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어휘, 한자

고사성어, 사자성어, 한자성어 유래 #02

Jobs 9 2023. 4. 2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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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면이 모두 적에게 포위된 경우와 고립된 경우를 이르는 말.

항우는 곧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한중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참모 장량 · 진평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해하에서 한신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초나라 진영은 군가사 격감한 데다가 군량마저 떨어져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밤중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초나라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그리운 고향의 노랫소리 에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을 쳤다.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 장량의 작전이 주효했던 것이다.

항우는 깜짝 놀라서 외치듯 말했다.

“아니, 한나라는 벌써 초나라를 다 차지했단 말인가? 어찌 저토록 초나라 사람들이 많은가?”

이미 끝장이라고 생각한 항우는 결별의 주연을 베풀고는 사랑하는 虞美人이 ‘四面楚歌’의 애절한 노래를 부르자, 비분강개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건만

때는 불리하고 추도 나아가지 않누나.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우야 우야 그대를 어찌할 거나.

【동의어】사면초가성(四面楚歌聲)

 

 

● 사불급설(駟不及舌)

한 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가 끄는 빠른 마차로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야 한다’는 말.

자공을 보고 극자성이 물었다.

“君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찌해서 문(文)이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듣고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자답지만 사(駟)도 혀[舌]에 미치지 못한다. 문이 질(質)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이나 개와 양의 가죽이 같다는 말인가?”

唐나라 때의 명재상인 풍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明心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할 것이다.”

 



● 살신성인(殺身成仁)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림.

이 말은 춘추시대, 인(仁)을 이상적 덕목으로 삼는 공자의 언행을 수록한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仁’을 저버리지 않으며

스스로 몸을 죽여서 ‘仁’을 이룬다.

공자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仁’의 도는 제자인 증자가 《논어》 <이인편>에서 지적했듯이 ‘충(忠)’과 ‘서(恕)’에 귀착한다.

부자의 道는 ‘忠’, ‘恕’일 뿐이다.

‘충’이란 자기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고, ‘서(恕)’란 ‘충’의 정신을 그대로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마음이다. 曾子는 孔子의 ‘인(仁)’이 곧 이 ‘충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 삼고초려(三顧草廬)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이나 찾아서 마침내 그를 군사로 삼은 일.

후한 말엽, 유비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가 없어 늘 조조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인 사마휘에게 군사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이나 봉추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이 복룡인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은 새파란 애숭이라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다.”

마침내 수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나라의 조조, 오나라의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고 한실의 맥을 잇는 촉한을 세워 皇帝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어 후주 유선 때까지 2조를 섬겨 후세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동의어】초려삼고(草廬三顧), 삼고지례(三顧之禮)

【유사어】삼고지우(三顧知遇)

 

 

● 삼천지교(三遷之敎)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가르치기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긴 일.

전국시대, 유학자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 맹자는 공자처럼 생이지지했다고 추앙되지도 않았고, 태어나자마자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는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승이 유명한 분도 아니어서 증자의 문인에게서 사숙했다는 것을 보면, 기초는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그의 독특한 이론인 성선설, 사단설, 호연지기설은 다 그의 독학에서 얻은 독창적인 것이다. 맹자는 독학자였기에 노력과 의지 못지 않게 교육 환경이 중요했고, 이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한 것이다.

孟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제구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고 놀았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 어머니는 ‘이런 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하며 비로소 만족했다.

【원 말】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유사어】현모지교(賢母之敎),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 상가지구(喪家之狗)

‘상갓집 개’(속담) ① 초상집 개, 주인 없는 개. ② 여위고 기운 없이 초라한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

춘추시대 말엽의 대철학자요 사상가로서 유교의 비조인 孔子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나라 정공때 대사구로서 재상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孔子는 왕족인 삼환씨에게 배척을 당하여 노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후 공자는 십 수 년간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도덕 정치’를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서 6-7개국을 순방했으나 받아 주는 군주가 없었다.

한 번은 정나라를 찾아갔던 공자(56세)가 제자들을 놓쳐 버리고 홀로 동문 옆에 서서 그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스승을 찾아나선 자공이 한 행인에게 孔子의 인상 착의를 대면서 혹시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그 행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문 옆에 웬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는 요임금과 같았고, 목은 순 · 우임금과 같았으며, 어깨는 명재상 자산과 같았소.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임금에게 세 치쯤 미치지 못했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같습디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동문으로 달려간 자공은 공자를 만나자 방금 행인에게서 들은 이야 기를 고했다. 이야기를 듣고난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용모에 대한 형용은 들어맞는다고 하기 어려우나 상갓집 개와 같다는 표현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 후 정나라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는 그야말로 상갓집 개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기운 없이 노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음을 이르는 말.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 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노옹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서 福이 禍가 되고 禍가 福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너무 깊어 측량할 수가 없다.

【원 말】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동의어】새옹마(塞翁馬), 북옹마(北翁馬)

【유사어】새옹득실(塞翁得失), 새옹화복(塞翁禍福), 화복규승(禍福糾繩)

 

 

● 성하지맹(城下之盟)

적국에게 항복하고 맺는 치욕적인 강화(講和)의 맹약(盟約).

환공 12년 초나라가 교로 쳐들어가 성의 남문에 진을 쳤을 때, 막오라는 벼슬에 있는 굴하가 환공에게 말했다.

“교의 사람들은 편협하고 경솔합니다. 경솔하면 도모함이 적은 법이니, 청컨대 땔나무를 취하는 인부를 호위를 붙여 내놓아, 이로써 그들을 유인하면 어떨까요?”

이리하여 그 계교대로 하자, 교의 군사들은 첫날 초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교의 군사들은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매복하였으므로, 크게 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 송양지인(宋襄之仁)

지나치게 착하기만 하여 권도가 없음을 이르는 말.

춘추시대인 주나라 양왕 2년, 송나라 환공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는 인덕이 있는 서형 목이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보가 위에 올라 양공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 춘추의 첫 패자인 제나라 환공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 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 제, 초 세 나라의 맹주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한 정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숫적으로 열세였던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되어 이듬해 죽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송나라 양공의 인(仁)’이라며 비웃었다.

 

 

●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말로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

문왕과 무왕을 도와서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킨 여상 태공망은 제나라에 있는 영구에 봉해졌는데, 계속해서 다섯 대에 이르기까지 주의 호경에 반장했다.

군자께서 이르시기를 음악은 그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바를 즐기며 예란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이르되,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향하는 것은 인(仁)이라고 하였다.

 



● 수서양단(首鼠兩端)

진퇴,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

전한 7代 황제인 무제때의 일이다. 5代 문제의 황후의 조카인 위기후 두영과 6代 경제의 황후의 동생인 무안후 전분은 같은 외척이었지만 당시 연장자인 두영은 서산 낙일하는 고참 장군이었고, 전분은 욱일 승천하는 신진 재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두영의 친구인 관부 장군이 고관 대작들이 모인 주연에서 전분에게 대드는 실수를 범했다. 사건의 발단은 관부가 두영을 무시한 한 고관을 힐책하는데 전분이 그 고관을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관부가 한사코 사죄를 거부하자 이 일은 결국 조의에 오르게 되었다. 양쪽 주장을 다 들은 무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

“경들이 판단컨대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 것 같소?”

