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생이라는 관념이 이탈리아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은 조토 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시인이나 화가를 칭찬하고 싶을 때는 그의 작품이 고대의 것만큼 훌륭하다고 말했다. 조토는 이런 식으로 미술의 진정한 부활을 유도해낸 거장으로 칭송되었다. 223
르네상스라는 관념은 그 중간의 시대가 ‘중세’라는 관념을 낳게 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 족 때문에 로마 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물건들을 쓸데없이 파괴하는 짓을 가리킬 때 반달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중간 시기의 미술을 고딕 미술이라고 부르는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탈리아 인들의 이러한 생각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223
중세의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보다 낙후되었기 때문에 조토의 새로운 업적들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혁신으로 보였고, 예술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모든 것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4세기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고전 시대에 번창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224
146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 <피렌체 대성당의 돔>, 1420-36년경.
젊은 피렌체 예술가 잡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부르넬레스키(1377-1466)였다. 당시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고딕 성당으로 브루넬레스키는 고딕 전통의 일부를 형성하는 기술적인 창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의 성당을 거대한 돔으로 덮기를 원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이런 돔(도판 146)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낼 때까지 이 돔을 받쳐주는 기둥들 사이의 거대한 공간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새로운 교회나 다른 건물의 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전통적인 양식들은 모두 다 버리고 로마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시안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측량하고 건물들의 형태와 장식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그가 목표했던 것은 새로운 건축 방법의 창조였으며 그러한 의도 내에서 고전 건축의 형식들을 새로운 조화와 미를 창조하는 데 자유로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실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거의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든 열주나 박공과 같은 고전적인 형식을 이용한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24
147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 <초기 르네상스 교회당: 파치 예배당>, 1430년경. 피렌체
148 브루넬레스키 설계, <파치 예배당 내부>, 1430년경.
도판 147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의 명문가인 파치 가를 위해서 지은 작은 예배당의 정면이다. 우리는 한눈에 이 건물이 고전적인 신전과 거의 공통점이 없음을 알 수 있지만 고딕 건축가들이 사용했던 형식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게 된다. 브루넬레스키는 원주와 벽기둥과 아치를 자기 식대로 결합해서 그 이전의 건물과는 전혀 다른 경쾌하고 우아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고전적인 박공을 가진 문틀과 같은 디테일을 보면 브루넬레스키가 얼마나 주의 깊게 판테온과 같은 고대의 유적들을 연구했는지 알 수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보면(도판 148) 그가 로마의 형식들을 어떻게 연구했는지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높은 창문도 없으며 가느다란 기둥도 없다. 그 대신 건물의 구조상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않지만 고전기의 ‘기둥 양식’을 본뜬 회색 벽기둥들이 아무 장식도 없는 흰 벽을 구획하고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다만 내부의 형태와 비례를 강조하기 위해서 벽기둥들을 거기에 설치했던 것이다. 224~226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백 년 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축법을 이해헀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226
149 마사초, <성 삼위 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 1425-8년경. 프레스코, 667x317cm,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우리는 마사초가 조토를 모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극적인 장엄함을 찬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모가 십자가에 못박힌 아들을 손으로 가리키는 단순한 제스처는 엄숙한 이 그림 전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대단히 웅변적이고 인상적이다. 이 그림의 인물상들은 사실 조각상처럼 보인다. 마사초가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효과였다. 우리는 손으로 그들을 만져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229
151 도나텔로, <성 게오르기우스> 1415-16년경. 오르 산 미켈레의 대리석상, 209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
브루넬레스키의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피렌체의 대가 도나텔로(1386?-1466)였다.(…) 도판 151은 그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이다.(…) 고딕 조각상들은 현관 양쪽에 조용하고도 엄숙하게 열을 지어 서성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조지)> 상은 한치라도 양보하지 않을 결심을 한 사람처럼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고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중세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던 망연하고 고요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활력과 집중감으로 넘쳐 있는 것만 같다. 방패 위에 손을 얹고 마치 적이 접근해오는 것을 주시하는 듯한 그의 모든 태도는 도전적인 결의로 긴장된 것처럼 보인다. 이 조각상은 젊음의 혈기와 용기를 매우 탁월하게 표현한 모습으로 지금도 언급될 만큼 유명하다. 229~230
15세기 초 피렌체의 거장들은 중세의 미술가들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공식을 반복하는 것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찬미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작업실이나 공방에서 모델이나 동료 미술가들에게 자기들이 원하는 자세로 포즈를 취해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인체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다. 도나텔로의 작품을 그처럼 뚜렷하게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준 것도 바로 이러한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관심이었다. 230
152 도나텔로, <헤롯 왕의 잔치> 1423-7년. 청동에 금도금, 60x60cm, 시에나 대성당 세례당의 세례반 부조
