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

현대시 모음 #02 - 공무원 국어 - 문학 - 시

Jobs 9 2020. 3. 1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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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風景)

- 김종한(金鍾漢)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

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도 흘러 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려.

(󰡔조선일보󰡕, 1937.1.1)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한 곳에 정착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살아온 한 집안의 깊은 연륜(年輪)과 그윽한 분위기이다. 이 시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능수버들, 낡은 우물가, 푸른 하늘, 윤사월, 뻐꾸기’ 등이 봄이라기보다 초여름에 가까운 계절적 배경과 어울려 평화로운 감상을 자아낸다.

심상 : 시각적, 청각적, 공감각적 심상

어조 : 전원의 평화롭고 그윽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서정적 어조

특징 : 오래된 우물이 있는 고가(古家)의 그윽한 정취와 아늑한 분위기가 우리의 고유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각 연이 2행으로 구성되어 단아하고 절제된 느낌을 자아낸다.

3연의 통사 구조의 반복을 통해 물긷는 동작이 느릿하면서도 규칙적인 리듬감을 자아낸다.

▶ 시상 전개 :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제시된 뒤 푸른 하늘(전설)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시는 아주머니의 정결한 행동이 묘사된다.

▶ 구성 : ① 윤사월의 낡은 우물가 풍경(1연)

② 박꽃처럼 웃으시는 아주머님(2연)

③ 푸른 하늘과 푸른 전설을 두레박이 넘쳐 흐르도록 길어 올리시는 아주머님(3연)

④ 물동이에 넘쳐 흐르는 아주머님의 푸른 하늘(4연)

▶ 제재 : 낡은 우물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풍경

▶ 주제 : 평화와 그윽함이 넘치는 시골 고가(古家)의 풍경

 

<연구 문제>

1. (1)이 시의 중심 소재를 쓰고, (2)그 소재가 전달하는 분위기를 30-4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1) 낡은 우물

(2) 대대로 이어오는 시골 집안의 평화롭고 그윽하며 예스러운 분위기

2. 이 시의 청자인 아주머님의 화사하고 원숙한 모습을 상징하는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박꽃

3. 이 시의 지배적인 두 심상은 어떤 것인가? 또, 그런 심상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모범답> (1) 시각적 심상 : 푸른 하늘, 푸른 전설

청각적 심상 : 뻐꾸기 소리, 황소 울음 소리

(2) 전원의 그윽하고 평화로운 삶.

4. 이 시가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푸른 전설

이 암시하는 바를 간략히 밝혀라.

<모범답> 조국의 독립과 희망찬 미래에 대한 신념.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김종한의 데뷔작이다. 그는 이념적, 사회적 경향의 시를 배격하면서 섬세한 언어 감각과 지적인 재치가 번득이는 작품을 즐겨 썼다. 이 시에서도 우리 고유어를 적절히 사용하여 전통적인 전원의 한가한 풍경을 재현시켜 놓았다.

능수버들 아래 낡은 우물이 있는 집은 그 내력이 매우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윤사월의 청명한 하늘 조각이 깊은 우물 속에 비치는 가운데 뻐꾸기 소리조차 한가롭게 들리는 전형적인 전원 농가의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려져 있다. 아마도 종가(宗家)의 맏며느리일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머님은 호젓한 우물가에 서서 하염없이 물을 길어 올린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화자는 아주머니에게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이 아니겠느냐며 말을 걸어보지만, 아주머니는 박꽃처럼 화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없이 두레박질만 한다.

초여름의 한적한 오후에 들리는 뻐꾸기, 황소 울음 소리는 농촌의 한가함을 한결 돋우어 준다. 삼라 만상의 움직임이 일순 정지해 버린 듯한 고요화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뻐꾸기와 황소의 울음 소리이다. 나지막하고 게으른 듯한 자연의 소리, 그 속에서 두레박으로 푸른 하늘과 푸른 전설을 넘치도록 길어 올려 물동이에 이고 일어선 아주머니, 충렁이는 물동이에 담긴 윤사월의 시리도록 푸른 하늘…, 이러한 소재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그윽한 평화와 아름다움이 넘치는 전원 풍경을 완성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김동환의 󰡔웃은 죄󰡕와 비교해 볼 만한 작품인데, 이 작품은 그보다 한 해 먼저 발표된 것이다.

 

 

 

성탄제(聖誕祭)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마지막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시집 󰡔성탄제󰡕, 1969)

 

* 부비는 : ‘비비는’의 사투리.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성탄일 무렵 내리는 눈을 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한 시이다.

이 시는 제5연과 제8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2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 부분에 화자의 시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나 음미해 보자. 화자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정조(情操)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감상하자. 또, 숯불, 눈, 붉은 산수유 열매 등의 시어가 지니는 이미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성격 : 회상적, 주지적, 문명 비판적

어조 :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독백적 어조

특징 : 촛불과 캐롤, 산타 할아버지로 표상되는 서구적 성탄이 아닌, 아버지와 산수유 열매 등의 한국적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구성 : ① 과거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1-6연)

② 삭막한 현재(7-10연)

▶ 제재 : 성탄일의 추억

▶ 주제 : 순수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계승의 참뜻

 

<연구 문제>

1. 이 시의 시상을 지배하는 소재를 찾아 쓰고, 그 상징 의미도 쓰라.

<모범답> (1) 산수유 열매(산수유 붉은 알알)

(2) 아버지의 순수한 사랑

2. 이 시는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대조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매개체를 찾아 쓰라.

<모범답> 눈

3. 이 시에서 ‘숯불’, ‘성탄제’는 각각 어떤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가?

<모범답> (1) 숯불 :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

(2) 성탄제 : 인류의 보편적 사랑과 성스러운 분위기

4. 화자가 어릴 적 체험과 관련하여 ㉠이라고 하며 성탄제를 연상하고 있는 근거와 시적 의미를 두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고난을 무릅쓰고 산수유 열매를 구해다가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점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구세주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구세주의 탄생일인 성탄제를 떠올리고 혈연적인 사랑을 인류에의 보편적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5. ㉡의 이유가 될 만한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감상의 길잡이>

시에서 노래되는 그리움의 대상은 연인이거나 어머니인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조금 특이하게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회상한다. 목숨이 잦아드는 듯한, 어렸을 때의 병력(病歷)과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이 시를 대할 때의 친근감은 우선 그 기법의 낯익음에서 연유한다. 전 10연 중에서 제7연을 분기점으로 하여 전반부에 화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후반부에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어른으로서의 삶을 대칭적으로 조직하였다.

전반부를 보면 어린 시절의 화자는 열병을 앓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온 붉은 산수유 열매(해열제)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생각한다. 붉은 산수유 열매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후반부에서는 어른으로서의 화자가 이제 어린 시절의 열병 대신 그렇게 열병을 앓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화자의 내면에 서리는 것은 어린 시절에는 열병, 어른이 된 다음에는 그리움이다.

한편, 전반부의 기억을 되살려 내는 계기는 성탄제 가까운 어느 날 서른 살의 이마에 와 닿는 눈발의 ‘서느런’ 감촉이다. 이 감촉이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연상케 한다. 눈은 회상의 매체인 것이다. 이러한 연상 속에는 성탄제의 의미를 자신의 절실한 경험과 맺어 보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이 시에서의 ‘성탄제’는 예수의 탄생이라는 피상적인 의미를 벗어나 아버지와 나(화자)와의 새로운 만남을 환기하는 계기가 된다.

‘붉은 산수유 열매’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것이다.

 

<맥락 읽기>

1.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 나.

2. 말하고 있는 지금은 언제쯤인가 ?

☞ 성탄제 가까운 어느날

3. 이 시에서 화자를 가리키는 다른 말을 모두 찾아 보면 ?

☞ 어린 목숨, 어린 짐생, 서러운 서른 살

4. 이 시를 내용상 둘로 나누어 본다면 ?

☞ 앞 : 1 ~ 6연 뒤 : 7 ~ 10연

5. 앞 뒤의 내용이 어떻게 다른가 ?

☞ 앞 : 옛추억(자기가 병들었을 때 아버지가 어렵게 약을 구해왔음)

☞ 뒤 :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은 어느 성탄제 가까운 날 옛추억을 생각함.

6. 옛추억을 떠올리게 된 매개는 ? ☞ 눈, 성탄제

7. 화자의 심정은 ? ☞ 서럽다. 그리움에 젖어 있다.

