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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요약 정리

Jobs9 2024. 1. 22.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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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요약 정리

 

차례

 

서론: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하여

1장 신비에 싸인 기원

2장 영원을 위한 미술

3장 위대한 각성

4장 아름다움의 세계

5장 세계의 정복자들

6장 기로에 선 미술

7장 동방의 미술

8장 혼돈기의 서양 미술

9장 전투적인 교회

10장 교회의 승리

11장 귀족과 시민

12장 현실성의 정복

13장 전통과 혁신 Ⅰ

14장 전통과 혁신 Ⅱ

15장 조화의 달성

16장 빛과 색채

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

18장 미술의 위기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20장 자연의 거울

21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

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23장 이성의 시대

24장 전통의 단절

25장 끝없는 변혁

26장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27장 실험적 미술

28장 끝이 없는 이야기

 

 

서론 -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하여

 

1. “미술(Art)이라는 것”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다.

 

2. 미술 작품을 대할 때 개인의 경험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단순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즐기게 도와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갖게 하기도 하며 이는 우려할 만한 점이다.

 

3.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한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는 아름다운 소재(본인의 아들)를 다뤘고 뒤러(Albrecht Durer)는 고생에 찌들린 늙은 어머니를 위대한 진실성을 담아 그렸으며 이 그림에 대해 처음에 느낀 반감을 극복한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가 그린 부랑아는 아름다운 대상은 아니지만 그가 그린 후에는 대단한 매력을 지니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터 데 호흐(Pieter de Hooch)의 화려한 네덜란드 실내 모습에 나오는 아이의 그림이 평범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것 역시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도판 1] 루벤스관, <아들 니콜라스의 초상>, 1620년경. 검정과 빨강 분필 소묘, 25.2*20.3cm, 빈 알베르티나 판화 미술관

[도판 2] 뒤러, <어머니의 초상>, 1514년. 검정 분필 소묘, 42.1*30.3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동판화관

[도판 3] 무리요, <부랑아들>, 1970-5년경. 유화, 146*108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도판 4] 피터 데 호흐, <사과껍질을 벗기는 여인이 있는 실내>, 1663년. 유화, 70.5*54.3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4. 아름다운 것에 관한 문제는 취향과 기준이 다르다는 데 있다. (한스 멤링(Hans Memling)의 작품과 멜로초 다 포를리(Melozzo da Forli)의 작품 예시)

[도판 5] 멜로초 다 포를리, <천사>, 1480년경. 프레스코의 부분, 바티칸 회화관

[도판 6] 멤링, <천사>, 1490년경. 목판에 유채로 그린 제단화의 부분, 안트웨르펜 국립 박물관

 

5.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의 예수를 그린 작품은 수백 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작업 방식이나 표현을 하기 위한 노력을 알고 나면 표현이 덜 분명한 작품이나 미숙한 작품에서도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도판 7] 귀도 레니,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1639-40년경. 유화의 부분, 62*48cm, 파리 루브르

[도판 8] 토스카나의 한 미술가, <그리스도의 얼굴>, 1175-1225년경. 십자가 상의 부분, 목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

 

6. 뒤러의 작품에서처럼 ‘실물과 꼭 같이’ 닮아보이도록 하는 화가의 솜씨는 찬양할 만하다. 하지만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소묘처럼 세부묘사가 덜 된 작품도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도판 9] 뒤러, <산토끼>, 1502년. 종이에 수채와 구아슈, 25*22.5cm, 빈 알베르티나

[도판 10] 렘브란트, <코끼리>, 1637년. 검정 분필 소묘, 23*34cm, 빈 알베르티나

 

7. 스케치 풍의 화법 뿐 아니라 ‘실물과 꼭 같이’ 보이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그림은 미술가가 ‘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현재의 작품들도 포함된다. 디즈니 쇼를 볼 때는 현대 미술전시회에 갈 때와 같은 편견으로 무장하지 않은 이들이 현대 화가가 어떤 것을 자기 나름대로 그린 것을 보면 그들은 그 화가를 그 이상 더 잘 그릴 수 없는 솜씨가 서툰 사람으로 간주하기 쉽다. 우리는 피카소(Pablo Picasso)의 삽화와 소묘에서 --그가 닭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지 않았음에도-- 결함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도판 11] 피카소, <암탉과 병아리들>, 1941-2년. 에칭, 36*28cm, 뷔퐁의 <박물지> 삽화

[도판 12] 피카소, <수탉>, 1938년. 목탄 소묘, 76*55cm, 개인 소장

 

8. 그림의 정확성을 가지고 흠을 잡으려면 두 가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첫째,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의 경마 그림과 스냅으로 촬영한 말의 모습에 대한 일화는 우리가 자연을 보는데 있어 얼마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도판 13] 제리코, <엡솜의 경마>, 1821년. 유화, 92*122.5cm, 파리 루브르

[도판 14] 에드위어드 머이브리지, <달리는 말의 동작>, 1872년, 연속 사진, 킹스턴 어폰템스 미술관

 

9. 우리는 이와 비슷한 오류를 드물지 않게 범한다. 이러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단 그것을 버리는데 성공한 미술가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 낼 때가 많다. 이러한 화가들은 우리에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존재를 자연에서 찾으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세계를 한번 힐끗 내다보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감동적인 모험이 될 것이다.

 

10.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지 못한다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성경을 주제로 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11. 사실상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대단한 정열과 주의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은 미술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성경을 참신한 안목으로 읽으려 하여 ‘물의’를 빚은 대표 인물은 카라바조(Caravaggio)이다. 그가 그림을 성당에 납품하자 사람들은 이 작품이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개했고 따라서 그는 인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도판 15] 카라바조, <성 마태오>, 1602년경. 거부된 작품.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제단화, 223*183cm, 현재 소실됨, 전에는 베를린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 소장

[도판 16] 카라바조, <성 마태오>, 1602년경. 다시 그린 작품,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제단화, 296.5*195cm, 로마 산 루이지 데이프란체시 성당

 

12. 이 일화는 그릇된 이유 때문에 미술 작품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피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우리가 ‘미술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이 신비스러운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만든 물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박물관/미술관의 그림과 조각 작품들은 진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만든 것이다.

 

13. 아름다움이나 표현에 관한 관념을 미술가들은 잘 언급하지 않는데 그 부분적인 이유는 미술가들이 ‘아름다움’과 같은 거창한 말을 쓰는 것을 난처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가의 실제적인 걱정거리 중에서 이러한 관념이 차지하는 부분은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화가가 그의 그림을 진행할 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훨씬 어려운 것이다. 그는 ‘제대로’ 그려졌는지 아닌지를 걱정한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미술가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를 이해하는 시작은 가장 겸손한 말로 표현되는 이 ‘제대로’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 때인 것이다.

 

14. 우리가 미술가가 아니고 그림을 그려보려고 진지하게 시도해보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꽃꽂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어울리린다’거나  ‘제대로’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 즉 ‘더이상 손대지 말자. 이제 완성되었다’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조그만 차이가 균형을 깨트리거나 또는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므로 가장 어울리는 관계란 하나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15. 이러한 이들을 까다롭다고 말할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으로 보이기 때문에 억제되거나 감추어진 것이 미술의 세계에서는 그 가치를 발휘할 때가 많다. 형태를 배합하고 색을 배열하는 문제에서 미술가는 언제나 ‘까다롭거나’ 아니면 극단적으로 괴팍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그는 ‘제대로’ 될 때까지 시도해야 한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하든지 그 차이점을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그가 성공하면 아무것도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그 무엇, 제대로 된 그 무엇, 즉 대단히 불완전한 세계에 완성이라는 것의 본보기를 그가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16. 라파엘로(Raffaelom, S.)의 그림과 그 그림을 위한 습작 스케치를 보면 그가 성취하려고 거듭 노력한 것은 인물 묘사가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올바른 균형, 즉 가장 조화로운 전체를 구성하는 올바른 관계였다. 그의 스케치북에는 이러한 종류의 그림이 대여섯 장 있는데 그의 최종 작품을 보면 우리는 마침내 그가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 조화가 마돈나의 아름다움을 더 고조시키고 어린아이들의 귀여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도판 17] 라파엘로, <초원의 성모>. 1505-6년. 목판에 그린 유화, 113*88cm, 빈 미술사 박물관

[도판 18] 라파엘로, <초원의 성모>를 위한 네 점의 습작, 1505-6년. 스케치북의 한 페이지, 종이에 펜과 잉크, 36.2x24.5cm, 빈 알베르티나

 

17. 올바른 균형을 이룩하기 위한 미술가의 노력에 대해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가 가야할 방향을 느낌으로 갈 뿐이다. 미술의 법칙을 공식화하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했다. (예시: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가 전통적 규칙을 강조하자 그의 경쟁자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가 그에  반하는 그림을 그린 일화)

 

18. 그러나 하나의 조각이 어떻게 되어 있어야 제대로 된 것인지를 말해 줄 수 있는 규칙이 없다 하여 그 때문에 어느 작품이나 다 마찬가지라거나, 사람들의 취향에 대해서는 논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림에 대한 논의들은 우리가 그림을 보도록 만들며 그림을 많이 볼수록 이전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장점들을 보게 된다. 조화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풍부해질수록 그만큼 더 그런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기게 된다. 취향에 관한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속담이 맞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취향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만약 차(茶)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맛을 음미할 여가와 의지와 기회가 있다면 그들은 정확한 감식가로 발전할 것이며 그들의 보다 큰 지식이 최상의 차를 즐길 수 있는데 보템이 되어줄 것이다.

 

19. 미술은 음식이나 술에 대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취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대가들은 미술 작품에 모든 것을 바치고 고통을 받았으며 심혈을 기울였으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최소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미술 작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있는 것이다.

 

20. 우리가 미술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이러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모든 암시를 포착하고 숨겨진 조화에 감응하려는 참신한 마음가짐을 지녀야한다. 미술에 관한 속물 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 좋지 못한 사례로 표현의 아름다움이나 정확한 소묘와 같은 분명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작품 가운데서도 위대한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들의 지식을 자만하게 될 경우 아름답지도 정확하게 그려지지도 않은 그런 그림들만을 좋아하는 체하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즐거움과 감동을 명확히 선사해주는 그런 작품을 좋아한다고 하면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다. 그들은 진정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어쩐지 불쾌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대단히 흥미 있는’ 작품이라고 하는 속물이 되고 만다. 나는 그런 오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 오히려 전혀 신뢰를 받지 못하는 쪽을 택하겠다.

 

21. 다음 장들에서 미술의 역사, 즉 건축, 회화, 조각의 역사를 논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공부는 미술가들의 독특한 방법과 그들이 왜 특정한 효과를 노렸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미술 작품을 보는 눈을 날카롭게 하고 그림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키워 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혼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22. 미술가에 관해서 약간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미술 작품을 볼 때 그림 앞에서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적합한 그것에 대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데 몰두한다. (예시: 렘브란트의 키아로스쿠로 (Choiaroscuro; 명암법)로 유명한 것을 아는 관객이 그의 그림 앞에서 유식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키아로스쿠로에 대해서만 중얼거리고 다음 그림으로 옮겨가는 행동) 이 책은 그러한 속물들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을 돕는 것이지 입을 헤프게 놀리는 일을 돕자는 것은 아니다ql 배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신한 눈으로 작품을 보고 그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값진 일이다. 우리가 그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가지고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1장 신비에 싸인 기원 - 선사 및 원시 부족들: 고대 아메리카

 

1. 우리가 언어의 시작을 모르는 것처럼 미술에 기원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미술의 범위를 정하는 것에 따라 그 시작도 달라진다.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실용성의 기준에서 평가하지만 때로는 실용성과는 별도로 ‘제대로’ 지은, 다시 말해서 디자인이나 비례 등의 부분에도 관심/호감을 나타낸다. 과거에는 회화와 조각에 대한 태도도 이와 비슷했다. 건물을 세운 동기를 모르면 그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듯이 고대 미술품 역시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그 동기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미술 작품의 제작 목적은 명확해지지만 한편으로는 생소해진다. 실용성의 관점에서 원시인들에게는 집을 짓는 것과 상(像)을 만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오두막이 비바람과 햇볕으로부터, 그리고 정령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있듯이 형상도 그들이 힘처럼 현실적으로 여기는 다른 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주술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2. 이처럼 미술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원시인들이 그림을 ‘실용적’ 위력이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좋아하는 운동 선수의 사진을 바늘을 이용하여 눈을 파내는 것을 즐기지 못 한다. 이러한 이상하고 불합리한 생각이 원시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예시: 영국의 가이 포크스 데이(Guy Fawkes Day),  아프리카에서 유럽 화가가 소를 그리자 원주민들이 “당신이 소들을 끌고 가버리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갑니까”라고 항의한 사례)

 

3.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들이 가장 오래된 그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도판 19] <들소>, 기원전 15,000-10,000년경. 동굴 벽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

[도판 20] <>, 기원전 15,000-10,000년경. 동굴 벽화, 프랑스 라스코 동굴

19세기에 발견한 스페인과 프랑스의 동굴 벽화가 발견됐을 때 고고학자들은 이 지방에서 돌과 뼈로 만든 도구들이 발견되어 짐승들을 사냥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빙하시대의 사람들이 그렸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도판 21] 프랑스 라스코 동굴 천장에 그려진 동물들, 기원전 15,000-10,000년경.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그려진 이런 그림들은 ―가장 그럴듯한 해석을 붙인다면― 그림의 위력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그들이 창이나 돌도끼로 그림 속의 동물을 공격하면 실제로 동물들이 그들의 힘에 굴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4. 물론 이것은 추측이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고대의 관습을 아직도 보존하며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원시인들이 미술을 이용하는 것을 보아도 뒷받침된다. 아직도 원시도구만을 사용하며 주술적인 목적을 위해 바위에 동물들의 그림을 그리는 부족이 있으며 정기적인 축제를 벌이며 동물처럼 보이는 옷을 입으며 춤을 추는 부족도 있다. 이런 의식들이 그들에게 먹이를 압도해서 잡을 수 있는 힘을 준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관념은 로마 시대에도 발견된다(로마의 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젖을 먹인 암늑대 동상을 주피터 신전 앞에 세웠다). 이러한 것은 매우 진지한 토템으로서 그들은 사람도 될 수 있고 또 동시에 동물도 될 수 있다는 그런 꿈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그곳에 우리를 만들어 암늑대를 키운다! 대부분의 부족들은 독특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의식을 행할 때에는 동물의 모습을 닮은 가면을 쓰고 그렇게 하면 그 동물로 변신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이들의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해적놀이나 탐정놀이 등과 유사하지만 (아이들과는 달리)원시인들은 그러한 환상을 망칠 다른 세계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놀이와 같은 의식에 모두가 다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으며 벗어날 기회도 없었고, 비판적으로 볼 기회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런 것들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5. 이러한 것들은 모두 미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이러한 조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미술에 영향을 끼친다. 미술가들의 작품 대부분은 이러한 의례의 일익을 담당하도록 만들어졌으며 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는가이다. 더군다나 미술가들은 각각의 형태와 색깔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그들의 부족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

 

6. 이와 비슷한 예는 국기(國旗)와 예식 반지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생활의 규정된 의식과 관습의 테두리 내에서는 원하는 취향과 솜씨를 선택해서 그것을 구사할 여지는 있다. 예컨대 크리스마스 트리의 주요한 특징들은 관습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각각의 가정마다 나름의 전통과 취향이 있기 마련이다. 제삼자가 보기에 이상해 보일지 모르는 트리 장식이 트리의 의미를 알고 있는 우리들 생각대로 장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7. 원시 미술은 이처럼 미리 정해진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만 미술가의 기질을 알아 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우리가 원시미술을  논할 때 ‘원시’는 미개함의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이들은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의 수준이 아닌 착상이다.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 진보가 아닌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에 대한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는 원시 미술가들이 자연을 표현하는데 유럽의 대가들 만큼이나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증거가 발견된다. 나이지리아의 청동 두상은 수 백년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적 유사성이 뛰어나며 그 표현 기술을 외부세계로부터 습득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도판 22] <마오리 족장의 집에 장식된 상인방>, 19세기 초. 목각, 32*82cm, 런던 인류 박물관

[도판 23] <흑인 청동 두상>, 나이지리아의 이페에서 출토, 족장의 상(像)으로 추정, 12-14세기. 청동, 높이 36cm, 런던 인류 박물관

 

8. 그렇다면 원시 미술 대부분이 그렇게 생경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원주민은 간단한 얼굴 형상을 나무에 그려 넣었을 때 보이는 완전히 다른 형상, 그 얼굴이 주는 인상을 마술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우수한 조각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정확하게 사람의 모습을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어떠한 형상을 묘사할 때 중요한 것은 모양이 아니라 이 형상을 인식하게끔 하는 통일성과 조화이다. <의식용 가면>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지만 미적 목적성을 가지고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하학적 형태만으로 충분한 지시성을 띠고 있다.

[도판 24] <전쟁의 신 오로>, 타히티에서 출토, 18세기. 나무에 신네트를 씌운 것, 길이 66cm, 런던 인류 박물관

[도판 25] <의식용 가면> 뉴기니의 파푸아만에서 출토, 1880년경. 나무와 나무 껍질 및 식물성 섬유, 높이 152.4cm, 런던 인류 박물관

 

9-11. 또 다른 한편으로 원시미술은 장식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는데, 단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 묘사를 통하여 사물의 전체를 설명한다.  

[도판 26] <하이다(북미 북서 연안 지대의 인디언) 족 추장의 집>, 19세기 모형, 뉴욕 자연사 박물관

도판26의 각 세부에 등장하는 각각의 도상은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모여 하나의 전체 이야기를 서술한다.

 

12. 우리는 이러한 작품을 이상한 망상의 소산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러한 것을 만든 사람에게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 대단히 엄숙한 작업이며, 이 작품(기둥)은 강력한 추장의 집과 그에 관한 존중을 보여준다.

 

13. 이러한 설명 없이는 많은 애정과 노력이 깃든 조각상의 의미를 전혀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연의 형상을 일관성 있는 패턴으로 변형시킨 철저함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아메리카의 위대한 문명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의 ‘미술’이다. ‘미술’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이유는 이와 같은 것들이 즐거움이나 ‘장식’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조각들의 정확한 의미는 조금 밖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른 원시 문화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볼 수 있다.

 - 16세기 멕시코의 아즈텍과 페루의 잉카의 발전된 문화와 도시체계

 -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인의 인간 얼굴의 사실적 묘사

 - 고대 페루인들의 ‘사람의 머리형상 그릇.

이러한 문명들의 작품은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관념 때문에 생소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도판 27] <죽음의 신의 머리>, 마야 족의 돌제단에서 출토, 500-600년경. 온두라스, 코판, 37*104cm, 런던 인류 박물관에 있는 석고 모형

[도판 28] 알래스카의 <의식용 가면>, 1880년경. 채색 목판, 37*22.5cm, 베를린 국립 미술관, 민속 미술관

[도판 29] <애꾸눈 사나이 머리 모양의 토기>, 페루, 치카나 계곡에서 출토, 250-550년경. 점토, 높이 29cm, 시카고 미술 연구소

 

14.  도판 30은 멕시코가 스페인에게 정복당하기 이전의 마지막 시대인 아즈텍 시기로 추정되는 조각 작품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틀라록(Tlaloc)이라는 비의 신을 표현 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열대 지방에서의 비는 지역 사람들의 생과 사를 결정 짓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무섭고 강력한 수호신의 형상으로 표현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주어진 형태를 가지고 얼굴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관념이 실물과 같은 조각을 만드는 우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만약 이 이상한 우상을 만들어낸 정신 상태로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초기 문명에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이 마술과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 문자의 최초의 형태에도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미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림과 문자가 가지는 밀접한 혈연적 관계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판 30] 아즈텍의 <비의 신 틀라록>, 14-15세기. 돌, 높이 40cm, 베를린 국립 미술관, 민속 미술관



2장 영원을 위한 미술 -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1. 지구상 어디에나 미술은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서의 미술의 역사는 앞서 밝힌 원시적인 미술들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스러운 기원들과 현대미술의 사이에는 직접적으로 연결 되는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방’과 ‘전승’의 측면에서 약 5천년 전의 이집트 미술과 현대미술의 사이에는 그러한 전통이 존재한다.

 

2. 우리는 이집트가 피라밋의 나라임을 잘 알고 있다.

[도판 31] <기자(Giza)의 피라밋>, 기원전 2613~2563년경.

그 피라밋들은 우리에게 그 것이 만들어지는 철저히 조직된 과정과 그 과정들이 가능하게 했던 강력한 왕권에 대하여 말해준다. 어떤 왕이나 민족도 단순한 기념물을 위해 그처럼 많은 비용과 공을 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 피라밋의 유구하고 신비스러워 보이는 이면에는 왕의 죽음과 승천, 저 세상에서 지속되는 삶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시신의 보존 처리 등과 같은 실제적인 중요성이 자리하고 있다.

 

3. 그러나 이것만이 미술의 역사에서 유구한 신념들이 수행했던 그런 역할을 대변해 주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아니다. 육체의 보존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믿은 이집트인들은 조각가들로 하여금 단단하고 영원 불멸한 화강암에 왕의 두상을 조각하여 무덤 속에 넣었다. 그리고 왕의 영혼이 그 형상 안에, 그리고 그 형상을 통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이중으로 갖게 되었다.

 

4. 이러한 의식이 처음에는 왕만의 전유물이었으나 얼마 안 가서 귀족들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무덤을 축조하였다.

[도판 32] <석회석 두상>, 기원전 2561-2528년경. 기자의 한 고분에서 출토, 높이 27.8cm, 빈 미술사 박물관

고왕국의 제4왕조인 피라밋 시대의 초기 초상들 중에는 이집트 미술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들이 속해있다. 이집트의 조각가들은 본질적인 것들 이외의 사소한 부분들은 과감히 생략 해버렸다. 이러한 작품들의 기하학적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원시적이지 않고, 살아있는 실물 같지도 않다.  자연에 대한 관찰과 도판 전체의 규칙성이 고르게 균형을 이루어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은 동시에 아득하고 영원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5. 기하학적인 규칙성과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의 결합은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형성한다. 이집트 미술에서 무덤의 벽면을 장식한 부조와 회화에서는 이점을 잘 연구할 수 있는데, 이 것들은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닌, 죽은 자들을 ‘살아있도록’하기 위해 기능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세력가들은 부장품과 순장의 대용물로서 그림과 인형들을 제작하였다.

 

6. 이러한 부조와 벽화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해내지만, 그 표현 방법 때문에 생경하게 느껴진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닌 완전함이었으며 이는 그림이 가지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 그림의 대상이 완전하고 분명한 모습으로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였던 그들은 그림을 그릴 때 보이는 대로의 자연의 모습이 아닌, 엄격한 규칙에 따라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

[도판 33] <네바문의 정원>, 기원전 1400년경. 테베(Thebes)의 고분 벽화, 64*74.2cm, 런던 대영 박물관

 

7. 이집트 미술가들의 그림 그리는 방식은 어린이들의 방법과 유사하지만 더욱 일관성 있고 규칙적이다. 그들은 인체를 표현할 때, 가장 그 특징적인 모습과 형태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시점에서 대상을 묘사하였다.

[도판 34] <헤지레의 초상>, 기원전 2778-2723년경. 헤지레 묘실의 나무로 된 문의 일부, 높이 115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그리하여 그들의 인체상은 정면과 측면이 혼재되어 있고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가진 인간의 모습에  대한 관념이 아닌, 규칙에 따른 것이며 이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대상을 완전한 모습으로 그려야만 그들이 사후세계에서 온전히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8. 이집트 미술은 미술가가 주어진 한 순간에 무엇을 볼 수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는 지식에 에 기반했다 . 이집트 미술가가 그림 속에 구현한 것은 형태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서 각각의 형태들이 가진  중요성을  구분했다.

 

9. 이러한 규칙과 관례를 이해하면 이집트인들의 생활사가 기록된 도판들을 이해할 수 있다.

[도판 35] <크눔호텝 묘실의 벽면>, 기원전 1900년경. 베니하산 부근. 1842년 카를 렙시우스가 출판한 <유물(Denkmaler)>에 실린 삽화에서 발췌.

[도판 36] 도판 35(크눔호텔 묘실 벽화) 부분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어떤 고관의 무덤 벽화. 상형문자를 통해 그의 살아생전 신상정보와 그의 영웅적 에피소드를 읽어낼 수 있다.

 

10. 우리가 이러한 이집트 그림을 보는 데 익숙해진다면, 그림의 형상이 얼마나 리얼한가는 그림을 이해하는 것에 상관없다. 그림 안의 요소들은 내용전달을 위해 불필요한 것 없이 구조적이고 계획적이다. 이집트 미술가들은 그림에 그물망 레이어를 그려넣어 작업을 한다. 인물과 동식물의 배치, 형태를 특유의 질서를 기반으로 오늘날까지도 명확히 개별적 특징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려냈다.

[도판 37] <나무 위의 새들>, 도판35(크눔호텔 묘실 벽화)의 부분, 니나 먹퍼슨 데이비스가 원화를 본떠 그린 그림

이는 엄청난 지식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패턴(patten)양식에 대한 이집트 예술가의 날카로운 안목이다.

 

11. 이집트 미술의 가장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조각, 회화, 그리고 건축의 형식들이 하나의 양식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하나의 양식을 구성하는 것을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모든 이집트 미술을 지배하는 규칙들은 개개의 작품에 균형과 엄숙한 조화라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12. 이집트의 양식은 대단히 엄격한 법칙들로 구성되어 모든 미술가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일단 이런 규칙들을 완전히 터득하게 되면 그의 수습 생활은 끝난다. 아무도 그가 배운 것과 다르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그에게 독창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과거에 추앙을 받았던 기념비들과 가장 비슷한 조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미술가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3천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기간동안 이집트 미술은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도판 38] 죽은 자의 심장의 무게를 재는 일을 감독하고 있는 자칼 머리 모양의 신(神)인 아누비스와 오른쪽에서 그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 따오기 두상의 전령신인 토트(Thoth), 기원전 1285년경. 죽은 자의 고분에 안치된 두루마리 그림인 <사자의 서>에 나오는 한 장면, 기원전 1285년경. 높이 39.8cm, 런던 대영 박물관

 

13. 그런데 유일하게 이집트 양식의 철칙들을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집트가 파국적인 침략을 받은 후에 건설된 ‘신왕국’으로 알려진 제 18왕조 시대의 왕 아멘호테프이다. 그는 그의 백성들이 믿는 이상하게 생긴 많은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신 그에게 있어 유일한 신인 아톤(Aton)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신으로서 태양의 모양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는 이 신의 이름을 본 따서 아크나톤(Akhnaton) 이라고 불렀다.

 

14. 그가 화가들에게 그리게 했던 그림들은 그 신기함으로 인해 그 시대의 이집트 인들을 놀라게 했음이 틀림없다. 그 그림들에서는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들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하나도 볼 수 없고 그의 초상들 중에는 그를 못생긴 사람으로 표현 한 것도 있다.

[도판 39]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기원전 1360년경. 석회석 부조, 높이 14cm, 베를린 국립 미술관, 이집트관

[도판 40] <딸들을 안고 있는 아크나톤과 네르페티티>, 기원전 1345년경. 석회석, 제단 부조, 32.5*39cm, 베를린 국립 미술관, 이집트관

그것은 아마도 그가 미술가들에게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라고 허락했거나 아니면 그는 예언자로서의 그의 독특한 중요성을 대단히 확신했기 때문에 그의 실제 모습을 주장했을 지도 모른다.

아크나톤의 후계자인 투탕카멘왕의 무덤에서도 어떤 작품들은 여전히 아톤종교의 현대적 양식을 띄고 있는 것들이 있는 것이 있는데 특히 가정적인 목가풍의 배경에 흐트러진 왕의 비스듬한 앉은 자세와 왕보다 작지 않게 그려진 왕비의 모습이다.

[도판 41] <파라오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기원전 1330년경.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된 왕좌의 일부, 나무에 금박과 채색,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15. 제 18 왕조 시대에 왕이 이러한 개혁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이집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덜 엄격하고 굳어있지 않으며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 데 기쁨을 느끼는 외국의 섬나라인 크레타(Creta ) 인 들의 작품들에 주의를 돌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운동감과 유연함이  당시 신성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던 이집트의 장인들을 감동시켰음이 틀림없다.

[도판 42] <단검>, 기원전 1600년경. 미케네 출토, 청동에 금과 은과 흑금으로 상감, 길이 23.8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16. 그러나 이집트 미술의 이러한 해방은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미 투탕카멘의 통치 시대에 옛 종교가 다시 부활되었고 외부 세계로 열린 창문이 다시 닫혀 그의 시대 이전에 천 년이나 지속된 양식이 이후로 다시 천 년이상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양식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새로운 테마가 시작되고 새로운 작업이 행해졌지만 미술의 업적에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새롭게 보태진 것이 없었다.

 

17. 물론 이집트는 수천 년 동안 근동에 존재했던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들 중의 하나에불과하다. 그리스 말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계곡을 의미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미술은 이집트의 미술보다 덜 알려져있다. 이 계곡에 채석장이 없어 구운 벽돌로 만들어진 당시의 미술품이 풍화작용으로 먼지가 된 이유도 있지만 주요한 이유는 아마도 이 민족들은 이집트 인처럼 인간의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가려면 육체와 그 형상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메르 족이라고 불리우는 한 민족이 고대도시 우르(Ur)를 통치했던 상고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도록 모든 가족들과 노예들을 함께 매장했었다. 이 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어 현재는 대영박물관에서 이 고대의 야만적 왕들이 그들의 왕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고도로 세련된 미술적 솜씨가 원시적인 미신이나 잔인성과 공존할 수 있었는지 볼 수 있다. 예를들어 이 무덤들 중의 하나에서 발견된 상상의 동물들로 장식된 하프가 발견되었다.

[도판 43] <하프>의 부분, 기원전 2600년경. 나무에 금박과 상감, 우르에서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이것은 전체적인 모습이나 배치방식에 있어서도 우리의 문장과 흡사한데 수메르족은 좌우의 대칭과 정확성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 그림에 보이는 장면들이 매우 엄숙하고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18. 메소포타미아의 미술가들은 이집트 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치자가 내세에서도 계속 살 수 있도록 해야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전쟁에 패한 종족과 빼앗은 전리품에 대해 기록한 전승비를 세우도록 했다.

[도판 44] <국왕 나람신의 기념비>, 기원전 2270년경. 수사 출토, 돌, 높이 200cm, 파리 루브르

이러한 기념비(국왕 나람신의 기념비)는 승전의 기억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왕이 패배한 적의 목을 누르고 서 있는 한, 그들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형상에 대한 고대인들의 신앙이 반영된 결과물일 것이다.

 

19. 훗날 이 기념비는 왕의 전쟁에 대한 완전한 그림 연대기로 발전하였다.

[도판 45] <요새를 공격하는 아시리아 군대>, 기원전 883-859년경.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의 설화 석고 부조, 런던 대영 박물관

 

이 연대기(요새를 공격하는 아시리아 군대)를 보면 마치 2천 년 전의 뉴스를 보는 듯 하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처참한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 아시리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득한 옛날임에도 선전술이나 과시하는 기술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지만 이는  그들의 오래된 미신, 즉 그림 속에는 그림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미신의 지배를 그때까지도 받고 있었을 것이다.



3장 위대한 각성 -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

 

1. 오리엔트 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미술 양식이 생겨난 곳은 거대한 오아시스 땅이었다. 이러한 양식들은 수천 년 간 거의 변하지 않고 존속되었다. 그러나 동방의 소제국들과 지중해의 섬나라들은 사정이 매우 달랐다. 이들 지역의 중심지는 원래 크레타 섬으로 크레타의 왕은 한 때 이집트로 사신을 보낼 정도로 부유하고 강했으며 크레타의 미술은 그곳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2.크레타 족이 누구인지, 특히 미케네 미술이 어디서 이식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최근의 발견에 따르면 크레타인은 초기 그리스어를 사용한 듯하다. 북부 유럽의 호전적인 종족들이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정복했고, 지금의 그리스 인들도 이들 중 하나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통해 우리는 지금은 파괴되고 없어진 예술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3.이들이 그리스를 지배했던 초기의 수백 년 간은 매우 조잡하고 원시적이었다. 크레타적 쾌활함은 안보이고 경직성은 오히려 이집트 미술을 능가했다. 그들의 도기는 단순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어떤 정경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이 엄격한 디자인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

[도판 46]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광경>, 기원전 700년경. ‘기하학적 양식’의 그리스 도자기, 높이 155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4. 이러한 단순성의 명쾌한 배열이 어느 정도 그리스 인들이 초기에 도입한 건축 양식에 영향을 미친 것같이 보이는데 이러한 양식이 현재의 도시와 마을에도 남아있다. 이 시기의 그리스 신전은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적어도 우리가 그 목적한 바를 알 수 없는 것은 전혀 없다. 기원전 600년경에 그리스 인들은 이전의 나무로 된 건물처럼 돌로 벽으로 둘러싼 작은 방과 지붕의 무게를 지탱할 기둥으로 된 단순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신전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에 의해 건립된 느낌을 준다. 그리스 종족들은 여러 개의 작은 도시들과 항구 도시에 정착해 살았다. 이런 작은 공동체 사이에는 경쟁과 마찰이 많았지만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공동체들 위에 군림하지는 못했다.

 

5. 미술사상 가장 커다란 혁명적 결실이 그리스 도시 국가 중 아테테에서 맺어졌다.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스 최초의 석조 신전이 세워진 기원전 6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돌을 가지고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남긴 업적을 발판으로 출발하였다. <두 형제상>은 그리스 미술가들이 신체의 각 부분과 근육을 구분하는 법을 이집트 양식에서 배웠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설득적이지 못한 숙련도이지만 이집트의 그것보다 떨어질지라도 인체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예전 방식을 따르지 않고 그 자신의 방식을 찾기로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집트에서 익힌 지식을 기초로 자신의 방법을 사용했다.

[도판 47] 아르고스의 폴리메데스, <두 형제, 클레오비스와 비톤>, 기원전 6150-590년경. 대리석, 높이 218cm, 216cm,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6.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의 저술가들이 전해주는 것 이외에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 당시의 화가들은 조각가보다 더 유명했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그리스 회화를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보는 것 외에는 없다. 화병이라 불리는 이것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테네에서는 주요 사업으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여전히 이집트의 영향이 남아있다. 이집트에서 생성된 예술적 법칙이 깨진 후 미술가들이 자신이 본 것에 의지하기 시작하자 진정한 사태가 전개되었다. 화가들은 원근법과 단축법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500년경에 미술 역사상 최초로 발을 정면에서 본 것을 그리는 시도를 감행했을 때 그것은 미술사상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이어다. 그 이전까지 이런 식으로 그린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전사의 작별>이라는 화병에 그려진 그림처럼 미술가들은 더 이상 모든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인다고 여겨졌던 형태로 그림 속 담으려고 의도하지 않고 대신 그가 대상을 바라본 각도를 참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도판 48] <장기를 두고 있는 아킬레스와 아이아스>, 기원전 540년경. 엑세키아스의 서명이 있는 흑회식 도자기, 높이 61cm, 바티칸 박물관

[도판 49] <전사의 작별>, 기원전 510-500년경. 에우티미데스의 서명이 있는 적회식 도자기, 높이 60cm, 뮌헨 고대 미술관

 

7. 이집트 미술의 교훈들이 완전히 무시되고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인물의 윤곽을 가능한 명백하게 표현하려고 했으며 전체의 조화를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이 인체에 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을 되도록 많이 그려 넣으려고 했다. 수백 년에 걸쳐 발달해온 인간 형태의 낡은 공식들이 그들의 출발점 이었다.

