처형당한 사람, 손발이 잘린 사람, 억울하게 죄인이 된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그들이 사또를 원망하며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모르오. 그런데, 전화위복이란 또 무슨 말이오?”

“제가 사또를 대신해서 지금 세력이 한창인 무신군을 만나 싸우지 않고 땅이나 성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계책을 말해 주면, 그는 틀림없이 사또를 후대할 것입니다.”

“그럼,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시오.”

이리하여 무신군을 찾아간 괴통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귀공이 범양을 쳐서 현령이 항복한 경우, 그 현령을 푸대접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부귀를 바라는 각지의 현령들은 ‘항복하면 범양 현령처럼 푸대접받는다.’며 더욱 군비를 강화하여 마치 ‘끓어오르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 같은 철벽의 수비를 굳히고 귀공의 군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땐 공격이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지금 범양 현령을 극진히 맞이하여 그로 하여금 각지의 현령들을 찾아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싸우지 않고 기꺼이 항복할 것입니다.”

【동의어】탕지철성(湯池鐵城)

【유사어】금성철벽(金城鐵壁)

 

 

● 금의야행(錦衣夜行)

비단옷을 입고 밤에 간다는 뜻으로, 아무 보람없는 행동을 가리킴.

유방에 이어 진나라의 도읍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유방과 대조적인 행동을 취했다. 우선 유방이 살려둔 3세 황제 자영을 죽여 버렸다. 또 아방궁에 불을 지르고 석 달 동안 불타는 것을 안주 삼아 미인들을 끼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다. 유방이 창고에 봉인해 놓은 엄청난 금은보화도 몽땅 차지했다.

모처럼 제왕의 길로 들어선 항우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스로 그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자 모신 범증이 극구 간했다. 그러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누벼온 싸움터를 벗어나 많은 재보와 미녀를 거두어 고향인 강동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자 한생이라는 사람이 또 간했다.

“관중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인데다 땅도 비옥합니다. 하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호령하십시오.”

그러나 항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보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공한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다. 항우는 동쪽의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항우에게 함양에 정착할 뜻이 없음을 알게된 한생은 항우 앞을 물러나가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놓은 것처럼 지혜 가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군.”

이 말을 전해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장 한생을 잡아 삶아 죽였다고 한다.

【동의어】의금야행(衣錦夜行), 수의야행(繡衣夜行)

【반의어】금의주행(錦衣晝行)

 

 

● 기호지세(騎虎之勢)

범을 타고 달리는 기세. 곧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는 형세.

남북조 시대 말엽인 581년,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의 선제가 죽자, 재상 양견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다. 외척이지만 한족이었던 그는 일찍이 오랑캐인 선비족에게 빼앗긴 이 땅에 한족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선제가 죽은 것이다.

양견이 궁중에서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남편의 뜻을 알고 있던 아내 독고부인으로부터 전간이 왔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함께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옵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이 어린 정제를 페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문제라 일컫고 국호를 수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년, 문제는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周나라의 宣帝가 돌아가심을 당하여, 高祖인 文帝가 조정에 들어가서 백가지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독고황후는 사람을 시켜 高祖에 일러 말하기를, “대사는 이미 그러한 것이니, 호랑이를 탄 형세로 내려 올 수가 없으니, 이것에 힘쓰라.”

【원 말】기수지세(騎獸之勢)

【유사어】기호난하(騎虎難下)

 

 

● 난형난제(難兄難弟)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두 사물의 낫고 못함을 분간하기 어려움의 비유.

“양상군자”로 유명한 후한의 진태구가 낭능후를 지낸 순숙의 집을 아들 진기와 진심, 진군을 데리고 찾아갔다. 순숙은 빈약하고 검소하여 노복도 없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순숙은 어린 막 내만 방에 두고 나머지 일곱 명은 전부 심부름을 시켰다. 이 때 태사가 임금께 아뢰기를, “덕성이 동쪽 순숙의 집에 다 모여 있다.”라고 했다.

한번은, 진식이 친구와 어디를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렸으나 워낙 늦어 먼저 출발했는데 늦게 온 친구가 진식을 욕하자 그 때 진기는 이렇게 말했다.

“손님께서 아버지와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하시고는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 이제 오셨으니 손님과 제 아버지 중 누가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까? 그리고 자식 앞에서 그 아버지를 욕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진식을 찾아왔던 사람은 친구의 어린 아들에게 책망을 당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내 사과하려 했으나 어린 진기는 이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또 한번은 사촌간인 진기의 아들과 진심의 아들 사이에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말이 나지 않자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와서 판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진식은, “원방도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季方)도 동생 되기가 어렵다.”라고 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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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가일몽(南柯一夢)

꿈과 같이 헛된 한 때의 부귀 영화.

