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 다음 풍습이 있었던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가 먹을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
①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습이 있었다.
② 제가가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렸다.
③ 소도라는 신성 구역이 존재하였다.
④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해설】 정답 ①
① 옥저에는 어린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가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하는 제도로서 일종의 신부 매매혼 풍습
② 부여는 마가·우가·저가·구가의 군장 세력이 있었고, 이들 가(加)는 저마다 별도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렸다.
③ 삼한은 정치와 제사가 분리된 제정 분리 사회였으며, 천군이 소도라는 영역을 지배
④ 동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지내면서 술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Q 2. 우리나라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미륵사지에는 목탑 양식의 석탑이 있다.
② 정림사지에는 백제의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③ 능산리 고분군에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있다.
④ 무령왕릉에는 무덤 주인공을 알려주는 지석이 있었다.
【해설】 정답 ③
③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규모가 작은 굴식 돌방무덤이 조성되었다. 백제에서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조성된 곳은 서울 석촌동 고분군
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
②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 변형하여 표현한 대표적인 탑으로, 백제 멸망 후 1층 탑신 사방에 소정방의 대당평백제국비명(평제문)이 새겨져 있다.
④ 무령왕릉에서는 피장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지석이 발견
Q 3. 조선 시대의 관청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사간원 – 교지를 작성하였다.
② 한성부 – 시정기를 편찬하였다.
③ 춘추관 –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④ 승정원 –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였다.
【해설】 정답 ④
④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국가 기밀과 왕명 출납
① 사간원은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중 한 곳으로 간쟁과 정사의 잘못을 논박하는 직무를 관장하였다. 교지 작성을 담당한 곳은 예문관
② 시정기는 춘추관에서 각 관청들의 업무 기록을 종합하여 편찬. 한성부는 서울의 행정과 치안, 사법을 담당
③ 춘추관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였다. 외교 문서 작성은 승문원에서 담당
Q 4.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1 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가) 은/는 연통제라는 비밀 행정 조직을 만들었으며, 국내 인사와의 연락과 이동을 위해 교통국을 두었다. 또 외교 선전물을 간행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가) 의 활동 방향을 두고 외교 운동 노선과 무장 투쟁 노선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
① 외교 운동을 위해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였다.
② 비밀 결사 운동을 추진하고자 독립 의군부를 만들었다.
③ 이인영, 허위 등을 중심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하였다.
④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해설】 정답 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으로, 연통제가 조직된 곳은 황해도 북부 지역과 경기·충청의 일부, 그리고 서간도와 북간도였으며 정보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에는 총판, 각 도에는 독판, 군과 면에는 각각 군감과 면감을 두었다
①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외교 활동을 위해 1919년 구미 위원부를 설치
②, ③, ④는 모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전의 사건들로, 임시 정부의 활동과는 관련이 없다
② 독립 의군부는 유생이었던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1912년에 조직한 단체
③ 총대장 이인영과 허위 등을 비롯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한 단체는 13도 창의군
④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초빙하여 1904년에 창간
Q 5. 다음 (가), (나) 승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 할 때 만류한 일화로 유명하다. (나) 진골 귀족 출신으로 대국통을 역임하였으며, 선덕 여왕에게 황룡사 9층 탑의 건립을 건의하였다. |
① (가)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사상을 제시하였다.
② (가)는 『화엄일승법계도』를 만들었다.
③ (나)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④ (나)는 이론과 실천을 같이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시하였다.
【해설】 정답 ②
(가)는 의상, (나)는 자장
② 의상은 당에서 돌아와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또한, 국가의 지원을 얻어 부석사를 짓고 화엄의 교종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① 원효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중관파와 유식파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였고, 화쟁 사상을 주장
③ 혜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서역) 여러 나라의 성지를 순례하고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기기도 하였다.
④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
Q 6. (가)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당 현종 개원 7년에 대조영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올려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아들 (가) 이/가 뒤이어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가 겁을 먹고 그를 섬겼으며, 또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신당서- |
① 수도를 상경성으로 옮겼다.
②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만큼 전성기를 이루었다.
