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운동, 프랑스 5월 혁명, 금지함을 금지하라
1968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8명의 청년들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사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의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된 전례 없던 반체제, 반문화 운동이다. 68혁명으로도 불리며 반체제에는 전통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도 포함한다.
파리에서 시작한 시위는 냉전과 베트남 전쟁 등의 시대적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해 미국, 서독, 체코슬로바키아,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했다.
사실 프랑스의 5월 혁명은 60년대 전체를 아울러서 유럽(특히 서유럽)과 미국에 흐르던 운동이 분수령을 이룬 것이다. 60년대 초반부터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대학생의 열렬한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졌다.
대한민국 내에서는 정치적 스탠스에 따라 그 명칭이 조금씩 다른데, 중립적 의미로는 '68운동'이라 하는 편이다. 신좌파나 사회자유주의 진영 등지에서는 기존 전통문화의 고리타분함을 타파했다는 긍정적 의미로 '68혁명'이라 하며, 강경 보수 진영에서는 전통적 가치가 파괴되었다는 부정적 의미로 '68폭동'이라고도 하는 편이다.
경제적 배경
경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된 사회를 수습한 후로, 서유럽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전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여 그 후유증으로 타격이 컸다. 무엇보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적 번영은 사실 그들이 지배하던 방대한 식민지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이들 식민지를 다시 지배하려 했지만 식민지들이 강력하게 저항했고 세계 각국도 반대했으며, 결정적으로 미국과 소련 양강 역시 제3세계 편을 들어주며 영국과 프랑스의 행태에 제동을 걸면서 결국 식민지들이 차례로 독립하게 되었다.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적 동력의 상당 부분이 상실되었다.
또한 1960년대는 프랑스의 경제적 호황기인 영광의 30년의 끝물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노조와의 대립 심화로 생산력 저하가 두드러지는 반면 패전국 일본과 서독이 미국과 함께 제조업에서 강세를 보이며 세계 시장을 장악해 나가자 프랑스의 제조업은 침체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서독 또한 50년대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며 빠르게 재건되었다. 하지만 서독도 비슷하게 제조업 수출 산업 위주 경제였으며 조선업 정도를 제외하면 많은 산업들이 일본과 겹쳤는데, 전자, 자동차 등에서 일본에게 점차 시장을 빼앗기며 밀리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부터 서독 경제 성장 둔화세가 확연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서유럽이 미국과 일본에 뒤쳐지자 시민들은 그 원인을 드골주의 등 우파 정권의 무능으로 돌리기 시작했고 실제로도 그들의 무능함이 제대로 드러났다.
사상적 배경
사상적으로는 당시 서유럽에서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 흐름을 주도하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시각에 따르면, 사회는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인해 사회가 항상 진보하지만은 않는다는 비판이론의 시각이 확대되었다. 68운동 역시 당시 사회가 보수에 정체되었다고 여겨, 구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시각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68운동이 점차 변질되면서, 이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다른 독자적인 행보를 보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가인 아도르노도 처음에는 68운동을 지지했으나 과격한 68운동의 움직임을 보자 반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판이론의 뿌리인 위르겐 하버마스 또한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는 마조히즘이며, 학생운동은 좌파 파시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가 운동권의 십자포화를 받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에서 슈타른베르크(Starnberg)로 교직을 옮겼다. 하지만 마르쿠제의 경우 68의 과격함을 아도르노와 같이 반대하기는 했지만 신좌파적 활동을 68이후에도 전개한 바 있다.
마오이즘과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도 큰 역할을 했다. 학생들은 마오쩌둥, 호치민, 체게바라 등의 공산 혁명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붙인 피켓을 앞세웠고, 그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특히 가장 인기 있었던 혁명가는 당시 문화대혁명과 베트남 전쟁의 주인공인 마오와 호치민이었다. 소르본 대학교/파리 대학교를 비롯 각 대학 건물에는 공산권 국가의 관공서처럼 마오와 체게바라 등의 초상화가 칼 마르크스, 레닌과 함께 걸리기도 했다. 물론 당시 유럽에 알려진 문화대혁명은 언제나 그래왔듯 중국이 철저히 미화한 이미지였다. 일각에서는 중국에서 왜곡한 문화대혁명 선전 때문에 학생들이 실상을 잘 모른채 이를 찬양한 것이며, 학생들은 이용당한 것이며 피해자라고 변론하지만, 이미 1930년대부터 중국 공산당은 친좌파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왜곡된 실상을 선전해 왔기 때문에 이를 학생들이 곧이곧대로 믿었을 가능성은 적고, 혹시 그대로 믿었다 한다면 어떠한 비판적 검증 없이 잘못된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므로 결국 지성인을 자처했던 당시 대학생들이 오늘날 후배 세대들의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사회적 배경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 각국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68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1968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세대, 즉 2차 대전이 끝난 해인 1945년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2차 대전의 참상에서 태어나 전후 극복과 함께 성장한 이들은 전쟁을 일으킨 기성 세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자랐다.