도나텔로의 이 작품에서 어떤 양상이 새로운 것인지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면이 새롭기 때문이다. 고딕 미술의 명확하고 우아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도나텔로의 이야기 방식을 보고 틀림없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그림에는 정돈되고 유쾌한 문양을 형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갑작스러운 혼돈의 효과를 만들어내려 하였다.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도나텔로의 인물들도 그 움직임에는 거칠고 모가 진 데가 있다. 그들의 몸짓은 격렬하며 이 이야기의 끔찍스러움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 장면이 거의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233
피렌체에서 도나텔로의 세대가 국제 고딕 양식의 섬세함과 세련미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힘 있고 장중한 인물상을 창조하기를 갈망했던 것과 같이, 알프스 북쪽에서도 한 조각가가 그의 선배들의 섬세한 작품들보다는 실감나고 보다 솔직한 미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이 조각가는 클라우스 슬뤼테르로 당시의 부유하고 번창하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에서 1380년경부터 1405년까지 일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한 유명한 순례지에서 샘을 표시하는 커다란 십자가 밑부분을 이루는 예언자 군상이 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을 표현한다고 느껴지는 혁명적인 창의성을 보인 사람은 화가 얀 반 에이크(1390?~1441)였다. 235
155 얀 반 에이크, <날개가 펼쳐진 헨트 제단화>, 1432년. 패널에 유채, 각 패널 146.2x51.4cm, 헨트, 성 바보 대성당
반 에이크의 새로운 미술 개념을 무엇보다도 놀랍도록 보여 주는 부분은 양 날개 부분의 안쪽에 그린 그림인 타락 이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그들은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에도 불구하고 정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다. 이점에서 반 에이크는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전통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진정으로 대치된다. 고대 미술가들은 밀로의 비너스나 아폴론 벨베데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의 형상을 ‘이상화’했다. 반 에이크는 이런 것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은 모델들을 그의 앞에 세우고는 후세들이 그의 지독한 정직성으로 인해 다소 충격을 받게 될 정도로 그들을 충실하게 그렸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그의 관찰은 랭부르 형제보다 더 인내심이 있었고 세부 묘사에 관한 그의 지식도 훨씬 정확했다.(…) 랭부르 형제의 나무는 상당히 도식화되어 있고 인습적이다.(…) 우리는 도판 157(155 세부)에서 진짜 나무를 보고, 도시로 이어지는 실제 풍경과 지평선 위에 있는 성을 본다. 236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 주변의 거장들은 자연을 그림 속에 거의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묘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원근법적인 선으로 틀을 짜는 것으로 시작해서 해부학과 단축법의 법칙에 관한 지식을 통해 인체를 구축해갔다. 반면 반 에이크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그림 전체가 가시적인 세계의 거울처럼 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미세한 세부까지 묘사하면서 자연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물건이나 꽃, 보석 또는 천의 아름다운 표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 북유럽 화가, 특히 네덜란드의 화가가 그린 것이고, 반면에 대담한 윤곽선과 원근법이 명확하며 인체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파악한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현실의 세세한 부분들을 비춰주는 거울을 창조하기 위해서 반 에이크는 회화의 기법을 개량해야만 했다. 그는 유화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룬 업적은 안료를 화면에 칠하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처방을 고안했다는 데 있다. 그 당시에 화가들은 튜브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기성품으로 된 물감은 구입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색깔이 있는 풀이나 광물질에서 그들 자신이 사용할 안료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이것을 맷돌 같은 것으로 갈거나 도제들을 시켜서 빻게 한 후 사용하기 전에 이 가루를 일종의 반죽과 같이 응집시키기 위해서 용매를 첨가했다. 이렇게 반죽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중세까지는 이 용매의 주된 성분은 달걀이었다.(…) 반 에이크는 이런 방식에는 만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색깔들이 서로 섞여들어가는 부드러운 변화를 나타내기에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는 달걀 대신 기름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여유있게, 그리고 보다 더 정확하게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는 투명한 층, 또는 겉칠에 이용할 수 있는 광택 있는 색채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뾰족한 붓으로 반짝이는 하이라이트를 찍어넣을 수 있게 되었으며 경이로운 정확한 묘사를 성취하여 그의 동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함과 동시에 유화를 가장 적합한 매체로 받아들여 널리 쓰이게 만들었다. 239~240
158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약혼>, 1434년. 목판에 유해, 81.8x59.7cm, 런던 국립 미술관
159 도판 158의 세부
반 에이크의 예술은 아마도 초상화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의 하나인 도판 158은 장사차 네덜란드에 왔던 이탈리아의 상인인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신부 잔느 드 쉬나니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에서의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작품 못지 않게 그 나름대로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현실 세계의단순한 한 구석이 마술처럼 갑자기 화면 위에 정착되었다.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카펫과 슬리퍼, 벽에 걸려 있는 묵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솔, 창틀 위에 있는 과일 등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아르놀피니 부처의 집을 직접 방문한 것만 같다.(…) 우리는 뒤의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또 화가이자 증인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도판 159).(…)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240~243
161 콘라드 비츠, <제자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 1444년. 제단화의 패널, 목판에 유채, 132x154cm, 제네바 박물관
혁신적인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람으로 스위스 화가 콘라드 비츠(1400?-1446?)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성 베드로에게 봉헌된 것으로 성경의 요한 복음(제 21장)에 실린 대로 예수가 부활된 뒤에 성 베드로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비츠는 제네바의 시민들에게 예수가 물가에 섰을 때 진짜로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호수가 아니라 시민들이 다 알고 있는 호수, 즉 높이 솟은 웅장한 살레브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제네바 호수를 그렸다.(…) 옛날 그림에 나오는 위풍당당한 사도들이 아니라 고기잡이 도구를 부지런히 다루면서 배가 기울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색하게 애를 쓰고 있는 평범하고 투박한 사람들을 그렸다. 244~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