 

8.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형태와 단축법을 발견한 그리스 미술의 대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대와 때를 같이 한다. 이 시기에 서양은(그리스는) 전통과 전설에 의문을 제기 하고, 편견없는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며 과학과 철학에 눈뜨기 시작했다. 미술가들은 일반적인 노역자와 크게 다른 취급을 받지 못했고, 교양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못했지만, 도시 국가에서 그들의 비중은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장인들 보다는 엄청나게 컸다. 노동자들도 어느 정도 국사에 참여가 허용되는 민주주의국가였기 때문이다.

 

9.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그리스 미술이 그 발전의 최고봉에 달했을 때이기도 하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진군을 저지한 후 파괴되고 약탈 된 신전의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페리클레스는 당대의 미술가들을 그와 동등한 입장으로 대접했다.

[도판 50] 익티노스 설계,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도리아식 신전

 

10. 이 때 건축된 신전과 조각들의 명성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작품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없어진 작품들의 모양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당시 그리스의 미술이 어떤 목적에 봉사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우상숭배에 대한 구절들을 어떤 구체적인 관념과 관련지어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경의 예레미야 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많이 나온다.

 

11. [인용]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떠는 것은 장승에 지나지 않는다. 숲에서 나무하나 베어다가 목수가 자귀질해서 만들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망치로 못을 박아야 겨우 서있는 것, 참외밭의 허수아비처럼 말도 못하는 것, 어디가려면 남의 신세를 져야 하는 것, 사람에게 복을 내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앙화를 내리지도 못하는 것, 그런 것을 두려워 말라.

 

12.  예레미야가 염두에 둔 것은 나무와 귀금속으로 만든 메소포타미아의 우상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불과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페이디아스의 작품들에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도판 51] <아테나 파르테노스>, 페이디아스가 기원전 447년부터 432년 사이에 제작한 신전의 거상(나무와 금과 상아)을 본뜬 로마의 대리석 복제품. 높이 104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아테나 파르테노스 조각상의 용모에는 어딘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면이 있으며, 예언자 예레미야가 설교했던 것처럼 미신의 대상인 우상과 연결되는 점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이러한 조각상 속에 사는 무시무시한 귀신이라는 원시적인 관념은 이미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이 여신은 한 위대한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신상의 힘은 어떤 마력에 있기보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페이디아스의 미술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신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부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판 52] <하늘을 이고 있는 헤라클레스>, 기원전 470-460년경. 대리석,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부분, 높이 156cm,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하늘을 이고 있는 헤라크레스는 헤라클레스가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를 따러가는 일화를 보여준다. 전체의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표현되어있다. 조각상은 정면이건 측면이건 간에 인물을 똑바른 자세로 표현했으며, 아테나는 우리를 정면으로 보고 있으며 그녀의 머리만이 헤라클레스 쪽을 향하고 있음으로 보아 이집트 미술의 영향(정면성)이 남아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그리스의 조각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과 장엄한 고요함과 힘이 이러한 고대의 규칙들을 잘 지킨 데서 나온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그리스 미술이 그 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찬양을 받은 것은 규칙의 준수와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3. 그리스 미술가들이 자주 주문을 받았던 작품들은 사실적 인체에 대한 지식을 완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올림픽 경기를 위시한 그리스 인들의 큰 운동 경기들은 오늘날의 운동 경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리스 인들의 운동 경기는 그들의 신앙과 의식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경기의 승자는 신으로부터 무적의 마술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이른바 ‘우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우상'의 조각상을 당대 제일의 조각가에게 의뢰함은 ‘신의 은총에 대한 기념이자 보존'을 뜻했다.

 

14. 위에서 언급한 조각상들은 대부분 청동 주조로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델포이에서 발견된 조각상을 보면 (특히 두상) 일반적으로 그리스 미술에 대해 갖기 쉬운 관념적 부분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공허함, 무표정, 대리석으로 만든 복제품 ↔ 채색된 돌, 도금, 풍요롭고 온화한 인상) 이를 통해 조각가가 인간 형태에 관한 본인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판 53] <전차 경주자>, 기원전 475년경. 청동, 델포이 출토, 높이 180cm,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도판 54] <전차 경주자> 부분.

 

15. 아테네의 조각가 미론이 만든 <원반 던지는 사람>의 복제품이 보여주는 (원반을 던지는) 자세는 대단히 신빙성 있어 보였기에 현대 운동 선수들이 이것을 모델로 해서 원반을 던지는 그리스의 정확한 스타일을 배우려고 노력했었다.

[도판 55] <원반 던지는 사람>, 기원전 450년경. 미론이 만든 청동 조각을 본뜬 로마의 대리석 복제품, 높이 155cm, 로마 국립 박물관

그러나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론은 주로 고대의 미술 방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원용해서 놀랄만한 운동 효과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집트의 양식을 빌어 왔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미론은 이집트 양식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신체의 신빙성 있는 표현으로 만들었다.

 

16. 현재 전해내려오는 그리스의 원작품들 중에서 파르테논 신전에서 나온 조각 작품들이 이 새로운 자유를 가장 경이적인 방법으로 반영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 기간 동안 미술가들은 신빙성 있는 재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더 많은 자유로움과 능란한 솜씨를 습득했다.

 

17. 파르테논 신전 내부의 상단에 있는 프리즈의 파편들을 보면 네 마리의 말들이 중첩되게 그려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도판 56] <전차 경주자>, 기원전 440년경.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프리즈 일부, 런던 대영 박물관

조각가가 작품 전체의 인상을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하게 하지 않고 뼈와 근육의 구조를 얼마나 탁월한 솜씨로 표현했는지를 보여준다. 프리즈에 남아있는 흔적들만으로도 피사체의 아름다움 (자유로움, 명확함 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간과 운동감을 능숙하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리스 미술이 이집트인들로부터 배운 점들과 패턴 및 훈련을 통해 얻은 구성에 대한 ‘지혜' 와 솜씨의 정확성 때문이다.

[도판 57] <기마 행렬>의 부분, 기원전 440년경.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프리즈 일부, 런던 대영 박물관

 

18. 당시의 그리스 인들이 더 중요시 한 것은 인체를 어떤 자세나 운동 상태로 재현 할 때 쓰이는 새로 발견된 자유를 인물의 내적인 삶을 반영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었다. 조각가로 훈련 받은 바 있는 소크라테스는 미술가들은 ‘감정이 육체의 움직임에 미치는’ 과정을 정확하게 관찰함으로써 ‘영혼의 활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19. 율리시스의 이야기를 그린 화병에서 화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율리시즈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로 그린 것 같다. 하지만 극적이고 감동적인 것을 감지하기 위해 정확한 대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유모와 영웅이 교환하는 시선은 말 이상의 것을 전해주고 있다.

[도판 58] <율리시즈와 그를 알아본 늙은 유모>, 기원전 5세기, 적회식 도자기, 높이 20.5cm, 키우시 국립 고고학 박물관

그리스 미술가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 말로 전달 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20. 헤게소의 생전 모습을 묘사한 그리스의 부조는 이미 모든 성가신 제한을 떨쳐버렸으나 아직도 배열의 명료성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더 이상 기하학적이거나 모가 나지 않고 자유롭고 거친 데가 없다. 조형적인 여러 요소들이 합해져서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 미술과 더불어 처음 출현한 단순환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다.

[도판 59] <헤게소의 묘비>, 기원전 400년경. 대리석, 높이 147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4장 아름다움의 세계 -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1. 기원 전 520년 경 부터 기원전 420년 경, 미술가들은 여전히 장인으로 대접 받았으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 도시국가의 대가들에 따라 다른 다양한 방식과 양식 및 전통들 (‘유파') 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런 비교 및 경쟁을 통해 다양한 양식들이 발전했다. 건축에서는 여러 양식들이 동시에 사용됐다.

[도판 60] <에렉테움> 기원전 420-405년경.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 이오니아 양식 Ionic Style

 

2. 기원 전 4세기 경, 미술에 대한 접근방식이 점차 변해갔다. 신의 표상 vs 미술작품으로서의 아름다움.

[도판 61] <승리의 여신>기원전 408년. 아테네 빅토리 신전 주위의 난간 부분, 대리석, 높이 106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3. 기원 전 4세기의 대표적인 작가인 프락시텔레스 Praxiteles는 실제 인물의 외모를 조심스레 모사하면서 완벽한 인체라는 이념에 일치하지 않는 불규칙성이나 특징들을 제거해 인체를 이상화했다. 이로써, 전형과 개성이 새롭고 정교한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 미술의 특징이 정점에 달하게 되었다.

[도판 62]<헤르메스와 어린 디오니소스>, 프락시텔레스,기원전 340년경.

대리석, 높이 213cm,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도판 63] 도판 62의 부분

 

4. 인간의 가장 완벽한 유형들을 재현한 것으로 추앙 받는 고전 걸작들은 대부분 기원전 4세기중반에 만들어진 복제품이거나 변형물이다. 이상적인 남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폴론 벨베데레(도판64)을 볼 때 신체의 부분들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고대미술의 흔적들을 발견 할 수 있다.

[도판 64] <아폴론 벨베데레>, 기원전 350년경으로 추정. 그리스 조각상을 본뜬 로마의 대리석 복제품, 높이 224cm, 바티칸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고전 시대의 비너스상 중 하나인 밀로의 비너스(도판65)는 프락시텔레스가 이루어 놓은 업적과 수법을 잘 사용하여 제작 되었다.

[도판 65] <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200년경. 대리석, 높이 202cm, 파리 루브르

 

5. 일반적이고 도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철저히 다듬어서 살아있는 듯한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이 방법은 개성 있는 인물 묘사에 대한 단점을 지닌다. 기원전 4세기 말까지는 현대적 의미의 초상이라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도 초상이 있기는 했지만 많이 닮지 않았고, 개개인적인 표정이나 특징들은 표현이 잘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굴의 움직임이 두상의 단순한 규칙성을 왜곡 시키거나 파괴한다고 생각하여,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활동’이라 불렀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 육체와 육체의 움직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6. 프락시텔레스 다음 세대인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러한 제약들이 점차 누그러들어 현대적 의미의 초상을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 사람들은 알렉산더 왕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초상화법에 대하여 논하기 시작했다. 왕실 조각가인 리시포스가 제작한 알렉산더 왕의 초상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은 복제품으로 추정되는 작품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한 세대 전인 프락시텔레스 시대이래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도판 66] <알렉산더 대왕의 두상>, 기원전 325-300년경. 리시포스의 알렉산더 초상을 본뜬 대리석 모조품, 높이 41cm,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우리는 이 초상이 알렉산더 왕과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 말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살아온 생을 상기하며 초상의 모습에 대해 타당성을 부여하게 될지도 모른다,

 

7. 알렉산더 왕에 의한 제국의 형성은 그리스의 미술을 도시국가에서 벗어나 당시 세계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의 조형언어로 만들었다. 그리스 미술의 양식과 창의성은 오리엔트 왕국들의 규모 및 전통과 융합 되었다. 이는 그리스 미술과 분리 시켜 헬레니즘(Hellenism)미술 이라고 부른다. 또 이 제국의 풍요한 수도들은 미술가들에게 그리스 본토와는 상이한 요구를 했다. 건축에서도 도리아나 이오니아 양식이 아닌 새로운 양식, 즉 기원전 4세기 초에 고안된 코린트 양식을 사용했다.

[도판 67] <코린트 식 주두>, 기원전 300년경. 에피다우로스 고고학 박물관

 

8. 그리스 미술은 대부분 헬레니즘 시대에 변화를 겪게 된다.

           [도판 68] <신들과 거인과의 싸움>, 기원전 164-165년경.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 대리석, 베를린

                         국립 미술관, 페르가몬 미술관

<신들과 거인들과의 싸움>은 거대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초기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를 거의 찾아볼 수 가 없다. 조각가는 강력하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렸음이 분명하다. 헬레니즘 미술은 이와 같이 거칠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또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9.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이 오래 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ㆍ종교적 연관성을 거의 상실했던 것 같다. 미술가들은 그들의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 표정, 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극적인 싸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미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였다. 라오콘의 비참한 운명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이 조각가에게 전혀 관심밖이었는지도 모른다.

[도판 69] 로데스의 하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 및 폴리도로스,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기원전 175-50년경. 대리석 군상, 높이 242cm, 바티칸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10. 헬레니즘 시대의 화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종교적 ‘목적’에 봉사하는 데보다 그들의 ‘기술'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가 고대 회화의 성격에 관하여 어떤 개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폼페이를 비롯한 기타 장소에서 발굴된 장식적 벽화와 모자이크를 보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도시들의 화가 및 실내 장식가들은 위대한 헬레니즘 미술가들이 이룩해놓은 업적을 이용하여 자유자재로 작품을 창조하였다고 짐작된다. 이 당시의 그림들을 보면 미술가들이 습득한 숙련과 자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   

[도판 70] <꽃을 꺾고 있는 처녀>, 1세기. 스타비아이에서 발굴된 벽화의 부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도판 71] <목신의 머리>, 기원전 2세기, 헤르쿨라네움의 벽화 부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11. 회화에 포함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정물화나 동물의 그림들, 풍경화 등)을 폼페이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은 고대 오리엔트 및 그리스 미술과는 또다른 면모이며 아마도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신이었을 것이다. 미술가들은 실제적인 모습이 아닌 목가적 요소들을 매력적으로 그림상에 배치시켜 보는 이에게 평화스러운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제공한다.

[도판 72] <풍경>, 1세기. 벽화, 로마 알바니 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들은 우리가 얼핏 보고 생각했던 것 보다는 훨씬 덜 사실적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가들은 우리가 ‘원근법'이라고 부르는 법칙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원근법이라던지, 사실적인 조망에 대한 표현 등이 적용되기 까지는 천여 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그러나 이러한 성질을 유감스럽다거나 수준이 낮은 작품에 있는 결함으로 여기지 않고 어떤 양식 안에서든지 예술적인 완성은 이룩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왔다. (종래의 전통적 이미지에 점점 더 많은 특성들을 첨가하는 발견의 항해를 계속해옴)



5장 세계의 정복자들 -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1. 우리는 앞서 로마의 한 도시였던 폼페이가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을 살펴 보았다. 이는 서양지배의 축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미술은 큰 변화 없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확실한 서양의 지배자가 된 후 미술가들은 새로운 변화와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스 시대의 업적과 가장 대비 되는 로마의 업적은 토목 공학이다.

 

2. 이러한 건축물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콜로세움(Colosseum, 도판37)일 것이다.

[도판 73]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80년경, 로마

세단의 아치로 구성된 실용적이면서도 가장 로마적인 건축물에는 그리스 신전에 사용된 세가지 건축 양식이 포함되어있다. ‘로마식 구조’와 ‘그리스의 형식’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으며, 주위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이와 같은 영향의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3. 그러나 로마인이 그들의 제국 전역에, 즉 이탈리아, 프랑스(도판74),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세운 개선문들보다 더 영원한 인상을 남긴 건축물은 없을 것이다.

[도판 74] <티베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14-37년경. 남부 프랑스, 오랑주

일반적으로 그리스 건축은 동일한 유니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콜로세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개선문에서는 그와 다르게 음악의 화음과 같은 배열을 사용했다.

 

4. 로마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치의 사용이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아치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쐐기모양의 돌로 하나하나 아치를 쌓아올리는 일은 토목공학이 이루어낸 대단히 어려운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이 기술의 습득은 건축가들이 점점 더 대담한 설계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적인 고안에 의해 궁륭을 만드는 예술의 위대한 전문가들이 탄생했다.

[도판 75] <로마의 판테온 내부> 130년경. 18세기 화가 G.P.판니니의 그림, 코펜하겐 국립 미술관

 

5.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따다가 그것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는 것이 로마 인들의 특징이었다. 실물을 꼭 닮은 초상을 조각한 것을 로마인들의 초기 종교에 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본 바와 같이 실제 인물을 닮은 것이 영혼을 보존시켜 준다는 믿음과 연결되어있다. 초상의 엄숙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로마 인들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그리스 인들이 했던 것 처럼 실물을 조금도 미화 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초상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다.  

[도판 76]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70년경. 대리석, 실물보다 큰 흉상, 높이 135cm,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6. 로마 인들이 미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 중 또 한 가지는 고대 오리엔트의 관습, 즉 그들의 승전을 선포하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었다.

[도판 77]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비>, 114년경. 로마

[도판 78]  도판(트라야누스 황제 기념비)의 세부

로마 인들은 본국의 이들에게 무훈(武勛)에 대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세부 묘사와 자세한 설명을 중요시하였고 이것이 미술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당시 미술의 주된 목적은 조화나 아름다움, 또는 극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웅의 일대기를 서술하는 그들의 회화적 방법은 로마와 접촉을 가진 여러 종교에 영향을 주었다.

 

7. 기원 후 수백년 동안 헬레니즘 미술과 로마의 미술은 --그 본거지에서조차-- 오리엔트 미술을 대체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여전히 시신을 미이라로 매장했으나 형상을 덧붙이는 대신 그리스 초상화를 알고 있는 미술가에게 초상을 그리게 했다.

[도판 79] <한 남자의 초상>, 100년경. 이집트 하와라에서 출토된 미이라의 관에서 나옴, 밀랍 바탕 위에 채색, 33*17.2cm, 런던 대영 박물관

 

8. 이집트와 멀리 떨어진 인도에서도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영웅을 숭배하는 로마식 방법을 채택하여 불타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설명했다.

 

9. 인도의 조각 미술에서 후기 불교 미술의 전형이 된 불상이 처음 부조로 만들어 진 것은 간다라라는 변경 지방에서이다. ‘위대한 출가’라고 불리는 불교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부조가 그 예이다.

[도판 80] <출가하는 고타마(석가모니)>, 2세기경. 파키스탄(고대의 간다라) 로리얀 탕가이에서 출토, 검정색 편암에 새긴 부조, 48*54cm 캘커타 인도 박물관

 

10. 신, 영웅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시각화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은 인도 사람들에게도 불타의 형상을 창조하도록 영향을 끼쳤다. 도판의 초기의 불상도 간다라에서 만들어졌다.

[도판 81] <석가모니 두상> 4-5세기경. 아프가니스탄(고대의 간다라) 하다에서 출토. 석고상에 옅은 채색, 높이 29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11. 유태교 역시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종교적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유태교는 우상 숭배를 경계하여 형상의 제작을 금지했음에도 동부의 도시에 있는 유태 식민지에서는 구약 성서의 이야기로 회당의 벽을 장식했다. 최근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작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지였던 두라에우로포스(Dura-Europos)에서 발견된 그림은 위대한 예술작품은 아니지만 기원후 3세기에서 볼 수 있는 흥미 있는 자료이다.

[도판 82] <바위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는 모세>, 245-56년경. 시리아의 고대 도시 두라에우로포스(메소포타미아)의 유태교 회당의 벽화

이 그림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림으로 그 이야기를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세는 키가 큰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화가는 능숙한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림이 실물을 닮을수록 형상의 제작을 금지하는 십계명에 대해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주된 의도는 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인 그때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 벽화의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가 동방에서부터 전파되고 미술을 그 종교적 목적에 봉사하게 할 때 이와 유사한 사고 방식이 미술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2. 기독교 미술가들 역시 그리스 미술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후 4세기경의 초기 그리스도상(도판 83)을 보면 그리스도는 젊은 미남으로, 성 바오로와 성 베드로는 그리스의 철학자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를 보면 초기의 기독교 미술이 헬레니즘 미술의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 초기 기독교 미술가들은 가시적 형태로 성서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기에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을 표현수단으로 미술을 이용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지하묘지인 로마 지하 묘굴(catacomb)에 그려진 <타오르는 불길 속의 세 사람>에서도 헬레니즘 시대의 화법이 볼 수 있지만 그들은 그림의 효과와 기술 보다는 소재인 성서의 기술과 표현에 더욱 집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판 83]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거느린 그리스도>, 389년경. 대리석 부조, 유니우스 밧수스의 석관의 일부, 로마 성 베드로 성당 납골소

 

14. 이는 라오콘(p.110, 도판 69)을 제작한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보여준다. 위의 그림을 그린 화가는 극적 장면 자체를 묘사하기 보다는  명확성과 단순성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인류의 관심이 지상의 아름다움 보다 상위의 세계, 정신적 세계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판 84] <타오르는 불길 속의 세 사람>, 3세기. 프리스킬라 지하 묘굴의 벽화, 로마

 

15. 이러한 관심의 이동은 로마제국의 쇠퇴와 붕괴 시기의 종교적 작품에서 만의 현상은 아니다. 점차 미술가들은 세련미와 조화보다는 거칠고 손 쉬운 방법을 사용했고, 대개 이 무렵 고대 미술이 쇠퇴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테크닉의 상실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효과를 이루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기원후 4, 5세기의 초상 조각을 보면 이 시기의 미술가들이 무었을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과거의 그리스 미술의 수려함이나, 로마 미술의 정교한 묘사와는 다른 이 시기의 초상 조각은 용모의 특징을 강조하고 주름을 표현하는 등의 강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이전과는 다른 형식의 미술로 볼 수 있다. 즉, 고대 세계의 종말과 기독교의 대두, 이로 인한 미술의 변화와 동시에 이를 수용한 사람들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도판 85] <아프로디시아스의 한 관리의 초상 조각>, 400년경. 대리석, 높이 176cm,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6장 기로에 선 미술 - 5세기에서 13세기까지: 로마와 비잔티움

 

1  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 되어져야만 했다. 이는 예배 장소의 선택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이교도의 신전을 본뜨지 않은 ‘바실리카 (basilica)’ 양식을 채택하여 교회 건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도판 86] <초기 기독교 바실리카: 산 아폴리나레 교회당>, 530년경. 라벤나 클라세

 

2. 이러한 바실리카들을 어떻게 장식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신중한 문제였다. 형상(形象)을 종교에 사용한다는 문제에 있어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당에 어떠한 조각상도 있어선 안된다는 점에 동의했으나,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특히 6세기 말의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교화를 위해 회화를 사용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림이라는 매체가 종교적인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 때문이었다.

 

3  그러나 이렇게 해서 용인된 미술의 유형은 상당히 제한된 성격의 것이었다. 될 수 있는 한 명확하고 단순해야 하고, 성스러운 목적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배제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미술가들이 로마 시대의 설명조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점차 엄격하게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도판 87]<빵과 물고기의 기적>, 520년경.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라벤나

여기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법은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기적적이고 성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불가사의한 기적(에 대한 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 안에 구현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상징이자 증거였다.”

 

4  이 시기의 미술은 상당히 딱딱하고 엄격해, 운동감과 표정의 완숙이 없다. 그러나 이는 기술적인 숙련도가 미흡해서가 아니라 이 화가가 단순함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명확성을 중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도에 사용한 형식들은 원시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이었다. 중세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것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5. 동로마 교회 중의 일파(一派)는 종교적 성격을 갖는 모든 형상에 반대했다. 754년 이들이 득세한 뒤로 동로마 제국에서는 모든 종교적 미술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의 반대 측에서 형상을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고 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상을 통해 하느님과 성인을 숭배하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시 득세하게 되자 교회 내에서의 회화의 위상은 달라졌다. 이에 따라 교회에서는 미술가들이 상상에 따른 그림을 그리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에 전통에 의해 틀에 박힌 유형 icon을 정하였다.

 

6. 이리하여 비잔틴 사람들은 이집트인들 만큼이나 엄격하게 전통을 준수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고대의 모델을 지킴으로써 그리스 미술의 관념과 업적을 보존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옷 주름이나 옥좌의 표현양식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는 비잔틴 미술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미술 보다 더욱 자연과의 밀접함을 가지도록 하였다.

[도판 88] <옥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예수> 1280년경. 제단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됨, 목판에 템페라 81.5*49cm, 워싱턴 국립 미술관(멜론 컬렉션)

두 번째는 이러한 전통의 강조와 엄격성으로 인해 작가 개인의 자질이 개발 되기 어려웠던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교회 내부의 거대하고 화려한 화상군이나, 모자이크미술을 보면 비잔틴이 고대 오리엔트 미술을 그리스도와 그 권능을 찬양하는데 적절히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89] <우주의 통치자인 그리스도, 성모와 아기 예수 및 성자들>, 1190년경. 비잔틴 미술가들이 몬레알레 대성당의 후진에 제작한 모자이크, 시칠리아

 

7. 이러한 화려한 성상들은 완벽한 기독교적 상징으로 권위를 획득하였고, 이 형상들은 동로마 교회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계속 존재하게 되었으며 러시아인들의 ‘이콘’ 역시 이를 반영한다.



7장 동방의 미술 - 2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슬람과 중국

 

1. 7장에서는 이 수백 년간―앞서 살펴본 시기―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정황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특히  다른 두 위대한 종교의 형상의 문제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우상을 만드는 것이 금기였던 이슬람교는 그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라베스크(arbesque) 양식을 창조해냈다.

[도판 90] <이슬람 궁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에 있는 사자궁>, 1377년 건축. 스페인

[도판 91] <페르시아 양탄자>, 17세기 제작.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마호메트는 미술가들의 마음을 현실 세계의 사물로부터 현실 세계의 사물로부터 선과 색채라는 환상의 세계로 돌리게 했던 것이다. 후기의 몇몇 회교 종파들은 형상 제작에 대해 훨씬 덜 엄격했다. 종교와 관계가 없는 경우에 한하여 그들은 인체와 삽화를 그리는 일을 허용했다. 14세기 이후의 페르시아와 그 후 무굴(Mogul) 왕조 때의 인도에서 제작한 연애나 역사, 우화 등을 묘사한 삽화는 당시의 화가들이 문양 디자인 훈련으로부터 배운 바를 보여준다.

[도판 92] <페르시아 왕자 후마이가 중국의 공주 후마윤을 공주의 정원에서 만나는 장면>, 1430-40년경. 페르시아 필사본에 실린 세밀화, 파리 장식 미술관

도판에서는 비잔틴 미술과 같은 사실적인 현실 공간의 묘사가 거의 없으며 단축법, 명암이나 인체의 구조를 암시하려는 시도도 전혀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마치 본문을 읽듯이 그림을 읽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여러 인물로 시선을 옮겨가며 볼 수도 있고, 이야기의 내용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

 

2. 중국에서는 종교가 미술에 끼친 영향이 이슬람의 경우보다 강하게 나타났다. 청동 제기(祭器)가 기원전 천 년 또는 그 이전에 제작 되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중국 미술의 기원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1세기 전후 중국에서는 이집트를 연상시키는 매장 풍습이 생겨났는데 그 묘실에는 당시의 생활 풍습을 반영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도판 93] <연회도(宴會圖)>, 150년경. 중국 산둥성 무량사 무덤의 부조에서 탑본

이미 그 당시의 회화와 조각에서 전형적인 중국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발전 되었는데, 이는 부드러운 곡선과 둥근 형태로써 뒤틀리고 구부러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확고부동하고 견고하다.

[도판 94] <날개 달린 동물>, 523년경. 소수(소수) 묘의 석수, 중국, 장쑤 성, 남경 부근

 

3. 중국의 사상가들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과 유사한 미술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미술을 과거의 도덕적 모범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유교 정신에 입각한 여인들의 모범을 모아 놓은 그림책인 <여사잠도(女史箴圖)>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도판 95] <부인을 나무라는 남편>, 400년경. 비단 두루마리 그림의 부분, 고개지의 <여사잠도>를                   복제한 것으로 추정, 런던 대영 박물관

이 그림은 남편이 부인을 나무라는 장면인데 중국 미술 특유의 위엄과 우아함이 잘 드러나 있다. 교훈이 목적인 이 그림에서 몸 동작과 배열은 간단명료하다. 이 초기의 중국 그림에는 물결치는 듯한 선(線)이 화면 전체에 운동감을 주고 있어 딱딱한 부분이 없는데, 이는 화가가 운동감을 표현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그러나 중국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불교였다. 불교의 승려나 고행자들은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도판] <나한상(羅漢像)>, 1000년경. 거의 실물 크기의 유약 바른 테라코타, 중국 하북성 이현 출토, 전에는 프랑크푸르트 풀트 컬렉션

이 조각의 귀와 입술, 볼의 윤곽에서 보이는 곡선들은 실제 형태를 왜곡 시키지 않고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다. 모든 것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느낌 없이 제자리를 차지하여 전체 효과를 내는데 함께 기여하고 있다. 이는 자연의 형상을 일관성 있는 패턴으로 변형시킨 원시인들의 가면의 원칙이 다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도판 96] 알래스카의 <의식용 가면>, 1880년경. 채색 목판, 37*22.5cm, 베를린 국립 미술관, 민속 미술관

 

5. 불교가 중국미술에 끼친 영향은 새로운 과제를 제공해줬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법을 도입시켜 미술가의 업적을 매우 존중하게 했다. 이는 그리스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에서의 그림 그리는 사람은 시인과 동급으로 취급되었다. 동양의 종교는 올바른 명상(冥想), 즉 선(禪)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명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에 대해 그것을 마음 속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동일한 신성한 진리를 여러 시간 계속해서 생각하고 숙고하여 그 본체를 상실함 없이 모든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동양인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훈련으로 서양인들의 육채운동이나 스포츠에 부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종교미술은 명상의 실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앙심 깊은 미술가들은 깊은 명상의 자료를 제공해주기 위해 존경의 염(念)으로 산과 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12~13세기의 산수화(山水畵)의 위대한 걸작들이 의도했던 바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다.

[도판 97] 마원(馬遠), <대월도(對月圖)>, 1200년경. 족자, 비단에 먹물과 물감, 149.7*78.2cm, 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

중국 미술가들은 소재를 직접 대하고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 사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명상과 정신 집중이라는 색다른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예술을 익혔다. 그 과정에서 먼저 그들은 직접적으로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탐구함으로써 ‘소나무’나 ‘바위’, ‘구름’ 등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의 영감이 아직 생생히 살아있을 때에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을 붓과 먹으로 단숨에 그려낼 수 있는 능란한 필치를 얻는 것이 중국 대가들의 야심이었다.

[도판 98] 고극공(高克恭)으로 추정, <우산도(雨山圖)>, 1300년경. 족자, 종이에 먹물, 122.1*81cm, 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

[도판 99] 유채(劉寀)로 추정, <세 마리의 물고기> 1068-85년경. 화첩, 비단에 먹물과 물감, 22.2*22.8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도판 99를 보면 우리는 중국의 미술가들이 얼마나 곡선을 좋아했으며 또 운동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곡선의 효과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6. 자연에서 몇 개의 단순한 주제를 선정해서 그것을 절도 있게 전개시키는 중국 미술의 방법은 경탄할만한 것이다. 18세기에 일본 미술가들은 서양 미술의 업적을 새로 접하며 그것에 전통적인 동양화 방식들을 응용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실험이 서양에 알려졌을 때 그것이 서양 미술에 얼마나 값진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8장 혼돈기의 서양 미술 -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

 

1.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대략 500년경-1000년경까지는 이른바 ‘암흑시대'라고 불리웠고, 이 시대의 서양 미술은 혼돈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분명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고대의 미술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북쪽의 무장 침략자들에 의한 전쟁과 침략 때문에 그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전 유럽을 기습해 약탈을 일삼던 북쪽 무장 침략자들은 어떠한 의미에선 분명 야만인이었으나 그들이 만든 공예품을 살펴보면 원시 부족들의 그것과 유사한 주술적 의의가 깃들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도판 100] <목조 건축을 모방한 색슨 족의 탑 : 얼스 바톤 올 세인츠 교회>, 1000년경. 노샘프턴

[도판 101] <용의 머리>, 820년경. 목조, 노르웨이 우서베르그에서 출토, 높이 51cm, 오슬로 대학 박물관

 

2. 켈트 족의 아일랜드와 색슨 족의 잉글랜드의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북방민족 장인들의 전통을 기독교 미술에 응용하려고 노력함. 그들이 이룩한 가장 성공적인 업적은 7,8세기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필사본들이었다.

[도판 103] <《린디스판 복음서》의 한 페이지>. 698년경. 런던 대영 박물관

린디스판 복음서 : 뒤엉킨 용과 뱀들로 이우러진  복잡,풍부한 레이스 문양의 십자가. 이 실마리를 풀면 다양한 문양이 엄격히 대응하며 디자인과 색체의 복잡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토착적 전통을 몸에 익힌 미술가들의 솜씨와 테크닉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

 

3. 이 도판은 인간의 형상으로 만든 이상한 문양처럼 보임. 이 미술가가 옛날 성경에서 찾아낸 어떤 표본을 사용해서 그의 취향에 맞게끔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음.

[도판 102] <성 루가>, 750년경.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성 갈렌 수도원 도서실

이러한 그림들은 토착적인 미술 전통 속에서 성장한 미술가들이 새로운 요구에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줌.  그러나 이러한(고전적인 전통과 토착 미술가들의 취향) 충돌이 전혀 새로운 서유럽 미술을 자라게 함.

 

4. 로마제국 황제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샤를마뉴 Charlemagne 대제의 궁정에는 로마 장인들의 전통이 열광적으로 부활되었다.

[도판 104] < 아헨 대성당의 일부>, 805년 건축.

 

5. 미술가는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근대적 관념을 과거 대부분의 민족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회 건립, 성찬배 디자인, 성경 이야기 표현을 하는 데 새로운 방식은 필요가 없었고 ‘미술가' 또한 이런 류의 주문 때문에 구속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6.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의 음악가가 동일한 작품을 아주 다르게 해석하듯이  중세의 대가 두 사람일지라도 동일한 주제와 동일한 고대의 모델을 가지고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7. 책 첫 페이지에 저자의 초상화를 싣는 것이 관계였던 그리스와 로마의 초상을 모사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105] <성 마태오>, 800년경. 아헨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

 

8. 역시, 잉크 담긴 뿔통, 다리와 무릎 주변의 주름을 미루어 보았을 때 초기 기독교 시대와 대단히 유사한 고대의 표본을 앞에 놓고 그린 듯 하다. 그러나 이를 그린 화가는 마태오를 서재에 앉아있는 침착한 학자대신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게 그렸다. 부릅뜬 큰 눈과 큰 손은 성인에게 긴장해서 집중하고 있는 인상을 주려 한 의도로 보인다.

[도판 106] <성 마태오>, 830년경. 램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

필치 역시 격렬한 감동 속에서 그려나간 듯한 인상을 준다. 복잡하게 얽힌 리본 모양과 선의 문양을 상기시킨다. 이는 고대 오리엔트 미술 및 고전미술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새로운 중세 양식의 표현이었다. 이집트이 ‘알았던 것'을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본 것'을 그렸다면, 중세 시대에는 ‘느낀 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9. 중세 미술의 평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미술이 자연을 모사하거나 미의 의미 혹은 미 자체로써의 가치를 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들에게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료 혹은 도구로 쓰인 미술이었다.

 

10. 요한복음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겨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 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화가가 중요시 여기다 못해 이외의 상황들을 철저히 누락시키고 요한복음 13장 8, 9 절 즈음의 대화 자체에만 치중하여 그림을 그렸다.

