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3장 위대한 각성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
47. 아르고스의 폴리메데스, <두 형제, 클레오비스와 비톤>, 기원전 615~590년경. 대리석, 높이 218 cm,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그리스의 신전들 중에는 크고 당당한 것들도 있지만 이집트의 건축물처럼 거대하지는 않다.(…) 그리스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노예화하려고 했던 신격화된 지배자는 없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노예제가 있는 사회 아니었나?]. 그리스 종족들은 여러 개의 작은 도시들과 항구도시에 정착하고 살았다. 이런 작은 공동체들 사이에는 경쟁과 마찰이 많았지만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공동체들 위에 군림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 중에서 아티카의 아테네는 미술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바로 여기에서 미술사 전체를 통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놀라운 혁명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 혁명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리스에 최초의 석조 신전들이 세워진 기원전 6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돌을 가지고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남긴 업적을 발판으로 출발하였다. 도판 47의 <두 형제상>은 그리스 미술가들이 신체의 각 부분과 근육을 구분하는 방법을 이집트 양식에서 배웠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입상들은 이것을 만든 조각가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공식만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분명히 무릎이 진짜로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내는 데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의 입상들의 무릎이 어쩌면 이집트 조상의 것보다 설득력이 덜하다 하더라도 그가 옛날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그 자신의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모든 조각가들은 특정한 인체를 표현하는 ‘자기의 방법’을 알고자 했다. 77~78
48. <장기를 두고 있는 아킬레스와 아이아스>, 기원전 540경. 엑세키아스의 서명이 있는 흑회식 도자기, 높이 61 cm, 바티칸 박물관
기원전 6세기에 그려진 초기의 화병들에는 아직까지도 이집트의 여러 화법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도판 48).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두 영웅인 아킬레스와 아이아스가 막사 안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들의 눈은 정면에서 보는 것으로 그려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몸체는 이제 이집트 방식으로 그려져 있지 않으며 팔과 손도 그렇게 명확하고 딱딱하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고대의 규칙들이 깨지고 또 미술가들이 자신들이 본 것에 의지하기 시작하자 진정한 사태가 전개되었다. 화가들은 무엇보다 위대한 발견, 즉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foreshortening; 인체를 그림 표면과 경사지게 또는 직교하도록 배치하여 투시도법적으로 감축되어 보이게 하는 회화 기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기원전 500년 조금 전에 미술 역사상 최초로 발을 정면에서 본 것을 그리는 시도를 감행했을 때 그것은 미술사상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우리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수천 점의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미술품들 중에도 이와 같은 화법으로 그린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78~81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형태와 단축법을 발견한 그리스 미술의 대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대와 때를 같이 한다. 이 시기는 바로 그리스 도시 국가의 시민들이 신들에 관한 오랜 전통과 전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편견 없이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던 때이다. 또한 이 시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의 과학과 철학에 대해서 인류가 처음으로 눈을 뜬 때이며, 연극이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축제의 단계로부터 벗어나 처음으로 발전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가들이 도시 국가의 지식 계급에 속해 있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도시 국가의 정사를 맡고 시장에서 끝없는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던 부유한 그리스의 시민들은, 어쩌면 시인이나 철학자들까지도 대부분 조각가나 화가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얕잡아 보았을 것이다. 미술가들은 손으로 일을 했으며 또한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했다. 그들은 땀과 때에 절은 주물 공장에 앉아 일반 노역자들과 같이 일을 했으므로, 교양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82
