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국 시대 이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이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 '나일(Nile)' 강의 풍요로움을 안고 북아프리카의 나일강 하류에서 '고대 이집트 문명(Ancient Egypt Civilization)'이 피워오르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는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1세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고 아카드 제국을 건설(BC 2350년)하기 이전인 BC 3100년 경에 이미 통일 국가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고대 이집트는 '제1왕조(Dynasty I)'와 '제2왕조(Dynasty II)'로 이어지는 '초기 왕조 시대(Early Dynastic Period, 대략 BC 3150∼BC 2686년 경)'에 '멤피스(Memphis)'를 수도로 하는 통일 국가를 형성하였다.
이후 고대 이집트는 '제3왕조(Dynasty III)'부터 '제6왕조(Dynasty VI)'까지 이어진 '고왕국 시대(Old Kingdom of Egypt, 대략 BC 2575∼BC 2150년 경)'에 이집트의 지배자를 지칭하는 '파라오(Pharaoh)'가 전제 군주로 군림하기 하기 시작하여 고대 이집트를 대표하는 건출물인 '피라미드(Pyramid)'를 건설하게 된다. 특히 고대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기자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Giza)'는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한 '세계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중에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제6왕조 말기가 되자 파라오의 권위가 많이 약화되면서 통일 국가로서의 고대 이집트가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제7왕조(Dynasty VII)'와 '제8왕조(Dynasty VIII)'의 지배력이 수도 멤피스 부근으로 한정되면서 중부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Heracleopolis Magna)'를 수도로 삼은 '제9왕조(Dynasty IX)' 및 '제10왕조(Dynasty X)'와 '상이집트(Upper Egypt)'의 '테베(Thebes)'를 중심으로 한 '제11왕조(Dynasty XI)'로 분열되는 '제1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 BC 2181년 경 ~ BC 2055년 경)'의 혼란이 이어졌다.
고대 이집트의 제11왕조의 4대 파라오인 멘투호테프 2세(Mentuhotep II, 재위 BC 2061년 경 ~ BC 2010년 경)가 BC 2040년경 이집트를 통일하면서 중심지가 멤피스에서 테베로 옮겨진 '중왕국 시대(Middle Kingdom of Egypt, BC 2055∼BC 1650년)'가 시작되었다. 멘투호테프 2세는 총 51년간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로 재위하면서 이집트를 하나로 통일한 것은 물론 그동안 방치되었던 '누비아(Nubia, 오늘날의 수단 북부)'에 대한 지배권도 확보했고 멀리 '가나안(Canaan, 현재의 팔레스타인)'까지 군사 원정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고대 이집트의 제11왕조는 3대 만에 단절되었고 BC 1991년 재상이자 남부 총독이었던 아메넴하트 1세(Amenemhat I, 재위 BC 1991년 ~ BC 1962년)가 즉위하면서 '제12왕조(Dynasty XII)'가 시작되었다. 제12왕조 시기의 고대 이집트는 주변 지역을 지배하며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특히 5대 파라오인 세소스트리스 3세(Senusret III, 재위 BC 1878년 ~ BC 1841년)는 누비아의 반란을 토벌하고 가나안까지 원정하였으며 각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그 뒤를 이은 6대 파라오 아메넴하트 3세(Amenemhat III, 재위 1842년 ~ BC 1797년)는 내치에 힘써 댐과 관개용 수로를 만들고 '파이윰(Faiyum)' 지방을 개척하여 농지를 증대시켰다.
BC 1803년경부터 시작하는 '제13왕조(Dynasty XIII)'부터 다시 파라오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지방 정권이 준동하는 '제2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 BC 1650년 경 ~ BC 1550년 경)'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특히 '제15왕조 시절(Dynasty XV, BC 1663년 ~ BC 1555년)'에는 동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힉소스인(Hyksos)'에게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힉소스라는 말은 고대 이집트어로 '이민족 통치자'를 의미하는 '헤카우 카수트(hekau khasut)'에서 유래한 말이었으나 BC 3세기 초기의 이집트인 신관이자 역사가였던 마네토(Manetho)가 '양치기의 우두머리들'이라는 뜻의 '힉소스(Hyksos)'로 오역하면서 이후 힉소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힉소스인은 '아시아(Asia)' 계통 민족으로 일반적으로 '아카드 제국(Akkadian Empire)'과 '바빌로니아 제국(Babylonian Empire)'을 건설하기도 했던 셈족 계열의 '아모리인(Amorites)'이나 지금의 아르메니아에서 유래한 계통 불명의 '후르리인(Hurrians)' 중 하나로 생각한다. 힉소스인은 호전적인 민족으로써 처음에는 이집트에 새로운 활과 말이 끄는 전차, 조립식 활, 개량된 전투 도끼 등의 신무기와 발달된 요새 축조술을 들여오며 용병으로 이집트에 정착했으나 점차 이집트가 혼란스러워지자 나일강 삼각주의 '하이집트(Lower Egypt)'와 중부 이집트를 장악하고 108년 간이나 고대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다.
