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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0장 교회의 승리 - 13세기

Jobs9 2024. 1. 2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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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교회의 승리

—13세기

 

우리는 지금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을 비잔틴 미술 및 고대 오리엔트 미술과 비교해보았다. 그러나 서유럽은 동유럽과 심각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미술 양식들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또 그것들이 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듯이 보였으나 서유럽은 이런 불변성을 전혀 몰랐다. 서유럽의 미술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하였다. 미술가들이 교회에 궁륭 천장을 만들어 새롭고 장엄한 방식으로 그들의 조각상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또 다른 참신한 이념이 노르만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을 볼품없는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새로운 이념은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딕 양식의 원리였다. 185

 

 

123 로베르 드 뤼자르슈, <고딕 건축 내부: 아미앵 대성당의 신랑>, 1218-47년.

 

 

124 <고딕 교회당 창문: 생트샤펠 대성당>, 1248년. 파리

 

이런 교회들을 단지 공학 기술상의 업적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고딕 건축가들은 우리들이 그들의 설계의 대담함을 느끼고 즐길 수 있게 배려했다. 우리는 도리아 식 신전을 보고 수평적인 지붕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열주들의 기능을 감지한다. 그리고 고딕 성당의 내부(도판 123)에 들어서서 보면 아찔할 정도로 높은 궁륭형 천장을 지탱시켜주는, 서로 밀고 당기는 복잡한 힘의 상호 작용을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는 빈 벽이나 육중한 기둥 같은 것은 없다. 내부 전체는 가느다란 기둥과 늑재로 짜여진 것같이 보인다. 그 망이 천장을 덮고, 주랑의 벽을 타고 내려와 가느다란 돌 가지들을 묶어놓은 것같이 한데 모여 합쳐진다. 창문들조차도 트레이서리라고 알려진 엮어자여진 선으로 덮여 있다(도판 124). 186

 

 

125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1163-1250. 고딕 성당

 

이 기적과 같은 건물들은 아주 멀리서 보아도 마치 하늘의 영광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런 건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도판 125). 현관과 창문의 배열은 매우 명료하고도 힘이 안들어 보이며, 회랑의 트레이서리 장식도 아주 날씬하고 우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돌더미의 무게를 잊게 되며, 마치 건물 전체가 신기루처럼 우리 눈 앞에 떠오르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189

 

 

127 <샤르트르 대성당 북쪽 수랑의 현관 부분: 멜기세덱, 아브라함과 모세>, 1194년.

 

아를 성당을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가는 성인들의 상을 건물의 구조에 딱 들어맞는 단단한 기둥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샤르트르 대성당의 북쪽 현관(도판 127)을 장식한 고딕 양식의 미술가는 성상들을 하나하나 살아 있는 듯이 묘사했다.(…) 이 조각상들은 앞 장에서 논의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고딕 양식의 조각가가 새로운 정신으로 작업에 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조각상들은 성스러운 상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진리를 엄숙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각상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옆에 있는 다른 것들과는 그 자태나 미의 형태에 있어 판이하고 제각각의 개성적인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190

 

고딕 양식의 미술가들은 그들에게까지 전수되어 내려온 옷을 입은 육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아마 그들은 프랑스에서 더러 찾아볼 수 있는 로마의 묘석이나 개선문 같은 이교도의 석조물에서 이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그들은 신체의 구조가 옷의 주름 아래로 보이게 만드는 잊혀졌던 고전 예술을 다시 찾았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그리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192~193

 

 

132 매튜 패리스, <코끼리와 사육사>, 1255년경. 필사본에 실린 드로잉, 케임브리지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파커 도서관

 

중세에는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초상화는 없었다. 모든 미술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인습적인 인물상을 하나 그리고 직함을 나타내는 표상, 즉 왕에게는 왕관과 홀, 주교에게는 주교관이나 홀장 등을 그려넣고 보는 사람이 잘못 알아보지 않도록 초상 아래쪽에 이름을 써넣었다.(…) 그러나 사람이나 물건을 앞에 놓고 그린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에게는 아주 다른 세계의 일같이 생각되었다. 실물을 그린다는 것은 13세기 미술가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간혹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전통적인 견본이 없을 때는 직접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도판 132는 그러한 예외적인 작품을 보여준다. 이것은 13세기 중엽에 영국의 역사가 매튜 패리스가 그린 코끼리 그림이다. 그 코끼리는 프랑스의왕 성루이(루이 9세)가 1255년에 영국 왕 헨리 3세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었다. 코끼리가 영국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코끼리 밑에 있는 하인은 앙리퀴 드 플로르라는 이름이 씌어져 있지만 실물과 그다지 닮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흥미 있는 점은 화가가 정확한 비례를 얻어내려고 대단히 고심했다는 사실이다. 196~197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인들에게 조각과 회화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뛰어넘게 만든 것은 비잔틴 미술[5~15세기 후반까지 동로마 제국,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정교회 국가에서 발생한 건축과 회화 등의 시각예술]이었다. 왜냐하면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미술은 서유럽 암흑 시대의 필사본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고 더욱이 헬레니즘 화가들의 발견들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198

 

미술사 책에서는 대개 이탈리아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와 더불어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위대한 화가의 출현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역사에 있어서는 새로운 장이나 새로운 시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조토의 방법들이 비잔틴 거장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또 그의 목적과 이념이 북유럽 대성당의 위대한 조각가들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그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201

 

 

134 조토 디 본도네, <신앙>, 1305년경. 파도바의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의 부분.

 

도판 134는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여인상으로 ‘신앙’의 화신이다. 우리는 이 고상한 인물상이 고딕 조각가들의 작품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각이 아니다. 이것은 환조 같은 느낌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그림이다. 우리는 팔의 표현에서 단축법을얼굴과 목에서는 입체적 표현법을그리고 의상이 흐르는 듯한 주름에서 깊은 그림자를 볼 수 있다천 년 동안 이와 같은 것이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조토는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201

 

 

135 조토, <그리스도를 애도함>, 1305년경. 파도바의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

 

조토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기록된 문자의 대용품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마치 무대 위에서 행해지고 있는 실제 사건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가들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알려지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미술가들을 마치 우리가 훌륭한 기구를 만든 사람이나 재단사를 생각하듯이 생각했다.(…) 이러한 점에서도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미술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의 시대 이후로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20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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