[도판 107] <사도들의 발을 씻기시는 그리스도>, 1000년경. 《오토 3세의 복음서》의 한 페이지. 뮌헨 바이에른 국립 도서관

대화가 일어난 장소라든지 요한복음이 묘사하고 있는 이들의 복장이라든지 인체의 비례, 정밀한 묘사 따위는 전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며 또한 그런 대화, 즉 베드로와 예수 간에 오간 대화 이외의 것들은 해석될 필요가 없었다. 그림은 그것이 묘사하는 요한복음 13장 8, 9절 즈음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이 내용을 분명하게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12. 기독교 교회의 이러한 그림들은 전대의 그리스 등에서 이미 전승되어 온 유산이 없었다면 성경의  내용 전달이라는 목적성을 갖는 유용한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13. 앞선 내용 ―6장 2단락(P.135)― 에서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책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가르침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그림의 역할에 대한 탐구는 필사본의 그림 뿐 아니라 조각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도판 108] <타락한 아담과 이브>, 1015년경. 힐데스하임 대성당의 청동문 부조 부분

도판은 1000년 직후 독일 힐데스하임 대성당을 위해 제작한 청동문의 일부분이다. 이 부조에는 성경 이야기에 속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인물들 간의 행동을 통해 죄의 전기와 악의 근원이 힘차고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명확한 표현으로 인해 인물의 부자연스러운 비례를 간과하게 된다.

 

14.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이 전적으로 종교적 이념에만 봉사한 것은 아니다. 성의 주인인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 역시 미술가를 고용하여 미술품을 제작했다. 중세 초기의 미술에서 비종교적 작품들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이유는 1)교회에 비해 성은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고, 2)종교적인 미술은 개인 저택의 장식물보다 더 잘 보존,관리되었기 때문이다.

[도판 109,110]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해롤드 왕과 그 후 영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귀향 장면>, 1080년경.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부분, 프리즈 높이 50cm, 바이외 태피스트리 미술관

개인 소유의 장식 미술이 유행에 뒤떨어지면 제거되거나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판의 태피스트리는 교회에 보존된 덕택에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것은 노르만의 정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학자들은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 즈음(108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림 연대기인 이 그림은 아시리아나 로마의 연대기와는 달리 작고 이상한 마네킹 같은 모습이다. 모사할 모델을 갖지 못했던 이 시기의 중세 화가는 간결한 수단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만을 중점적으로 묘사하여 한 편의 서사시를 들려주고 있다.



9장 전투적인 교회 - 12세기

 

1.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영국을 점령하면서 노르만 인들은 그들의 건축양식을 들여왔다. 영국의 새로운 영주가 된 이들은 수도원과 교회당을 건립하여 그들의 힘을 과시하였다. 이 양식은 영국에서는 노르만(Norman), 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노르만 침략 이후 백 년 이상 번창하였다.

 

2. 교회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일종의 커뮤니티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일한 석조건물로서 이정표의 역할을 하였으며, 다른 건물들과의 차별성은 마을의 자부심이 되었다. 또한 그 축조에 있어서는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다양한 장을 형성하였다.

 

3. 초기에는 바실리카의 평면 설계와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몇 가지 부속물을 붙여 화려하게 만들거나 십자형으로 변형시키는 정도였다. 그러나 로마네스크 교회는 바실리카와 확연히 달랐다.

[도판 111]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 뮈르바크의 베네딕투스 교단 수도원 유적>, 1160년경. 알사스

육중한 각주가 받쳐주는 둥근 아치형의 교회가 주는 인상은 중후한 힘을 느끼게 한다. 중세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견고한 벽과 탑은 ‘전투적인 교회’라는 관념, 즉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암흑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는 관념을 표현하는 듯 하다.

[도판 112] <중세 도시 속의 교회 : 투르네 대성당>. 1171-1213년. 벨기에

 

4. 교회 건축과 관련한 어려운 문제는 석조 지붕을 올리는 것이었다. 바실리카 성당의 목조 지붕은 위엄이 없고 불에 쉽게 탔으며 궁륭을 올리는 로마의 기술은 이미 잊혀진 어려운 기술이었기에 11-12세기에는 끊임없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 문제에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신랑의 양쪽 기둥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견고한 접합과 그에 필요한 돌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벽과 기둥이 더욱 강해야 했다. 따라서 이 초기의 ‘터널(tunnel)’식 궁륭에는 엄청난 석재가 필요했다.

 

5. 그래서 노르만 건축가들은 지붕 전체를 무겁게 만드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가로지르는 몇몇 개의 단단한 아치, 늑재 궁륭(肋材穹窿, rib-vault)를 프레임으로 세우고 그 사이사이를 가벼운 재료로 메우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도판 113] <더럼 대성당의 신랑(nave)>, 1093-1128년. 노르만 양식의 대성당

[도판 114] <더럼 대성당의 서쪽 정면(궁륭은 나중에 본래의 설계대로 완성)>, 1093-1128년. 노르만 양식의 대성당

 

6. 프랑스를 기점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에 조각작품들로 개몽적, 교육적 표현방식중 하나로서 장식하기 시작했다.

[도판 115] <아를의 성 트로핌 대성당의 정면>, 1180년경. 남프랑스

[도판 116] <영광의 예수>, 도판115(성 트로핌 대성당)의 세부

팀파눔(tympanum)이라 불리우는 현관의 상인방(上引枋, lintel) 윗부분에서 네 복음서의 저자들을 상징하는 사자-성 마르코, 천사-성 마테오, 독수리-성 요한, 황소-성 루가에 둘러싸인 그리스도의 도상이 구약성경의 에스겔 1장 4-12절 에스겔의 환상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기독교 신학자들은 성서의 그 부분이 네 사람의 복음서 저자를 의미하고 이는 교회의 도상으로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교회 입구의 이러한 조각들(팀파눔 아래 왼편에 지옥으로 끌려가는 죄인들과 오른쪽에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밑에 엄격한 표정의 성인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심을 더욱 고무시키고자 했다.

 

8.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의 중세 말 시 일부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자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줄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 마을 교회에서

하프가 울려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을 끓는 물에 튀기는 지옥의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는 나에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9. 우리는 이러한 조각 작품들이 고전적인 작품처럼 자연스럽고 우아하며 경쾌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특유의 엄숙함은 전체 건물의 웅장함과 잘 어울리며, 작품을 얼핏 보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0.교회 내부의 부분들도 그 목적과 의미에 따라 제작되었다. <글로스터 대성당의 촛대>는 대성당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도판 117] <글로스터 대성당의 촛대> 1104-13년경. 도금, 청동, 58.4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촛대의 맨 윗부분에는 “이 빛을 담는 그릇은 미덕의 산물로 빛을 발함으로써 그 빛이 인간으로 하여금 악에 눈이 멀지 않도록 교리를 설교한다” 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새겨진 괴물들과 엉켜 있는 인간의 형상은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을 연상 시킨다. 하지만 명문의 내용에 따라 ‘어둠 속을 비치는 빛’은 그들을 승리 할 수 있게 만든다.  

 

11.벨기에의 리에주에 있는 <놋쇠 세례반>도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도판 118] 라이네르 반 후이, <놋쇠 세례반>, 1107-18년. 87cm, 성 바르톨로메오 교회,벨기에 리에주

이 세례반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주제로 삼았다. 중앙부분에 그리스도를 포함한 인물들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각 인물의 의미를 설명하는 명문이 함께 새겨져 있다. 세례반 아래의 황소들 또한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 건설 중 다음과 같은 것을 만들게 했다.

 

12. 예루살렘의 성전을 위해서 만든 것에 새겨진 문장 인용

그 다음 그는 바다 모형을 둥글게 만들었다. 한 가장자리에 다른 가장자리에 까지 직경이 십 척, ...

바다는  이 열두 마리의 소 등에 얹혀 있었는데, 세 마리는 북쪽을 바라보고 세 마리는 서쪽을 바라보고

세 마리는 남쪽을 바라보고 세 마리는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 소들은 모두 궁둥이를 안쪽으로 하고 등으로 바다를 떠받치고 있다.

 

13. 리에주의 미술가는 이 모델에 따라 세례반을 만들었다.

 

14. 12세기 십자군원정으로 비잔틴 미술과의 접촉이 증가함에 따라 동방정교의 성상을 본뜬 작품들이 많아졌다.

 

15. 로마네스크 시기는 유럽 예술이 동방미술의 이념에 접근하려 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예술가는 자연 형태의 모방보다는 표현에 필요한 모든 것, 상징의 배치에 중점을 두었다.

[도판 119] 작자미상, 〈수태고지〉, 《스바비아 필사본 복음서》, 1150년경, 슈투트가르트,뷔르템베르크 지방도서관

 

16. 이는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의 회화가 교회의 교리를 가시적 형상으로 변환하려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원시적 형태의 단순화된 표현 방법으로 인하여 복잡한 형식의 구성(Composition)에 대한 여러 표현의 자유를 주었다.

[도판 120] 작자미상, 〈성 게레온, 빌리마루스, 갈 및 성 우르술라와 일만일천명의 처녀들의 순교〉, 1137~47, 필사본달력,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지방도서관

 

17. 색채 역시 자연을 모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함으로서 초자연적 세계(기독교에 의한 이상세계)의 관념을 전달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도판 121] 작자미상,  〈수태고지〉, 12세기 중반,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10장 교회의 승리 - 13세기

 

1. 동유럽 미술 양식이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오며 딱히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면, 서유럽의 미술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변모해갔다. 예를 들자면 로마네스크 양식 또한 12세기를 넘기지 못했으며 이윽고 새롭고 참신한 이념이 등장, 즉 고딕(Gothic) 양식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고딕양식의 등장으로 인해 건축가들이 꿈꾸었던 것 이상으로 일관성 있고 보다 훌륭한 건축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2. ‘늑재'를 교차하여 사용한다는 원리만으로 혁명적 양식의 고딕 건축을 세우기엔 불충분했으며 다른 많은 기술적인 혁신이 뒤따라야 했다. 이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로서 ‘첨형 아치'라는 발상이 나왔다. 이 방법을 따르면 건축물의 요구에 따라 그 높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3. ‘첨형 아치’ 기둥만으로는 궁륭 외부의 압력을 지탱하기엔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건물 전체가 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러한 일환으로 건축가들은 고딕 궁륭의 뼈대를 완성시켜주는 ‘공중 부벽'을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건물 각 부분에 무게를 균등하게 배분시켜 전체의 견고함을 유지하고 동시에 건물 구조에 필요한 자재를 점점 줄일 수 있게 만들었다.

[도판 122] <공중에서 본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1163년~1250년

 

4. 고딕 형식으로의 변화가 단순히 건축공학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육중한 건물을 세우기 위한 대담한 설계를 느끼고 즐길 수 있게 만든다. 건물 내부에 육중한 기둥을 세우지 않고 늑재들이 서로 얽혀 힘점을 분산시키며 거대한 건축물의 무게를 지탱한다.

[도판 123] 로베르 드 뤼자르슈, <고딕 건축 내부 : 아미앵 대성당의 신랑>, 1218~47년.

[도판 124] <고딕 교회당 창문 : 생트샤펠 대성당>, 1248년. 파리

 

5.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의 대성당들이 애초의 예정대로 완성되는 일은 드물었고 건축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도중에 여러 차례 계획의 수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주는 경외감이 있다. 이는 마치 성경이 묘사하는 (요한계시록 21장) 천상의 예루살렘을 지상으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6.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꼽을 수 있다.

[도판125]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1163~1250년. 고딕성당.

 

7. 이런 대성당의 건설에 있어서 건축물 자체와 더불어 그것을 장식하는 석조상도 로마네스크와 구별되는데, 성인들의 석상이 건물의 구조에 딱 들어맞아 기둥처럼 만들었던 것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이라면 고딕 양식에서는 건축물의 구조나 크기에 국한시키지 않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성인들을 배치했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형상화된 이미지로 전달하는 기능 뿐만 아니라 각 형상들에 나름의 독자성을 부여함으로서 조각가가 새로운 정신으로 작업에 임했음을 느낄 수 있다.

[도판 126] <샤르트르 대성당 북쪽 수랑의 현관 부분>, 1194년.

[도판 127] <멜기세덱, 아브라함과 모세>, 1194년. 도판 126의 세부.

 

8 .13세기에는 수많은 대성당들이 서유럽 전반에 걸쳐 건립됐다. 건립에 참여한 기술자들은 초기 건축을 바탕으로 일을 하며 기술을 익혔으나,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 나름대로의 것을 보태려고 노력했다.

9. 여기에서, 우리는 조각가가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엄숙한 좌우 대칭을 유지하고 조각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128] <성모의 죽음>, 1230년 경,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남쪽 수랑의 현관 부분.

[도판 129] <성모의 죽음>, 도판 128의 세부

고딕 시기의 미술가들은 옷을 입은 육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기술을 이해하고자 했고, 이 어려운 기술을 터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성모 마리아의 발과 손, 그리고 그리스도의 손이 옷자락 밑에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는 방법은 고딕 시대의 조각가들이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 외에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의 위대한 각성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시 한 번 하나의 형상을 실감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신빙성 있게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근육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성모를 쳐다보는 그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했다.

10. 13세기에 이르면, 일부 미술가들은 석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에 발전을 보였다.

[도판 130] <에케하르트와 우타>, 1260년경, 나움부르크 대성당 성가대석의 설립자 군상’의 일부

이 조각을 제작한 조각가는 당시 실제 기사들의 모습을 신빙성 있게 전달해준다. 설립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므로 이 조각가가 실물을 대상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없다. 아마 그는 제작 당시의 기사와 숙녀를 모델로 이 작품을 제작했을 것이다.

 

11. 13세기 북유럽 조각가들의 주된 업무는 성당을 위한 작품 제작이었으나 당시 북유럽 화가들이 빈번하게 맡았던 일은 필사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고 그 삽화들은 엄숙한 로마네스크의 양식의 삽화와는 상당히 달랐다. 사실적으로 대상을 표현 하는 것 보다 내용의 맥락과 그 안의 인물들의 감정표현, 규칙안에서의 배열 등이 더 중요했다. 이 것은 당시의 화가들이 12세기 세밀화가들 보다 인체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표현되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도판 131] <그리스도의 매장>, 1250-1300년경. 봉몽에서 나온 필사본 기도서의 한 페이지, 브장송 시립 도서관

 

12. 예술가들이 그들에게 흥미 있는 것을 그리기 위해서 표본이 되는 서적을 참조하지 않게 된 것은 13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중세의 미술가들은 도제식 시스템 안에서 교육을 받고, 옛 서적들에 실린 장면을 모사하거나 재배치하는 등 관습적 틀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습득했다. 미술가의 전 생애를 통틀어 실물을 보고 관찰하여 그릴 필요성에 부딪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왕이나 주교 같은 특정 인물을 그릴 때도 대상의 특징을 관찰하여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습적인 인물상을 하나 그린 후, 직함을 나타내는 표상을 그려 넣고 잘 드러나지 않게 초상 아래 쪽에 이름을 써 넣었다. 실물을 보고 그린다는 것은 13세기 미술가들에게는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나 간혹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13세기 중엽에 영국의 여가가 매튜 패리스에 의해 그려진 코끼리 그림을 보면 당시의 미술가들도 비례라는 것을 대단히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비례를 무시했다 하더라도 그 것은 그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그 것이 그들의 목적에 있어서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판 132] 매튜 패리스, <코끼리와 사육사>, 1255년경. 필사본에 실린 드로잉, 케임브리지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파커 도서관

 

13. 13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국가였다. 그러나 도시국가로 분열 되어있던 이탈리아에서는 영국, 독일과 달리 프랑스 건축가들의 구상이나 방법이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4.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는 자연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프랑스 거장들의 작품들을 모방하고 고전 건축의 표현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하나의 틀 속에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결합하는 중세의 작법을 따르고 있다.  

[도판 133] 니콜라 피사노, <수태 고지, 성탄 및 목동들>, 1260년. 피사의 세례당 대리석 설교 연단의 부조

다소 붐비고 혼잡해 보이지만 각각의 이야기를 적절히 배치하고, 생생한 세부묘사를 보여주는데 그의 작품은 그의 예리한 관찰력을 짐작케 하며 머리나 의상의 묘사(의상 아래의 신체의 형태를 보여주고 인물을 위엄있고 실감나게 해주는 방법)는 고전기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조각에 대해 깊이 연구했음을 알게 해 준다.  

 

15.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탈리아 조각가들보다 더 늦게 고딕 예술의 새로운 화풍에 반응하였으며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여전히 비잔틴 제국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16. 이러한 동방의 보수적인 양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새로운 변화는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말이 되자 회화에도 혁명이 나타났다.

 

17. 우리는 자연의 재현에 있어 조각이 회화에 비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각의 단축법, 명암을 통한 깊이의 환영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조각의 실제의 공간과 빛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화는 구성과 이야기를 엮는 원칙이 다른 목적(종교의 전달과 명확성)에 의해 지배되었기에 현실의 환영을 만드는 모든 핑계를 다 포기하였다.

 

18.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인들에게 조각과 회화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없앤 것은 비잔틴 미술이다. 비잔틴 미술은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명암법과 단축법등의 원칙이 정확하게 실현되는 방법론들이 있었기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천재적 화가가 등장하는 배경이 성립되는데 그는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이다.

 

19. 미술사에서는 대개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章)을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조토의 출현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잔틴 거장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또 그의 목적과 이념이 북유럽 성당의 위대한 조각가들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대함이 적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0. 조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프레스코 벽화들이다. 프레스코(fresco)란, 벽에 바른 석고가 젖어(fresh)있을 때 그림을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그는 1302~1305년 사이에 북부 이탈리아 파도바의 작은 성당에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생애를 그렸다. 그리고 다른 북유럽의 성당 현관에 선과 악의 화신(化神)들도 그렸다.

 

21. 도판 134 <신앙>은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여인상으로 ‘신앙’의 화신이다. 이 인물은 고딕 조각가들의 작품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환조(丸彫)로 착각할 수 있는 이 그림은 팔의 표현에서 단축법을, 얼굴과 목에서는 입체적 표현법을, 그리고 의상의 흐르는 듯한 주름에서 깊은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지난 천 년간 이와 같은 표현은 없었다. 조토에 이르러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도판 134] 조토 디 본도네, <신앙>, 1305년경. 파도바의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의 부분,

 

22. 조토의 이 발견은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위한 것 뿐 만 아니라, 그것은 그로 하여금 회화의 개념 전체를 변경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림으로 기록하는 수법을 쓰지 않고 그 대신에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은 환영을 창조할 수 있었다. 동일한 장면에 옛 기법을 참조할 뿐 만 아니라 성경의 정경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라는 설교 수사의 충고를 따랐다. 그는 성경 속의 사건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어떤 자세를 취했을지 고심했다. 그 뿐 아니라 그런 몸짓이나 동작이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것에도 골몰했다.

 

23. 도판 135<그리스도를 애도함>을 비슷한 주제의 도판131 <그리스도의 매장>과 비교하면 이 혁신의 범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후자에서는 인물들을 화면에 다 넣기 위해 공간을 배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토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에게 회화는 기록된 문자의 대용품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공간을 구성한 것이다. 예컨대, 성 요한과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상상해볼 경우, 공간이 있으며 모두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이 이야기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모든 인물의 모습이 완전히 보여야 한다는 고대 오리엔트 미술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을 앞 장에서 확인했다. 조토는 그러한 개념을 다 무시했다. 인물들은 얼굴을 가리기도 했으며,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조차 똑같이 슬퍼하고 있음을 우리가 감지하고 있을 만큼 각 인물들이 이 비극적인 장면의 슬픔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도판 135] 조토, <그리스도를 애도함>, 1305년경. 파도바의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

[도판 136] 도판 135의 부분

 

24. 조토는 피렌체의 자랑이었다. 그들은 그의 생애를 노래했으며 그의 기지와 재주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 했다. 이것 역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전까지는 주교들에게 천거를 받는 거장들은 있었으나 그들의 이름이 후세에까지 알려질 수 있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술가 자신들도 대부분 자기 작품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다. 사르트르 대성당 등의 조각 작품을 만든 거장들은 당대에 충분한 평가를 받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명예는 그들이 봉사했던 대성당에 돌렸다. 이 점에서도 조토는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다. 그의 시대 이후 이탈리아에서부터 다른 나라까지 미술사(美術史)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11장 귀족과 시민 - 14세기

 

1. 13세기는 거대한 대성당들의 건축에선 거의 모든 분야의 미술이 각자 맡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 건축은 더이상 미술의 주축이 아니었다. 12세기 중반 권력과 학문의 중심은 수도원과 귀족의 성이었지만, 점차 상업이 발달하면서 14세기에 접어들며 시민들은 귀족과 수도원의 권력에서 벗어나 그들의 부를 기반으로 한 도시생활을 했다. 이는 미술 소비의 취향이 웅장한 건축보다 세련된 것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이 점은 영국의 고딕적 양식으로 알려진  '초기 영국 양식(Early English style)'과 후에 '장식적 양식(Decorated style)'의 명칭적인 구분에서부터 드러난다.

[도판 137] <엑서터 대성당의 서쪽 정면>, 1350-1400년경. ‘장식적’ 양식

 

3. 교회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건축가의 주된 과업이 아니었다. 도시에는 교회 이외에도 다양한 건물들을 필요로 했다.

[도판 138] <베네치아의 도제궁>, 1309년 착공

 

4. 14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조각은 교회를 위한 석조물이 아닌 장인들이 만든 귀금속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들이었다.

[도판 139] <성모와 아기 예수>, 1324-39년경. 1339년 에브뢰의 잔에 의해 헌납됨, 금도금한 은과 에나멜 및 보석류, 높이 69cm, 파리 루브르

이들은 공중의 예배 보다는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대저택에 안치 되었는데, 대성당의 엄숙한 느낌의 조각과 달리 사랑과 자비로움을 불러 일으키도록 만들어 졌다. 이 작품은 성모와 예수를 실제 어머니와 어린아이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딱딱한 인상을 피하려고 부드러운 곡선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모티프는 당시의 유행이었다. 이 작품은 섬세한 세부묘사와 표면 처리, 정확한 비례 등을 특징으로 한다.

        

5. 14세기 화가들의 세부 묘사에 대한 집착은 <메리 여왕의 기도서>와 같은 영국의 필사본들에서도 드러난다.

[도판 140]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 매사냥 놀이>, 1310년경. 《메리 여왕의 기도서》의 한 페이지, 런던 대영 박물관

이 작품은 율법학자들과 대화중인 ‘성전의 예수’를 보여준다. 그림은 조토의 그것과 달리 아직  비현실적이다. 사실적인 공간은 고려되지 않았으며, 얼굴들은 단순한 공식을 따르고 있다. 그 바로 아래에 성경과 상관이 없는, 매를 이용해 오리를 잡는 당시의 일상 생활을 그린 장면이 있다. 위의 장면이 상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면, 아래의 그림은 일상 생활을 관찰해서 그린 것이다. 이러한 두 요소들은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 아래 14세기 들어 융합하기 시작했다.

 

6. 조토가 속한 피렌체의 화가들이 초기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끊은데 반해 시에나의 화가들은 두초를 중심으로 초기 비잔틴 미술의 형식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융합시켜 발전시켰다.

[도판 141] 시모네 마르티니와 리포멤미, <수태 고지>, 1333년.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화 부분, 목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    

이 작품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늘에서 내려와 성모마리아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두드러진 황금색 배경과  마리아의 옷이 단조롭게 표현된 것에서 비잔틴 양식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천사의 날개가 왼쪽 아치에 들어맞게 그려졌다든가 뒤로 움츠린 마리아가 오른쪽 아치 속에 그려지고 이 두 인물 사이의 공간을 꽃병과 그 위의 비둘기로 채워나가는 방법은 인물을 패턴 속에 조화롭게 배치하는 중세 미술가들의 전통에서 습득했다.  그러나 시에나의 화가들이 전통만을 따른 것은 아니다. 당시 다른 유럽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흘러내리는 의상의 부드러운 곡선과 우아하고 가느다란 몸매같은 섬세한 형태를 추구했다. 이전의 중세 미술가들은 사물의 실제 비례와 공간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시에나 화가들은 사물들을 작가의 세심한 관찰을 통해 묘사하고 각 사물들을 공간을 염두해 배치하였다.

 

7. 조토는 위대한 피렌체의 시인 단테(Dante)와 동시대인으로 단테는 그의 <신곡>(Divine Comedy)에서 조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도판141을 그린 시모네 마르티니는 그 다음 세대의 위대한 시인인 페트라르카의 친구였다.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시모네 마르티니가 페트라르카의 애인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현대적 의미의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술가들은 관습적인 남녀의 상을 그리고 아래에 이름을 써 넣곤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14세기 미술가들이 실물 관찰을 통한 사실적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라하의 대성당에는 프랑스적인 관념과 양식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동시대에 제작된 사실적 조각인 <설립자 군상>(p.194, 도판130) 있다.

[도판 142] 페터 파를러(아들) <자화상>, 1379-86년. 프라하 대성당

 

8. 보헤미아 지방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의 영향력이 전파되는 중심지들 중의 하나가 되었디. 라틴 교회의 지배를 받는 유럽은 하나의 단위로 묶여있었으며 그 안에서 미술가나 사상가들은 한 중심지에서 다른 중심지로 옮겨다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겨난 양식을 역사가들은 ‘국제적 양식’이라고 불렀다. 영국에 있는 이런 작품들의 한 예로 프랑스 미술가가 영국 왕을 위해 그린 <윌튼 두폭화>(Wilton Diptych)(도판 143)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형상에 대한 고대의 주술적 태도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미술의 초창기에 볼 수 있었던 이러한 신념의 강인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도판 143] <리처드 2세를 아기 예수에게 천거하는 세례자 요한, 참회왕 에드워드 및  성 에드먼드>(월튼 두폭화), 1395년경. 목판에 템페라, 각각 47.5x29.2cm, 런던 국립 미술관

 

9. <윌튼 두폭화> 앞서 논의한 작품들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어떤 주제와 표현을 공유하고 있는지는 인물들의 포즈나 부분의 표현, 단축법의 활용 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10. 국제적 양식의 미술가들은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관찰력과 그에 대한 그들의 취향”을 주변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도판 144] 랭부르 형제(폴과 장), <오월>, 1410년경. 《베리 공작의 기도서》 <매우 행복한 시절> 중에서, 샹티이 콩데 미술관

랭부르(Limbourg) 형제의 공방에서 제작한 기도서는 부르고뉴의 대공의 주문으로 제작한 것으로 그에 붙은 달력은 《메리 여왕의 기도서》(도판 140) 이후로 사생으로부터 얻은 생명감과 관찰력을 어느 정도까지 발전시켰는지 보여준다. 즐겁고 화려한 이 광경으로부터 우리는 초서와 그의 순례자들을 떠올릴 수 있다. 현실 생활에서 따온 장면의 하나처럼 보이도록 그린 이 그림은 완벽한 실제의 광경은 아니다. 상징적인 나무나 공식으로부터 그려진 인물상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실제 주변 생활의 화려함과 유쾌함으로 인해 그림을 그린 이와 중세 초기의 미술가들의 견해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얻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작업에 사용하고 있다. 이 시기의 미술가는 자연으로부터 스케치를 할 수 있어야 했고, 스케치북을 사용하여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들의 스케치를 비축해 두어야 했다.

[도판 145] 안토니오 피사넬로, <원숭이 습작>, 1403년경. 스케치북 중에서, 종이에 은필, 20.6x21.7cm, 파리 루브르

북부의 화가 안토니오 피사넬로의 소묘는 미술가들이 얼마나 애정어린 관심으로 살아 있는 동물을 연구했는지 보여준다. 이 시기의 미술가들은 자연의 관찰을 통한 꽃이나 동물의 세부 묘사에서 나아가 조각과 그림 제작을 위해 시각의 법칙을 개척하고 대상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고자 했다. 미술가들의 이러한 관심과 함께 중세 미술은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고 불리우는 시대가 시작된다.



12장 현실성의 정복 - 15세기 초

 

1.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은 조토 시대 이후의 일이었으며 이 시대에는 고대의 작품에 빗대어 예술가들을 칭송했다. 이탈리아인들은 고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나라가 세상과 문명의 중심이었으나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그 권세와 영광이 기울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의 부흥이라는 관념은 과거 ‘위대했던 로마’ 재생으로 연결된다. 그들의 관점에서 고대와 새로운 재생의 시대 사이에 놓인 시기는 반달족, 고트족 등에 의해 로마의 영광이 사라진 ‘슬픈 막간’, 중간의 시대일 뿐이었고, 이민족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반달리즘, 고딕미술 등의 단어에 야만적임, 아름다운 대상을 파괴하는 짓이라는 의미를 담게 했다.

 

2. 사실상 이러한 이탈리아인들의 생각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실제적 역사의 흐름에 대한 단순한 상황 파악에 불과하다. 미술의 부활은 고트족의 로마 침입 이후 암흑시대를 거치며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어오다가 고딕양식에 와서야 급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점진적 성장과 개화를 인식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조토의 업적이 엄청난 혁신이며, 고귀하고 위대한 모든 것의 부활로 여겨졌던 것이다. 14세기 이탈리아인들의 인식으로는 예술, 과학, 학문은 고전 시대에 번창했다 이민족에 의해 파괴되었음으로 그들 스스로가 영광의 시대를 부흥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3.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다른 도시보다 강하게 나타난 곳은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피렌체였다.

 

4. 이들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리스키(Fillippo Brunelleschi : 1377~1466)였다. 당시 부르넬리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는 궁륭형 천장을 만드는 고딕식 방법에 근거한 구상과 설계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건물이나 교회에 대한 건축을 의뢰 받았을 때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바라는 시안을 택했고, 로마를 여행하며 고대 신전과 궁전의 유적을 스케치하고 측량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고전 건축을 이용해 새로운 조화와 미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도판 146]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 <피렌체 대성당의 돔>, 1420-36년경.

 

5. 브루넬레스키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데 실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거의 500년 가까이 서양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브루넬레스키의 유산에 반기를 들기 시작 한 것은 금세기 들어와서의 일이다. 하지만 현재 건축되고 있는 대부분의 건축물에는 아직까지도 고전적 형식의 잔재를 찾아 볼 수 있다.

 

6. 도판 147은 브루넬리스키가 피렌체의 명문가인 파치(Pazzi)가를 위해 지은 예배당의 정면이다.

[도판 147]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 <초기 르네상스 교회당: 파치 예배당>, 1430년경. 피렌체

[도판 148] 브루넬레스키 설계, <파치 예배당 내부>, 1430년경.

한눈에도 고전적인 신전과 거의 공통점이 없으며, 고딕양식과도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원주와 벽기둥(Pilaster)과 아치를 자기식대로 결합하여 기존 건물들과 다른 경쾌하고 우아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보면 높은 창문, 가느다란 기둥 등 고딕적 특징들도 찾아볼 수 없다.

7.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후 수백년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의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평면에서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도판 149는 이러한 수학적 법칙에 근거해서 그려진 최초의 그림 중 하나이다. 이것을 그린 화가는 마사초(Masaccio : 1401~1428)이다. 그는 요절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당시 회화에 있어서 완전한 혁명을 이룩했다. 원근법도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지만 단순히 기법적인 부분을 떠나서 배치된 인물상들의 단순함과 장엄함, 섬세함이 아닌 육중함, 꽃이나 보석 같은 세부 묘사대신 건조하게 보이는 황량한 지하 납골소등 기존에 유행하던 국제적 양식과의 큰 차이점들이 당시 피렌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을 것이다. 마사초의 작품이 기존에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림들보다 시각적 즐거움을 덜 주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더 진지하고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르네상스의 거장들에게 기법적인 발견은 목표가 아닌 그러한 방법과 발견을 매개로 주제와 의미를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이해시키는 것에 있었다.

[도판 149] 마사초, <성 삼위 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 1425-8년경. 프레스코, 667x317cm,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8. 브루넬레스키의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였다. 도판 151은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무기 제조자 조합이 의뢰한 성 게오르기우스를 묘사한 작품이다.

[도판 150] 도판 151의 세부

[도판 151] 도나텔로, <성 게오르기우스>, 1415-16년경. 오르 산 미켈레의 대리석상, 209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

이는 교회외부 벽감에 세우기 위한 작품으로 고딕 조각상들과의 현저한 차별성을 보인다. 조용하고 엄숙하며 다른 세상의 것처럼 보이지만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상은 활력과 집중감을 보여주며, 도전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젊음의 혈기와 용기를 탁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 생명감과 운동감에도 불구하고 견고함을 잃지 않으며 마사초의 그림과 같이 우아한 세련미를 새롭고 힘찬 자연의 관찰로 대치하고 있다. 세부묘사는 전통적 모델에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며 인체의 실제 모습을 연구하였음을 입증한다. 15세기 초 피렌체의 거장들은 모델의 포즈를 통하여 인체의 탐구를 하였으며 도나텔로 역시 이 방법을 통해 사실적 묘사를 획득하였다.

 

9. 도나텔로는 조토와 마찬가지로 생존 당시 많은 명성을 얻었으며 여러 도시에서 작품활동을 왕성히 하였다. 도판 152의 세례 요한의 일화를 묘사한 작품 역시 시에나 성당의 세례반을 위해 만든 청동 부조이다.

[도판 152] 도나텔로, <헤롯 왕의 잔치>, 1423-7년. 청동에 금도금, 60x60cm, 시에나 대성당 세례당의 세레반 부조

[도판 153] 도판 152의 세부

이 작품 속의 생생한 묘사는 고딕 미술의 우아한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돈되고 유쾌한 문양이 아닌 갑작스러운 혼돈의 효과를 만들어 냈으며, 일화의 끔찍함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10.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은 현실의 환상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는 사건의 배경으로 고전적 궁전을 채택하였으며 배경인물들을 로마시대 유형의 인물들로 묘사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미술을 재생시키기 위해 로마의 유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미술에 대한 연구가 르네상스를 야기시켰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브루넬레스키의 일파 미술가들은 미술의 부활을 위하여 자연, 과학, 고대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11. 과학과 고전 미술에 대한 지식들은 한동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전유물로 남아있었으나 곧 다른지역(북유럽)의 미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12. 피렌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국제 고딕 양식의 섬세함과 세련미에 반해 힘있고 장중한  인물상을 창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당시 번창했던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Dijon)에서 1380년 경부터 1405년까지 일했던 클라우스 슬뤼테르(Claus Sluter)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조각가이다.

[도판 154] <예언자 다니엘과 이사야>, 1396-1404. <모세의 샘>의 부분, 석회석, 대좌 제외 높이 360cm, 디종 샤르트뢰즈 드 샹몰 예배당

이 작품은 유명한 순례지에 있는 샘을 표시하는 커다란 십자가 밑 부분을 이루고 있는 예언자 군상이다.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와 마찬가지로 고딕 시대 작품들과 달리, 조각상 이라기보다는 지금 막 역할을 하려는 중세 종교극에 나오는 인상적인 등장 인물들 같다. 그러나 이 같은 놀라운 사실성 외에도, 흘러내리는 의상과 기품 있는 자태의 육중한 인물을 표현한 슬뤼테르의 예술적 감각을 잊어서는 안된다.

 

13. 그러나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라 화가였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09-1441) 였다. 그 역시 부르고뉴 공국의 궁전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대부분 오늘날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지역의 한 지방에서 일을 했다.

[도판 155] <날개가 접혀진 헨트 제단화>, 1432, 패널에 유채, 각 패널 146.2x51.4cm,헨트, 성 바보(St.Bavo) 대성당

[도판 156] <날개가 펼쳐진 헨트 제단화>

이것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 제단화는 얀 보다는 덜 알려진 그의 형 휘버트(Hubert)가 시작해 피렌체의 마사초와 도나텔로의 걸작들이 완성된 바로 그 무렵인 1432년, 얀이 완성했다.