신왕국 시대의 시작, 제18왕조
힉소스인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나일강 상류 지역의 상이집트에 살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테베를 중심으로 별도의 '제16왕조(Dynasty XVI)'와 이어진 '제17왕조(Dynasty XVII)'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고 제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카모세(Kamose, 재위 BC 1555년 ~ BC 1550년)의 동생 아흐모세 1세(Ahmose I, 재위 BC 1549년 ~ BC 1524년)가 BC 1570년 경 힉소스인을 하이집트에서 추방하고 '제18왕조(Dynasty XVIII)'를 새롭게 개창하면서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New Kingdom Period, BC 1550년 경 ~ BC 1069년 경)'를 열었다.
이후 고대 이집트의 제18왕조는 영토를 북동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누비아까지 넓히기 시작했고 제6대 파라오인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재위 BC 1479년 ~ BC 1425년) 시절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투트모세 3세는 BC 1479년 어린 나이에 파라오로 즉위하여 의붓 어머니인 하트셉수트(Hatshepsut)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나 성인이 된 후 단독 통치자로서 BC 1425년 죽을 때까지 총 17차례의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먼저 반란을 일으킨 시리아의 '카데쉬(Kadesh)'를 정벌하였고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의 상류인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의 남동쪽까지 군사 원정에 나서서 카데쉬 반란의 배후인 후르리인의 '미탄니(Mitanni)'를 공격하고 영역을 유프라테스강까지 넓혔다. 이때 고대 이집트인들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나일강만 보았기 때문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투트모세 3세는 동쪽의 가나안을 정벌한 후 왕자들을 볼모로 데려오며 속국으로 삼았고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를 정벌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고대 이집트의 영토는 오리엔트 지방의 '레반트(Levant, 현재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레바논 지역)'과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까지 이르며 고대 이집트의 역사상 최대로 확대되었다. 참고로 본래 '파라오(Pharaoh)'라는 명칭은 고대 이집트의 궁전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일설에는 투트모세 3세 시절부터 군주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하며 그대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 제18왕조는 오리엔트 지방까지 세력이 미치며 번영을 구가했지만 말기에 이르면 신관의 힘이 왕권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에 제11대 파라오인 아크나톤(Akhnaton, 재위 BC 1351년 ~ BC 1334년)이 기존의 태양신 '아문-라(Amun-Ra)' 대신에 새로운 태양신 '아톤(Aton)'을 믿는 종교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결국 이케나톤이 죽고 나자 고대 이집트의 신앙은 다시 아문-라를 신봉하는 것으로 되돌아갔고 그의 어린 아들 투탕카멘(Tutankhamen, 재위 BC 1334년 ~ BC 1325년)이 18세에 후사없이 요절하고 만다. 이렇게 투탕카멘은 업적이 거의 없으나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 있는 왕묘와 황금 마스크가 발굴되고 이와 관련된 사람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파라오의 저주(Curse of the pharaohs)'로 유명해진다.
투탕카멘의 죽음으로 인해 제18왕조는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고 투탕카멘의 부인인 안케세나멘(Ankhesenamun)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히타이트(Hittite)'의 수필률리우마 1세(Šuppiluliuma I)에게 왕자를 보내주면 자신과 결혼하여 파라오가 되게 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하지만 히타이트의 왕자 잔난자(Zannanza)가 이집트로 오는 도중에 피살되면서 무산되었다. 대신하여 투탕카멘 시대의 고위 관리이자 안케세나멘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아이(Ay, 재위 BC 1323년 ~ BC 1319년)가 고령의 나이에 안케세나멘과 결혼하는 형식을 통해 파라오가 되었으나 재위 4년만에 사망하였다.
이어서 투탕카멘의 군사령관이었던 호렘헤브(Horemheb, 재위 BC 1319년 ~ BC 1292년)가 아케나톤의 처제이자 아이의 딸로 추정되는 무트노지메트(Mutnedjmet)와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호렘헤브마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고대 이집트의 제18왕조는 끝이 났다. 이후 호렘헤브 시대의 재상이자 아문-라의 고위 사제이었던 람세스 1세(Ramesses I, 재위 BC 1292년 ~ BC 1290년)가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새로운 '제19왕조(Dynasty IX)'가 새롭게 열렸고 고대 이집트의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이루게 된다.