당나라 9대 황제인 덕종 때 광릉 땅에 순우분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자 어디서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의 명을 받고 대인을 모시러 온 사신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 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부마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 태수를 제수받고 부임했다. 남가군을 다스린 지 20년, 그는 그 간의 치적을 인정받아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단라국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천도해야 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南柯]’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 구멍을 원상태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구멍을 살펴보았으나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해야 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동의어】남가지몽(南柯之夢), 남가몽(南柯夢), 괴몽(槐夢)

【유사어】한단지몽(邯鄲之夢), 무산지몽(巫山之夢), 일장춘몽(一場春夢)

 

 

● 남귤북지(南橘北枳)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뜻으로, 사람은 환경에 따라 악하게도 되고 착하게도 된다는말.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에 안영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나라 영왕이 그를 초청했다. 안영이 너무 유명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욕망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수인사가 끝난 후 영왕이 입을 열었다.

“제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경과 같은 사람밖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소?”

안영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을 비웃는 영왕의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예,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뽑혀서 초나라로 왔습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격의 대답이었다.

그때 마침 포리가 죄인을 끌고 지나갔다.

“여봐라!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예, 제나라 사람이온데, 절도 죄인입니다.”

초왕은 안영에게 다시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하고 안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강남에 귤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줄 압니다.”

그 기지와 태연함에 초왕은 안영에게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려.”하고는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동의어】귤화위지(橘化爲枳)

 

 

● 남상(濫觴)

사물의 처음. 시작.

공자의 제자에 자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양자강은 사천땅 깊숙히 자리한 민산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모든 일은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 아 입었다고 한다.

《筍子》 ‘孔子家語’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子路가 옷을 잘 차려입고 孔子님을 뵈었다. 그러자 孔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由야, 이 옷자락은 무엇이냐? 옛날에 강은 민산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처음에 나옴에 그 근원은 가히 써 술잔에 넘칠 만하였다. 그러나 그 강의 나루에 이르러서는, 배 를 늘어놓지 못하고 바람을 피하지 못하여, 건너지 못하였다. 오직 下流에 물이 많음이 아니겠느냐? 지금 너도 의복을 이미 盛하게 차려 입고 얼굴빛이 충만되었구나. 천하에 장차 누가 즐겨 너에게 간하랴!”

【유사어】효시(嚆矢), 권여(權與)

 

 

●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 곧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뜻.

전국시대 말엽,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나라 혜문왕은 동생이자 재상인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모수라는 식객이 자천하고 나섰다.

“대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것은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죠.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20번째 수행원으로 뽑았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으로 환대 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의어】추처낭중(錐處囊中)

 

 

● 누란지위(累卵之危)

몹시 위험한 형세.

전국시대, 세 치의 혀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하는 세객들은 거의 무두 책사 · 모사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 · 모사를 종횡가라고 일컬었다.

위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도 종횡가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힐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 수가의 종자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수가보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齊나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참언했다.

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답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장록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왕계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소양왕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위태롭다.’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시대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후 范雎은 ‘원교근공책’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동의어】위여누란(危如累卵)

 

 

● 다기망양(多岐亡羊)

①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로 갈려 진리를 얻기 어려움. ② 방침이 많아 도리어 갈 바를 모름.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와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은 물론 양자네 집 하인들까지 청해서 양을 찾아 나섰다. 하도 소란스러워서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섰느냐?”

양자의 하인이 대답했다.

“예, 양이 달아난 그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현명한 제자가 선배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스승인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큰길에는 갈림길이 하도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에 와서 이 같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동의어】망양지탄(亡羊之歎)

【유사어】독서망양(讀書亡羊)

 

 

●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더욱 좋음.

한나라 고조 유방은 명장으로서 천하 통일의 일등 공신인 초왕 한신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날, 漢 高祖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한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신은 ‘다다익선’이옵니다.”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의 장수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동의어】다다익판(多多益辦)

 

 

● 당랑거철(蟷螂拒轍)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반항함.

⑴ 《韓詩外傳》(券八)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 때의 일이다.

어느날,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던 도중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허, 맹랑한 놈이로군. 저건 무슨 벌레인고?”

장공이 묻자 수레를 모는 어자가 대답했다.

“사마귀라는 벌레이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을 모르는 놈이온데, 제 힘도 생각지 않고 강적에게 마구 덤벼드는 버릇이 있사옵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말했다.