 

14. 피렌체에 있는 마사초의 프레스코(도판 149)와 플랑드르의 이 제단화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 두 작품 모두 양쪽 아래 부분에 기도하는 헌납자 부부가 있으며, 중앙에는 커다란 상징적 이미지가 자리했다. 마사초의 프레스코화에서는 성 삼위일체의 묘사에 초점을 맞췄다면, 반 에이크의 제단화에서는 예수를 상징하는 양에게 경배 하는 광경이 중앙에 배치됐다. 이 부분은 요한 계시록의 한 귀절(7장 9절)에 기초해 구성되었다.

 

15.  이 제단화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제작되어 축제날이면 펼쳐졌고 주간에는 접혀있었다. 접혔을 때의 외관 가장 아래에는 세례자 요한과 복음서 저자 요한이 입상의 형상으로 그려졌고, 그 위로 수태고지의 장면이 묘사됐다. 이를 백 년 전, 시모네 마리티니가 그린 제단화(p.213, 도판 141)과 비교해보면, 반 에이크가 얼마나 새롭고도 ‘세속적으로’ 이 성스러운 이야기를 묘사했는지 알 수 있다.

 

16.  새로운 미술에 대한 반 에이크의 시도를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부분은, 펼친 제단화의 양 날개 부분에 그려진 타락 이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그들은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에도 불구하고 정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반 에이크는 바로 이 부분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는 고대 미술가들처럼 인물형상을 이상화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벌거벗은 모델들을 그의 앞에 세우고, 무척 충실하게 그렸을 것이다. 천사들이 입은 비단옷의 광택과 그림 곳곳의 보석의 광체의 표현에서 그의 끈기와 숙달된 솜씨을 알 수 있다. 반 에이크 형제는 국제 (고딕)양식의 미술 전통과 결별하는 대신 그것을 완벽한 경지로 이끌어 중세 미술의 개념에서 진일보했다. (약 백년 전의) 랭부르 형제 역시 매력적이고 섬세한 세부 묘사를 즐겼으나, 인물이나 풍경의 실제 모습에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소묘와 원근법이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반 에이크의 자연에 대한 관찰은 랭부르 형제보다 더 인내심이 있었고 세부 묘사도 훨씬 정확했다.

[도판 157] 도판 156 의 세부

 

17. 물론, 자연을 충실히 모방하지 않았다고 해서 랭부르 형제 및 여타 다른 작품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반 에이크의 무한한 주의력과 끈기를 높이 평가해야 북유럽 미술이 발전해나간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남유럽 미술가들은 자연을 과학적인 정확성으로 묘사했다. 그들이 원근법적인 선으로 틀을 짜고 해부학과 단축법에 관한 지식을 기반으로 인체를 구축해 간 반면, 북유럽의 얀 반 에이크는 그림 전체가 현실 세계를 비추는 거울처럼 될 때까지 미세한 세부까지 묘사했다. 물건, 꽃, 보석 등 표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 북유럽 지역의 작가가 그린 것이고, 대담한 윤곽선과 명확한 원근법, 인체의 아름다움을 확실히 드러낸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8. 현실의 모사(혹은 묘사)를 위해 반 에이크는 회화의 기법을 개량해야만 했다. 그는 유화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발명한 유화는 원근법의 발견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룬 업적은 안료를 화면에 칠하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처방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이 시기까지 화가들은 안료를 지금처럼 튜브에서 짜 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야 했다. 반 에이크가 발명하기 이전에 사용한 기법을 템페라라고 하는데, 광물, 풀 등에서 캔 안료를 일종의 반죽으로 응집시키기 위해 달걀을 용매를 첨가했는데, 그것은 너무 빨리 마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에이크는 이 기법에 회의를 가진 것 같은데, 왜냐하면 너무 빨리 마르기 때문에 색들이 서로 부드럽게 섞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달걀 대신 기름을 이용했는데, 이는 그림이 한층 부드럽고 정확하고 여유롭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 반 에이크의 예술은 초상화 부분에서 특히 위대한 성취를 보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도판 158 <아르놀피니의 약혼>은 이탈리아 상인과 그의 신부를 그린 그림이다.

[도판 158]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약혼>, 1434년. 목판에 유채, 81.8x59.7cm, 런던 국립 미술관

[도판 159, 160] 도판 158의 세부

이 그림은 이탈리아의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작품만큼이나 혁명적이다. 현실의 단순한 것들이 갑자기 화면에 정착된 것이다. 침대, 카펫, 슬리퍼 등 온갖 것들이 다 있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감상자가 아르놀피니 부처(夫妻)의 집에 직접 방문한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림은 아마도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엄숙한 순간, 즉 그들의 약혼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행위의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하는 공증인과 같이, 반 에이크는 이 중요한 약속을 기록해달라고 요청받았을 것이다. 이 거장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라틴어로 ‘Johannes de eyck fuit hic 1434(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 1434년) ’라고 그의 이름을 써 넣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인공들의 뒤에 걸려 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화가이자 증인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목격자가 확실하다고 인정하는 사진을 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는데, 그림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고안해낸 것이 에이크인지, 아르놀피니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을 창안해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는 분명히 반 에이크의 새로운 회화 방식이 지닌 엄청난 가능성들을 재빨리 이해했음이 틀림없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20. 현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를 위해서 반 에이크는 마사초와 같이 국제 고딕 양식의 쾌적한 형식과 유려한 곡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인물상들이 도판143<일명 윌튼 두폭화>와 같은 정교하고 우아한 작품과 비교해보면 딱딱하고 어색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세대의 낡은 개념을 거부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구세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혁신의 가장 급진적인 사람은 스위스의 화가인 콘라드 비츠(Conrad Witz, 1400? ~ 1446?)를 들 수 있다. 도판 161<제자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은 그가 1444년에 제네바 시를 위하여 그린 제단화의 일부분이다.

[도판 161] 콘라드 비츠, <제자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 1444년. 제단화의 패널, 목판에 유채, 132x154cm, 제네바 박물관

이 그림은 성(聖) 베드로에게 봉헌된 것으로 요한복음 21장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부활한 뒤 성 베드로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몇 명의 사도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티베리아 해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고, 날이 밝아 그들 앞에 선 이가 예수라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어부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고기가 어찌나 많은지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들 중 한 명이 ‘주님이시다!’라고 하자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그는 벌거벗고 있었다) 그냥 물에 뛰어들었다.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만약 중세의 화가가 이러한 기적의 장면을 그리게 되었다면 그는 배경의 티베리아 해를 상투적인 물결선으로 묘사하는 데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츠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예수가 물가에 섰을 때 진짜로 어떤 모습이었을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시민들이 다 알고 있는 호수, 즉 살레브 산을 배경으로 하는 제네바 호수를 배경으로 그렸다. 이것은 누구나 다 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지금도 당시와 흡사한 배경을 유지하는 실제의 풍경이다. 그것은 아마도 실제 풍경을 최초로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시도한 첫 작품일 것이다. 이 현실의 호수 위에 비츠는 위풍당당한 사도들이 아니라 투박한 사람들을 그렸다. 성 베드로는 물에 빠져 무기력한 사람처럼 보이며 또한 마땅히 그리 보였을 것이다. 단지 예수만이 소란한 가운데 조용하고 굳건히 서 있다. 그의 확고한 자세는 마사초의 프레스코, 도판149<성 삼위 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의 인물상들을 연상시킨다. 제네바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이 제단화를 대했을 때, 즉 그들의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그들의 모습의 사도들과 그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는 호숫가에 구원과 위안을 주기 위해 기적처럼 나타난 부활한 예수를 보았을 때 그들은 틀림없이 매우 커다란 감동을 체험했을 것이다.



13장 전통과 혁신 1 - 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1. 15세기 초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미술을 성경 내용의 묘사가 아닌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은 유럽 전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15세기 미술가들의 실험과 탐구, 모험 정신은 중세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 이전 시기, 즉 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은 비슷한 목적에 의해 서로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갔다(국제 양식). 물론 중세 시기에도 민족적인 차이는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예술·학문·정치 영역 모두 유럽 각지는 비슷한 수준이었다.

 

3. 중세 시대의 귀족들은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사도의 이상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옹호자라는 생각은 없었다. 중세 말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으로 구성된 도시가 봉건 영주의 성보다 중요해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상인들은 고향의 언어를 사용하며 타국의 경쟁자나 침입자에게 함께 대항했다. 각 도시는 그들이 가지는 지위와 특권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것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도시들이 세력을 확대하자 미술가들도 이리 저리 옮겨 다니던 예전과 달리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를 조직했다. 길드는 조합원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였고, 미술가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다. 기술 면에서 완전하게 익혔다는 것을 입증하고 나서야  제작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

 

4. 길드와 시 의회는 시의 행정에 발언권을 가진 부유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도시를 번창하게 하고 경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길드들은 그들 기금의 일부를 교회 설립, 제단과 예배당을 세우는 작업이나, 조합의 건물을 짓는데 사용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그들은 예술에 일조할 수 있었다. 또한 길드는 회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타 지방의 미술가가 정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오직 유명한 미술가들만이 중세 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일했다.

 

5. 도시가 성장하기 이전의 고딕 국제 양식은, 적어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유럽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국제적 양식이었을 것이다. 15세기부터는 미술이 각기 다른 ‘유파(school)’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지의 모든 도시, 마을에는 나름의 ‘회화 유파’가 생겨났다. 당시 젊은 학생들이 다닐 미술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화가가 되고자 하면 거장의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시작해야 했다. 허드렛일부터 하나씩 배워나가는 이 방식이 당시 15세기 ‘회화의 유파’들이었다. 이는 훌륭한 미술 학교들이었으며 한 도시의 스승들이 그들의 기술과 경험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주는 이 방식을 통해 각 도시의 ‘회화 유파’가 그처럼 분명한 독창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6. 피렌체는 이 엄청나게 다양한 거장들과 ‘유파’들, 그리고 그들의 실험을 한 눈에 개관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당시의 미술 후원자들의 주문은 그 이전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롭고 혁명적인 방법들이 인습적 주문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축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의 고전적 형식을 자신의 건축에 반영한 것처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ti)도 유사한 방식을 사용했다.

[도판 162]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르네상스 교회 : 만토비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 1460년경

도판의 건축물에서 그는 교회의 정면을 로마 풍의 거대한 개선문(도판 74)처럼 구상했다.

[도판 163]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피렌체의 루첼라이 대저택>, 1460년경

또한 그는 이러한 새로운 방침을 주택에서도 사용했다. 이 건물의 정면과 고전 시대 유적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음에도 그는 건물의 정면 장식에 고전적 형식을 사용했다. 원주나  반원주 대신 고전적 기둥의 양식을 암시하는 판판한 벽기둥(pilaster)과 엔타블레이쳐(entablature)를 그물처럼 엮어서 건물을 덮었다. 로마의 콜로세움 양식을 차용한 이 대저택에서 우리는 로마의 형식 뿐 아니라 고딕 전통 형식과의 유사성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고전적 기둥 양식의 요소를 인습적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 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 뿐이다.

 

7. 15세기 피렌체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알베르티가 그랬듯이 새로운 것을 오랜 전통에 맞도록 조화시켜야 하는 처지에 놓일 때가 많았다. 이러한 신·구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에 활동한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8. 새로움과 전통을 조화시킨 피렌체의 거장 중에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로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1378-1455)가 있다.

           [도판 164] 로렌초 기베르티, <세례받는 그리스도>, 1427년. 청동에 금도금, 60x60cm, 시에나 대성당 세례당의 세례반 부조

도판 164는 도나텔로의 <헤롯 왕의 잔치>가 있는 시에나 대성당의 동일한 세례반을 위해 만든 부조이다. 도나텔로와 달리 기베르티의 작품은 여전히 중세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장면의 구성은 12세기 리에주의 놋쇠 장인의 그것과 비슷하다(도판 118). 옷 주름 등의 세부를 다루는 방법은 도판 139 와 같은 14세기 금세공사의 작품을 상기시켜 준다. 그럼에도 이 부조는 도나텔로의 작품만큼 힘차고 실감나게 보인다. 인물들은 도나텔로의 작품에서처럼 특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도나텔로가 실제 공간을 염두한 새롭고 극적인 장면 표현으로 그 전 시대의 명료한 배치 방식을 뒤엎었다면 기베르티는 보다 명료하고 절제있는 표현을 하려 했다. 그는 깊이의 암시를 통해 등장인물들을 모호한 배경과 대조시켰다.  

 

9. 피렌체 부근 피에솔레(Fiesole)의 화가 프라 안젤리코는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들을 응용했다.

           [도판 165] 프라 안젤리코, <수태 고지>, 1440년경. 프레스코, 187x157cm, 피렌체 산 마르코 미술관

이 프레스코 벽화를 보면 그는 마사초와 같이 실감나게 원근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벽에 구멍을 뚫는 것’은 그의 주된 의도는 아니었고 그는 시모네 마르티니(도판 141)처럼 성화를 아름답게 그리려고 했다. 그의 그림에는 운동감이 적고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하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겸손한 태도로 일부러 근대적인 표현법을 과시하지 않았다.

 

10. 피렌체의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의 작품중 전쟁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 있다.

[도판 166] 파올로 우체로, <산 로마노의 대승>, 1450년경. 피렌체 메디치 궁의 실내 장식화로 추정, 목판에 유채, 181.6x320cm, 런던 국립 미술관

[도판 167] 도판 166의 부분

얼핏 보면 이 그림은 중세풍으로 보인다. 나무로 만든 인형같은 말과 사람들은 이 그림의 표현기법이 현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이유는 화가가 무엇보다도 원근법에 몰두하여 그의 인물들이 조각된 것 처럼 보이도록 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땅에 그려진 전사자는 단축법으로 묘사되어있고,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부러진 창들 또한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배치 때문에 작품의 무대는 다소 인위적으로 보인다. 랭부르의 세밀화(도판 144)와 비교해볼 때 반 에이크(도판 157)가 극도의  세부묘사로 국제 양식의 형식을 변화시켰다면 우첼로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실감나는 무대를 구축하려고 했다.

 

11. 프라 안젤리코나 우첼로보다 덜 헌신적이고 덜 야심적인 미술가들은 별 어려움 없이 새로운 기법을 응용했다.

[도판 168] 베노초 고촐리, <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 박사들>, 1459-63년 사이. 프레스코 벽화 부분,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의 예베당

이 작품은 메디치 궁에 있는 개인 예배당의 벽화로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이지만 그와 화풍이 매우 다른 베노초 고촐리가 그린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동방 박사들을 왕자와 같은 모습으로 쾌적한 여행을 하는 것처럼 그렸다. 그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묘사를 할 기회로서 이 그림을 그렸다. 귀족들의 유희 장면(도판 144)을 묘사하는 취향은 이 그림에서 더욱 생생하고 유쾌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는 그렇다고 그를 비난 할 수는 없다. 당시의 생활상은 이 그림에서와 같이 화려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군소 미술가들에게서 그런 것들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2. 피렌체 남쪽과 북쪽의 도시의 사는 화가들도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여 그 이상으로 발전해 나가려고 했다. 그중에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 31-1506)가 있다. 만테냐는 파도바의 한 교회에서 성 야고보의 전설을 설명하는 일련의 벽화들을 그렸다.

[도판 169] 안드레아 만테냐,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 1455년경. 프레스코,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성당벽화였으나 현재 손실

그 중의 하나의 작품은 사형장으로 호송되는 성 야고보를 묘사하고 있다. 조토나 도나텔로와 마찬가지로 만테냐 역시 현실적인 장면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좀 더 정확한 것이었다. 조토가 인물의 내면적인 의미에 집중했다면 만테냐는 장면을 그대로 재구성하기 위해 외부적인 형태에도 관심을 가졌다. 만테냐는 마사초의 미술을 이어나갔다. 그의 인물들은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조각적이고 인상적이다. 그는 마사초처럼 원근법을 열심히 사용했다. 만테냐는 연극 무대를 창출하듯이 원근법을 사용하여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사건이 일어난 순간의 의미와 과정을 전달하려 하였다.

 

13.피렌체의 남쪽 지방 도시인 아레초(Arezzo) 와 우르비노(Urbino)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 만테냐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법을 응용하고 있었다.

[도판 170]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 1460년경. 프레스코의 부분, 아레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벽화.

이 작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계기가 된 꿈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그린 것으로 전투하기 전날 밤의 황제의 막사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피에로의 작품에서는 만테냐와의 공통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무대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고, 세부 처리에서 정확하게 묘사하고자 하였으며  원근법에 능숙하다는 점들이다. 이러한 방법 이외에도 그는 빛의 처리를 더하였다. 빛의 처리는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도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녔다. 피에로는 빛과 그림자로 하여금 앞의 다른 기법들에서 행하지 못한 깊은 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조해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14. 피렌체의 미술가은 처음에는 원근법의 발견과 자연의 탐구 같은 새로운 발견들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줄꺼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새로운 창안들이 야기시킨 문제점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미술은 과학의 발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한다. 미술에서 어떤 한 방향으로의 새로운 발견은 다른 방향에서의 새로운 어려움을 낳는다. 예를 들면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관념이 사용되면서 인물을 어떻게 조화롭게 배치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특히 교회 건축의 전체적인 구조와 어울려 멀리서 바라보는 거대한 제단화 같은 작업에서 더욱 심각하게 문제시 되었다.

[도판 171]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1475년. 제단화, 목판에 유채. 291.5x202.6cm 런던 국립 미술관

이 작품은 15세기 후반 피렌체의 미술가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가 제작한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장면이다. 그는 소묘에 있어서도 정확하며 구성에 있어서도 정확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정확한 규칙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시도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피렌체의 미술가들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중하게 시도하였는지를 보여준다.

 

15.이 작품에서 성인은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고 여섯 명의 사형 집행인들이 규칙적인 삼각형 구도로 배치되어있다.  이러한 배치는 지나치게 딱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분명하고 좌우대칭적이다. 그래서 화가는 대칭적 구도의 인물들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본 것으로 그려넣는 단순한 방법을 통해 구성의 생경한 대칭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작품에서 이러한 방법이 매우 의식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구성이 연습같이 보이면서 그가 성취하고자 시도한 것들을 대부분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배경을 원근법을 이용하여 휼륭하게 묘사하였으나 주제와 전혀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폴라이우올로의 작품은 15세기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을 문제들을 보여준다. 한 세대 뒤의 이탈리아 미술이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 것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6.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 1446~1510)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고전 시인들은 중세 전반에 이미 알려지긴 했지만 과거의 위대한 영광을 되찾으려는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일반인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에 있어서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신화는 심오한 교훈, 신비스러운 진리와 같은 것이었다.  보티첼리의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인 <비너스의 탄생>(도판 172)은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도판 172]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172.5x278.5cm, 피렌체 우피치

보티첼리의 작품 속 인물들은 덜 단단해 보이고 마사초나  폴라이우올로만큼 정학히 그려지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은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p.213 도판 141)나 프랑스 금세공사의 작품(p.210 도판 139)같은 14세기의 미술을 상기시켜 준다. 정확하지 않은 인체의 비례나  그 밖의 자유로운 표현들은 오히려 신화적 존재의 인상과 내용을 더 드높여주며, 화면자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된다.

 

17. 보티첼리에게 이 그림을 주문했던 부유한 상인,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는 나중에 한 대륙의 이름이 될 운명을 가진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고용주이기도 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중세의 ‘공식적인’ 종언이라 부르는 시대에 도달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여러가지 전환점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기법적인 혁명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어야할 지점은 두 세기 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변화들이다. 



14장 전통과 혁신 2 - 15세기 : 북유럽

 

1. 15세기는 미술사에 있어서 이탈리아 미술을 다른 유럽지역과  차별되는 미술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는 건축이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물에 고전적인 모티프를 사용하는 르네상스적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피렌체에서의 고딕  양식에 종지부를 찍었다. 다른 지역보다 한 세기나 앞서 일어난 일이다.

 

2. 도판 174의 루앙의 법원 건축물은 ‘플랑부아양(Flamboyant:타오르는 불꽃 모양) 양식’이라고도 불리워지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설계자가 장식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건물 전체를 화려한 장식들이 뒤덮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판 174] <루앙의 법원성의 안뜰(전에는 재무성이었음)>, 1842년.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

 

3. 특히 영국에서 소위 ‘수직 양식(Perpendicular style)’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경향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수직 양식은 곡선과 아치보다 직선을 더 빈번하게 사용한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영국 건축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가장 유명한 예는 1446년 착공된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 예배당이다. 이 고딕 예술 장인의 상상력은 세부, 특히 궁륭의 형태에서 자유자재로 발휘되어 있다.

[도판 175]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 예배당>, 1466년 착공. ‘수직’ 양식

 

4.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특히 승리를 거둔 반면, 15세기 북유럽은 아직 고딕 전통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반 에이크 형제의 혁신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여전히 과학의 문제라기보단 관습과 관례의 문제로 생각되었다. 수학적 원근법의 이론, 과학적 해부학의 비밀, 로마 유적들에 대한 연구 등등은 북유럽 거장들의 평온한 정신상태를 동요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근대’에 속하고 있지만 아직도 ‘중세 미술가들’이었다. 그러나 그시기에 유럽 전역의 미술가들이 당면한 문제는 놀랄만큼 비슷하다. 얀 반 에이크는 그림 전체가 꼼꼼한 관찰로 꽉찰 때까지 조심스럽게 세부를 하나씩 첨가함으로써 그림을 자연의 거울로 만드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도 반 에이크의 혁신을 보다 더 전통적인 주제에 활용한 미술가가 있다. 예를 들어 15세기 중엽 쾰른에서 작업을 했던 독일 화가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 1410?-51)는 어느정도 북유럽의 프라 안젤리코라 말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을  반 에이크의 새로운 방법들을 알고 있으나 그 정신으로 보면 반 에이크보단 오히려 고딕 양식의 <윌튼 두폭화>에 가깝다. 그의 <장미 그늘 아래 성모>를 두폭화와 비교해보면 두폭화의 문제점을 로흐너는 이미 터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판 176] 슈테판 로흐너, <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 1440년경. 목판에 유채, 51x40cm, 쾰른 발라프 리하르치 박물관

 

5. 북유럽의 다른 화가들은 오히려 베노초 고촐리와 비견된다. 그가 피렌체의 메디치 저택에 그린 프레스코들은 국제 양식의 전통적인 정신에서 보여지는 우아한 세계의 호사스러움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태피스트리를 디자인한 화가들과 귀중한 필사본의 페이지를 장식한 화가들에게도 나타난다. 도판 177에 보이는 삽화는 고촐리의 프레스코와 마찬가지로 15세기 중엽에 그려졌다.

[도판 177] 장 르 타베르니예, <’사를 마뉴 대제의 정복’ 중 헌정 페이지>, 1460년경. 브뤼셀 왕립 도서관

이 그림엔 저자가 완성된 책을 주문했던 그의 귀족 후원자에게 전달해주는 전통적인 장면이지만 당시 중세 도시의 관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다. 그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일상 생활을 이처럼 충실히 그릴 수 없었다. 이러한 예는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그들도 세계를 이러한 정확성과 유머를 가지고 보지는 못했다. 이탈리아 미술에 비해 이상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성취하는데 관심을 적게 가졌던 북유럽의 미술은 이런 종류의 표현법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6. 그러나 이 두 ‘유파’ 즉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의 선진적인 화가들 중 한 사람인 장 푸케(Jean Fouquet:1420?-80?)가 젊은 시절 이탈리아를 방문했다.그는 로마에 가서 교황을 그리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지 몇년 뒤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기증자의 초상<성 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프랑스 샤를 7세의 재무대신 에티엔 슈발리에>은 <윌튼 두폭화>와 비교하여볼 때 그 발전상을 알 수 있다.

[도판 178] 장 푸케, <성 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프랑스 샤를 7세의 재무대신 에티엔 슈발리에>, 1450년경. 제단화 부분, 목판에 유채, 96x88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회화관

그 그림을 통해 그가 이탈리아 작품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지만 모피, 돌, 옷감, 대리석 등 사물의 질감과 표면에 그가 갖는 관심을 보면 그의 미술은 북유럽 전통의 영향도 동시에 드러난다.

 

7. 반 에이크와 같이 세부를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장면을 묘사하지 않고, 얕은 무대 위에 인물들을 배치하여 표현하였다.

[도판179]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435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220x262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재치나 본능이 아닌 정확한 규칙(삼각형 구도)를 중시한 폴라이우올로(p263,도판171) 의 작품처럼 어색하고 자의적으로 보이지 않고, 윤곽이 분명하며 화면 전체구성이 만족스럽다. 이러하듯 고딕 미술의 주요 개념들을 새로운 사실적인 양식으로 번안함으로써 북유럽의 미술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없어졌을지도 모를 명확한 화면 구성의 전통을 상당부분 보존했다.

그 뒤로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나름대로 미술의 새로운 요구와 미술이 오랫동안 복무해온 종교적인 목적을 융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다음단락에 예시)

 

8. 반 얀 에이크의 평온한 분위기와는 다른 긴장되고 진지한 것이 있다. 그것은 성모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12사도들의 다양한 반응을 묘사한 훌륭한 솜씨이다. 이전 화가들은 작품에서는 사도들이 거의 비슷하게 닮아 있었으며, 명확한 구도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반 데르 후스는 화면의 공간을 유효하게 사용함으로써 인물들을 전 화면에 배치하여 우리의 눈에 현실의 장면을 떠올려 주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도판 180] 후고 반 데르 후스 <성모의 임종>. 1480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146.1 x 121.1cm. 브뤼주 박물관

[도판 181] 도판 180의 세부

 

9. 로지에르는 조각가들과 목각사들에게 고딕 양식을 새로운 형식 속에 잔존케 하였다.

[도판 182] 바이트 슈토스. <성모 마리아 교회당 제단>. 1477-89년. 쿠라쿠프, 채색 목조. 높이 13.1m

[도판 183] 바이트 슈토스, <사도의 머리 부분>, 도판 182의 부분

성모의 생애 중 중요한 순간들이 묘사되어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당 제단은 누구나 주요 장면들의 의미를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명확한 디자인의 가치를 볼 수 있다. 또한 제단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사도들의 머리와 손 등을 놀랍게 처리한 바이트 슈토스의 예술의 진실성과 표현력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10. 15세기 중엽 독일에서는 예술과 인쇄술에 중요한 발명들이 있었다. 목판화술(woodcut)은 목판을 양각으로 파내어 인쇄하는 기법으로, 여러장의 목판화를 묶어 책으로 만든 목판인쇄본(block-books)도 만들어졌다.

[도판184] 작자미상, 〈착한 사람의 임종〉, 1470년경, 목판화, 22.5×16.5cm, 《잘 죽는법》의 삽화, 울름에서 인쇄

 

11.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목판인쇄본이 쇠락하면서 목판화는 삽화로 곁들어지게 되었다.

 

12. 목판화와 반대로 뷰린(bulin)을 이용하여 음각해 만드는 동판화(copperplate engraving)의 발명은 보다 훨씬 풍부한 세부 묘사와 미묘하고 정교한 효과를 가능하게 하였다.

 

13. 이 단락에서는 15세기 동판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작품을 비평하고 있다. 특히 도판 185 <거룩한 밤>을 과녁으로 삼고 그에 대한 설명적 묘사를 하고 있다.

[도판 185] 마르린 숀가우어, <거룩한 밤>, 1470-3년경. 동판, 25.8x17cm

곰브리치에 의하면 이 작품이 공들여 묘사한 장면은 네덜란드 대가들의 기풍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여타 유명한 작가들이 그러했듯 세부적 묘사나 사물의 재질이나 느낌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유화 등의 회화에서 쓰인 물감과 붓을 이용한 상황 묘사가 아닌 판화라는 기법으로 이를 구현했다는 것이 기적에 가깝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제시한 작품에 드러난 시각적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14. 이러한 가능성을 지닌 목판술과 동판술, 즉 판화 기법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판화는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각기 다른 유파들의 개념을 전이시키는 새로운 수단이었으며 이러한 기법적 기술과 구성을 베껴오는 것이 불명예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인쇄술의 발명과 발전이 (책의 출판이라는 획기적 시발점)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듯이 미술에 있어서도 판화라는 기법으로 도치된 기술은 이후의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장 조화와 달성 - 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1. 이제까지 우리는 15세기 말 보티첼리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까지 살펴 보았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를 ‘콰트로첸토’, 즉 ‘400년대’라고 부른다. 16세기, 즉 ‘친퀘첸토(500년대)’ 초엽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티치아노(Tiziano), 코레조(Correggio)와 조르조네(Giorgione), 북유럽의 홀바인(Holbein)과 뒤러(Durer)등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2. 앞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의 시작을 이미 조토의 시대에서 보았다. 부유한 도시와 자치주에서는 거장들을 초청해서 아름답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훌륭한 작품들을 그들의 영역에 만들기를 원했다. 미술가들을 두고 영입경쟁을 하던 이들 도시와 자치주의 자부심은 거장들의 경쟁심을 가질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미술가들의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미 그들은 단순히 주문/제작을 하는 수준을 넘어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하지만 미술가들의 지위는 고대 그리스 시대 수준이었는데, 이를 깨뜨리고자 하는 것 역시 그들에겐 또 하나의 도전이자 자극이었다. 거장들의 영입을 위해 각 도시와 자치주들은 미술가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과거와 다르게 미술가들은 그들 나름의 조건을 제시하거나 마음에 맞는 주문을 선택 할 수 있게 되었다

 

3.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건축 분야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르넬레스키 시대(p.244) 이래로 건축가는 고전시대의 지식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건축분야는 후원자의 요구와 미술가의 이상이 극명하게 갈등을 일으키는 분야였다. 우리는 앞서 알베르티와 같은 거장들이 이러한 갈등 속에서 어떠한 절충안을 내놓았는지(p.250, 도판 163) 살펴 보았다. 르네상스 건축가들이 원했던 것은 그 쓰임새와는 상관없이 비례적 아름다움과 공간성, 그 조화가 연출하는 장대함 이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열렬한 지지자인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에게 전통에 따라 지어진 성베드로 바실리카를 허물고 새로운 방식의 교회 건축을 의뢰했다.

[도판 187] 도나토 브라만테, <르네상스 전성기의 예배당: 템피에토>, 1502년. 로마 몬토리오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

 

4. 그 후 교황은 이 거장에게 새로운 성 베드로 성당의 설계를 맡겼는데 그는 이것이 기독교 세계에서 정말 놀랄만한 업적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브라만테는 1천년간의 서유럽 전통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5. 그 건물에만 어울릴 수 있는 그리스 고전기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면서 그는 거대한 십자형 홀을 중심으로 둘레에 대칭적으로 예배당을 배치한 정방형의 성당을 설계했다.

[도판 186] 카라도소, <브라만테의 거대한 돔 건축 설계를 보여주는 신축 성 베드로 성당 건립을 위한 메달>, 1506년. 브론즈, 직경 56cm, 런던 대영 박물관

그는 고대 로마의 최대 건물인 콜로세움(p.118, 도판73)의 효과와 판테온 신전(p. 120, 도판 75)의 효과를 결합시키려 했다.  그러나 고대의 미술을 흠모하며 전대미문의 작품을 만들려했던 당시 건축가들의 야심이 편의성과 전통을 압도한 기간은 매우 짧았다. 교황이 대성당 건축을 위한 과도한 기금을 모으려 하다 종교개혁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6.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계획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대담성과 진취성은 1500년경을 전후로 하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특징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 거장들을 배출한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조토(1300년경) 시대와 마사초(1400년경) 시대를 거치며 성장하게 되었으며, 그 기술 뒤에는 군소 대가들의 공방이 있었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는 토스카나의 마을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화가이며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1435-88)가 경영하는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도판 188]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념상>, 1479. 청동, 높이 395m, 베네치아 산조반니에 파올로 광장

[도판 189] 도판 188의 세부

베로키오의 명성은 대단하였고 베네치아 시는 그에게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장군의 기념물 제작을 의뢰했다. 이 기마상에서 그가 도나텔로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부학적으로 관찰된 말과 인물의 근육, 선봉장임을 짐작하게 하는 말탄 사람의 자세, 장군과 말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집중된 에너지와 모든 시점에서 뚜렷해 보이는 윤곽에 이 작품의 위대성이 있다.

 

8.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젊은 레오나르도는 철저한 기초를 습득했을 것이다. 보통의 재주를 가진 소년이었어도 이 공방의 훈련으로 훌륭한 미술가가 되었겠지만 그는 천재였다. 우리는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글과 소묘 등에서 보이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의 탁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철저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였으며 책을 읽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것을 직접 실험했다. 그는 해부학, 자연에 대한 관찰, 비행 기구 등 발명품의 고안, 대기가 색채에 미치는 영향, 음(音)의 조화 등을 끊임 없이 연구했고 이는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도판 190]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해부학 연구(후두부와 다리)>, 1510년. 종이에 펜과 갈색 잉크 및 검정 분필과 담채, 26x19.6cm, 윈저 성 왕립 도서관

 

9. 군주나 장군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비스러운 인물로 생각됐던 레오나르도를 성채와 운하의 건설, 무기와 장치의 발명을 담당하는 기사로 등용하고자 했다. 그는 미술가와 음악가로서 추앙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술을 한 번도 출판한 적이 없어 우리는 그의 사상과 지식 범위를 알 수 없다. 그는 강한 호기심으로 연구와 실험을 해나갔으며,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대상의 탐구를 위해 이전의 문제에 대해 흥미를 잃었을 수도 있다.

 

10. 레오나르도의 자연에 대한 모든 탐구는 미술에 필요한 가시적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과학적 연구를 통해 그가 사랑하는 회화 예술을 단순한 기술이 아닌 존경받는 신사다운 작업으로 변경시킬수 있다고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볼수 있는 가구공, 직공, 땜장이의 역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양과목(arts)과 손을 사용하는 일의 구분법을 보면 당시 회화를 포함한 손으로 하는 기술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림 또한 학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레오나르도와 그의 후원자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미완의 상태로 멈춘 작품들이 많았고, 작품의 완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임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여기저기 옮겨 다녔고, 당시 사람들은 그가 시간을 허비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는 결국 1519년 프랑수아 1세의 궁정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이해보다는 찬탄과 존경을 더 많이 받았다.

 

11. 불행하게도 그가 원숙기에 완성시킨 몇 개의 작품들만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도판 191] 뒷벽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우의 만찬>이 보이는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 벽화

[도판 192]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98년. 회반죽에 템페라, 460x880cm,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 벽화

도판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 벽화이다. 성경 이야기가 이처럼 가깝고 실감나게 그려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성경의 이야기를 눈 앞에 그려보려고 노력했다.  그림 속의 12사도들은 그들의 몸짓과 움직임에 의해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어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또 이 질서 속에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움직임과 그를 받아 주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 폴라이우올로(도판 171)의 인위적인 해결책에 비했을 때 그보다 젊은 나이였던 레오나르도가 얼마나 쉽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지 알 수 있다. 구성이나 소묘같은 기법상의 문제를 넘어 서서 우리는 인간의 행위와 반응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깊은 통찰력과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최후의 만찬>이야말로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위대한 기적들 중 하나이다.

 

12.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들자면 그것은 리자(Lisa)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부인의 초상인 <모나리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도판 193]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2년 경,목판에 유채, 77x53cm, 파리 루브르

지나치게 유명한 명성 탓에 우리는 이 그림을 참신한 눈을 가지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감탄스러운 부분은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 중에는 그런 효과를 내는 것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세세한 부분까지 의도적으로 잘 모사하려 할수록 점점 더 생생하게 그려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진정한 해결책을 발견한 사람은 레오나르도 뿐이었다. 그는 윤곽을 확실히 그리지 않고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두는 ‘스푸마토(spumato)’를 창안함으로써,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스푸마토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 무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13. <모나리자>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스푸마토 기법을 아주 세심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 있는데, 그는 바로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모나 리자의 표정을 늘 붙잡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런 효과는 모호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의 양쪽이 꼭 들어맞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왼쪽의 지평선이 오른쪽 것 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을 보는 초점에 따라 그녀의 자세와 얼굴이 변하는 것 같이 보인다.