8. 화자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

☞ (돌아가신 것으로 볼 수도 있는 할머니 혹은)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

☞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삭막한 도시에 사는 서러움

9. 그러니까 화자는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

☞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그 옛날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젖어 있다.

 

<생각해 볼 거리>

1. 이 시는 색감의 대조가 뚜렷한 표현들이 있다. 찾아본다면 ?

☞ 밤(검은색) : 바알간 숯불(붉은 색)

☞ 눈(흰색,차가움) : 붉은 산수유(붉은 색. 따뜻함. 뜨거움)

2. 이런 표현은 어떤 효과를 얻고 있는가 ?

☞ 밤, 눈이 주는 어둡고 차가운 이미지에 대해 바알간 숯불, 붉은 산수유는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와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날 아침에

-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시집 󰡔성탄제󰡕, 1969)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누구나 쉽게 읽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평이한 내용이다. 우리 생활 주변의 평범한 소재로, 알기 쉬운 시어를 사용하여 삶의 밑거름이 될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자연의 변화에 따라 어김없이 맞이하는 설날, 새해 아침에 희망을 가지고 한 해를 설계하고, 우리의 생활이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삶을 긍정적으로 밝게 맞이하자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설날 아침을 맞는 화자의 인생관이 무엇인지 찾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

성격 : 주지적, 희망적

특징 : 평범한 시어와 간결하고 압축된 표현으로 건강한 삶의 자세를 표출.

▶ 구성 : ① 새해를 맞는 자세(1-4연)

② 새해 아침의 마음가짐(5-8연)

③ 새해를 맞는 자세(9-11연)

▶ 제재 : 설날 아침

▶ 주제 :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현재의 넉넉하지 못한 생활상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곳은 어느 연인가?

<모범답> 제6연

2. 이 시에서

따스하게

라는 표현은 구체적 감각이다. 삶에서 지니는

따스하게

의 구체적 의미를 비유로 표현한 구절 둘을 찾아 쓰라.

<모범답>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고운 이빨을 보듯

3. 이 시를 근거로 하여 시인의 인생관을 6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인생의 길이 험난하고 각박하더라도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슬기롭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관을 보이고 있다.

4. 제10연의 표현상의 특징과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직유법을 사용하여 신생(新生)의 이미지를 드러낸 표현이 신선감을 준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11연으로 된 주지적 서정시로, 밝고 건강하고 건설적인 시상(詩想)을 알기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열띤 감정이나 감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혼돈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면서 긍정적이고도 희망적인 인생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시로서 산뜻한 맛은 떨어지나 담고 있는 의미면에서는 우리에게 삶의 깊이를 더하여 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설날, 새삼스럽게 인생살이의 각박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화자는 더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 그것을 긍정적 · 희망적 삶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대로’, ‘꿈도 좀’,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등의 표현에서 설날의 추위와 같은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을 슬기로 견뎌내는 여유 있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주어진 삶을 더 지혜롭게 영위하여 기쁨과 보람을 찾자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작게는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 크게는 한 나라의 시인으로서 설날 아침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은 성장의 기쁨과 반가움이며, ‘고운 이빨을 보듯’은 잇몸을 뚫고 나오는 어려움과 같은 삶의 고통을 착함과 슬기로써 이겨내고 기쁨과 반가움을 맛보자는 것이다. 평이한 시어와 간결 · 압축된 표현으로 적절히 감정을 절제하면서 생활과 유리되지 않고 건강한 삶의 자세를 담담한 어조로 표출시킨 것이라 하겠다.

 

 

북치소년

- 김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시집 󰡔십이음계󰡕, 1969)

 

<감상의 길잡이>

김종삼은 고도의 비약에 의한 어구의 연결과 시어가 울리는 음향의 효과를 살린 초현실주의 기법을 원용하여 동안(童眼)에 비친 이미지로써 순수 지향의 의식을 펼쳐 보인 시인이다. 초기에는 시행의 단절, 난삽한 한자어의 배치, 의미의 비약 등을 활용하여 기법의 실험성을 드러내다가, 후기에는 점차 평이한 진술을 바탕으로 인간의 체험을 드러내고 행간의 여운을 통하여 감추어진 의미를 암시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이 시는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 ―처럼’으로 묶인 세 개의 연에서 그 비교 대상이 생략됨으로써 완전한 문장을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쓰다가 그만 둔 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끊어진 그 시상들을 ‘북치는 소년’이라는 제목을 중심으로 엮어 보면, 시인이 의도하고 있는 통일된 시상을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각 연의 ‘ ―처럼’ 뒤에 ‘북치는 소년’을 덧붙이면, 전체의 맥락이 완전하게 살아나 독자의 가슴 속에서 여운으로 완결됨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서양에서 우리 나라의 어느 가난한 아이에게 아름다운 카드가 온다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김종삼 시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혼자이고 가난하며 비극적 존재로 나타난다. 이 시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2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가난한 아이로 비애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6․25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쟁 고아로도 볼 수 있겠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그 아이는 서양 소년이 북을 치고 있는 그림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는다. 그러나 카드 속에 담겨 있는 ‘북치는 소년’․‘양떼’․‘진눈깨비’ 등의 이국적 풍광(風光)들은 그에게 막연한 아름다움의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아이는 그 환상적인 풍경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그는 곧 그것이 다만 화려한 장식에 불과한, ‘내용 없는 아름다움’임을 깨닫는다.

이렇듯 이 시는 눈에 비친 사상(事象)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시가 아니라, 그 사상 뒤에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는 이미지에 의해서 조형된 시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어떤 사상이나 의미 내용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각 시어들이 구축해 놓은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간인(民間人)

- 김종삼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현대시학󰡕, 1971.10)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6․25의 비극적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으면서도 전쟁의 색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제목으로 쓰인 ‘민간인’이라는 단어는 관리나 군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란 뜻으로, 남북 분단의 비극이 평범한 일반인에게도 끼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배경을 제시하고, 그 곳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이렇다 할 생각과 느낌을 덧붙이지 않은 채 다만 보여만 줄 뿐이다. 그것은 시인이 그 비극적 상황을 비정하리만큼 객관적으로 그려 내면서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 것인가를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작 방법은 독자의 상상력을 통하여 더 깊은 생각과 느낌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은 시인에게 기억하기조차 끔찍했던 공포의 사건으로, ‘용당포’라는 지명과 ‘1947년 봄’이라는 시간을 통해 더욱 구체화됨으로써 장장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서운 사건은 다름아닌, 전쟁이 발발하기 전, 북한 주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남북 왕래가 금지된 38선을 넘어 월남을 감행하는 극한 상황에서, 우는 젖먹이 아이까지 바다 속에 던져 넣던 비극적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라는 구절의 ‘수심’은 바로 분단이 가져다 준 비극의 깊이요, 그의 가슴에 각인된 고통과 슬픔의 깊이라 하겠다.

 

 

광장(廣場)

- 김규동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黙)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시집 󰡔나비와 광장󰡕, 1955)

 

<감상의 길잡이>

모더니스트로 출발한 김규동은 초기에는 주지주의 혹은 쉬르리얼리즘적인 색채를 보였으나, 70년대 이후부터는 사회 내지 역사 의식을 토대로 하는 사회성 짙은 리얼리즘의 민중시로 나아가는 시 세계를 보이고 있다. 이 시는 그의 초기시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계열로 전쟁으로 인해 피폐된 인간성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흰나비’는 단순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시적 화자를 대신하는 감정 이입된 존재로서 시적 상황에 대한 일정한 인식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활주로’․‘제트기’․‘피 묻은 육체’․‘묘지’ 등의 시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시에서 제기된 것은 피비릿내 나는 전쟁 상황이다. 그와 함께, ‘돌진하려는 흰나비’․‘차단하는 투명한 광선의 바다’․‘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 등의 날카로운 이미지는 죽음과 직면한 화자의 절박한 한계 상황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향을 잊어버리고 /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보’다가, 결국은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의 조수에 밀려 /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리’는 ‘흰나비’는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대항하여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화자의 모습이다.

