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 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개관
- 주제 : 젊은 날의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
- 성격 : 비유적, 성찰적
- 표현 : 영탄적이고 애상적인 어조 / 시를 쓰고 있는 시점보다 훨씬 먼 미래의 시점을 상정하여 시상을 전개시킴.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 청춘의 열정을 삭일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인생을 관조할 만한 시점의 나이가 든 후에)
* 책 →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한 기록과 기억이 담긴 곳
* 힘없는 책갈피 → 힘을 잃은(나이가 들어 희미해진) 기억의 좌표
* 이 종이 → 이 시를 쓰고 있는 종이를 가리킴. 화자의 젊은 날의 고백과 방황의 기록이 담긴 종이
* 책갈피가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 나이가 들어 희미해진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을 회상시킬 것이다.("자, 여기 너의 젊은 시절에 대한 고백과 기록과 기억이 고스란히 있으니, 잘 보아라.")
* 마음에 세운 많은 공장 →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조하기 위해 들끓는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 날 화자의 심적 상태
*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 → 지칠 줄 모르고 무언가를 쫓으며 살아가는 자신을 비유한 말로,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삶으로도 비칠 수 있지만, 화자는 도리어 의미없이 허황되게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즉,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겨 있음.
*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 열정적으로 사는 듯 했지만, 결국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 이러한 행동들은 객관적 거리를 두고 자신을 조망해 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앞의 내용과 관련지어 보면 이러한 행동들은 나 아닌 남에게나 하는 행동으로, 화자에게 있어 그의 살아온 나날들은 마치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실망스러웠으며, 화자는 젊은 시절을 자신의 뜻과 이상대로 살지 못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일 것이다.
*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지금까지의 삶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산 삶이었음을 깨달음.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 화자가 젊은 날에 품었던 꿈과 열정은 결국 질투에 불과했다는 뜻임. /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자신이 꿈, 이상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란 쉽지가 않다. 꿈과 현실의 불일치 속에서 나는 질투한다. 왜 나는 이룰 수 없는가. 이루지 못하고 있는가. 그러면서 나는 내가 상상하는 나의 모습이나 혹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질투하게 된다. 부럽다 부러워, 난 왜 아무것도 못하고 이러고 있을까. 늘 이런 생각으로 지새는 젊은 날은 바로 질투였던 것이다.
*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문장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화자의 반성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핵심 구절 / 화자의 삶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창조적인 몸부림이 아니라, 순전히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표현함. / 젊은 시절의 나는 늘 무엇인가를 바라기만 했고 무엇을 하고 싶었기만 했으며 무엇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모든 희망이라는 것은 시기와 질투와 부러움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미친 듯이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뒤돌아 생각해 보니 왜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몰랐는지에 대한 후회가 든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시상의 흐름(짜임)
- 1 ~ 2행 : 미래에 대한 상상(현재 시점에서 미래의 일을 상상함.)
- 3 ~ 6행 : 청춘의 모습(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본 현재의 모습) - 부정적 인식
- 7 ~11행 :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적 성찰 ('내 희망은 질투')
- 12~14행 :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은 청춘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김.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청춘 시절에 대한 화자의 반성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시구에는 그러한 화자의 반성이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화자는 자신의 청춘의 모습을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개'에 비유하고,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탄식밖에 없다고 자조한다. 그러면서 화자의 삶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창조적인 몸부림이 아니라, 순전히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를 썼을 당시의 시인도 젊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 다른 것만 미친 듯이 원하고 질투하는 것이 젊음임을. 이 시는 먼 훗날 읽혀질 생각으로 지금 쓰여진 시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힘없는 기억의 좌표에 의해 상기될 젊음의 기록이 이 시다. 하지만 이 시는 분명 지금 읽히고 있고 시인은 '먼 훗날'이 되기도 전에 요절했다. 그러나 우리는 젊지만 젊음을 미리 터득하고 깨달은 시인이 가르쳐 준 비밀을 미리 알게 되었다.
기형도의 시세계
좋은 시인은 그의 개성적, 내적 상처를 반성하고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형도의 상처는 어떤 것인가? 유년, 소년 시절의 그의 상처는 가난이며 젊은 날의 그의 상처는 이별이다. 그는 그의 내적, 개인적 상처를 서정적으로 다시 말해 증오의 감정없는 추억의 어조로 되살리고 있다. 그는 가난과 이별이라는 개인적 체험에서 독특한 미학을 끌어내고 있는데, 비평가 김현은 이를 '그로데스크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붙인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 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을 진흙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낙관적인 미래의 전망이 거의 없다.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 있을 뿐이다. 기형도를 특별히 사랑했던 문단의 선배인 작가 김훈은 그의 죽음을 맞아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라고 침통한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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