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단장(斷章)
조지훈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개관
- 제재 : 풀잎
- 주제 : 고달픈 삶의 체험과 생명에의 외경감 / 운명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삶
- 성격 : 사색적, 선(禪)적, 산문적
- 표현 : 그윽한 어조와 서술적 이미지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단장 → 斷(끊을 단) 章(글 장) / '짧은 시가나 문장'이란 의미로, 완전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글을 가리킨다. /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겸손의 표현
* 무너진 성터 ~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 → 화자가 현재 서 있는 시적 공간으로, 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이 있는 언덕에 화자는 서 있다. 바람은 강한 성도 무너뜨리고, 단단한 바위도 깎아 버리는 큰 힘을 지닌 것으로, 화자가 현재 있는 언덕은 이 같은 바람이 지금도 불고 있음을 떠가는 구름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 → '조찰히'는 '깨끗하다'의 의미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풀잎을 표현한 것이다. 이 부분만 볼 때 바람은 풀잎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긍정적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다르게 접근해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풀잎은 현재 성과 바위에 비해 연약한 존재이면서 그것들과는 달리 시련(=바람)을 참고 견디며 시간의 흐름에 그 영혼을 내맡기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 풀잎과 화자가 서로 동화(同化)되는 모습을 형상화함.
* 우리들 →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풀잎과 화자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공동체 의식이나 동질감을 드러낼 때 쓰이는 표현이다. 전반부에서 화자와 풀잎은 서로 구분된 관계였지만, 3행과 4행을 거치며 화자는 풀잎과 동화됨을 느끼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너와 나는 '우리'로 보다 가까워지게 됨.
* 아름다운 분신 → '우리'와 의미상 유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분신이란 풀잎에 대한 화자의 동질감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 '고달픈 얼굴'은 화자와 풀잎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화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고 고달픈 얼굴이라는 주관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고, 동시에 이 표현을 통해 화자의 처지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다. 화자 또한 풀잎처럼 세상의 힘겨움으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뎌내는 풀잎을 보며 '웃으며 얘기하노니'라 하여 교감(=동병상련)과 함께 풀잎으로부터 삶의 위안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 → 시적 공간인 언덕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때의 흐름'은 의미상 바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한 떨기 영혼 →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묵묵히 바람을 견디며 서 있는 풀잎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유를 통해 화자의 경회감을 드러내고 있다.
시상의 흐름(짜임)
- 1~2행 : 화자가 서 있는 언덕의 풍경(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
- 3~4행 : 풀잎을 바라보는 화자의, 자연에 동화된 감정
- 5~6행 :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옹호
- 7행 : 화자의 풀잎에 대한 경외감
이해와 감상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 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다부원에서>와 같은 총체적인 상황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시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또는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키며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풀잎 단장』의 표제시로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잎을 새롭게 조명하여 생명의 신비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풀잎이란 단순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적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과도 같이 조그만 고통에도 동요하고 번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시인은 풀잎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반성적 타자(他者)로 설정한 풀잎을 통해 주어진 운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는 여유로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지친 영혼을 내맡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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