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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 유대지방,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아

Jobs 9 2025. 1. 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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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의 유대지방

 

 

갈릴리, 갈릴래아

 

이스라엘 북부 지방의 이름

동쪽은 갈릴리호와 요르단강에 경계하여 있고, 상하로 나뉘어 상갈릴리는 기복(起伏)이 많은 고원, 하갈릴리는 기복이 적고 비옥한 평원으로 이어져 있다. 1세기 예수 시대에는 헤롯 안티파스의 영지(領地)였는데, 디베리아, 가버나움, 나사렛, 가나, 막달라 등의 마을들을 포함한 이 지방은 예수가 사역 활동 등의 전도하던 주요 무대였고, 대부분의 사도 및 제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용어
솔로몬이 나프탈리의 평야를 히람 1세에게 선사하자, 왕은 이 선물에 불만을 품고 "카불의 땅"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유대인은 이를 "갈릴"이라 나름대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게네사렛 호수를 포함하여, 그 지역 전체를 '하갈릴'이라고 부른다.

성서 속의 갈릴래아
신약성경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 팔레스타인의 북쪽 지방으로, 갈릴리 호수(갈릴래아 호수) 주변과 그 남쪽 지역을 가리켰으며 북쪽으로는 페니키아, 동쪽으로는 시리아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과 비교하여 당시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산 것으로 전해진다. 갈릴래아 주민들이 빈곤한 이유는 로마 제국의 수탈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은 세리, 대리정권인 헤로데 정권, 사제 계급의 세금 징수를 통해 주민들을 수탈했으며, 이에 민중들이 저항하면 공개처형인 십자가형으로 학살함으로써 탄압했다. 이 지방의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은 예수의 고향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다. 

 

 

 

유대, 유대아

 

전통적으로 가나안 지방의 남단을 부르는 고대의 지명이다. 넓게는 가나안 지방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나 대체로 과거 유다 왕국이 존재했던 가나안 지방 남부를 가리킨다. 현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요르단의 일부 지방으로 나뉜다.

‘유대’라는 이름은 고대 히브리 민족의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명인 유다의 자손인 ‘유다 지파’의 이름을 라틴어로 전사한 것(유대아)을 음차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지리적 고찰
원래 이 지역의 경계는 남쪽으로 헤브론, 북쪽으로 베스호론,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쪽으로는 요르단강을 경계로 한다. 지리적으로는 건조한 산악지형으로 대부분 사막으로 간주된다. 산지 중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020m인 남쪽의 헤브론 산이고 동쪽과 북쪽으로 가면 해수면보다 400m나 낮은 지형이다. 중요한 도시로는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예리코 등이 있다.

역사
선사 시대부터 이 지역에는 인류가 거주한 것으로 보이며 예리코는 인류가 가장 먼저 살기 시작해 아직까지도 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수많은 민족들이 이 지역에서 역사의 부침을 거듭해 왔고 유명한 것은 유대인들이다. 유대교의 토라 전승에 따르면 이 지역은 유대인의 시조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조상의 땅이며 그들이 묻힌 땅이다.

기원전 10세기경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이 세워져있었다고 하며 나중에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나뉘었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기원전 597년 또는 기원전 586년 (이른바 바빌론 유수의 시작 부분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나뉘고 있음) 바빌로니아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유대인의 주된 거주지였다.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해방되어 유대인들이 귀환했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잠깐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고 뒤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유다 마카베오의 반란 이후 하스몬 왕조가 들어서면서 잠시 유대인 왕국이 들어섰으나 결국 내분으로 기원전 63년 로마가 개입해 로마의 통치를 받았는데, 로마 제국은 유대를 직접 다스리는 게 아니라, 헤로데 1세와 그의 후손들로 구성된 헤로데 왕가를 유대의 지역권력으로 임명하여 다스렸다.