신왕국 시대의 번영, 제19왕조 시대
람세스 1세의 아버지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군사령관이었던 '세티(Seti)'로서 군인 가문 출신으로 보인다. 람세스 1세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호렘헤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재상과 아몬-라의 고위 사제의 지위를 겸하였고 나중에는 후계자로서 공동 통치자로 임명받아 호렘헤브 사후에 파라오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1292년 왕위에 오른 람세스 1세는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아들인 세티 1세(Seti I, BC 1290년 ~ BC 1279년)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한 후 재위 2년만에 사망하였다. 이 때문에 세티 1세를 실질인 제18왕조를 창건한 파라오로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세티 1세는 그동안의 내부 혼란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한 군사 행동을 벌여 남쪽의 누비아, 서쪽의 리비아(Libya), 동쪽의 가나안까지 영토를 넓혔다. 또한 히타이트에게 빼앗긴 시리아를 되찾기 위해 여러 번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남하하던 히타이트와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집트의 영토를 넓힌 세티 1세가 재위 14년만인 BC 1279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람세스 2세(Ramesses II, 재위 BC 1279년 ~ BC 1213)가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는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람세스 2세는 구약성경의 '출애굽기(Book of Exodus)'에 나오는 이집트 왕으로도 유명하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집트 곳곳에 자신의 조상을 남겼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존재가 잘 알려지게 된다. 람세스 2세는 부왕인 세티 1세가 히타이트와 다투었던 시리아가 당시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경제적인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를 원하였다. 또한 강성한 히타이트의 남하가 계속되면서 언제가는 이집트 본국마저 침공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졌기 때문에 사전에 히타이트의 세력을 꺾어 놓고자 시리아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계획하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데쉬 전투(Battle of Kadesh)'가 발발하게 된다.
히타이트 제국의 역사
고왕국 시대
BC 2000년경 오리엔트 지방에서 세력을 얻기 시작한 '히타이트인(Hittites)'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원주민인 '하티인(Hattians)'을 정복한 후 몇 개의 소국을 형성하였다. BC 18세기 경 도시 국가인 '쿠샤라(Kussara)'의 왕이었던 아나타(Anitta)가 아나톨리아 반도의 카파도키아 고원을 정복하고 장차 히타이트의 수도가 될 '하투사(Hattusa, 현재 터키의 보아즈칼레)'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BC 1600년 경 '고왕국(Old Kingdom)'이 시작되는데 히타이트의 기록에 따른 공식적인 고왕국의 창건자는 라바르나 1세(Labarna I, 재위 BC 1600년 경 ~ BC 1586년 경)이나 그 존재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라바르나 1세의 아들 하투실리 1세(Ḫattušili I, 재위 BC 1586년 경 ~ BC 1556년 경)가 수도를 하투사로 정하면서 실질적인 히타이트 고왕국이 시작되었다. 사실 하투실리 1세의 본래 이름은 라바르나 2세(Labarna II)였으나 하투사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하투실리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시리아 북부까지 영토를 넓히게 된다.
이후 하투실리 1세의 뒤를 이은 조카 무르실리 1세(Mursili I, 재위 BC 1556년 경 ~ BC 1526년 경)는 BC 1531년 함무라비의 자손이 다스리던 바빌론까지 원정하여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무르실리 1세는 바빌론을 약탈한 후 물러났고 이후 비어버린 바빌론을 '카시트족(Kassites)'이 지배하게 된다. 이렇게 히타이트는 성쇠를 구가하였지만 무르실리 1세 이후에는 왕위 계승 다툼에 따른 내분과 유프라테스강의 중류 연안에 후르리인의 국가인 미탄니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한동안 침체기에 들어간다.
신왕국 시대
히타이트는 BC 14세기 초 투드할리야 1세(Tudhaliya I)가 즉위하면서 새롭게 부흥하며 '신왕국(New Kingdom)' 시대로 접어든다. 신왕국의 4대 왕인 투드할리야 2세(Tudhaliya II, 재위 BC 1360년 경 ~ BC 1344년) 시대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6대 수필률리우마 1세(Suppiluliuma I, 재위 BC 1344년 ~ BC 1322년)가 즉위한 후 미탄니를 공격하여 속국으로 삼으면서 시리아 일대를 소국을 병합하였고 수도인 하투사에 견고한 성벽을 쌓는 등 히타이트를 오리엔트의 강대한 제국으로 발돋움시켰다. 이 때문에 수필률리우마 1세를 히타이트 신왕국의 실질적인 창건자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 히타이트는 후르리인으로부터 말 기르는 법을 습득한 후 이륜 전차를 도입하였고 철제 무기도 일부 사용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한편 수필률리우마 1세가 통치하던 시절 고대 이집트는 제18왕조의 투탕카멘이 후사없이 사망한 혼란스러운 시절로 투탕카멘의 아내인 안케세나멘이 수필률리우마 1세에게 히타이트의 왕자 중 한 명을 보내주면 자신이 결혼하여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게 해주겠다고 제안하자 수필률리우마 1세가 자신의 아들 잔난자를 보냈으나 잔난자가 이집트로 가는 도중에 피살되고 고대 이집트는 고위 관리인 아이가 안케세나멘과 결혼하여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이에 분노한 수필률리우마 1세가 군대를 보내 시리아의 이집트 속국을 공격하여 히타이트의 영토로 삼았다.
