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길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은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시어 풀이
*선망(羨望) : 부러워하여 바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속리산을 오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을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삶을 성찰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떠올리고 있는 작품이다.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이며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화자에게 준다.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 괴산군,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최고봉인 천왕봉의 높이는 1,058m로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이 산 동쪽은 낙동강 유역, 남쪽은 금강 유역, 북쪽은 한강 유역이다.
나희덕의 시 <속리산에서>는 속리산 등산을 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대상을 의인화하여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고, 마지막 행에서는 대상인 속리산을 객체에서 주체로 바꾸어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보였다’고 한다. 성취욕을 위해서는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고 있던 시인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과 대비되는 삶을 살아온 자신을 성찰하게 해 준다. 그래서 시인은,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임을 산으로부터 듣는다. 그럼에도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시인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시인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속삭이며, ‘산을 오르고 있지만’ 시인이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 산을 오르는 고단함보다 ‘오히려 산 아래에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즉 우리들의 실제 일상적인 삶이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이것은 높이 오르는 것만이 성공이라는 세속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인에게 높이 오르는 것보다 오히려 경쟁의식 속에 살아가는 산 아래 속세의 삶이 더 고달프지 않았겠느냐는 산의 가르침이다.
이를 통해 시인은 속리산이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속리산을 주체화해서 표현한 이 말 속에는 ‘길게 길게 늘여서’ 여유를 가진 삶을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속리산을 오르며, 산다는 것은 높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임을 속리산을 통해 깨닫고 있다. 인생을 산행에 비유한다면, 이 시에서 시인이 가르쳐주는 것은 정상에만 오르는 것보다는 법주사 경내를 걷다가 계곡을 지나고, 산등성이를 넘고. 그리고 둘레길까지 걸으며 점점 더 깊이 산속으로 들어가 산의 품에 안기는 것이 진정한 산행이라는 것이다. 이 시는 높이(경쟁)에 대한 열망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년 ~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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