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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興德王), 통일신라 제42대(재위:826~836) 왕, 상대등(上大等)

Jobs9 2021. 5. 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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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2대(재위:826~836) 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수종(秀宗) 또는 경휘(景暉)·수승(秀升)이다.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元聖王)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인 숙정부인(淑貞夫人金氏)이다. 비(妃)는 소성왕(昭聖王)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金氏)로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되었다.

흥덕왕(興德王)은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으며, 특히 복색(服色)·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등의 골품제(骨品制) 규정을 한층 강화하여 신분의 구분을 엄히 하였다. 아울러 김헌창(金憲昌)의 난(亂) 진압에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의 후손들을 우대해 주었고, 청해진(淸海鎭)·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적의 침탈을 막는 등 내치의 안정에 힘썼다.

 

흥덕왕의 정치적 입장은 대체로 헌덕왕과 비슷하였다. 804년(애장왕 5) 시중(侍中)에 임명된 것으로 미뤄볼 때, 언승(彦昇)과 함께 애장왕(哀莊王)대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다고 생각된다. 809년 언승이 애장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웠고, 헌덕왕대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819년(헌덕왕 11)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고, 822년에는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감으로써 왕위계승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애장왕대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827년(흥덕왕 2)에 명활전(明活典)을 설치하였다. 혹은 그것이 914년(신덕왕 3)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源谷羊典)을 설치했으며, 집사부(執事部)를 집사성(執事省)으로 고쳤다. 이 때의 개혁은 귀족세력의 억제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헌덕왕대의 김헌창(金憲昌)의 난(亂)을 마무리짓는 조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덕왕대의 개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834년에 모든 관등(官等)에 따른 복색·거기·기용·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해 발표한 것이지만, 귀족들의 요구에 의해 골품(骨品) 간의 계층구별을 더욱 엄격히 하고자 취해진 조치였다. 특히, 이 규정의 내용은 진골(眞骨)과 육두품(六頭品)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다. 복색·거기·기용·옥사 등 규정의 전반적인 내용을 볼 때, 육두품·오두품·사두품, 평민 사이에는 상당한 출입이 허용되고 있는데 반해 왕과 진골, 그리고 진골과 육두품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존재하고 있다. 즉 이들 규정의 가장 중요한 점은 왕과 진골, 진골과 육두품 사이의 준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흥덕왕의 개혁은 행정기구의 한식(漢式) 개편과 물리적인 힘에 의한 귀족세력의 억제, 그리고 그를 통한 왕권의 전제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 풍속규제 정책 역시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아울러 835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는 김헌창의 난 평정에 공을 인정받은 김유신 후손들의 현실적인 세력을 배경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鎭)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장려를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弓福)주 01)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徐州)에서 소장(小將)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莞島)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고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에 임명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唐恩郡)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서해안에 횡행하는 해적(海賊)을 퇴치하기 위해 장보고가 청원하여 진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청해진과 당성진의 설치는 해적의 퇴치와 아울러 노예무역을 중심으로 한 교역활동을 통하여 그 경제력을 확대시키고 있던 서남해변의 지방호족(地方豪族) 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조처였다. 즉 헌덕왕 14년(822년)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에 가담한 지방호족 세력의 거점지역이 이들 진이 설치된 서남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827년에는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度僧)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가져온 차(茶) 종자를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무성하게 되었다. 흥덕왕은 앵무새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현재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836년 12월에 승하하였다. 장지(葬地)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강서면 육통리에 있는 장화왕비와 합장된 흥덕왕릉(興德王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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