히타이트의 세력 확대는 수필률리우마 1세의 아들인 무와탈리 2세(Mursili II, 재위 BC 1322년 ~ BC 1295년) 시대까지 이어져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서쪽에 있던 '아르자와(Arzawa)'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무와탈리 2세는 새롭게 부흥한 고대 이집트의 공격을 받으면서 고전하게 되는데 제19왕조의 제2대 파라오인 세티 1세에게 시리아의 영토를 상당 부분 빼앗기고 카데쉬에서 겨우 막아내면서 카데쉬를 국경으로 삼는 비공식적인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BC 1279년 세티 1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람세스 2세가 부왕을 따라 시리아 군사 원정에 참여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부왕 시절보다 더 큰 규모의 군사원정을 계획하였기 때문에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가 카데쉬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해독
고대 이집트는 일찍이 '상형문자(象形文字, Hieroglyph)'를 사용하여 자신의 역사를 많은 기록으로 남겼으나 오랫동안 해독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AD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트르의 이집트 원정군에 포병 부사관으로 참전했던 피에르 피에르 프랑수아 부샤르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로제타 마을에서 이른바 '로제타 석(Rosetta Stone)'이라고 불리는 비석을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을 AD 19세기 초엽에 프랑스의 이집트학 학자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이 완전히 해독하는데 성공하면서 고대 이집트의 많은 역사가 세상에 들어나게 된다.
히타이트어 해독
히타이트는 동시대에 존재한 나일강 유역의 고대 이집트에 못지않은 강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정작 히타이트에 대한 기록은 고대 이집트의 기록의 'ht'(고대 이집트어는 모음을 거의 표기하지 않음)이나 '헷 사람들(sons of Heth)'이 나오는 구약성경 속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비해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년전까지만 해도 히타이트는 자세한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왕국이었다.
그러던 중 AD 19세기 후반에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1대 파라오 아크나톤 시대의 수도였던 '아마르나(Amarna)'에서 미지의 언어로 기록된 점토판이 발굴되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보아즈칼레(Boğazkale)'에서도 같은 언어로 기록된 점토판이 나타나면서 히타이트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I, AD 1914년 ~ AD 1918년) 중 독일군으로 끌려갔던 체코의 젊은 학자인 베드리크 흐로즈니(Bedřich Hrozný)가 상관의 배려로 아마르나와 보아즈칼레의 점토판 해독에 몰두하여 마침내 미지의 언어가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 languages)'에 속하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 언어를 사용한 민족이 바로 히타이트인었고 보아즈칼레는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사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히타이트어는 문자로 남겨진 인도-유럽어족 중 가장 오래된 언어로 판명되었다.
고대 이집트 제국과 히타이트 제국의 격돌, 카데쉬 전투
BC 1274년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에 대한 공격에 나서면서 2,000명의 전차병을 포함하여 15,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각각 이집트의 신을 의미하는 '아몬(Amun)', '라(Ra)', '프타(Ptah)', '세트(Seth)'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에 맞서서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도 3,000명의 전차병을 포함한 총 35,000의 병력을 편성하였다. 결전의 장소는 시리아를 장악하기 위한 히타이트의 전초 기지로써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던 시리아 북부의 카데쉬가 선택되었다. 당시에 청동기만을 사용한 이집트와 달리 히타이트는 철제 무기도 일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 군이 시리아로 향하면서 람세스 2세가 직접 지휘하는 5,000명의 아몬 사단이 선두에 섰다. 이 때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군대가 멀리 있다는 2명의 투항병의 말을 믿었기에 본대와 떨어진 상태로 먼저 카데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히타이트의 왕인 무와탈리 2세가 보낸 첩자였다. 사실 무와탈리 2세의 동생인 하투실리(Hattusili)가 이끄는 히타이트 군은 람세스 2세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카데쉬 성벽 북쪽에 집결해 있었다. 결국 람세스 2세는 고립된 채 히타이트 대규모 부대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히타이트 군은 람세스 2세의 후속 부대가 지원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차 2,500대를 신속히 이동시켜 기습공격을 벌였고 이 공격으로 뒤쫓아 오던 이집트의 라 사단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말았다. 이제 람세스 2세는 지원병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히타이트 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비록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신인 아문을 외치면서 전투에 직접 참가해 뛰어난 용맹을 발휘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때 람세스 2세를 구원한 것은 이집트 군에 복무하는 가나안인 정예 부대였다. 람세스 2세는 모종의 계획을 위해 이들은 서쪽 강가에 배치하였는데 때 마침 구원을 온 것이었다.
여기에 각지에서 모은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기강이 느슨했던 히타이트 군이 승리를 확신하고 이집트 진지를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삽시간에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탈출한 람세스 2세는 군대를 빠르게 정비하고 오히려 히타이트 군을 카데쉬 남쪽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도 '오론테스(Orontes)' 강 너머로 쫓겨갔고 수많은 히타이트 병사들이 이집트 군의 공격을 피하다 강물에 익사하였다. 고대 이집트 측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이 카데쉬 전투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카데쉬 전투 이후에도 히타이트의 시리아 지배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사실상 무승부에 가까웠다.
