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net 19: When I consider how my light is spent
John Milton
When I consider how my light is spent,
Ere half my days, in this dark world and wide,
And that one Talent which is death to hide
Lodged with me useless, though my Soul more bent
To serve therewith my Maker, and present
My true account, lest he returning chide;
“Doth God exact day-labour, light denied?”
I fondly ask. But patience, to prevent
That murmur, soon replies, “God doth not need
Either man’s work or his own gifts; who best
Bear his mild yoke, they serve him best. His state
Is Kingly. Thousands at his bidding speed
And post o’er Land and Ocean without rest:
They also serve who only stand and wait.”
눈이 멀고 나서
나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이 어둡고 광활한 세상에서 반생도 살기 전에
숨겨두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한 가지 재능,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 되었구나. 비록 나의 영혼은
그 재능으로 창조주를 섬기고, 나의 진정한 삶의 계산서를
여행이 끝나는 날 그분이 꾸짖지 않도록 내밀려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빛은 허락하지 않으시면서 낮일을 원하시는가?”
나는 어리석게 묻는다. 인내는 그 불평을 가로막고
즉시 나에게 답하는구나. “주님은
인간의 업적이나 재능을 원치 않으신다.
그의 가벼운 멍에를 잘 짊어지는 자가 그를 잘 섬기는 것.
그의 나라는 위대하다. 수천의 천사들이 그의 명에 따라 달리며
육지나 대양을 넘어 쉼 없이 전하는 말은,
‘다만 서서 기다리는 것도 섬기는 것이다’.”
“Sonnet 19,” more commonly called "When I consider how my light is spent," is a poem by the English poet John Milton. Likely written in the mid-1650s, after Milton lost his eye-sight, the poem reflects on the physical and spiritual challenges the speaker faces as a blind person. He feels unable to complete the tasks that God has set for him, and worries that he is squandering his capacity to serve God. But, in the second half of the poem, the speaker reassures himself by arguing that God does not need human help and that there are many ways to serve him. Like some of Milton’s other poems (for example, “How Soon Hath Time”), the poem thus defends a Protestant position: the idea that salvation comes from faith, rather than work.
Summary
When I think about how I went blind before I reached the mid-point of my life in this big, dark world; when I consider that my greatest talent—which it would kill me to hide—is now useless, even though I want more than ever to use it to serve God, to prove to him that I’ve made good use of my life, so that he doesn’t rebuke me for the way I’ve spent my life; when I think about all this, I ask, foolishly, “Does God want me to do work that requires sight after denying me that sight?” But my internal sense of patience, in an effort to stop that bad thought, quickly replies: “God doesn’t need man’s work or his gifts. Whoever best obeys God's commands serves him best. He is like a king. Thousands of people rush around at his bidding, crossing land and sea without rest. And those who simply wait for his commands also serve him.”
Themes
Faith and Work
In “When I consider how my light is spent,” Milton reflects on blindness. This was an important topic for him, since he lost his own sight in the mid-1650s. Milton was a writer and translator—someone who relied on his eyes. Yet though blindness would have presented a number of practical problems, in this poem Milton focuses on the spiritual issues associated with blindness: the poem's speaker believes that he or she should use his or her talents as a writer to serve God, yet the speaker's blindness makes this impossible. This implicitly calls into question the demands that God places on human beings, yet any tension is resolved by the end of the sonnet: the speaker ultimately asserts that people best serve God through faith, rather than work.
In the first eight lines of the poem, the speaker mourns the loss of sight. Because of this blindness, the speaker feels unable to complete the work that the speaker had planned to do—and that God expects the speaker to perform. Alluding to the Parable of the Talents in the Book of Matthew, the speaker argues that if God gives someone a skill or ability, then God expects that they will use it profitably: if they fail to do so, they will incur God’s wrath. But the speaker's blindness makes it impossible to continue with any literary work—even though the speaker had been undertaking that work specifically to glorify God. Seething under the poem’s first eight lines, then, is a sense of deep frustration, a sense that God may be unfair.
For a devout Puritan like Milton, this is a potentially blasphemous position for several reasons. The speaker is in danger of thinking that he or she knows better than God—an all-knowing being. And the speaker imagines that the way to please God is through work—a position associated with Catholicism. It's important to note that Milton himself despised Catholicism and regularly attacked it throughout his career. As the speaker articulates frustration with God, the speaker strays into what the poem will ultimately deem a serious error—something the rest of the poem will be dedicated to correcting.
After the speaker articulates these frustrations with being blind—and lapses into a dangerous, almost blasphemous argument with God—a new voice enters the poem, which the speaker calls “patience.” This allegorical figure makes two arguments. First, this figure notes that God doesn't require human work or human gifts. Instead, the best way to secure salvation is simply to obey God. The voice suggests that this obedience is “mild” and, perhaps more importantly, flexible. It means different things for different people: while some “speed … o’er Land and Ocean,” others “stand and wait.” Yet both are, or can be, forms of service.