“저 벌레가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천하 무적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수레를 돌려 피해 가도록 하라.”

⑵ 《文選》에 보면,

‘蟷螂拒轍’은 삼국시대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陳琳)이란 사람이 유비 등 군웅에게 띄운 격문에도 나온다.

“조조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 된다. 그러니 모두 원소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

【동의어】당랑지부(螳螂之斧), 당랑당거철(蟷螂當拒轍), 당랑지력(螳螂之力)

【유사어】당랑규선(螳螂窺蟬)

 

 

● 대기만성(大器晩成)

크게 될 사람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⑴ 《三國志》‘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위나라에 최염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大器晩成’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를 보좌하는 삼공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⑵ 《後漢書》에 보면,

후한을 세운 광무제 때 마원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까지 된 인물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大器晩成’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 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제목으로 다듬어 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하라.”

⑶《老子》에도,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동의어】대기난성(大器難成)

【유사어】대재만성(大才晩成)

 

 

● 도원결의(桃園結義)

‘의형제를 맺음’이란 뜻.

전한은 외척에 의해 망했고 후한은 환관에 의해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황건적의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문란한 국정에 거듭되는 흉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태평도의 교조 장각의 깃발 아래로 모여 들어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수는 무려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한 관군은 이들 난민들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했다. 당황한 정부에서는 각 지방 장관에게 의용병을 모집해서 이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주 탁현에서 의용군 모집 공고문을 본 유비는 나라 걱정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유비를 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장비였고, 그 다음에 관우를 만났다. 그들 셋은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나라 걱정을 하다가 의기가 투합하여 나라를 위해 함께 일어서기로 결심을 했다.

장비의 요청으로 그의 집 후원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고 천하를 위해 일하기로 맹세를 했다.

이어서 세 사람은 3백 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 후, 제갈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여 유현덕은 조조, 손권과 함께 촉나라를 세워 삼국시대를 이루었다.

 

 

● 도청도설(道聽塗說)

길거리에 펴져 돌아다니는 뜬소문을 이르는 말.

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論語》 ‘陽貨篇’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들은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길거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리는 것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좋은 말은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하고 천도를 지상에서 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는,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억제하고 인덕을 쌓으며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덕을 쌓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論語》에서 이르고 있다.

⑵ 후한시대, 반고가 엮은 《漢書》 ‘藝文志’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체로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임금이 하층민의 풍속을 알기 위해 하급 관리에게 명하여 서술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세상 이야기라든가 길거리의 뜬소문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

소설이란 말은 이런 의미에서 원래 ‘패관소설’이라고 일컬었으나 나중에 그냥 ‘소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유사어】구이지학(口耳之學), 가담항설(街談巷說), 유언비어(流言蜚語)

 

 

● 동병상련(同病相憐)

①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② 어려운 사람끼리 동정하고 도움.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년, 오나라의 공자 광은 사촌동생인 오왕 요를 시해한 뒤, 오왕 합려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소부 비무기의 모함으로 태자태부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光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이며 초나라를 공략해야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으리라는 원려 때문이었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피리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하상가에도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월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분사하고 말았다.

【유사어】동우상구(同憂相救), 동주상구(同舟相救), 동기상구(同氣相救), 동악상조(同惡相助), 동류상구(同類相救), 오월동주(吳越同舟), 유유상종(類類相從)

 

 

● 득롱망촉(得隴望蜀)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욕심만 부림’을 이르는 말.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의 유분자를 비롯하여 농서에 외효, 촉에 공손술, 수양에 유영, 노강에 이헌, 임치에 장보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 유분자, 유영, 이헌, 공손술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그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하고 서주 상장군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 9년, 광무제와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외아들 외구순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년,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을 이루었다.

【동의어】평롱망촉(坪隴望蜀), 망촉지탄(望蜀之歎)

【유사어】계학지욕(谿壑之慾), 차청차규(借廳借閨), 거어지탄(車魚之歎), 기마욕솔노(騎馬欲率奴)

 

 

● 마이동풍(馬耳東風)

남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고 지나쳐 흘려 버림을 이름.

이것은 李白의 <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의 詩 가운데 있는 말이다.

“푸른 산을 둘러싸고 뜬구름이 하염없이 이어져 있고,

그 하늘 가운데 외로운 달이 흐르고 있다.

외로운 달은 추위에 못 이겨 빛나고,

은하수는 맑고 북두칠성은 흩어져 깔려 있는데,

밤의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난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밤 그늘 서리의 하얀 것을 생각하고,

자네의 집 우물의 구슬 난간에 얼음이 얼어붙은 모양을 생각하고,

얼어붙은 자네의 마음을 생각했다.

