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D 공무원 영어 독해 공부법 공무원 영어는 독해에서 결정된다. 짧은 시간에 긴 지문을 독해하는 능력이 필수다. TED는 시사적 내용에 출제 가능성도 크다. TED 원 사이트에서 공부해도 되겠지만 영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장시간 공부하기 힘들다. 또한 읽기만 필요해서 듣기는 시간 낭비다. 짧은 시간에 많이 읽기 위해서는 독해하는 동안 막히면 곤란하다. 단어 찾고 문법 찾다보면 흐름이 끊긴다. 모르면 잠깐씩 해석을 보고 넘어가더라도 빠르게 독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물론 해석을 읽는 것 만으로도 독해 논리 훈련에 큰 도움이 된다. ※ 스마트폰은 가로 이용 |
Many people face the news each morning with trepidation and dread. Every day, we read of shootings, inequality, pollution, dictatorship, war and the spread of nuclear weapons. These are some of the reasons that 2017 was called the "Worst. Year. Ever." Until 2018 claimed that record -- (Laughter)
많은 사람들이 아침마다 뉴스를 접하며 불안과 공포를 느낍니다. 매일 보는 기사는 총기 사건 불평등, 공해, 독재 정부 전쟁, 핵무기 확산 등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2017년을 두고 "사상 최악의 해"로 평가했죠. 2018년이 그 기록을 경신할 때 까지는 그랬습니다
and left many people longing for earlier decades, when the world seemed safer, cleaner and more equal. But is this a sensible way to understand the human condition in the 21st century? As Franklin Pierce Adams pointed out, "Nothing is more responsible for the good old days than a bad memory."(Laughter)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수십 년 전을 그리워합니다. 그때는 세상이 더 안전했고, 깨끗했고, 더 평등했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것이 지금 21세기에 우리 인류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합리적인 방법일까요? 프랭클린 피어스 아담스는 이런 말을 남겼죠.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억력이 나빠서이다."
You can always fool yourself into seeing a decline if you compare bleeding headlines of the present with rose-tinted images of the past. What does the trajectory of the world look like when we measure well-being over time using a constant yardstick?
내리막의 상황만 보다 보면 스스로를 어리석게 만듭니다. 요즘의 끔찍한 신문기사 제목과 과거의 장밋빛 모습을 서로 비교하면 그럴 수밖에요. 그렇다면 이 세상이 어떤 궤적을 거쳐왔는지 시간에 따른 행복도의 변화를 동일한 척도로 평가해보면 어떨까요?
Let's compare the most recent data on the present with the same measures 30 years ago. Last year, Americans killed each other at a rate of 5.3 per hundred thousand, had seven percent of their citizens in poverty and emitted 21 million tons of particulate matter and four million tons of sulfur dioxide. But 30 years ago, the homicide rate was 8.5 per hundred thousand, poverty rate was 12 percent and we emitted 35 million tons of particulate matter and 20 million tons of sulfur dioxide.
현재 상황에 대한 가장 최근 자료와 30년 전의 상황을 비교해보겠습니다. 작년, 미국에서는 10만 명당 5.3명의 비율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시민의 7%가 빈곤을 겪고 있으며 2100만 톤의 미세 먼지를 배출했고 400만 톤의 아황산가스를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에는 살인사건 비율이 10만 명당 8.5명이었고 빈곤율은 12% 였으며 미세먼지 배출량은 3,500만 톤이었고 아황산가스 배출량은 2,000만 톤이었습니다.
What about the world as a whole? Last year, the world had 12 ongoing wars, 60 autocracies, 10 percent of the world population in extreme poverty and more than 10,000 nuclear weapons. But 30 years ago, there were 23 wars, 85 autocracies, 37 percent of the world population in extreme poverty and more than 60,000 nuclear weapons. True, last year was a terrible year for terrorism in Western Europe, with 238 deaths, but 1988 was worse with 440 deaths.
전 세계의 상황도 볼까요? 작년, 전 세계 12개 지역이 전쟁을 겪고 있었고 60 개국이 독재 국가였으며 전 세계 인구의 10%가 극심한 빈곤 상태였고 핵무기는 10,000개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에는, 전쟁 지역이 23 곳이었고 85개의 독재국가가 있었으며 전 세계 인구의 37%가 극빈층이었고 핵무기는 60,000개 이상이었습니다. 실제로, 작년은 서유럽에 있어서 테러로 인한 최악의 해로 238명이 사망했지만 1988년에는 상황이 더 나빠서 440명이 사망했죠.
