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으로 얻은 이익(1914년 ~ 1917년)
1912년 : 청 멸망, 중화민국 성립
1917년 : 미국 참전; 러시아 11월 혁명
1919년 : 한국 3 · 1운동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이해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전화(戰火)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등의 연합군(삼국협상)과 독일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 등의 동맹군(삼국동맹)과의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약소국들을 식민지화 하여 전 세계의 1/5, 전 인류의 1/10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쟁탈을 위해 일어난 제국주의전쟁의 성격을 지닌다.
1차 세계대전(1914~1917)은 제국주의의 열강 대부분이 연루된 국제전이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에 항의하여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대결로 비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19세기 말 이래로 심화되어 온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세력 경쟁에 기인하고 있다.
일본은 영국의 요청으로 8월 23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에 개입했다. 실상 영국은 아시아에서 독일 무장 상선을 수색하는 것에 한정해서 일본의 참전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영국의 제한적 참전요구를 뛰어넘어 전면 참전한다고 전했다. 영국이 참전 의뢰를 취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참전했다. 원로 이노우에 가로우(井上馨)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번 유럽의 대전쟁은 그야말로 국내외의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일본은 즉시 거국일치로 단결하여 정쟁을 중지하고 동양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확립하고 이를 배경으로 중국 정부를 회유해야 한다."
당시 일본 지도층들은 전쟁이 비교적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 예상하고, 중국 및 만몽의 이권을 쟁취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일본은 참전 직후부터 동아시아에서 세력 확장에 주도적이었다. 독일의 조차지였던 산둥성의 청도를 점령하고, 세계대전으로 유럽열강이 아시아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은 1915년 중국 원세개(遠世凱, 1859~1916)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강요하였다. 21개조는 단지 경제적 요구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주권을 현저하게 침해하는 내용이었다. 21개조 교섭은 중국 측의 맹렬한 반대와 미국의 견제에 의하여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일본은 일부를 삭제한 후 최후통첩의 방식으로 중국을 협박하여 강제로 승인토록 했다. 이에 대해 중국 국민은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정부가 일본의 최후통첩을 받고 요구를 받아들인 5월 9일을 국치 기념일로 하여 항일운동은 고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항일운동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권익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일본은 1916년 제4차 러일 협약을 맺어 중국이 다른 열강의 지배하에 놓이지 않도록 했고, 원세개의 뒤를 이은 북방 군벌 단기서(段祺瑞) 정권에게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여 중국내 손문 등 혁명파를 압박하여 권익을 지키고자 했다.
한편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정권이 출현하였고, 이는 자본주의 열강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연합국 측에서는 혁명이 자국에 파급될 것을 두려워하여 소비에트정권에 간섭하려고 하였다. 당시 시베리아에 있던 연합군측은 체코슬로바키아군을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1918년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다. 일본은 미국 · 영국과 약속한 72,000명이 넘는 병력을 파견하여 전비 10억 엔, 사망자 3,500명, 부상자 2만 명에 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대가를 치렀지만, 일본은 러시아 혁명세력의 저항으로 당초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각국은 전쟁 종결 후에 철병했지만 일본만은 계속 주둔해 오다가 열강으로부터 영토적 야심을 비난받아 1922년에 겨우 철병하였다. 그 후 1925년에 일본과 소련 간에는 국교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경제 불황과 재정위기를 한 번에 떨쳐내었다. 유럽 상품에 대신해서 면직물 등의 일본상품이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여 무역은 압도적인 수출초과가 되었다.
세계적으로는 선박의 부족사태가 일어나면서 일본의 해운업 · 조선업은 공전의 호황을 누리게 되고 일본은 세계 제3위의 해운국이 되었다. 철강업, 화학공업, 전력사업 등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면서 1차대전 이후 비로소 처음으로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앞지르게 되었다. 한편 전쟁에 의한 호황은 자본가에게 막대한 이익을 주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라 사회적 갈등과 모순은 심화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