③ 장문휴를 시켜 당의 등주(산둥성)를 공격하였다.
④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설】 정답 ③
(가)는 발해 무왕. 고왕 대조영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것과 연호로 인안을 사용한 것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③ 무왕은 장문휴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고 산둥 반도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
① 발해 문왕은 755년경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였으며, 785년경에는 다시 수도를 동경용원부로 천도(5대 성왕 때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천도)
② 9세기 전반 선왕 때에 이르러 발해는 말갈족 대부분을 복속시켰으며, 영토를 확장하여 요동 지역까지 이르렀다. 이 무렵 당은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바다 건너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의미로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④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진’(震)을 건국(698)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였다. 이후 대조영은 713년 당나라 현종(玄宗)에 의해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되었고, 국호를 발해
Q 7. (가)~(라) 국왕 대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조선 시대 국가를 운영하는 핵심 법전인 『경국대전』은 세조 대에 그 편찬이 시작되어 (가) 대에 완성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국가 체제를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법전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나) 대에 『속대전』을 편찬하였으며, (다) 대에 『대전통편』을, 그리고 (라) 대에는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
① (가) - 홍문관을 두어 집현전을 계승하였다.
② (나) - 서원을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하여 대폭 정리하였다.
③ (다) -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화성을 축조하였다.
④ (라) -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해설】 정답 ④
제시된 (가)는 성종, (나)는 영조, (다)는 정조, (라)는 고종
④ 철종 대 임술 농민 봉기가 발생하자 정부에서는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을 반포(1862)
① 성종은 왕과 신하가 함께 모여 유학을 논의하고 시책을 나누는 경연을 활성화시켜 언로를 넓혔으며, 이를 위해 세조 대에 폐지된 집현전을 대체하여 홍문관을 설치
②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붕당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었던 산림(山林)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이와 함께 영조는 붕당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
③ 정조는 수원 화산(팔달산) 아래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으로 하여금 화성을 세우도록 하여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Q 8. 밑줄 친 ‘사건’의 명칭은?
중종에 의해 등용된 조광조는 현량과를 통해 사림을 대거 등용하였다. 그는 3사의 언관직을 통해 개혁을 추진해 나갔고, 위훈 삭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중종도 급진적인 개혁 조치에 부담을 느껴 조광조 등을 제거하였다. 이 사건으로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다. |
① 갑자사화 ② 기묘사화 ③ 무오사화 ④ 을사사화
【해설】 정답 ②
조광조 등 사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통해 밑줄 친 ‘사건’이 1519년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
② 조광조가 반정 공신들의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공신의 위훈을 삭제하자,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화는 기묘사화(중종 14, 1519).
① 갑자사화(1504)는 연산군이 능상(陵上)의 풍조를 일소한다는 명분 하에 조정 신료들을 도륙했던 사건
③ 김종직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항우와 의제에 빗대어 「조의제문」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으면서 이후 무오사화(1498)의 원인
④ 명종 때에는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권력 다툼이 계기가 되어 대윤 세력과 인종을 지지한 사림 세력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가 발생(1545)
Q 9.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역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성상 전하께서 옛 사서를 널리 열람하시고, ‘지금의 학사 대부는 모두 오경과 제자의 책과 진한(秦漢) 역대의 사서에는 널리 통하여 상세히 말하는 이는 있으나, 도리어 우리나라의 사실에 대하여서는 망연하고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니 심히 통탄할 일이다. 하물며 신라·고구려·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정립하여 능히 예의로써 중국과 통교한 까닭으로 범엽의 『한서』나 송기의 『당서』 에는 모두 열전이 있으나 국내는 상세하고 국외는 소략하게 써서 자세히 실리지 않았다. …… 일관된 역사를 완성하고 만대에 물려주어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해야 하겠다.’라고 하셨다.” (나)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실려 있다.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그것을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
① (가)는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영웅 서사시이다.
② (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고대 설화를 수록하였다.
③ (나)는 만주 지역까지 우리 역사의 범위를 확장하였다.
④ (나)는 고조선부터 고려에 이르는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해설】 정답 ③
제시된 (가)는 『삼국사기』, (나)는 『발해고』
③ 유득공의 『발해고』는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으로 확대시키면서 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데 힘썼다.