50. 익티노스 설계,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도리아식 신전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는 바로 그리스의 미술이 그 발전의 최고봉에 도달했던 때이기도 하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침략군을 물리친 후 시민들은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페르시아 침략군이 파괴한 것들을 다시 재건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성스러운 암반인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신전들이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서 불타버리고 약탈당했다. 이제 이 신전들이 대리석으로 다시 건립되었는데 그전보다도 훨씬 더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어졌다(도판 50).(…) 페리클레스는 속물이 아니었다. 고대 저술가들은 그가 당대의 미술가들을 그와 동등한 사람들로 대접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페리클레스는 신전의 설계를 건축가 익티노스에게 위임했으며 신상들의 제작과 신전의 장식은 조각가 페이디아스에게 일임했다. 82
고대 세계의 거의 모든 유명한 조각 작품들이 없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기독교가 승리한 뒤로 이교도의 신상은 어느 것이나 때려 부수는 것이 신성한 의무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84
51. <아테네 파르테노스>, 페이디아스가 기원전 447년부터 432년 사이에 제작한 신전의 거상을 본뜬 로마의 대리석 복제품, 높이 104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신이 이러한 조각상 속에 사는 무시무시한 귀신이라는 원시적인 관념은 이미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페이디아스가 보고 만들어낸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도판 51)은 단순한 귀신의 우상 이상의 것이었다.(…) 페이디아스가 만든 아테나 여신은 한 위대한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신상의 힘은 어떤 마력에 있다기보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있었다. 84~87
그리스 미술가들이 옷주름을 이용하여 인체의 중요한 부분들을 표현했던 방법은 지금도 그들이 얼마나 형태에 관한 지식을 중요시했던가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 미술이 그 뒤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처럼 찬양을 받은 것은 규칙의 준수와 규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87
올림피아에 있는 신전들은 신에게 바쳐진 우승한 경기자들의 조각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한 풍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운동선수들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 하더라도 승리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교회에 증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를 위시한 그리스 인들의 큰 운동경기들은 오늘날의 운동 경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리스 인들의 운동 경기는 그들의 신앙과 의식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나 직업 운동선수가 아니라 그리스 명문가의 자제들로서 경기에 이긴 승자는 신들로부터 무적의 마술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다. 원래 이러한 경기를 개최하게 된 것은 승리의 영광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우승자들이 그들의 조각상을 당대의 제일 유명한 조각가에게 의뢰한 것은 이 같은 신의 은총의 징표를 기념하고 또 영원히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87~89
55. <원반 던지는 사람>, 기원전 450년경. 미론이 만든 청동 조각을 본뜬 로마의 대리석 복제품. 높이 155cm, 로마 국립 박물관
도판 55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미론은 주로 고대의 미술 방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원용해서 놀랄만한 운동 효과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조각상의 앞에 서서 그 윤곽선만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것이 이집트의 미술 전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론은 이집트의 화가들처럼 몸통은 앞모습으로, 다리와 팔은 옆모습으로 표현했고, 또 그들과 같이 신체 각 부분의 가장 특징적인 면을 종합해서 한 사람의 신체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손을 통해서 이 오래되고 진부한 공식이 무엇인가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실감 나지 않는 딱딱한 자세로 종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델에게 비슷한 자세를 취하게 하여 움직이는 신체의 신빙성 있는 표현으로 만들었다.(…) 미론은 운동감의 표현을 정복했다는 사실이다. 90
지금의 우리들 같으면 고운 대리석의 색과 결이 너무나 근사하기 때문에 감히 그 위에 색을 칠할 엄두도 못 냈을 터이지만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신전들까지도 빨간색과 푸른색 같은 강한 대비색들로 칠했다. 92
이 위대한 시기의 모든 그리스 작품들은 인물들을 배치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지혜와 기술을 보여주고 있지만 당시에 그리스 인들이 그보다 더 중요시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즉 인체를 어떤 자세나 운동 상태로 재현할 때 쓰이는 새로 발견된 자유를 인물의 내적인 삶을 반영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조각가로 훈련을 받은 바 있는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이것을 미술가들에게 강조했다는 말을 그의 제자들로부터 전해 듣는다. 미술가들은 ‘감정이 육체의 움직임에 미치는’ 과정을 정확하게 관찰함으로써 ‘영혼의 활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