당시 서구 사회는 나치 청산이 이루어지기 전으로,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의 부역자들은 여전히 정치, 경제 부문의 요직에 앉아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쿠르트 키징어 전 서독 총리, 테오도르 오버랜더 전쟁피해자, 추방자 연방장관, 한스 글롭케 연방총리청장, 라인하르트 겔렌 연방정보국장, 헤르만 요제프 압스 당시 도이체방크 총재,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독일 경제인연합회장, 1950년대 서독 최고 갑부 중 한명인 프리드리히 플리크 등이 있다. 이들로 대표되는 기성 세대는 홀로코스트 등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 범죄에 대해 없었던 일로 취급하며 사회적 망각을 강요했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 독일의 나치 청산, 이탈리아의 남북격차 및 빈부 격차 문제로, 미국은 뿌리깊은 인종차별 및 그와 연계된 흑인 도시 빈민 문제로 고유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또한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주로 참전군인을 대상으로 한) 확대된 대학교육도 문제의 원인 중 하나였다. 기존의 대학생-대졸자가 상위계급에 속했다면, 확대된 대학교육은 양적으론 늘어났으나 질적으론 열악했고 (쉽게 말해 꼰대스러운 교육체계와 교육자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대졸자들이 기대했던 고급 일자리가 부족했다. 대학생=고소득자 공식이 붕괴하며 고학력 무직자라는 겪어본 적 없던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다. 게다가 68혁명 당시의 대학생들은 부모 세대가 나치 독일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후손들이었다. 결국 어두운 과거사와 나치의 잔재를 비롯한 적폐청산이 제대로 안 되었고, 당연히 젊은 세대들은 프랑스의 모순된 사회지도층에 강한 불만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저마다 고유한 문제를 겪고 있던 미국과 유럽에 반전(反戰)이라는 공통된 의제를 던져주었다. 2차 대전이나 한국전쟁과 달리 취약한 명분을 가지고 있던 베트남 전쟁은 전쟁을 치르는 미국 국내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했고,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대중은 네이팜탄 등 비인도적 살상 무기가 동원된 전쟁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60년대 중반,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대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에 뛰어들었다. 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을 제3세계 국가(북베트남)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보았고, 이를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기성 세대가 만들어낸 문제와 다를 바가 없다고 인식했다. 당시 운동권의 핵심 의제였던 베트남전과 제국주의에 대한 규탄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2차 대전기의 유대인, 체 게바라가 이끄는 쿠바인,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콩과 동일시하게 하였으며, 당시 왜곡된 채로 서방에 선전되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각국의 캠퍼스에서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 미국의 흑인민권운동, 독일의 나치 청산 문제 등 고유한 의제를 던지며 한껏 성장한 각국의 학생 운동권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공통된 의제를 빨아들이며 국제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68운동의 거대 흐름 중 하나로 미국의 히피 역시 꼽힌다. 68운동의 움직임이 미국에서 크게 터진 사건이 바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다.
혁명의 움직임이 캠퍼스를 휩쓸면서, 한껏 축적되어 있던 근대 서방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문제로는 성차별, 인종차별, 권위주의의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들을 비판했던 이들은 지식인층과 고등교육을 받았던 중간관리층으로 이들이 68 운동을 주도했다. 이 당시 서구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에 고등교육의 기회가 상류층만이 아니라 그 아래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한마디로 19세기적 전통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모순들, 또 그에 따른 비판들이 발생했던 것이다.
