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기로에 선 미술
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게 되자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엄청난 것이었다.(…) 예배 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교회는 이교도의 신전을 본뜨지 않고 고전기에 ‘바실리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커다란 집회소 형태를 본뜨게 되었다.(…) 바실리카들을 어떻게 장식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신중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형상을 종교에 사용한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은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이 그들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가르침을 회중에게 상기시켜 주고 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의 서부 지역인 라틴 계 사람들이 주로 이러한 견해를 지지했다. 6세기 말의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이 방침을 택했다. 133~135
87. <빵과 물고기의 기적>, 520년경.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라벤나
처음에는 미술가들이 로마 시대의 미술이 발전시킨 설명조의 이야기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점차 엄격하게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중하게 되었다. 도판 87은 이러한 원칙이 매우 일관성 있게 적용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5백 년경 당시 이탈리아 동부 해안의 거대한 항구이자 수도였던 라벤나의 한 바실리카에서 나온 것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은 능숙한 붓의 획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풍부하고도 심오한 색채를 발산하는 돌이나 유리 입방체들을 꼼꼼히 짜맞춘 모자이크로 교회의 내부를 장엄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주었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법은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기적적이고 성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그림은 처음 볼 때에는 상당히 딱딱하고 엄격하게 느껴진다. 여기에는 그리스 미술의 자랑이었고 또 로마 시대에까지 지속되었던 운동감과 표정의 완숙한 표정 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이 화가는 그리스 미술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이 우리들에게 다소 원시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이 화가가 단순함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시도에 사용한 형식들은 원시 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이었다. 135~136
비잔틴 사람들은 전통의 준수에 있어서는 이집트 인들처럼 엄격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비잔틴 교회는 성상을 그린 화가에게 고대의 모델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옷 주름이나 얼굴 및 몸짓의 묘사에 사용된 그런 유형들에 관한 그리스 미술의 관념과 업적을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을 강조하고, 그리스도나 성모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떤 허용된 범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비잔틴 미술가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자질을 개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보수성은 서서히 발전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미술가들이 아무런 자유도 가지지 못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의 단순한 설명도를 비잔틴 교회의 내부를 지배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화상군으로 변모시킨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