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제천의례 영고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에서 대회를 열어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영고(迎鼓)라고 한다. 이때 형옥(刑獄)을 중단하여 죄수를 풀어 주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의 제가와 사출도
나라에는 임금이 있었다. 모두 여섯 가지 가축 이름으로 관직명을 정하였는데,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였다. …… (중략) …… 이 여러 가는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다스렸는데, 큰 곳은 수천 집, 작은 곳은 수백 집이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의 5부와 대가
고구려에는 본래 5족(族)이 있었는데, 연노부(涓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이다. 본래 연노부가 왕을 하였지만 차츰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이를 대신한다. ……(중략)……왕의 종족(宗族) 가운데 대가(大加)는 모두 고추가(古雛加)라고 부른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적통대인(適統大人)은 고추가라고 칭할 수 있으며, 또한 종묘(宗廟)를 세우고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 지낼 수 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하였으므로 고추가의 칭호를 더해 준다. 여러 대가(大加)는 또한 스스로 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을 두고 명단을 모두 왕에게 보고하는데, 중국 경대부(卿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으며, 회동(會同)의 좌석 차례에서는 왕가(王家)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대열에 앉을 수는 없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옥저의 위치와 변천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 방향은 좁고 서남 방향은 길어서 천 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挹婁)⋅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아 있다. 호수(戶數)는 5,000호(戶)이다. 대군왕(大君王)은 없으며 읍락(邑落)에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漢)나라 초에 연(燕)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의 왕이 되었는데, 이때 옥저(沃沮)의 [여러 읍락이] 모두 [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이에] 옥저를 현도군(玄菟郡)으로 삼았다. 후에 이(夷)⋅맥(貊)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이른바 현도고부(玄菟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樂浪)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治所)를 두어 별도로 영동(領東) 7현(縣)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때에 옥저의 [읍락도] 모두 현이 되었다. 건무(建武) 6년(서기 30)에 변경의 군(郡)을 줄였는데, 동부도위도 이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현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渠帥]를 모두 각 현의 제후(縣侯]로 삼았으니,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은 전부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들 이적(夷狄)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현(不耐濊縣)의 제후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후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공조(功曹)⋅주부(主簿) 등 여러 관서를 두었는데, 예(濊)의 백성(民)이 모두 [관직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 우두머리는 스스로를 삼로(三老)라고 일컬었는데, 그것은 옛 [한나라] 현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나라가 작고 큰 나라들 사이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삼한의 발전
[한(韓)은] 한(漢)나라 때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였으며, [그 수장이] 사철마다 [낙랑군을] 찾아 뵈었다. [후한(後漢)] 환제(桓帝, 재위 146∼167)⋅영제(靈帝, 재위 168~189)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나라의] 군현(郡縣)이 제어하지 못하니, [한나라 군현의] 백성[民]으로서 한국(韓國)에 유입된 자가 많았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옥저의 부세와 그 부담
(동옥저는) 나라가 작아 큰 나라와의 사이에서 압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에 예속되었다. 고구려는 다시 그 나라의 대인(大人)으로 하여금 사자(使者)로 삼아 일을 이끌어 가도록 했다. 또한 고구려의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를 책임지도록 하였고, 동옥저의 맥포(貊布)⋅어염(魚鹽) 및 해중 식물(海中食物) 등을 천리 길을 지어 날랐다. 또한 동옥저의 미녀를 보내도록 하여 고구려인의 종이나 첩으로 삼았는데, 그들을 노복(奴僕)과 같이 대우하였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동예의 책화
예(濊)나라의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시하였으며, 산천마다 각각 읍락(邑落)의 구분이 있어 함부로 서로 건너거나 들어갈 수 없었다. ……(중략)…… 그 나라의 읍락은 서로 침범하면 항상 생구(生口)⋅우마(牛馬)로 죄를 처벌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이름 하여 ‘책화(責禍)’라고 하였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삼한의 사회와 문화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000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는데,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들은 토착민으로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장수(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중략)……
마한에는 무릇 50여 개의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만여 호(戶)이다. 진왕(辰王)은 목지국(目支國)을 통치한다. 신지(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사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부례(濆臣離兒不例) 구사진지렴(狗邪秦支廉)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으로는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이 있다.
……(중략)……
한족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낙랑이나 대방군에 가서 조알(朝謁)할 적에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중략)……
한족의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더라도 읍락(邑落)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중략)……
항상 5월이면 씨 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중국의 탁무(鐸舞)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친 후에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섬기기 때문에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관토록 했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었는데 이를 ‘소도(蘇塗)’라고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 온 자들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