그에게 ‘화려한 희망’을 갖게 하는 ‘아름다운 영토’는 인간성이 복원된 세계이지만, 현실은 ‘신도 기적도 이미 /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전쟁터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서만 피어난다는 모순된 ‘희망’을 찾아 ‘또 한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준다. 이렇게 이 시는 6․25의 비극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을 파괴하는 전쟁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인식은 감각적 표현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전후(戰後) 시의 한 경향이었던 모더니즘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외인촌

- 김광균

 

하이얀 모색(募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馬車)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電信柱)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少女)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조선중앙일보>(1935)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에는 현대의 도시 문명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과 경험을 중시하는 주지주의 경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 ‘외인촌’이라는 공간 배경과 이국적인 분위기가 그림을 그리듯 표현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하이얀 모색, 파아란 역등, 새빨간 노을, 안개 자욱한 화원지, 어두운 수풀의 빛깔을 그려 보고,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 갈대밭, 시들은 꽃다발, 외인묘지, 가느다란 별빛, 공백한 하늘, 고탑, 퇴색한 성교당」 등에서 이국적인 애상의 정경을 떠올려 보자.

▶ 성격 : 회화적, 감각적, 주지적, 이국적

▶ 특징 : ① 이국적 정서

② 도시적 우수

③ 회화적 이미지

▶ 시상 전개 : 시간의 흐름(저녁→밤→아침)

▶ 구성 : ① 저녁 무렵의 산협촌(1연)―원경(遠景)

② 작은 집들과 시냇물, 화원지의 텅 빈 풍경(2,3연)―근경(近景)

③ 외인 묘지의 밤 정경(4연)

④ 성교당의 종 소리(5,6연)

▶ 제재 : 외인촌의 풍경

▶ 주제 : 도시인의 고독과 우수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의인법을 사용한 두 구절을 찾아 쓰라.

󰄆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2. 이 시는 고독과 우수의 정서를 느끼게 해 주지만, 그러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노출시키지는 않는다. 낭만주의 계열의 시와 비교하여 이 시인의 창작 방법이 지니는 특징을 40-50자 정도로 설명하라.

󰄆 낭만주의 계열의 시가 주정적인 데 비하여 주지주의 시는 지성을 통해 감정을 억제한다.

3. ㉠의 표현상의 특징과 드러내고자 한 이미지를 40-50자 정도로 쓰라.

󰄆 청각적 영상을 시각화한 공감각적 표현으로 비약과 확산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4. 이 시에서 다음 각각에 해당하는 객관적 상관물을 찾아 쓰라.

(1) 한없는 동경과 그리움에 젖어 있는 모습

󰄆 전신주

(2) 그리움에 타는 가슴

󰄆 구름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주지주의 시로서 회화적 요소를 중시하였다.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에서 도시인의 고독과 우수를 느낄 수 있다. 외인촌의 이국적인 정취를 사실적으로 그려내 낯설고 쓸쓸한 세계를 홀로 떠도는 이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시간적 배경은 ‘저녁→밤→아침’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어둠의 분위기가 화자에게 고독과 우수를 느끼게 하고 있다.

제1연에서 저녁 무렵 산골짜기의 마을을 푸른 등불을 달고 어둠 속으로 잠기듯 사라져 가는 역마차와 산마루ㅅ길에 서 있는 전신주 위에 뜬 구름이 새빨간 노을과 어우러져 고요하고 잠잠한 외인촌의 원경(遠景)이 제시된다.

제2,3연에서는 저물 무렵 창을 닫는 집들, 돌다리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한낮에 꽃밭에서 웃으며 놀다간 소녀들의 모습과 시든 꽃다발 등 외인촌의 근경(近景)을 묘사하고 있다.

제4,5연에서는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과 그 위에 비치고 있는 별들, 텅 빈 하늘에 매달려 있는 시계, 고탑같이 높은 교회의 지붕에서 울려 퍼지는 종 소리를 묘사하여 이국적인 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행의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 소리’는 청각적 영상을 시각화한 공감각적 표현으로 비약과 확산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맥락 읽기>

1. 이 시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 나

2.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산협촌, 외인촌

3. 이 시에서 외인촌은 우리의 전통적인 향토 마을과 같은 곳일까?

☞ 아니요.

3-1. 그럼, 외인촌은 어떤 곳일까?

☞ 외국 사람들이 사는 곳

3-2. 그래서 어떤 느낌을 주나?

☞ 이국적인 느낌

3-3. 그러한 느낌을 나타내주는 시어를 찾아보자.

☞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馬車) / -전신주 /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 / -외인 묘지 /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 / -날카로운 고탑 / -퇴색한 성교당 / -종소리

4. 무얼하고 있지?

☞ 산협촌(외인촌)의 경치를 보고 있어요. (관찰하고 있어요)

5. 하루 중 어느 때일까? 시간이 어떻게 바뀌지?

☞ 저녁→밤→아침

6. 외인촌의 저녁 풍경은 몇 연에 나와 있지?

☞ 1, 2, 3연

6-1. 외인촌의 저녁 풍겨은 어떻지? (자세히 묘사하여 말해보자)

☞ 하이얀 모색(저녁 어스름) 속에 있다.

→ 파아란 역등을 달은 마차 한 대가 지나 가고, 전신주 위엔 새빨간 노을에 젖은 구름이 걸려 있다. 바람이 불고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시든 꽃다발이 있다.

6-2. ‘나’는 외인촌의 저녁 풍경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 고독하다. 아름답다. 펴온하다. 고독마저도 감미롭다.

6-3. 외인촌의 저녁 풍경을 그려 보자.

7. 외인촌의 밤풍경은 어떠하지?

☞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에 가느다란 별빛이 내린다.

7-1. 외인촌의 밤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보자.

8. 외인촌의 아침 풍경은 어떻지?

☞ 빈 하늘에 걸려 있는 마을의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고, 낡은 교회당 지붕 위에선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8-1. 외인촌의 아침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보자.

9. 만약, 시의 종류를 노래하는 시, 생각하는 시, 보는 시로 나누어 본다면, 이 시는 어느 시에 해당될까?

☞ 보는 시

10. 이렇게 이 시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형체없는 소리마저도 그림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곳을 찾아 보자.

☞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져 있었다.

☞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11. 외인촌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 보고, 정리해 보자.

☞ 이 시는 외인촌의 이국적인 정서를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내고 있는 시이다.

 

 

설야(雪夜)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야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시집 「와사등」(1939)> (첫발표: 조선일보󰡕, 1938.1.8)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눈오는 날 밤의 정경을 통해 지향 없는 그리운 감정과 상실감에서 오는 서글픔을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시인의 천부적인 이미지 조형 능력이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 차단한 의상’ 등을 통해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러나 제5연의 ‘잃어진 추억의 조각’에서는 감상(感傷)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시인이 원천적인 주지 시인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서정 시인으로서의 측면이 강했음을 반증한다.

성격 : 회화적, 애상적

심상 : 회화적 심상

구성 : 강설에 의한 유추

한밤에 흩날리는 눈 - 먼 곳의 그리운 소식(1)

- 서글픈 옛 자취(2)

눈을 맞이하는 설레는 심정(3)

눈 내리는 소리(4)

눈으로 말미암은 추회(追悔)(5)

눈에 서리는 슬픔(6)

제재 :

주제 : 눈오는 밤의 정경과 그리움

 

<연구 문제>

1. 시인 특유의 내면 공간의 조형(造形) 능력이 뛰어난 두 어절의 시구를 찾아 쓰라. ☞ 마음 허공

2. 이 시에서 시인이 원천적인 면에서 서구적 이미지스트 시인보다 낭만적인 시인으로서의 체질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두 단어를 찾아 쓰라. ☞ 추회, 슬픔

3. 이 시에서 제재인 ‘눈’을 나타내고 있는 시구 넷을 찾아 쓰라.

☞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 차단한 의상

4. ㉠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한 것인지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 눈의 이미지를 관능적으로 표현한 시행으로서, 눈이 사르륵사르륵 내리는 소리를 은유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눈 내리는 밤의 정경 속에 피어오르는 추억과 환상을 그린 시다.

마지막 두 줄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 내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에서 확인되는 것은 사물을 마주한 시인의 감정 상태이다. 눈은 정화(淨化)된 슬픔이다. 눈이 억누를 수 없는 슬픔처럼 마구 쏟아지지 않고 정화된 슬픔처럼 차분하게 내리는 것은 시인(혹은 화자)의 슬픔이 과거의 추억으로 은은하게 되살아 오기 때문이다.

눈이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잃어진 추억의 조각’, ‘차단한 의상으로 비유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눈은 과거의 추억을 환기시켜 주고, 그 추억은 현재의 나를 슬픔에 젖게 한다. 그렇다면 를 슬프게 하는 추억, 과거의 경험 내용은 무엇일까?

