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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사건, 1979년, 신민당 당사, 부마항쟁, 노동운동

Jobs 9 2021. 4. 9.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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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8월 9일∼11일 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이던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들 중 1인이 경찰의 강제 진압에 의해 사망한 사건.

 

1966년 설립된 YH무역주식회사는 1970년대 초반에는 종업원 4천여 명에 수출 순위가 15위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한 회사였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고, 수 차례 노조 결성 시도가 실패한 후인 1975년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가발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자 YH무역의 경영주는 경영부실 상황에서 자금을 해외로 유출했으며, 노동자 인원 감축, 위장 휴업, 하청화 등을 단행하였다. YH노조는 1978년 5월, 1979년 4월에 회사측의 폐업 철회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 이후 회사 정상화를 위해 청와대, 정부 당국 및 채권 은행, 미국 대사관 등에 탄원을 하였지만, 회사는 자진 사표를 권유화 하는 등 정상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 지방 각지에서 상경하여 저임금 노동을 하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회사의 폐업은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고, 정부의 친기업적 노동 탄압 정책 하에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는 유명무실한 실정이었다. 이런 조건 하에서 회사측의 방만한 경영과 일방적 회사 폐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1979년 8월 6일 회사에서는 다시 폐업 공고를 했고, 7일에는 일방적으로 회사 기숙사 식당을 폐쇄한다고 발표하였다.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YH노조는 도시산업선교회 등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노동자들 일부를 기숙사에 잔류시키며,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8월 9일 새벽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에 187명의 노동자를 결집하여 농성을 벌였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농성장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격려하였고,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였다. YH노동자들의 농성 사건은 크게 언론에 보도되어 여론화되었고, 각종 시민사회단체의 지지와 방문이 이루어졌다. 8월 10일 신민당은 국회 보사위원회 소집을 요구하였으나, 정부와 여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이 사건을 논의할 수 없었다. 오후가 되어 YH무역 사장이 신민당사를 방문하여 회사를 은행관리로 넘기고 폐업을 철회하겠다고 했고, YH노조는 해당 조치가 취해지면 농성을 해제하겠다고 했으나, 그 이후 진전이 없었다. 경찰의 진압 압박이 강화되자, 김영삼 총재는 당사를 포위한 경찰의 철수를 요청하고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 1천여 명이 신민당사로 진입하여 총재실 등을 파손하고, 김영삼 총재, 국회의원, 기자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이 농성중이던 4층에도 경찰이 진입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이 와중에 YH노동자 김경숙이 왼쪽 팔목 동맥이 절단되고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하였다. 또한 YH무역 기숙사에서 농성중이던 58명의 여성노동자들도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노동자들은 8월 13일 회사로 옮겨져서 퇴직금, 7·8월 임금을 지급 받았다. 노동자들은 당초 회사가 약속한 상여금, 월차수당, 8개월분의 해고수당을 주지 않자 항의를 했지만, 경찰에 의해 준비된 버스로 귀향하게 되었다.

8월 17일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주동자로 최순영 지부장 등 노조간부와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 한국사회선교협의회 문동환, 서경석, 고려대 교수 이문연, 시인 고은 등을 「국가보위법」,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신민당은 노동탄압과 경찰의 국회의원 폭행, 야당 파괴 공작 등을 비판하고 18일간 농성을 벌였다.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도 YH노동자, 목사, 지식인 등의 구속에 항의하였다. 정부는 8월 16일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종교 단체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산업체 등에 대한 외부세력 침투실태 특별조사반’을 설치하고 기업체의 실태를 조사하였다.

 

신민당 의원들의 항의 농성이 벌어지고, 종교계·언론인·해직교수협의회·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주청년협의회 등 민주화운동 세력의 비판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4일에는 국회에서 김영삼이 국회의원 제명을 당하자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런 정치, 사회적 분위기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로 인한 부도 기업 속출 등에 대한 불만은 10월 16일 부마항쟁을 촉발하게 되었다. YH무역 여성노동자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은 1970년대 정부의 노동자 억압을 통한 경제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박정희정권이 몰락하게 되는 일련의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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