처음에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영의 추종자로 알려진 내사 정당시조차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어사대부 한안국도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폐하, 양쪽 다 일리가 있사와 흑백을 가리기가 심히 어렵나이다.”

중신들의 불분명한 태도에 실망한 무제가 자리를 뜨자 조의는 거기서 끝났다. 전분은 화가 나서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처럼 망설였소? 이 사건은 시비곡직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인데…. 그대와 더불어 대머리가 벗겨진 늙은이를 해치우려 했는데, 어찌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했는가?”

【동의어】수시양단(首施兩端)

【유사어】좌고우면(左顧右眄)

 

 

● 수어지교(水魚之交)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모사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와 익주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 스려 부국강병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 수주대토(守株待兎)

변통할 줄 모르고 어리석게 지키기만 함.

송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다.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는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농부 자신은 송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밭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이다.

한비자는 요순을 이상으로 하는 왕도 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수주대토의 비유를 들었다.

그는 시대의 변천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라고 보고 복고주의는 진화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착각이라고 주장하면서 낡은 관습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에 순응할 줄 모르는 사상 또는 사람에게 이 수주대토의 비유를 적용한 것이다.

 

 

●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① 가까운 사이의 이웃 나라 중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 쪽도 온전하기 어려움의 비유. ②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또는 서로 도움으로써 성립되는 관계의 비유.

춘추시대 말엽, 오패의 한 사람인 진나라 문공의 아버지 헌공이 괵 · 우 두 나라를 공략할 때의 일이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진나라와 괵나라의 중간에 위치한 우나라의 우공에게 길을 빌려 주면 많은 재보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궁지기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나라와 우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나라를 치려는 진나라에 길을 빌려 준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옵니다.”

“경은 진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나라와 우리 우나라는 모두 주황실에서 갈라져 나온 동종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를 줄 리가 있겠소?”

“괵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진나라는 동종의 정리를 잃은 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나라는 종친인 제나라 환공과 초나라 장공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 그런 무도한 진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일가권속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월,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동의어】순치지국(脣齒之國), 순치보거(脣齒輔車)

【유사어】조지양익(鳥之兩翼), 거지양륜(車之兩輪)

 

 

● 신출귀몰(神出鬼沒)

자유 자재로 출몰하여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음.

전한의 회남왕 유안이 엮은 《淮南子》 ‘兵略訓’은 도가 사상을 기본 이론으로 한 전략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군의 계략과 진 치는 일과 군대의 세력과 병기가 겉으로 보아서 적군이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용병에 교묘한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있다.『교묘한 자의 행동은 신이 나타나고 귀신이 돌아 다니는 것처럼 별과 같이 빛나고 하늘과 같이 운행하는 것이다. 그 나아가고 물러남과 굽히고 펴는 것은 아무런 전조(前兆)도 없고, 형태도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출귀행>이란 ‘신이 나타나고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귀신과 같이 나오고 들어감이 자유자재여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말하거니와, 같은 말이 병서인 《삼략》에도 실려 있다. 이 병서는 황석공이 이상에서 유방의 공신인 장량에게 준 것으로, 淸나라의 적호가 지은 《통속편》 ‘귀신지부’의 <神出鬼沒>에서 나온 것으로, 이 《삼략》의 <신출귀행>의 말을 들고 있다.

<神出鬼沒>이 직접 나온 것은 《당희장어》에 나오는 ‘두 머리 세 얼굴의 귀신이 나타나고 없어진다.’의 구절이지만, 이것은 《淮南子》나 《삼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이 말은 《漢書》 ‘河間獻王德傳’에 실려 있는, ‘학문을 닦아 예를 좋아하고, 일을 참답게 하여 옳음을 구함.’에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초기, 즉 청나라 말기에서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계몽사상가로서 활약한 양계초는 《淸代學術槪論》을 써서 淸代 학술의 개론을 시도한 사람이다. 양계초는 다시 능정감이 대진을 위하여 지은 《事略狀》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이용하여 대진의 실사구시의 정신을 드러내 밝히고 있다.

“옛날 하간의 헌왕은 실사에 대하여 옳음을 구하였다. 도대체 실사의 앞에 있으면서 내가 옳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고, 내가 그르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더구나 ‘실사구시’를 학문의 표적으로서 존중한 것은 대지 혼자만의 일이 아ㅇ니다. 그보다도 후배에 해당하는 청나라 왕조의 학자들 중에는 주대소나 왕정진과 같이, 스스로를 ‘實事求是齌’라고 아호를 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실사구시’란 사실을 토대로 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며, 청조의 고증학파가 공론만 일삼는 양명학에 대한 반동으로 내세운 표어이다.

고증학자들은 정확한 고증을 존중하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학문연구의 입장을 취했다.

 

 

● 양두구육(羊頭狗肉)

겉으로 훌륭하게 내세우나 속은 변변찮음.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 때의 일이다.

영공은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시켜놓고 완상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 유행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며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을 내렸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십시오.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공은 안영의 진언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임금께서는 궁중에서는 미인에게 남장하는 것을 용서하면서도, 궁중 밖에서는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소의 머리를 문에 걸어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궁주에서는 미인에게 남장시키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입니까? 궁중에서 금한다면 궁중 밖에서도 감히 남장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동의어】현양수매마육(懸羊首賣馬肉),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馬肉)

【유사어】양질호피(羊質虎皮), 현옥고석(衒玉賈石)

 

 

● 양상군자(梁上君子)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① 집 안에 들어온 도둑의 비유. ② 천정 위의 쥐를 달리 일컫는 말.

후한 말엽, 진식이란 사람이 태구현 현령으로 있을 때,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현민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현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어느해 흉년이 들어 현민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날 밤, 진식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웬 사내가 몰래 드러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둑이 분명했다.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독서를 계속하다가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악인이라 해도 모두 본성이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습관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악행도 하게 되느니라. 이를테면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도 그렇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진식의 말에 감동한 도둑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루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 진식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이로부터 이 고을에 다시는 도둑이 나타나지 않았다.

 



● 양약고구(良藥苦口)

‘효험이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귀에는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

이것은 孔子의 말씀으로 《孔子家語》 ‘六本篇’, 《설원》 ‘정간편(正諫篇)’에 실려 있다. 효과가 있는 좋은 약은 입에 넣을 때 쓰고, 사람들에게 듣는 충고는 좋은 말일수록 귀에 들어올 때 거슬린다는 뜻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殷나라 탕왕은 곧은 말을 하는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夏나라의 걸왕과 殷나라의 주왕은 무조건 따르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임금에게 다투는 신하가 없고, 아버지에게 다투는 아들이 없고, 형에게 다투는 동생이 없고, 선비에게 다투는 친구가 없다면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하가 諫해야 하고,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들이 諫해야 하고, 형이 잘못을 저지르면 동생이 諫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친구가 諫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에 위태하고 망하는 징조가 없고, 집안에 패란의 악행도 없고, 부자와 형제에 잘못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원 말】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동의어】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간언역어이(諫言逆於耳), 금언역어이(金言逆於耳)

 

 

● 어부지리(漁父之利) 

‘두 사람이 이해 관계로 다투는 사이에 엉뚱한 딴 사람이 이득을 봄’을 일컬음.

