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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 617~686), 정토종, 신라 원효 두문자 암기

Jobs 9 2023. 4. 12.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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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원효 정토종 두문자 암기

'원정대 아십 일화원'  

 

원효(元曉, 617~686)는 617년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栗谷)에서 태어났다. 법명(法名)은 스스로 원효(元曉)라고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이며 당시 사람들은 ‘새벽〔始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15세 무렵에 집안의 재산을 희사(喜捨)하고 출가하여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初開寺)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裟羅樹) 곁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고, 648년에는 황룡사(皇龍寺)에서 불경을 연구하며 수도하였다.

원효는 많은 저술을 통해 대승 불교의 오묘한 뜻과 진리를 밝혔으며, 여러 불교 학파의 이론을 통합하여 조화시키며 독자적인 불교 이론을 정립하였다. 당시 중국 불교는 여러 경전 가운데 어떤 경전이 부처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지를 따져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경전을 해석하였다.

원효는 중국 불교와 달리 통합적으로 불교 사상을 이해하여 독창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하였다. 그는 본래 하나의 마음이 진리를 다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다양한 이론이 생긴다고 보고, ‘모든 종파와 사상을 분리시켜 고집하지 말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종합해야 한다.’라는 원융회통(圓融會通) 사상을 정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화쟁(和諍) 사상이다. 화쟁이란 ‘말다툼, 즉 논쟁을 조화시킨다.’라는 의미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사실은 동일한 것임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

비유하자면, 그 형상(形相)으로 보아서는 청색과 남색이 다르지만, 그 바탕으로 보아서는 같은 것이며, 얼음과 물은 그 형태로 보아 다른 것이지만 그 근원은 동일한 것이다.

- 원효, “십문화쟁론”

 

원효는 서로 다르게 보이는 주장도 따지고 보면 모두 부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일체의 모든 이론은 결국 그 깨달음의 바탕인 일심(一心)일 뿐이며, 하나인 마음의 진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심이란 무엇인가? 깨끗함과 더러움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고, 참과 거짓 또한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一〕라고 한다. 이 둘이 없는 곳에서 모든 법은 가장 진실되어 허공과는 다르므로 스스로 신령스럽게 아는 성품이 있으니, 이를 마음〔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찌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없는데 무엇을 일러 마음이라 하겠는가? 이 같은 도리는 언어와 생각을 초월했으니 무엇이라고 지목할지를 몰라 억지로 하나인 마음〔一心〕이라고 한다.

- 원효, “대승기신론소”

 

원효에 따르면, 일심이란 깨끗함과 더러움, 참과 거짓, 나와 너 등 일체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절대불이(絶對不二)한 것이다. 즉, 모든 경론은 일심의 펼침이며, 이것을 종합하면 일심을 떠나지 않는다. 여러 종파 또한 일심의 펼침에서 나타난 현상이며, 간추려 생각하면 역시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일심에 바탕을 둔 그의 화쟁 사상도 모든 이론 및 종파의 특수성과 상대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전체로서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우리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동시에 있을 수 있으나 이 역시 둘이 아닌 하나이다.

- 원효, “대승기신론소”

 

일심(一心)의 입장에서 보면, 참다운 모습〔眞如〕이나 생성과 소멸〔生滅〕의 모습은 모두 같으면서 다른 것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음이 곧 부처로서 변화하지 않는 진여(眞如)의 특징을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연기에 의해 끊임없이 창조·파괴되는 생멸의 측징을 보인다. 결국 모든 종파의 주장은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므로 다투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처의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효의 일심 사상은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정신과도 통한다. 다음은 원효의 유명한 일화이다.

원효는 34세 되던 해에 8살 아래인 의상과 함께 공부를 좀 더 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고구려 땅을 거쳐 중국으로 가려고 하다가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1년 뒤 두 번째 유학을 떠나기 위해 의상과 함께 백제의 옛 땅을 거쳐 바닷길로 중국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그만 날이 저물어 무덤 속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바가지에 있는 물을 아주 맛있게 마시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는 너무 놀랍고 역겨운 나머지 구역질을 하였고, 그 순간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제 달게 마실 때나 오늘 구역질이 날 때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제와 오늘 달라진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생겨나므로 모른 것이 생긴다〔一切唯心造〕.”라고 읊었다고 한다.

원효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은 오직 일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심으로 돌아간 사람의 삶은 어떨까? 원효에 의하면, 그것은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삶이다. 일상에서 비로소 나와 남, 나와 세계의 벽은 무너지고 하나의 세계가 전개된다. 이럴 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이후,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無碍歌)>라 불렀다. 

원효는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았는데, 이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하면서 서민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는 표주박에 ‘걸림이 없다.’라는 뜻의 ‘무애(無碍)’라는 글자를 새기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염불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무애(無碍)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에서 비롯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불교의 교리를 쉬운 노래로 만들어 전했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마음의 투철한 깨달음을 통하여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비를 실천하는 무애행(無碍行)을 실천한 것도 ‘일심으로 돌아가서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한다.’라는 의미의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原 饒益衆生)’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원효는 한국 불교 이론의 개척자일 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사람도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써 당시 왕실 중심의 불교를 민중 불교로 전환하고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연 선구자였다.

대승의 뜻은 광범위하나, 심법(心法)은 하나이다.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의 뜻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마음이 일어나면 만 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 마음이 없어지면 만 가지 법이 없어진다. (중략) 크다고 하자니 틈이 없는 작은 곳에 들어가도 공간이 남고, 작다고 하자니 밖이 없는 큰 것을 감싸고도 남음이 없다. 있다고 하자니 한결같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하자니 만물이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무어라 이름 붙이기 어려워 대승(大乘)이라 한 것이다.

- 원효, “대승기신론소”

만년에는 경주의 고선사(高仙寺)에 머무르다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전해진다. 저서로는 “금강삼매경론소(金剛三昧經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이 있다.

 

원효와 의상

원효와 의상은 통일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같은 시기를 살았다. 원효는 화쟁 사상을 바탕으로 종파 간의 사상적 대립을 해소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동아시아 불교계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나무아미타불'만 열심히 외우면 죽어서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아미타 신앙을 보급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의상은 당에서 화엄 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와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라는 화엄 사상을 강조하여 신라 화엄종을 개창하고, 부석사 등 여러 사원을 건립하였다. 의상의 사상은 통일 직후 신라 사회를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원효(617~686)는 대승 불교의 참뜻이 중생 구제에 있음을 깨닫고, 고통받는 일반 민중에게 불교를 믿음으로써 내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는 경주와 그 주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도록 가르쳤다. 이 주문은 서방의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에게 의지하겠다는 의미를 지녔는데, 간결한 기도만으로도 내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많은 백성이 호응하였다.

의상(925~702)도 원효처럼 아미타 신앙을 널리 퍼뜨리면서 내세의 구원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거기에 관음 신앙을 덧붙임으로써 민중에게 더욱 큰 희망을 불어 넣었다. 관음은 불교에서 아미타불의 중생 구제를 돕는 보살로, 특히 현세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어디서든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존재로 알려졌다. 먼 내세가 아닌 가까운 현세의 고통을 구제해 준다는 점에서 관음보살은 민중에게 훨씬 더 친숙하게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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