남녀 분리, 성적 억압도 68운동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였다. 애당초 68혁명의 도화선이 된 계기가 대학가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에 방문하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현재는 개방적인 프랑스가 과거에는 서구권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보수적이었으며 1960년대까지도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국가였다. 특히 프랑스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것이 1946년이며 공식적으로 남편의 동의 없이 여성이 은행 계좌를 열거나 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1965년, 경구피임법이 합법화된 것이 1967년이었다.
대학생이 주축이 된 운동
68운동의 특징은 바로 운동의 주축이 대학생이라는 점이다. 과거 대부분의 혁명(운동)은 부르주아지 혹은 노동자와 같이 특정 (경제) 계층이 중심이었다. 반면, 68혁명은 초창기에는 대학생을 주축으로 하여 점차 다른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의 5월 혁명이 분수령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구좌파의 대표 계층인 노동자가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후 구좌파+신좌파 연합은 이탈리아로 이어진다.
이것은 시대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과 미국은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전쟁 동안 이를 악물고 소위 '하면 된다'는 악바리 근성으로 살아온 기성세대와는 달리 풍족한 소비 생활과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당시 젊은이, 특히 대학생들은 먹고 사는 문제 뿐 아니라 사회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 대학생들은 전체적으로 좌파이지만, 스스로를 '신좌파'로 여기며 이전의 좌익/공산 계열을 '구좌파'로 구획짓고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권력을 혐오하기에 대학생들은 저항의 움직임으로 곳곳에 자유대학을 세우면서 모두가 선생이고 학생이고자 하였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
당시든 현재든 기독교가 정신적 문화의 중심이었던 서구 사회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68운동은 ‘금지함을 금지하라(Il est interdit d'interdire)’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 등 당시 슬로건에서 보이듯 기존 정치체제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때문에 종교적이고 경건한 삶을 혐오하였으며,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종교 인구가 급속도로 감소하였으며, 오늘날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나이 든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 시각은 21세기에도 이어져 실제로 유럽 성당들에 들어가 보면 신자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정 반대로 동양 종교, 그중에서도 힌두교, 티베트 불교,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고평가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에도 불교에 관심을 갖는 서구인들은 있었지만 68운동 시기에 데시마루 다이센(弟子丸泰仙, 1914~1982)이란 일본 승려가 프랑스에 입국한 것을 계기로 유럽에 본격적으로 불교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프랑스에 미친 영향
이 혁명으로 결과적으로 샤를 드골 정권이 붕괴되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68년 의회를 해산하고 6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기성 세대들의 불안감으로 보수파가 압승하였지만 이후에 샤를 드골이 자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국민투표를 시행해먹었다가 투표에서 패배해 물러난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이것을 괜한 짓 해서 물러났다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단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안건의 국민투표에 자신의 신임을 결부시켜 정국을 돌파하는 수법 자체가 드골이 임기 내내 자주 써먹은 것이었고, 이 때문에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이라거나 신대통령제 정권이라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것. 그리고 69년 4월의 '지방행정과 상원의회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 시행 당시 드골은 프랑스 국민들의 신임 확인에 정말 목마른 상황이었다. 68년 6월 총선에서 예상을 완전히 뒤집은 압승을 거두며 일단 급한 상황은 수습하는 데 성공했지만 68년 5월 위기(68운동) 당시 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던 상황은 드골의 리더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드골로서는 위기의 완전한 수습을 위해 자신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신임을 재확인하여 영향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행된 국민투표에서 드골의 안건이 부결되었다는 것은 이전까지 드골이 국민투표를 자신에 대한 신임의 재확인 수단으로 애용해왔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68년 총선에서 지나치게 급진과격화되는 대중운동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드골파에게 표가 쏠린것과는 별개로, 프랑스의 지도자로써 드골을 더이상 신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프랑스 국민들의 선택이었던 것. 그리고 드골 역시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무리하게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은퇴를 결정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러나 68운동 이후에도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 선거에서 51.7%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정권 교체를 이룰 때까지 향후 10년 넘게 보수 정당이 계속 집권했고, 심지어 오일 쇼크로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조차도 좌파 정당은 동거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다만 지방 의회와 기초단체장은 좌파가 장악하긴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어도 그랑제꼴을 제외한 대학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등 광범위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방송 등 미디어 업계도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공영방송이던 ORTF는 친정부 편향적인 보도로 비판을 받았고 사내에서도 파업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에 사측에서는 동년 10월에 상업광고를 개시하고 보도 부문의 편향성을 완화시키는 등 유화책을 동원했지만 잡음은 계속되었고, 결국 1975년 ORTF는 공중분해되는 결말을 맞았다. 반대로 현재 프랑스 유력 일간지 중 하나인 '리베라시옹'이 창간되고 샤를리 엡도의 전신인 '아라키리'(Hara-Kiri)가 만들어지는데도 혁명의 영향이 지대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유럽과 미국에 알려졌지만, 마오의 쩔어주는 능력으로 비참한 실상은 철저하게 가려진 채로 홍보되어 마오는 훌륭한 사상가이자 운동가로서 찬양의 대상이 되었고 마오파 학생단체가 마이너 중에서는 메이저로 상당히 활동하였던 것은 흑역사일지도. 베트남 전쟁 규탄을 위해 각국의 학생 지도자가 독일의 베를린에서 모여 토론회를 가졌던 적이 있는데, 토론회가 끝나고 열린 평화가두시위에서 학생들은 "호! 호! 호치민!!"을 외쳤다.