Performing great works is thus perfectly acceptable to Milton’s God, but it's not the only way to please him. It is just as effective to simply wait for God's commands, perhaps forever. The action doesn’t matter. What matters the way that it is performed—and whether it is an expression of faith in God and God's will.
(현대영어 해석)
When I think about how I went blind before I reached the mid-point of my life in this big, dark world; when I consider that my greatest talent—which it would kill me to hide—is now useless, even though I want more than ever to use it to serve God, to prove to him that I’ve made good use of my life, so that he doesn’t rebuke me for the way I’ve spent my life; when I think about all this, I ask, foolishly, “Does God want me to do work that requires sight after denying me that sight?” But my internal sense of patience, in an effort to stop that bad thought, quickly replies: “God doesn’t need man’s work or his gifts. Whoever best obeys God's commands serves him best. He is like a king. Thousands of people rush around at his bidding, crossing land and sea without rest. And those who simply wait for his commands also serve him.”
(한국어 해석)
내가 인생의 절반을 채 넘기기 전에 이 크고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시력을 잃었는지 생각할 때;
내가 나의 가장 뛰어난 재능 - 내가 죽어야 숨겨지는 - 이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비록 나는 내 인생을 잘 사용했다고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그 재능을 쓰고 싶지만, 그리하여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내가 어떻게 인생을 소모했는지에 대해 꾸짖지 않으시도록; 내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묻는다, 어리석게, "하나님은 시력을 필요로 하는 일을 내가 하길 원하시면서 나에게서 시력을 빼앗아가시나?" 그러나 나의 내면의 인내의 감각이, 그 나쁜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재빨리 대답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이나 그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누구든 하나님의 명에 가장 잘 순종하는 자가 그분을 가장 잘 섬기는 것이다. 그는 왕 같으시다. 수 천의 사람들이 그의 명령에 달린다, 땅과 바다를 쉼 없이 가르며. 그리고 그의 명을 기다리는 자 또한 그를 섬기는 것이다.
존 밀턴
- 1608 - 1674
- 셰익스피어와 함께 당대 최고의 작가로 손꼽힘 (실낙원 저자)
- 44세에 시력을 완전히 잃음
- 부유한 집안에서 자람.
- 아버지가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책을 구입.
- 여러 언어 습득.
- 최고의 선생님들에게 배움.
- 기억력이 굉장히 좋음 (photographical memory를 가졌다는 이야기도 있음)
- 그걸로 부족해 세계여행(유럽여행) 다녀옴
- 돌아와 6년간 집에 있는 모든 책 (유럽의 모든 책)을 다 읽음
- (촛불 켜놓고 하루 16시간씩)
- (유전적일 수도 있으나, 이런 이유로 시력을 잃은 것으로 추정)
<작품감상>
정형시든 자유시든, 어떤 문예사조나 이론이든, 좋은 작품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문제는 어떻게 진솔한 영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학이론이나 문예사조를 배우는 것은, 거기에 얽매이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작품을 담을 그릇으로 어떤 것이 모양새가 좋을지 고르기 위한 것이다. 무슨 문예운동을 한다고 억지로 꿰맞추려 하다 보니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듯 어색한 작품들이 생산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밀턴이 작품을 쓸 당시는 역시 소네트의 전성시대였다. 정형시 특히 소네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용 못지않게 리듬이다. 그러나 외국시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이러한 리듬을 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여하튼 시는 노래이기 때문에 리듬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시(詩)답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익은 산문시 혹은 지나치게 앞서가는 형식과 내용 파괴주의자들의 시를 보면서, 요즘 가요계에서 얄팍한 내용을 현란한 춤으로 얼버무리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밀턴의 이 시에서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주어진 삶을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 그 열매의 크기에는 괘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을 다듬어 완성한 바울도 평생 불치의 병을 짊어지고, 오히려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다. 고난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이를 발판 삼아 도약하는 성인(聖人)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현대에 살아가야 할 큰길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마지막 행에서 ‘기다림’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다만 최선을 다하고 기다리는 것이,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하는 것이라는, 삶의 바른 길을 재삼 확인하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다.
이 시의 3행에서 6행까지는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달란트의 비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달란트란 과거 이스라엘 화폐를 말하기도 하기도 하고, 각자 타고난 재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인이 하인 셋을 불러놓고, 능력에 따라 장사 밑천을 나눠주고 장기간 출타를 한다. 주인은 첫 번째 하인에게 5 달란트를 주고, 두 번째 하인에게는 2 달란트, 세 번째 하인에게는 1 달란트를 준다.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와 셈을 하는데, 첫 번째 하인은 두 배인 10 달란트를, 두 번째 하인 또한 4 달란트를 벌어, 둘 다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세 번째 하인은 받았던 돈을 불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이 왔을 때 그대로 내민다. 주인은 그의 게으름을 꾸짖었고 어두컴컴한 밖으로 내쫓았다.
