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고종 20) 보부상(褓負商)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상인조합.
보부청을 설치해 전국 8도의 보부상단을 통합한 대원군은, 자신이 도반수(都班首)가 되고 맏아들 재면(載冕)을 총리로 하여 전국에 있는 3,000여 개의 시장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 단체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철혈국수당(鐵血國粹黨)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이어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인천·원산·부산 3개 항이 개항되어 일본 상인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또한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구미 상인의 조선 침입도 본격화되었다. 대원군의 보호를 받으며 활동했던 보부청으로서는 이들 외상(外商)의 침투를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83년 8월김병국(金炳國)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항 이후 자본주의적 시장 침투를 막고, 상업의 자유화에 밀려 위협을 받게 된 보부상을 보호할 목적으로 혜상공국을 설치하였다. 혜상공국은 전국의 보부상을 총괄 지배하는 정부기관으로서 군국아문(軍國衙門)의 관할하에 두었다.
특히, 이 기관은 외국 상인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막고, 시골 무뢰배들에 의한 불량행상의 폐단을 말끔히 없앰으로써 보부상의 권익을 보호함과 동시에 보부상의 민폐도 근절하여 각자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구관당상(句管堂上)에 민태호(閔台鎬), 총판(總辦)에 한규직(韓圭稷)·민영익(閔泳翊)·윤태준(尹泰駿)·민응식(閔應植)·이조연(李祖淵) 등이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혜상공국은 1885년 8월내무부(內務府)소속으로 들어간 뒤 상리국(商理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99년 6월 다시 상무사(商務社)로 바뀌었다가 1904년 12월 이를 공진회(共進會)로 바뀐 뒤 이준(李儁)·나유석(羅裕錫)의 영도하에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대립하였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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