프랑스에서는 68운동에 대해 무조건적인 기성 세대 부정과 지독할 정도의 혼란만 존재했다는 의견과 진정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할 수 있었던 새로운 혁명이었다는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독일에 미친 영향
현대 독일에 대한 시선 중 '과거 청산을 철저히 이루어낸 나라'라는 평가는 68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 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철저하게 군국주의 잔재를 청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68혁명 이전 서독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소설 der Vorleser(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미하일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서독은 과거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과거에 나치에 협력했던 인물들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실제 68운동 이전의 서독은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하지 못했다. 과거 나치당원이었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가 총리일 정도였다.
그리고 1968년 11월 7일, 마침내 문제의 그 사건이 터졌다. 베를린에서 기민당의 전당 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던 와중에 당시 30세였던 베아테 클라르스펠트(Beate Klarsfeld)가 의장석에 앉아 있던 키징어 총리에게 몰래 다가가서 나치라고 소리치면서 뺨을 후려쳐버린 것이다. 키징어에게는 약간의 찰과상과 염증만 있었을 뿐 큰 부상은 없었고, 곧 그는 클라르스펠트에 대한 모든 사법적 조치를 취하했지만, 그녀는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총리를 폭행한 사건이 아니라 신세대들이 나치에 부역한 기성세대들에게 지니고 있는 강한 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68혁명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임을 보여준 전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68혁명 이후 키징어의 정치 인생도 사실상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독일의 과거 청산의 가장 상징적이며 시발점이 된 Kniefall von Warschau(바르샤바에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고 사죄한 사건) 또한 전후 25년이 지난 1970년에나 이루어졌다. 68운동 이듬해인 1969년 총선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기민련과의 연정을 끝낸 뒤 총선이 치러졌고 사민당이 단독 과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원내1당이 되면서 이루어낸 성과이다.
물론 이는 서독에 한정된 이야기로, 정작 공산 국가였던 동독에는 68운동의 영향력이 거의 파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서독에서도 68운동이 완전한 혁명을 이뤄내지 못했다면서 과격 학생운동 세력이 바더 마인호프 그룹을 결성, 연방검찰총장, 경제인연합회장 등 요인 암살과 테러를 저지른 흑역사를 촉발하였다.
그러나 재통일된 독일 전국에서 치뤄진 1998년 총선에서, 언론/학교 등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해 각자의 삶에서 나름대로의 성취를 이룬 68운동 참여자들을 중심으로 한,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요슈카 피셔의 세계 최초 적록연정 출범은, 이 혁명의 주요 사상가 '루디 두취케'가 생전에 마르고 닳도록 강조했던 '제도를 통한 행진'(사민/녹색 등 제도권 정치참여 강조)의 결과물로서 68혁명의 최종적 승리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네덜란드에 미친 영향
원조인 프랑스보다 68혁명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 후대에 대마초와 성매매를 공개적으로 허용하는 등 한국인 기준에서 방종과 혼란으로 보일 정도의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는 바로 이 사건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다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둘이 처음부터 풀리진 않았는데, 네덜란드가 성매매와 공창제를 허용한건 2000년대부터다. 197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이었고 지금의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사우나를 위장한 성매매 업소가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대마초 허용이 68운동의 영향을 받았는지 확실하지 않은데, 대마초의 경우는 주로 대마초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진짜 마약을 판매하는 딜러들이었고 그 딜러들에게 대마초 구매자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지정된 가게에서 판매를 허용하고 지정된 커피숍과 툭트인 공원 같은 곳에서 대마초 흡연을 허용한 것이다.