‘여인’은 ‘나’의 추억의 중요한 부분이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단순한 감각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다른 시행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연의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 흰눈은 내려……’와 관련이 있으리라. 이것은 또 제3연의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과도 관계가 있을 터이다. 여기서 우리는 ‘홀로’와 ‘호올로’라는 두 개의 부사가 놓인 자리를 생각하게 된다. 나도 ‘홀로’이고 여인도 ‘호올로’이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외로움이다.

여인은 지금 내 앞에 있지 않고 ‘머언 곳’에 있으며, ‘차단한 의상’에서 암시되듯이 여인은 나에게 냉정하다. 여인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추억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슬픈 추억이지만, 여인은 나에게 신비로웉 존재다. ‘머언 곳에 여인이 옷 벗는 소리’는 부정(不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여인의 신비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맥락 읽기>

1. 화자는 누구인가? ☞ 내, 나

2. 듣는 사람이 있는가 ? ☞ 아니다. 홀로 있다.

3. 화자는 어디에 있는가 ?

☞ 눈 내리는 뜰에 홀로 서 있다.

4. 그는 무얼하고 있는가 ?

☞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5. 화자는 내리는 눈을 무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 ?

☞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 (차단한 의상)

6. 눈의 비유적 표현으로 볼 때 화자는 지금 어떤 심적 상태에 있으며 또 그 이 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심적 상태 : 서글픔, 그리움에 젖어 있다.

☞ 이 유 : 먼 옛날의 서글픈 추억 때문에

7. 시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그 추억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어떤 여인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

8. 그렇다면 그것과 관련된 시구를 찾아 보자.

☞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차단한 의상

9.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 표현이 있다면 ?

☞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10. 무얼 표현한 것인가 ? ☞ 눈내리는 모습

11. 어떤 효과를 내는가 ?

☞ 눈이 싸르락 소리를 내며 고즈넉이 내리는 모습을 표현함과 동시에 화자의 생각 속에 있는 한 여인의 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와사등

-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녀 있다.

내 호올노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날애를 접고

느러슨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저저

찰난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크러진 채

사념(思念)의 벙어리 되여 입을 담을다.

 

피부의 바까테 숨이는 어둠

낫서른 거리의 아우성 소래.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석기여

내 어듸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왓기에

기일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듸로 어떠케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니여 잇다.

<󰡔조선일보󰡕, 1939.6.3, 시집 󰡔와사등󰡕, 1939>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30년대 주지주의 시가 보여 주는 세련된 비유적 언어와 시적 공간의 확충은 비싼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등불’의 이미지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보자. 어둠을 밝히는 시인 의식의 표출이면서 ‘떠남’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떠남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인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는 어둠을, 날개를 접는 새에 비유한 감각적 표현이다. ‘고층 건물→묘석’, ‘찬란한 야경→잡초’에서 도회인의 고독감과 불안, 고민을 반영한 시각적 이미지와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의 공감각적 이미지를 주목하자.

성격 : 회화적, 감각적, 주지적

심상 : 시각적, 촉각적, 공감각적 심상

구성 : 수미쌍관의 구성

현대 문명 속에서의 현대인의 방향 감각 상실(1)

현대인의 무정향성(無定向性)의 근거 제시(2)

도시적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비애(3)

종말 의식을 갖고 살면서 느끼는 중압감(4)

현대인의 방향 감각 상실(5)

제재 : 와사등

주제 : 현대인의 고독감과 불안 의식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화자인 ‘나’의 방향 상실감을 나타낸 두 어절의 시구를 찾아 쓰라.☞ 비인 하늘

2. 제2연의 2,3행에서 비유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쓰라.

☞ ‘묘석’은 현대인의 종말감을 암시하고, ‘잡초’는 무질서한 현대 문명을 비유한다.

3. 이 시에서 ㉠이 표상하는 바를 10자(실자수) 내외로 쓰라.

☞ 고독하고 쓸쓸한 현대인

4. 이 시는 화자의 어떤 정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50자 정도로 설명하라.

☞ 현대 문명에서 느끼는 비애, 고독 등의 정서를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5. 이 시가 시문학파의 한 사람인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와 다른 점을 대상과 심상의 두 측면에서 비교해 보라.

☞ 대상 : ‘와사등’이 물질 문명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우수를 그리고 있다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는 순수미의 세계를 향토적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심상 : 김광균이 주로 시각적 심상에 의존하여 회화성을 강조했다면, 김영랑은 청각적 심상을 통해 음악성을 강조했다.

 

<감상의 길잡이>

김광균의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이 이 시도 시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사람의 의식이나 소리까지도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 회화적 특성을 드러낸다. 󰡔와사등󰡕은 아무 것도 믿고 의지할 수 없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어디론가 따나가야만 하는 현대인의 고독과 슬픔의 신호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떠남의 심상에는 도시적 상황 속에서의 현대인의 불안 의식이 나타나 있다.

1연에서는 물질문명 속에서 현대인의 갈 곳 모르는 슬픈 심정을 잘 그리고 있다.

2연에서는 현대인의 슬픈 심정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문제의 한계를 벗어나 시대적 상황으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2연에서 파악되는 여러 가지 특성은 이 시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3연에서는 제2연에서의 어둠의 정서를 이어받으면서 다시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고 있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은 시각을 촉각으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심상이다.

4연에서는 현대 문명으로 인한 종말 의식을 갖고 살면서 느끼는 중압감, 그리고 존재로서의 실체를 상실해 버린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5연은 제1연의 반복이다. 다만 행의 배열만 바꾸어 놓고 있다. 이것은 등불의 이미지를 선명히 하려는 배려이며, 결국 현대인의 고독감과 비애를 실감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추일 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인문평론󰡕, 1940.7)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에는 특이한 비유가 많이 눈에 띈다. 김광균의 시의 화화성은 현대 도시 문명의 새로운 감수성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시는 회화이다’라는 모더니즘의 기초 위에 있다. 󰡔추일 서정󰡕도 예외는 아니어서 쓸쓸하고 황량한 가을날의 풍경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 시에서 추일 서정의 황량감, 애상감, 공허감, 상실감, 고독감 등의 정서가 확연히 드러난 시어나 시구를 찾아보자. ‘황량한 풍경’에서 화자 자신의 느낌을 상상해 보자. 그 허전한 고독감을 떨치기 위해 화자의 행동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그 행동에서 남겨진 정서는 결국 무엇인가? 특이하게 비유된 이미지 하나하나에 구속되지 말고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 보자.

성격 : 회화적, 주지적

심상 : 시각(회화), 공감각적 심상

특징 : 시각적 이미지를 비유를 통해 형상화함.

생경하고 과격한 비유의 연속으로 딱딱한 느낌을 줌,

구성 : 가을의 애상감, 공허감(1-3)

가을이 주는 소멸과 조락(4-7)

가을이 주는 고독감, 황량감(8-11)

황량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독한 화자(12-16)

제재 : 가을날의 풍경

주제 : 황량한 가을날의 고독감

 

<연구 문제>

1. 이 시는 특이한 비유가 많아 첫 인상이 매우 어렵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 보면 지극히 평범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지은이는 무엇을 묘사했는지 40자 내외로 쓰라.(반드시 ‘풍경’과 ‘인물’ 두 단어를 이용할 것)

☞ 쓸쓸한 가을날의 풍경 속에 외로이 방황하는 어떤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2. 이 시의 지배적 정서를 찾아 쓰고, 그 정서가 행위로 구체화된 시어도 찾아 쓰라. ☞ 고독, 돌팔매

3. ㉠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한 것인지 40자 내외로 쓰라.

☞ 기차 연기를, 원근감과 비유에 의한 언어의 회화성을 살려 표현하였다.

4. ㉡은 무엇을 비유한 말인지 2음절의 한자로 쓰라. ☞ 裸木

5. 주지주의 시의 의의를 당시 사회적 현실과 관련시켜 두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공업화를 추진함으로써 사회는 급격히 도시화되고 근대적인 생활 양식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회 현실이 시인에게 새로운 감수성을 요구함으로써 주지주의 시가 등장한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연의 구분이 없지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1행부터 제11행까지는 자연을 도시적, 문명적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하였고, 12행부터 끝까지에서는 문명화된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경이 묘사되어 있다.