우리도 이 세상에 나올 때에 각자 나름대로 타고난 재능을, 최선을 다해 사용하여 살면 되는 것이지, 얼마나 큰 업적을 남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담겨있다. 훌륭한 업적을 쌓았던 인물들, 그 업적이 무엇이든, 죽고 나면 남아 있는 우리에게 그저 스쳐가는 바람결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또한 항상 누구에게나 닥치기 마련인 고난에, 무릎 꿇고 좌절하여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삶을 낭비한다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때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밀턴은 반생도 되기 전에 자기 눈이 멀어 빛이 소진(消盡)된 것을 생각하며 불평하고 있다. 글 쓰는 것이 삶의 전부인 밀턴에게 있어서 육적인 것 이상의 아픔과 영적인 죽음까지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은 끝이 났다고 한탄한다. “하나님께서는 빛은 허락하지 않으시면서 낮일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그에게 준 달란트, 곧 그의 문학적 재능이 빛의 상실과 더불어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단단한 신앙은 절망의 끝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묵시(黙示)와 어둠의 심연에서 비쳐주는 새로운 빛을 찾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업적이나 재능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운명에 순종하되 성실히 사는 것만이 피조물의 자세인 것이다. ‘다만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행위(업적)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밀턴은 이 시를 통해서 믿음의 가장 결정적인 표현은 인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직 주어진 달란트(재능)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기다리는 것까지가 인간의 영역인 셈이다. 성경 곳곳에서 최선을 다한 후의 기다림을 강조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다.
<작가소개>
청교도 시인 존 밀턴(1608-1674)은 1608년 12월 9일에 런던의 '성 바울 사원' 근처 칩사이드(Cheapside)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로마 가톨릭교도였으며, 아버지가 신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는 소원(疏遠)하였다. 밀턴은 작곡에 재능이 있던 아버지로부터 청교도적 기질과 음악적 소질을 이어받고 문예부흥적인 교양을 몸에 익혔다. 그의 개인지도를 맡았던 유명한 신학자 토머스 영(Thomas Young)과 그의 부친은 어릴 때부터 그에게 문학적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토마스 영이 유럽으로 떠난 후, 성 바울 학원(St. Paul's School)에 입학하여 라틴어 등 여러 가지 언어를 배웠다. 1625년 케임브리지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하였는데, 이미 이때 밀턴의 라틴어 시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있었다. 최초로 영어로 쓴 걸작시 <그리스도 탄생 아침에(Ode 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 1629)>는 종교적 주제에 있어서나 기교적 원숙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1632-38년의 약 6년간 런던 서쪽 교외의 호튼에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선악 간의 갈등을 테마로 한 가면극 <코머스 (Comus, 1634)>와 불의의 해난사고로 죽은 친구를 추도한 시 <리시다스 (Lycidas, 1637)>를 발표하였다.
1638년 대륙으로 건너가, 파리에서는 그로티우스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갈릴레이와 알게 되었으나, 고국의 정치적 소요가 심상치 않음을 듣자 1639년 급거 귀국하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되고 공화정부가 수립되자, 밀턴은 외국어 비서관으로 초청되어 외교문서의 번역과 대외적 선전을 담당하면서 11년간 크롬웰 정부에서 주로 많은 산문을 썼다.
1652년에 완전히 시력을 상실하였고, 1666년 왕정복구가 되면서 얼마동안 옥중생활을 하였으나 기적적으로 처형을 면하게 된다. 그는 이런 시련을 극복하고 불후의 걸작들인 <실낙원(Paradise Lost, 1667)>, <복낙원 (Paradise Regained, 1671)>, <투사 삼손 (Samson Agonistes, 1671)>을 세상에 내놓았다.
구약성서에 기반을 둔 인간의 원죄(原罪)와 그 죄로 인한 낙원상실의 비극적 사건을 다룬 대서사시 <실낙원>은 밀턴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시력마저 완전히 잃은 후에 쓴 서사시로 10,565행에 달한다. ‘밀턴은 서사시라는 일정한 형식에 격조 높은 문장과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17세기 정신세계와 인문적 교양을 작품 속에 훌륭히 담아냈다.’ 밀턴 자신이 말한 것처럼 “영원의 섭리를 설파하고, 인간에 대한 신의 길의 정당함을 역설한” 것이다.
<복락원>은 <실낙원>의 후속 편으로 2,070행의 서사시다. <실낙원>이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써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비극이라면, <복낙원>은 예수님이 사탄을 물리침으로써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 ‘유혹하는 사탄과 이를 물리치는 예수님의 격렬한 논쟁을 통해, 메시아의 등장과 낙원의 회복을 알리는 메시지를 통해, 밀턴은 결국 구원의 길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음을 시사하고 있다. 신앙인이자 혁명가였던 밀턴의 삶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작으로 꼽힌다.’
극시, <투사 삼손>은 밀턴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삼손이 투옥되어 죽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삼손이 자신의 비참함과 치욕스러움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돌이켜 겸손과 인내를 배워 정신적으로 힘을 회복한 결과, 자신이 재차 신에게서 선택받은 전사(戰士)라고 느끼게 된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비평가들은 삼손의 모습이 작가인 밀턴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