[도판 194] 도판 193의 세부

그는 자연으로부터 대담한 이탈을 시도했음에도, 끈질기게 자연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누구 못지 않게 근실했다. 다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들의 꿈-형상을 보존함으로써  묘사 대상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현실로 만들었다.

 

14. 16세기(친퀘첸토) 이탈리아 미술을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미켈란젤로는 다빈치보다 23년 늦게 태어나 45년 더 살았다. 긴 생애 동안 미술가의 지위가 바뀌는 것에 일조했다. 13살 무렵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3년 간 도제 생활을 거쳤다. (기를란다요는 천재적이라기 보다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이 많은 작가였다.)

[도판 195]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성모의 탄생>, 1491년, 프레스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15.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거의 모든 기술적 기본기를 익혔으나 그에 안주하지 않고 공방을 나와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해부학의 연구를 하는 등의 일에 매진했다. 그는 사실적 묘사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며 30세가 될 무렵 다빈치와 필적할 수 있는 당대 가장 뛰어난 거장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비록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피렌체 시는 시의회 대회의실 벽화를 동시에 의뢰하였다. 이후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살펴보면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영묘를 세우는 계획에 미켈란젤로에게 석상들을 요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를 위해 카라라의 채석장으로 가서 6개월간 머무르며 대리석을 골라내고 작품 구상을 하는 등의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교황의 마음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계획에 더 쏠리면서 미켈란젤로를 실망케 했으며 이는 곧 공포와 분노로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교황에게 무례한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16. 이 사건은 의외로 교황이 미켈란젤로의 로마 회귀를 협상케 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거취나 계획이 국가의 미묘한 문제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에 의견을 일치시킨 것 같다. 피렌체 시장의 설득하에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져 미켈란젤로의 로마 복귀 이후 교황은 바티칸 대성당의 천장벽화를 주문한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라는 말까지 하며 이를 완강히 거부하지만 교황 측의 끝없는 고집에 결국에는 작업에 착수한다. 처음엔 간단한 그림을 계획했으나 작업 착수 전 갑자기 미켈란젤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할' 계획으로 변경한다.

[도판 196]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 복원 전 내부의 전경

 

17.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거대한 공간을 그림으로 채운 한 사람의 육체적인 작업도 그의 지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업적과 비교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후대에게 제시해준 항상 새롭고 풍요로운 착상들, 그리고 모든 세부를 묘사하는 정확한 솜씨와 그 비전의 장대함은 인류에게 천재의 능력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심어주었다.

[도판 198]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1508-12년, 프레스코, 13.7x39m, 바티칸

 

18. 엄청난 작업조차도 늘 새로운 형상들을 창조하려는 그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듯이 미켈란젤로는 그림들 사이의 경계에 또다시 수많은 인물상들을 그려 넣었다.

 

19. 천장화를 단순히 하나의 훌륭한 장식으로만 생각하고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조화로운지 그리고 전체의 짜임새가 얼마나 명료한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20. 놀라운 인물상들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자세든지, 어떤 각도에서든지 인체를 능수능란하게 그리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천장에 있는 20여 명의 인물상은 그가 가장 선호하는 대리석을 가지고 계속 작업할 수 없게 되자 그 실망과 분노가 오히려 그를 더욱 자극하여 그림으로 분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도판 197]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일부

 

21. 그의 소묘를 통해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모든 세부들을 세심하게 연구하였는지 알 수 있다.

[도판 199]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천장화 중 리비아 무녀를 위한 습작>, 1510년경. 황갈색 종이에 빨강 분필, 28.9x21.4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미천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수십 세대를 통해서 이어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은 미켈란젤로가 그의 천지 창조에서 그린 것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판 200]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도판 198의 부분

이 소재는 오래 전부터 그려왔으나 아무도 이처럼 간단하고 힘차게 위대한 창조의 신비를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가 만들어낸 하느님의 모습을 통해서 신의 전지 전능함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방법은 미술의 가장 위대한 기적 중 하나이다.

 

22. 미켈란젤로는 1512년 시스티나 성당을 완성하자마자 율리우스2세의 영묘 건립을 계속하기 위해 다시 대리석 조각에 착수했다. 그는 그곳을 로마의 유적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수많은 포로들의 조각상으로 장식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군상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죽어가는 노예>이다.

[도판 201] 미켈란젤로, <죽어가는 노예>, 1513년경. 대리석, 높이 229cm, 파리 루브르

 

23. 시스티나 천장화를 끝난 후 그의 상상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로 작업을 하자 더욱 위대한 힘을 발휘하였던 것 같다. ‘아담’에서 힘찬 젊은이의 아름다운 육체 속으로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반면에 <죽어가는 노예>에서는 생명이 막 꺼지려 하고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는 순간을 표현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데서 해방되는 이 마지막 순간, 이 피로와 체념의 몸짓 속에 말할 수 없이 지극한 아름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 조각상은 우리들 앞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노렸던 효과인 듯 하다. 그가 조각한 인체들을 제아무리 격렬하게 몸을 뒤틀고 돌리고 있다 해도 전체적인 윤곽은 언제나 확고하고 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그가 작업하고 있는 대리석 속에 인물들이 숨어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조각가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들을 덮고 있는 돌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조각상들의 윤곽 속에는 본래의 대리석 덩어리의 단순한 형태가 반영되어 있어 그 인물상에 제아무리 많은 동작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명료한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24.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이 작품을 완성한 후 이전의 어떤 미술가보다 큰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명성 때문에 그는 젊은 시절 꿈인 율리우스2세의 영묘를 완성할 여유가 없어졌다. 군주들과 교황들은 그 이전의 누구보다 더 열렬히 미켈란젤로의 이름과 연결시키고자 열망하였다. 그들이 거장의 봉사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동안 그는 점점 더 깊숙이 내면 속으로 들어갔으며 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대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퍽 의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77세 때 한 이탈리아 인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썼다고 해서 편지를 거부했다고 한다.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보내지 마시오. …나는 단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통하고 있으니까…”

 

25. 그는 그의 자랑스러운 독립성­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는 다음 일화가 보여준다. 그의 적수 브라만테가 미완성으로 남긴 성(聖) 베드로 대성당에 둥근 지붕을 씌우는 일에 대한 보수를 거절했다. 기독교 세계의 총본산인 이 대성당을 위해 한 일을 세속적인 이윤으로 더럽혀서는 안 될 하느님에 대한 영광의 봉사로 간주했던 것이다.

 

26. 1504년 한 젊은 화가가 피렌체로 왔다. 이 화가의 이름은 라파엘로 산티(1483 ~ 1520)였다. 그는 소위 ‘울브리아 파’의 지도자 피에트노 페루지노의 촉망받는 제자였다. 페루지노는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통해 일반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그런 화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성공적인 작품들 중에는 그가 전체적인 화면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공간의 깊이를 묘사하는 방법과 인물들이 거칠고 딱딱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푸마토를 구사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도판202<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난 성모>의 구성은 매우 단순한데 거의 완벽한 좌우대칭 구도에는 딱딱하거나 무리가 가는 곳은 하나도 없다

[도판 202] 페루지노, <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난 성모>, 1490-4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173x170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그러나 이 조화를 위해 콰트로첸토 거장들이 사랑했던 자연주의적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한 것 같다. 페루지노의 천사들을 보면 그 천사들이 다소 동일한 유형들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독립된 작품을 본다면, 이 세계보다 더 평화롭고 조화로운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27.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스승의 화풍을 흡수한 라파엘로는 피렌체의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새로운 차원을 확립시키는 것을 보며 그것을 배우기로 했다. 그는 레오나르도와 같은 광범위한 지식도 없었으며 미켈란젤로처럼 정력도 없었다. 그러나 앞의 두 사람이 매우 다루기 어려운 천재들임에 반해,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라파엘로는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두 거장을 따라잡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다.

 

28. 미켈란젤로의 조물주가 신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것처럼, 라파엘로의 성모상 역시 그러하다.

[도판 203] 라파엘로, <대공의 성모>, 1505년경. 목판에 유채. 84x55cm, 피렌체 피티 궁

이러한 호소력을 가진 작품은 언뜻 ‘알기 쉬운’ 작품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예술가의 고민이 들어있다. 완전함의 기준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점에서 진실로 ‘고전적’이다. 동일한 테마를 다룬 다른 작품들을 보았을 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단순함’은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인물 유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게 해주지만, 그의 그림에서 충만한 생명력은 페루지노의 공허함과 규칙성과는 큰 차이가 있다.

 

29. 라파엘로는 수년간 피렌체에 머문 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화에 착수하였을 1508년경에 로마로 갔다. 그는 교황에게 바티칸 궁 안의 스탄차(stanza)안의 벽면을 장식하는 일을 받게 되었다. 이 벽과 천장을 장식하는 프레스코는 완전한 디자인과 균형잡힌 구성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특히 전체적 짜임새의 조화와 다양성이 돋보이는데, 이는 이 그림의 축소된 도판이나 세부도판으로는 전체적 구성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반증한다.

 

30. 그러나 라파엘로가 그린 보다 작은 프레스코인 <요정 갈라테아>에서는 그림의 어느 곳을 보아도 세부적 구성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도판 204] 라파엘로, <요정 갈라테아>, 1512-14년경. 프레스코, 295x225cm, 로마 빌라 파르네지나의 벽화

[도판 205] 도판 204의 세부

이 그림은 돌고래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파도 위를 달리는 갈라테아와 그 주위로 모여드는 바다의 신과 요정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풍요롭고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구성을 가지고 있다. 각 인물상은 서로 다른 인물상과 대응하며 움직임 역시 상반되는 움직임과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파엘로는 그림이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배치와 구도는 그를 후대의 미술가들로부터 찬양받도록 하였고,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묘사에서 그 경지를 인정받은 것과 같이, 라파엘로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31.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 않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그가 <요정 갈라테아>를 완성했을 때 그는 어떤 특정 모델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정도 포기한 대신 상상한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전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미술가들은 과거의 과정과 반대로 상상에 의한 아름다움의 이념에 따라 자연을 수정시키려 노력했다. 미술가들이 의도적으로 자연을 ‘개량(이상화)’하려 한다면 그의 작품이 틀에 박힌 것이 되기 십상이나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생명력과 성실성을 잃지 않고도 개량(이상화)’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 라파엘로의 명성이 수세기 동안 남아있는 것은 이러한 업적 때문이다. 그는 회화 작업 외에도 브라만테의 사망 후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맡았다. 경쟁자인 미켈란젤로와는 다르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덕에 분주한 공방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었다.

[도판 206] 라파엘로,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1518년, 목판에 유채, 154x119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33.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정복 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16장 빛과 색채 -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1. 베네치아는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들보다 르네상스 양식을 늦게 받아들였지만,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경쾌함과 따뜻함이 더해져서 헬레니즘 도시의 장대함을 연상시켰다.

[도판 207] 야코프 산소비노, <산 마르코 대성당의 도서관>, 1536년. 전성기 르네상스의 건물, 베네치아

이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건물 중 피렌체 출신의 야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1486-1570)가 지은 산 마르코 성당의 도서관이 있다. 이 건물은 베네치아의 밝은 빛에 어울리는 양식과 작풍을 보여준다. 산소비노는 콜로세움의 건축 법칙을 많이 따르고 있는데, 건물 아래층은 도리아 식 원주를 사용하였고, 위층은 이오니아 식으로 꾸몄으며 난간을 얹고 그 위에는 아티카(attica: 건축에서 조각상들을 놓는 대좌 구실을 함)를 갖추어 놓았다. 그는 콜로세움과 달리 아치를 기둥 위로 올리지 않고 기둥들 사이에 한 쌍의 작은 이오니아 식 원주로 받치게 하여 풍요로운 효과를 자아냈고, 난간과 꽃 장식과 조각상들을 이용하여 고딕 시대의 베네치아 건축 정면(도판 138)의 트레이서리를 연상시키는 외관을 만들었다.

 

2. 이 건물은 친퀘첸토의 베네치아 미술 특유의 취향을 보여준다. 밝은 빛 속에 색채가 뒤섞이게 하는 환초로 가득한 해변의 분위기나 콘스탄티노플의 모자이크 장인들과의 교류는 이 도시의 화가들로 하여금 신중하고 민감하게 색채를 사용하게 한 것 같다. 피렌체의 화가들이 정확한 소묘와 원근법, 구도 등으로 그림의 통일된 구성을 만들었다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진정한 색채에 대한 관심으로 그러한 구성을 하였다.

[도판 208] 조반니 벨리니, <성모와 성인들>, 1505년. 제단화, 목판에 유채, 캔버스에 모사, 402x273cm, 베네치아, 산 차카리아 성당  

베네치아의 조반니 벨리니(1431?-1516)가 말년에 그린 그림을 보면 가장 먼저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 단순한 대칭적 구도 속에 색채로 생명을 불어 넣었으며 수 많은 성모상과 다른 품위와 차분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성함과 위엄을 손상 시키지 않고 페루지노(도판 202)와 달리 인물의 개성을 살렸다.

 

3. 조반니 벨리니는 베로키오,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등과 같은 시대에 속해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 세대의 제자와 추종자들은 친퀘첸토의 유명한 거장들이었다. 조반니 벨리니 역시 친퀘첸토의 베네치아 거장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를 배출했다. 중부 이탈리아의 고전기 화가들이 구성과 구도로 그림에 있어 조화를 중요시 여겼다면 이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와 빛을 통해 통일성을 부여했다. 조르조네는 이 능력에서 가장 혁명적이었다. 이 화가의 작품은 5점 밖에 전해지지 않으며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대표작 폭풍우 [도판 209]가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질 만한 역사적 근거가 많지 않으나 당시 그리스의 시인들이 쫓던 매력에 매료되어 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도판 209] 조르조네, <폭풍우>, 1508년경. 캔버스에 유채, 82x73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하지만 이 그림이 미술사에서 갖는 의미는 내용 뿐만 아니라 그림 자체의 표현에 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빛과 공기의 공간 표현을 통해 각각의 묘사들은 전체를 아우른다. 그리고 풍경이 단순한 배경을 넘어 그림의 진정한 주제로 자리잡는다. 이 그림을 필두로 회화의 의미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을 획득했다.

 

4. 하지만 조르조네는 단명했고 이 위대한 업적을 이은 것은 티치아노였다. 흑사병으로 죽게 되던 나이가 99세라는 설도 전해진다. 티치아노의 물감 다루는 솜씨는 미켈란젤로의 소묘 솜씨에 필적할 정도였고 이러한 재능은 자신으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무시할 수 있게 했으며 파괴성을 내포한 통일성을 위해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도판 210의 <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에서 전대에 표현되던 성화들의 구도와 성인들을 표현한 자세가 완전히 깨진 것을 알 수 있다.

[도판 210] 티치아노, <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 1519-26년. 제단화, 캔버스에 유채, 478x266cm,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데이 프라리 성당

[도판 211] 도판 210의 세부

전통적 구도와 표현된 자세의 파격적 변화는 그림을 생기있고 활기차게 만들어주었으며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공기와 색채로써 이 장면들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했다.

 

5. 티치아노가 당대에 그처럼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그 이전의 것들과 비교 할 때 그것은 단순하고 힘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세밀한 묘사나 입체감은 그리 눈에 띄지 않지만 이름 모를 영국 젊은이의 인상을 강렬하게 담아 놓았다.

[도판 212] 티치아노, <한 남자의 초상, 일명 ‘젊은 영국인’>, 1540-5년경. 캔버스에 유채, 111x93cm, 피렌체 피티 궁

[도판 213] 도판 212의 세부

 

6. 권력자들이 이 거장에게 초상화를 그려받는 영광을 얻기 위해 경쟁 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그가 사실적 재현에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판 214] 티치아노, <교황 바오로 3세와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그의 동생 오타비오 파르네세>, 1546년. 캔버스에 유채, 200x173cm 나폴리 카포디몬테 박물관

 

7. 베네치아와 같은 중심 도시 외에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파르마에서도 미술가들의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혁신적이었던 화가, 코레조(Correggio, 안토니오 알레그리(Antonio Allegri)는 완전히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명암법을 구사하였다. 그의 대표작을 그린 시기의 미술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는 아마 북부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들에서 레오나르도 제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명암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8. 예수의 탄생을 그린 <거룩한 밤>(도판215)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빛을 발하고 있으며 그 빛은 행복한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다.

[도판 215] 코레조, <거룩한 밤>, 1530년경. 목판에 유채, 256x188cm, 드레스텐 고미술 갤러리

 

9. 다소 기교가 없고 우연하게 보이는 이 배치는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던져진 강한 빛에 의해 그림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코레조는 색과 빛으로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이의 시선을 유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가 했던 것 보다 더욱 잘 활용하였다.

 

10. 코레조의 활동 이후에 활동한 화가들은 수세기 동안 코레조의 교회의 천장과 둥근 지붕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반복해서 모방했다. 빛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능숙한 기술을 이용하여 코레조는 신도들에게 천장이 열려 있으며 그 열린 천장을 통해 하늘의 영광을 곧장 바라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도판 216] 코레조, <성모의 승천 : 파르마 대성당의 천장화를 위한 습작>, 1526년경. 종이에 빨간색 분필, 27.8x23.8cm, 런던 대영 박물관

[도판 217] 코레조, <성모의 승천>, 프레스코, 파르마 대성당의 둥근 천창

이 프레스코는 긴 세월을 흐르는 동안 많은 손상을 입었으나 이 프레스코 화를 위한 예비 그림으로 그린 일부 소묘가 전해지고 있다. 이 소묘를 통해 코레조가 단지 몇 번의 분필 자국만으로 넘쳐 흐르는 빛을 암시할 수 있는 단순한 회화 수단을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 - 16세기 초: 독일과 네덜란드

 

1.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위대한 업적들과 창안들은 알프스 북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고딕양식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위대하지만 남유럽의 미술을 접한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의 것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현상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대한 업적이라 부를 수 있었던 세가지는 과학적 원근법, 해부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고전 시대 건축 형식에 대한 것이었다.

 

2. 이 새로운  지식의 충격에 대해서 유럽의 여러 미술가들과 미술 전통이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그들 나름의 개성의 힘과 상상력의 폭에 따라 어떻게 자기를 내세웠는지, 혹은 흔히 있었듯이 어떻게 굴복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건축가들의 입장에서 고딕 양식과 고대 건축 양식은 모두 이론상으로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것이었지만 그 목적과 정신은 크게 달랐고, 결국 새로운 유행이 들어오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돌아온 주문자들의 새로운 유행에 대한 요구에 대해 건축가들은 그들이 가지는 특성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성을 가미하는 형식으로 대응했다.

[도판 218] 피에르 소이예, <캉의 성 피에르 성당 성가대석>, 1518-45년. 변형된 고딕 양식

[도판 219] 얀 발로트와 크리스티안 지크스데니에르스, <브뤼주의 구 관청(재판소 서기과)> 1535-7년. 북유럽의 르네상스 건물

 

3. 그러나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상당히 달랐다. 그들의 경우에는 건축가들의 경우와 같이 선택적으로 부분을 받아들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 1471~1528)의 작품을 통해 미술의 새로운 원칙을 이해하고 그 원칙의 유용성을 받아들이는 극적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4.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 – 1528)는 헝가리에서 이주해 뉘른베르크에 정착했던 유명한 금세공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가 운영하는 이 지역의 가장 큰 제단화, 목판화 삽화 공방에서 수습기간을 보낸 뒤, 당시 장인들의 관례에 따라 여행을 떠났다. 콜마르, 바젤, 북부 이탈리아, 만테냐를 거쳐 공방을 열기 위해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유럽의 미술가가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적 성과들을 완전히 소화한 상태였다. 그의 초기 걸작 가운데 하나는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대형 목판화였다. 그것은 즉각 성공을 거뒀다. 최후의 심판의 공포와 그에 앞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의 광경이 이처럼 강하게 시각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뒤러와 이 요한계시록의 무시무시한 환영들은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도판 220] 알브레히트 뒤러,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1498년, 목판화, 39.2x28.3cm

도판은 요한계시록 12장 7절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5. 그 때 하늘에서는 전쟁이 터졌습니다. 천사 미가엘이 자기 부하 천사들을 거느리고 그 용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 용은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지만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그들이 발붙일 자리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요한 계시록 12장 7절)

 

6. 이 한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적과 싸우는 영웅을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는 대신, 뒤러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용의 목을 찌르려는 성 미가엘의 힘판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도록 했다. 한 무리의 천사들도 검사나 궁사로서 끔찍스러운 모습의 괴물과 싸우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7. 뒤러는 고딕 미술가들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증명하여 보였지만, 그의 목적은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었다.

[도판 221] 알브레히트 뒤러, <풀밭>, 1503년, 수채화 습작, 종이에 펜과 잉크 및 연필과 담채, 40.3x31.1cm, 빈 알베르티나

뒤러는 자연을 모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 노력하였는데 이는 유화와 동판, 목판화로 삽화를 그렸던 성경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도판 222] 알브레히트 뒤러, <예수 탄생>, 1504년, 인그레이빙, 18.5x12cm

1504년에 완성된 <예수탄생>에서 뒤로는 숀가우어와 같은 테마를 선택하였으나 그는 낡은 농가의 표현에 큰 노력을 쏟았다. 그 낡은 건물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인물들은 작고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초라한 방문객과 더불어 버려진 농가의 앞마당은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뒤러는 이러한 동판화에서 미술이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기 시작한 이래로 고딕 미술의 발전을 총합하고 완성시킨 것 같이 보인다.

 

8. 미술의 새로운 관심으로 부상한 새로운 목적은 고전 미술이 부여한 이상적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이었다. 뒤러는 묘사만으로는 아름다움을 창조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체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법칙을 찾아 인체의 아름다움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하여 인간의 체격을 일부러 왜곡시키는 실험들을 통하여 결국,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를 제작하였다. 그는 이 작품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의 라틴어 이름을 서명하였다.

[도판 223]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이브>, 1504년. 인그레이빙, 24.8x19.2cm

 

9. 이 작품 속에서 그가 균형을 맞추어 만들어낸 조화로운 형태들은 이탈리아나 고전 작품의 모델만큼 신빙성이 있거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두 인물의 형태와 자세, 대칭적인 구도도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작품 속 세세히 묘사되어 있는 작가의 장치들을 살펴보면 그가 어두운 배경에서 희고 섬세히 모델링한 인체의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도 노력한 의도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남유럽 미술의 이상을 북유럽에 최조로 구현한 그의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10. 그러나 뒤러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 작품을 제작한 후 더 배우기 위해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11. 내게는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 (인용구)

 

12. 이것은 뒤러가 베네치아에서 보낸 편지 중 하나로 뉘른베르크 길드 조직의 엄격한 질서 속의 미술가로서의 그의 입장과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누리는 자유에 대한 대조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점점 퍼져나갔고 미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막시밀리엥 황제가 그를 고용한 이후, 그가 네덜란드에 방문하였을 때 그는 왕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는 북유럽의 나라들에서도 위대한 미술가들은 그들이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던 속물 근성에서 벗어나 인정 받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3. 위대함과 예술적 기량에 있어서 뒤러와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화가는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다(그의 이름은 확실하지 않다). 17세기의 요아힘 폰 잔드라르트(Joachim von Sandrart)는 그를 독일의 ‘코레조’라 부르며 그의 작품 몇 점을 언급하며 매우 칭찬했는데, 그로부터 이름이 ‘그뤼네발트’라는 라벨이 붙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문서에서 그뤼네발트라는 이름이 언급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거장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그림들 중 일부에 M.G.N 이라는 약자를 통해 뒤러와 동시대에 살았던 마티스 고트하르트 니트하르트(Mathis Gothardt Nithardt)가 그의 진짜 이름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의 우리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뒤러는 그의 습관, 취향 등까지도 매우 친숙하게 알려진 살아있는 사람인 양 느껴지지만, 그뤼네발트는 셰익스피어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이다. 우리가 뒤러를 잘 아는  이유는그가 자신을 자기 나라의 미술을 개혁하고 쇄신한 사람으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한 것을 기록했다. 반면 그뤼네발트는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몇 점 안되는 그의 작품들은 지방의 교회에 있는 전통적인 형식의 제단화이며 그중에는 통칭 이젠하임 제단화도 여기에 속한다.

[도판 224] 통칭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1515년. 이젠하임 제단화의 부분, 목판에 유채, 269x307cm, 콜마르 운터린덴 박물관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을 활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종교의 설교를 제공해주고 교회가 가르쳐 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패널(도판 224)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켰음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구세주의 참혹한 모습은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볼 수 없으며, 수난절의 설교자처럼 이 고통스러운 장면의 무서움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의 도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그 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야 한다”.

 

14. 여기서 이 미술가는 제단을 바라보는 신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할 있도록 성 요한이 손을 들어 가리키게 하여 그 말씀을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근대 미술의 법칙을 거부하고 인물의 중요성에 따라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이전으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제단화의 영적인 의미를 위해서 미적 표현을 희생시켰듯이 그는 또한 정확한 비례에 관한 새로운 요구를 도외시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그로 하여금 성 요한의 말씀에 담긴 신비로운 진리를 더 잘 표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5. 그뤼네발트의 작품은 ‘진보적’이 아니더라도 위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진정 예술의 위대성은 새로운 발견에 있지 않다. 그뤼네발트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나 이 새로운 발견들을 채용해서 그가 이 새로운 기법들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도판 225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예수의 고통받는 신체를 묘사하는 것 대신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의 빛을 가진 초자연적인 형상으로 변용되는 것을 전달했다.

[도판 225] 통칭 ‘그뤼네발트’ <그리스도의 부활>, 1515년. 이젠하임 제단화의 부분, 목판에 유채, 269x143cm, 콜마르 운터린넨 박물관

이 그림은 그리스도가 휘황찬란한 빛을 남기고 무덤에서 막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활한 예수와 갑작스러운 빛의 환영에 압도되어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군인들의 무기력한 몸짓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보이며 군인들이 갑옷을 입은 채 몸부림치는 광경은 충격적이다. 꼬꾸라진 인형처럼 보이는 군인들의 일그러진 형상들은 예수의 변용된 신체의 조용하고 장엄하며 평온한 모습을 부각시키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16. 독일의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 ~ 1553)는 알프스 남부 출신의 조르조네가 산악의 풍경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알프스 북부에 매혹되어 있었다. 1504년에 그는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聖) 가족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성가족은 울창한 숲의 한 샘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성모의 주위에 모인 천사들의 사랑스러운 행동은 피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다. 이 시적인 새로운 구성은 로흐너의 서정적인 미술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도판 226] 루카스 크라나흐, <이집트로 피난 중의 휴식>, 1504년. 목판에 유채, 70.7x50.3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회화관

 

17. 크라나흐는 만년에 입센의 궁정화가가 되었는데 마르틴 루터와의 친분에 힘입어 명성을 얻었다. 그가 도나우 지방에 잠시 머물러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프스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눈을 뜨이게 할 수 있었다. 레겐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경 ~ 1538)는 산 속의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도판 227]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풍경>, 1526-8년경. 목판에 붙인 양피지에 유채, 30x22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그가 남긴 몇 점의 작품에는 인물은 없으며 이것은 대단한 변화이다. 자연을 사랑한 그리스인들조차 목가적 풍경을 위한 배경으로서만 풍경화를 그렸다. 중세에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서사구조가 없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 화가의 묘사력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화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는 그림을 팔 수가 있었다.

 

18.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옛날 방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도판 228] 통칭 ‘마뷰즈’ <성모를 그리고 있는 성 루가>, 1515년경. 목판에 유채, 230x205cm, 프라하 국립 미술관

마뷰즈가 인물들을 그린 방식과 그 배경을 그린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업적에 관한 그의 지식과 과학적인 원근법에 대한 능숙한 솜씨, 그리고 고전기의 건축에 대한 조예와 능숙한 명암 처리방법 등을 과시하려 한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도판 228은 대단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조화미는 결여 되어있다.

 

19. 16세기 네덜란드의 가장 위대한 미술가는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미술가들이 아니라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한 미술가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발전되어 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도판 229-230] 히에로니무스 보스 <천국과 지옥>, 1510년경. 세폭화의 양날개 패널화. 목판에 유채, 135x45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 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 주었고 반면에 구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18장  미술의 위기 - 16세기 후반: 유럽

 

1. 1520년경의 이탈리아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 되었다고 여겼던 것으로 간주 되며 미켈란젤로, 다빈치, 티치아노, 라파엘로 등은 전대가 이상으로 삼았던 것들을 실현시켰다. 더이상 회화에 있어 어려움은 없었다고 판단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들은 당시 미술가를 꿈꾸는 이에게 ‘미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인지’에 대한 의문이라는 일종의 반감을 제시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의문으로 삼지 않고 미켈란젤로의 수법적 미술을 무분별하게 모방하여 작품에 투사했고 이러한 유행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를 매너리즘 시대라 칭했다. 그렇지만 많은 미술가들이 완성된듯 여겨지는 미술 이후의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실질적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해 실험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의 실험은 해박한 지식에 기반하거나 기괴해서 해석하기 복잡하기만 한 것들로 흘러갔으며 전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를 비롯한 동시기의 미술가들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반증한다. 특히나 미켈란젤로는 관습적 틀들을 무시하고 파격적 개성을 선보인 적이 많았는데 이는 표현의 새로운 수법과 양상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천재의 본보기라 할 수 있었다.

 

2. 미켈란젤로의 선례 덕에 젊은 미술가들은 자신만의 독창성으로 대중을 놀라게 해도 무방하다고 여겼고 이로 인해 페데리코 추카리의 <로마의 추카리 궁의 창문>과 같이 기발한 디자인도 생겨났다.

[도판 231] 페데리코 추카리, <로마의 추카리 궁의 창문>, 1592년

 

3. 또 다른 건축가들은 그들의 박식과 지식의 과시에 열을 올렸으며 이 중 가장 뛰어나고 박학다식 했던 건축가는 안드레아 팔라디오 였다.

[도판 232] 안드레아 팔라디오, <베첸차 부근의 빌라 로톤다>, 1550년.

<베첸차 부근의 빌라 로톤다>와 같이 기발한 건축을 했는데 사면이 동일하면서 동시에 신전의 정면 형태를 가지고 있다만 실질적으로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해 보인다. 기발함과 인상적 효과에의 매진이 건축의 목적 상실을 야기했다.

 

4.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술가는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 1500-71)였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그 시대의 생활상에 관한 생생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는데, 그에게 있어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존경받고 점잖은 공방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나 추기경들이 다투어서 그의 호의를 구하고자 하는 미술의 ‘대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도판 233] 벤베누토 첼리니, <소금그릇>,1543년, 흑단 바탕 위에 금과 칠보 세공, 길이 33.5cm, 빈 미술사 박물관

땅과 바다가 서로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인물상의 다리가 서로 맞물리게 했으며,  각각의 상징에 따라 정교한 장식을 했다. 이 매끈하고 우아한 인물 모습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고 장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첼리니의 태도는 그전 세대가 했던 것보다 더 흥미있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정신을 코레조의 제자였던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1503-40)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판234]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마돈나>, 1534-40년, 화가의 죽음으로 미완성, 목판에 유채, 216x132cm, 피렌체 우피치

이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길게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여진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자니노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6. 전시대 거인들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는 이 기묘한 시대의 기타 다른 미술가들은 평범한 수준의 기량과 솜씨에 만족했다. 그들중에도 몇몇 가지는 충분히 놀랄만한 것이었는데, 조반니 다 볼로냐 (Giovanni da Bologna) 혹은 잠볼로냐(Giambologna)라고 알려진 플랑드르의 조각가 장 드 불로뉴(Jean de Bologne :1529-1608)가 제작한 조각이다.

[도판 235] 잠볼로냐, <머큐리상>, 1580년, 청동, 높이 187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그는 여기서 생명이 없는 물체의 무게를 극복하고 공중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의 조각상을 창조하려 했다.고전기의 조각가라면 이런 효과는 본래의 재료 덩어리를 생각나게하기 마련인 조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나, 잠볼로냐는 기존의 규칙에 도전해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보여주고자 했다.

 

7.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틴토레토(Tintoretto)였다. 그는 티치아노의 형태와 색채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티치아노의 작품은 성경이나 성자들의 전설을 생생히 느끼게 할 정도로 열정적인 것이 아니라 생각하였다. 그는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그리려 하였다. 그의 그림 도판 236은 얼핏 혼란스럽고 번잡하지만 비범하고 매력적이다.

[도판 236] 틴토레토,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1562년경, 캔버스에 유채, 405x405cm,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이 그림은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한것이다. 틴토레토는 성인의 유해를 꺼내었을 때 성마르코가 갑자기 현현한 순간을 선택하였다.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과 근경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은 아주 기묘한 분위기와 충격을 자아낸다. 틴토레토는 기적의 인상을 창조하기 위해 원숙한 색채의 아름다움을 희생하였다. 도판 237은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긴장감과 흥분된 감정을 고무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 규칙과는 정반대로 주인공인 성게오르기우스가 주된 인물임에도 불구, 배경 속에 멀리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도판 237] 틴토레토,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1555-8년경, 캔버스에 유채, 157.5x100.3cm, 런던 국립 미술관

 

8. 피렌체의 비평가이자 전기 작가인 바사리(Giorgio Vasari)는 틴토레토에 대해 “만약 그가 정통적 방법을 버리지 않고 선배들의 아름다운 양식을 따랐다면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틴토레토가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점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예술의 위대한 혁신자들은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통상적인 기법적 완성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하고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려 하였다. 오히려 기법적 트릭은 보는 사람의 주의를 그림 속 사건에서 다른 데로 돌릴 수 있기에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었던 것이다.

 

9.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El Greco)는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16세기의 화가 중 하나이다. 그 역시 틴토레토처럼 격정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스페인 톨레도(Toledo)에 정착했다. 이 시기의 스페인에는 아직 미술에 관한 중세 이념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자연스럽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자연적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극적인 환상을 창조하는데 있어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도판 238] 엘 그레코, <요한 묵시록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1608-14년경. 캔버스에 유채, 224.5x192.8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도판 238은 요한 계시록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놀랍고 흥미로운 것 중 하나이다.

 

10. 다음은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 양이 성 요한을 불러 일곱 개의 봉인을 떼는 것을 ‘와서 보라’는 대목 중의 한 부분(6장 9-``절)이다.

 

11. [인용]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나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에...

 

12. 정확한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일의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틴토레토의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에서 엘 그레코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또 그가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스페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신비스런 종교적 열정의 나라였으며 이 분위기에서 매너리즘 미술은 엘 그레코의 손을 거쳐 감식가를 위한 미술로서의 특징을 대부분 상실한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바사리가 틴토레토의 작품에 대해 표시했던 종류의 반감을 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작업실은 항상 분주했으며, 따라서 많은 조수들을 고용했던 것 같다.

[도판 239] 엘 그레코, <펠릭스 오르텐시오 파라비시노 수사>, 1609년. 캔버스에 유채, 113x86cm, 보스턴 미술관

한 세대 후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기분 나쁜 농담 같은 것으로 간주하며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와 색채를 비판했다. 엘 그레코 미술의 재발견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13. 북쪽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을 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의 존속이라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히고 있었다. 이 위기는 종교개혁에서 비롯했다. 신교도들은 구교도들의 신이나 성인 등이 그려진 그림이나 조각들을 봉헌하는 것을 우상숭배라 여겼다. 그래서 신교 지역의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칼뱅 강경파들은 심지어 집안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사치라 반대하였다. 이런 것이 교리 상 허용된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기후와 건물의 영식이 이탈리아 귀족들이 그들의 궁전에 그리게 했던 대규모의 프레스코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화가들에게 남게 된 것은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14. 이 위기의 영향을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 ~ 1543)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홀바인은 부유한 상업 도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였던 바젤로 갔다.