󰡔외인촌󰡕이 풍경의 묘사로 끝나는 데 비해, 󰡔추일 서정󰡕은 후반부가 희귀하게도 시인을 등장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여기서 우리는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 의식을 엿보게 된다.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은 이미 자연의 모습을 상실한 채 문명화되어 있다. 지폐, 포화(砲火), 넥타이, 담배 연기, 급행 열차, 공장, 철책, 셀로판 지() 등으로 비유되는 자연은 시인으로 하여금 황량한 생각에 젖게 한다. 그래서 그는 문명의 황량함을 향해 을 던진다. 그것은 거짓된 문명의 파괴를 위해 던지는 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던지는 돌이다. 마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 돌은 다만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갈 뿐이다. 이 시가 겨냥하는 지점은 문명 속의 인간의 고독일 터이다.

 

 

은수저

- 金光均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 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文學」(1946년 7월호)---

 

<핵심 정리>

1. 시작(詩作) 배경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비통한 심경을 절제와 간결의 언어로 표현하여 더 많은 효과와 감동을 준다.

2. 시상의 전개

* 제1연 - 은수저에 고인 눈물

* 제2연 - 애기에 대한 환상

* 제3연 - 안타까운 부정(父情)

3. 주제 : 아기를 잃은 부정(父情)

4. 소재 : 은수저

5. 시어의 상징 의미

* 은수저 - 애기를 상징

 

<감상의 길잡이>

이미지즘 경향의 회화적 수법을 앞세운 이전의 시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김광균의 이 시는 자식 잃은 아버지의 뜨거운 부정(父情)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시는 해방공간의 정치성 짙은 시들과는 달리 김광균의 시적 관심사가 다시 시인의 내면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김광균이 문단에 처음 작품을 선보인 것은 불과 16세이던 1930년 동아일보 지면이었다. 그리고 첫 시집 󰡔와사등󰡕이 출간된 것이 25세 때인 1939년이고, 두 번째 시집 󰡔기항지󰡕가 나온 것이 33세 때인 1947년이었다. 결국 그는 서른 이전의 나이에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한국 시사에서 확보했을 뿐 아니라, 해방을 전후해서 이미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거의 소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후 그는 시작 생활을 중단하고 실업계에 투신하여 역량있는 실업인으로 활약하다가 문단 고별 시집인 󰡔황혼가󰡕(1957)를 출간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3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 생활을 재개하여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예전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 시는 두 번째 시집 󰡔기항지󰡕에 수록되어 있지만, 후기 작품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항지󰡕 발문에 ‘내 나이 스물 여섯부터 서른까지의 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참고한다면, 이 시는 예전의 시와는 전혀 다른 경향의 작품으로 서른 이후에 창작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의 이 시는 화자인 아버지가 저녁을 먹으며 아이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한밤중에 만난 죽은 아이의 환영과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아이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시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비통한 심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시어는 ‘눈물’ 하나밖에는 없다. 그러나 간결한 3연의 구성과 단문으로 행을 마감한 시 형식 속에는 자식을 그리워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아픔이 흠뻑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연은 화자가 저녁 식사 시간에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저녁 식사 시간, 화자는 문득 아이가 없음을 깨닫는다.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잠깐 어디를 간 것이라고 믿어 왔지만, 저녁 밥상을 받고 아이의 빈 자리를 보며 그제서야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는 아이의 방석에 놓인 주인 없는 ‘은수저’를 보며 화자는 눈물을 흘린다. ‘저무는 산’과 ‘잠기는 노을’은 하강․소멸의 이미지로서 아이의 죽음을 상징하며, 아기를 ‘애기’로 표현한 것에서 더 짙은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은수저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빌며 그가 아이의 돌잔치 때 선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화자는 그 은수저에서 더 깊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이다. ‘은수저’에서 ‘애기’를 떠올리고, 다시 그것은 ‘부정(父情)’으로 확대됨에 따라 마침내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2연은 한밤중에 화자가 아이의 환영(幻影)을 만나는 모습이다. 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화자는 들창을 열고 바람 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던 중, 불어 오는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방실방실 웃으며 방안을 들여다 보는 아이의 환영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화자가 반가와하기도 전에, 아이는 벌써 문을 닫고 총총히 사라져 버린다.

3연은 아이가 죽음의 세계로 떠나가는 모습이다. 화자는 ‘먼 들길’로 제시된 죽음의 세계로 ‘맨발 벗은’ 채 울면서 가고 있는 ‘애기’를 목메어 부르지만, 아이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그림자마저 아른거’릴 뿐이다.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던 2연의 ‘애기’가 3연에 와서는 사자(死者)의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나 있다. 아무리 목메어 부르며 그리워하더라도 이젠 더 이상 이 곳 이승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아이임을 인정하고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데서 진한 육친애를 느낄 수 있다. 정지용의 <유리창>과 동일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지만, <유리창>보다 화자의 감정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별다른 수사적 기교 없이 평이한 서술로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지만, 그것을 절제하고 여과하는 시인의 인간적 성숙도를 짐작할 수 있다.

 

 

호 부(星湖附近)

- 김광균

 

1

 

양철로 만든

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기일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 머얼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조선일보󰡕, 1937.6.4)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각적 영상으로 달빛이 호젓하게 비친 차가운 겨울 호수의 풍경을 스케치하듯 그렸다. 회화적 이미지 구사로 잘 알려진 시인 특유의 비유 형상 능력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달을 ‘양철’로, 겨울 호수를 ‘은모래’와 ‘화려한 꽃밭’으로 나타내고 있음에 유의하자. 화자의 감정의 기복을 행간(行間)에 따라 유추함으로써 ‘성호 부근’의 겨울 호수의 풍경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성격 : 회화적

심상 : 시각적 심상

시상 전개 : 공간의 이동

구성 : 1. 달빛이 비친 겨울 호수의 모습

차가운 겨울 호수의 모습(1)

호숫가를 쓸쓸히 거님(2)

환상 속에 떠오르는 영상(3)

2. 황혼 무렵의 차창 밖 풍경

떠오르는 고향의 모습(4)

황혼의 차창에 서리는 풍경(5)

제재 : 호수

주제 : 달빛이 비친 겨울 호수의 모습

 

<연구 문제>

1. 회화적 수법의 하나인, 의식을 시각화한 시구를 찾아 쓰라.

☞ 추억의 가지가지

2. ㉠과 ㉡은 어떤 장면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가?

☞ 달빛에 비친 성호의 모습

3. ㉢에 함축된 의미를 20자 내외로 쓰라.

☞ 젊음의 추억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4. 다음 중

에 함축된 정서와 같이 제시된 것은?

☞ ③

① 구름에 가듯이, 가는 나그네

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③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④ 아니시며 그츠르신 ᄃᆞᆯ 아으 / 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아ᄅᆞ시리이다.

 

<감상의 길잡이>

1연은 차가운 겨울 호수에 호젓이 달이 비취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달을 양철이라는 금속성에 비유하여 차가운 겨울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2연은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쓸쓸히 거니는 화자의 모습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3연은 화자의 회상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의 영상을 선명하게 그려 내고 있다. 추억이란 의식까지도 시각화하여 빙성처럼 빛나는 영상으로 그려 낸 시인의 독특한 형상 능력이 돋보인다.

4연은 추운 겨울의 얼어붙은 강물을 보면서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5연은 황혼 무렵 차창에 서리는 풍경을 보면서 추억 속의 고향을 떠올리고 있다.

 

 

 

- 김광균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조선일보󰡕, 1939.7.9)

* 고가선 : 고압 전류를 송전하는 전선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데생’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이미지만으로 노을이 지는 황혼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이러한 회화적 수법과 함께 ‘노을→전신주→고가선→밤’ 또는 ‘구름→목장의 깃발과 능금나무→들길’로 이어지는 시선의 이동을 통해 어둠이 짙어가는 모습을 변화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 색채는 분위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하며 심상을 떠올려 보자.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영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또렷한 시각적 이미지가 많이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시각적 영상과 다른 종류의 감각적 요소가 어우러진 시구를 찾아보고, 내면적 분위기를 드러낸 시어를 찾아보자.

