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문화 Art, Culture/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훈민정음(해례본), 訓民正音

Jobs9 2022. 9. 22.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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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해례본)』, 訓民正音

국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大韓民國)
등재연도
1997년
소장 및 관리기관
대한민국 간송미술관
문화재 지정번호
국보 제70호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訓民正音) 판본에는 1443년에 창제된 한국의 문자 한글을 공표하는 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반포문(頒布文)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해설과 용례를 덧붙여 쓴 해설서 해례본(解例本)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판본을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하며, 간송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세계적 중요성·독창성·대체 불가능성
훈민정음은 한국인에게 문자체계의 혁명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한자로는 쓸 수 없던 한국인의 말까지 완벽히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한자는 중국인을 위한 문자 체계이며, 음운 체계와 문법 구조가 한국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를 두고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한자로 한국말을 적는다는 것은 네모난 손잡이를 둥근 구멍 안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만큼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그렇듯 한국인이 한자로 말을 적으려면 소리를 한자로 바꾸어 적어야만 했는데, 이 때문에 의사소통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한자로 의사소통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이두(吏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두는 조정의 관리와 평범한 백성이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말을 기록하는 문자 체계였다. 한자로써 한국말을 순서대로 적고, 심지어 한국말의 조사와 어미까지도 적었다. 그러나 이두는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것이므로 한국말의 소리를 특징적으로 나타낼 수 없을뿐더러 조사와 어미의 미묘한 차이를 반영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종대왕이 한국말의 음운체계를 반영하는 문자를 창제하였고, 이로써 한국인은 말을 글로 온전히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이 혁신의 두 번째 측면은 한국인이 글자를 아주 쉽게 배우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는 각각의 개념을 나타내는 문자를 일일이 배워야 했기에 매우 어려웠다. 또한 글자의 획이 복잡하여 쓰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한자를 배운다는 것이 한국인과 같은 외국인에게는 매우 어려워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자를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문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는 단 28자이며 그 획도 단순했기 때문에 배우고 사용하기가 쉬웠다. 

한국인은 누구라도 한글을 배워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국인은 독특한 민족의 말을 완벽하게 적을 수 있게 됨으로써 민족문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오늘날 한국의 식자율(識字率)이 높은 이유가 누구나 문자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유네스코의 문맹 퇴치 운동에 기여하고 있다. 게일(J.S. Gale, 캐나다 출신 선교사‧한국어 학자)의 선언문에서 “세종대왕은 단지 동양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이바지한 왕이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지만 한글(즉,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글자) 창제가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사실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한글』, 왕립 아시아 학회의 조선 지회 회보, IV권, 제1부, 1912). 

한국 정부는 양력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간일을 계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한 뒤 1946년부터 매년 국가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한국인에게 중요하다. 오늘날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기여한 이에게 주는 상을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이라고 일컫는 사실이 이 책이 세계의 문화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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