전국시대, 제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웃 조나라 혜문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그래서 연나라 소왕은 종횡가로서 그간 연나라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해 온 소대에게 혜문왕을 설득하도록 부탁했다.

조나라에 도착한 소대는 소진의 동생답게 거침없이 혜문왕을 설득하여 혜문왕의 연나라 침공 계획을 철회시켰다고 한다.

“오늘 귀국에 들어오는 길에 역수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보니 조개가 조가비를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요새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내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 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운수사납게도 그곳을 지나가던 어부에게 그만 둘다 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입니다. 연 · 조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피폐케 한다면, 귀국과 인접해 있는 저 강대한 진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과연 옳은 말이오.”하며 혜문왕은 침공을 중지했다.

【동의어】어부지리(漁父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 견토지쟁(犬兎之爭), 전부지공(田父之功),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함.

전국시대인 주나라 신정왕 3년(BC 318), 양나라 혜왕과 작별한 맹자는 제나라로 갔다. 당시 나이 50이 넘은 孟子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인의를 치세의 근본으로 삼는 왕도 정치론을 유세 중이었다.

“전하의 대망이란 무엇입니까?”

선왕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맹자 앞에서 패도를 논하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짐짓 이런 질문을 던져 선왕의 대답을 유도하였다.

“전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 아니면 아름다운 색(色)이 부족하시기 때문입니까?”

“과인에겐 그런 사소한 욕망은 없소.”

선왕이 맹자의 교묘한 화술에 끌려들자 맹자는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시다면 전하의 대망은 천하통일을 하시고 사방의 오랑캐들까지 복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하오나 종래의 방법(무력)으로 그것(천하통일)을 이루려 하시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론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을 듣자 선왕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토록 무리한 일이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합니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일은 물고기만 구하지 못할 뿐 후난은 없습니다. 하오나 패도를 좇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나라가 멸망하는 재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오리무중(五里霧中)

짙은 안개 속에 잇어 방향을 알 수 없음과 같이, 무슨 일에 대해 알 길이 없음의 비유.

후한 순제 때, 학문이 뛰어난 장해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대고 끝내 출사치 않았다.

장해는 《春秋》 ‘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들을 비롯하여 귀족, 고관대작, 환관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이를 싫어하여 화음산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의 자를 딴 공초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는 학문뿐만 아니라 도술에도 능하여 쉽사리 ‘오리무’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방술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장해는 성격이 도술을 좋아하여, 능히 5里 안의 안개를 지을 수가 있었 다. 그때에 관서 사람인 배우가 또한 능히 3里의 안개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해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로 들어가 배우기를 바랬지만 장해는 모습을 숨겨서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 오월동주(吳越同舟)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같은 장소와 처지에 함께 놓임.

《孫子》라는 책은 중국의 유명한 병서로서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무가 쓴 것이다. 손무는 오왕 합려 때, 서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읍을 공략하고 북방의 제나라와 진나라를 격파한 명장이기도 했다.

《孫子》 ‘九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병을 쓰는 법에는 아홉 가지의 지(地)가 있다. 그 구지(九地) 중 최후의 것을 사지(死地)라 한다. 주저 없이 일어서 싸우면 살길이 있고, 기가 꺾이어 망설이면 패망하고 마는 필사의 지(地)이다.

그러므로 사지에 있을 때는 싸워야 활로가 열린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필사의 장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능한 장수의 용병술은 예컨대 상산에 서식하는 솔연이란큰 뱀의 몸놀림과 같아야 한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벼든다. 또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옛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이나 다 같이 평소의 적개심을 잊고 서로 왼손, 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전차의 말들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퀴를 땅에 묻고서 적에게 그 방비를 파괴 당하지 않으려 해봤자 최후에 의지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의지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필사적으로 하나로 뭉친 병사들의 마음이다.“

【동의어】오월지쟁(吳越之爭), 오월지사(吳越之思)

【유사어】동주상구(同舟相救), 동주제강(同舟濟江), 호월동주(胡越同舟), 오월지부(吳越之富)

 

 

● 오합지졸(烏合之卒)

① 갑자기 모인 훈련 없는 군사. ② 규율도 통일성도 없는 군중.

전한 말, 대사마인 왕망은 평제를 시해하고 나이 어린 영을 세워 새 황제로 삼았으나 3년 후 영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잦은 정변과 실정으로 말미암아 각지에 도둑떼가 들끓었다.

이처럼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유수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왕망 일당을 주벌하고 경제의 후손인 유현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에 천하는 다시 한나라로 돌아갔다.

대사마가 된 유수가 이듬해 성제(成帝)의 아들 유자여를 자처하며 황제를 참칭(僣稱)하는 왕랑을 토벌하러 나서자, 상곡 태수 경황은 즉시 아들인 경감에게 군사를 주어 평소부터 흠모하던 유수의 토벌군에 들어 갔다. 그때 손창과 위포가 갑자기 행군을 거부하는 바람에 잠시 동요가 있었다.

“유자여는 한왕조의 정통인 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오. 그런 사람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격노한 경감은 두 사람을 끌어낸 뒤 칼을 빼들고 말했다.

“왕랑은 도둑일 뿐이다. 그런 놈이 황자를 사칭하며 난을 일으키고 있지만, 내가 장안의 정예군과 합세해서 들이치면 그까짓 ‘오합지졸’은 마른 나뭇가지보다 쉽게 꺾일 것이다. 지금 너희가 사리를 모르고 도둑과 한패가 됐다간 멸문지화를 면치 못하리라.”

그날 밤, 그들은 왕랑에게로 도망치고 말았지만 경감은 뒤쫓지 않았다. 서둘러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한 경감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마침내 건위대장군이 되었다.

우리가 돌격 기병대를 일으켜 써 오합지중을 치는 것은 썩은 고목을 꺾고 썩은 것을 깎음과 같을 뿐이다.

【동의어】오합지중(烏合之衆)

【유사어】와합지중(瓦含之衆)

 

 

● 옥석구분(玉石俱焚)

선악의 구분 없이 함께 멸망함.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망하는 것을 <옥석구분>이라고 한다.

《書經》 夏書 胤征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불이 곤강에 타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 임금이 덕을 놓치면 사나운 불길보다도 격렬하다. 그 우두머리 괴수는 죽이고 협박에 못이겨 복종한 사람들은 벌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물들어 더러워진 풍속은 모두 더불어 오직 새롭게 하리라.

‘胤征’은 윤후가 夏나라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희화를 치러 나갈 때 한 선언으로, 희화를 치는 까닭을 말한 것이다.

‘崑岡’은 玉을 생산하는 산의 이름이다. 만일 곤강이 불에 탄다면 玉과 돌이 함께 타버릴 것이다. 화재는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거니와, 임금이 덕을 잃는다면 그 피해는 사나운 불길보다도 더 심하다. 따라서 지금 그 수령인 자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거니와, 억지로 가담했던 사람까지 모두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니,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착함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동의어】옥석혼효(玉石混淆)

 

 

● 와각지쟁(蝸角之爭)

매우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 또는 좁은 범위 안에서 싸우는 일.