▶ 성격 : 회화적, 서정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시상 전개 : 시선의 이동

▶ 구성 : ① 밤의 어둠이 황혼을 점점 덮어가는 모습(1연)

② 고가선 위에 마지막 노을이 불이 켜지듯 빨갛게 남음(2연)

③ 구름은 빨간 노을에 물들여져 한 다발 장미처럼 보임(3연)

④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희미한 윤곽으로 남아 사라질 듯이 쓸쓸한 들길(4연)

▶ 제재 : 황혼의 풍경

▶ 주제 : 노을이 지는 황혼의 외로움

 

<연구 문제>

1. 다음 시 󰡔인동(忍冬) 잎󰡕과 󰡔데생󰡕의 이미지 표출 방식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묘사의 연습 끝에 나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실패였다.”는 김춘수의 말과 관련하여 실패의 원인을 찾아 6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눈 속에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하는 인동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 ① 󰡔인동(忍冬) 잎󰡕이 묘사적 이미지를 통해 풍경을 그리고 있음에 반해, 󰡔데생󰡕은 비유적 이미지로 풍경을 그리고 있다.

② 두 편 다 객관적 묘사로 그치지 않고, ‘외로운’, ‘슬프다’ 등의 관념을 노출시키고 있다.

2. ㉠의 뜻하는 대상과 보랏빛이라고 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쓰라.

󰄆 ① 하늘

② 노을과 어둠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3. 이 시의 시상 전개 방식을 쓰고, 셋째, 넷째 연에서 그 대상을 찾아 순서대로 나열하라.

󰄆 ① 시선의 이동(원근법)

② 구름→목장의 깃발과 능금나무→들길

 

<감상의 길잡이>

‘1’은 저녁 노을이 어둠에 묻히고 하나 둘 별이 나타나는 순간의 모습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1연은 하늘의 노을이 향료를 뿌린 듯 곱게 배경을 이루고 전신주가 기울어지듯점점 어둠에 묻히고 있는 모습이다.

2연에서는 황혼이 기울면서 등()이 켜지는 것 혹은 별이 나타나는 것을 밤이 켜진다고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2’는 구름과 땅 위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3연에는 노을과 어둠이 뒤섞여 보랏빛으로 변한 하늘을 배경으로 아직 남아 있는 노을에 반사된 붉은 구름이 한 다발 장미로 표현되어 있다.

4연은 가장 가깝고 구체적인 사물이 등장하는 땅 위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목장의 깃발과 능금나무는 차차 희미해져 가냘픈 윤곽으로 남아 곧 어둠에 묻힐 것이다. 특히, 들길을 부울면 꺼질듯이라고 감각화하여 사라져 가는 애잔한 정경을 그려 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풍경을 풍경으로만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외로운자신의 정서를 들길에 투영시키고 있다.

 

 

 

31이여! 가슴아프다

- 김광균

 

조선독립만세 소리는

나를 키워준 자장가다

아버지를 여읜 나는

이 요람의 노래 속에 자라났다

아 봄은 몇 해만에 다시 돌아와

오늘 이 노래를 들려주건만

3․1날이여

가슴아프다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

겨레와 겨레의 싸움 속에

나는 이 시를 눈물로 쓴다

이십칠년전 오늘을 위해

누가 녹스른 나발을 들어 피나게 울랴

해방의 종소리는 허공에 사라진 채

영영 다시 오지 않는가

눈물에 어린 조국의 깃발은

다시 땅 속에 묻혀지는가

상장(喪章)을 달고 거리로 가자

우리 껴안고 목놓아 울자

3․1날이여

가슴 아프다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

(시집 󰡔3․1기념 시집󰡕, 1946.3)

 

<감상의 길잡이>

김광균은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조직부장을 맡으면서 과거 이미지즘 위주의 시를 쓰던 경향과는 완전하게 다른 시작(詩作)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지용이나 김기림과는 달리 시의 정치적 편향을 비판하면서 시인의 정신 세계를 개척하는 길만이 민족시의 방향임을 주장한다.

이 시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시분과에서 1946년 3월 1일을 기념하여 간행한 󰡔3․1기념 시집󰡕에 수록된 일종의 기념시의 성격을 지닌다. 대부분의 기념시가 기념의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의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 시는 오히려 기념하는 주체의 솔직한 자기 비판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14년 생인 김광균은 1919년 3․1운동 당시 다섯 살의 나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조선독립만세 소리는 / 나를 키워준 자장가’라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시인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봄은 해마다 반복되어, 해방이 된 오늘날에도 다시 3․1날의 노래를 부르지만, 오히려 가슴 아플 뿐이다. 그것을 시인은 7~9행과 20~22행의 ‘3․1날이여 / 가슴 아프다 /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라고 반복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전체가 22행의 단연시로 구성되어 있지만, 위의 반복구를 기준으로 해서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럴 때 전반부는, 과거의 회상으로서의 3․1날을 노래하는 동시에, 1946년의 3․1날을 노래하는 후반부의 전제의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시인의 관심은 당대의 현실에 놓이는 바, 그의 현실 인식은 ‘겨레와 겨레의 싸움 속’과 ‘해방의 종소리는 허공에 사라진’ ‘눈물에 어린 조국’으로 표상된다. 해방된 지 1년도 채 못되어 좌․우익의 투쟁은 날로 거세어 가고, 해방의 감격은 어느새 ‘땅 속에 묻혀’져 버린 현실 속에서 시인은 ‘이 시를 눈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광균은 비록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은 하였지만, 맹목적인 이데올로기 추구와 시의 정치적 편향을 경계하면서, 3․1날을 떳떳이 맞을 수 없는 후손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김광균의 가슴앓이가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에 대해서는, 과연 그 어떤 지도자가 진실로 가슴 아파할 것인가. 아, 진실로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1979)

 

<감상의 길잡이>

김광규의 시는 대부분 평이한 언어와 명료한 구문(構文)으로 씌어진 일상시(日常詩)이면서도 그 속에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그를 흔히 난해시에 식상한 독자와의 통교(通交)를 회복시킨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시 역시 일상적 삶에서 얻은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평이한 표현 방법을 통해 중년기 사내의 소시민적 의식 구조를 명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는 화자가 중심이 된 간단한 줄거리가 담겨 있다. 4․19가 일어나던 무렵, 젊은 혈기와 ‘때묻지 않은’ 순수로 살던 화자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어느 ‘세밑’, 중년의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옛 추억이 서린 곳에서 동창들을 만난다. 그들은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기’고 전화번호가 달라진 만큼,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부와 지위를 얻은,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중년이 되어 있다. 월급이 대화의 전부가 되고, 물가가 고민의 주종을 이루는 소시민의 중년이 되어 버린 그들은, ‘늪’ 같은 일상적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옛사랑’을 노래하던 젊음을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포커’나 ‘춤’으로 대표되는 향락적 세계를 즐길 뿐이다. 그러므로 행여 누가 들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그저 ‘살기 위해 살고 있’는 소시민적 생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에게 순수와 젊음을 반추시켜 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만 ‘플라타너스 가로수’만이 간신히 남아 그들을 반겨 주지만, 그들은 더 이상 ‘하얀 입김 뿜으며 /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없는 자신들을 확인할 뿐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라며 꾸짖는 것 같은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도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기’는 화자의 무거운 발자국에서, 우리는 유수 같은 세월 속에 젊음과 열정, 순수와 이상을 잃어버리고 거의 맹목적일 만큼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년의 소시민적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다.

 

 

국제열차는 타자기(打字機)처럼

- 김경린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 가고

 

보랏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街路)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說話)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不安)과

예절(禮節)과 그리고

공포(恐怖)만이 거품 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다시

먼 앞날에

추락(墜落)하는 애정(愛情)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氣流)를 안고

투명(透明)한 아침을 가져오리.

(9인 시집 󰡔현대의 온도󰡕, 1957)

 

<감상의 길잡이>

김경린은 1949년 박인환,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함께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냄으로써 ‘후기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시킨 시인이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모더니즘 동인회 ‘바우(VOU)’등에 동인으로 참여한 바 있으며, 귀국해서는 조선일보에 <차창(車窓)>등을 발표하여 김기림의 직계 제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또한 청록파로 대표되는 전통적 서정 세계에 반발하여 1950년 ‘후반기’ 동인회를 결성하고 도시적 감수성, 현대 의식, 전위적 기법 추구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전쟁 직후의 혼란상을 노래하면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1960년대 말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1980년부터 재개한 그는 ‘한국적인 전통’에서 ‘세계적인 전통’으로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정열적인 창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시는 일찍이 그가 「모더니즘 선언서」에서 밝힌 바 있는 모더니즘의 세계성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국제 사회 속에서 겪는 지식인 화자의 절망과 좌절을 현대 문명의 한 표상인 ‘타자기’로 포착하여 현대인들의 정신 풍토를 그리고 있다. 발표 당시 ‘국제열차’․‘타자기’ 같은 시어는 대단히 생경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시인은 이 광물성 이미지의 시어들을 통하여 현대 도시 문명이 지닌 메카니즘을 보여 주고 있다.

