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회 동요
1. 반무신란
(1)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 난(명종 3년, 1173년 계사년) : 문신세력의 반발
(2) 서경 유수 조위총의 난(명종 4년, 1174년)
(3) 귀법사, 중광사, 흥화사, 흥왕사, 왕륜사, 경복사 등 교종계통의 반발 : 왕실과 문신귀족은 교종과 본래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무신정권 때 문신의 도피처가 되어 무신에 반발하였다 - 최충헌은 정책적으로 선종계통인 조계종을 후원하였다.
2. 민란 (농민과 천민의 난)
(1) 민란의 배경 (사회, 경제적 모순)
①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와해되면서 피지배층의 사회의식이 크게 성장하였다.
②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 나갔다. 또한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가 더울 늘어났고, 무신 상호간의 정치 싸움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농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③ 집권 무신들이 이전보다 과중한 수탈 : 무신정권은 일반 군인층, 농민들의 호응으로 성립하였음에도 피지배층을 위한 수취체제의 개편이나 지방관 수탈을 근절하기 위한 적절한 시책을 제시하지 않고,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농민들은 민전을 빼앗기고 또한 지방 관리의 가렴주고로 농민 생활이 더욱 곤궁하여졌다.
(2) 특징
① 명종 ∙ 신종 대의 30년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 그 후 최충헌의 강력한 독재정치로 무신정권이 안정되면서 농민항쟁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응하였기 때문에 그 기세가 둔화되었으나 그 대신 노비들의 신분해방투쟁과 승도의 반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지배층의 토지 탈점과 과중한 수탈은 계속되었고, 民은 이후에도 초적의 형태로 항쟁을 계속하였다.
② 초기 민란은 자연발생적 민란으로 부당한 수탈 제거에 목적이 있었으며, 연합전선 형성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 점차 공동전선 형성, 지속적
③ 항쟁의 목표 : 국왕의 타도나 적대감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무신정권 내지 그와 연결된 지방관의 탐학과 횡포에 대한 항거 - 점차 신분해방 주장, 정권 탈취기도, 신라 부흥운동과 같이 왕조 질서를 부정하는 성격에서부터 지방관의 탐학을 국가에 호소하는 타협적인 성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의 봉기가 일어났다.
④ 대표적인 민란 : 공주 명학소의 난, 김사미 ∙ 효심의 난, 경주의 민란
(3) 민란의 전개
① 1172년(명종 2년) 서북계의 민란 : 최초의 본격적 농민항쟁 - 이 지역이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특수한 군사지역이었기 때문에,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에 많은 농민이 가담하고 난이 평정된 뒤에도 1179년까지 지속되었다.
* 조위총은 무인정권에 소외되어 정치적인 불만 등 개인적인 동기에서 기병을 하였으나, 서북지역 40여 성의 주민이 호응함으로써 조위총의 의도와는 달리 본격적인 농민 항쟁으로 전환되었다.
② 1175년(명종5년) 석영사의 난 : 최초의 남도 민란(개경이남), 양반과 내통
③ 1176년(명종6년) 공주 명학소 망이 망소이의 난 : 일반적인 농민반란에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복합되었다 - 정부에서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 무마시켰다.
④ 1182년(명종12년) 관성(지금의 옥천)와 부성(지금의 서산)의 난 : 농민반란
⑤ 1182년(명종12년)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의 난 : 주현군의 병사인 죽동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관노 및 지역의 주민이 가세해 일어나 항쟁하였다. 그 주체가 죽동 등의 군인이었으나 노예가 직접 참가한 첫 반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⑥ 1193년(명종23년) 김사미의 운문(지금의 청도)과 효심의 초전(지금의 울산)의 난 : 이 시기 가장 대대적인 민란으로 김사미, 효심의 농민군들이 연합전선을 이루어 그 세력이 경상도 전역에 확산되었으나 밀양싸움에서 정부군에 패배하여 7000명이나 죽음을 당하고 진압되었다. 이 단계에는 농민군이 관군과 비슷한 정도의 무장력과 전술 전략을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지방관 숙청과 일련의 조서를 통한 정책적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것이 최충헌 정권 출현의 배경이 되었다.
⑦ 1198년(신종 원년) 개경에서 만적의 난 : 최충헌의 사노 만적은 개경 북산에 공 ∙ 사노비를 모아 놓고 우리나라에서는 경인년(1170, 정중부의 난)과 계사년(김보당의 난)이래 높은 관리가 천인에게서 많이 나왔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 우리들도 최충헌과 주인들을 죽이고 천인에서 해방되면 공경장상이 될 수 있다하여 - 신분해방과 더불어 정권탈취까지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고려왕조 최초의 노비반란이다.
⑧ 1199년(신종2) 명주(강릉), 동경(경주)의 난 : 민란이 발생하여 서로 합세
⑨ 1200년(신종3) 진주에서 공사노비, 밀성에서 애노의 난, 협천(지금의 합천)에서 부곡민의 난
⑩ 1202년(신종5) 경주지방의 민란 : ‘고령의 왕업이 거의 다 되었으니,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 라는 격문을 돌리며 운문, 울진, 초전 등 경상도 일대의 반란 세력의 호응을 받아 그 세력이 자못 떨치어 정부가 그것을 꺾는데 10여 년의 세월을 소모하였다. 이는 최씨정권이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데 대한 옛 신라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의미한다.
⑪ 1217년(고종4년) 서경에서 최광수 : 고구려 부흥 운동
⑫ 1237년(고종 24년) 담양에서 이연년 형제 : 백제 부흥 운동
(4) 의의 : 민중의식의 성장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주장을 표면화시켜)
① 무신집권기의 집권층은 民의 전면적인 항쟁에 직면하여 무력으로 진압을 하기도 하였지만, 탐학한 지방관을 처벌하거나 부분적으로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부의 시책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지방에 감무가 허다하게 설치되고, 권농을 하고, 농민의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고 조부를 감면하는 등 탐관오리의 제거와 생활 안정을 위한 정부의 노력을 어느 정도 이끌어낼 수 있었고 또한 부곡제 지역이 소멸되기 시작하여 980여 개에 달하던 천민집단의 종속구역이 12세기와 13세기를 거치는 동안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 남은 것들도 대부분 그 성격이 일반 군, 현 또는 그 속의 일반 촌락과 같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② 유교정치가 붕괴된 무질서 속에서 하층민이 크게 성장하여 문벌 중심의 고려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로 개편되는 과도기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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