전국시대, 양나라 혜왕은 중신들과 맹약을 깬 제나라 위왕에 대한 응징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혜왕은 재상 혜자가 데려온 대진인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진인은 도가자류의 현인답게 이렇게 되물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촉각 위에는 촉씨라는 자가, 오른쪽 촉각 위에는 만씨라는 자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들은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시작했는데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 지 15일 만에야 전쟁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하오면, 이 이야기를 사실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전하, 이 우주의 사방상하에 제한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오면, 마음을 그 무궁한 세계에 노닐게 하는 자에게는 사람이 왕래하는 지상의 나라 따위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으음, 과연.”

“그 나라들 가운데 위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대량(大梁:開封)이라는 도읍이 있으며, 그 도읍의 궁궐 안에 전하가 계십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에 비한다면 지금 제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려는 전하와 달팽이 촉각 위의 촉씨, 만씨가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과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소.”

대진인이 물러가자,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싹 가신 혜왕은 혜자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성인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원 말】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

【동의어】와우각상(蝸牛角上), 와각지쟁(蝸角相爭), 와우지쟁(蝸牛之爭)

【유사어】만촉지쟁(萬觸之爭)

 

 

● 와신상담(臥薪嘗膽)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딤의 비유.

춘추시대, 월왕 구천과 취리에서 싸워 크게 패한 오왕 합려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가 간하는 것도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속령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 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의 치욕을 상기했다. 그리고 구천 부부는 함께 밭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회계의 치욕으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로부터 역전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고소에 육박한 구천은 오왕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동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유사어】회계지치(會稽之恥), 절치액완(切齒扼腕)

 

 

● 월하빙인(月下氷人)

월하노(月下老)와 빙상인(氷上人)이 합쳐진 말로, ‘결혼 중매인’을 일컬음.

⑴ 《續幽怪錄》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 때, 위고라는 젊은이가 여행 중에 송성에 갔을 때, ‘달빛 아래 한 노인[月下老]’이 손에 빨간 끈을 든 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위고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상 혼사에 관한 책인데, 여기 적혀 있는 남녀를 이 빨간 끈으로 한 번 매어 놓으면 어떤 원수지간이라도 반드시 맺어진다네.”

“그럼, 지금 제 아내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음, 이 송성에 있구먼, 성 북쪽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진이란 여인네의 어린아이야.”

위고는 약간 기분이 언짢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상주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위고는 그곳 태수의 딸과 결혼했다. 아내는 17세로 미인이었다. 어느날 밤 위고가 아내에게 신상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실은 태수님의 양녀입니다. 친아버지는 송성에서 벼슬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그 때 저는 젖먹이였는데 마음씨 착한 유모가 성 북쪽 거리에서 채소 장사를 하면서 저를 길러 주었답니다.”

⑵ 《晉書》 ‘索眈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나라에 색탐이라는 점쟁이가 있었다. 어느날 영고책이라는 사람이 몽 점을 치러 왔다.

“꿈 속에서 나는 얼음 위에 서서 얼음 밑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색탐은 이렇게 해몽했다.

“얼음 위는 곧 양이요, 얼음 밑은 음인데 양과 음이 이야기 했다는 것은 ‘얼음 위에 선 사람’인 그대가 결혼 중매를 서게 될 조짐이오. 성사 시기는 얼음이 녹는 봄철이고….”

그 후 얼마 안되어 과연 영고책은 태수의 부탁을 받고 태수의 아들과 장(張)씨의 딸을 중매 서서 이듬해 봄에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동의어】월하노(月下老), 빙상인(氷上人), 빙인(氷人)

【유사어】적승(赤繩)

 

 

● 위편삼절(韋編三絶)

① ‘독서에 열심함’의 뜻. ② 한 책을 되풀이하여 숙독함의 비유.

한 권의 책을 몇십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서 책을 철한 곳이 닳아 흩어진 것을 다시 고쳐 매어서 애독을 계속하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책이 소위 몇십 장의 죽간을 끈으로 철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그 끈이 몇 번이나 끊어지도록 책을 계속하여 읽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三絶’이란 딱 세 번에 한정된 수가 아니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알려진 前漢의 사마천이 쓴 《史記》 가운데 孔子傳, 즉 孔子世家에 실려 있는 말로, 공자가 만년에 역경을 애독하여 韋編三絶에 이른 데서 나왔다고 한다.

孔子가 晩年에 易經을 좋아하여, 단 · 계 · 상 · 설괘 · 문언을 서(序)하고, 易經을 읽어 韋編三絶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몇 해를 빌어 이와같이 하면, 나는 易經에 있어서 곧 빛나게 될 것이다.’

 



● 유비무환(有備無患)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음.

‘열명’은 은나라 고종이 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에 대한 의견과 그 의견을 실천하게 하는 내용을 기록한 글인데, 이 ‘有備無患’이란 말은 부열이 고종 임금에게 한 말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능한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은 다 그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춘 것이 있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春秋左氏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서 보낸 값진 보물과 가희들을 화친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들을 위강에게 보냈다. 그러자 위강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안히 지낼 때에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하여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입니다.”

 



● 은감불원(殷鑑不遠)

멸망의 선례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라’는 말.

고대 중국 하 · 은 · 주의 3왕조 중 殷王朝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은 원래 지용을 겸비한 현주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북방 오랑캐의 유소씨국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라는 희대의 요녀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국고를 기울여 시설한 주지육림 속에서 주야장천 음주폭락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는 가렴주구에다가 충간자를 처형하기 위한 포락지형을 일삼는 악왕의 으뜸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주왕의 포학을 간하다가 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왕의 보좌역인 삼공 중의 구후와 악후는 처형 당하고 서백은 유폐되었다.

서백은 그 때, ‘600여 년 전에 은왕조의 시조인 탕왕에게 주벌 당한 하왕조의 걸왕을 거울 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충간하다가 화를 당했는데 그 간언이 《詩經》 ‘大雅篇’의 ‘탕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先例)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왕 때에 있네.

삼공에 이어 삼인으로 불리던 미자 · 기자 · 비간 등 세 충신도 간했으나 주색에 빠져 이성을 잃은 주왕은 걸왕의 비극적인 말로를 되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원성이 하늘에 닿은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이반 당한 주왕은 서백의 아들 발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원 말】재하후지세(在夏后之世)

【동의어】상감불원(商鑑不遠)

【유사어】복차지계(覆車之戒), 복철(覆轍)

 

 

● 읍참마속(泣斬馬謖)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림’을 비유.

조조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의 요충지인 ‘가정’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촉나라의 중원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 때 마속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회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 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를 사수만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하여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러나 마속의 생각과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만 한 채로 산 위를 공격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산 위에서는 식수가 끊겼다. 다급해진 마속은 전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의 실패로 전군을 한중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成都)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 이심전심(以心傳心)

말이나 글로 전하지 않고 마음으로 마음에 전함.

송나라의 중 도언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를 기록한 《전등록》에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以心傳心’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의 중 보제의 《오등회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에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拈華]’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微笑]’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과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불립문자·교외별전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동의어】염화미소(拈華微笑)

【유사어】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이익을 거둠.

진나라 혜문왕때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는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에 부합하는 패업’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하고, 강병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에 힘써야 하며, 패자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입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인 주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며, 더우기 주나라의 구정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만 얻을 뿐입니다.”

이에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먼저 국토를 넓혔다.