실제로 무와탈리 2세는 끝내 1만 8천명에 달하는 후속 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전황을 냉철하게 판단한 무와탈리 2세가 아직 이집트 군에게 프타 사단과 세트 사단이 남아있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철군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히타이트는 북쪽에서 융성해지고 있던 '카스카족(Kaskians)'을 의식하여 조속히 전쟁을 마무지 지어야 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하기도 하다. 람세스 2세도 더 이상 히타이트를 공격할 만한 힘을 잃어버렸기에 회군하였고 이후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16년 동안 지리한 소모전을 벌이다가 BC 1258년에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을 성립시켰다. 이로서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시리아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전차부대
말이 끄는 수레인 전차는 수메르인들에 의해서 처음 개발되어 아카드인에 의해서 개량된 이후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네 개의 바퀴가 달린 사륜 전차가 많이 사용되었으나 사륜 전차는 방향전환이 어렵고 무게가 무거워 속도도 느리며 지형적인 제약도 많이 받았다. 이에 BC 2300년경에 이르면 바퀴를 두 개로 줄여 가볍고 기동성이 높은 이륜 전차가 많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륜 전차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 고대 중국, 고대 인도 등으로 폭넓게 전파되었고 전차의 보유 숫자를 가지고 군사력을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카데쉬 전투에서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도합 무려 5천여대의 전차를 동원하며 국력을 과시하였다.
이집트는 힉소스인의 지배를 받으며 전차를 알게 되었고 힉소스인의 지배에서 항전을 벌이며 전차를 자신들의 주전력으로 삼았다. 이집트의 전차는 투트모세 3세에 이르러서는 최소 2천대 이상을 유지하였고 전차의 수리시설을 제국 곳곳에 만들었다. 이집트의 전차는 가벼운 경전차로서 2명의 병사가 탔는데 한 명은 전차를 모는 마부였고 다른 한 명은 궁수였다. 마부는 방패를 들고 타서 궁수를 보호해주는 역할까지 하였고 궁수는 아카드 제국 시절부터 위력을 입증한 복합궁을 사용하였다. 이집트의 전차는 가볍게 만든 만큼 빠르게 기동하는 장점을 보유하였다. 이집트는 전쟁시 경전차로 빙빙 돌면서 상대의 전력을 깎고 진형을 무너뜨린 후에 보병대가 진격하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한편 히타이트의 전차는 중전차로서 이집트의 경전차와 달리 차체가 크고 무거웠다. 히타이트의 전차에는 마부, 궁수 이외에 방패병을 추가하여 총 3명을 탑승시켰다. 히타이트의 전차는 이집트의 전차처럼 원거리 공격이 아니라 창을 들고 상대 보병에게 돌격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서 전차병들에게 금속 갑옷을 지급하였고 바퀴축에도 칼날을 부착하였기 때문에 히타이트 전차의 접근전 능력이 한층 배가되었다. 대체로 직접 창을 들고 싸우는 전투원들은 귀족이었고 마부나 방패병들은 노예나 평민이 맡았다.
이렇게 전차는 그 자체로도 보병들에게 큰 위압감을 줄 수 있고 기동성을 활용하여 화살을 날리는 원거리 공격을 하거나 직접 보병에 대한 돌파를 감행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밀집보병의 대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차는 평지에서 만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어 지형적인 제한이 많았고 무엇보다 유지비용이 많이 되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훗날 안장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 기병에게 전투의 주력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다만 이후에도 그리스-로마 시기에 전차 경주를 펼쳐지면서 평시의 스포츠용으로는 계속 유지된다.
카데쉬 전투 이후의 히타이트 제국과 고대 이집트 제국
히타이트 제국의 몰락
히타이트에게 멀리 떨어진 고대 이집트의 공격보다 더 직접적인 위협으로 작용한 것은 북부의 카스카족이었다. 흑해 연안에 살던 카스카족은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의 '네릭(Nerik)'을 장악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무와탈리 2세는 이집트와 카스카족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히타이트의 수도를 하투사에서 남부 지중해 연안의 '타르훈타사(Tarhuntassa)'로 옮기고 하투사는 동생 하투실리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통치를 맡기게 된다. 하투실리는 무와탈리 2세의 기대에 부응하여 카데쉬 전투에서 람세스 2세의 이집트 군을 막아내고 카스카족을 몰아내고 북부의 네릭을 장악하는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무와실리 2세가 BC 1272년에 사망하고 그의 막내 아들인 무르실리 3세(Mursili III, 재위 BC 1272년 ~ BC 1267년)가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하투실리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무르실리스 3세는 하투실리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제국의 수도를 다시 하투사로 옮기면서 하투실리의 권한을 축소시켰고 급기야는 네릭을 빼앗기에 이른다. 이에 하투실리가 반발하면서 내전이 발생했고 BC 1267년 무르실리스 3세가 재위 7년 만에 폐위당하면서 이집트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하투실리가 히타이트의 왕으로 즉위하여 하투실리 3세(Hattusili III, 재위 BC 1267년 ~ BC 1237년)가 되었다. 그리고 카데쉬 전투 이후 16년 간이나 이어진 이집트와의 오랜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람세스 2세와 협상을 벌여 BC 1258년 '히타이트-이집트 평화 조약(Egyptian–Hittite peace treaty)'을 체결하였다. 이는 대등한 위치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 중에서 기록상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집트는 물론 히타이트 유적에서도 각각의 언어로 기록된 점토판이 발굴되어 그 사실성이 입증되었다.