인생은 아차 하는 사이에 백년도 채우지 못한다.

자, 술이나 마셔 한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햇볕이 쪼이지 않는 북쪽 창문 속에서,

시를 읊거나 부를 짓는 정도의 일일세.

일 만 마디를 지어도 고작 술 한 잔의 가치도 없네.“

그리고 나서 李白은 이렇게 읊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다 머리를 흔들 걸세.

동풍이 말의 귀를 쏘는 것 같음이 있네.

 



● 막역지우(莫逆之友)

아주 허물없는 사이.

<莊子>에 똑같은 형식으로 이야기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자사와 자여와 자리와 자래 이렇게 네 사람은 서로 함께 말하기를, “누가 능히 無로써 머리를 삼으며, 삶으로써 등을 삼고, 죽음으로써 엉덩이를 삼을까? 누가 사생존망이 한 몸인 것을 알랴! 우리는 더불어 벗이 되자.” 네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었다.

자상호와 맹자반과 자금장 이렇게 세 사람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서로 더불어 함이 없는데 서로 더불어 하며, 서로 도움이 없는데 서로 도우랴. 능히 하늘에 올라가 안개와 놀며, 끝이 없음에 날아 올라가며, 서로 잊음을 삶으로써 하고, 마침내 다하는 바가 없으랴”하고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 보고 웃으며, 서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벗이 되었다.

 



● 맥수지탄(麥秀之歎)

고국의 멸망을 한탄함.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은나라의 주왕이 음락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한 신하 중 삼인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 기자, 비간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 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의 아들 발에게 주살 당하고 천하는 주왕조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무왕 발은 은왕조의 봉제사를 위해 미자를 송왕으로 봉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조선왕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을 금치 못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교활한 저 철부지가

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동의어】맥수서유(麥秀黍油), 맥수지시(麥秀之詩)

 

 

● 맹모단기(孟母斷機)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왔을 때, 짜던 베를 칼로 잘라서 훈계한 고사로 ‘어머니의 엄격한 자녀 교육’을 이름.

孟子는 孔子의 손자인 子思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거니와, 이보다 앞서 소년시절에 유학에 나가 있던 孟子가 어느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는 베를 짜고 있다가 孟子에게 물었다.

“네 공부는 어느 정도 나아갔느냐?”

“아직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옆에 있던 칼로 끊어버렸다. 孟子가 섬찟하여 물었다.

“어머니, 그 베는 왜 끊어버리시나이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짜던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君子란 모름지기 학문을 배워 이름을 날리고, 모르는 것은 물어서 앎을 넓혀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과 몸을 편안히 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위험을 저지르지 않는다. 지금 너는 학문을 그만두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심부름꾼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생계를 위하여 베를 짜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차라리 그 夫子에게 옷은 해 입힐지라도, 오래도록 양식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여자 가 그 생계의 방편인 베짜기를 그만두고, 남자가 덕을 닦는 것에 멀어지면, 도둑이 되지 않는다면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孟子가 두려워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고서 배움에 힘써, 子思를 스승으로 섬겨, 드디어 천하의 명유가 되었다.

이것을 소위 ‘斷機之敎’라고 일컫는다.

【동의어】단기지계(斷機之戒), 단기계(斷機戒)

【유사어】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조용한 물. 곧 ‘맑고 고요한 심경’을 이름.

《莊子》 ‘德充符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노나라에 왕태라는 올자가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孔子의 제자 상계가 특출한 면도 없는 왕태에게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孔子는 “사람은 흐르는 물로 거울을 삼는 일이 없이 그쳐 있는 물로 거울을 삼는다. 왕태의 마음은 그쳐 있는 물처럼 조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거울삼아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또 같은 ‘德充符篇’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이런 말을 들었는가? ‘거울이 밝으면 티끌과 먼지가 앉지 않으며, 티끌과 먼지가 앉으면 밝지 못하다. 오래도록 현자와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다.’ 이제 자네가 큰 것을 취하는 것은 선생님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말을 함이 이와 같으니, 또한 허물이 아니겠는가?”

 



● 명모호치(明眸皓齒)

눈동자가 맑고 이가 희다는 뜻으로, ‘미인’을 형용하는 말.

안록산이 난리를 일으켜 낙양이 함락된 것이 755년, 두보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다. 그해에 두보는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을 처자에게 통고하기 위하여, 당시 소개되어 있는 長安 근처의 봉선으로 갔다.

