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귀족과 시민
- 14세기
13세기는 거대한 대성당들의 시대로 이 대성당에서는 거의 모든 분야의 미술이 각자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 사업은 14세기와 그 뒤로도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그것은 미술의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고딕 양식이 처음 발전했던 12세기 중반의 유럽은 아직 인구가 적은 농부들의 대륙이었고 권력과 학문의 중심지는 수도원과 귀족들의 성이었다. 그들 자신의 위세당당한 대성당을 갖고자 하는 대주교들의 야심은 도시의 시민적 자부심이 일깨워졌음을 알리는 최초의 징후였다. 그러나 약 150년 뒤 이 도시들은 상업의 번화한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로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더 이상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음침하게 격리되어 살기보다는 안락과 유행하는 사치가 있는 도시로 이주해서 권력자의 궁전에서 그들의 부를 과시했다. 207
138 <베네치아의 도제궁>, 1309년 착공
교회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건축가들의 주된 과업은 아니었다. 나날이 발전하고 번창하는 도시에서는 시청 청사라든가 조합 사무실, 대학, 궁전, 다리와 성문 등과 같은 많은 세속적인 건물들이 필요했다. 이런 종류의 건물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특징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베네치아에 있는 도제궁(도판 139)인데 이 건물은 베네치아 권세와 번영이 최고에 달했던 14세기에 착공되었다. 이 건물은 고딕 양식의 발전이 후기에 이르러 장식과 트레이서리에 많은 비중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장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7~208
141 시모네 마르티니와 리포 멤미, <수태고지>, 1333년.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화 부분, 목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에서는 조토의 미술이 회화의 모든 개념에 변화를 일으켰다. 고대 비잔틴 양식이 갑자기 딱딱하고 구식으로 보였다.(…) 조토의 개념은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서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반면에 북쪽의 고딕 화가들은 남유럽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들 북유럽 미술가들의 취향과 양식이 대단히 깊은 영향을 준 곳은 또 하나의 토스카나 마을로 피렌체의 적수였던 시에나에서였다. 시에나의 화가들은 피렌체의 조토처럼 갑작스럽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초기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조토와 같은 세대로 시에나의 거장인 두초는 고대 비잔틴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도판 141은 그의 유파 중에서 그보다 젊은 두 대가인 시모네 마르티니와 리포 멤미가 그린 제단화이다. 211~212
142 페터 파를러(아들), <자화상>, 1379-86년. 프라하 대성당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렸다는 라우라의 초상화는 지금 전하지 않아 그 초상화가 얼마나 실물과 유사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14세기 미술의 거장들이 자연을 주제로 실물과 유사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으며 또 초상 미술이 이 시기에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실물을 충실하게 표현한 실제 인물의 초상 조각이다. 왜냐하면 이 연작에는 당시 제작을 일임했던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인 페터 파를러(아들)를 포함하는 당대 인물들의 흉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첫 번째 진짜 미술가의 자화상일 것이다(도판 142). 214
랭부르 형제가 그린 나무도 자연에서 보고 그린 진짜 나무들이 아니라 나란히 서 있는 상징적인 나무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그린 사람들의 얼굴도 하나의 매력적인 인물상의 공식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주변 생활의 화려함과 유쾌함에 대한 그의 관심은 회화의 목적에 대한 그의 견해가 중세 초기의 미술가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관심은 가능한한 가장 명료하고도 인상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자연의 일면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점차 변해왔다. 218
145 안토니오 피사넬로, <원숭이 습작>, 1430년경. 스케치북 중에서, 종이에 은필, 20.6x21.7cm, 파리 루브르
매튜 패리스의 경우에는 예외적이었던 것이 얼마 안가서 통례가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피사넬로가 랭부르 형제의 세밀화보다 불과 20년 뒤에 그린 도판 145와 같은 소묘는 이러한 습관이 미술가들로 하여금 얼마나 애정어린 관심을 가지고 살아 있는 동물을 연구하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미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의 그림 속에 얼마나 많은 양의 뛰어난 세부 묘사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연의 관찰을 통한 꽃이나 동물의 세부 묘사에 숙달되는 새로운 기술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시각의 법칙을 개척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이 했듯이 인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어 그것을 토대로 조각과 그림을 제작하려 하였다. 미술가들의 관심이 이런 방향으로 변하자 중세미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고 불리우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218~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