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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대한석유공사, 유공, 한국이동통신, SK텔레콤, 노태우, 최종현, 전경련, 최태원, 노소영, 공기업 민영화

Jobs 9 2021. 10. 2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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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이 오늘날 한국 재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벌이 된 계기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씨가 결혼한 것은 1988년이어서 시기적으로만 보면 이 결혼과 1980년 SK의 유공 인수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노 씨 가문과 최 씨 가문이 사돈의 연을 맺기 이전부터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SK의 유공 인수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당시 선경(현재 SK)의 유공 인수는 재계에서조차 “말도 안 되는 미스터리”라고 평가할 정도의 일대 사건이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공기업이었던 유공의 위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1978년 대기업 순위에서 유공은 6,281억 원의 매출로 당당 한국 1위에 올랐다. 반면 당시 선경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선경과 선경금속 두 곳만 매출 50위 안에 올랐고, 두 회사의 매출을 합해도 유공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 선경이 당시 재계 서열 1위였던 삼성그룹을 뿌리치고 유공을 삼킨 것은 그야말로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격이었다. 

이에 대해 1999년 12월 산업자원부가 펴낸 역대 상공-동자부 장관 에세이집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적힌 기록은 눈여겨볼만 하다. 최동규 전 동자부장관은 이 에세이집에 기고한 ‘정유산업의 민영화’라는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1994년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돌아온 후 내가 초청해 골프를 치던 중 11년 전에 있었던 일이 되새겨졌다. “그때 유공을 선경에 넘기게 한 사람은 보안사령관이었던 노태우야. 나도 몰랐어.” 역사는 이렇게 해서 밝혀지게 되고 진실 앞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현실에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결국 선경의 유공 인수는 최태원-노소영의 결혼 이전부터 최 씨 집안이 군부 실세 노태우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덕이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재계에서는 이후락과 노태우 등 권력 실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선경그룹의 탁월한 능력을 경이로운(혹은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재계가 SK그룹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 시각은 ‘온실 재벌’, ‘공기업 민영화 전담 그룹’이라는 것이다. 민영화란 정부가 일반 기업에게 베푸는 크나큰 시혜다. 민영화를 한다는 말은 곧 정부가 공기업을 매각한다는 뜻이고, 공기업이 있었다는 자체는 곧 그 시장이 독점 시장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SK그룹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두 번의 초대형 민영화에서 모두 승자로 남았다. 1980년 유공을 삼킨 것이 그 첫 사례고,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것이 그 두 번째 사례다. 한국이동통신은 바로 오늘날 SK그룹의 주력인 SK텔레콤의 전신이다. 그리고 SK그룹은 이 두 개의 거대한 정부재산을 공개 경쟁 입찰이 아니라 모두 ‘낙점’이나 ‘배분’의 방식으로 손에 쥐었다. SK그룹이 자랑하는 워커힐 호텔도 이런 방식으로 손에 넣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8월,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경그룹을 선정해 발표했다. 임기 말이라는 특수성, 게다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거대 이권사업인 이동통신 사업자로 대통령의 사돈 그룹인 선경이 선정됐다는 사실. 누가 봐도 이는 공정할 수가 없는 사업자 선정이었다. 당시 재계에서는 “노 대통령이 선경을 밀어주는 대신, 퇴임 후 생활을 선경으로부터 보장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연히 야당이 반발했고, 여당 후보였던 김영삼마저 이 불투명한 거래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다. 결국 선경그룹은 여론에 밀려 일주일 만에 사업권을 반납해야 했다.  

바로 이런 과정 때문에 SK그룹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관계와 우리가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한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노 대통령 시절 사업권을 따내긴 했지만 결국 반납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일부만 사실일 뿐, 전체적으로는 맞지 않는 주장이다. 

실제 SK그룹이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한 것은 1994년이었다. 그리고 진출 방식은 공기업이었던 한국이동통신의 주식을 매입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1994년에는 1992년 SK가 반납했던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두고 포철과 SK 등 6대 기업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때였다. 즉, 당시 정부는 이동통신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제1이동통신이었던 한국이동통신을 민영화하고, 제2이동통신으로 신규 사업자를 선정하려 했던 것이다. 

유력 인수 후보였던 포철과 SK, 코오롱 등은 그야말로 눈알이 빠질 정도의 치열한 눈치 경쟁을 벌였다. 한 기업이 제1이동통신 인수로 돌아서면 나머지 기업은 제2이동통신 사업자 경합을 벌여야 하는 상황. 정부는 애초부터 인수 후보를 1992년 인수전에 참여했던 6개 그룹으로 제한함으로써 SK 등 기존 경력자들에게 큰 혜택을 줬다. 

워낙 이권이 큰 사업이었던 탓에 어떻게 선정을 해도 뒷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가 생각해 낸 묘안이 바로 사업자 선정권을 재계에 넘기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동통신이라는 국가 중추 사업 선정권을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재계에 넘긴다는 사실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었지만, 김영삼 정부는 그렇게 일을 처리했다. 결국 사업자 선정권은 전경련으로 넘어왔고, 공교롭게도(!) 당시 전경련 회장은 선경그룹의 수장 최종현이었다. 

최종현이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것은 1993년. 하지만 그가 전경련 회장직에 내정된 것은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 11월이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여론이 많았다. 왜냐하면 최 회장은 1991년 태평양증권을 프리미엄 56억 6,000만 원이라는 헐값에 인수하는 파격적 혜택을 누리면서 세간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증권가에서 거론되던 태평양증권의 프리미엄은 1,000억~3,000억 원 선. 그런데 최종현은 이 증권사를 56억 원이라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가격에 인수했다. 심지어 최종현은 개인 자격으로 태평양증권을 인수하면서 30대 재벌의 신규업종 진출을 제한한 여신 관리 규정도 교묘히 피해 갔다. 대통령의 사돈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거래였다. 그런 최종현이 여론의 반대를 뚫고 노태우 정권 말기에 전경련 회장으로 내정된 것이다. 

그리고 최종현은 2년 뒤인 1994년, 정부가 넘긴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권을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손에 쥐었다. 최종현은 전경련 회장직을 이용해 선경그룹이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냈다는 여론의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낸 묘안이 바로 포철과 선경그룹의 역할 분담이었다. 선경그룹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 경쟁에서 발을 빼는 대신, 즉 포철에게 그 사업권을 몰아주는 대신, 자신은 제1이동통신인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경련 회장단은 며칠의 격렬한 토론 끝에 최종현의 이 방안을 승인했다. 대부분의 재벌 총수들은 1992년 사업권을 땄다가 한 번 토해낸 적이 있는 선경과 최종현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결국 이동통신이라는 국가 중추 사업은 선경과 포철의 나눠먹기로 결정이 났고, 선경은 이 과정을 통해 유유히 한국이동통신이라는 거대 공기업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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