 

15. 홀바인은 뒤러가 추구했던 지식을 좀 더 쉽게 습득했다. 홀바인은 화가 집안출신인데다가 매우 재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성과를 흡수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서른 살쯤 바젤의 시장(市長) 이름으로 봉헌된 제단화 도판240<성모 상>을 그렸다.

[도판 240] 소(小) 한스 홀바인, <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 1528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146.5x102cm, 다름슈타트 성(城) 미술관

이 그림의 형식은 모든 나라에 전통적인 것으로서, 이미 <윌튼 두폭화>, <페사로의 성모>에 적용된 것을 보았다. 홀바인의 그림은 이 중 가장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전적 형태의 감실의 배열은 르네상스 시대의 벨리니와 미켈란젤로의 구성을 상기 시킨다. 세부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 편 인습적인 미를 다소 무시한 것으로 보아,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어권에서 정상에 있던 그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그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추천으로 스위스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친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통해 이렇게 썼다. “여기서는 예술이 얼어 죽어가고 있소.”

[도판 241] 소(小) 한스 홀바인, <토머스 모어 경의 며느리, 앤 크레사크리>, 1528년. 소묘, 종이에 분필, 37.9x26.9cm, 윈저 궁 왕립 도서관

영국에 도착한 홀바인은 토머스 모어 경의 일족의 대형 초상화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영국에 정착한 후 궁정 화가의 직함을 얻었고, 그는 더 이상 성모(聖母)상을 그릴 수는 없지만 궁정 화가의 일은 매우 다양했다. 그는 보석, 가구, 무기나 술잔 등도 디자인했다. 그러나 주된 임무는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도판242<리처드 사우스웰 경>은 헨리8세의 신하로 수도원을 해체했던 관리를 그린 것이다.

[도판 242] 소(小) 한스 홀바인, <리처드 사우스웰 경>, 1536년. 목판에 유채, 47.5x38cm, 피렌체 우피치

홀바인의 이러한 초상화는 드라마틱한 것은 없으나 그들의 인품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해 본대로 충실하게 그린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체 구성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알기 쉽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의도한 점이다.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 했으며 세부묘사를 과시하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완숙기에는 그러한 트릭이 그다지 필요 없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으며 또 초상인물들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 돌리게 의도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러한 절제 때문이다.

[도판 243] 한스 홀바인, <런던의 한 독일 상인 게오르크 기체>, 1532년. 목판에 유채, 96.3x83.7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회화관

 

16. 홀바인이 떠나자 독일어권은 쇠퇴하게 되는데, 그가 죽자 영국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사실상 영국 회화가 종교개혁의 회오리를 견뎌낸 것은 초상화분야 뿐이었다. 이 분야에서조차 매너리즘 취향이 나타나고 홀바인 풍의 간결한 양식 대신 귀족적인 세련미와 우아함이 이상화 되었다.

 

17. 엘리자베스 시대의 젊은 귀족의 초상화 <도판 244>는 새로운 유형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

[도판 244] 니콜라스 힐리어드, <들장미 곁의 젊은이>, 1587년경. 양피지에 수채와 구아슈, 13.6x7.3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그림 안에 ‘고귀한 사랑이 괴로움을 가져온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세밀화는 청년이 구애를 하고 있는 숙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그린 그림 같다. 이 시대의 젊은 멋쟁이 라면 사랑의 슬픔과 짝사랑을 과장해서 표시하게 되어있었다. 우아하고 멋진 장난으로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모두들 색다르게 변형시키거나 세련되게 만들어 자신을 뽐내고 싶어했다.

 

18. 만약 힐리어드의 세밀화가 장난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본다면 가식적이고 어색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선물을 받은 처녀가 거기에 그려진 멋있고 우아한 구애자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마침내 그의 ‘고귀한 사랑’ 을 받아 들이게 되기를 바라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자.

 

19.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 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오래 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전문적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특히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데 있어 엄청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주제를 어떤 종목 또는 부분으로 한정해서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뒤에 가서 ‘풍속화(genre pain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

 

20. 16세기 플랑드르에서 가장 유명한 풍속화가는 피터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이었다. 그는 1560년대에 안트웨르펜과 브뤼셀에서 그의 대부분의 그림을 그렸다.

[도판 245] 피터 브뢰헬(父), <화가와 고객>, 1565년경. 갈색 종이에 펜과 검정 잉크, 25x21.6cm,  빈 알베르티나

그도 뒤러나 첼리니처럼 미술과 미술가의 존엄성을 중요시 하였다.알바 공과 화가를 그린 도판245를 보면 의연한 화가와 지갑을 만지작 거리는 두 인물의 대조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21. 브뢰헬은 주로 농민의 생활 장면을 그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플랑드르의 농부 출신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범하기 쉬운 실수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브뢰헬이 농부였다면 그는 농부들을 다르게 그렸을 것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비슷한 태도를 지녔었다. 셰익스피어에 있어 목수 퀸스와 직조공 보텀은 일종의 ‘어릿광대’였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나 브뢰헬이 그들을 소재로 다룬 것은 속물 근성에 의해 우스갯거리로 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보이고자 하층민의 생활을 다루었다.

 

22. 도판 246은 시골의 결혼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브뢰헬이 그린 인간 희극들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

[도판 246] 피터 브뢰헬(父), <시골의 결혼 잔치>, 1568년경. 목판에 유채, 114x164cm, 빈 미술사 박물관

[도판 247] 도판 246의 부분

이 그림은 모든 세부를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한 화면 안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훌륭한 솜씨와 관찰력으로 묘사된 많은 일화보다 놀라운 것은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구성했다는 점이다.

 

23.결코 단순하지 않은 유쾌한 그림을 통해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이를 더 완벽하게 개척해 나갔다.

 

24.이탈리아와 북유럽 나라들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받으며 다른 방향으로 미술의 위기를 전개해 나갔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으나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프랑스의 상류 계급은 결국 이탈리아 양식 중 첼리니 유형(도판 223)의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리즘 양식이었다. 장 구종(Jean Goujon)의 분수 부조에서 이러한 영향을 볼 수 있다.

[도판 248] 장 구종, <님프>, <순진무구한 자들의 샘>의 부분, 1547-9년. 대리석, 각각 240x63cm, 파리, 프랑스 국립기념물 박물관

 

25. 구종보다 한 세대 뒤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들의 기발한 발상을 브뢰헬의 정신으로 동판화를 제작한 자크 칼로(Jacques Callot)가 등장했다. 그는 엘 그레코처럼 마른 인물과 예기치 않은 광경을 결합시키는 것을 즐겼다. 그는 이 수법으로 부랑자, 군인, 병신, 거지, 떠돌이 악사들의 생활 정경을 묘사하여 인간의 어리석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도판 249] 자크 칼로, <두 이탈리아 광대>, 1622년경. 동판화 연작 <스페사니아의 춤(Balli di Sfessania)>의 부분

칼로가 이러한 광상적 작품을 통해 인기를 얻을 무렵,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로마, 안트웨르펜, 마드리드 작업실에서 화젯거리가 되었던 새로운 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 - 17세기 전반기: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1. 미술의 역사는 흔히 다양한 양식들의 역사, 즉 여러 양식들이 계승되고 발전 되어지는 이야기로 설명 될 때가 많다.

시기별 양식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왔다. 르네상스시대의 뒤를 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바로크 이전의 양식들은 그 특이점들을 기준으로 구분이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르네상스 이후 오늘날까지 건축가들은 고전 양식에서 빌려온 기본 형태들을 사용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르네상스의 건축양식이 부르넬리스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말 할 수도 있으며  이 기간 전체를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 에대한 취향과 유행은 오랜 기간 많은 변화를 거쳐왔으므로 개개의 구별을 위해 이름을 붙이는 것이 용이하다. 오늘날 불리워지는 각 양식들의 어원은 대부분 그 것에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크 역시 ‘기괴한’, ‘터무니 없는’ 따위의 뜻으로, 그리스 로마 이외의 고전 형식을 차용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며 당시 경향에 반감을 가진 후대의 비평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우리가 이러한 구별들을 완벽히 평가 할 수는 없다. 고전적 규칙을 무시하거나 오해한 것들에 대한 무감각함, 옛 논쟁들이 우리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판 250>과 같은 교회의 정면의 모양이 그다지 흥미로워 보이지 않지만 1571년 당시에는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

 

2. 유명한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 1541?~1602)가 설계한 <일 제수(Il Gesu)교회>의 정면 현관을 잘 살펴 보면 왜 그 정면이 내부 못지 않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틀림 없이 새롭고 독창적인 인상을 주었을지를 깨닫게 된다.

[도판 250] 자코모 델라 포르타, <로마의 일 제수 교회>, 1575-7년경. 초기 바로크 교회

우리는 이 건축물이 고전 건축의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시키는 방법에 로마와 그리스, 르네상스의 건축법들은 도외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요소들로 구성된 이전의 건축들과 비교해보면 전체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부르넬리스키, 브라만테, 산소비노의 건축들은 단순하고 경쾌하며 엄숙해 보이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이들의 건축은 기본 형태가 변화 없이 반복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건물의 일부만 보고 전체를 상상 할 수도 있다.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건축은 모든 부분이 전체의 효과를 위해 존재하고 그 질서를 위해 고전시대에 볼 수 없었던 소용돌이 형태를 취했다. 이러한 ‘변칙적’인 곡선과 소용돌이 형태는  바로크 건축가들이 공격받는 부분이었으나 이러한 부분들은 단순히 장식적인 것들이 아니라 건축의 구조적인 틀을 유지해주는 것이었고, 건축가가 의도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3.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우리는 틴토레토와 엘 그레코의 작품들 속에서 17세기의 회화에서 더 중요성을 띄게 되는 새로운 이념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빛과 색의 강조, 혹은 복잡한 구도를 선호 한다던가 하는 식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17세기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지속 시킨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상투적인 것들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미술의 동향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즐겼다. 그들의 관심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볼로냐 출신의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1609)와 밀라노의 작은 마을 출신인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1610)로 옮겨졌다. 이 두 화가 모두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방법은 서로 달랐다. 카라치는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의도를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도판 251)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양식과는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인 느낌이 강하다. 감상적이라 할 수 있으나 본래의 목적성 또한 잃지 않았다.

[도판 251] 안니발레 카라치,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 1599-1600년. 제단화, 캔버스에 유채, 156x149cm, 나폴리 카포디몬테 박물관

 

4. 카라치와 카라바조는 절친한 사이였으나 두 사람의 작품은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는 추한 것을 두려와 하지 않았고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을 원하였다. 그는 고전적인 규범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을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그의 작품을 많은 이들이 비판하였고 비평가들에 의해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받았다. 성 토마를 묘사한 그의 작품(도판 252)는 매우 파격적이다.

[도판 252] 카라바조, <의심하는 토마>, 1602-3년경, 캔버스에 유채, 107x146cm, 포츠담 장수시 궁 자선 시설

당시 사람들은 기존의 사도들을 묘사한 모습과 매우 다른 노동자과 같은 모습에 불경스러움을 느꼈을 것이지만, 그는 사도들이 실제 늙은 노동자, 평범한 사람이었음에 집중하였고 성 토마의 행동은 성경에 분명히 적혀 있는 대로 묘사하였다.

 

5.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자연을 풍실하게 모사하려는 의도는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는 조토와 뒤러와 같이 성경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리려 하였다. 진실되고 실감나는 표현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는 명암을 다룰 때 역시 이 의도에 충실하였다. 그의 빛은 깊은 어둠과의 대조를 만드는 거센 빛이다. 이는 이상한 장면을 타협없이 정직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점은 당대에는 비난받았으나 후대의 화가들에게는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6.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는 20세기에 들어 진가를 인정받았다. 이 두 사람은 당시에 큰 자극과 영향을 끼쳤으며, 이들이 작업하였던 로마는 당시의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미술가들은 로마의 여러 유파중 하나를 선택해 가담하려 하였고, 여기서 배운 바를 바탕으로 독자적 표현법을 개발했다. 또한 로마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신봉하는 국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회화 유산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유리한 곳이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귀도 레니(Guido Reni)일 것이다. 당시 그의 명성은 엄청났었는데, 도찬 253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도판 253] 귀도 레니, <오로라(새벽의 여신)>, 1614년, 프레스코, 약 280x700cm, 로마 팔라비치나 로스필리오시 궁 천장화

오로라와 전차를 타고 달리는 아폴론을 그린 이 그림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따라서 이 그림이 라파엘로의 파르네지나 궁의 프레스코를 상기 시켜주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비평가들이 레니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 이런 모방 때문이며, 이 모방이 레니의 작품이 순수한 미를 추구하는데 있어 너무 자의적이고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라파엘로 작품의 미적 감각과 평온한 느낌이 그의 성격과 예술관에서 비롯한 것인 반면, 레니의 화법선택은 일종의 원칙에서 였을 것으로 보인다. 미술은 미술가들이 여러 방법 중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할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레니가 그의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그의 기준에 벗어난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이상적 형태를 추구하는 그의 노력이 훌륭하게 이루어진 것을 찬미할 수 있다.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에 따라 자연을 이상화, 미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한 사람들은 카라치와 레니, 레니의 추종자들이었고 이를 신고전주의적(neo-classical), 또는 ‘아카데믹한(academic)’ 방침이라 부른다.

 

7.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랑스의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1594~1665)이었다.

그는 정열적으로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생겨난 유명 작품 중의 하나이다.

[도판 254] 니콜라 푸생,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1638-9년. 캔버스에 유채, 85x121cm, 파리 루브르

전체 구도는 단순해보이지만 그 단순함은 심오한 미술적 지식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그러한 지식만이 조용한 휴식의 회고적 정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8. 이와 동일한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사람은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 (Claude Lorrain : 1600~82)이었다. 그는 푸생처럼 자연의 사실적인 표현에 있어서 완벽한 기량을 그의 스케치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요소들을 적절히 묘사하며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이는 사람들의 경탄과 찬미를 불러일으킬 만하였다.

[도판 255] 클로드 로랭,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1622-3년. 캔버스에 유채, 174x220cm, 케임브리지셔 앵글시 사원

 

9. 북유럽 사람으로 카라치나 카라바조 시대의 로마를 접한 화가로 플랑드르의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ebens:1577-1640)가 있다. 그는 로마와 제노바, 만토바에서 심도있게 미술을 연구했으나 이탈리아 미술을 따르지만은 않았다. 그는 플랑드르의 전통에 따라 사물의 표면에 관심을 가졌고,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렸다. 그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움을 즐기게 해준다는 접근 방법 아래서 카라치와 카라바지오의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카라치가 전설과 신화를 그림의 주제로 그리는 것을 부활 시키고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감동적인 제단화를 구성한 방법을 높게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카라바조가 자연을 연구할 때 보인 성실성 또한 높이 평가했다.

 

10. 1608년에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왔을 때 루벤스는 31세로 이탈리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 알프스 이북에서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전의 플랑드르 화가들이 작은 그림만을 그린 반면 그는 거대한 화면을 선호하는 취향을 플랑드르에 도입했는데, 이는 당시의 고관 대작들과 군주들의 취향에 들어맞았다.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전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빛과 색채를 구사하는 기술을 공부했다.

[도판 256] 페터 파울 루벤스,<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대형 제단화를 위한 스케치, 1627-8년경. 대형 제단화를 위한 습작, 목판에 유채, 80.2x55.5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회화관

이 그림은 성인들에게 둘러싸인 성모를 그린 그림으로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전통적인 주제이다. 이 그림은 앞선 그림들보다도 움직임과 빛, 그리고 공간감에 있어서 뛰어나며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각각 인물들의 모습과 행동들은 하나같이 개성있게 그려져 있다.

 

11. 세부를 살펴보고 난 뒤에 화면을 전체적으로 보면 루벤스가 이처럼 많은 등장 인물들을 한데 묶고 또 축제와 같은 장엄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그에게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주문이 쇄도했는데, 그는 큰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주문을 받으면 도판 256과 같은 스케치만을 그릴 때가 많았다. 그림을 큰 화폭에 옮기는 일은 조수들이 하였고, 그들이 밑그림과 채색을 마치면 그제서야 루벤스가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가 손을 대면 그림은 곧 생기를 띠게 되었는데 이 것이 그의 예술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도판 257] 페터 파울 루벤스, <아이의 얼굴>, 루벤스의 딸 클라라 세레나로 추정, 1616년경. 목판에 붙인 캔버스에 유채, 33x26.3cm, 파두츠 리히텐슈타인 왕실 소장품

도판 257은 그러한 기량을 드러내는 간단한 소묘이다. 루벤스는 그 이전의 화가들의 위대하지만 어쩐지 실물과 거리가 멀고 비현실적인 인물과 비교하여 생기 발랄한 생명력의 인상을 만들어냈다. 루벤스는 대담하고 섬세한 빛의 효과를 그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붓질을 이용해 표현했다. 그의 그림은 더 이상 세심하게 입체감을 표현한 채색 소묘가 아니다. 그것은 소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화적인’ 수단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12. 루벤스에게 그 이전의 어떤 화가도 누려보지 못한  명성과 성공을 거두게 만든 것은 거대하고 다채로운 화면을 손 쉽게 구상하는 천부적인 솜씨와 그 속에 활기가 충만하게 떠돌 수 있게끔 하는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재간과의 조화에 있다. 그의 예술은 궁정과 귀족 계층의 사치, 권력을 미화하는 데에 적합했다. 당시 유럽은 30년 전쟁과 영국 내란, 구교와 절대 군주, 신교와 신흥 상업도시 세력의 대립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네델란드도 신/구교의 영향에 따라 둘로 나뉘어있었는데 루벤스는 카톨릭 진영의 화가로서 독자적인 지위에 올라있었다.

[도판 258] 페터 파울 루벤스, <자화상>, 1639년경. 캔버스에 유채, 109.5x85cm, 빈 미술사 박물관

그는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으로부터 많은 작품 의뢰를 받았으며 한 왕실의 궁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때로는 미묘한 외교적인 임무를 맡기도 했다.     

 

13. 우의화는 보통 다소 따분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는 그것이 사상을 표현하는 편리한 수단이 되었다. (도판 259)가 그런 것들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은 스페인과의 화평을 위해 영국왕 찰스 1세에게 가져간 것이다.

[도판 259] 페터 파울 루벤스,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 1629-30년. 캔버스에 유채, 203.5x258cm, 런던 국립 미술관

[도판 260] 도판 259의 부분

이 작품의 풍부한 묘사와 생생한 대조들은 맥 빠진 추상이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현실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적인 아룸다움, ‘이상화’는  그가 추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4. 루벤스의 유명한 많은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 1599~1641)이다. 그는 스승의 모든 기법적인 것들을 흡수 했으나 성격적인 측면에서는 스승과 매우 달랐다.  그의 다소 힘이 없고 우울한 분위기가 제노바의 귀족들과 영국 왕 찰스 1세, 왕당파 당원들의 마음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1632년 영국의 왕실화가가 되었고 그로부터 영국이 사회에 관한  그림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도판 261] 안토니 반 다이크, <영국 국왕 찰스 1세>, 1635년경. 캔벗으ㅔ 유채, 256x207cm, 파리 루브르

[도판 262] 안토니 반 다이크, <존 경과 버너드 스튜어트 경>, 1638년경. 캔버스에 유채, 237.5x146.1cm, 런던 국립 미술관

 

15. 루벤스는 스페인을 여러 번 여행하던 중에 젊은 화가를 만났는데 그는 루벤스의 제자인 반 다이크와 같은 나이이면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위를 누리고 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였다. 그는 이탈리아에 가 본 적은 없으나 모방작을 통해 알게 된 카라바조의 발견들과 수법에 커다란 감명을 받아, ‘자연주의'의 방침에 따라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히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도판 263] 디에고 벨라스케스, <세비야의 물장수>,1619-2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7x81 cm, 런던 앱슬리 하우스, 웰링턴 박물관

이는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재주를 과시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것과 같은 유형의 ‘풍속화'지만,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 토마>(도판 252)와 같이 강렬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려졌다.모든 것이 너무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는 이 그림 앞에서는 그 누구도 표현된 물건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이 장면이 중요한지 아닌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색채도 엄격히 말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아님에도 전체는 너무도 풍요롭고 원숙한 조화 속에 어울려있다.

 

16. 루벤스의 충고로 벨라스케스는 위대한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로마를 방문했다.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제외하고는 펠리페 4세의 궁정에서 유명하고 존경받는 화가로 지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왕과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매력적이거나 재미있는 얼굴을 가지지 않았으나, 그는 이들의 초상화들을 사상 유례 없는 가장 매혹적인 그림들로 바꾸어 놓았다.카라바조, 루벤스, 티치아노 등의 필법을 연구했으나, 자연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에는 ‘남에게 빌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판 264] 디에고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1649-50년, 캔버스에 유채, 140x120 cm,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에 대해 도전 의식을 가졌을 것이나, 광택의 표현법이나 표정을 포착한 붓질의 정확성에서 티치아노의 수법을 완전히 터득했음에도 잘 베껴낸 공식 같은 그림의 느낌은 전혀 나지 않는다.  사실 벨라스케스의 원숙한 작품들은 붓놀림의 효과와 색채의 섬세한 조화에 많이 의존하고 있어, 도판만으로는 원화의 정확한 느낌을 알 수 없다. 특히 그런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라스 메니나스>이다.

[도판 265] 도판 266의 세부

[도판 266] 디에고 벨라스케스, <라스 메니나스>, 1656년, 캔버스에 유채, 318x276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그림 안에는 벨라스케스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뒷벽의 거울을 통해 초상화를 그리도록 앉아 있는 왕과 왕비의 모습이 비춰져 있다. (도판 265)

 

17.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미 오래 전에 그가 현실의 한 순간을 포착했다고 상상하고 싶다.

 

18. 물론 벨라스케스는 그의 현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사건’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도판 267]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 1659년, 캔버스에 유채, 128.5 x 99.5 cm, 빈 미술사 박물관

이 작품은 당시 두 살이었던 왕자 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으로, 얼핏 보아서는 인상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것이나 원화에서는 여러 가지 농도의 붉은 색조가 배경 속으로 몰입되는 차가운 은빛 색조와 결함해 독특한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붉은 의자 위에 앉은 강아지와 같은 작은 모티프조차도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탁월한 솜씨를 드러내보인다. 여기서 벨라스케스는 개의 특징적인 인상만을 포착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레오나르도보다 한 층 더 남겨두고 있다. 19세기의 파리, 인상주의의 창시자들이 벨라스케스를 과거 어느 화가들보다 존경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19.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됐다. 유럽의 카톨릭 진영 혹은 신교도의 네덜란드 지역의 미술가들에게 이 점은 모두 같았으며, 그들은 이 새로운 임무에 열정을 쏟았다.



20장 자연의 거울 - 17세기: 네덜란드

 

1. 유럽이 구교와 신교로 나뉘자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늘 날에는 벨기에인 남부에는 구교의 영향이, 북쪽에는 가톨릭 군주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대부분이 신교도였다. 그들의 세계관은 영국의 청교도와 흡사하여 경건하고 소박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인들은 가톨릭 국가를 휩쓴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번영이 절정을 이루던 17세기 중엽, 시민들은 그들 국가의 자부심과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 시청사(市廳舍)를 짓기로 했다. 그들이 선택한 모델은 도판268<암스테르담의 궁전(전에는 시청)>으로 크고 당당하지만 소박한 건축양식이다.

[도판 268] 야콥 반 캄펜 설계, <암스테르담의 궁전(전에는 시청)>, 1648년. 17세기 네덜란드의 시청

2. 신교의 승리가 미친 영향은 앞서 본 것처럼 회화에서 두드러졌다.

 

3. 신교 사회에서 계속할 수 있었던 회화의 영역은 초상화였다. 성공한 많은 상인들이나 정부의 요인으로 성공한 명사들은 그들의 지위를 드러낼 수 있는 초상화를 원했다. 더욱이 네덜란드도시들의 자치 위원회 등의 집단 초상화를 걸어놓는 관습이 여전히 있었다. 이러한 고객들의 취향에 맞게 그리면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었지만 유행에 뒤처지면 몰락하기 마련이다.

4. 자유로운 신생 네덜란드의 최초 거장 프란스 할스(Frans Hals:1580?-1666)는 불안정한 생활을 지냈다. 그는 말년에 시립 양로원이 제공하는 조그마한 수입으로 살며 양로원 이사들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5. 도판 269 <성 조지 시민 군단 장교들의 연회>(1616)는 거의 초기 그림으로 그가  가진 솜씨와 독창력이 잘 드러난다.

[도판 269] 프란스 할스, <성 조지 시민 군단 장교들의 연회>, 1616년. 캔버스에 유채, 175x324cm, 하를렘 프란스 할스 미술관

네덜란드 시민들은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했고, 각 부대의 장교들을 위해 당시 프란스 할스가 머물던 하를렘 시에선 호사스런 연회를 베풀며 이를 기념으로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 전통이었다.

 

6. 할스는 처음부터 그 유쾌한 순간을 어떻게 전달할지, 알고 있었다. 동시에 12명의 구성원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7. 할스와 그의 가족에게는 적은 수입일 뿐인 개인 초상화 중 하나<피터 반 덴 브루케 초상>(1633)는 그의 솜씨를 더잘 살펴볼 수 있다.

[도판 270] 프란스 할스, <피터 반 덴 브루케 초상>, 1633년경. 캔버스에 유채, 71.2x61cm, 런던 켄우드 유증(遺贈)

할스 이전 초상화들이 스냅사진 처럼 보인다면, 그의 그림은 실제 특정인물의 인상을 잘 포착해 묘사했다. 당시 대중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모르나, 그 이전 화가들이 그림의 세부를 섬세하게 묘사해 나갈 동안 힐스는 빠르고 능숙하게 치밀한 계산 없이 인상을 세련되게 포착해냈다.

 

8. 네덜란드의 화가들 중 재능이 있는 사람은 주문을 받아서 그림을 제작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과 달리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나서 구매자를 찾아나서야 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제 미술가들이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후원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매하는 대중을 상대해야 했기에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의 각 도시에는 점포에 그림을 진열해놓고 파는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군소 화가가 명성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화의 특수한 분야 ( 장르 ) 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16세기에 북유럽의 나라들에서 시작된 전문화의 경향이 17세기에 와서는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전문 화가들은 때때로 그 어떤 훌륭한 화가보다도 뛰어났다.

[도판 271] 지몬 데 블리헤르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 1640-45년경. 41.2x54.8cm, 런던 국립 미술관

지몬 데 블리헤르: 바다 풍경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

이들 네덜란드 화가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9. 도판 272 < 강변의 풍차> 얀 반 호이엔: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도판 272] 얀 반 호이엔, <강변의 풍차>, 1642년. 목판에 유채, 25.2x34cm, 런던 국립 미술관

그는 우리들의 눈에 익은 모티브들을 변화시켜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득히 먼 곳으로 인도하며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함.

우리로 하여금 소박한 풍경 속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10.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그리고 아마도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 van Rijin : 1606 ~ 69)을 들 수 있다. 그는 레오나르도나 뒤러처럼 따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후대에까지 그의 말이 전해지는 천재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거장들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 노년기를 관통하는 굴곡진 인생과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는 일련의 기록인 자화상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11. 렘브란트는 1606년에 대학 도시 레이덴(Leiden)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 초상화가로서

성공하였으나  대중에 대한 인기의 하락과 빚, 반려자들의 죽음으로 그의 말년에는 그림 그리는 화구들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도판 273)은 말년의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다.

[도판 273] 렘브란트 반 레인, <자화상>, 1655-8년경. 목판에 유채, 49.2x41cm, 빈 미술사 박물관

그는 꾸밈없이 드러나는 모습 그대로를 그려냈고 이 것은 화가 스스로가 포착한 인간의 실제의 모습과 그에 대한 탐구적이고 확고한 응시, 그리고 성실성을 보여준다.

그는 그림의 완성에 대한 판단은 화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완성은 ‘화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할 때’라고 했으며 그래서 그는 얀 지크스의 장갑낀 왼손을 단순한 상태로 남긴 채 마무리했다.

[도판 274] 렘브란트 반 레인, <얀 지크스>, 1654년. 캔버스에 유채, 112x102cm, 암스테르담 지크스 컬렉션

우리는 많은 역대 거장들의 초상화를 보아왔다. 그 것들은 대부분 소설에 나오는 인물같이, 무대에 오른 배우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초상화에는 좀더 실제적이며 체온이 느껴지는, 대상의 심리적인 부분까지도 공감할 수 있는 남다른 특징이 있다.

 

12. 이와 같은 표현은 다소 감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영혼의 활동’이라고 부른 것에 관해서

렘브란트가 가지고 있었던 거의 신비스러울 정도의 지식을 달리 표현 할 길이 없다. 그는 상황에 따른 인간의 행태를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성경 내용을 묘사한 기존의 그림과 렘브란트의 작품의 차이점은 이런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어떠한 행동들과 처신, 상황의 뉘앙스가 벌어지는지를 상상해내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도판 275] 렘브란트 반 레인, <무자비한 하인의 이야기>, 1655년경. 종이에 갈대펜과 갈색 잉크, 17.3x21.8cm, 파리 루브르

 

13. 렘브란트는 이 장면의 내적의미를 표현을 위해 어떤 제스처나 동작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는 연극적인 구석이 없다. 도판276<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도 성경의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며, 그 이전에는 그려진 적 없는 장면이다.

[도판 276] 렘브란트 반 레인,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1642년. 목판에 유채, 73x61.5cm,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

렘브란트는 그림의 주인공들을 암스테르담에서 본 동방의 사람으로 표현했다. 렘브란트는 동방의 화려한 의상에 매료되었고, 다윗에게는 터번을, 압살롬에게는 오리엔트의 환도(還刀)를 주었다. 오리엔트의 의상은 그에게 빛과 보석의 광채를 묘사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루벤스나 벨라스케스처럼 번쩍이는 질감의 효과를 묘사할 수 있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보다는 밝은 색을 훨씬 덜 사용했다. 첫인상은 어두운 갈색이나 밝고 현란한 색조의 대조를 보다 강하고 돋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자체의 효과를 위해 이러한 기법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한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4. 전에 뒤러가 그랬던 것처럼 렘브란트도 판화의 거장이었다. 그가 사용한 기법은 에칭(etching)이었다. 에칭은 이전의 인그레이빙에 비해 매우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 차이점은 선의 성격에 있다. 도판277<설교하는 그리스도>은 그의 판화 중 하나인데 설교하는 예수를 그린 것이다.

[도판 277] 렘브란트 반 레인,  <설교하는 그리스도>, 1652년경. 에칭, 15.5x20.7cm

그는 이 장면을 위해 도시 주변에서 모델을 구했다. 배경은 암스테르담의 유태인 거리를 그렸고, 모델은 유태인의 용모와 의상을 연구해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다양한 용모의 사람들이 등장했고 이탈리아의 미술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볼 때 충격을 받곤 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추한 것을 피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카라밧지오의 영향을 받았다. 카라밧지오와 마찬가지로 그는 조화와 아름다움보다는 진실과 성실성을 더 중요시했다.

 

15. 렘브란트의 자유로운 제작 태도는 그가 인물군상을 배치하는데 얼마나 많은 예술적 지혜와 기술을 사용했는지 잊게 만든다. 이 그림의 예수와 그 주변의 군상처럼 균형이 잡힌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우연인 듯 하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군상 배치를 이탈리아 미술에서 배웠으며 결코 이탈리아 미술을 경멸하지 않았다. 만년에 그의 예술이 한층 더 심오하고 타협을 모르는 경지에 들어감에 따라 초상화가로서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의 미술가로서의 명성은 대단히 높았다. 진짜 비극은 명성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데 있다.

 

16. 렘브란트의 존재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덜란드에 연구할 가치가 있는 화가가 적었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북유럽의 소박한 풍속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중세의 세밀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뢰헬도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었으며 17세기의 얀 반 호이엔의 사위인 얀 스텐(Jan Steen, 1626 ~ 1679)은 이것을 완성시켰다. 다른 미술가들처럼 그 역시 미술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어서 여관을 운영했다. 그는 이 부업을 즐겼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관은 그에게 쾌락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희극적인 인물유형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도판278<세례 잔치>는 평민들의 유쾌한 생활의 한 장면인 세례를 축하하는 장면이다. 다양한 서사가 있는 이 그림은 그것을 한 화면에 뛰어나게 혼합했다.

[도판 278] 얀 스텐, <세례 잔치>, 1664년. 캔버스에 유채, 88.9x108.6cm, 런던 윌리스 컬렉션

 

17.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이라고 하면 유쾌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렘브란트의 정신에 가까운 분위기를 표현한 화가들이 있었다. 그 중 뛰어난 사람은 또 다른 분야의 ‘전문가’인 야콥 반 로이스달이 있다. 생애 절반을 하를렘에서 보내면서 숲의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렸으며 자연속에 반영되는 자기 자신의 정서와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애썼다.  

[도판 279] 야콥 반 로이스달, <나무로 둘러싸인 늪이 있는 풍경>, 1665-70년. 캔버스에 유채, 107.5x143cm, 런던 국립 미술관

 

18. 이 장의 제목을 ‘자연의 거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네덜란드 미술이 단지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미술에 반영된 자연은 미술가 자신의 마음, 즉 그의 취향이나 기분을 반영한다. 때문에 네덜란드 회화 중에서 가장 ‘전문화’된 분야인 정물화를 흥미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화가들은 그들이 그리고 싶은 물건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그들의 상상에 맞게 테이블 위해 배치할 수 있었으며, 미술가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빛이 색유리에 어떻게 반사되는지, 색채와 질감의 대조와 조화, 페르시아 양탄자와 번쩍이는 도자기 등 )를 해결할 수 잇는 실험장이 되었다. 사소한 사물들로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듯이 그림의 주제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도판 280] 윌렘 칼프, <성 세바스티아누스 사수들의 조합의 뿔로 만든 술잔과 바다 가재 및 유리잔이 있는 정물>, 1653년경. 캔버스에 유채, 86.4x102.2cm, 런던 국립 미술관

 

19. 가사가 없어도 위대한 음악이 될 수 있듯이 중요한 주제가 없는 위대한 그림이 있을 수 있다. 결국 주제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20.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일하는 화가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였다. 그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있는 순박한 인물, 단순한 일을 하고 있는 단 한사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그림은 사실 인물이 들어 있는 정물화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가식없는 그림이 명작이 된 이유는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해내는 베르메르의 표현기법에서 비롯되었다. 형태의 윤곽선을 부드럽게 만들어 입체감과 견고함의 인상을 주었으며, 부드러움과 정확성을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결합시켰다.

[도판 281] 얀 베르메르, <부엌의 하녀>, 1660년경. 캔버스에 유채, 45.5x41cm,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21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1 -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

 

1. 바로크 양식의 건축은 16세기 후반에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예수회 교단의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델라 포르타는 더 많은 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 소위 고전적인 건축의 규칙이라는 것을 무시해버렸다. 17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는 건물과 그 장식에 대한 더욱 눈부신 새로운 구상들이 하나하나 축적되어 17세기 중엽에 완전히 발전하게 된다.