①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무신 집권기인 1193년에 편찬된 역사서로서 민간 전승으로 내려온 고구려 건국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
②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한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
④ 『발해고』는 유득공이 한국, 중국, 일본의 사서를 참고하여 발해 역사를 서술한 책
Q 10. 다음 주장을 한 실학자가 쓴 책은?
토지를 겸병하는 자라고 해서 어찌 진정으로 빈민을 못살게 굴고 나라의 정치를 해치려고 했겠습니까? 근본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라면 역시 부호를 심하게 책망할 것이 아니라 관련 법제가 세워지지 않은 것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 (중략) … 진실로 토지의 소유를 제한하는 법령을 세워, “어느 해 어느 달 이후로는 제한된 면적을 초과해 소유한 자는 더는 토지를 점하지 못한다. 이 법령이 시행되기 이전부터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광대한 면적이라 해도 불문에 부친다. 자손에게 분급해 주는 것은 허락한다. 만약에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숨기거나 법령을 공포한 이후에 제한을 넘어 더 점한 자는 백성이 적발하면 백성에게 주고, 관(官)에서 적발하면 몰수한다.”라고 하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 소유는 균등하게 될 것입니다. |
① 반계수록 ② 성호사설 ③ 열하일기 ④ 목민심서
【해설】 정답 ③
제시된 자료는 박지원의 『한민명전의』에 실린 한전론에 대한 내용. 박지원은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설정해야 한다는 한전론을 제안
③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후에 작성한 견문록이다. 그는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
①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저서이다. 그는 『반계수록』 에서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관리, 선비, 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할 것을 주장
② 『성호사설』은 이익의 저서이다. 이 책은 천지, 만물, 인사, 경사, 시문 등 5개 부문으로 나누어 우리나라 및 중국의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소개
④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저서이다. 정약용은 민생 안정을 위해 수령의 행동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
Q 11. (가)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헌병에게 경찰 업무를 부여한 헌병 경찰제를 시행했다. 헌병 경찰은 정식 재판 없이 한국인에게 벌금 등의 처벌을 가하거나 태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한국인은 이처럼 강압적인 지배에 저항해 3·1 운동을 일으켰으며, 일제는 이를 계기로 지배 정책을 전환했다.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직후부터 3·1 운동이 벌어진 때까지를 (가) 시기라고 부른다. |
① 토지 조사령이 공포되었다.
② 창씨개명 조치가 시행되었다.
③ 초등 교육 기관의 명칭이 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④ 전쟁 물자 동원을 내용으로 한 국가 총동원법이 적용되었다.
【해설】 정답 ①
제시된 자료의 (가) 시기는 헌병 경찰을 앞세운 강압적이고 비인도적인 무단 통치 시기(1910~1919)
① 1910년에 시작된 토지 조사 사업은 1912년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면서 본격화
② 1939년 일제는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창씨개명령을 공포하고, 1940년 창씨개명을 실시
③ 일제는 1941년에 소학교를 ‘황국 신민 학교’라는 뜻을 가진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④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고 본격적으로 인력과 물자의 수탈을 강화
Q 12.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한국 국민당을 이끌던 그는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자 한국 독립당을 결성해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광복 직후 귀국한 그는 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으며, 남한 단독 선거가 결정되자 김규식과 더불어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
①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해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② 광복 직후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다.
③ 무장 항일 투쟁을 위해 하와이로 건너가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하였다.
④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알려지자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펼쳤다.
【해설】 정답 ④
제시된 자료의 밑줄 친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을 역임한 백범 김구
④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알려지자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탁 운동을 전개
① 여운형과 김규식 등은 1946년 7월 좌우 합작 위원회를 결성. 1946년 10월 좌우 합작 위원회는 좌익과 우익의 제안을 절충해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
② 조선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은 여운형은 광복 직후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1945. 8.)