히타이트는 BC 1237년 하투실리 3세가 사망한 이후에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하투실리 3세 이후 왕위를 두고 계속해서 내분이 발생하였고 그 사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장악하고 급성장한 '아시리아(Assyria)'가 중간에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미탄니를 멸망시키면서 큰 위협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쇠락해지던 히타이트는 BC 1190년 무렵 돌연 멸망하게 되는데 멸망 원인으로 일명 '바다의 민족(Sea Peoples)'으로 알려진 이민족의 침입에 의한 것이라는 설과 자연재해 때문이라는 설, 내전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몰락
제19왕조의 몰락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카데쉬 전투를 제외하고는 대규모 군사원정을 실시하지 않았고 무려 66년간 재위하면서 나일강 삼각주 지역 북동부에 새로운 수도인 '피-람세스(Pi-Ramesses, '람세스의 집'이라는 의미)'를 만들었고 각지에 신전과 자신의 조상을 세웠다. 람세스 2세의 시대에 이집트는 번영하였으나 너무 오랫동안 재위하면서 후계 구도에 문제가 발생했다. 2명의 후계자가 람세스 2세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13번째 왕자인 메르넵타(Merneptah, BC 1213년 ~ BC 1203년)가 BC 1213년 람세스 2세의 뒤를 이었으나 이미 60세가 넘는 고령이었다.
메르넵타는 서쪽의 리비아인(Libyans)의 준동을 진압하면서 고대 이집트를 안정시켰지만 재위 10년만인 BC 1203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세티 2세(Seti II, 재위 BC 1203년 ~ BC 1197년)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세티 2세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만큼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였고 BC 1202년 테베를 통치하던 아멘메세스(Amenmesse)가 반란을 일으켜 상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아멘메세스가 3년 뒤인 BC 1199년에 사망하면서 세티 2세가 다시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세티 2세도 그 다음해인 BC 1198년 죽고 말았다.
이후 세티 2세의 3번째 왕비의 아들인 시프타(Siptah, 재위 BC 1197년 ~ BC 1191년)가 이었지만 시프타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혈통이 불분명하여 정통성에 문제가 많았다. BC 1191년 다시 시프타가 사망한 이후 세티 2세의 2번째 부인이었던 투스레트(Twosret, 재위 BC 1191년 ~ BC 1189년)가 여왕으로 즉위하였으나 투스레트도 재위 2년 만인 BC 1189년 세트나크트(Setnakhte, 재위 BC 1189년 ~ BC 1186년)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면서 고대 이집트의 새로운 '제20왕조(Dynasty XX)'가 들어서게 되었다.
제20왕조의 위기와 몰락
제20왕조를 세운 세트나크트도 재위 3년만인 BC 1186년에 사망하고 그 뒤를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로 기록되는 람세스 3세(Ramesses III, 재위 BC 1186년 ~ BC 1155년)가 이어받게 되었다. 람세스 3세의 재위 시절에 고대 이집트는 '바다의 민족'이라고 알려진 미지의 이민족들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를 람세스 3세가 육상으로는 가나안을 내어준 채 이들의 침입을 막아냈고 해상으로도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복잡한 수로를 이용하여 겨우 방어해 내었다. '바다의 민족' 이외에도 서쪽의 리비아인도 나일강 삼각주 지역을 침입했으나 이를 상대하여 오히려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렇게 3번의 외적 침입으로부터 이집트를 지켜낸 람세스 3세는 31년간 이집트를 평온하게 통치하며 후대 파라오의 모범으로 남으면서 람세스 3세의 후계자들이 모두 람세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치적에도 불구하고 람세스 3세도 말년에 많은 반역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BC 1155년 람세스 3세가 사망한 후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Ramesses XI, 재위 1107년 ~ BC 1077년)가 즉위하게 되는 BC 1098년까지 고대 이집트의 제20왕조는 48년간 7명의 파라오가 교체되는 혼란이 발생했다. 그 사이 왕실의 권위는 쇠퇴하고 대신하여 사제의 권위가 파라오의 권위를 넘어서게 되었고 마침내 람세스 11세 시절인 BC 1080년 아문 대사제단의 고위 사제인 헤리호르(Herihor)가 테베에서 왕위를 참칭하고 상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BC 1077년 람세스 11세가 죽자 이번에는 '타니스(Tanis)'의 총독이었던 스멘데스(Smendes)가 왕위를 찬탈하고 하이집트를 지배하면서 이집트는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리비아인과 '누비아인(Nubians)'들이 이집트로 진출하여 지배하기도 하면서 혼란기인 '제3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 BC 1069년 경 ~ BC 664년 경)'가 이어지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혼란
바빌로니아의 왕조 변천
카시트 왕조의 성립
수메르와 아카드 제국에 이어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는 물론 동쪽의 엘람, 서쪽의 시리아까지 차지하는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BC 1750년 함무라비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삼수-일루나 재위 시절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쇠약해졌다. 먼저 라르사의 림-신 2세(Rim-Sin II)가 반란을 일으켜 우르크, 우르, 이신 등으로 확산되었으나 4년에 걸친 싸움 끝에 림-신 2세를 포로로 잡아 처형하면서 간신히 진압하였다. 그러나 동쪽의 엘람도 에파르티 왕조의 쿠티르나훈테 1세가 고대 바빌로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이후 약 200년간 오리엔트의 역사와 무관하게 지내며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 '고 엘람 시대(Old Elamite period, BC 2700년 경 ~ BC 1500년 경)'를 마감하게 된다.