【동의어】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二鳥)

【반의어】일거양실(一擧兩失)

 

 

● 일망타진(一網打盡)

한꺼번에 모조리 잡음.

북송 4대 황제인 인종 때의 일이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중국의 일부였던 안남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은 연약한 외교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치에는 괄목할 만한 치적이 적지 않았다.

전한 5대 황제인 문제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문치를 폄으로써 이른바 ‘경력의 치’로 불리는 군주 정치의 모범적 성세를 이룩했다.

이 무렵, 청렴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이 재상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상신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내강이라 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올바른 정도(正道)를 어지럽히는 것이라 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 보류했다가 10여 통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되돌려보내곤 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성지를 함부로 굽히는 짓이라 하여 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 소순흠이 공금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 왕공진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범인들은 ‘일망타진’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음.

孔子께서 曾子에게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曾子는 알아듣고 “네”하고 대답했다.

孔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자, 曾子는 “선생임의 말씀은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論語》 ‘衛靈公篇’에도 孔子께서 子貢에게 “나는 한 가지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온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子貢이 대답해 말했다.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하나를 가지고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 자포자기(自暴自棄)

절망 상태에 빠져서, 자신을 버리고 돌보지 않음.

전국시대를 살다간 아성 맹자는 ‘자포’와 ‘자기’에 대해 《맹자》 ‘이루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을 헐뜯는 것을 ‘자포’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인이나 의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라고 한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은 편안한 집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의’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로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 전전긍긍(戰戰兢兢)

매우 두려워 벌벌 떨며 두려워함.

‘전전’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긍긍’이란 몸을 움추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뜻한다.

이 말은 중국 최고의 시집인 《시경》 ‘소아편’의 ‘소민’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모신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그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해야 하네

또 《논어》 ‘태백편’에 보면, 曾子가 병이 重해지자 제자들을 불러서 말했다.

“내 발을 펴고, 내 손을 펴라. 《시경》에 이르기를 ‘매우 두려운 듯이 조심하고, 깊은 연못에 임한 것 같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고 했다. 지금 이후로는 나는 그것을 면함을 알겠구나, 제자들아.”

【동의어】전전긍긍(戰戰兢兢)

【유사어】소심익익(小心翼翼)

 

 

● 전전반측(輾轉反側)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룸.

고민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 혹은 잠자지 못하고 뒤척임을 되풀이 하는 것을 형용하여 ‘輾轉反側’이라고 하거니와, 이 말은 본래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형용해서 하는 말이다.

《詩經》 ‘周南’의 관저에 이렇게 실려 있다.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좌우로 헤치며 따는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깨나 구하는도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자나깨나 생각하는도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

이 제2절의 결구가 ‘輾轉反側’이다. 이 노래는 물쑥을 따면서 부르는 연가이다. 즉 노동가임과 동시에 연애가이기도 하다.

 

 

● 절차탁마(切磋琢磨)

옥, 돌, 상아 따위를 자르고 쪼고 갈고 닦아서 빛낸다는 뜻으로, ‘학문, 덕행을 갈고 닦음’의 비유.

《論語》 ‘學而篇’에는 《詩經》에 실려 있는 시가 인용되고 있다.

자공이 孔子께 여쭈었다.

“가난해도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는 것은 어떠합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를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절을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끊는 듯이 하고, 닦는 듯이 하며, 쪼는 듯이 하고, 가는 듯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것을 이릅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구나. 지난 일들을 일러 주었더니 닥쳐올 일까지 아는구나.”

【원 말】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

【준 말】절마(切磨)

 

 

● 정중지와(井中之蛙)

우물 안 개구리, 즉 견문이 좁아서 넓은 세상의 사정을 모름의 비유.

황하의 신인 하백이 흐름을 따라 처음으로 바다에 나와, 북해까지 가서 동해를 바라보면서, 그 끝이 없는 넓음에 놀라서 북해의 신인 약에게 말했다. 그러자 북해의 신인 약이 이렇게 말했다.

“우물 안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를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여 름만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식견이 좁은 사람에게는 도를 말해도 알지 못하거니와, 그것은 그들이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자기의 추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더불어 큰 진리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莊子》 ‘秋水篇’에 실려 있는 첫머리의 에피소드로, 하백과 북해의 신인 약과의 문답은 계속된다.

이 문답을 통하여 莊子는 道의 높고 큼과 대소귀천은 정하여진 것이 아니니, 대소귀천의 구별을 잊고서 道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井中之蛙 不知大海’는 ‘우물 가운데 있는 개구리는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井蛙’라고 말하며 또 ‘井底蛙’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 말】정중와 부지대해(井中之蛙 不知大海)

【준 말】정와(井蛙)

【동의어】정와(井蛙), 정중와(井中蛙), 정저와(井底蛙), 감정지와(堪井之蛙)

【유사어】촉견폐일(蜀犬吠日), 월견폐설(越犬吠雪)

 



● 조삼모사(朝三暮四)

간사한 꾀로 남을 속여 희롱함을 이르는 말.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란 원숭이를 뜻한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저공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저공을 따랐고 마음까지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앞으로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한결같이 화를 내었다. ‘아침에 도토리 세 개로는 배가 고프다’는 불만임을 안 저공은 ‘됐다’ 싶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준 말】조삼(朝三)

【동의어】조사모삼(朝四暮三)

 

 

● 주지육림(酒池肉林)

술로 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이르는 말.

고대 중국의 夏나라 걸왕과 殷나라 주왕은 원래 지용을 겸비한 현주였으나 그들은 각기 말희와 달기라는 희대의 두 요녀 독부에게 빠져서 사치와 주색에 탐닉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夏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에서 공물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을 베풀기로 했다. 또 무악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로 동산을 쌓고 포육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그러니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했던 殷나라 탕왕에게 주벌 당하고 말았다.

또한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殷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시씨국에서 공물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전백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酒池肉林’을 만들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周나라 시조인 무왕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동의어】육산주지(肉山酒池)

【유사어】육산포림(肉山脯林)

 

 

● 죽마고우(竹馬故友)

① 어렸을 때의 벗.(소꼽동무)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 오랜 친구.

진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 때의 일이다.

촉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라는 은사를 건무장군 양주자사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 반목했다. 왕희지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 중 하나인 후조의 왕 석계룡이 죽고 호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동의어】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유사어】기죽지우(騎竹之友), 죽마지호(竹馬之好)

 

 

● 지록위마(指鹿爲馬)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킴.

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측근 환관인 조고는 거짓 조서를 꾸며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현명한 부소보다 용렬한 호해가 다구기 쉬웠기 때문이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고는 이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를 비롯, 그밖에 많은 구신들을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말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 천의무봉(天衣無縫)

하늘의 직녀가 짜 입은 옷은 솔기가 없다는 뜻으로, ① 詩文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을 이름. ② 완전 무결함.

곽한이 뜰에 누웠는데 절세미인이 나타나서,

“저는 천상의 직녀이온데,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어 울화병이 생겨서, 상제의 허락을 받고 요양차 내려왔습니다.”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요구하더니 매일 밤 찾아왔다. 칠월 칠석이 되자 며칠 안오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래서, “남편과의 재미는 좋았소?” 하자, “천상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과 다릅니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니 질투는 마십시오.” 했다.

