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조선

호란, 북벌 운동, 서인,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유호란, 정묘약조, 병자호란, 효종

Jobs9 2023. 5. 1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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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과 북벌 운동

  ․광해군 (1608~1623)

    - 史庫의 정비, 서적의 간행, 호패의 실시

    - 뛰어난 외교정책 (강홍립의 후금투항)

  ․인조 (인조반정,1623)

    - 서인 집권, 向明排金

    - 이괄의 난 (인조반정에 대한 공신책정에 불만) → 후금의 침략 종용

    - 정유호란 (인조 5년,1627) → 형제관계 수립

    - 정묘약조 : 주전(척화론)>주화론

  ․병자호란

    - 후금의 淸 개국 (인조 14년,1636) → 조선에게 군신관계 요구 → 병자호란 발발

    -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 → 삼전도에서 항복

    - 소현세자, 봉림대군 볼모

      척화파인 3학사(홍익한,윤집,오달제) 죽음, 김상헌 옥고

  ․효종

    - 북벌계획, 북한산성·남한산성 수리

 

 

기출 문제

 Q  다음의 밑줄 친 비석이 세워진 계기가 된 전쟁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이 비석은 인조 17년(1639)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세워진 청 태종 공덕비이다. 비신의 높이가 395cm, 너비가 140cm에 달하고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큰 비이다. 비문(碑文)은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다. 

 

① 전쟁 후에 두 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② 전쟁이 끝나고 청은 세자를 인질로 데려갔다. 
③ 전쟁을 앞두고 조선은 주화론과 척화론이 대립하였다.
④ 청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해설】 정답 ① 

병자호란 끝난 후 청나라의 요구로 세워진 삼전도비(三田渡碑)

① 양국이 형제맹약을 맺은 것은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 체결된 정묘약조에 의해서이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군신관계를 요구하였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이를 관철시켰다.

②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했던 봉림대군과 왕족들은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고, 인조가 항복한 다음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 

③ 병자호란 직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집권 붕당인 서인은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주화파에 대표적인 인물이 최명길이며, 주전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상헌, 윤집 등이다. 

④ 인조와 대신들은 당초 강화도로 몽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청군의 진군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고, 압록강을 건넌지 불과 7일 만에 한성 근처인 양철평(지금의 은평구 불광동 일대)까지 다다랐다. 이에 당황한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오답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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