What's going on? Was 1988 a particularly bad year? Or are these improvements a sign that the world, for all its struggles, gets better over time? Might we even invoke the admittedly old-fashioned notion of progress? To do so is to court a certain amount of derision, because I have found that intellectuals hate progress.(Laughter)
어떻게 된 거죠? 1988년이 유난히 나쁜 한 해였나요? 아니면 이렇게 나아졌다는 것은 이 세상이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일까요? 우리는 어쩌면 진보라는 고리타분한 개념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비웃음을 사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는 지식인들은 진보를 싫어하거든요.
And intellectuals who call themselves progressive really hate progress.(Laughter)
스스로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조차 진보를 정말 싫어합니다.
Now, it's not that they hate the fruits of progress, mind you. Most academics and pundits would rather have their surgery with anesthesia than without it. It's the idea of progress that rankles the chattering class. If you believe that humans can improve their lot, I have been told, that means that you have a blind faith and a quasi-religious belief in the outmoded superstition and the false promise of the myth of the onward march of inexorable progress. You are a cheerleader for vulgar American can-doism, with the rah-rah spirit of boardroom ideology, Silicon Valley and the Chamber of Commerce. You are a practitioner of Whig history, a naive optimist, a Pollyanna and, of course, a Pangloss, alluding to the Voltaire character who declared, "All is for the best in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그런데 그것은 지식인들이 진보의 과실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학자와 전문가들은 현실에 무감각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진보의 개념은 시끄러운 토론 수업에서나 다룹니다 인류가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쓸데없는 믿음이고 사이비 종교의 해묵은 미신이며 진보가 거침없이 계속될 거라는 말은 헛된 약속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미국의 천박한 '할 수 있다' 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파이팅 정신은 회의실이나 실리콘 밸리, 상공회의소에서나 볼 수 있다. 너희는 끊임없이 진보하는 역사를 꿈꾸고 있으며 폴리아나 같은 순진한 낙천주의자이자 "무슨 일이 닥쳐도 결국에는 모든 게 잘 될 것이다"라고 했던 볼테르의 소설 속 등장인물인 팽그로스나 마찬가지다.
Well, Professor Pangloss, as it happens, was a pessimist. A true optimist believes there can be much better worlds than the one we have today. But all of this is irrelevant, because the question of whether progress has taken place is not a matter of faith or having an optimistic temperament or seeing the glass as half full. It's a testable hypothesis. For all their differences, people largely agree on what goes into human well-being: life, health, sustenance, prosperity, peace, freedom, safety, knowledge, leisure, happiness. All of these things can be measured. If they have improved over time, that, I submit, is progress.
사실, 팽그로스 교수는 공교롭게도 비관론자였습니다. 진짜 낙관론자는 현재 상황이 아무리 좋아도 그보다 더 나은 미래가 올 거라고 믿죠. 하지만 이런 견해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진보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신념이나 낙천적 기질의 문제도 아니고 컵에 물이 반이나 차있다고 보는 시각의 문제도 아닙니다. 진보는 검증할 수 있는 가설입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지만 인간다운 삶의 구성 요소에 대해서는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겁니다. 수명, 건강, 생계유지, 부유함, 평화, 자유, 안전, 교육 여가 생활, 행복 등이죠. 이 모든 것들은 수치로 측정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 수치가 시간에 따라 나아진다면 진보했다고 판단할 수 있죠.
Let's go to the data, beginning with the most precious thing of all, life. For most of human history, life expectancy at birth was around 30. Today, worldwide, it is more than 70, and in the developed parts of the world, more than 80. 250 years ago, in the richest countries of the world, a third of the children did not live to see their fifth birthday, before the risk was brought down a hundredfold. Today, that fate befalls less than six percent of children in the poorest countries of the world.