더욱이 수메르의 '이신 왕조(Isin Dynasty)'의 마지막 왕인 다미크일리슈(Damiq-ilishu)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일루마일리(Ilum-ma-ilī)가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습지대(Sealand)'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들은 '습지대 왕조(Sealand Dynasty)' 혹은 바빌론의 '제2왕조(Dynasty II)'라고 불린다. 이렇게 하여 고대 바빌로니아의 세력이 급격히 축소되었고 수도인 바빌론만 온전히 지배하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BC 1595년에 히타이트에게 공격당하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히타이트는 바빌론을 직접 지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약탈과 파괴만 한 후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 갔고 힘의 공백이 발생한 바빌론을 차지한 것은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으로부터 새롭게 이주해 온 산악 민족인 '카시트족(Kassites)'이었다.
카시트족은 삼수-일루나(Samsu-iluna)가 통치하던 바빌론을 공격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비록 삼수-일루나가 이를 물리쳤지만 고대 바빌로니아의 북부 지역 중 일부를 차지하였고 BC 1595년 히타이트가 바빌론을 약탈한 후 물러나자 바빌론을 점령하고 북부 바빌로니아의 지배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시트족은 BC 1475년 남쪽의 바빌론 제2왕조까지 점령하고 바빌로니아를 재통일하게 되는데 이렇게 카시트족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하는 시기를 '카시트 왕조(Kassite Dynasty)' 혹은 바빌론의 '제3왕조(Dynasty III)'라고 부른다. 이후 카시트 왕조는 BC 1155년까지 약 400년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부와 남부를 지배하게 된다.
엘람의 부흥과 카시트 왕조의 멸망
함무라비 사후 고대 바빌로니아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 오리엔트 역사에서 사라졌던 엘람이 BC 1500년 경 '안샨(Anshan)'을 중심으로 등장한 여러 왕조들과 함께 다시 등장하면서 '중 엘람 시대(Middle Elamite period)'를 시작한다. 엘람은 바빌론의 새로운 주인이 된 카시트 왕조와 대결을 벌이게 되었고 키디누에스 왕조(Kidinuids, BC 1500년 ~ BC 1400년)와 이기할케스 왕조(Igihalkids, BC 1400년 ~ BC 1210년), 슈트루케스 왕조(Shutrukids, BC 1210년 ~ BC 1100년)로 이어졌다.
BC 1320년경 이기할케스 왕조 시기에 카시트 왕조에게 한때 점령당하기도 했으나 슈트루케스 왕조부터는 전세가 역전되어 오히려 엘람이 카시트 왕조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후 BC 1155년 엘람 슈트루케스 왕조의 슈트루크-나훈테(Shutruk-Nakhkhunte, 재위 BC 1185년 ~ BC 1155년)가 카시트 왕조의 자바바-슈마-이딘(Zababa-shuma-iddin)을 죽이고 새로운 바빌론의 왕으로 자신의 아들인 쿠티르-나훈테(Kutir-Nakhkhunte)를 세우면서 바빌로니아의 카시트 왕조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슈트루크-나훈테가 죽은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유서깊은 도시인 이신의 세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쿠티르-나훈테의 아들인 후텔루테쉬-인-슈쉬나크(Khutelutush-In-Shushinak, 재위 BC 1120년 ~ BC 1110년)의 시기에 이신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Nebuchadnezzar I, 재위 BC 1124년 ~ BC 1103)의 공격을 받아 바빌론을 빼앗기고 오히려 역습을 당해 수도인 '수사(Susa)'까지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 후 후텔루테쉬-인-슈쉬나크는 안샨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가 네부카드네자르 1세의 군대가 물러나면서 수사를 다시 회복하였지만 이후 엘람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BC 1110년 후텔루테쉬-인-슈쉬나크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인 쉴하나-함루-라가마르(Shilhana-Hamru-Lagamar)가 즉위한 후로는 다시 3세기 이상 오리엔트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바빌론 제4왕조의 성립
엘람으로부터 바빌론을 되찾은 이신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에 의해 바빌론의 '제4왕조(Dynasty IV)'가 시작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엘람의 수도인 수사를 잠시 점령할 정도로 큰 위세를 떨쳤고 엘람의 슈트루크-나훈테가 바빌론으로부터 약탈해갔던 '마르두크(Marduk)'의 신상을 되찾아 오면서 많은 신망을 얻었다. 마르두크는 번개의 신이자 바빌론의 민족신이었기 때문에 그 상징성이 매우 컸다.
