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건국
1. 왕건의 등장
(1) 출신 : 송악을 기반으로 한 호족 출신 -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2) 세력의 확대 : 예성강 유역의 해상세력과 제휴
(3) 후백제 견제 : 궁예의 부하로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 지방 점령
2. 고려 왕조 개창
(1) 918년에 건국 : 국호를 태봉에서 고려로 바꾸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쳤으며, 이듬해 국도를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다시 옮겼다.
(2) 의의 : 신라와 발해로 양립되었던 남북국시대를 하나로 통일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가 되었다.
(3) 한계 : 영토상 -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지 못하였다.
정신적 - 고구려 계승의식과 신라 계승의식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조선시대 들어와 한 단계 극복되었다.
민족의 재통일
1. 고려의 통일 원동력
(1) 대내적
① 고대적 수취체제를 지양하여 취민유도(取民有度)를 내세워, 호족들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 도록 조세를 1/10로 낮추었고 아울러 흑창을 설치하였으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하였다. : 왕건의 경우 당시 사회 혼란의 근본적 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수취체제에서 야기된 경제 모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② 호족세력의 포섭과 회유 정책으로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였다.
③ 후백제와 무력 대결하고,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우호 정책 : 이 정책으로 왕건은 경상도 서부와 남부지역(진주, 고성 등)의 상당 부분을 수중에 넣고, 결국 신라 경순왕의 투항을 받았다. 따라서 고려의 통일은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였다.
(2) 대외적 : 중국 5대와의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2. 고려의 재통일
(1) 927년 : 견훤의 경주 습격 - 왕건은 대구 공산 동수에서 패전
(2) 930~935년 : 930년 안동 고창 전투에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 932년 일모산성(청원 문의면)에서 승리하였다
- 934년 운주(홍성)에서 승리하여 공주이북 3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
- 935년에는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3) 936년 : 후백제의 내분 - 후백제의 주력을 선산의 일리천전투(지금의 선산)와 황산전투에서 승리하였다.
3. 후삼국의 통일 요인 : 골품제의 제한을 철폐하였고, 조세 경감과 토지세율을 1/10세 하여 지나친 수취체제를 개선하여 새 사회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 궁예와 견훤의 실패 배경 : 전체 주민을 통합할 수 있는 보다 차원 높은 정치 이념과 사회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한 데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궁예와 견훤이 무력에만 주로 의존하고 지식인 계층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기도 하다.
*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는 달리 자신이 호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경륜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사회의 성격과 의의 ∙ 특징
1. 중세 사회의 성격
(1) 지방 호족 세력이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문벌 귀족 사회를 형성하였다.
(2) 유교 정치 이념의 정립으로 고대적 신분제적 질서를 청산하였다 : 따라서 교육과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행정적 질서를 중시하였다. 그리고 유교와 불교 문화가 융합되었다.
(3) 고대의 혈연적 ∙ 종교적 요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문화의 밀도와 저변이 확대되었다.
① 뚜렷해진 지방문화 : 중앙, 지방문화 교류 활발
② 유학, 한문학 발달 : 출판문화 발달
③ 독자적 성격의 향상 : 송 문화 수용에 고려의 독자적인 개성을 보여줌
(4) 강력한 민족의식 형성
① 배경 : 외세의 간섭이 없는 자주적 통일로 내부 모순을 극복
② 표출 : 고구려 강토 회복을 위한 북진 정책, 북방 민족과의 항쟁
2. 중세 사회의 의의
나말 여초의 사회 변동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외세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왕조 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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