그럼 수치를 한번 볼까요. 제일 먼저, 가장 중요한 인간의 수명입니다. 우리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의 기대 수명은 30세였습니다. 오늘날에는 70세 이상이죠. 그리고 일부 선진국에서는 80세를 넘습니다. 250년 전에는 가장 부유한 나라조차도 어린아이의 30%는 5세 이전에 사망했습니다. 그 후에 사망 위험이 100분의 1로 줄었고 오늘날에는 세계 최빈국에서 조차 그 불운한 아이들의 비율이 6% 이하로 줄었습니다.
Famine is one of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It could bring devastation to any part of the world. Today, famine has been banished to the most remote and war-ravaged regions. 200 years ago, 90 percent of the world's population subsisted in extreme poverty. Today, fewer than 10 percent of people do. For most of human history, the powerful states and empires were pretty much always at war with each other, and peace was a mere interlude between wars. Today, they are never at war with each other. The last great power war pitted the United States against China 65 years ago. More recently, wars of all kinds have become fewer and less deadly. The annual rate of war has fallen from about 22 per hundred thousand per year in the early '50s to 1.2 today.
요한 계시록의 네 재앙 중 하나인 기근의 경우에는 모든 세상에 파멸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근은 외딴 지역이나 전쟁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0년 전에는 전 세계 인구의 90%가 극심한 기근에 놓여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10% 이하로 줄었죠. 인류사를 통틀어 강한 권력을 가진 지역이나 국가는 주변국과 늘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전쟁들 사이의 아주 잠시 동안만 평화를 누렸죠. 오늘날에는 그렇게 전쟁을 치르는 나라는 없습니다. 마지막 강대국 간의 전쟁은 65년 전에 있었던 미국과 중국 간의 전쟁일 것입니다. 더 최근에 와서는 전쟁의 회수나 규모도 훨씬 줄었죠. 연간 전시 사망자 비율은 50년대 초에 10만 명당 22명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1.2명으로 감소했습니다.
Democracy has suffered obvious setbacks in Venezuela, in Russia, in Turkey and is threatened by the rise of authoritarian populism in Ea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Yet the world has never been more democratic than it has been in the past decade, with two-thirds of the world's people living in democracies. Homicide rates plunge whenever anarchy and the code of vendetta are replaced by the rule of law. It happened when feudal Europe was brought under the control of centralized kingdoms, so that today a Western European has 1/35th the chance of being murdered compared to his medieval ancestors. It happened again in colonial New England, in the American Wild West when the sheriffs moved to town, and in Mexico.
민주주의의 경우는 베네수엘라, 러시아, 터키 등의 국가에서 명백히 후퇴하고 있고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양상이 동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죠. 하지만 전 세계가 이렇게 민주적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과거 10년 전에 비하면 말이죠. 현재는 세계 인구의 2/3가 민주주의 체제하에 살고 있습니다. 살인사건 발생률의 경우는 무정부 상태와 복수의 원칙을 법규율이 다스리면서 감소했습니다. 봉건 유럽이 중앙 집권화된 왕정 체제로 바뀌면서 오늘날 서유럽에서는 중세 시대에 비해 살인사건 발생률이 1/35로 감소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뉴잉글랜드도 그랬고 미국의 서부시대에도 보안관의 등장으로 같은 양상을 보였으며 멕시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Indeed, we've become safer in just about every way. Over the last century, we've become 96 percent less likely to be killed in a car crash, 88 percent less likely to be mowed down on the sidewalk, 99 percent less likely to die in a plane crash, 95 percent less likely to be killed on the job, 89 percent less likely to be killed by an act of God, such as a drought, flood, wildfire, storm, volcano, landslide, earthquake or meteor strike, presumably not because God has become less angry with us but because of improvements in the resilience of our infrastructure. And what about the quintessential act of God, the projectile hurled by Zeus himself? Yes, we are 97 percent less likely to be killed by a bolt of lightning.
사실,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전보다 더 안전해졌습니다. 지난 세기에 걸쳐서 교통사고 사망률은 96%나 감소했고 인도에서 차에 치일 확률도 88%나 감소했으며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99%나 줄었으며 업무 중에 사망할 확률은 95% 감소했으며 천재지변으로 사망할 확률은 89%나 감소했습니다. 가뭄, 홍수, 산불, 태풍, 화산 폭발 산사태, 지진 또는 운석 충돌 같은 것이죠. 아마도 신이 우리에게 화를 낼 일이 줄었다기보다 기반 시설물의 복원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전형적인 천재지변이라면 제우스 신의 번개가 아닐까요? 그렇죠. 번개로 사망할 확률은 97%로 감소했습니다.