이후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바빌론을 22년간 통치하였으나 그 사이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아시리아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고 있었다. 결국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죽은 이후 아시리아에 밀려 바빌론 제4왕조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결국 BC 1025년 시리아에 새롭게 등장한 '아람인(Arameans)'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이후 바빌로니아는 여러 단명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를 겪은 후 BC 911년부터는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미탄니의 흥망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한때 아시리아가 강성했으나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에게 점령당했고 고대 바빌로니아가 멸망한 이후에는 동쪽에서 이주해 온 후르리인이 차지하며 '미탄니(Mitanni)'라는 국가를 세운 후 그 세력을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부 지역까지 넓히게 된다. 후르리인은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 languages)'과는 무관한 '후르리-우라르투어족(Hurro-Urartian languages)'에 속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오리엔트 지방에서 살던 민족과는 전혀 다른 민족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왕의 이름으로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슈타르나(Shuttarna; 좋은 태양)', '바라타르나(Barattarna; 위대한 태양)', '파르샤타타르(Parshatatar; 토끼를 지닌 군주)', '사우슈타타르(Shaushtatar; 좋은 군주)', '아르타마마(Artatama; 가장 옳음)', '투슈라타(Tushratta; 10개의 당근을 가짐)' 등을 사용한 것을 볼 때 미탄니의 지배 계층은 '인도-아리안인(Indo-Aryan peoples)' 계통으로 추정된다.
후르리인은 말과 전차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변 민족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였고 수도인 '와슈칸니(Washukanni)'에는 군대의 주둔 기지까지 별도로 가지고 있었다. 미탄니가 등장할 당시 강대국이었던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모두 침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미탄니는 오리엔트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BC 15세기경부터 히타이트와 고대 이집트에서 모두 '신왕국(New Kingdom)'이라고 불리는 부흥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미탄니의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BC 14세기 히타이트의 수필률리우마 1세(Šuppiluliuma I, 재위 BC 1344년 경 ~ BC 1322년 경)에게 수도를 점령당하면서 영토의 절반을 빼앗기고 나머지는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부흥한 아시리아에게 BC 13세기 중반에 멸망당하며 아시라아의 한 주로 전락하고 만다.
아시리아 중왕조의 등장
BC 19세기 '아수르(Assur)'를 중심으로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하며 번영했던 아시리아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에게 멸망당했고 이후에 유입된 후르리인의 미탄니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BC 14세기 중엽에 아슈르 우발리트 1세(Ashur-uballit I, 재위 BC 1365년 ~ BC 1330년)에 의해 부흥하며 새로운 '아시리아 중왕조(Middle Assyrian Empire)'를 열었다. 아슈르 우발리트 1세에 의해 아시리아는 자영농을 중심으로 조직한 군대를 이용하여 실전과 정기적인 군사 훈련을 병행함으로써 아시리아는 군사 강국으로 재탄생되었다.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슈르 우발리트 1세는 히타이트와 연합하여 BC 1350년 이후 미탄니의 수도를 공격하여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속국으로 삼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미탄니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아슈르 우발리트 1세는 아수르, '니네베(Nineveh)' 등의 도시를 점령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아시리아의 확장은 아슈르 우발리트 1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샬마네세르 1세(Shalmaneser I, 재위 BC 1275년 ~ BC 1245년)가 히타이트 군을 격파하고 히타이트의 속국이었던 미탄니를 병합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투쿨티니-누르타 1세(Tukulti-Ninurta I, 재위 BC 1245년 ~ BC 1208년)는 바빌론을 점령한 후 7년간 직접 통치하였는데 이때 바빌로니아의 각종 신앙과 학문 등의 유입으로 문화적인 발전을 거듭하였고 아시리아 왕이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King of Sumer and Akkad)'이라는 호칭을 부여받게 되었다. 또한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히타이트의 세력이 쇠퇴한 틈을 타고 히타이트의 투드할리야 4세(Tudḫaliya IV, 재위 BC 1237년 경 ~ BC 1209년경)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면서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면서 그 세력이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참고로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역사적으로 '왕중왕(아카드어 šar šarrāni)' 칭호를 최초의 인물이다.
BC 1190년 북방의 강국인 히타이트가 멸망하면서 아시리아를 크게 위협할 국가가 사라지게 되었지만 아시리아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Tudḫaliya IV, 재위 BC 1114년 ~ BC 1076년)의 사후 왕위 계승을 두고 오랫동안 내분이 일어나면서 그 세력이 다시 약화되고 말았다. 또한 서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람인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고 동쪽에서는 산악 민족인 룰루비족의 압박이 계속되었으며 남쪽에서는 바빌론 제4왕조가 새롭게 일어나는 등 아시리아는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영토가 '티그리스(Tigris)' 강 유역의 좁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BC 10세기경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시리아 신왕조(Neo-Assyrian Em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