 

2. 도판 282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 1599-1667)가 그의 조수들과 건립한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교회이다.

[도판 282]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와 카를로 라이날디, <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산타 아그네스 성당>, 1653년. 로마, 피아차 나보자 소재

보로미니는 르네상스 시대의 형태적인 요소들을 차용했다. 그러나 여기에 거대한 둥근 지붕을 만들고 양쪽에 두 개의 탑과 정면을 세움으로써, 서로 다른 형태들을 한데 모아 그의 교회를 구성했다. 바로크 양식의 소용돌이 장식과 곡선이 건물의 전반적인 설계와 장식적인 세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런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은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극장의 무대와 같이 과장되어 있다는 평을 들어왔으나, 보로미니 자신은 교회가 축제처럼 흥겹게 보이고 화려함과 운동감이 가득한 건물이 되기를 원했다.

 

3. 이 교회 내부는 중세 성당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천상의 영광을 연상시키기 위해 보석과 황금, 스터코(stucco, 치장 벽토)등으로 호화스러운 장관을 연출했다.

[도판 283]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와 카를로 라이날디, <산타 아그네스 성당 내부>, 1663년 경

북유럽 지역의 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너무 세속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당시의 가톨릭 교회는 신교가 교회의 외면적인 치장에 반하는 설교를 하면 할수록 더욱 열렬하게 미술가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가톨릭 세계는 미술이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 이상으로 글을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해서 개종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음을 발견했다. 교회당 내부에서 중시되는 것은 세부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주는 전반적인 효과이다.

 

4. 이러한 무대 장식같은 현란한 미술을 발전해 나간 한 미술가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였다. 그도 반 다이크, 보로미니, 벨라스케스, 렘브란트처럼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도판 284] 잔 로렌초 베르니니, <콘스탄차 부오나렐리 상>, 1635년경. 대리석, 높이 72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

도판은 한 젊은 여자의 흉상으로, 참신하고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베르니니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얼굴 표정의 묘사를 활용하여 그의 종교적인 체험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5. 도판 285는 로마의 작은 교회 부속 예배실의 장식을 위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도판 285]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환희>, 1645-52년, 대리석, 높이 350cm,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부속 코르나로 에비실의 제단

[도판 286] 도판 287의 세부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것이다. 바로크 미술가들이 종교 미술 작품에서 열렬한 환희와 신비스러운 황홀경의 느낌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베르니니가 그 목적을 아주 훌륭하게 성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옷주름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 옷자락이 몸부림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이러한 효과들은 얼마 안 가서 유럽 전역에 퍼져 모방되었다.

 

6. 바로크 교회의 회화 장식은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와 같은 조각처럼 그것이 놓인 장소까지 고려해서 보아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도판은 베르니니를 추종하는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Giovanni Battista Gauli)가 그린 로마 예수회 교회의 천장 장식이다.

[도판 287]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예수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함>, 1670-83년. 프레스코, 로마 일 제수 예수회 교회당의 천장화

그는 교회의 궁륭형 천장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여 우리에게 천국의 영광을 곧바로 보고 있는 듯한 환상을 주고자 하였다. 이전의 코레조의 천장화(도판 217)에 비해 훨씬 무대 효과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림은 그것이 놓여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의미를 상실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예술가들이 협력한 바로크 양식이 완벽하게 발전된 후의 이탈리아와 유럽 가톨릭 세계에서 회화와 조각이 독립적인 예술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7.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대부분 뛰어난 장식가들이었으며 치장 회반죽세공과 대형 프레스코벽화를 그리는 기술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이러한 거장들중 제일 유명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1696~1770)이다.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 스페인에서 활약 했다. (도판288)은 그가 1750년경에 그린 베네치아의 한 궁전 장식의 일부이다.

[도판 288]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1750년경. 프레스코, 베네치아 라비아 궁

[도판 289] 도판 288의 세부

 

8.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그리기에도 재미있었을 것이며 보기에도 역시 즐겁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러한 작품들이 그 이전시대의 것들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9. 이탈리아 미술은 18세기 초에 단 한 가지의 특수한 분야에서만 새로운 이념들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였다, 그 작품들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돌아가는 타지인들을 위한 기념품 역할을 하였고, 하나의 유파로 자리를 잡았다. (도판290)은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1712~93)가 그린 베네치아의 한 풍경이다.

[도판 290] 프란체스코 구아르디,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정경>, 1775-80년경. 캔버스에 유채, 70.5x93.5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그는 화가가 한 장면의 일반적인 인상을 제공하면 나머지는 관람자가 상상을 통해 메꾸고 보충하려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작품 속의 곤돌라 사공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색채와 붓놀림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게 되면 그 환영은 완벽한 효과를 연출해낸다. 이러한 후기 이탈리아 미술의 결실 속에 살아있는 바로크 양식의 전통은 후대에 가서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된다.



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2 -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1. 인간에게 감명을 주고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는 예술의 힘을 발견한 것은 로마 교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유럽의 왕과 영주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권려을 과시해서 민중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고심했다. 이것은 특히 17세기 말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었던 것은 바로 1660-80년경에 세워진 베르사유 궁전(도판 291) 이다.

[도판 291] 루이 르 보와 쥘아르두앵 망사르, <베르사유 궁>. 파리 부근, 1655-82년. 바로크 양식의 궁전

[도판 292] <베르사유 궁의 정원>, 오른쪽 군상은 <라오콘>(p.110, 도판 69)의 모조품임

 

2.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건축가들은 이 건물의 거대한 덩어리를 좌우 날개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각 익부에는 고상하고 장엄한 외관을 부여하는데 주력했다. 이것을 순수한 르네상스식 형태들만으로 단순하게 조합했더라면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정면은 그 단조로움을 깨지 못했을 것이나 조각상들과 항아리, 전승 기념품 등의 도움으로 건축가들은 어느 정도의 다양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3. 이러한 교훈이 그 시대의 건축가들에게 완전히 흡수된 것은 그 다음 세대에서였다. 1700년을 전후한 시대가 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으며 그것은 비단 건축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만 했다. 이러한 창작활동의 결과 카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의 많은 소도시들의 경관은 완전히 변형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독일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이념들이 가장 잘 융합된 지역이었다.

[도판 293]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 빈의 벨베데레 궁 >, 1720-24년 사이

 

4. 환상적인 장식의 효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건물 안에 들어설 때이다.

[도판 294]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 벨베데레 궁의 입구 홀과 계단 >, 1724년. 18세기 동판화에서

[도판 295]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와 요한 단츠호퍼, <독일 폼머스펠덴 성의 계단 >, 1713-14년

 

5. 교회의 건물들도 이와 유사한 인상적인 효과를 이용했다. 도판296<다뉴브 강변의 멜크 수도원>을 보면 비현실인 환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도판 296] 야콥 프란타우어, <다뉴브 강변의 멜크 수도원>, 1702년

이 수도원은 지방의 한 건축가와 이름 없는 (솜씨 좋은) 떠돌이 장인들이 맡았다. 이 이름 없는 미술가들은 단조롭지 않고 당당한 외관을 표현하기 위한 어려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소에 따라 차등을 둔 장식으로 공간 내부를 효과적으로 부각시켰다.

 

6. 그러나 실내 장식에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베르니니나 보로미니보다 더 자유분방했다.

[도판 297] 야콥 프란타우어·안토니오 베두치·요제프 뭉겐나스트 <멜크 수도원의 예배당 내부>, 1738년경.

예배당 내부를 보면 사방에 구름이 가득 차 있고 음악을 연주하며 천국의 기쁨을 전하는 천사들이 있다. 모든 것은 춤추는 듯 보이며 구조물 자체가 그렇게 보인다. 이러한 교회의 건물 안에는 '자연스럽'거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 그런 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나름의 규칙과 기준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7. 이탈리아 뿐 만 아니라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상실했다. 앙투안 바토(Antoine Watteau, 1684 ~ 1721)는 17세기 전반의 거장들과 비견될 만한 유일한 미술가이다. 그는 플랑드르 일부 출신으로 파리에 정착해 살다 37세에 요절했다. 그 역시 궁정 사회의 환락의 배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왕과 귀족들의 성의 실내장식을 디자인했다. 이러한 축제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자기 가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종의 목가적인 풍경으로 상상의 공원에서 야유회를 즐기는 꿈같은 생활로 모든 것이 아름다운 그런 세상이다. 바토의 예술은 로코코(Rococo)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 바토의 꿈과 이상이 우리가 로코코라 부르는 유행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한 것이다. 그는 그가 그인 품위 있는 호사스러움에 대한 그의 비전을 가지고 위의 상상력의 보고를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8. 도판298<공원의 연회>는 얀 스텐의 그런 떠들썩한 쾌활함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달콤하고 우수에 젖은 그런 고요함이 지배적이다.

[도판 298] 앙투완 바토, <공원의 연회>, 1719년경. 캔버스에 유채, 127.6x198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바토의 섬세한 필법과 세련된 색조의 조화와 같은 그의 예술적인 자질들은 원화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찬양한 루벤스처럼 분필 자국이나 붓자국만으로 육체의 인상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얀 스텐의 그림과 다르듯이 그의 습작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루벤스의 그것과는 다르다. 바토는 병자였으며 폐병으로 요절했다. 아마도 그를 찬미하고 모방했던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었던 그런 강렬함을 그의 예술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3장 이성의 시대 -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1.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해 있었고, 신교 국가들은 이 대유행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을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이자 세인트 폴 대성당(도판 299)을 지은 크리스토퍼 렌 경 (Sir Christopher Wren : 1632 - 1723)은 본인이 로마에 가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로크 건축가들의 건물 배치 방법과 장식적 효과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중앙의 둥근 지붕 및 양쪽의 탑 등) 한편 세인트 폴 대성당의 정면 현관을 보면 로마의 바로크 양식 교회에 비해 강인함과 안정감, 고귀함을 느낄 수 있다. 렌의 장식에는 괴상하거나 환상적인 면이 없으며, 모든 형태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모델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기에 보는 이에게 은근하고 침착한 인상을 준다.

[도판 299] 크리스토퍼 렌 경,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1675-1710년

 

2. 신교와 가톨릭의 교회 건축의 대조는 특히 건물의 내부를 살펴볼 때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윌브룩 교회(도판 300)는 주로 신자들이 예배를 위해 만나는 공간, 즉 신도들의 생각을 집중시키도록 하는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렌은 자신이 설계한 많은 교회 - 엄숙미, 간결함을 주는 공간 - 에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노력했다.

[도판 300] 크리스토퍼 렌 경,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윌브룩 교회 내부>, 1672년

 

3. 교회들이 그랬듯 성들도 동일한 경향을 따랐다. 영국의 왕들은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가 없었고 귀족들 역시 사치와 방종의 면에서 독일인들과 경쟁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블렌하임 궁을 제외하고 18세기의 영국은 성이 아닌 교외의 저택을 이상으로 삼았다.

 

4. 교외 저택들은 바로크 양식의 호사로움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고전 건축의 내용들을 충실히 따르려 노력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고전 건축물을 연구해 교과서로 출판하기도 했는데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책이 가장 대표적이며 18세기 영국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권위서로 간주된데다가 ‘팔라디오 식' 별장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벌링턴 경이 직접 사용하기 위해 설계하고 윌리엄 켄트가 장식한 치직 저택은 팔라디오 식 별장의 전형이다.

[도판 301] 벌링턴 경과 월리엄 켄트, <런던 치직 저택>, 1725년경.

힐데브란트나 가톨릭 유럽의 다른 건축가들과 달리 영국의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고전 건축의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5. 당시의 영국은 취향의 척도가 이성의 척도였다. 그들은 바로크식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감정을 압도하는 목적의 예술에도 반대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양식을 인공적이라 여겨 비난하고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에서의 취향과 이성의 척도를 이탈리아 건축가의 권위에서 찾았듯 경치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도 역시 남유럽의 화가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찾았다.

[도판 302] <윌트셔 주 스타우어헤드의 정원>, 1741년부터 조성됨.

 

6. 이러한 청교도적 적대의식은 영국 미술의 전통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회화에서 유일하게 수요가 여전한 영역은 초상화였는데 이마저도 홀바인이나 반 다이크 같은 외국 화가들이 충족시켰다. 이들은 외국에서 명성을 얻은 뒤 영국으로 초청된 화가들이었다.

 

7. 이 시대의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 이유를 내세워 미술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자국의 작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려 하지는 않았다. 저택에 걸 그림의 경우 외국의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을 사려 했다. 그들은 당대 화가들을 외면하고 스스로 미술 감식가를 자처하며 거장들의 걸작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8. 이와 같은 현상은 책의 삽화를 그려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영국의 한 젊은 판화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1697~1764)였다. 그는 청교도 전통에서 성장한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기위해서는 예술이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권선징악과 같이 교훈적인 내용들을 그릴 것을 계획했다. 그의 그림은 그림속의 상황과 교훈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그림 안의 인물들에게는 적절한 역할을 부여했고 그 것에 맞는 소도구나 제스처를 부여했다. 또 이러한 유형의 그림을 극작가나 연출가의 수법에 비교했다.

 

9. 도판 303은 <탕아의 편력>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빈털터리가 된 탕아가 베들럼 정신병원에서 광란하는 미치광이로 인생을 끝맺는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도판 303] 월리엄 호가스, <베들럼의 탕아>, ‘탕아의 편력’ 중 한 장면, 1735년. 캔버스에 유채, 62.5x75cm, 런던 존 손 박물관

 

10. 이 그림에 나오는 각 인물들과 에피소드는 모두 호가스가 말하는 이야기와 꼭 들어맞지만 그것만으로 이 그림을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주제에 집착하면서도 그림을 제작하는 기술적인 측면과 화면을 구성하는 데에도 훌륭한 솜씨를 발휘 했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전통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스러워 했으며 취향이라는 것 또한 가르칠만한 법칙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 거장들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상당한 부와 명성을 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것들은 보급용으로 복제된 판화에서 온 것이었다. 당시의 감식가들은 그를 대수롭지 않은 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통해서 유행적인 취향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 했다.

 

11. 호가스로 부터 한 세대가 지나고 등장한 조슈아 레이놀즈 경(Sir Joshua Reynolds: 1723-92)은 영국의 상류사회를 만족 시키는 그림을 그렸다. 당시의 감식가들은 그의 그림을 진정한 미술의 모범이라고 입을 모았으며 카라치의 교훈을 받아들여 과거 거장의 장점을 모방하고 연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을 때, ‘아카데믹한’ 이론들을 상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취향에는 척도가 있으며 예술에서 과거의 권위있는 모범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12. 일면 그는 거만하고 진부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사실 그는 17세기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비평가들은 모두 ‘역사화’라는 것의 품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손으로 작업하는 것에 대한 편견에 대항한 미술가들의 투쟁을 비추어 보았을 때, 미술가들이 미술에 있어 시적 착상의 중요성과 주제의 고상함을 강조하게 된 것은 이들이 상류사회에 들어갈 자격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13. 레이놀즈는 지식인이었으며 사교계에서 환영받는 인사였다. 그는 영국에서 역사화를 부활시키고자 하였으나 상류사회에서 원하는 것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 전형이 된 것은 반 다이크였으며 레이놀즈는 그 전형에 다다를 만큼의 실력이 있었으나 모델의 성격과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특별한 것을 덧붙이기를 좋아했다.

[도판 304] 조슈아 레이놀즈,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 1773년. 캔버스에 유채, 73.7x62.2cm, 개인 소장

 

14.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려야 할 때에도 레이놀즈는 배경을 신중히 선택하여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도판305] 조슈아 레이놀즈,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1775년. 캔버스에 유채, 91.8x71.1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이 작품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의 초상화 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벨라스케스의 작품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도판 267 p410,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1659년경)  벨라스케스가 색채와 질감에 대해 관심을 가진 반면 레이놀즈는 소녀가 애완용 강아지에게 기울이고 있는 애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하였다. 실제로 그는 아이와 친밀감을 형성한 후 어느 한 순간의 표정을 포착하여 화폭에 담았다. 레이놀즈의 작품 속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보이는 효과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레이놀즈는 작품을 제작할 때 이러한 효과보다  이 귀여운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고 매력을 생생하게 전달하여 모델이 돋보이도록 하는 것을 더욱

중요시 하였다.

(※ 레이놀즈의 어린이를 주제로한초상화)

 

15. 레이놀즈의 보울즈 양의 초상화가 걸린 런던의 윌리스 컬렉션에는 초상화에 있어 호적수인 토머스 게인즈버러

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도판 306] 게인즈버러, <하버필드 양의 초상>, 1780년경. 캔버스에 유채, 127.6x101.9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이 작품은 작은 숙녀가 망토의 끈을 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통의 중요성을 주장한 레이놀즈에 비해 게인즈버러는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재능으로 자수성가하였다. 게인즈버러의 <하버필드 양의 초상>을 살펴본다면  뛰어난 붓놀림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과시할 수 있는 솔직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순수한 접근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에는 레이놀즈 작품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체의 특성과 외양을 묘사해내었다.

 

16. 레이놀즈가 고대사에 나오는 야심적인 신화의 장면이나 일화들을 그리는 것을 갈망한 반면 게인즈버러는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게인즈버러의 풍경화를 사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대부분이 습작으로 남아있다

[도판 307] 토머스 게인즈버러<시골 풍경> 1780년경. 황갈색 종이에 검정 분필과 찰필로 그리고 흰색으로 강조해 덧칠한 소묘, 28.3x37.9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이러한 풍경화는 자연을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이 되도록 짜맞추어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반영시키기 위한 ‘구성 작품’들이었다.

 

17. 18세기에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영국에서는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미술을 이용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을 그렸다.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였고 화가들은 보통 사람들의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 제일 위대한 화가는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 Simeon Chardin)이다.

[도판 308]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뎅, <감사 기도>, 1740년. 캔버스에 유채, 49.5x38.5cm, 파리 루브르

샤르댕은 도판 308과 같은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을 화폭에 담는 면에서 그는 베르메르와 유사하다.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 없는 화면 구성의 솜씨는 그를 18세기의 가장 사랑받는 화가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18. 프랑스에서도 권력의 겉치레보다는 서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초상미술에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초상 미술가는 조각가 장 앙투안 우동(Jean-Antoine Houdon)이다.

[도판 309] 장 앙투안 우동, <볼테르 상>, 1781년. 대리석, 높이 50.8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그의 흉상들은 베르니니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도판의 볼테르 상에서 우리는 이성의 옹호자였던 그의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 위인의 깊은 동정심을 ‘읽을 수’ 있다.

 

19. 영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picturesque)’ 측면에 대한 취향이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나타난다.

[도판 310]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넓은 정원>, 1780년경. 종이에 붉은 색 분필, 35x48.7cm, 브장송 박물관

프라고나르는 게인즈버러의 세대에 속했으며, 상류 사회의 테마를 그리는 바토의 전통을 따르는 매력적인 화가였다. 그의 풍경화는 실제 풍경의 단면으로부터 어떻게 장엄함과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볼 수 있게 해준다.



24장 전통의 단절 - 18세기 말 19세기 초: 영국, 미국 및 프랑스

 

1.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하는 근대는 화가나 조각가가 보통의 직업과는 달리 천직(天職)으로 취급되던 르네상스 시대였다. 또한 종교 개혁으로 인해 성상 반대 운동이 일어나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그림과 조각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미술가들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만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미술은 유한 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여전히 미술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려는 목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미술가들 사이에서도 여러 유파들이 존재하면서 미술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 논쟁 속에서도 그들은 많은 공통점을 공유했다. 예를 들어 ‘이상주의자’들도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함에 동의했으며, ‘자연주의자’들도 고대의 고전적 작품들이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2. 이러한 공통된 기반이 무너진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수백 년 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수많은 가설들에 종지부를 찍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근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뿌리를 둔 프랑스 혁명이 일으킨 첫번째 변화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많은 건축가들이 팔라디오의 규칙이 ‘올바른’ 양식을 보장해준다고 믿어 왔으나 다른 문헌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은 자신의 시골 별장을 낭만적인 고성처럼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도판 311] 호레이스 월폴, 리처드 벤틀리와 존 츄트,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1750-75년경. 신고딕 양식 별장

1770년경 당시에는 이 건물을 골동의 취미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했으나 이는 벽지 무늬를 선택하듯 건물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만든 자의식의 첫번째 징후였다.

 

3. 또 다른 예로 건축가 윌리엄 챔버스(William Chambers)는 런던의 큐 왕립 식물원(Kew Gardens)에 중국의 건축과 정원 양식을 적용한 중국식 탑을 세웠다. 대다수의 건축가들이 르네상스 건축을 고전 양식으로 생각하고 활용하였으나, 이러한 관례 중 많은 것들이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15세기 이래 고전 건축의 규칙들로 통용되던 것이 다소 퇴폐적 시기의 로마 시대 유적에서 취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따라서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이는 ‘섭정 시대(1810-20)’에 절정을 이루었다.

[도판 312] 존 패프워스, <첼튼엄의 도셋 하우스>, 1825년경. 섭정 시대 건물의 정면

도판 312는 영국의 많은 온천들이 호황을 누리던 섭정 시대에 지어진 이오니아 식 그리스 신전(도판 60)을 모방하여 지은 첼튼엄 온천의 한 집이다.

[도판 313] 존 손 경, <시골 별장의 구상도>, 1798년에 런던에서 발행된 《건축 스케치》의 한 페이지

유명한 건축가 존 손(John Soane) 경이 그린 별장의 구상도는 도리아 식을 부활시킨 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그의 구상도는 그리스 양식을 이루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사용한 습작처럼 보인다.

 

4.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을 적용하는 건축 개념은 당시의 주류였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제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자신의 저택 몬티첼로를 신고전주의(neo-classical) 양식으로 설계했고,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Greek Revival)’ 양식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도판 314] 토머스 제퍼슨, <버지니아의 몬티첼로 저택>, 1796-1806년.

프랑스 역시 대혁명 이후 이러한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혁명기의 이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태어난 아테네의 자유 시민이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왕족과 귀족들이 사용하던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은 과거의 것들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후,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다. 또한 유럽에서는 새로이 부활한 그리스 양식과 함께 고딕 양식도 나란히 존재했다. 이는 특히 ‘신앙의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던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5. 그림과 조각에 있어 전통의 사슬이 단절됐다는 사실은 즉각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으나 큰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다. 이제는 그림 그리는 일이 더이상 장인이 도제에게 전승하는 형태의 보통의 직업이 아니었으며, 그림이란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하나의 과목이 되었다. 아카데미(academy)는 플라톤이 그의 제자를 가르쳤던 올리브 숲 이름에서 나온 말이며, 16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집회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아카데미는 18세기에 이르러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되었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는 왕 스스로 왕국 내의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술의 번창을 위해서는 왕립 기관의 교육보다 구매를 하고자 하는 이의 숫자가 더욱 중요하다.

 

6. 여기에서 어려운 문제는 아카데미가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고, 이 사실이 후원자들로 하여금 당시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 보다 거장의 작품을 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와 런던에서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했다. 오늘날 작가들이 전시하고, 전시를 위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행위였다. 이는 상류 사교계에 화젯거리를 제공해주는 동시에 사회적 행사였으며, 미술가들에게 명성을 주고, 뺐기도 했다.  요구하는 것이 분명한 개인 후원자들이나 취향이  짐작되는 일반 대중 작품을 만드는 대신 작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발로 몇몇 미술가들이 아카데미의 ‘관학적’인(학교미술적인) 미술을 경멸했으며, 대중의 취향에 호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소외 당한 사람들 사이의 의견 충돌이 그동안 미술 발전에 공통 기반을 파괴해버릴 위험을 몰고 왔다.

 

7. 이러한 심각한 위기에 바로 나타난 영향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 이전 그림의 주제가 진부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종교적 주제와 그리스 신화, 로마의 영웅과 의인화에 국한되었던 주제는 18세기 중반 이전의 미술가들의 것이었다. 당시 성공적인 화가나 외로운 반역자들은 다 같이 전통적인 주제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유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8.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 했던 미국 미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분명 구세계에서 신성시 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미국인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 1737-1815)의 도판 315<1641년에 다섯명의 탄핵된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 1세>는 큰 물의를 일으켰다.

[도판 315] 존 싱글톤 코폴리, <1641년에 다섯 명의 탄핵된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 1세>, 1785년. 캔벗으ㅔ 유채, 233.4x312cm, 매사추세츠, 보스턴 시립 도서관

그의 의도는 마치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가능한 정확하게 그 장면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적 사실들을 수집하는데 열정적이었고, 고증학자들과 사학자들에게 의상과 소품들 하나하나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하원 의원을 지냈던 사람들의 초상화를 가능한 많이 수집하기 위해 수고했다. 이는 노력의 성과가 어떠했는지는 별개 문제이다.

 

9. 코플리는 국왕과 국민 대표 사이에서 일어났던 이런 극적인 대결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과거 국왕의 요구에 대해 국민 대표들이 반발한 것을 코플리가 새삼 들추어낸 의미는 여왕이 그림을 보고 불길한 침묵 끝에 “코플리 씨 당신은 연습치고는 지극히 불행한 주제를 택했군요”라는 의미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4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림과 똑같은 장면이 프랑스에서 재연되었다. 미라보(Mirabeau)는 국민 대표들을 몰아내려는 국왕을 거부함으로써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10.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다시 등장시켰다. 건축에서의 ‘고딕 복고’와 비견할 수 있는 그의 역사화 속에는 낭만적인 기미가 엿보인다.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고 취향도 그러했다. 이러한 신 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 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1825)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마라(Marat)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그는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암살당한 마라>를그려냈다. 그는 이를 위해 경찰의 보고서와 같이 실제 현장에 충실하면서도 영웅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도판 316] 자크-루이 다비드, <암살당한 마라>, 1793년. 캔버스에 유채, 165x128.3cm, 브뤼셀, 벨기에 왕립 박물관

 

11. 구태 우연한 주제를 내팽개친 다비드 세대의 미술가들 중에는 위대한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 1746~1828)가 있다. 그는 스페인 전통 회화를 익히고 있었으며 <도판 317>의 <발코니의 사람들>에서 보듯 그는 다비드와는 달리 고전주의적인 장려함을 위해서 이러한 지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도판 317] 프란시스코 고야, <발코니의 사람들>, 1810-15년경. 캔버스에 유채, 194.8x125.7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의 그림에서 표현되어지는 것들은 어용 초상화가들을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권력에 아첨하지 않으며 초상 안에서 인물들이 가지는 허영심이나 탐욕, 추악함을 낱낱이 드러냈다.

[도판 318] 프란시스코 고야,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 7세>, 1814년경. 캔버스에 유채, 207x140cm, 마드리드 프라도

[도판 319] 도판 318의 세부

12. 고야는 단지 유화 작품을 통해서만 과거의 인습을 벗어나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애쿼틴트(aquatint)방식의 수많은 판화를 제작했다. 그의 판화에서 특이한 점은 이미 일려진 내용을 주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녀, 기괴한 요괴들이 그 주제인데, 이 것은 그가 스페인에서 목격한 잔인하고 억압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로서 제작된 것이며 또 그 것은 그 스스로의 악몽을 형상화한 듯하다. 고야는 개인적인 환상의 세계를 펼치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도판 320] 프란시스코 고야, <거인>, 1818년경. 애쿼틴트, 28.5x21cm

 

13. 미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고야보다 열한살 아래인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 : 1757~1827)였다. 그는 관학적 미술을 경멸했고 그 기준을 받아들이기 또한 거부했다. 그는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시에 삽화를 그려 인쇄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도판 321은 <유럽,예언서>라는 자작 시집에 곁들인 삽화 가운데 하나이다.

[도판 321] 윌리엄 블레이크, <태고적부터 계신 이>, 1794년. 양각 에칭에 수채, 23.3x16.8cm, 런던 대영 박물관

 

14.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멧부리가 아직 박히지 않고 언덕이 생겨나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그가 하늘을 펼치시고 깊은 바다 앞에 컴퍼스를 세우실 때에, 구름을 높이 달아 매시고 땅 속에서 샘을 세차게 솟구치게 하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다.

 

15.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느님의 이런 장엄한 환상이다. 블레이크는 미켈란젤로의 숭배자였으며 그림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형상도 미켈란젤로가 그린 하느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형상은 블레이크의 손을 거치며 하느님의 모습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되어갔다. 블레이크가 머리 속에 떠올리고, 그려낸 이 형상은 엄밀히 말해 하느님이 아니라 그가 유리즌(Urizen;이성을 상징-역주)이라 부른 세계의 창조자였다. 그는 세계는 악하며, 그 창조자 또한 악한 혼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화면은 기분 나쁜 악몽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16.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그의 소묘상의 오류를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림에서 보이는 형상들은  각각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는 묘사의 정확성은 신경쓰지 않았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17. 주제의 선택의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여기서도 전통은 양가적이었다. 같은 세대의 터너와 컨스터블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을 통해 접근했다. 터너는 레이놀즈처럼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를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스케치를 국가에 기증하며 로랭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도판 322]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1815년. 캔버스에 유채, 155.6x231.8cm, 런던 국립 미술관

로랭 그림은 단순, 고요함, 그리고 그의 환상 세계가 지니는 명료성, 구체성 그리고 요란한 색채가 없었다. 터너는 동적이며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그의 최고 걸작들은 사실상 웅대한 자연의 가장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판 323<눈보라 속의 증기선>은 터너의 작품 중 가장 냉담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린 것이다.

[도판 323]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눈보라 속의 증기선>, 1842년. 캔버스에 유채, 91.5x122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시커먼 선체와 돛대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나운 바다의 위협적인 돌풍과 대결하는 투쟁의 인상뿐이다. 낭만주의 시와 음악을 들을 때 상상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폭풍일 것이다. 터너에게 있어서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18.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 매우 달랐다. 그에게 전통은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게인즈버러가 그만 둔 곳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게인즈버러조차 전통적 기준의 ‘한 폭의 그림 같다’ 생각할 만한 소재들을 선택했으며 여전히 자연을 목가적인 장면들을 위한 아늑한 무대로 보았다. 컨스터블에게 이 모든 생각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실을 원했다. “꾸민없는 화가가 자리할 곳은 충분해”, “오늘날의 가장 큰 악덕은 허세야. 그것은 진실을 넘어서려 하지” 로랭을 모범으로 당시의 화가들은 문외한도 그릴 수 있는 속임수를 많이 만들어냈다. 틀에 박힌 방식을 만들어 냈고, 컨스터블은 이를 경멸했다. 그는 인습적인 색을 요구하는 친구를 실제 풀과 그것(예컨대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갈색)을 비교하며 차이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대담한 혁신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한 것 뿐이었다. 그의 습작들(도판324<나무줄기의 습작>)은 완성된 작품들보다 훨씬 대담했다.

[도판 324] 존 컨스터블, <나무 줄기의 습작>, 1821년경. 종이에 유채, 24.8x29.2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그는 자연을 스케치하기 위해 야외에 나갔으며 화실에 돌아와서는 그것을 공들여 다듬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이 순간적인 인상의 기록을 전시할 만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처음 전시되었을 때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도판325<건초 마차>는 1824년에 공개되어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도판 325] 존 컨스터블, <건초 마차>, 1821년. 캔버스에 유채, 130.2x185.4cm, 런던 국립 미술관

그림은 단순한 풍경 그림이다. 그의 그림은 실제의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가식적인 포즈나 허세가 전혀 없는 그의 철저한 성실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앞에 놓인 소재들을 성실히 묘사하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유럽의 낭만주의자인 독일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슈베르트의 가곡 같은 낭만적인 서정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그린 산은 중국 산수화의 정신을 상기시키기까지 한다. 낭만주의 미술의 성취는 컨스터블이 추구했던 길을 따라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색한다는 것에 있다.

[도판 326]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실레지아 산악 풍경>, 1815-20년경. 캔버스에 유채, 54.9x70.3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25장 끝없는 변혁 - 19세기

 

1. ‘전통의 단절’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특징지으며 당시 미술가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감식가들은 ‘예술(art)’와 단순한 ‘기술’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산업혁명은 장인의 전통을 무너뜨리며 수공업을 대신한 기계생산으로의 변화를 이루었다.

 

2. 이러한 변화는 건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장인 기술의 결여는 ‘양식’과 ‘미’에 대한 집착과 함께 이 시기의 건축을 말살시켰다. 건축물의 수는 많았지만 자연스러운 양식은 발견할 수 없었다. 조지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견본책들이 ‘비예술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하였고, 의뢰인들은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여 건축물을 지었다. 즉, 건축물의 각각의 부분들을 다른 양식으로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전통적 건축방법이 어느정도 수용되었으나, 통일성 있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3. 이러한 상황은 건축가들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이들은 과거의 양식을 모방하여도, 혹은 묵살하려 해도 그 설계는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났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난 성공사례가 런던의 국회의사당이다.(도판 327)

이의 설립과정은 이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1834년 화재로 소실된 국회의사당의 새로은 설계 공모에서 르네상스 양식 전문가인 찰스 배리 경(Sir Charles Barry:1795-1860)의 설계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시민적 자유는 중세에 쟁취되었기에 그 상징 역시 고딕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고딕식 세부장식의 전문가인 퓨진(A. W. N. Pugin:1812-52)이 담당하게 되었다.

[도판 327] 찰스 배리와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퓨진, <런던의 국회 의사당>, 1835년.

 

4. 한편 회화나 조각에서는 ‘전통적인 양식’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에 ‘전통의 단절’이 미친 영향이 미약하리라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화가는 안정된 직업으로 안정된 지위를 가질 수 있었으나 19세기에 그 안정이 무너지게 되었다. ‘전통의 단절’으로 인해 화가들의 선택권이 확대될수록 화가의 취향과 대중의 취향의 간극이 생기면서 후원자와의 마찰이 빚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미술가들 사이에서도 분리를 형성하였다. 또한 산업혁명과 장인 기술의 쇠퇴, 전통성이 결여된 새로운 중산 계급의 등장, ‘예술’을 빙자한 조잡한 상품의 생산으로 인해 일반 대중의 취향 수준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5. 미술가와 대중 사이의 불신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불신 상황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고 사회와의 고립을 형성한 작가들은 파멸에 이르렀으나 선택의 폭이 확장되고 후원자에게서 독립한 점 외에도 미술은 미술가가 개성을 가졌다는 전제 하에 개성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6. 모든 미술을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역설처럼 들릴 것이다. 미술이 ‘표현' 수단임에는 분명하지만, 양식의 규칙과 관습이 너무 엄격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에는 표현도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식이 미술가에게 제공하는 선택의 영역은 넓어졌으며, 미술가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도 증가했다. 미술이 추구하는 참된 목적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그 외 다른 목적이 모두 포기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런 생각이 진실되고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성공한 화가들--소위 관전파 화가들-- 과 죽은 뒤 진가를 인정받는 ‘이단자'들 사이의 구별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19세기의 ‘관전파 미술'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전문가가 거의 없다.

 

7. 앞서 코플리의 그림(p.483, 도판 315)에 대해 논하면서, 역사의 극적인 한순간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려내려는 그의 노력이 한 세기 내내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 같은 그림들은 대개 전시회에서의 큰 성공 이후 곧 인기를 잃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Art)’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9세기의 미술사는 가장 성공하고 가장 돈을 잘 번 거장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끝없는 탐구로 인습을 비판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한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하겠다.

 

8. 이 새로운 미술이 전개되는 과정의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파리에서 일어났다. 전세계의 미술가들이 배움과 토론을 위해 19세기 유럽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몰려들었고, 미술의 새로운 개념이 싹트기 시작 했다.

 

9. 19세기 전반기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였다. 그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추종자로, 고전기의 영웅 미술을 숭배했고 정밀한 묘사를 중시했다.

