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현대문학

크낙산의 마음, 김광규 [현대시]

Jobs9 2024. 5. 9.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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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낙산의 마음

김광규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뭇잎 사이로

살쾡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 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고

바위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 버릴 수 없어

산에는 살고 싶은 마음

남겨 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마루터기 : 산마루·용마루의 두드러진 턱. [준말] 마루턱.

✶너울거리다 : 멀리 보이는 바다의 큰 물결이 굽이쳐 흐르다. 또는 큰 나뭇잎이나 풀 같은 것이 바람에 춤추듯이 나부끼다. [작은말] 나울거리다.

✶등걸 : 줄기를 잘라 낸 나무의 밑동. 나뭇등걸.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서정적, 관조적, 희구적

- 제재 : 크낙산

- 주제 :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준 자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싶은 소망

- 특징

     ①소유와 욕망의 인간 세계와 무소유의 자연 세계가 대비됨

     ②자연과 동화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표현됨

     ③삶의 고뇌를 떨쳐버리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자연을 형상화함

 

 

이해와 감상

이 시에 등장하는 크낙산은 화자가 마음이 무거운 날 찾아가는 자연의 산으로 살쾡이, 도마뱀등이 몸만 가지고서도 넉넉히 살아가는 곳으로 인간 세상과 대비되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공간이며 자연과 우주의 질서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공간이다. 화자는 자연 속의 하나의 생물, 무생물들을 부러워하면서 자연 속에 동화되어 살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을 지닌 채 산을 내려온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도 작은 산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싶은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적 고뇌로부터 벗어난 자연에서의 경험과 일상으로의 회귀를 노래한 시이다. 이 시의 화자는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산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산에서 만물이 공존하는 자연의 소멸과 재생을 접하고는 자연의 마음을 지니게 되어 일상으로 돌아온다. 즉, 일상(집을 공간으로 하여 인간 세계의 현실적 고뇌가 드러남) → 탈일상(자연을 공간으로 하여 자연과 인간을 대비,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이 나타남) → 일상(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회귀)의 공간 이동과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허위에 물든 현대 사회의 삶에 대한 자기반성을 자연에서의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산으로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크낙산'이라는 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국 화자는 자신이 '크낙산'에 영원히 머물러 있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산을 떠나와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라고 한다.

이 시에서 반복되고 있는 내용은 바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태어날 수 없어',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 다시 태어난다' 등의 표현들을 통해 화자가 크낙산에 가고자 하는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자에게 크낙산은 자신만의 이상 세계이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내면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자신을 재충전하고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크낙산, 즉 화자가 추구하는 이상 세계가 화자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구현되기를 바라는 화자의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이상적 공간에 가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언제까지고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으므로 자신의 내면 속에 삶의 희망을 갖고 활력을 충전할 수 있는 이상적 공간을 마련해 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화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이 시에서의 '크낙산'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희망과 활력으로 가득한 공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나도 가슴 속에 '크낙산' 과 같은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보도록 노력해야겠다.

 

시인 김광규

김광규 (1941~ )의 시는 산문에 가까운 시적 문체로 평범한 일상사를 즐겨 다루면서, 그 일상 속에 가려진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좀팽이처럼』『아니리』등의 시집이 있다.

이 시는 늘 반복되는 안일한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과 마주칠 때 느끼는 생명감을 노래하고 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시인의 바람과,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현대사회의 각박한 모습에 대한 비관이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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