도적들의 수중에 있는 長安에서 봄을 맞이한 杜甫는 남몰래 江頭를 찾아가,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하고 이 江頭를 슬퍼하며, 목소리를 삼키고 울면서 이 <哀江頭>란 시를 지었던 것이다.

밝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피로 더러워진 떠도는 혼은 돌아가지를 못하네.

맑은 위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검각은 깊은데,

蜀나라로 끌려가 사니 피차간 소식이 없네.

인생은 情이 있어 눈물이 가슴을 적시니,

강물에는 강꽃이 피니 어찌 마침내 다함이 있으랴.

황혼에 오랑캐 기마들은 티끌로 城을 채우는데,

城 남쪽으로 가고자 하여 城 북쪽을 바라보네.

여기에서 ‘明眸皓齒’라고 한 것은 楊貴妃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 모순(矛盾)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어느날 초나라 장사꾼이 저잣거리에 방패[盾]와 창[矛]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자, 여기 이 방패를 보십시오. 이 방패는 어찌나 견고한지 제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한 다음 이번에는 창을 집어들고 외쳐댔다.

“자, 이 창을 보십시오. 이 창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때, 구경꾼들 속에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장사꾼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유사어】자가당착(自家撞着)

 

 

● 무위이화(無爲而化)

①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여 잘 이루어짐. ② 성인의 덕이 크면 클수록 백성들이 스스로 따라나서 잘 감화됨.

《老子》의 ‘道德經’에는,

천하에는 행해서는 안 된다고 정해진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가난해진다. 백성들에게 편리한 문명의 도구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나라는 혼란해진다. 인간은 지혜나 기술이 향상되면 될수록 괴상한 것들이 나타나고 법률이 정밀해지면 해질수록 죄인은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한다.

“내가 하는 것이 없으면 백성은 스스로 和하고,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백성은 스스로 바르게 된다. 내가 일 없이 있으면 백성은 저절로 잘 살게 되고, 내가 욕심이 없으면 백성은 저절로 소박해진다.”

또 老子는 말한다.

“‘道’는 언제나 無爲이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체를 하고 있다.”고.

老子의 말은 계속된다.

“후왕이 만약 능히 이 ‘道’를 잘 지키면 만물은 자연히 화하려 한다”고.

 

 

● 문경지교(刎頸之交)

생사를 같이하는 친한 사귐. 또 그런 벗.

전국시대 조나라 혜문왕의 신하 유현의 식객에 인상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나라 소양왕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인 화씨지벽을 원상대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을 쳐서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테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소양왕이지요.”

“나는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소양왕을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염파 장군과 내가 버티어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고 염파 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웃통을 벗은 다음 태형에 쓰이는 형장을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하고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刎頸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동의어】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 문일지십(聞一知十)

한가지를 들으면 열을 미루어 앎.

공자의 제자는 삼천 명이나 되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제자가 72명이나 되었으며 철인으로 꼽힌 사람도 10명이나 되었다.

제자 중에 자공은 재산을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공자가 주유천하할 때의 경비 대부분을 대었고 학문의 재주와 재치도 뛰어났다.

그러나 말없이 묵묵히 스승의 뒤를 따르는 안회는 매우 가난했으나 삼 개월 동안 어질었다고 인을 허여받은 유일한 제자였다.

안회와 자공의 길고 짧음에 대하여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자공은 “사가 어찌 감히 회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는 자공의 대답에 만족했다. 역시 자공은 스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신을 알고 있었다. “네가 안회만 못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이는 스승인 공자의 가슴에서 기뻐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 문전성시(門前成市)

권세가나 부자가 되어 집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함.

전한 말, 11대 황제인 애제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저의 실권은 대사마 왕망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 정씨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이라는 미동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중신들이 간했으나, 마이동풍이었다. 그 중 상서 복야 정숭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이라는 상서령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조창은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옵소서.”

애제는 그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신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의 소청을 묵살한 채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예인 손보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을 공박하고 서인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유사어】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문전작라(門前雀羅),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 미생지신(尾生之信)

① 신의가 굳음. ② 우직하여 융통성이 없음.

춘추시대, 노나라에 미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였다.

어느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尾生은 믿음으로써 여자와 더불어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밀려와도 떠나지 않아, 기둥을 끌어안고서 죽었다.”

① 전국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은 연나라 소왕을 설파할 때, <신의있는 사람의 본보기>로 앞에 소개한 미생의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② 그러나 같은 전국시대를 살다간 莊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莊子는 그의 우언이 실려 있는 《莊子》 ‘盜跖篇’에서 근엄 그 자체인 孔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의 입을 통해서 미생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책형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동의어】포주지신(抱柱之信)

 



● 발본색원(拔本塞源)

폐단의 근원을 아주 없애 버림.

