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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Enlightenment, 자연법, 자유주의, 헌법, 법치주의, 정교분리, 17~18세기, 칸트

Jobs 9 2025. 5. 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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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啓蒙主義 / Enlightenment)

 

17~18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사상 운동으로,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통해 중산층에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계몽주의의 주요 요소로 뽑는 것은 자연법, 자유주의, 헌법에 기반을 두는 법치주의, 정교분리 등이 있다.

 

 

특징

 

17세기부터 유럽에서 나타나고 18세기에 확산되었는데, 아이작 뉴턴, 바뤼흐 스피노자,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에드워드 기번, 볼테르,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임마누엘 칸트 등 수많은 학자들이 참여한 시대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18세기 유럽은 기초적인 형태의 산업화와 함께 경제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겪었고, 이에 따라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정부의 역량도 점점 성장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평균적인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 커피하우스나 살롱과 같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토론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공 영역’의 존재는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다양한 사조와 담론들을 탄생시켰다.

 

이전 버전에는 영국의 생활수준이 넘사벽이고 정치가 자유로워서 다른 나라 지식인들이 영국 따라잡기에 열중했다고 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18세기까지 유럽의 생활수준은 특별히 어느나라가 월등히 높다고 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현대 경제사학자들에 의해 증명된 데다가1, 애초에 영국이 가장 자유로운 정치체를 가졌다고 부러워했다는 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같은 이들이 영국을 부러워한건 사실이지만 몇몇 계몽주의자들은 선거에 따라 군주를 뽑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가장 자유롭고 좋은 정치체를 가졌다고 본 경우도 있었고, 나라에 따라서는 강력한 전제군주가 계몽주의를 추구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같은 프랑스 사람이라도 루소 같은 이는 영국의 정치체가 인민을 선거할때 말곤 노예로 만드는 체제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무튼.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국가들은 영국과 다른 전통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특히 중상류층의 거의 전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에 전통적인 형태의 신앙심을 잃어버린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자에 대한 반감도 커졌다. 그래서 영국의 계몽주의와 자국의 전통을 융합시킨 인물들이 크게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칸트로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를 집대성 했으며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기독교 철학과 상충되는 이론은 철저히 배격했기에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등의 주변 국가에서도 철학의 신으로 추앙되었다.

 

계몽주의에 관여한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진보주의적 엘리트2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이전 세기의 비합리성, 독단성, 불분명성, 미신에 맞서 싸웠고, 그로 인해 종교적,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노력들은 18세기 말에 발생한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근대화와 수반하여 전세계적으로 계몽운동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는 현대인들의 기본적인 세계관에 계몽주의적 사고가 상당 부분 내재되어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계몽주의는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갔다.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 당이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기독교를 대체할 새로운 사이비 종교를 만드는 등 계몽주의를 넘어 온갖 해괴한 일을 벌였고, 계몽주의를 강제로 유럽 전체에 퍼트리고자 했던 나폴레옹 전쟁의 불길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자, 계몽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분노가 만연했던 것이다. 심지어 계몽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조차 계몽주의 비판이 주류의 목소리가 될 정도였다. 19세기 영국 지식인들의 주요 논쟁 거리는 더 이상 영국 중산층의 처우 개선이 아니라 도시 하층민을 비롯한 국내외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개선 문제에 대한 급진주의자와 보수주의의 대결이었다.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계몽주의는 철학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키디데스 등 고전 고대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철학적 경험주의와 이에 따르는 균형,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한 것이며, 회의주의는 피론 등 고대의 회의주의 철학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인간 이성을 중시하는 태도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대륙의 합리주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등을 계승해 발전시킨 것이었다. 도덕철학의 측면에서도 당대에는 '스토아 학파'니 '에피쿠로스 학파'니 하는 단어가 여전히 사용되었다.3

 

그러나 계몽주의자들을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과 구분시키는 점은, 갈릴레오, 뉴턴, 데카르트 등이 추동한 물리학 발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과학적 지식의 진보라는 관념에 매료됐고, 이러한 생각을 인류사 전체의 연속적 진보로 확장시켰다. 즉,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진보를 확신하는 세계관 or 역사관을 내놓은 것이다. 그 외 15~17세기 대항해시대나 30년 전쟁 등이 끝난 뒤 유럽이 누린 평화와 번영도 사상적 진보에 영향을 미쳤다.

 

다수의 계몽주의자들은 근대 물리학과 같은 과학적 방법이 도덕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위 인간과학, 즉 사회과학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흄은 "가격과 돈의 비축량이 균형을 이루는 경향을 물의 자정 작용에 빗대면서 인간의 이해관계가 '도덕적 인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이걸 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면 "개개인의 행동이 모이면 하나의 객관적인 사회 유형을 형성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고를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애덤 스미스로, 그에 따르면 모든 자연계의 사물들이 자연법칙적인 경과를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 역시 방해가 없다는 전제 하에 자기조절체계로 작동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문단에서 거론된 흄과 스미스는 대륙유럽의 계몽주의자들과 구분되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상의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내용들은 현재까지도 세계인들의 기본적인 세계관의 틀로 작동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이념적 패러다임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유주의만 해도, 맹목적인 전통이나 관습으로부터 개인이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인류 진보의 한 측면으로 본 계몽주의가 없었다면 지금의 모습처럼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해와 실상

 

‘계몽주의’라는 분류법이 흔히 쓰이지만 사실 이 단어는 19세기 후반에야 등장한 것으로, 당대에는 이런 분류가 없었다. 그리고 계몽주의자라고 해서 다 같은 사상을 공유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계몽주의자들 끼리도 많이 싸웠다. 흔히 계몽주의는 합리주의, 세속주의, 국민주권, 개인의 자유 등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이는 한쪽 면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종교에 대한 태도만 해도 드니 디드로 같은 유물론자, 무신론자부터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 같은 기독교 사상을 옹호하는 이들까지 다양했고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루소처럼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한 이들부터 입헌 군주정 선호자, 과두제 선호자, 심지어 전제군주정 선호자까지 계몽주의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기 때문에 ‘계몽주의는 이렇다‘고 정의할 수는 없다.