③ 1914년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
Q 13. 제헌 국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② 한·일 기본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③ 통일 3대 원칙이 언급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④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해설】 정답 ①
1948년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1948. 7). 제헌 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정신과 건국이념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
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고조되어 1948년 9월 22일 제헌 국회에서는 반민족 행위 처벌법(약칭 : 반민법)이 제정·공포하였다. 친일파들은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이 공산당의 주장이라고 국회를 협박하고, 반공 구국 궐기 대회를 개최했는데, 정부는 이 대회를 적극 지지하였다. 이러한 정부와 친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1948. 10. 23)
② 한·일 기본 조약(한·일 협정)은 박정희 정부 때인 1965년에 체결
③ 박정희 정부 때에는 남북한 정부 당국이 비밀 접촉을 거쳐 1972년 7월 통일에 관한 기본 원칙(통일 3대 원칙)을 담은 7·4 남북 공동 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
④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다는 내용의 개헌안은 유신 헌법(1972. 12.)
Q 14.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고종이 즉위한 직후에 실권을 장악한 그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천주교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와 교섭하려 했다. 하지만 천주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유생의 주장이 높아지자 다수의 천주교도와 선교사를 잡아들여 처형한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이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됨에 따라 물러난 그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잠시 권력을 장악했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곧 물러났다. |
① 미국에 보빙사라는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② 전국 여러 곳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했다.
③ 국경을 획정하고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④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12사를 두었다.
【해설】 정답 ②
제시된 자료의 밑줄 친 ‘그’는 나이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섭정으로 집권한 흥선 대원군(1863~1873 집권)
② 두 차례의 양요에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흥선 대원군은 1871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① 조선 정부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4.) 이후 조선 주재 미국 공사(푸트) 부임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을 미국에 보빙사로 파견
③ 숙종 때인 1712년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④ 정부는 1880년에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12사를 두어 외교, 군사, 통상, 재정 등의 개화 행정을 담당
Q 15. 밑줄 친 ‘이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백제 개로왕은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는데, 도림이 고하기를 “제가 젊어서부터 바둑을 배워 꽤 묘한 수를 알게 되었으니 개로왕께 알려드리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 (중략) … 개로왕이 (도림의 말을 듣고) 나라 사람을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城)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비고 백성이 곤궁하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 그제야 도림이 도망을 쳐 와서 그 실정을 고하니 이 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장수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 『삼국사기』 - |
① 평양으로 도읍을 천도하였다.
② 진대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③ 낙랑군을 점령하고 한 군현 세력을 몰아내었다.
④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쳤다.
【해설】 정답 ①
고구려의 장수왕. 고구려의 승려 도림은 장수왕의 밀사로 백제에 들어가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던 개로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도림의 권유에 따라 개로왕은 백성을 징발하여 성을 쌓고 궁실, 누각 등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는 등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켰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의 국가 재정이 흔들리고 백성이 곤궁하게 되었다. 밀사로서 백제에서 수행하였던 임무가 이루어진 후에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왔고, 장수왕이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
①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
② 진대법을 처음 시행한 것은 고국천왕
③ 낙랑군과 대방군 등 한 군현 세력을 몰아낸 것은 미천왕
④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친 왕은 광개토대왕
Q 16.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은?
이 건물은 주심포 양식에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은 배흘림 양식이다. 1972년 보수 공사 중에 공민왕 때 중창하였다는 상량문이 나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
① 서울 흥인지문
② 안동 봉정사 극락전
③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④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해설】 정답 ②
고려 시대의 건축물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
② 고려 전기에는 주로 주심포 양식이 유행하였는데, 13세기 이후에 지은 일부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가장 오래된 건물
① 한양 도성의 사대문 중의 하나인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때 창건
③ 신라 의상이 창건한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주심포 양식에 팔작지붕 건물
④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조선 전기의 과학과 기술을 집약한 대표적인 건축물
Q 17. (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서재필 등은 (가) 을/를 만들었다. (가) 은/는 고종에게 자주독립을 굳건히 하고 내정 개혁을 단행하라는 내용이 담긴 상소문을 제출하였으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외국의 간섭과 일부 관리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
① 「교육입국 조서」를 작성해 공포하였다.
② 영은문이 있던 자리 부근에 독립문을 세웠다.