발본색원은 ‘春秋左氏傳’ 昭公 九年條 중, 주왕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유래된 故事이다.

“나에게 백부가 계신 것은 마치 옷에 갓이 있는 것과 같다.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어야 하듯 백셩들에게 지혜로운 임금이 있어야 한다. 백부께서 만약 갓을 찢어버리고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으며, 오로지 지혜로움을 버린다면 비록 오랑캐들이라도 나라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春秋左氏傳’ 昭公 九年條에 실린, 윗글의 원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 큰아버지가 계신 것은, 마치 의복에 갓과 면류관이 있고,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고, 백성들에게 지혜로운 임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큰아버지께서 만일 갓을 짜개고 면류관을 부수고, 근본을 뽑아 근원을 틀어막고, 오로지 지혜로운 임금을 버리신다면,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그 남음이 어찌 한 사람에 있으리오.

이와는 다른 出典으로, 명나라 때의 철학자 왕양명의 ‘발본색원론’이 있다.

왕양명의 ‘발본색원론’을 여기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가 평소 제창하던 “하늘의 이치를 지니고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라.”는 말과 취지가 같다. 즉, 사사로운 탐욕은 근본부터 뽑아버리고 그 근원을 틀어막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적인 고사가 지금 세상에서는 범죄나 범죄 조직의 뿌리를 뽑아버린다는 데에만 사용되고 있으니 이는 통탄할 일인가, 아니면 언어의 사회성에 대한 금석지감이라 할 일인가?

 

 

● 배수지진(背水之陣)

① (물러설 수 없도록)물을 등지고 적을 치는 전법의 하나. ②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의 비유.

한나라 고조 유방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2년 전의 일이다.

명장 한신은 유방의 명에 따라 위나라를 쳐부순 다음 조(趙)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조나라에서는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정형의 협도 출구 쪽에 성채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폈다.

이에 앞서 군략가인 아좌거가 재상 진여에게 ‘한나라 군사가 협도를 통과할 때 들이치자’고 건의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는데, 첩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한신은 서둘러 협도를 통과하다가 출구를 10리쯤 앞둔 곳에서 일단 행군을 멈췄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한신은 2,000여 기병을 조나라의 성채 바로 뒷산에 매복시키기로 하고 매복 임무를 맡은 장수에게 이렇게 명했다.

“본대는 내일 싸움에서 거짓 패주할 것이다. 그 때 제군들은 적이 비운 성채를 점령한 뒤 한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하라.”

그리고 한신은 1만여 군사를 협도 출구 쪽으로 보내어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채를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한나라 군사가 북을 울리며 진격하자 조나라 군사는 성채를 나와 응전했다. 2-3차 접전 끝에 한나라 군사는 퇴각하여 강가에 진을 친 부대에 합류했고, 승세를 탄 조나라 군사는 맹렬히 추격해 왔다. 한편 이러한 틈에 매복하고 있던 2,000여 한나라 기병대는 성채를 점령하고 한나라 깃발을 세웠다. 강을 등지고 진을 친 한나라 군사는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인지라 필사적으로 대항하여 싸웠다. 이에 견디지 못한 조나라 군사가 성채로 돌아와 보니, 한나라 깃발이 나부끼고 있지 않는가. 당연히 전쟁은 한신의 대승리로 끝났다. 전승 축하연 때 부하 장수들이 배수진을 친 이유를 묻자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군사는 이번에 급히 편성한 오합지졸이 아닌가? 이런 군사는 사지에 두어야만 필사적으로 싸우는 법이다. 그래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것’이다.”

【동의어】배수진(背水陣)

 

 

● 백구과극(白駒過隙)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는 뜻으로, ‘인생과 세월의 덧없고 짧음’을 이르는 말.

인생이 지나가는 것의 빠르기가, 문틈으로 흰 말이 지나가는 것을 봄과 같다는 말이다.

《莊子》 ‘知北遊篇’에 다음과 같은 것이 실려 있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것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순간일 뿐이다. 모든 사물들은 물이 솟아나듯이 문득 생겨났다가 물이 흐르듯 아득하게 사라져가는 것이다. 변화로써 태어났다가 또한 변화로써 죽을 뿐이다. 생물들은 이를 슬퍼하고, 사람들도 이를 슬퍼한다. 죽음이란 화살이 살통을 빠져나가고, 칼이 칼집을 빠져나감과 같이 혼백이 육신에서 빠져나가고 이에 몸이 따라 무로 돌아가는 것을 말함이니, 이야말로 위대한 복귀가 아닌가!