Before the 17th century, no more than 15 percent of Europeans could read or write.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achieved universal literacy by the middle of the 20th century, and the rest of the world is catching up. Today, more than 90 percent of the world's population under the age of 25 can read and write. In the 19th century, Westerners worked more than 60 hours per week. Today, they work fewer than 40. Thanks to the universal penetration of running water and electricity in the developed world and the widespread adoption of washing machines, vacuum cleaners, refrigerators, dishwashers, stoves and microwaves, the amount of our lives that we forfeit to housework has fallen from 60 hours a week to fewer than 15 hours a week.
17세기 이전에는 유럽인 중에 읽고 쓰기가 가능한 사람은 15%를 넘지 않았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20세기 중반이 되었을 때에 전반적으로 읽고 쓰기가 가능하게 되었고 나머지 국가들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서 25세 이하 인구의 90% 이상이 읽고 쓸 수 있습니다. 19세기에는 서양인의 근무시간이 주당 60시간을 넘었지만 오늘날에는 40 시간 이하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수도망과 전력망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세탁기, 진공청소기가 널리 쓰이며 냉장고, 식기세척기,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를 사용하게 되면서 가사 노동에 소비되는 시간이 주당 60시간에서 15시간 이하로 줄었습니다.
Do all of these gains in health, wealth, safety, knowledge and leisure make us any happier? The answer is yes. In 86 percent of the world's countries, happiness has increased in recent decades.
건강, 재산, 안전, 지식 그리고 여가 생활에 여유가 생긴다면 더 행복할까요?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전 세계 국가의 86%에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행복지수가 증가했죠.
Well, I hope to have convinced you that progress is not a matter of faith or optimism, but is a fact of human history, indeed the greatest fact in human history. And how has this fact been covered in the news?(Laughter)
이제 납득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진보는 믿음이나 낙관적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사의 실상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실로 대단한 실상이죠. 이런 실상을 뉴스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다뤄온 건가요?
A tabulation of positive and negative emotion words in news stories has shown that during the decades in which humanity has gotten healthier, wealthier, wiser, safer and happier, the "New York Times" has become increasingly morose and the world's broadcasts too have gotten steadily glummer.
뉴스 기사에 나오는 긍정적 또는 부정적 느낌의 단어를 비교해보면 과거 수십 년 사이에 우리 인류는 더 건강해졌고 더 부유해졌고, 더 똑똑해졌고,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해졌지만 뉴욕 타임스 지는 갈수록 뚱한 태도를 보이고 전 세계 방송사들도 계속해서 우울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Why don't people appreciate progress? Part of the answer comes from our cognitive psychology. We estimate risk using a mental shortcut called the "availability heuristic." The easier it is to recall something from memory, the more probable we judge it to be. The other part of the answer comes from the nature of journalism, captured in this satirical headline from "The Onion, " "CNN Holds Morning Meeting to Decide What Viewers Should Panic About For Rest of Day."(Laughter)
왜 사람들은 진보를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그 대답 중 일부를 우리의 인지 심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용성 발견"이라는 심리적인 빠른 판단으로 위험을 예측하는데요. 머릿속에서 뭔가 쉽게 떠오를수록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대답은 언론의 본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The Onion 뉴스 사이트의 조롱 섞인 기사 제목에서도 알 수 있죠. "CNN은 아침 회의에서 무엇으로 독자들의 하루를 혼란에 빠뜨릴지 결정합니다"
News is about stuff that happens, not stuff that doesn't happen. You never see a journalist who says, "I'm reporting live from a country that has been at peace for 40 years, " or a city that has not been attacked by terrorists. Also, bad things can happen quickly, but good things aren't built in a day. The papers could have run the headline, "137,000 people escaped from extreme poverty yesterday" every day for the last 25 years. That's one and a quarter billion people leaving poverty behind, but you never read about it. Also, the news capitalizes on our morbid interest in what can go wrong, captured in the programming policy, "If it bleeds, it leads." Well, if you combine our cognitive biases with the nature of news, you can see why the world has been coming to an end for a very long time indeed.