화자는 마치 ‘성난 타자기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질주하는 국제열차’처럼 빠르게 변화해 가는 국제 사회에 동승하지 못하고, ‘조상들이 / 뿌리고 간 설화가 / 아직도 남은’ 전통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우수와 병리를 진단한다. 그것은 바로 6․25의 비극적 체험과 상처로 인한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 가치의 전도와 혼란, 도시화에 따른 비인간화 현상의 심화 등,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젊은 지식인들의 ‘불안’과 ‘공포’이며, ‘예절’로 대표되는 전통 문화가 파괴되는 현실을 무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빠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불안과 고통을 겪고 있지만, 세계적 ‘기류’에 편승하여 언젠가 ‘투명한 아침을 가져올’ ‘앞날’을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힌 나비

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여성」(1939년 4월)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바다와 나비󰡕는 1920년대 낭만주의의 병적 감상성과 경향파의 정치적 관념을 부정한 이른바 모더니즘 운동의 대표작이다. 초기시(󰄤󰡔기상도󰡕)에서 자주 보이던 낯선 외래어의 사용이나 경박함이 배제되고,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연약한 나비와 광활한 바다와의 대비를 통해 ‘근대’라는 엄청난 위력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1930년대 후반 한국 무더니스트의 자화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 시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S. 스펜더’의 시 󰡔바다의 풍경󰡕 제3연과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 그의 시에서는 두 마리의 나비가 익사하는데, 김기림의 시에서는 나비가 바다로 내려갔다가 지쳐서 되돌아온다. ‘나비’는 생명체 곧 인간을, ‘바다’는 죽음 또는 영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격 : 감각적, 상징적

특징 : 서글픔과 애처로움이 뒤섞인 관조적 미의식

바다, 청무우 밭, 초승달의 푸른빛과 흰나비로 대표되는 흰빛의 색채 대비

바다와 나비 등의 상징적 시어 사용

구성 : 바다가 무서운 줄 모르는 나비(1)

바다로 날아갔다가 지쳐 돌아온 나비(2)

나비의 모습(3)

제재 : 바다와 나비

주제 :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좌절감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나비’가 바다에서 궁극적으로 찾는 대상은 무엇인가? ☞ 꽃

2. 이 시에서

힌 나비

와 이미지가 대조되는 시어나 시구를 모두 찾아 쓰라. ☞ 바다, 청무우 밭, 새파란 초승달

3. 어떤 평론가는 이 시에서 ‘바다’를 서울과 동경 사이에 있는 현해탄을 암시한다고 했다. 그럴 경우, ‘나비’가 ‘바다’를 향해 내려갔다가 지쳐서 돌아오는 행위는 거대한 문명 앞에 무릎 꿇는 당시 지식인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비’가 ‘바다’에 도전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당시 지식인들의 행위와 관련하여 15자 내외로 쓰라. ☞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4. 이 시에서 ‘나비’는 어떤 존재를 이미지화한 것인지 두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무서운 파도가 치는 ‘바다’를 ‘청(靑)무우 밭’으로 오인하는 낭만적 감정을 소유한 사람을 ‘나비’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나비’는 낭만적인 꿈을 가지고 여행하는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를 형상화한 말로 볼 수 있다.

 

<감상의 길잡이>

시집 <바다와 나비>(1946)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벌써 피할 수 없는 근대그것의 파산의 예고로 들렸으며 이 위기에 선 근대의 초극이라는, 말하자면 세계사적 번민에 우리들 젊은 시인들은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작품이 바로 󰡔바다와 나비󰡕이다. 이 시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바다나비가 갖는 상징일 터이다. ‘바다는 수심(水深)도 알 길이 없고, 삼월에도 꽃이 피지 않는 무생명의 공간으로 나타나 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 바다는 근대화 과정에서 겪어야 할 모험과 시련의 의미를 띠게 된다.

근대의 몰락을 예견하며 그것의 초극을 꿈꾸었던 김기림으로서도 현실적 상황의 열악함에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너무도 무력했던 것일까? 그가 제시한 것은 지친 한 마리 나비에 불과하다.

근대라는 엄청난 물결 앞에 무력함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30년대 후반 한국 모더니스트들의 자화상을 눈에 보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도 한국 모더니즘 시의 회화적 특성과 문명 비판적 성격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푸른 바다에 대비되는 흰나비, 나비 허리에 걸린 새파란 초승달의 이미지는 그 회화적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특히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라는 구절은 문명의 무생명성 혹은 불모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 문명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상도(氣象圖)

- 세계의 아침

- 김기림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

누었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쓰른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 「스마트라」의 동쪽. …… 5 「킬로」의 해상(海上) …… 일

행 감기(感氣)도 없다.

적도(赤道) 가까웁다. …… 20일 오전 열 시. ……

(󰡔기상도󰡕 제1부, 1936)

 

<감상의 길잡이>

1930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시작(詩作)을 시작한 김기림은 이양하, 최재서 등과 함께 주지주의 문학, 특히 I.A.리챠즈의 문학 이론을 도입하여, 이를 근거로 해서 모더니즘 문학 운동을 선언하는 한편, 그 이론에 입각한 시 창작을 시도하였다. 그는 「현대시의 기술」, 「현대시와 육체」, 「오전(午前)의 시론」 등의 주지적 시론을 발표하면서 시 창작을 병행하여 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어의 기교적 측면에만 관심을 갖는 일부 모더니즘 시인들을 ‘기교주의’라 비판하면서 내용과 형식이 조화가 된 ‘전체시’를 창작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장시 <기상도>는 바로 김기림 자신이 주장한 ‘전체시론’의 방법론에 근거하여 의도적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이 시는 자신의 모더니즘 이론을 충실하게 이행하려 한 시이며, 현대시가 지녀야 할 주지성과 회화성, 그리고 문명 비판적 태도 등을 동시에 시도하여 본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 시적 형상화의 면에서보다는 시사(詩史)적인 면에서 더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전체가 7부 400여행으로, 그 전모는 ‘①세계의 아침 ②시민 행렬 ③태풍의 기침(起寢)시간 ④자취 ⑤병든 풍경 ⑥올빼미의 주문(呪文) ⑦쇠바퀴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태풍의 내습과 강타’라는 극적 상황 설정을 통해 세계 정치의 ‘기상도’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태풍’의 진행 과정을 중심으로 볼 때, ①,②는 태풍 이전 ③,④는 그 발생과 진행 ⑤,⑥은 태풍 내습 후의 파괴된 풍경 ⑦은 기상의 정상 회복에 대한 시인의 희망을 서술하고 있다.

윗 부분은 이 중의 제1부 ‘세계의 아침’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태풍 내습 이전의 건강한 세계의 아침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바다’․‘갑판’․‘정거장’ 등을 배경으로 한 세계 시민의 행복한 삷이 ‘아침’이라는 신선한 이미지로 제시된다. 따라서 윗 부분에서는 어떤 상징적 의미보다는 첫 연에서 보듯 이미지즘의 형태와 같은 기법적인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이와 함께 과도한 외래어의 사용이 초래하는 모더니즘의 부정적인 특성도 엿볼 수 있다.

시 전체로 볼 때, 이 시는 ‘이야기 시(narrative poem)’가 아닌 형식으로는 처음으로 시도된 장시라는 형식적 의의를 지니며, 내용적인 면에서는 ‘태풍의 내습과 강타’라는 상황이 알레고리(allegory)적 수법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상징화되어 있어서, 문명 비판 의식이 당대의 역사적․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과도하게 흩어져 있을 뿐 이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시적 통일성의 장치가 부족하고, 그 이미지도 시인의 관념 속에서만[세계지도 위에서만] 펼쳐지고 있어서 시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물론 김기림의 이러한 결점은 차츰 극복된다. 이 시 이후 발표한 시들을 묶어 낸 시집 󰡔태양의 풍속󰡕은 점차 이미지즘 위주의 시작 경향을 보여 주고 있으며, 󰡔바다와 나비󰡕에 실린, 해방 전의 <바다와 나비>, <요양원>, <겨울의 노래> 등의 대부분의 시들은, 모두 서정과 지성이 결합된 선명한 시각적 영상을 보여 주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연가()

- 김기림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중앙신문󰡕, 1946.4.27)

 

* 소연(騷然)하다 : 떠들썩하다.