사람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이처럼 허무한 일이다.

《史記》 ‘유후세가’에는 여태후가 유후에 대하여 한 말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인생의 한 세상 사이는 ‘흰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어찌 스스로 괴로워하기가 이와 같음에 이르겠는가?



 

● 백년하청(百年河淸)

중국의 황하가 항상 흐리어 맑을 때가 없다는 말로, 아무리 오래 되어도 사물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뜻.

정나라가 초나라의 속국 격인 채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도 정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하게 되었다. 이에 정나라에서는 대책을 숙의하는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는 진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자는 측과 초나라와 강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 자사가 말하기를, “주나라의 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황하의 물이 맑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사람 수명으로는 맞지 않다. 여러 가지를 놓고 점을 치면 그물에 얽힌 듯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니 우선 초나라와 강화를 해서 백성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진나라의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은 황하의 맑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즉, “황하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晉나라의 구원병이 올 것이 어긋난다는 비유로 쓴 말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대처하는 괴로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이야기라 하겠다. 그 후 정나라는 자사의 말대로 해서 위기를 면했다.

 

 

● 백미(白眉)

여럿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

유비는 적벽대전 후 형주, 양양, 남군을 얻고 군신을 모아서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이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하여 준 이적이,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유비가 이적에게 물었다.

“어진 선비가 누구요?”

“형양 땅 마량의 다섯 형제가 모두들 재명이 있는데, 가장 어진 이는 양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양’으로 자는 계상이라고 합니다. 또 향리에서도 ‘마씨집 오상이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가 있는 마량이 제일 뛰어나다.’고 합니다. 공께서는 어찌 청하여 오지 않으십니까?”

유비는 즉시 마량을 청하여 오게 했다.

 

 

● 백아절현(伯牙絶鉉)

‘백아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고사에서 ‘참다운 벗의 죽음’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 높은 백아에게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 주는 친구 종자기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과 큰 강의 분위기를 그려 내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종자기의 잎에서는 탄성이 연발한다.

“아,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솓는 그 느낌은 마치 태산같군”

“응, 훌륭해, 넘칠 듯이 흘러 가는 그 느낌은 마치 황하같군”

두 사람은 그토록 마음이 통하는 연주자였고 청취자였으나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백아는 절망한 나머지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기를 가리커 지음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순자》 ‘勸學篇’에,

『옛날에 호파가 비파를 타면 물 속에 있던 물고기가 나와 들었고,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여섯 필의 말이 풀을 뜯다가 고개를 들어 쳐다 보았다. 그러므로 소리는 작더라도 들리지 않는 것이 없고 행동은 숨기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옥이 산에 있으면 풀과 나무가 윤택하고, 연못에 진주가 생기면 언덕이 마르지 않는다. 善을 행하고 惡을 쌓지 않는다면 어찌 명성이 들리지 않겠는가?』

그 후부터 친한 벗이 죽었을 때 <백아절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동의어】백아파금(伯牙破琴)

【유사어】지음(知音), 고산유수(高山流水)

 

 

● 백중지세(伯仲之勢)

서로 어금버금한 형세.

같은 부모의 형과 누님을 백부와 백모라 하고, 동생과 누이동생을 숙부와 숙모라고 부르는 것은, 옛날부터의 중국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중국에서는 형제의 순서를 다시 세분하여, ‘伯 · 仲 · 叔 · 季’로 부르고 있다.

《禮記》 ‘壇弓’ 上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이름을 짓고, 관례를 하고서 자를 붙이고, 50에 백중으로써 하고, 죽으면 시호를 내리는 것은 주나라의 도리이다.』

즉, 어린이가 태어나면 3개월만에 이름을 짓고, 20세가 되면 손님들을 초대하여 관을 씌우고, 자를 짓는다. 50세가 되면 자 위에 伯 · 仲 등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고, 죽으면 諡號를 내린다. 이것이 周나라의 관습이었던 것이다.

<伯仲>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형제는 비슷하게 닮았기 때문에, 비교 평가하여도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때, <그들은 伯仲之間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伯仲之間>이란 말을 처음에 쓴 것은, 魏나라의 文帝 조비였다.

文人들이 서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다. 부의와 반고에 있어서는 백중지간일 뿐이다.





● 분서갱유(焚書坑儒)

중국 진시황이 민간의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일.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나라 시황제 때의 일이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 집권의 군현제도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 어느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의 잔치에서 박사인 순우월이 ‘현행 군현제도 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인 승상 이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 · 복서 · 종수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책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라고 한다.