곽한이 조용히 그녀의 옷을 살펴보니, 바느질한 곳이 전혀 없었다. 이상해서 물으니, “하늘의 옷은 원래 바늘이나 실로 꿰매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벗은 옷은 그녀가 돌아갈 때면 저절로 가서 그녀의 몸에 입히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직녀의 시녀가 소식을 한 번 전한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곽한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미인을 보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집안의 혈통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 싫어도 아내를 맞이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부부의 사이도 좋지 않아 아들도 얻지 못한 채로 끝나고 말았다.

 

 

 

● 천재일우(千載一遇)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

동진의 학자로서 동양 태수를 역임한 원굉은 여러 문집에 시문 300여 편을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文選》에 수록된 ‘三國名臣序贊’이다. 이것은 《三國志》에 실려 있는 건국 명신 20명에 대한 행장기인데, 그 중 위나라의 순문약을 찬양한 글에서 원굉은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백락을 만나지 못하면, 곧 천년에 한 천리마도 없다.

말에 대하여 안목이 높은 말의 명인 백락을 만나지 못한다면, 천년이 지나도 한 마리의 천리마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어진 신하가 명군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통한다.

대저 만 년의 한 번 기회는 이 세상의 통하는 길이며 천 년에 한 번 좋은 기회를 만나는 것은 현인과 지혜 있는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이와같은 기회를 누구나 기뻐하지 않고는 못 견디니, 기회를 잃으면 누구나 어찌 능히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의어】천재일시(千載一時), 천재일회(千載一會), 천세일시(千歲一時)

【유사어】맹귀부(우)목(盲龜浮(遇)木)

 

 

● 청운지지(靑雲之志)

① 속세에 초연한 태도. ②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

장구령은 현종 때의 어진 재상으로 간신 이임보의 모략으로 인해 벼슬길에서 파직되어 초야에서 여생을 보냈다. 다음은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의 감회를 읊은 시이다.

옛날 청운의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

누가 알리요 밝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서로 측은히 여기고 있는 것을.

오늘날, 보통이 아닌 큰 뜻, 입신출세에 대한 야망을 ‘청운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청운’이라는 말은 옛날 《史記》 ‘伯夷列傳’에도 나오며, 다음과 같이 쓰여지고 있다.

항간의 사람들은 행실을 닦아 이름 세우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靑雲의 선비라고 붙이는 것이 아니니, 어찌 능히 후세에 베풀 수 있으랴!

 

 

 

●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일컫는 말.

이 말은 전국시대의 유학자로서 성악설을 창시한 순자의 글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 더 차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목표로 하여 노력해야 하고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한 걸음씩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푸름과 얼음’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문과 마차가지로 그 과정을 거듭 쌓음으로써 그 성질이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가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행함으로써 스승보다 더 깊고 높은 학문과 덕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이 너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준 말】출람(出藍)

【동의어】출람지예(出藍之譽), 출람지재(出藍之才), 후생각고(後生角高), 출람지영예(出藍之榮譽)

 

 

● 촌철살인(寸鐵殺人)

간단한 경구로 어떤 일의 급소를 찔러 사람을 감동시킴의 비유.

‘학림옥로’라는 책은 남송 때의 나대경이,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은 청담을 시동에게 기록하게 한 것으로 ‘天 · 地 · 人’의 세 부분 18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 중 ‘지부’ 제7권 <살인수단>에는 종고선사가 다음과 같이 선을 논하여 말했다.

비유하면 한 수레의 병기를 싣고서 하나를 희롱하여 마치면 또 다른 하나를 꺼내 가지고 와서 희롱함과 같지만, 이것이 곧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아니다. 나는 곧 단지 촌철이 있으므로, 문득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선의 요체를 갈파한 말이므로, 살인이라고 하지만 물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속의 속된 생각을 없애는 것’을 뜻한다.

아직 크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속된 생각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성급하게 이것 저것 대답을 해 오겠지만, 정신의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 날것들뿐이다. 그와 같은 칼로는 몇 천 몇 만 개나 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일에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기울일 때, 충격적으로 번득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큰 깨달음인 것이다.

 

 

● 타산지석(他山之石)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덕(知德)을 연마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

이 말은 《詩經》 ‘小雅’의 <학의 움음>에 실려 있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는 온 들에 들리는도다.

물고기가 잠겨 연못에 있다가, 혹은 물가로 나와 노는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이에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 오직 개암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도, 가히 써 숫돌로 삼을 수 있도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 하늘에 들리는도다.

물고기가 물가에 있다가, 혹은 잠기어 연못에 있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이에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오직 닥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에, 가히 써 구슬을 갈 수 있도다.

【유사어】절차탁마(切磋琢磨), 공옥이석(攻玉以石)

 

 

● 태산북두(泰山北斗)

① 태산과 북두성. ② 세상 사람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

唐나라 때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 때 25세의 나이로 진사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를 극간하다가 조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 파직 당했다가 다시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과 함께 고문부흥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 《唐書》 ‘韓愈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을 가지고 여러 학저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준 말】태두(泰斗), 산두(山斗)

【동의어】여태산북두(如泰山北斗)

 

 

●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초패왕 항우를 멸하고 한나라의 고조가 된 유방은 소하 · 장량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 중 한 사람인 한신을 초왕에 책봉했다.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이었던 종리매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고조는 지난날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을 어 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에게 ‘한신은 반심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의 헌책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들은 초 땅의 진에서 대기하다가 운몽로 유행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이 나오면 진에서 포박하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진에 집결한 다른 제후들의 군사로 한신을 주살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를 들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서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 당하자 한신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한(漢)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한 내가, 이번에는 고조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원 말】교토사 양구팽(狡兎死 良狗烹)

【도의어】야수진 엽구팽(野獸盡 獵狗烹)


 



● 파죽지세(破竹之勢)

대적(大敵)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 가는 당당한 기세.

위나라의 권신 사마염은 원제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제라 일컫고, 국호를 진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나라와 진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대장군 두예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 2월, 무창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요, 대나무란 처음 두 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읍으로 쇄도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 손호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옛날에 악의는 제서의 한 번 싸음에서 승리하여, 강한 齊나라를 합쳤다. 지금 아군은 위세를 이미 떨치고 있다. 비유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 다. 몇 마디를 쪼갠 다음에는 다 칼날을 맞아 쪼개어질 것이니, 다시 손을 댈 곳이 없다.

【동의어】영인이해(迎刃而解), 세여파죽(勢如破竹)

 



● 표사유피(豹死留皮)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 사람은 사후(死後)에 이름을 남겨야 함의 비유.

왕언장은 한갓 병졸에서 시작하여 후량 태조 주전충의 장군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기와 힘으로 쇠창을 옆에 끼고 촉한의 조자룡처럼 적진을 누벼 군사들은 그를 왕철창이라 불렀다.

그는 후량이 멸망할 때 겨우 500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도를 지키다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다. 후당의 장종 이존욱은 그의 무용을 아껴 부하가 되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언장은,

“신은 폐하와 10여 년이나 싸워 이제 패군지장이 되었습니다. 죽음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또 아침에 양나라, 저녁에 진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해 무식했으나, “표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언제나 말하고 지키겠다.”고 하였다.