135년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으로 모든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이후 유대인은 자신의 땅과 국가가 없이 디아스포라를 해야 했으며 1948년 이후에야 자신들의 국가 이스라엘을 세워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마리아, 소므론

 

전통적으로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북쪽으로는 갈릴리와 남쪽으로는 유대와 경계를 나누는, 산지가 많은 지방을 일컫는 지리적 용어이다. 역사적, 정치적, 자연적으로 다른 지방과 구분되는 지역이며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땅의 중앙부분이다.

사마리아라는 이름은 구약성경 열왕기상 16:24에서 유래한다. 구약성경의 그 기록에 따르면,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섯 번째 왕인 오므리가 원래 그 땅의 주인인 "세멜"로부터 사마리아의 산지를 샀는데 사마리아라는 이름은 그"세멜"에서 따왔다고 한다. 

지리적 위치
북쪽은 갈릴리, 서쪽은 지중해, 동쪽은 요단강, 남쪽은 유대와 경계를 이룬다. 사마리아는 대부분이 그렇게 높지 않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간히 해발 800m를 넘는 부분도 있다. 산지는 남쪽 유대까지 특별한 경계를 이루지 않고 이어져 있다. 


신약시대의 유대지방
역사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왕이 죽은 후 그의 이스라엘 왕국은 남쪽의 유다 왕국과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의 여섯 번째 왕인 오므리가 원래 "세멜"(세멜이 개인인지 어떤 부족인지는 확실치 않다)로부터 언덕(사마리아)을 은 두달란트에 사들여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기원전 884년경) 이 도시는 바위산의 정상에 세워졌는데, 교통의 요지이면서 외적을 방어하기도 좋은 천연 요새지였으며, 고대의 포도주와 기름의 생산지로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실체가 밝혀졌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왕인 호세아왕 때 앗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침공해 도시를 점령하고 모든 사마리아 지역의 거주민을 앗시리아로 포로로 강제이주시켰고 바빌론과 쿠다(Cuthah)등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거주시켰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자신들과 구별해 쿠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쿳팀" 이라고 부르며 이는 경멸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이다.) 

이후 바빌론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면서 사마리아는 도시로 존재했고 기원전 332년경 수천명의 마케도니아병사들이 반란을 진압하러 와서는 그곳에 정착해 헬레니즘의 도시가 되었다. 그 시대에 성전과 거대한 도시성벽이 보강되었는데 기원전 108년 유대의 왕인 요한 히르카누스가 침공하여 성벽을 깨뜨리고 파괴하였다. 기원전 63년 사마리아는 로마에 의해 시리아 속주로 병합되었다.

기원전 30년 헤로데 대왕은 사마리아를 새로이 재건하여 크게 확장하고 도시 이름을 세바스테로 개명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했다. (세바스테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어로 아우구스투스를 뜻한다.) 헤로데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한 웅장한 사원을 비롯해 약 4km 길이의 성벽과 요새를 새로 세웠으며 헬레니즘 도시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 사업이었다. 

사마리아에는 세례자 요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믿어져 왔고 나중에 세례자 요한을 위한 교회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사마리아

통일왕국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과 유다로 대분열’
분열왕국 이스라엘 6대왕인 오므리가 수도로 삼아
유다왕국은 사마리아인 혼인금하고 반목과 경원시
신약시대 예수의 우물가의 여인 통해 널리 알려져

 
고대 역사적으로 본 사마리아

사마리아(SAMARIA)는 전통적으로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북쪽으로는 갈릴리와 남쪽으로는 유대와 경계를 나누는, 산지가 많은 지방을 일컫는 지리적 용어이다. 역사적, 정치적, 자연적으로 다른 지방과 구분되는 지역이며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땅의 중앙부분이다.

지정학적으로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약 33km 떨어진 팔레스틴의 내륙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사마리아성을 포함하고 있는 중부산간지방 전체를 사마리아 지방이라고 통칭한다. 북쪽은 갈릴리, 서쪽은 지중해, 동쪽은 요단강, 남쪽은 유대와 경계를 이룬다. 사마리아는 대부분이 그렇게 높지 않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 유대까지 특별한 경계를 이루지 않고 이어져 있다. 간간히 해발 800m를 넘는 부분도 있다.