[도판 328]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년, 캔버스에 유채, 146x97.5cm, 파리 루브르

이 작품은 형태의 표현에 있어서 그의 탁월한 솜씨와 구도에서의 엄격한 명료성을 잘 보여 준다. 많은 화가들은 그의 기교를 부러워하고 그의 권위를 존중한 한편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매끈한 완벽함을 못 견뎌했다.

 

10. 앵그르의 반대세력의 구심점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였다. 그의 일기를 보면 정작 자신은 열광적인 반항아로 간주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으나, 아카데미의 기준을 받아들이기 거부했기 때문에 그런 역할로 간주되었다. 그는 대상의 정확한 묘사와 그리스,로마 시대 조상의 모사를 거부했고, 회화에 있어서는 소묘보다는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아카데미가 화가들에게 요구하는 진부한 주제에 싫증이 나서 1832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아랍 세계의 색채와 풍속을 연구했다.

[도판 329] 외젠 들라크루아, <진격하는 아랍 기병대>, 1832년, 60x73.2cm, 몽펠리에 파브르 박물관

이 작품은 그가 여행 중 얻은 성과 중 하나로, 다비드와 앵그르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명확한 윤곽선, 빛과 그림자 부분의 색조가 섬세히 표현된 나체, 구성상의 배치와 절제, 그리고 애국적이거나 교훈적인 주제 대신 화가는 격양된 순간의 장면에서 느꼈던 기쁨을 전달하고자 했다.

 

11. 들라크루아가 진정으로 찬양한 미술가는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1796-1875)였다. 그의 미술은 이처럼 대조적인 자연에 대한 접근 방식을 서로 연결 시켜주고 있다. 컨스터블처럼 코로도 진실하게 현실을 묘사하려고 했으나 그에게 진실이란 조금 달랐다.

      [도판 330]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정원>, 1843년. 캔버스에 유채, 43.5x60.5cm, 파리 루브르

도판 330은 그가 여름 날 남프랑스의 열기와 정적을 표현하기 위해 모티프의 전반적인 형태와 색조에 주력했음을 볼 수 있다.

 

12. 우연하게도 약 1백년 전에 프라고나르도 에스테 별장의 정원을 택했었다. 프라고나르(도판 310)는 다양함을 추구한 반면에 코로는 푸생(도판 254)이나 클로드 로랭(도판 255)을 생각나게 하는 명료함과 균형을 추구하면서도 빛과 대기를 다른 방식으로 그려냈다. 프라고나르는 소묘로 농담의 점진적인 변화에 몰두 했는데, 코로는 색채를 통해 이와 비슷한 효과를 얻어냈다. 농담의 변화와 색채는 종종 상충하기 때문에 이런 성취는 어려운 일이었다.

 

13. 컨스터블은 클로드 로랭이나 다른 화가들의 전통적인 방법(녹색이 다른 색채들과 충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경을 부드러운 갈색으로 칠하는 방법)을 받아들였고 또 거부했다. 도판 302와 같은 사진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만 그 강렬한 색채들은 카스파즈 다비트 프리드리히(도판 326)가 먼 거리의 효과를 내는데 활용했던 색조의 부드러운 변이를 해치고 있다. 컨스터블의 <건조마차>(도판 325)에서는 전경의 색채와 잎사귀들의 색채가 부드럽게 전체적으로 통합된 색조의 범위 안에서 한데 어우러지고 있다. 코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색채를 통해 그림 속의 빛과 안개를 포착한 듯이 보인다. 그의 주조색인 은회색은 색채들을 완전히 흡수해 버리지는 않으나 색채들이 시각적인 진실에서 출발하지 않은 채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한다. 그 역시 클로드나 터너처럼 고전이나 성경의 인물을 화면 속에 배치해 넣었는데 그에게 명성을 준 것은 이 같은 시적인 성향이었다.

 

14. 코로의 젊은 동료들은 그의 조용한 화법을 좋아했으나 그를 추종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혁명은 주제에 관한 인습과 관련되어 있었다. 아카데미는 고상한 그림은 고상한 인물을 그려야 하고 노동자나 농민은 풍속화(도판 246)에나 적합한 주제라고 믿었다. 1848년 2월 혁명 시기에 프랑스의 바르비종에는 컨스터블의 지도하에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하던 화가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장-프랑스와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도 있었다. 그는 풍경화에서의 이러한 관점을 인물화로 확장하여 농부들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도판 331] 장-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 1857년. 캔버스에 유채, 83.8x111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도판 311에는 극적인 사건과 줄거리 없이 세 명의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은 농부들이 추수가 한창인 들판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목가적인 분위기도 아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체격과 움직임을 강조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인물의 윤곽선을 단순하고도 견고하게 묘사했으며 이를 햇살이 가득한 들판과 대비시켰다. 이렇게 세 명의 농촌 아낙들은 아카데미 파 그림 속의 영웅보다 자연스러운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 인물들의 움직임과 배치는 계산된 리듬에 따른 것이며 이것이 전체 구성에 고요한 안정감과 균형감을 주어 그림을 엄숙한 장면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15.쿠르베는 이러한 운동에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는 1855년 파리의 한 낡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것을 사실주의 G 쿠르베 전이라 불렀다. 오직 진실을 원하는 그의 사실주의는 미술에 있어서 혁명을 의미하였다.

[도판 332] 귀스티브 쿠르베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1854년 캔버스에유채 129x149cm 몽벨리에 파브르 박물관

이 작품은 그림도구를 가지고 걷다가 친구와 후원자로부터 정중한 인사를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 속 구도와 색채 인물의 포즈에서는 꾸밈과 계산된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쿠르베는  그 당시 평범한 효과에 안주하는 인습을 거부하고 세계를 본 그대로 표현하려 노력함으로써 다른 미술가들을 이끌었다.

 

16. 영국의 경우에는 그들이 이처럼 위험한 지경에 빠졌는지 고민한 결과 그들은 아카데미 화가들이 스스로 라파엘로의 진실을 희생시키며 자연을 이상화하는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미술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라파엘로 훨씬 이전의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기위해 스스로를 ‘라파엘 전파’라 불렀다.

      [도판 333]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수태고지>1849-50년 목판에 붙인 캔버스에 유채 72.6x41.9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이 작품은 이들중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힌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수태 고지>이다. 로제티는  중세적인 표현방식이 아닌 정신을 따라 그 장면을 형상화하여 참신한 시각으로 성경을 보도록 노력하였다. 라파엘 전파의 출발점은 밀레나 쿠르베와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비슷했으나  그들의 노력에는 자기 모순적인 부분이 있었으므로 성공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동시대의 프랑스 화가들의 의도가 다음세대에 더욱 성공적이었다.

 

17. 프랑스 미술의 세번째 혁명의 물결은 에투아르 마네와 그의 친구들의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쿠르베의 주장을 신중하게 검토하여 전통 미술에서 진부하고 무의미해진 인습을 찾아내려 하였다. 전통 미술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입체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서 밝은 부분에서 어두운 부분으로 점차 변화를 주는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햇빛 아래에서는 강렬한 명암대조가 나타나 더 밝게 보이며 심지어 그림자도 반드시 회색이나 검은색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마네와 친구들은 사물을 반드시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아카데미의 규칙을 탈피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자 하였다.

 

18. 그런 생각들이 처음에는 과장된 이설로 간주되었던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미술의 발자취를 살펴오면서 우리는 “본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 집착해서 그림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아왔다. 이집트 미술가들은 의도대로 인간의 형상을 짜맞추기 위해서 대상이 “어떻게 보이는 지”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 인들은 단축법을 사용하여 이러한 편견을 타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 인들의 지식이 초기 기독교 시대와 중세 미술에서 다시 두드러지게 되었다. 오히려 르네상스 시기에는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이 원근법의 발견과 해부학의 강조를 통해 오히려 더욱 득세 하였다. 그 후에도 생생한 세계의 재현에 대한 연이은 발견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림 속에서 반드시 인지 되는 일정한 형태와 색깔이 있다는 확신에는 감히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네와 그 추종자들이 일으킨 채색에서의 혁명은 그리스인들이 했던 형태 표현에서의 혁명에 비견할만한 것이다.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연광아래서 각 대상들은 고유 색을 가진 개별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혹은 마음 속에서)뒤섞인 색조의 혼합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19. 이러한 발견들은 갑작스럽게, 또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아니다. 마네의 작품들은 초기의 것들조차도 보수적 미술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는 전통적 명암법을 포기하고 강렬하고 거친 대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마네의 작품들이 이전 시대의 대가들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에 당시 화가들과 비평가들 사이에 이루어진 격렬한 논쟁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 스로는 자신이 혁명가이고 싶어한다는 것을 극구 부인했다. 그는 계승되고 발전 되어온 과거 위대한 전통속에서 영감을 찾아내었다. <도판334><발코니>속에서 보이는 인물과 공간의 강한 명암대비는 분명 고야의 그림들 중 하나에서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도판 334]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1868-9년. 캔버스에 유채, 169x125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그러나 마네는 고야보다 더 멀리까지 나아갔다. 과거 화가들은 방법적으론 달랐을지라도 모두 단단한 몸체들이 주는 이상을 자아내려 했고 명암 대조를 통해 만들어냈다. 그들이 그린 인물들과 비교해서 마네가 그린 인물들의 머리는 평면적이며 심지어 코의 형태또한 확실히 그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처리들이  당시 사람들에겐 단순히 무지의 소치로 보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이 간다.

 

20. 이 새로운 이론들은 외광(外光, Plein air), 즉 옥외의 자연 광선에서의 색의 취급 뿐만 아니라 움직이고 있는 형태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마네의 석판화인 <도판 335>와 영국 화가 윌리엄 파웰 프리스(William Powell Frith : 1819~1909)의 작품인 <도판 336><더비 경마일>을 비교 해보면 마네의 낙서 같은 석판화 작품이 더 ‘진실한’ 것(순간, 사건)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판 335] 에두아르 마네, <롱샹의 경마> 1865년경. 석판화, 36.5x51cm

[도판 336] 윌리엄 파웰 프리스, <더비 경마일>, 1856-8년. 캔버스에 유채, 101.6x223.5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21. 마네와 뜻을 같이 한 화가 중 하나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 1840 - 1926)이다. 그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오래되어 굳어진 습관의 변화는 물론 안이한 제작 방법에의 거부이기에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연' 혹은 ‘모티브'는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그림을 구성하는 시간적 여유가 그만큼 없었고, 따라서 모네는 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갔다. 그 당시 비평가들은 이러한 불완전한 마무리, 즉 되는 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제작 방식에 불만을 가졌고, 모네 주변의 풍경 화가들에 대해서 ‘인상주의자들'이라는 조롱섞인 명칭을 붙여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무리의 화가들 자신 스스로가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또한 그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도판 337] 에두아르 마네, <배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 1874년

 

22. 위에서 언급한 모네와 그 주변 화가들 - 인상주의자들 - 의 첫 전시회에 대한 신문 기사들은 그 당시 비평가들이 그들을 어떻게 조롱하고 경멸했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23. 비평가들을 그렇게 격분시킨 것은 단순히 그림의 기법만이 아니라, 인상주의자들이 선택했던 ‘소재’들에도 있었다. 과거의 화가들이 시도했던 방식 - ‘한 폭의 그림 같이' 자연의 한 부분을 재현하는 방식 - 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는 낯설음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의 컨스터블과 터너는 그들 각자의 방법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소재들을 발견해나갔다. 터너의 <눈보라 속의 증기선>(도판 323)과 같은 그림을 보며 클로드 모네는 ‘회화의 주제보다는 빛과 증기의 효과 (소재)가 가지는 마술적인 힘이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모네는 파리의 철도역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일상의 광경이 지니는 진정한 ‘순간적 인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신중한 솜씨로 색조의 균형을 이루어내며 완성하였다.

[도판 338] 클로드 모네, <파리의 생라자르 역>, 1877년

 

24. 인상주의자들은 새로운 원리를 풍경화 뿐만 아니라 생활의 장면 어디에나 적용시켰다.

[도판 339]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갈레트'의 무도회>,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31x175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의 그림은 밝은 색채의 즐거운 혼합물을 보여주며, 인파 속에 쏟아지는 햇빛의 효과를 연구하고자 한 결과이다. 이 그림은 마무리가 끝나지 않은 '스케치'같아 보이나 이는 예술적인 지혜의 소산으로, 르누아르가 각 세부까지 세세히 다 그렸다면 그의 그림은 지루하고 생동감 없이 보였을 것이다.

 

25. 인상주의자 중 그 방법을 가장 강하게 고수했던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햇빛이 비치는 파리의 거리가 주는 '인상'을 그렸다. 그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보이느냐고 화를 내곤 했는데 이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체에는 어떠어떠한 부분들이 '속해있다'하는― 기존의 지식을 통해 판단을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도판 340] 카미유 피사로, <이탈리아 거리, 아침, 햇빛>, 1897년. 캔버스에 유채, 73.2x92.1cm, 워싱턴 국립 박물관, 체스터 데일 컬렉션

 

26. 대중들이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인상주의자들의 진정한 목표는 화가가 겪었던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것이었다.

 

27. 인상주의자들이 새롭게 가지게 된 자유와 능력에 대한 감회는 그들에게 세계 전체가 회화를 위한 적절한 주제가 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색조의 조합, 색채와 형태의 흥미로운 구성, 양달과 응달의 즐거운 조화 등을 발견할 수 있는 어디에서든 미술가는 이젤을 세워놓고 그가 받은 인상을 캔버스 위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 '품위 있는 주제', '균형 잡힌 구도', '정확한 소묘'와 같은 과거의 인습은 사라지고 미술가들은 그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그리는가에 있어 자기 자신의 감각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돌이켜보면 그들은 완벽히 승리했으며 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타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을 비웃었던 비평가들이 큰 오류를 범했음이 증명되었고 비평은 다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위신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실패는 미술사에 있어 인상주의 이념의 궁극적인 승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28. 인상주의자들이 활동했던 19세기에 두 조력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승리는 그처럼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조력자 중 하나는 사진술이었다. 휴대용 카메라와 스냅 사진의 발전은 인상주의자들의 회화가 등장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 했다. 카메라는 우연한 광경과 예기치 않은 각도가 가지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사진술의 발달은 미술가가 심도 있는 탐색과 실험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19세기의 사진술이 회화가 지녔던 기능을 떠맡게 되면서 미술가들은 점차적으로 사진술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근대 미술은 이런 발명의 충격 없이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29. 두번째 조력자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였다. 일본은 중국 미술의 영향을 받아 약 1000년동안 지속해왔다. 그러나 아마도 유럽 판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18세기의 일본 미술가들은 동양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들을 포기하고 채색 목판화를 위한 주제로서 하층민의 생활 장면들을 선택했다. 채색 목판화는 장인이 가진 기교의 완벽성과 대담한 의도가 결합된 것이었으나 일본의 감식가들은 이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일본이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교역을 강요받았을 당시 이 판화들은 포장지나 빈 곳을 메우는 종이로 사용되었다. 마네 주변의 화가들은 이것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열심히 수집한 최초의 부류였다. 일본 판화는 프랑스의 화가들에게 유럽적 인습을 탈피할 수 있는 깨달음을 주었다.

[도판 341] 가쓰시카 호쿠사이, <우물 뒤로 보이는 후지 산>, 1835년. 목판화, '후지산의 100경' 중의 하나, 22.6x15.5cm

[도판 342] 기타가와 우타마로, <자두꽃 만발한 경치를 보려고 발을 걷어올리는 정경>, 1790년대 말엽. 목판화, 19.7x50.8cm

후쿠사이는 우물의 발판 뒤로 보이는 후지산의 정경을 재현했고, 우타마로는 판화지의 가장자리나 대나무 발에 의해 잘려나간 인물을 묘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유럽 회화의 기본 규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경향은 인상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들에게 고대의 지배적인 지식이 잔존해 있음을 발견했다.

 

30. 에드가 드가는 이러한 가능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는 동감하였지만 그들과의 간격은 유지했다. 드가는 구도와 소묘에 굉장히 관심을 쏟았고 따라서 앵그르를 존경했다. 그는 의외의 각도에서 표현할 수 있는 공간과 입체감을 즐겼다.

[도판 343] 에드가 드가, <앙리 드가와 그의 조카딸>, 1876년. 캔버스에 유채, 99.8x119.9cm, 시카고 아트 미술 연구소

이런 성향은 실내(연습실)의 발레 장면을 주제로 선택하기 좋아했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곳에서 드가는 매우 다양한 자세와 여러 각도에서의 신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드가의 이런 그림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지만 단순히 예쁘다는 이유로 그린 것은 아니었고, 마치 인상주의자들이 자기를 둘러싼 풍경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객관성으로 그녀들을 관찰한 것이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이념들이 완전한 구성의 대가만이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아카데미적 관례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증명했다.

[도판 344] 에드가 드가, <출연 대기>, 1879년. 종이에 파스텔, 99.8x119.9cm, 개인 소장

 

31. 조각에서의 모더니즘 논쟁은 오귀스트 로댕을 필두로 대두되었다. 이미 저명한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대중적 인기도 누리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은 비평가들에게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음과 동시에 인상주의 반항아들의 작품과 함께 취급되기도 했다. 그도 역시 ‘마무리'된 외형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으며 심지어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남겨두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게으름의 소산 혹은 비정상적 습관으로 보였을 것이다.

[도판 345] 오귀스트 로댕, <조각가 쥘 달루>, 1883년. 청동, 높이 52.6cm, 파리 로댕 박물관

[도판 346] 오귀스트 로댕, <신의 손> 1898년 경. 대리석, 높이 92.9cm, 파리 로댕 박물관.

‘작품의 완성은 미술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주장했던 램브란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로댕의 영향력은 프랑스 외부로 인상주의가 퍼지는데 일조했다.

 

32. 세계의 미술가들은 파리에서 접한 인상주의를 새로운 이념과 함께 부르주아 세계의 편견과 인습에 대항하는 태도로 고국에 퍼다 나르기 시작했다. 이들 중 미국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는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도 드가나 로댕처럼 엄밀히 보면 인상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일반 대중이 감상적인 일화에 보여주는 관심을 격멸했다는 데에서 파리의 화가들과 그 뜻을 공유했다. 그는 주제보다는 색채와 형태들로 전이시키는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휘슬러는 작품에 기이한 제목을 붙이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그의 어머니를 그린 초상화에 <회색과 검정색의 구성>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도판 347]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미술가의 어머니의 초상> 1871년. 캔버스에 유채, 144x162cm

그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현대미술을 위해 투쟁했는데, 충격적이고 별난 제목을 붙이는 그의 습관과 아카데미의 전통을 무시하는 성향이 비평가 존 러스킨의 분노를 샀다. 1877년, 휘슬러는 일본풍의 야경화들을 <야상곡>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하고 작품 하나에 200기니를 매겼는데 러스킨이 비아냥 조로 혹평하자 명예훼손 죄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도판 348]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푸른색과 은색의 야상곡; 오래된 배터시 다리> 1872-5년경. 캔버스에 유체, 67.9x50.8cm.

 

33. 이 소송건의 원고와 피고 양측은 실제 주변의 추악함과 천박함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러스킨이 도덕성에 호소한 ‘미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자각'과 휘슬러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심미주의 운동'이라는 두 견해는 19세기가 끝날 무렵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26장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 19세기 후반

 

1. 표면적으로 볼 때 19세기 말은 대번영의 시기였으며 이러한 번영에 스스로 만족한 시기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낀 미술가와 작가들은 대중의 마음에 드는 예술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점차 불만을 갖게 되었다.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사람들의 선전 계몽 활동이 기계적 대량 생산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야기한 문제들에 대중의 눈을 뜨게 했고 순수하고 단순한 ‘손으로 만든 소박한’ 것에 대한 기호를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2. 미술가들은 각각의 재료가 갖고 있는 가능성과 디자인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의 ‘신미술’[아르 누보(Art Nouveau; 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의 프랑스 어. 당시의 심미주의적이고 장식적인 경향의 미술 운동)]을 갈망했다. 건축가들은 새로운 종류의 재료와 새로운 형태의 장식에 대해 실험하였다. 그리고 벨기에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의 설계 밑바탕에 깔린 논리의 여러 의문들을 가진다.

3. 오르타는 일본 건축 양식에서, 좌우대칭의 원칙을 버리고 굽이치는 곡선의 효과를 활용했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이 곡선들을 현대의 요구에 잘 맞는 철제 구조물에 옮겨놓았다. 이 새로운 창안은 아르누보와 동일시 되었고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도판 349] 빅토르 오르타, <계단>, 브뤼셀의 폴-에밀 장송가(街)에 있는 타셀 호텔, 1893년.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

4. 19세기 말까지 젊은 미술가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업적에도 우려와 불만의 느낌이 생겨났다. 이러한 감정에서 흔히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여러가지 미술 운동이 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근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당시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회화의 규칙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현대 미술의 시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리기를 원했다. 그들이 벌인 보수적인 대가들과의 논쟁은 그 목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대한 것이었다. 인상주의에 이르러서 자연을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아마도 일부 화가들이 인상파 화가들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던 것이 이들의 완전한 승리 때문이었던 것 같다.

 

5. 그러나 우리는 미술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그 대신 더 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점들의 본질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은 폴 세잔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가하였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평판에 염증을 느끼고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 떠들썩거리는 비판 소리에 상관없이 그의 예술의 문제점들을 탐구했다. 그는 그의 그림을 사줄 고객을 찾는데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독자적인 수단과 규칙적인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제기한 예술적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작품에 가장 정확한 규범을 적용할 수 있었다. 그는 이론적인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숭배자들에게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몇 마디로 설명하고자 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푸생과 같은 고전적 대가들은 그들 작품에서 놀라운 균형과 완벽성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세잔은 푸생의 그림 같은 웅대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지닌 미술을 자신의 예술적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푸생의 방법으로는 그것을 더 이상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대가들의 그림은 고전 시대 작품의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형태의 배열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이나 견고함에 대한 인상도 새로운 관찰보다도 전통적 규범을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세잔은 이러한 아카데믹한 수법이 자연과 대립한다고 생각한 인상주의자들과 견해를 공유했다. 그는 자신의 인상에 따라 자기가 본 그대로 형태와 색채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난 그는 당시 그가 택한 방향에 대해 불안함을 느꼈다. 인상주의자들은 ‘자연’을 그리는 데 있어서 대가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연을 본떠서’ 그림을 그리고, 인상주의 대가들이 발견한 것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푸생의 미술을 돋보이게 한 질서와 필연의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6. 그 문제 자체는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자연의 정복이 완성되고 원근법을 창안되면서 중세 미술의 명료한 구성이 흐트러졌고, 라파엘로 세대에 와야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가 생겨난 던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동일한 문제가 다른 단계에서 또 다시 반복하게 된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빛 속에서 확실한 윤곽이 없어지고 채색된 그림자가 등장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명료성과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이 업적들을 보존할 수 있을까? 그는 조화로운 화면 구성을 살리기 위해 ‘구도된’ 풍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견고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아카데믹한 소묘 방법과 명암법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색채의 올바른 사용에서 그는 더욱 절박한 문제와 마주쳤다. 세잔은 명료함 뿐 만 아니라 강렬하고 순도 높은 색채를 열망했다. 중세의 미술가들은 사물의 실제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었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의 작은 색점이나 터치의 병치가 만들어내는 밝은 색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남프랑스의 자연의 색조를 온전히 나타내길 바랐으나, 이는 현실감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방식의 그림들은 평면적이며 깊이감을 주지 못한다. 세잔은 온갖 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자연을 대했을 때의 감각적인 인상에 절대적으로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그의 말대로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있는 미술품과 같이 더욱 견고하고 지속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려는 그의 의도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실험을 중지하지 않았고 그것은 성공했다. 만약 미술이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술은 계산이 아니다. 미술가들이 그토록 신경을 쓰는 균형과 조화는 기계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갑작스레 ‘일어나는’ 것이며, 아무도 어떻게 또는 왜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7. 남프랑스의 도판 350<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린 풍경화는 빛을 듬뿍 받고 있지만 동시에 명확하고 견실하다.

[도판 350] 폴 세잔, <벨뷔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 산>, 1885년경. 캔버스에 유채, 73x92cm, 펜실베이니아 주 메리온, 반스 재단

이 그림은 명료한 화면 구성과 함께 깊이감과 거리감을 확실하게 전해준다. 그림의 수직적, 수평적 묘사들은 질서와 평온함을 가지고 있으며 세잔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느낌을 찾을 수 없다. 붓놀림조차 자연스러움을 배가 시키며 방향을 바꾼 경우는 도판 351<프로방스의 산>에서 볼 수 있는데, 전경의 바위를 강조함으로써, 화면 위쪽에 생길 뻔했던 평면감을 상쇄시키기 위해 그가 얼마나 주도면밀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도판 351] 폴 세잔, <프로방스의 산>, 1996-90년. 캔버스에 유채, 63.5x79.4cm, 런던 국립 미술관

그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도판 352)는 단순명료한 형태가 그림에 얼마나 안정감과 평온함을 주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비교할 때 마네의 도판337<모네의 초상화> 같은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은 단지 즉흥적으로 재치 있게 그린 것 같아 보인다.

[도판 352] 폴 세잔, <세잔 부인의 초상>, 1883-7년. 캔버스에 유채, 62x51cm, 필라델피아 미술관

 

8. 물론 세잔의 작품 중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도판353<정물>과 같은 그림은 네덜란드의 그것에 비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도판 353] 폴 세잔, <정물>, 1879-82년경. 캔버스에 유채, 46x55cm, 개인 소장

세잔의 작품이 처음에 더덕더덕 칠해진 형편없는 것이라 조롱받은 것도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눈에 띄게 서툰 수법을 다음과 같이 추리해볼 수 있다. 세잔은 회화의 전통적인 수법을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어떤 그림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긁기에서부터 출발하려고 결심했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정물을 그렸다. 하지만 세잔은 자신이 해결하고자 했던 몇몇 특정한 문제들을 연구하고자 정물을 소재로 택했던 것이다. 그는 입체감과 색채의 관계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과처럼 밝은 색채의 견고하고 둥근 물체가 이러한 문제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소재였다. 또한 그는 균형 잡힌 화면 구성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과일 그릇의 한쪽을 잡아 늘려 왼쪽의 빈 공간을 메꾸려했던 것이다. 그 는 탁자 위에 있는 모든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관계가 잘 드러나 보이도록 탁자를 앞으로 기울게 묘사했다. 밝은 색채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깊이감을 살리고, 깊이감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질서 있는 화면 배치를 이루려고 한 그의 피나는 노력, 그 모색과 고투 속에서 필요하다면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했던 단 하나는 바로 윤곽선의 정확성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전통적인 원근법을 과감히 무시했다. 그는 종래의 전통적인 소묘법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자신도 ‘정확한 소묘’를 무시한 이 순간이 미술사상 대전환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9. 세잔이 인상파의 방법과 질서를 어떻게 결합할까 고민하는 동안,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 1859-91)는 이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인상주의 회화의 기법을 출발점으로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과학 이론을 탐구하여 순수 원색을 분할해 점을 규칙적으로 찍어 화면을 구축하려했다. 이를 통해 색채의 순도와 명도를 유지하면서도 눈에는 혼합된 색처럼 보이리라 기대했다. 점묘법(pointillism)이라는 극단적인 기법으로 인해 모든 윤곽선이 흐려져 그림을 알아보기 힘들게 될 위험에 대해서, 쇠라는 세잔이 했던 것보다 더 극단적으로 형태를 단순화함으로써 이를 보완했다.

[도판 354] 조르주 쇠라,<쿠르브부아의 다리>, 1886-7년, 캔버스에 유채, 46.4x55.3cm, 런던, 코톨드 미술연구소

쇠라는 극단적인 수준까지 수직선과 수평선을 강조했으며, 이로써 자연의 충실한 모사로부터 멀어져 흥미롭고 표정이 풍부한 색면 구성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0. 쇠라와 세잔이 각기 파리와 엑스에서 작업을 하던 1888년, 네덜란드 출신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남프랑스의 아를(Arles)로 왔다. 이곳에 머물며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서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는데, 여기에는 그의 화가로서의 사명감, 그의 투쟁과 승리, 절망적인 고독, 타인과 사귀고자 했던 간절한 열망을 비롯해 작품을 제작했던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1888년 겨울 정신쇠약으로 발작을 일으킨 이후 1890년 7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 고통은 14개월간 계속되었다.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10년이 채 못되며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마지막 3년 동안에 그려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직접적이고 강렬한 효과를 지니면서,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과 위안으로 채워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갈망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그처럼 비할 데 없이 강렬한 표현 속에서도 섬세하고도 치밀한 것이었다.

 

11. 그는 원색의 색점과 붓놀림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나, 이는 색채를 분할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흐의 붓자국은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고흐는 이러한 새로운 수법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대상과 장면, 즉 붓으로 색칠함과 동시에 소묘할 수 있고, 두텁게 물감을 바를 수 있는 소재를 즐겨 그렸다. 그루터기와 관목들, 곡물밭, 울퉁불퉁한 올리브 나뭇가지, 사이프러스 나무의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눈뜬 화가가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도판 355] 반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곡물밭>, 1889년. 캔버스에 유채, 72.1x90.9cm, 런던 국립 미술관

 

12. 고흐는 광기 어린 창작 행위에 자신을 던졌다. 그는 이전까지 어떤 화가도 그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소박한 사물들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아를의 하숙방(도판 357)을 그려서 동생 테오에게 보내면서 그는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판 356] 반 고흐, <생트마리 드 라 메르의 풍경>, 1888년. 43.5x60cm, 빈터투어, 오스카 라인하르트 컬렉션

[도판 357] 반 고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1889년. 캔버스에 유채, 575.5x74cm, 파리 오르셰 박물관

 

13. (인용문 요약-편지글) 단순히 침실을 색채만으로 그리고 단순화시켜 방 안의 모든 물건에 장엄한 양식을 부여하려고 한다. 여기서 색채로 휴식, 수면을 암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그림을 보고 두뇌와 상상력이 쉴 수 있도록. (묘사) 이 구성은 단순하다. 명암과 그림자는 없애버리고 일본 판화처럼 자유롭고 평평하게 색을 칠하려고 한다.

 

14. 고흐는 정확한 묘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였고 그가 ‘입체경적 현실감(stereoscopic reality)’이라고 말한 자연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리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물의 형태를 과장, 변화시켰다. 그는 같은 시기 세잔이 도달했던 것과 비슷한 지점에 다른 방법을 통해 도달했다. 그들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중요한 첫발을 디뎠다. 세잔을 정물을 그릴 때 형태와 색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려 했고, 자신의 특수한 실험이 필요할 때만 ‘정확한 원근법’을 포기했다. 반면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고 필요하다면 언제나 형태를 왜곡시켰다.

 

15. 세잔과 고흐의 뒤를 이어 1888년 남프랑스에 폴 고갱(Paul Gauguin : 1848-1903)은 또 다른 제 3의 화가였다. 그와 친해지길 무척 갈망한 고흐는 영국의 라파엘 전파가 지녔던 화가들 사이에 우정을 꿈꾸며 그를 설득해서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인간적으로 고갱은 고흐와 달리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두 화가 사이에 공통점은 비교적 늦게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고갱은 이전에 유능한 주식 중매인이었다), 거의 혼자서 그림을 독학했다는 것이다. 둘의 우정은 고흐가 정신 착란으로 고갱에게 달려들어 고갱이 파리로 도망치며 끝을 맺었다. 2년 후 고갱은 유럽의 생활이 빼앗은 본능적이고 강렬한,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되찾고자 유럽을 완전히 떠나 ‘남양 군도’의 하나인 타히티 섬으로 갔다.

 

16. 물론 고갱이 문명에 대한 혐오를 느낀 최초의 예술가는 아니다. 어느 시대이든 예술가들이 그 시대의 ‘양식’에 대해서 자의식을 갖게 될 때마다 그래왔다. 인상주의자들은 일본 판화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 판화는 고갱이 열망했던 강렬함이나 단순함과 비교해볼때 세련된 예술이었다. 처음에 그는 농민의 삶을 연구했으나 오래가지 않았고, 원주민으로 살아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타히티 섬에서 가져온 그의 작품들을 옛친구들은 그림의 야만적이고, 미개한 분위기에 당혹스러워 했으나, 이는 고갱이 원하던 것이었고 그렇게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도판358 <백일몽>의 야만적이고 거친 모습은 당시에 매우 이국적이었다. 그는 원주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자 노력했고, 토착민 장인들의 ‘원시’ 미술수법을 연구하고 때로는 이를 작품 속에 묘사하기도 했다.

[도판 358] 폴 고갱, <백일몽(白日夢)>, 1897년. 캔버스에 유채, 95.1x130.2cm, 런던 코톨드 미술 연구소

세잔과는 달리 그는 이 단순화된 형태와 색채의 구성으로 인해 혹시 그의 작품들이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남양군도로 영원히 돌아가 그곳에서 고독과 절망의 몇 해를 보낸 후 질병과 궁핍에 쓰러저 죽었다.

 

17. 세잔, 반 고흐, 고갱 이 세 화가는 절망적인 고독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었고 생전 인정받지 않은 채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미술에 강렬함은 아카데미 미술에 만족하지 않는 젊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들은 세잔이 느꼈던 색조 변화를 통한 깊이감과 보는대로의 색채 자체의 아름다움 사이에 충돌되는 어려움을 해결해낼, 아니면 적어도 피해나갈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 1867-1947)는 도판 359<식탁에서>처럼 마치 캔버스 위에 아른거리는 색채 느낌으로 독특한 솜씨와 감수성을 보여준다.

[도판 359] 피에르 보나르, <식탁에서>, 1899년. 판지에 유채, 55x70cm, 취리히, E. G. 뷔를러 재단

스위스의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 : 1853-1918)는 도판360<툰 호수>에서 그의 고향 풍경을 대담하게 단순화해 묘사하여 마치 포스터와 같은 명료성을 보여준다.

[도판 360] 페르디난트 호들러, <룬 호수>, 1905년. 캔버스에 유채, 80.2x100cm, 제네바 미술 역사 박물관

 

18. 이 그림이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유럽 미술이 일본으로부터 습득한 수법은 특히 광고미술에 적합하다는 것이 곧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 1864~1901)은 이처럼 절제된 회화 수단을 포스터라는 새로운 미술에 도입 하였다.

[도판 361]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사절단:아리스티드 브뤼앙>, 1892년. 석판화 포스터, 141.2x98.4cm

 

19. 삽화 미술 분야도 역시 그와 같은 영향이 확산 되면서 똑같이 도움을 받았다.

[도판 362] 오브리 비어즐리, <오스카와일드의 《살로메》 삽화>, 1894년. 일본 양피지에 양각과 망판 인쇄, 34.3x27.3cm

 

20. 아르 누보 양식이 유행하던 이 시기에 많이 사용된 찬사의 말은 ‘장식적’이라는 것이었다. 회화와 판화는 그 내용 이전에 시각적인 즐거운 화면 구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일부 미술가들은 이러한 유행 가운데서 중요한 것들이 사라졌다고 느꼈고, 그 것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세잔은 균형과 질서의 감각이 사라졌다고 느꼈고, 반 고흐는 미술이  강렬한 정열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고갱은 그가 본 인생과 예술 전반에 불만을 느꼈고 그보다 단순하고 솔직한 어떤 것을 원시인들 속에서 발견하리라 기대했다. 이 세 화가가 모색했던 각각의 해답은 세가지 현대 미술 운동(입체주의(cubism), 인상주의(Impressionism),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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