【동의어】호사유피(虎死留皮)

 

 

● 풍성학려(風聲鶴唳)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에도 놀람의 비유.

동진의 명장 사현은 진왕 부견이 직접 이끌고 내려온 백만에 가까운 군사를 맞아 겨우 10분의 1밖에 안되는 적은 군사로써 이를 회하 상류인 비수에서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사현이 대승을 하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진의 재상 사안은 동생 사석과 조카인 사현을 선봉으로 삼아 8만의 군사로 서진의 백만 대군을 맞이했다.

그리고 사현은 적의 총지휘관인 부융에게 사자를 보내 이렇게 청했다.

“귀하의 군대를 조금만 뒤로 후퇴시켜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물을 건너가 한 번 싸움으로 승부를 하겠습니다.”

군사의 수를 믿고 상대를 깔보고 있던 부견과 부융은 얼마 안되는 적이 물을 반쯤 건너왔을 때 기습작전으로 간단히 이를 해치울 생각으로 사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융의 북군이 후퇴를 개시하고 남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을 때 북군 내에서 뜻하지 않은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은 북군은 남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 을 보자 싸움에 패해서 물러나는 것으로 오인하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기 때 문이다. 뒤쪽에 있던 군사들은 앞의 군사가 허둥지둥 도망쳐 오는 것을 보자 덩달아 겁을 먹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이리하여 북군은 자기 군사가 모두 적군으로 보이는 혼란 속에서 서로 짓밟으며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남은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밤을 새워 달아나며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진나라 군사가 뒤쫓아 온 걸로 알고 길도 없는 가시밭 속을 헤매며 한데서 밤을 보냈다. 거기에다 굶주림과 추위까지 겹쳐 죽은 사람이 열에 일곱 여덟은 되었다. 청각적인 착각과 아울러 산천의 풀과 나무까지 다 적의 군사로 보였다는 초목개병이라는 시각적인 착각도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 필부지용(匹夫之勇)

소인의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냅다치는 용기.

齊나라 宣王이 물어 보았다.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孟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仁者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殷나라 湯王이 갈나라를 섬기고, 周文王이 곤이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혜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越王 구천이 吳나라를 섬겼습니다.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하늘의 道를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니다. 《詩經》에도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길이 나라를 편안케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크기도 하여라, 선생의 말씀이여! 그런데 과인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으니, 과인은 용기를 좋아합니다.”

“왕께서는 제발 작은 용기를 좋아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칼자루를 어루만지고 노려보면서, ‘제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낼 것이냐?’하신다면, 이는 필부의 용기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을 대적함이니, 왕께서는 제발 용기를 크게 부리소서.”

 



● 한단지몽(邯鄲之夢)

인생과 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

당나라 현종 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에 사는 노생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 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을 거쳐 어사대부 겸 이부시랑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자사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 당했으나 그는 환관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 년 후 원죄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을 제수한 뒤 연국공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가 지켜 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하고 한단을 떠났다.

【동의어】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之夢), 일취지몽(一炊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梁之夢)

 

 

● 한단지보(邯鄲之步)

자기가 지켜야 할 본분을 모르고 마구 남의 흉내를 내면 두 가지를 다 잃는다는 말.

莊子의 선배인 위모와 명가인 공손룡과의 문답 형식으로 된 이야기가 있다.

위모가 공손룡에게 말했다.

“또한 그대는 걷는 법을 배우러 수릉의 젊은이가 한단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아직 그 나라의 걸음걸이에 능하지 못하였는데 제 나라의 걸음걸이마저 잃어, 곧 엎드려 기어서 제 나라로 돌아갔을 뿐일세. 당장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의 방법을 잃고 그대의 본분을 잃어버릴 것일세.”

공손룡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혀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아, 곧 달려서 도망쳐 갔다.

 

 

● 한우충동(汗牛充棟)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로, 장서가 매우 많음의 비유.

唐나라 중엽의 문장가 유종원의 ‘육문통선생묘표’라는 글이 있는데, 그 첫머리 부분에 이렇게 실려 있다.

孔子께서 《春秋》를 짓고서 1500년이 지났다.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이 다섯 있는데, 지금 그 셋을 쓴다. 죽간을 잡고 생각을 초조하게 하여 써 읽고 주석을 지은 자가 백천이나 되는 학자가 있다. 그들은 성품이 뒤틀리고 굽은 사람들로, 말로써 서로 공격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 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은 책들은 집에 두면 ‘창고에 가득 차고’, 옆으로 옮기려면 ‘소와 말이 땀을 흘릴’ 정도였다. 孔子의 뜻에 맞는 책이 숨겨지고, 혹은 어긋나는 책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늙은을 다하고 기운을 다하여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돌아보아도 그 근본을 얻지 못한다. 그 배우는 것에 전념하여, 서로 다른 바를 비방하고, 마른 대나무의 무리가 되며, 썩은 뼈를 지키어 부자가 서로 상대를 상처내고, 임금과 신하가 배반하기에 이르는 자가 전 세상에는 많이 있었다. 심하도다. 성인 孔子의 뜻을 알기가 어렵도다.

 

 

● 형설지공(螢雪之功)

갖은 고생을 하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은 공.

晉의 차윤은 자가 무자이다. 어려서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널리 책을 읽었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기름을 얻지는 못하였다. 여름철에 비단 주머니로써 수 십 마리의 반딧불을 담고 책을 비춰서 읽으며 밤으로써 낮을 잇더니, 후에 벼슬이 상서랑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서창을 형창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의 손강은 어려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사귀고 놂이 잡스럽지 않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기름이 없어서 일찍이 눈에 비춰 책을 읽더니, 후에 벼슬이 어사대부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서안을 설안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 호가호위(狐假虎威)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림의 비유.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초나라 선왕 때의 일이다.

어느날 선왕은 위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강을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이 우리 재상 소해휼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 따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하, 혹 ‘狐假虎威’란 말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그러면 들어 보십시오.『어느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하신 천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아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었는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초나라의 군세, 즉 전하의 강병입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폄하는 이유는 아부로써 영신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었다.

【동의어】가호위호(假虎威狐)

【준 말】가호위(假虎威)

 

 

● 호연지기(浩然之氣)

①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② 자유롭고 유쾌한 마음. ③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운 바 없는 용기.

공손축이 “선생님께서는 특히 어느 것에 뛰어나십니까?”하고 묻자, 孟子는 “나는 남의 말을 잘 알며, 나는 내 浩然之氣를 잘 기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공손축이 “무엇을 浩然之氣라 합니까?”하고 묻자 孟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기운은 몹시 크고 몹시 굳센 것으로, 그것을 곧게 길러서 해되게 하지 않는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게 된다. 그 기운이 됨은 정의와 道에 맞는 것으로 이 기운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이 기운은 안에 있는 옳음이 모여서 생겨나는 것으로, 밖에서 옳음이 들어와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동하여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으면, 곧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준 말】호기(浩氣)

【동의어】정대지기(正大之氣), 정기(正氣)

 

 

● 호접지몽(胡蝶之夢)

나비가 된 꿈이란 뜻. ①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② 만물 일체의 심정 ③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물의 시비·선악·진위·미추·빈부·귀천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을 제창한 사람이다.