뉴스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언론은 없죠. "지난 40년간 평화를 유지해 온 나라에서 생중계로 전해드립니다." 아니면 테러 공격을 받은 적이 없는 도시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나쁜 일은 빨리 일어나지만 좋은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제목의 기사가 있다고 치죠. "어제 13만 7천 명이 극심한 기근에서 벗어났습니다." 25년간 매일 같은 기사를 낸다면 기근을 벗어난 인구가 모두 12억 5천만 명이 되겠지만 사람들은 그 기사를 읽지 않을 겁니다. 또한, 언론이 이용하는 것은 상황이 나빠질 것에 대한 우리의 병적 호기심입니다. "피를 흘려야, 주목받는다"라는 편집 정책에 갇혀있는 거죠. 따라서, 우리의 인지 편향과 언론의 본성을 조합해보면 왜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세상이 끝날 거라고만 해왔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Let me address some questions about progress that no doubt have occurred to many of you. First, isn't it good to be pessimistic to safeguard against complacency, to rake the muck, to speak truth to power? Well, not exactly. It's good to be accurate. Of course we should be aware of suffering and danger wherever they occur, but we should also be aware of how they can be reduced, because there are dangers to indiscriminate pessimism. One of them is fatalism. If all our efforts at improving the world have been in vain, why throw good money after bad? The poor will always be with you. And since the world will end soon -- if climate change doesn't kill us all, then runaway artificial intelligence will -- a natural response is to enjoy life while we can, eat, drink and be merry, for tomorrow we die.
진보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을 얘기할까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궁금하셨을 거예요. 첫째로, 비관론적 시각도 좋은 것 아닐까요?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방지하고 부정을 들춰내 권력에 맞서 진실을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물론 고통과 위험이 어떤 상황에서 일어날지 알아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도 알아야 하죠. 왜냐하면 무분별한 비관론에는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중 하나가 운명론입니다. 만약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이 모두 헛된 것이라면 실패한 것에 돈을 더 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 늘 가난에 허덕이게 되겠죠. 그리고 세상이 곧 종말을 맞을 테니.. 기후 변화가 인류를 멸종시키거나 통제불능의 인공지능이 그렇게 하겠죠. 그러면 여생을 즐기겠다는 게 당연한 반응일 겁니다. 내일 죽더라도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거죠.
The other danger of thoughtless pessimism is radicalism. If our institutions are all failing and beyond hope for reform, a natural response is to seek to smash the machine, drain the swamp, burn the empire to the ground, on the hope that whatever rises out of the ashes is bound to be better than what we have now.
무분별한 비관주의의 또 다른 위험은 급진주의입니다. 만약 우리 제도권이 무능해서 다시 개혁할 희망도 없다면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은 조직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부정부패를 쓸어내고 조직 세력을 뿌리까지 태워버리려 할 것입니다. 그 잿더미에서 뭐든 다시 일어난다면 당연히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말이죠.
Well, if there is such a thing as progress, what causes it? Progress is not some mystical force or dialectic lifting us ever higher. It's not a mysterious arc of history bending toward justice. It's the result of human efforts governed by an idea, an idea that we associate with the 18th century Enlightenment, namely that if we apply reason and science that enhance human well-being, we can gradually succeed.
그렇다면 만약 뭔가 진보되었다면 그것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진보는 우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신비로운 힘이나 변증법적 논리가 아니고 정의를 향해 가는 역사의 신비스러운 궤적도 아닙니다. 진보는 어떤 사상에 의해 지배되는 인류의 노력의 산물입니다. 그 사상은 18세기의 계몽주의와 연관되어 있죠. 말하자면, 이성과 과학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을 향상하고 점차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거죠.
Is progress inevitable? Of course not. Progress does not mean that everything becomes better for everyone everywhere all the time. That would be a miracle, and progress is not a miracle but problem-solving. Problems are inevitable and solutions create new problems which have to be solved in their turn. The unsolved problems facing the world today are gargantuan, including the risks of climate change and nuclear war, but we must see them as problems to be solved, not apocalypses in waiting, and aggressively pursue solutions like Deep Decarbonization for climate change and Global Zero for nuclear war.