이듬해 아방궁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을 닦는 방사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과 후생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方士)는 많은 재물을 사취한 뒤, 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분노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페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두어 놓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비방한 460명의 유생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라고 한다.

 

 

● 불구대천(不俱戴天)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함’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큰 원한’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禮記》 ‘곡레편’에는 ’不俱戴天之讎’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며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원수를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또 이 말은 《맹자》 ‘盡心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孟子의 말과 비교가 되어 다시 생각게 한다.

“내 이제야 남의 아비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겠노라. 남의 아비를 죽이면 남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제 아비나 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니라.”

오늘날 이 말은 아버지의 원수에 한하지 않고 ‘더불어 살 수 없을 정도로 미운 놈’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의어】대천지수(戴天之讎), 불공대천(不共戴天)

【원 말】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讎),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

 


 

● 불혹(不惑)

불혹의 나이. 곧 마흔 살.

孔子는 일생을 회고하며 자신의 학문 수양의 발전 과정에 대해 《論語》 ‘爲政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 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 <志學>

서른 살 때 입신했다. 三十而立 <而立>

마흔 살 때는 미혹하지 않았고 四十而不惑 <不惑>

쉰 살 때 하늘의 명을 알았다. 五十而知天命 <知命>

예순 살 때는 귀에 따랐고 六十而耳順 <耳順>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從心>

<註> 20세 : 약관(弱冠) 60세 : 환갑(還甲) 70세 : 고희(古稀)

77세 : 희수(喜壽) 88세 : 미수(米壽) 99세 : 백수(白壽)

【동의어】불혹지년(不惑之年)

 

 

● 붕정만리(鵬程萬里)

앞길이 매우 멀고도 큼.

이 말은 《莊子》 ‘逍遙遊篇’ 첫머리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이다.

『북쪽 바다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큰 것은 그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화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한다. 성내어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의 기운으로 장차 남쪽 바다로 옮기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연못이다. 제해라는 사람이 있어 다음과 같은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김에, 물을 치기를 3천 리나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선풍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를 9만 리나 하며, 6개월이나 걸려서 남쪽 바다에 가서 쉰다.>

아지랑이와 티끌과 먼지를 생물들이 뿜어내건만, 하늘은 푸르고 푸르르니, 그 올바른 색깔인가? 그 멀어서 끝간 데가 없는 까닭인가?

그 내려다봄에 또한 이와같을 뿐이다. 또한 대저 물의 쌓임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움에 힘이 없고, 술잔의 물을 뜰의 파인 곳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배가 되어 뜨지만, 잔을 놓으면 엎어진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의 쌓임이 두텁지 못하면, 그 큰 날개를 띄움에 힘이 없다. 그러므로 9만 리면 바람이 그 아래에 있다. 그리하여 뒤에 곧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지고서,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다. 이리하여 지금 비로소 붕새는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것이다.』

<붕정만리>는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 비육지탄(脾肉之嘆)

성공하지 못하고 한갓 세월만 보냄에 대한 탄식.

유비는 198년에 조조와 협력하여, 한 마리 이리와 같은 용장 여포를 하비에서 격파한 다음, 한의 임시 수도 허창으로 올라가 조조의 주선으로 헌제에게 배알하고 좌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그대로 조조의 휘하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허창을 탈출하여 각지로 전전한 끝에 황족의 일족인 형주의 유표에게 의지하여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표에게 초대되어 형주성에 갔을 때,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일 어서던 유비는 문득 자신의 넓적다리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물을 흘렸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유표가 유비의 눈물 흔적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묻자, 유비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말을 타고 전장을 돌아다녀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말을 타지 않고 너무 빈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살이 들러붙었습니다. 세월이 가는 것은 빨라 늙음이 이르는데도, 아직 공업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슬플 뿐입니다.”

 




●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사물이 서로 화합하기 어려움을 일컫는 말.
‘빙탄불상용’이란, 그 성질이 전혀 반대여서, 아무래도 타협하기 어려운 사이를 말한다. 다음은 《楚辭》 ‘칠간’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사람 일의 불행을 슬퍼하여, 太命을 붙여서 함지에게 맡긴다.
몸은 병을 얻어 쉬지 못하고,
마음은 湯임금과 같이 끓어오르네.
얼음과 숯은 가히 써 서로 함께하지 못하니,
내 본디부터 목숨이 길지 못함을 알겠구나.
홀로 괴롭게 죽어 즐거움이 없음을 슬퍼하여,
나는 나이가 아직 다하지 않음을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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