캐나다에 미친 영향
15대 총리인 피에르 트뤼도가 이들의 지지를 받아 6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고 이후 그가 동성애 합법화와 낙태 허용, 다문화국가 선언을 하는 등 캐나다가 굉장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국가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자유당은 68운동 이전에 이미 집권하고 있는 상황으로, 좀더 보수적인 레스터 피어슨 총리에서 좀더 좌파적인 피에르 트뤼도 총리로 바뀌고 총선에서 이기게 한 정도의 제한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에 미친 영향
네덜란드,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68혁명이 성공한 나라 중 하나로, 혁명의 영향으로 요제프 클라우스 총리가 실각하고 전후 최초로 좌파 성향의 총리인 브루노 크라이스키가 내각을 꾸렸다. 크라이스키는 무려 13년 동안 총리직을 맡으며 좌파의 초장기집권을 이끌었다.
그의 집권기 동안, 여성 평등법과 임산부 출산 수당금 지급법, 소수민족 보호 등의 법률이 통과되었으며, 동시에 의료보험이 확대되는 등의 사회복지제도 역시 확충되었다. 이를 통해 가톨릭 중심의 오스트리아 사회는 보다 현대적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한국에 미친 영향
한국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시각이 주류이다. 애초에 68운동의 발발이 베트남 전쟁 때문인데, 당시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 규모만 32만명에 달하며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상태였다. 따라서 한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사실상 대리전쟁상태에 있었다. 1968년 이후 1.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나 제2의 6.25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무장간첩 침투와 휴전선 교전이 잦았기 때문에, 68혁명의 문화적 영향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기 매카시즘에 가까운 반공 분위기가 강화되어 68혁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즉 서방에서 68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매카시즘적인 반공주의적 분위기가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로 더 강화되어, 그러한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쉽게 말해 서방사회에서 68혁명이 일어날 때, 한국은 때려잡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반공주의적 분위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68운동은 나라가 그럭저럭 먹고 사는 궤도에 올랐을 때,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촉발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한국은 그럴 정치적,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68운동이 한국에 영향을 끼친 것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려 했던 1990년대 중반 학생 운동 내 PD의 후신 분파들이 그 이론을 수입하고 슬로건과 이미지를 차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다만 68운동 자체와는 별도로, 제5공화국 시기의 학생운동 및 이를 주도한 386세대와 68운동의 주체인 68세대를 비교, 분석하는 사례는 나오고 있다.
일본에 미친 영향
일본 역시 프랑스의 5월 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전공투가 그 영향을 많이 받아 60년대 말 일본의 과격한 대학 운동을 주도했으며 일부는 적군파 등 테러리스트로 전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격하고 폭력적이었던 나머지 이는 오히려 향후 일본 정치의 보수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68운동 평가
대체로 정치 성향에 따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친 히피 계열들은 거의 진보주의의 근본으로 여기고, 반대로 반동적 보수주의 계열은 좌익 폭동 정도로 취급한다.
보수주의자들의 평가
보수파에게 ‘68년 5월’은 바로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으로,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경우 과거 68년 5월을 도덕과 권위, 국가 정체성 위기의 근원으로서 청산돼야 할 유산으로 지목한 적도 있었다. 영국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도 최근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차를 불태우던 젊은이들은 책임감이 없었다”며 “도덕과 정신의 재앙이었다”고 평가했다. 사실 68운동 이전의 프랑스 사회 분위기는 세속주의를 추구하되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선을 넘지 못하게 하는 일명 '모랄 라이크(morale laïque)'라는 형태를 따르고 있었으나 68운동 이후로는 이러한 최소한의 윤리 수준마저 무너졌다는 것이 '보수적 정교분리자'들의 견해이다.