진보는 필연적인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어디서나 누구나 항상 나아지는 것이 진보는 아닙니다. 그것은 기적에 가깝죠. 진보는 기적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문제점은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새로운 문제를 낳고 그걸 차례로 해결해 나가야 하죠. 오늘날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난제와 직면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기후변화의 위험과 핵전쟁도 포함되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풀어나가야 할 문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가올 종말이 아니고 말이죠. 그리고 공격적으로 그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에 대한 심층 저탄소화 계획이나 핵전쟁에 대한 글로벌 제로 단체처럼 말이죠.
Finally, does the Enlightenment go against human nature? This is an acute question for me, because I'm a prominent advocate of the existence of human nature, with all its shortcomings and perversities. In my book "The Blank Slate, " I argued that the human prospect is more tragic than utopian and that we are not stardust, we are not golden and there's no way we are getting back to the garden.(Laughter)
마지막으로, 계몽주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과 상반된 것일까요? 제 입장에서는 예민한 문제인데요. 저는 인간 본성의 존재를 유난히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단점이나 고집스러운 면이 있기는 해도 말이죠. "빈 서판(The Blank Slate)"라는 제 저서에서 저는 인류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훨씬 비관적이라고 주장했고 우리는 별처럼 빛나는 소중한 존재도 아니며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고 말했죠.
But my worldview has lightened up in the 15 years since "The Blank Slate" was published. My acquaintance with the statistics of human progress, starting with violence but now encompassing every other aspect of our well-being, has fortified my belief that in understanding our tribulations and woes, human nature is the problem, but human nature, channeled by Enlightenment norms and institutions, is also the solution.
그런데 저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15년 전에 그 책이 출간된 이후로 달라졌죠. 인류의 진보에 대한 통계 자료를 접하고 폭력으로 시작했지만 우리 행복의 모든 면을 둘러싼 현실을 보며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련과 위기를 이해하게 되었죠. 인간의 본성은 문제가 있지만 계몽주의적 규범과 제도로 다듬어진 인간 본성은 이 역시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Admittedly, it's not easy to replicate my own data-driven epiphany with humanity at large. Some intellectuals have responded with fury to my book "Enlightenment Now, " saying first how dare he claim that intellectuals hate progress, and second, how dare he claim that there has been progress.(Laughter)
물론 자료에 근거한 깨달음만으로 인간성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저서 "Enlightenment Now"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지식인들도 있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어떻게 지식인들이 진보를 거부한다고 주장하느냐는 것이었고 둘째는 대체 뭐가 진보되었다고 주장하느냐는 것이었죠.
With others, the idea of progress just leaves them cold. Saving the lives of billions, eradicating disease, feeding the hungry, teaching kids to read? Boring.
다른 사람들은 진보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수십 억 인구의 생명을 구하고 질병을 없애고, 기근을 없애고 아이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친다고? 이젠 지겨워.
At the same time, the most common response I have received from readers is gratitude, gratitude for changing their view of the world from a numb and helpless fatalism to something more constructive, even heroic.
반면에 대부분 독자들의 반응은 감사를 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줘서 고맙다는 거였죠. 무감각하고 무력한 운명론적 시각이 뭔가 더 건설적이고 비장하게 바뀌었다면서 말이죠.
I believe that the ideals of the Enlightenment can be cast a stirring narrative, and I hope that people with greater artistic flare and rhetorical power than I can tell it better and spread it further. It goes something like this.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여러분께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예술혼과 이야기 솜씨를 가진 사람들이 이 얘기를 더 잘 설명하고 널리 알리면 좋겠어요. 이런 내용입니다.
We are born into a pitiless universe, facing steep odds against life-enabling order and in constant jeopardy of falling apart. We were shaped by a process that is ruthlessly competitive. We are made from crooked timber, vulnerable to illusions, self-centeredness and at times astounding stupidity.
우리는 냉혹한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생명 유지의 질서에 반하는 커다란 역경에 맞서야 하고 우리를 무너뜨릴 끊임없는 위험에 놓여있죠. 이 세상은 무자비한 경쟁으로 이루어져 있고 뒤틀린 나무로 만들어진 우리는 환상에 사로잡혀 자기중심적이고 때로는 대단히 어리석죠.