흔히 계몽주의가 현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주장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것도 오류. 고전적 자유주의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장자크 루소나 드니 디드로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은 선택받은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정치권력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고, 볼테르처럼 프리드리히 대왕 같은 계몽적 전제군주제를 옹호한 경우도 적지 않다. 다만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이 계몽주의자들의 작업을 계승하여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몽주의자들 그 본인이 자유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계몽주의자들이 이성을 사용한 합리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해서 이전 시대에는 이성에 대한 개념이 없다거나, 합리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성을 이용해 세상을 인간이 알아갈 수 있다는 태도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있던 것이고, 멀리 잡으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전 시대 철학자들의 작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지, ‘신앙이 지배하는 미개한 중세에 이성의 빛을 전달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처음 탄생한 19세기 후반에는 계몽주의 이전은 미신과 광신이 지배하는 미개한 시대라는 인식이 만연했고, 그렇기에 계몽주의자들이 민중을 깨우쳤다(Enlighten)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

 

 

 

독일 계몽주의

 

독일의 계몽은 합리주의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는 '보편적 인간 이성의 이념' 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프랑스의 계몽은 사회적, 정치적 계몽인 것에 반하여 독일의 계몽은 이론적 계몽이자 철학적 계몽이었다. 이는 현실과 동 떨어져 학문의 영역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계몽 철학의 학문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타 서유럽 국가의 계몽에 비해 후진적이였다.

 

 

독일의 유명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다음과 같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통해 계몽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칸트가 정의한 계몽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칸트는 그의 주장에 종교적 차원의 계몽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이성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이 중에는 공적인 사용과 사적인 사용이 있는데 특히 공적인 사용은 '학자의 입장에서 독서계의 모든 공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칸트가 베를린 월간 학보에 계몽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이성의 공적인 사용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 인간은 스스로 계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현자 나탄을 통해 계몽주의를 표현하였다. 계몽주의는 인본주의, 합리주의를 주장하였고 이는 교회의 권위에 바탕을 둔 구시대의 정신적 권위와 사상적 제도에 반대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대인을 통해 유럽인들의 계몽을 하려고 하였다. 레싱의 사상은 계몽주의적 인본주의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사랑을 실천하고, 이 실천을 통해 진정한 종교적 의미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한계와 비판

 

계몽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인물로는 카를 마르크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인류 역사가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해 간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자유가 일관되게 실현돼간다는 계몽주의의 낙관주의적인 역사관에는 비판을 가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모든 인류 사회에서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경제적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그렇지 못한 다수의 피지배계급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해야만 하는 상황이 언제나 지속되어 왔다. 단지 시대에 따라 지배-피지배 관계의 형태가 귀족-노예, 영주-농노, 자본가-노동자 식으로 변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발전해온 것은 인간사회가 자연세계를 대상으로 자원을 획득하고 그걸 가공하는 생산력, 즉 산업기술, 분업방식, 기업제도 등 뿐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비판을 차치해도, 계몽주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를 실현함에 있어서도 한계를 갖는다. 이를테면 초창기 계몽주의는 "무지한 민중을 지식인들이 일깨운다."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개개인마다 상이한 사상을 품을 수 있다고 보는 다원주의와 다소간 상충된다. 이 특성이 극단화되면 계몽주의는 역설적으로 전체주의로 비화될 수도 있다.

 

 

 

계몽주의 역사관?

 

서양 역사학 분야에서 계몽주의자들이 갑론을박을 생산하기도 하는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부터 시작하여 근대 계몽주의자, 나아가 현대의 칼 세이건 같은 대중저술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계몽주의 이전과 이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고 보아 계몽주의 이전 시대의 미개성을 굉장히 부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유럽사의 중세 및 기독교. 반대로 말하면 기독교가 도래하기 전인 고대 그리스 및 고대 로마는 그 실체를 떠나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에서 이들의 중세 비판은 합리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근세 시기부터 기존 사학자들이 열심히 써먹은 바 있는 중세 암흑시기설은 이미 애저녁에 주류 학계에서 논파되었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 정설로 퍼져있다보니 오늘날에도 많은 대중들이 이 역사관을 주류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에드워드 기번 등을 통해 대중화된 '계몽주의적' 역사관은 옳은 내용들도 있긴 하나, 개중에는 현대 역사학계에서 논파된 주장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 바깥의 많은 일반인들이나 적잖은 대중 저술가들은 여전히 '계몽주의적' 역사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중세 유럽이나 교회를 일방적으로 후려치면서 반대로 고대 그리스 및 로마나 근세 유럽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올려치기를 하는 태도다. 물론 유럽 중세 시절도 당연히 문제가 없는건 아니지만, 여하튼 관련해서 암흑시대, 연속성 논쟁, 아고라(영화), 조르다노 브루노,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 마녀사냥 등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들

 

일루미나티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전쟁

브나로드 운동(러시아)

브나로드 운동(한국)

독립협회

민립대학설립운동

계몽절대주의(啓蒙絕對主義, Enlightened Absolu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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