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고대

거칠부(居柒夫), 국사(國史), 진흥왕, 기출 문제

Jobs 9 2023. 12. 3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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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國史)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 왕 진흥왕 때 편찬된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진흥왕 6년기에 의하면, 545년 추7월에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가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國史)는 군신(君臣)의 선악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폄(褒貶)을 보이고자 함이니, 사기(史記)를 꾸며 두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왕이 이를 좇아 대아찬(大阿飡)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수찬하게 하였다.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 국사가 편찬되었다.”고 한 것은 국가의 위신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라고 믿어진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신라 중고왕통(中古王統)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위업을 과시하려는 데도 편찬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초에 걸쳐 정력적으로 진행된 산성 축조에 대한 기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국사(國史)』의 편찬은 유례없는 영토확장과 체제정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거칠부(居柒夫)

삼국시대 신라의 파진찬, 상대등 등을 역임한 관리.장수.

일명 ‘황종(荒宗)’ 또는 ‘거칠부지(居七夫智)’·‘거칠부지(居柒夫智)’라고도 한다.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5대손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17 계체기(繼體紀) 23년조에 등장하는 구지포례(久遲布禮)로 비정된다. 할아버지는 잉숙(仍宿), 아버지는 이찬(伊湌) 물력(勿力)이다. 특히 그의 아버지 물력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의 장인으로서 486년(소지왕 8) 2월에 이벌찬(伊伐飡)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거칠부는 545년 신라왕조의 역사서인『국사(國史)』를 편찬하였고, 551년 고구려를 쳐서 죽령(竹嶺) 이북의 10군(郡)을 빼앗아 신라 영토로 만들었으며, 진지왕(眞智王) 즉위에 공헌하는 등 신라 중고기의 중요한 대신으로서 활약했다.

내물마립간 계통의 왕족 후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나라에 큰뜻을 두고 승려가 되어 사방을 유람하였다. 그때, 고구려에 몰래 들어가 혜량(惠亮)의 강설(講說)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551년(진흥왕 12)에 고구려의 국경 속으로 진격했을 때 그를 맞아들여 승통(僧統)이 되게 하였다. 혜량은 황룡사에서 백좌강회(百座講會)를 열어 국태안민(國泰安民)을 기원하는 대집회를 열었는데, 이는 국가의 안위를 위하는 거칠부의 불교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545년에 왕명을 받아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국가의 위신을 높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아찬(大阿湌)에서 파진찬(波珍湌)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거칠부는 특히 군사·정치적인 분야에서 활동이 컸다. 551년에 대각간(大角干) 구진(仇珍), 각간(角干) 비태(比台), 잡찬(迊湌) 탐지(耽知)·비서(非西), 파진찬(波珍飡) 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 비차부(比次夫), 아찬(阿湌) 미진부(未珍夫) 등 8명의 장군과 더불어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탈취하였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시위인 동시에 진흥왕 12년 이후의 친정체제(親政體制)를 뒷받침하는 조치였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즉 「마운령비(摩雲嶺碑)」와 「창녕비(昌寧碑)」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흥왕 때 가장 영향력 있는 장군으로 정치적 비중 또한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576년 진지왕이 즉위하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진지왕의 즉위에 어떤 구실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또, 진지왕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폐위되었는데, 이는 거칠부의 사망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Q  밑줄 친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이찬 이사부가 에게 “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 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왕이 같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삼국사기』

 

① 정전 지급 
② 국학 설치 
③ 첨성대 건립 
④ 북한산 순수비 건립

【해설】 정답 ④
● 진흥왕 6C  '진짜 개대홍 배신자 단 나성북창 대황마'
신라 진흥왕(6세기)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했다.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하고 함경도까지 진출하는 과정
① 신라 성덕왕(8세기) 때 정전을 지급하였다.
② 신라 신문왕(7세기) 때 국학을 설치하였다.
③ 신라 선덕여왕(7세기) 때 황룡사 9층 목탑과 첨성대, 분황사/탑, 영묘사를 건립하였다.
④ 신라 진흥왕(6세기) 때 한강 하류를 점령하고 북한산비(555)를 건립하였다.

 

 

 

 Q  밑줄 친 ‘왕’의 재위 시기에 세워지지 않은 비석은?

 

이찬 이사부가 에게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① 창녕비
② 북한산비
③ 단양 적성비
④ 영일 냉수리비

【해설】 정답  ④
● 진흥왕 6C  '진짜 개대홍 배신자 단 나성북창 대황마'

 

* 역사서 ‘국사’가 편찬된 신라 진흥왕 대에 세워진 비석

- 삼국 시대에 학문이 점차 발달하고 중앙 집권적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기가 편찬되었으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 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  신라는 6세기 진흥왕(540~576)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576),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562)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북한산비, 창녕비, 황초령, 마운령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① 창녕비(561): 경남 창녕 지역에 소재한 진흥왕 순수비. 정식 명칭은 척경비(拓境碑)만 순수비와 같은 순행의 내용이다. 비화가야를 정복한 후 왕으로서의 통치 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이 일치 협력해 백성을 잘 이끌라고 한 유시를 담고 있다.

② 북한산비(568년 또는 555~568): 오늘날 서울 북한산 지역 순행비. 조선 후기 김정희가 고증하였다.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까지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③ 단양 적성비(551년 또는 555~568): 적성 공략에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尒次)와 가족 등 주변인물을 포상하고 적성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하는 대민회유 무마책의 내용이다. 이를 통해 신라가 한강 상류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④ 영일 냉수리비: 503년(지증왕, 유력설) 또는 443년(눌지왕), 영일 지방의 재산 분쟁을 판결해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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