Yet human nature has also been blessed with resources that open a space for a kind of redemption. We are endowed with the power to combine ideas recursively, to have thoughts about our thoughts. We have an instinct for language, allowing us to share the fruits of our ingenuity and experience. We are deepened with the capacity for sympathy, for pity, imagination, compassion, commiseration. These endowments have found ways to magnify their own power. The scope of language has been augmented by the written, printed and electronic word. Our circle of sympathy has been expanded by history, journalism and the narrative arts. And our puny rational faculties have been multiplied by the norms and institutions of reason, intellectual curiosity, open debate, skepticism of authority and dogma and the burden of proof to verify ideas by confronting them against reality.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보완할 자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서로 조합하고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천부적 능력도 가지고 있죠. 우리는 언어에 대한 본능도 있어서 창의성과 경험의 과실을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공감 능력도 깊게 자리하고 있으며 연민, 상상, 동정, 위로의 능력도 갖고 있죠. 이런 재능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는 길을 찾기도 합니다. 언어 능력의 범위는 필기 물, 인쇄물, 전자 문서 등으로 더욱 확대되어 왔습니다. 공감 능력의 범위도 넓혀 왔습니다. 역사, 언론, 그리고 예술적 묘사를 통해서 말이죠. 우리의 보잘것없는 이성적 능력도 배가되어 왔습니다. 이성적인 규범과 법제도 지적 호기심과 열린 토론 권위와 종교 교리에 대한 회의적 시각 현실과 충돌하는 사상을 검증하기 위한 책임감을 가지면서 말이죠.
As the spiral of recursive improvement gathers momentum, we eke out victories against the forces that grind us down, not least the darker parts of our own nature. We penetrate the mysteries of the cosmos, including life and mind. We live longer, suffer less, learn more, get smarter and enjoy more small pleasures and rich experiences. Fewer of us are killed, assaulted, enslaved, exploited or oppressed by the others. From a few oases, the territories with peace and prosperity are growing and could someday encompass the globe. Much suffering remains and tremendous peril, but ideas on how to reduce them have been voiced, and an infinite number of others are yet to be conceived.
거듭되는 발전의 소용돌이로 힘을 모아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힘과 싸워 힘겨운 승리를 거둡니다. 특히 인간 본성이 가진 어두운 측면과 싸워 이기죠. 우리는 생명과 정신을 포함한 우주의 신비를 파해 칩니다. 우리는 더 오래 살고, 덜 고통받고, 더 많이 배우고, 더 현명해졌으며 작은 기쁨과 풍부한 경험을 더욱 즐기게 되었습니다. 죽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노예로 살거나, 학대받거나 핍박받는 사람도 줄었죠. 몇 군데 오아시스에서 시작하여 평화와 번영의 지역이 늘어가고 언젠가는 온 세상을 뒤덮을 것입니다. 아직 많은 어려움이 남아 있고 엄청난 위기가 도사리고 있지만 그것을 줄이기 위한 방안이 나오고 있고 다른 수많은 방법들도 고려되고 있습니다.
We will never have a perfect world, and it would be dangerous to seek one. But there's no limit to the betterments we can attain if we continue to apply knowledge to enhance human flourishing. This heroic story is not just another myth. Myths are fictions, but this one is true, true to the best of our knowledge, which is the only truth we can have. As we learn more, we can show which parts of the story continue to be true and which ones false, as any of them might be and any could become.
완벽한 세상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개선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우리 지식을 인류의 번영을 위해 사용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죠. 이 영웅담은 단지 신화가 아닙니다. 신화는 허구지만, 우리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진실인 지식이야말로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더 많이 배울수록 이야기의 사실로 이어져야 할 부분과 거짓인 부분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일부는 틀림없이 그렇고, 일부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And this story belongs not to any tribe but to all of humanity, to any sentient creature with the power of reason and the urge to persist in its being, for it requires only the convictions that life is better than death, health is better than sickness, abundance is better than want, freedom is better than coercion, happiness is better than suffering and knowledge is better than ignorance and superstition.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느 인종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 관한 것입니다. 이성의 힘을 갖고 자신의 생존을 추구하는 지각 있는 생명체의 영웅담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삶이 죽음보다 낫고 건강이 질병보다 낫고 풍부함이 부족함보다 낫고 자유가 강압보다 낫고 행복이 고난보다 낫고 지식이 무지나 미신보다 낫다는 신념입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