이 도시는 바위산의 정상에 세워졌는데, 교통의 요지이면서 외적을 방어하기도 좋은 천연 요새지였다. 구약의 아합왕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의 우상숭배자들과의 대결의 현장인 그 유명한 갈멜산이 사마리아 지역에 있다.(열왕기상 18장)

사마리아 왕궁의 화려함은 예언자 아모스와 열왕기상를 통해 남아있다. ‘겨울궁, 여름궁, 상아궁 그리고 큰 궁’등의 표현은 바로 그것을 두고 한 말이다.(아모스 3:15, 열왕기상 22:39)

그리고 고대의 포도주와 기름의 생산지인 것이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실체가 밝혀졌다. 또한 사마리아에는 세례자 요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믿어져 왔고, 후일 세례자 요한을 위한 교회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분열 왕국인 북이스라엘의 수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겨우 70년 밖에 지속하지 못한다. 다윗이 일구었던 이스라엘 통일 왕국은 솔로몬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남북의 두 왕국으로 나뉘어진다. 통일 이스라엘이 분열한 이유는 종교적인 타락과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이었다. 

다윗에 이어 솔로몬의 통일왕국은 그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서 나라가 두 도막이 나게 된다. 남유다 왕국은 다윗 혈통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일부로 구성되었고, 그 나머지 10지파가 북이스라엘 왕국이 된다.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열왕기상 11:31-32)

그 배경은 이렇게 요약된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려면 지파의 승인이 필요했다. 솔로몬 통치 말기의 타락으로 국고가 탕진되고 백성들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상황에서 백성들의 대표들은 노역과 무거운 세금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자 에브라임 출신의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지파가 이스라엘 왕국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열왕기상 12:10-11)

이후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벧엘에 산당을 쌓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범하였다. 여로보암이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이유는 남 유다왕국이 통치하는 예루살렘으로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내려가면 분명히 자신을 배신하고,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열왕기상 12:32)

여로보암 왕이 산당을 세운 벧엘은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야곱이 에서를 피해 갈급하여 기도한 곳으로, 벧엘은 야곱이 돌을 베고 잠자다가 꿈에 천국의 계단을 본 곳이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28:11-12, 18-19)

분열 왕국인 이스라엘의 6대 왕인 오므리(재위 BC 884년경-873년경)는 즉위 후 6년에 세겜 근방에 있던 디르사(Tirza)로부터 수도를 옮겨 왔다. 오므리왕은 아합왕의 부친이기도 하다. 오므리는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기 위해서 그 땅의 주인인 ‘세멜’로부터 은화 두 달란트에 사들여 사마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디르샤에서 육년동안 치리하리라.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열왕기상 16:23-24)

아모스서에서 ‘사마리아를 산’(3장 9절)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므리는 사마리아가 자연적 요새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결정을 한 것 같다. 결국, 사마리아라는 명칭은 곧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받아들여졌고,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사마리아는 오므리 시대에 두로(Tyre)와 친근하려는 그의 정책에 걸맞는 장소였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세겜이나 디르사보다는 두로와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오므리 왕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두로와 긴밀한 관계였다.

특히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왕은 두로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사마리아를 베니게(페니키아)의 큰 영향을 받은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의 결혼은 번영하는 지중해 상업 도시들과 맺는 외교적·상업적 관계를 강화하여 육지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도시들에 상당한 부를 안겨 주었다.


두로는 이스라엘 북서쪽에 있으며 지중해에 면한 베니게의 수도이다. 베니게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갈멜산 북쪽으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갈릴리와 레바논 산맥을 경계로 이루어진 240km에 해당하는 해안가로 좁게 뻗은 곳에 위치한 국가이다.

베니게는 헬라어로 ‘붉은 색, 자주색’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로 조개껍데기에서 나온 붉은 색 염료로 옷감을 물들여 수출한 것과 연관된 명칭이다. 이 자주색은 자연스러우면서도 탈색이 안 되는 것으로 유명하여 고가(高價)로 취급되었다. 두로 근처에 위치한 고대 염색공장에서도 많은 수의 조개더미가 발견되었다. 