당시의 과격했던 68운동은 68운동 자체가 태동할 수 있는 배경과 보호막을 제공했던 온건 자유주의자(liberal)를 공격해 타격을 줌으로서 커다란 공백을 만들고, 그 뒤 신좌파의 과격함에 질린 사람들이 가져온 반동과 함께 그 빈자리를 신보수주의가 메우게 되었다는 보수적 관점의 접근을 시도한 로버트 니스벳같은 학자의 설명도 있다. 즉, 달리 보자면 68운동은 잠재적 아군이었던 리버럴의 무덤임과 동시에 네오콘의 요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를 부추겨 80년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지적과 함께 히피와 마약 문화만을 남겼다는 냉소도 없지 않다. 실업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프랑스의 현 젊은이들에게 68세대가 보보스(BOBOSㆍ부르주아 보헤미안)라는 허울뿐인 자유주의자로 비쳐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위르겐 하버마스나 마루야마 마사오같은 온건 리버럴 성향 지식인들도 68운동의 과격성을 매우 비판했으며,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는 당시 68운동세력에 대해 나치나 군국주의자보다 더한다고 비난했다.
68운동에는 명확한 비전도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일례로 미국의 도시 빈민 운동가 사울 알린스키는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폭로(revelation)일 뿐 혁명(revolution)이 아니다"라고 68운동을 비판하였다. 한마디로 선진국 중산층 대학생의 불장난이라는 것. 거기다가 많은 수의 히피들이 80년대 이후 히피 문화가 죽어버리자 강경한 복음주의 성향 개신교 내지는 보수적 가톨릭으로 전향한 것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궤적과 교훈이라는 68운동에 대해 고찰하는 칼럼을 실으면서 당시 흑인 인권운동가들이 백인 여성한테 '너 나랑 성관계 거부하면 인종차별주의자니까 받아들여라?'라고 강요한 것을 비판했다.
종교계에서도 진보적 신학자였던 베네딕토 16세를 반강제적으로 보수적인 인물로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실제로 68운동을 전후해서 유럽의 미사 참례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들 중에는 대놓고 "예수에게 저주를!",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인 책이다!"라며 대놓고 기독교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던 사람들도 많았었다. 거기에 비트닉과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대안종교랍시고 힌두교나 불교 같은 동양 종교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기독교인들 중에는 안 그래도 몰락해가던 유럽의 기독교가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진보주의자들의 평가
진보적 입장에서 68년 5월은 정치혁명이라기 보다 억압적이고 고루한 사회 관습을 뒤바꾼 문화혁명의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티에르는 호주의 일간 ‘에이지(The Age)’에서 “변화가 하루 밤새 일어나지 않았지만, 학교와 가정 직장 등에 걸쳐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나의 68혁명’을 펴낸 가이스마르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혼 경력 등의 화려한 사생활에다 유대계 뿌리가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68혁명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 변화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68운동의 큰 의의 중 하나는 당시까지 입을 열 수 없었던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의 소수자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큰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68운동 당시 새로움, 평등한 연대를 부르짖으며 학생단체들이었지만 그 내부에서도 여전했던 성차별에 분노한 여성들은 자신들끼리 연대하여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해갔다. 대표적인 슬로건으로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가 있다. 리버럴한 서양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단히 줄이면 이는 거대한 학생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운동은 젊음의 해방구 내지는 분출구로서 그 역할을 한 시대의 조류였다. 그러나 아직도 고루한 사회관습을 바꾼 분수,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상기하다시피 첫째, 벌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생생한 현대사인데다 둘째, 이른바 문화혁명으로서 아직도 삶에 직접적인 영향과 그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와 판단이 매우 까다롭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겠다.