장자가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신은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나비인 자기가 꿈 속에서 장주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 《莊子》의 이런 우화는 독자를 유현의 세계로 끌어들여 생각게 한다.

옛날에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나비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스스로 즐겨서 뜻하는 대로 가고 있어,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깨달으니 곧 莊周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莊周가 된 것인지를. 莊周와 나비와는 곧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것을 자연이 된다고 말한다.

【유사어】장주지몽(莊周之夢)

 

 

● 화룡점정(畵龍點睛)

가장 긴요한 부분을 끝내어 완성시킴.

남북조시대, 남조인 양나라에 장승요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군장군과 오흥태수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신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도 유명했다.

어느날, 장승요는 금릉에 있는 안락사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은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네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펴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 화사첨족(畵蛇添足)

쓸데없는 군일을 하다가 도리어 실패함.

전국시대인 초나라 회황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인색한 사람이 제사를 지낸 뒤 여러 하인들 앞에 술 한 잔을 내놓으면서 나누어 마시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하인이 이런 제안을 했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마신다면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리는 사람이 혼자 다 마시기로 하는 게 어떻겠나?”

“그렇게 하세.”

하인들은 모두 찬성하고 제각기 땅바닥에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뱀을 다 그린 한 하인이 술잔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 술은 내가 마시게 됐네. 어떤가, 멋진 뱀이지? 발도 있고.”

그 때 막 뱀을 그린 다른 하인이 재빨리 그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세상에 발 달린 뱀이 어디 있나?”

술잔을 빼앗긴 하인은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 화서지몽(華胥之夢)

화서의 꿈이란 뜻으로, 좋은 꿈이나 낮잠을 이르는 말.

먼 옛날 중국 최초의 성천자로 알려진 황제는 어느날, 낮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화서씨의 나라에 놀러가 안락하고 평화로운 이상향을 보았다.

그 곳에는 통치자도 신분의 상하도 연장의 권위도 없고, 백성들은 욕망도 애증도 이해의 관념도 없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도 초연했다. 또 물 속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 죽지 않으며, 공중에서 잠을 자도 침대에 누워 자는 것과 같고 걸어도 땅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또한 사물의 미추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고 험준한 산골짜기도 보행을 어렵게 하지 않았다. 형체를 초월한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 충만한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번뜩 깨닫는 바 있어 중신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지난 석 달 동안 방안에 들어앉아 심신 수양에 전념하며 사물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려 했으나 끝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오. 그런데 짐은 이번 꿈 속에서 비로소 그 도라는 것을 터득한 듯싶소.”

그 후 황제가 ‘도’의 정치를 베푼 결과 천하는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유사어】화서지국(華胥之國), 유화서지국(遊華胥之國)

 

 

● 환골탈태(換骨奪胎)

① 얼굴이 전보다 변해 아름답게 됨. ② 남의 문장의 취의를 본뜨되 그 형식을 바꿔 자작처럼 꾸밈.

황정견은 소식과 함께 북송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박학다식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 냈는데, 그의 독자적인 수법을 도가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 ‘換骨奪胎’라는 말이다.

“황정견은 ‘두보의 시를 일컬어 영단한 말로 쇠를 이어서 금을 이룸과 같다.’라고 말했다.”

두보의 붓에 걸리면 흔해 빠진 경치도 곧 아름다운 자연으로 변하는데, 그것은 연금술사가 쇠에 한 알의 영단을 넣어서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때의 ‘영단’은 ‘시상’을 의미한다.

도가에서는 『영단 혹은 금단을 먹어서 보통 사람의 뼈를 선골로 만드는 것을 ‘환골’』이라 하고, 탈태의 ‘태’도 선인의 시에 보이는 착상을 말하며, 시인의 시상은 마치 어머니의 태내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그 태를 나의 것으로 삼아 자기의 시경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탈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남송의 중 혜홍이 쓴 《冷濟夜話》에 황산곡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의 뜻은 궁진함이 없고 사람의 재주는 한이 있다. 한이 있는 재주로써 궁진함이 없고, 뜻을 쫓는 것은 도연명이나 두보일지라도 교묘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것, 이것을 환골법이라고 말하며, 그 뜻을 규모로 하여 이를 형용하는 것, 이것을 탙태법이라고 말한다.”

 

 

● 온고지신(溫故之新)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 것을 안다는 뜻.

溫故는 ‘옛 것을 배우다’이다. 溫에는 ‘배우다’는 뜻도 있다. 知新은 ‘새 것을 알다’이니 溫故之新은 ‘옛 것을 공부하면 새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

남의 스승이 된 사람은 고전에 대한 박식만으로는 안 된다. 즉 고전을 연구하여 거기서 현대나 미래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예기》 〈학기〉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기문지학은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지식을 암기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실로 ‘온고지신’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고전을 연구함에 있어서도고전의 현대적 의의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에 고전 학습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 박학상설(博學詳說)


博學은 ‘여러가지를 배워 많이 안다’로 博識과 같다. 詳說은 ‘자세히 설명하다’이니, 博學詳說은 ‘널리 배우고, 상세하게 해설한다’는 말이다.

《盟子》의 ‘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여러 학문을 배우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장차 반대로 간단 명료함을 설명키 위해서다)에서 나온 成語다.

‘……詳說之’의 ‘之’는 詳說의 목적어로 앞의 博學을 나타낸다. ‘反’은 ‘오히려’ ‘도리어’ ‘반대로’라는 뜻으로 쓰이며, 說約은 ‘요점을 추려 간략히 하다’는 의미다.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博學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진리를 얻어 생활에 활용키 위해서다. 인류문명은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갔다가, 다시 복잡한 것에서 간단한 것으로 되돌아 간다. 그러니까 博學은 說約의 과정인 셈이다.

 

 

● 일인불과이인지(一人不過二人智)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여럿이 힘을 합하는 것만은 못하니 협동하고 협력하라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는 두 사람의 지혜를 넘지 못한다’ 이다.

不過는 어느 정도에 이를지 못했을 때 쓴다. ‘不過五百名’은 5백명이 안되다는 뜻이다. 不過의 반대는 過多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은 不過不及이다. ‘一人之能過千人之能’(한 사람의 능력이 천 사람의 능력을 넘는다)이라는 말도 있다. 이런 一當千의 사람을 過人이라고 한다. 自古로 胎敎를 잘 해서 나은 아이는 過人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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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자천금(一字千金)

戰國時代 末期 제나라 맹상군과 조나라 평원군은 각 수천 명, 초나라 춘신군과 위나라 신릉군은 각 3000여 명의 식객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나라의 상국이 되어, 어린(13세) 왕 정으로부터 중부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 여불위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 자초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 가거’라며 천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다.

당시 列國들 사이에는 著述사업이 유행이었다. 呂不韋는 食客들을 동원해 古今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 역사 등을 모두 網羅한 백과사전格인 책을 완성해 마치 자기가 편찬한 양 ‘呂氏春秋’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수도인 咸陽 성문에 걸어놓고 “누구든지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뺀다면 천금을 주겠다고 豪言했다. 《史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呂不韋는 자기 誇示겸 우수인사 誘致 목적으로 이 말을 했지만, 지금 ‘一字千金’은 ‘심금을 울리는 아주 빼어난 글’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脈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유사어】일자백금(一字百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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