 
남유다왕국 반목 ‘신약시대 사마리아’


신약성경에서 많이 언급되는 지역 이름 중에 사마리아는 예수님의 행적과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이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 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한지라”(누가복음 9:52-53) 

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동네를 통과하는 것을 반대했을까? 예루살렘에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길을 내어주지 않은 야박한 인심. 여기에 대해 알아보려면 먼저 오랜 기간에 걸쳐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생긴 오랜 갈등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땅 제일 북쪽에는 갈릴리가 있었고, 중간에는 사마리아, 남쪽에는 유다 지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유다 지역으로 가는데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면 사흘밖에 걸리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요르단 강을 건너 두 배나 되는 먼 길을 돌아다녔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대화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 족속의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직접적인 후손들이라고 믿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은 결국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참여하는 것도 배제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들과 교제하는 것도 많은 금지 조항을 두어 제한시켰으며, 자녀들을 사마리아인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인을 더 멸시했다. 사마리아 여자로 태어난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당연히 그녀와 사는 남편도 부정한 자로 간주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이 어떤 마을에 머물기만 해도 그녀의 타액으로 부정한 기운이 머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만진 그릇이나 항아리는 더욱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수 당시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다가 목이 말라 어떤 우물가로 다가갔다. 그런데 두레박이 없어 물을 길어올릴 수가 없었다. 정오 무렵 제자들이 예수만 남겨두고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간 사이 한 여자가 항아리를 이고 물을 길러 나왔다.

유대인들에게 소외당하는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또 소외당하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는 물을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 여인은 유대 남자가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거느냐고 되물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한복음 4장 5-9절)

그녀는 제6시에 물을 길러 나왔다고 했는데 이를 유대인의 시간으로 보면 정오이다. 해가 중천인 이 시간에는 보통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자신의 부도덕한 과거와 삶으로 말미암아 남들의 눈을 피해 그 시간에 온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한복음 4장 18절) 이 말씀을 인용하는 대부분의 설교가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창녀였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적으로나 율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없는 형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녀를 극적으로 구원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여인이 창녀라는 근거가 전혀 없다. 단적으로 말해 창녀였다면, 남편이 아예 있을 수 없고,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을 남편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추론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당시에 여자가 남자에게 이혼을 요구하거나 갈아 치울 수 있는 상황이 절대로 아니었다. 물론 이 정도의 복잡한 혼인 관계와 동거는 오늘날 이혼율이 최고로 높은 현대 사회에서조차도 드문 것이다. 이는 대단히 희박한 사례이다. 주변의 시선이 절대 곱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여인이라는 사실이 성립되려면 먼저 그녀가 이혼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어야만 하지만, 당시 철두철미하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이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문화에서 여성에게는 이혼의 권리가 없었다. 율법은 단지 남자가 여자가 간음했을 때만 이혼을 허락할 수 있었다.

당시 사회는 법적으로 남자의 편에서 남자를 보호하고, 부인된 여성을 학대하고 버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돈이 없던 남자들을 위해서도 이혼 권리를 통해 부인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법이 지지해 주었다.

당시 과부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폭이 좁았기 때문에 그녀가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의 부인이나 첩으로 사는 것은 허다했다. 권력과 경제력을 지닌 남성들에게 여러 여자를 거느릴 권리로 일부다처제라는 법률이 있었다.

그녀는 결혼의 실패, 여성에 대한 사회 경제적 압제, 빈곤의 희생자였을 수도 있다. 어느 남자에게도 그녀가 원했던 안정되고 지속적인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여자가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에서 그녀가 했던 여섯 번의 결혼은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리아성을 포함하고 있는 중부산간지방 전체를 사마리아 지방이라고 통칭한다 .  북쪽은 갈릴리,  서쪽은 지중해,  동쪽은 요단강,  남쪽은 유대와 경계를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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