후폭풍과 결과
비틀즈의 존 레논은 이 때 영국, 미국의 반전 운동, 폴란드의 시위, 문화대혁명과 이 운동을 보고 느낀 점으로 폭력 혁명에 대해 유보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Revolution'이라는 곡을 썼다. The Beatles 앨범에는 'Revolution 1'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는데, 폭력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가사 한 구절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후 오히려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Revolution을 개사해서 부르고, Power to the People(인민에게 권력을)과 같이 이전보다 급진적인 내용의 곡들을 발표한다.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는 1968년 당시 런던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거센 시위군중의 함성에 감명을 받아 Street Fighting Man이라는 곡을 쓰게 된다. 된다
한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프라하의 봄을 비롯한 친소 공산정권에 반기를 드는 사회운동이 벌어졌다. 동구권의 보수파인 소련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좌파'의 또다른 갈래로 보기도 한다. 물론 1968년 이전에 체코 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으나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흐루쇼프에겐 성가신 일일 뿐이었다. 헝가리 반공시위 역시 진압을 명령한 사람은 다름아닌 흐루쇼프다.(참고로 헝가리 반공시위가 일어난건 1956년의 일로, 스탈린이 죽은지 3년 뒤의 일이다.) 물론 흐루쇼프도 처음엔 용인하려 하긴 했는데(동 시기 폴란드에서 고무우카의 집권을 용인한걸 보면 아예 헝가리에 군대를 보낼 가능성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고무우카도 나중에 루이필리프처럼 기대에 못미치는 정치를 펼치고 이게 경기침체하고 겹쳐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져서 인민들에 의해 사실상 쫓겨나게 되었다.) WTO(바르샤바 조약기구)탈퇴 구호가 나오자 바로 탄압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또한 체코 말고도 다른 공산권에서도 이러한 반소, 반독재 운동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폴란드이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처럼 국가적 개혁 분위기를 탄 것은 아니었고, 일반적인 학생 운동의 규모였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해서 티토가 학생들의 요구안을 일부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소련의 탱크에 처절하게 짓밟혔고 이후 둡체크 후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기장이 된 구스타브 후삭이 현상 유지(status quo)를 주장한 정상화(Normalization)가 1987년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10여년이 흐른 뒤 80년대 초반 폴란드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운동이나 헝가리의 온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개혁, 그리고 소련 말기 체코의 벨벳 혁명의 시점이 됐다는 평이 있다.
그 밖에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키스탄, 심지어는 강철의 공산주의 제국 소련에서도 1월달에 시위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만 하다.
결국 68혁명은 베트남 전쟁과 틱꽝득의 소신공양으로 시작해 프라하의 봄, 프랑스 5월 혁명으로 정점을 맞았지만, 미국에서 진보파의 지도자이던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프랑스 총선에서 드골파의 초압승, 이탈리아 총선에서 기독교민주당 주도의 연립정권 승리, 소련군의 프라하 무력점령, 그해 말에 있었던 리처드 닉슨의 당선, 그해 크리스마스에 미국의 파워를 상징하는 사건인 아폴로 8호의 달 선회 비행과 함께 끝났다. 타임지의 1968년 올해의 인물로 68년의 여러 혁명가들이 아닌 아폴로 8호의 우주비행사들이 선정된 것이 가장 상징적이다. 즉 보수파는 1968년 운동 자체를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싶었던 것. 조금 심하게 말하면 혁명은 끝나고 68년은 전세계 보수세력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다만, 미국은 68년 이후에도 학생운동 연합체 SDS(민주사회 학생연합)과 그 후신 웨더맨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고, 69년에 정점을 찍었다 70년 이후 운동권 세력의 과격화로 급격히 쇠퇴한다.
좌파 사상가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두고 2011년의 뉴욕 월가 점령 시위에서 "한가지만 약속해달라. 여러분은 수십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달라"라고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현재의 프랑스 유권자들 중 70%는 68혁명이 프랑스의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기사 70%의 유권자라면 이들이 전부 좌파라고 보긴 어렵다.기사 이는 좌우를 떠나 68혁명의 영향으로 전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체제나 사회분위기가 완화하거나 해체되고, 문화적으로 수직적인 면모에서 점차 수평적으로 바뀌며 소수자에 대한 인권, 동성애나 다양한 가족형태와 성적 지향, 환경보호와 다양한 의견 존중, 개인의 자아 실현 등이 서구 사회에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잡은 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는 역사적 판단을 바탕으로 얻어진 여론조사 결과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영화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일본 영화, 프랑스 영화, 독일 영화, 영국 영화, 미국 영화부터 제3세계 영화의 새로운 조류 역시 이 운동을 기점으로 삼을 정도.
세계 역대 올림픽 개막식의 선수들 입장을 보면, 이 68혁명을 기점으로 딱딱하고 군사 퍼레이드 같던 개막식이 좀 더 자유분방해지는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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