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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4장 아름다움의 세계 -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Jobs9 2024. 1. 22.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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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아름다움의 세계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자유를 향한 미술의 위대한 각성은 대체로 기원전 520년경부터 기원전 420년경 사이의 백 년 동안에 일어났다.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면서 미술가들은 그들의 실력과 숙련됨을 충분히 의식하게 되었으며 일반인들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여전히 장인으로 대접받았으며 어쩌면 속물 같은 귀족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미술의 종교적혹은 정치적 기능뿐만 아니라 미술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미술 ‘유파’들의 업적을 비교했다. 말하자면 각 도시 국가들의 대가들에 따라 다양한 방식과 양식 및 전통들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러한 유파들 사이의 비교와 경쟁이 미술가들을 자극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만들었고 또 우리가 그리스 미술에서 찬양하는 그런 다양성을 창조해내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99

 

 

61. <승리의 여신>, 기원전 408년. 아테네 빅토리 신전 주위의 난간 부분, 대리석, 높이 106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우아하고 아늑한 특징은 이 시대의 조각과 회화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페이디아스 이후의 세대에서 시작된다. 이 시기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필사적인 전쟁에 휘말려드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와 그리스의 번영은 종말을 맞게 된다. 잠깐 동안의 평화가 지속되던 기원전 408년에 조각 장식을 한 난간이 아크로폴리스에 승리의 여신상을 작은 신전에 보태졌는데 그 조각과 장식은 이오니아 양식에서 보여지는 섬세함과 우아함으로 그 취향이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새겨진 인물상들의 손발은 무참히 절단되어졌지만 나는 그들 인물상 중의 하나(도판 61)를 예시함으로써 머리나 손이 없는 파손된 상태의 이 작품이 여전히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승리의 여신들 중의 하나인 이 소녀상은 걸어가다가 느슨해진 샌들의 끈을 조이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다. 갑자기 멈춰선 자태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아름다운 몸체 위를 흐르는 옷 주름은 얼마나 부드럽고 풍부한가! 우리는 이러한 작품들에서 당시의 예술가들은 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 표현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동작이나 단축법의 묘사에 더 이상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99~100

 

이리하여 기원전 4세기 미술에 대한 접근방식이 점차 변해갔다. 페이디아스의 신상들은 그리스 전역에 걸쳐서 신의 표상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에 비해 기원전 4세기의 큰 신전의 조각상들은 미술 작품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더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제 교양 있는 그리스 인들은 시와 연극을 논의하던 것처럼 회화와 조각에 대해 토론했으며 섬세하고 우미한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그것들의 형태와 착상을 비판했다. 100~103

 

 

62. 프락시텔레스, <헤르메스와 어린 디오니소스>, 기원전 340년경. 대리석, 높이 213cm,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기원전 4세기 최대의 미술가인 프락시텔레스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의 매력과 감미롭고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특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로 찬양했던 그의 가장 유명한 걸작품은 사랑의 여신인 젊은 아프로디테가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해지지 않고 19세기에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한 작품(도판 62, 63)을 그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청동상을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인지도 모른다. 103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프락시텔레스와 그리스의 다른 미술가들은 지식을 통해서 이런 아름다움을 성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의 조각상들처럼 이토록 균형 잡히고 잘 생기고 아름다운 살아 있는 육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리스 미술가들이 많은 모델들을 관찰해서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점은 빼버리고, 실제 인물의 외모를 조심스럽게 모사하면서 완벽한 인체라는 이념에 일치하지 않는 불규칙성이나 특징들을 제거함으로써 인체를 미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미술가들은 수백 년을 통해서 고대미술의 껍데기에 보다 많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관심을 기울여왔다. 프락시텔레스의 시대에 와서 그들의 수법은 가장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능숙한 조각가의 손길을 통해서 낡은 유형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으며그들이 이제 진짜 사람들처럼 우리 앞에 서 있으나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보다 나은 세계에서 온 사람들같이 보인다.(…) 그 당시 미술은 전형과 개성이 새롭고 정교한 균형을 이루는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103~105

 

 

53. <전차 경주자>, 기원전 475년경. 청동, 델포이 출토, 높이 180cm,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66. <알렉산더 대왕의 두상>, 기원전 325-300년경. 리시포스의 알렉산더 초상을 본뜬 대리석 모조품. 높이 41cm,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초상이라는 개념은 기원전 4세기 말까지는 그리스 인들의 작품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그 이전의 시대에도 초상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조각상들은 아마도 실물과 그다지 많이 닮지는 않았던 것 같다.(…) 프락시텔레스 다음 세대인 기원전 4세기 말에 와서 이러한 제약이 점차 누그러들기 시작해 미술가들은 아름다움을 파괴하지 않고도 얼굴의 표정을 살리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개개인의 영혼의 활동을 포착하는 방법과 인상의 개인적인 특징을 포착하는 법을 배웠으며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의미의 초상을 만드는 것도 터득했다.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새로운 초상화법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 자신도 왕실 조각가인 리시포스가 자신의 초상을 조각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당시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였던 리시포스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은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알렉산더 대왕의 초상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은 한 복제품(도판 66)에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델포이의 <전차 경주자>(도판 53-4) 시대 이후로 미술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보여주며, 또한 리시포스보다 불과 한 세대 전인 프락시텔레스 시대 이래의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 106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스 미술은 이 제국이 건설됨에 따라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 언어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후기 시대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이 제국의 풍요한 수도들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그리고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은 그리스 본토에서 미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과는 상이한 요구를 했다. 건축에 있어서까지도 도리아 양식의 간결한 형태와 이오니아 양식의 평이함과 우아함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새로운 형태의 원주가 선호되었는데 그것은 기원전 4세기 초에 고안된 것으로 코린트라는 부유한 상업 도시의 이름을 따서 코린트 양식(도판 67)이라고 불렀다. 코린트 양식에서는 주두를 장식하기 위해서 이오니아 식의 소용돌이 장식에 잎사귀 모양을 첨가했으며 일반적으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양식은 동방에 새로 건설된 도시에 거대한 규모로 설계된 호화로운 건물과 잘 어울렸다. 108

 

 

69. 로데스의 하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 및 폴리도로스,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기원전 175-50년경. 대리석 군상, 높이 242cm, 바티칸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헬레니즘 미술은 거칠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후세에 최대의 명성을 날린 고전 조각 작품들 중에는 헬레니즘 세대에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1506년에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이라는 군상(도판 69)이 발견되었을 때 미술가들과 미술 애호가들은 이 비극적인 군상의 효과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이 오래 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종교적 연관성을 거의 상실했던 것 같다. 미술가들은 그들의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표정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그러한 극적인 싸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미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였다. 108~111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가들은 우리가 원근법이라고 부르는 법칙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그리곤 하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멀어져가는 저 유명한 포플러가 늘어서 있는 길의 원근법이 당시 화가들의 기본적인 과제는 아니었다. 미술가들은 먼 곳에 있는 물건은 작게 그리고 가까운 데 있거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렸다. 그러나 사물이 멀어짐에 따라서 대상의 크기를 일정하게 줄여가는 방법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조망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구도의 틀을 고전 시대 사람들은 채택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적용되기까지는 천여 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114~115

 

리스 인들은 초기 오리엔트 미술의 엄격한 제약을 철저하게 타파하고 관찰을 통해서 종래의 전통적인 이미지에다가 점점 더 많은 특성들을 첨가하는 발견의 항해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자연의 말초적인 세부까지 낱낱이 반영하는 그런 거울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은 언제나 그것들을 만들어냈던 지성의 각인을 지니고 있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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