③ 개혁의 기본 강령인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④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을 일으켰다.
【해설】 정답 ②
제시된 자료의 (가) 단체는 독립 협회
② 1897년 11월,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독립문이 완공되었다. 독립 협회의 주도로 성금을 모아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이었다. 청의 내정 간섭에 시달리던 조선은 일본이 청·일 전쟁(1894~1895)에서 승리하면서 청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이에 사대 외교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헐어 버리고, 이후 독립문을 건립
① 독립 협회 창립 이전의 일이다. 1895년 2월 고종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
③ 독립 협회 창립 이전의 일이다.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독립서고문을 바치고,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인 홍범 14조를 반포(1894. 12.)
④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은 독립 협회 해산(1898. 12,) 후인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
Q 18. (가) 시기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무신 정권 몰락 ↓ (가) ↓ 공민왕 즉위 |
① 만권당이 만들어졌다.
②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다.
③ 쌍성총관부가 수복되었다.
④ 『제왕운기』가 저술되었다.
【해설】 정답 ③
김준 등의 정변으로 인한 무신 정권의 몰락은 1258년이고, 공민왕 즉위는 1351년
① 충선왕은 아들(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경으로 건너가 1314년 만권당이라는 연구 기관을 설립하여 원의 조맹부, 고려의 이제현 등 당대의 일류 학자들을 모아 서로 교류
② 정동행성은 충렬왕 때인 1280년에 설치되었다. 원은 고려와 함께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다. 1274년에 1차 원정을 시도했으나, 일본 막부의 저항과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이후 원은 다시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1280)하고 1281년(충렬왕 7) 2차 원정을 단행하였으나 결국 실패
④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충렬왕 때인 1287년에 저술. 『제왕운기』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함으로써 자주성을 나타내고 있다.
③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
Q 19. 밑줄 친 ‘이 나라’의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이 나라에는 관리에게 정해진 면적의 토지에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나누어주는 전시과라는 제도가 있었다. 농민은 소를 이용해 깊이갈이를 하기도 했으며, 시비법의 발달로 휴경지가 점차 줄어들었다. 밭농사는 2년 3작의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다. 이 나라의 말기에는 직파법 대신 이앙법이 남부 지방 일부에 보급될 정도로 논농사에 변화가 나타났다. 또한 이암에 의해 중국 농서인 『농상집요』도 소개되었다. |
①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으로 삼사를 두었다.
② 공물 부과 기준이 가호에서 토지로 바뀌었다.
③ 생산량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조세를 거두었다.
④ ‘소’라는 행정 구역의 주민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였다.
【해설】 정답 ②
전시과 제도를 시행하였다는 점과 시비법의 발달로 휴경지가 감소했다는 점, 2년 3작의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다는 점, 이앙법이 남부 지방 일부에 보급될 정도로 논농사에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 등을 통해 고려 시대의 경제 상황
② 공물 부과 기준이 가호에서 토지로 바뀌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마련된 대동법 시행 이후의 사실이다. 고려 시대에서는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면, 주현은 속현과 향, 부곡, 소에 이를 할당하고,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을 거두었다.
① 고려 시대에는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으로 호부와 삼사를 두었다.
③ 고려는 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었다.
④ 고려 시대에는 양민이면서 군현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에 거주한 주민이 있었다. 향이나 부곡에 거주하는 사람은 농업을, 소에 거주하는 사람은 수공업이나 광업품의 생산을 주된 생업으로 하였다.
Q 20. (가) 시기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① 을사늑약 체결
② 정미의병 발생
③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
④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해설】 정답 ④
연표에서 신미양요의 발생은 1871년, 갑오개혁은 1894년
④ 청나라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일본의 대륙 진출을 견제함과 동시에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으려는 의도에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알선하였고, 결국 조선의 신헌과 미국의 슈펠트 간에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1882)
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고종 황제와 정부 대신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1905)
②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
③ 1868년 독일 상인이었던 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오페르트는 미국인 젠킨스와 프랑스 선교사 페롱의 도움을 받아 충남 덕산에 있는 남연군(대원군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여 유해를 미끼로 통상을 요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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