* 뭉둥아리 : 몸뚱어리.

* 달다 : 몸이 화끈해지다.

 

<감상의 길잡이>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에 가담하여 ‘전국문학자대회’의 준비 위원으로서 「우리시의 방향」이라는 주제 강연을 발표한 바 있으며,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이자 시부 위원장의 지위에 오른 김기림, 그의 돌연한 사상적 전향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대단히 이채로운 사건에 해당한다. 1930년대 모더니즘 시론의 주창자로서 임화(林和)와 이른바 ‘기교주의 논쟁’을 벌이면서 많은 순수주의 시인들의 이론적 지주의 역할을 맡았던 그의 전향은, 소설에서의 이태준(李泰俊)의 전향과 함께 해방공간의 문학과 정치와의 함수관계를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다. 이태준은 그의 소설 <해방 전후>에서 주인공 ‘현(玄)’의 입을 빌어 자신의 전향을 합리화시키고 있거니와, 김기림은 위의 「우리시의 방향」이라는 강연에서 “시인은 자유와 정치를 지키는 넓은 동맹군의 일익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여 정치와 시의 적극적 결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공간 김기림 시의 대부분은 그 전의 작품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강한 정치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점에서 <연가>는 이 시기 그의 시로서는 드물게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표현이 적고 서정시의 여백(餘白)까지도 맛볼 수 있는 정제된 미감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육로로 천리 수로 천리’를 건너 드디어 임을 만난다. 그들은 ‘새나라’에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왔지만, 여전히 식민지 치하에서의 유랑의 상처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즐거운 밤에서조차도 놀라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을 꾸고 ‘그대 앓음소리’는 삼라만상의 소리로 들려 올 정도로 병이 깊다. 그러나 ‘새나라’로 오는 즐거움에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희망이 피’고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운 것도 전혀 흉잡힐 것이 아니다. 이제는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아,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을 수 있고, 사랑이 뜨거우면 ‘이리도 피해 달아’날 정도로 서로에 대한 확신이 선다. 이러한, 헤어지지 않으리라는,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사랑의 언약은 ‘새나라’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을 시적 자아는 마지막 연에서 ‘새나라 언약이’ 화려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그럴 때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라고 하며 죽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비교적 상징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새나라를 맞는 시인의 감격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어떠한 정치적 색채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서정시의 묘미는 이처럼 그 취의(趣意)를 직설적으로 표백하지 않는 내면화의 미감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김기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시인 들의 작품 중에 그러한 시가 오히려 드물 정도로, 해방공간의 문학 외적 환경은 비관적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

- 김광림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시집 󰡔학의 추락󰡕, 1971)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논리적 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운 몇 개의 경험이 빚어내는 자유 연상을 추적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이미지들이 이루어 내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끼는 일일 것이다.

눈 속에서 벙그는 ‘매화 봉오리’가 득도한 듯한 노승의 눈매에 도는 ‘미소’와 동일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성격 : 관조적, 정적, 주지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어조 : 차분하고 진지한 어조

▶ 시상 전개 : ① 시간의 흐름(과거에서 현재로)

② 시선의 이동(‘매화’에서 ‘노송’으로)

▶ 구성 : ① 가야산의 독경 소리와 벙그는 매화(1연)

② 눈 맞는 열 두 암자와 노승의 미소(법열)(2연)

▶ 제재 : 산(해인사)

▶ 주제 : 서설(瑞雪) 속의 선미(禪味) 어린 산사(山寺)의 풍경과 분위기

(한겨울 산속의 적막한 풍경과 분위기)

 

<연구 문제>

1. ‘산’의 선미(禪味) 어린 정적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구절을 찾아 명사로 끝맺는 말로 고쳐 쓰라.

󰄆 면벽한 노승의 눈매에 도는 미소

2. 이 시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시어를 찾아 쓰라. 󰄆 서설(瑞雪)

3. ㉠의 의미를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와 관련지어 20자 내외로 쓰라.

󰄆 오랜 정진 끝에 얻은 깨달음의 기쁨.(오랜 수도 끝에 오묘한 진리를 깨달은 기쁨)

 

<감상의 길잡이>

이 시의 화자는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논리적인 관계가 희박해 보이는 몇 개의 경험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의 연상을 통해 빚어내는 묘한 분위기를 응시한다.

화자는 어느 해 여름엔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러 승려들의 독경 소리를 인상 깊게 들은 적이 있고, 오늘 다시 찾은 이 절에는 눈 속에서 매화꽃이 벙글고 있다. 이 시간의 경과는 여름부터 겨울까지 면벽 수도하는 ‘노승’의 정진(精進)을 의미한다. 이 오랜 정진 끝에 득도(得道)한 노승의 눈매에 감도는 ‘미소’처럼 서설(瑞雪) 속에서는 ‘비로소 매화 봉오리’가 벙글고 있다.

‘매화 봉오리’와 노승의 눈매에 감도는 ‘미소’가 묘하게 병치되어 동일화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일이 이 시 감상의 관건(關鍵)이라고 하겠다.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

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월간 문학󰡕, 1968.11)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 산업화에 따르는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현실 인식이 이 시의 시작 동기(詩作動機)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둘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비둘기’는 도시화, 산업화로 인하여 소외되어 가는 인간을 상징하고 있으며, 비판자적 구실을 한다.

성격 : 문명 비판적, 우의적(寓意的)

표현 : 묘사와 서술의 혼합. 비둘기의 의인화

구성 : : 삶의 터전을 상실한 비둘기(1)

: 문명에 쫓기는 비둘기(2)

: 사랑과 평화를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3)

제재 : 비둘기

주제 :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의 비판

 

<연구 문제>

1. 이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시의 화자가 바라고 있는 인간의 참된 삶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35자 내외로 쓰라.

☞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면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2. 청각적 심상으로 표현한 구절 둘을 찾아 쓰고, 그것이 공통적으로 뜻하는 바를 쓰라.

☞ (1) 돌 깨는 산울림, 채석장의 포성

(2) 자연의 파괴, 또는 문명의 침투(충격)

3. 이 시를 모더니즘 계열의 시로 본다면, 내용상으로 어떤 특징을 지녔기 때문인가? 30자 내외로 쓰라.

☞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제1연과 제3연의

비둘기

의 상징적 의미의 변화를 100자 내외로 쓰라.

☞ 비둘기를 의인화시켜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투영시킴으로써 사랑과 평화라는 관습적 상징을 넘어 개인적 상징으로 창조해 내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 (), ()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제1,2연에서는 묘사를 통하여 비둘기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고, 3연에서는 화자의 서술에 의하여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1연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하여 성북동 산에까지 문명이 침투하면서 본래 그 곳에서 살던 비둘기는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된다.

1-2행에서는 쫓기게 된 비둘기의 신세를 제시하고 있다.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주택가가 들어섰다는 뜻이지만, 문명의 침투에 의한 자연의 파괴이며, ‘번지가 없어졌다는 비둘기의 살 곳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3-8행에서는 삶의 보금자리를 잃은 비둘기의 마음의 상처와 뿌리뽑힌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돌 깨는 산울림은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의 모습을 청각화한 것이고, ‘가슴에 금이 갔다는 비둘기가 입게 된 마음의 상처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리고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는 살 곳을 잃는 비둘기의 쓸쓸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2연에서 비둘기는 가는 곳마다 쫓기면서 옛날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된다. 이것은 인간이 문명에 의하여 소외당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채석장 포성의 메아리는 제1연의 돌 깨는 소리와 상응(相應)하는 것으로 자연의 파괴를 청각화한 것이다. ‘구공탄 연기에 향수를 느끼다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는 사랑과 평화가 있던 옛날, 또는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향수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연은 주제를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옛날에는 비둘기가 사랑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았는데, 지금은 문명으로 인하여 자연도 잃고, 쫓기는 존재가 되었으며, 사랑과 평화마저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둘기를 바로 인간으로 본다면, 이 시는 문명에 의한 자연 파괴와 인간 소외, 그리고 인간성 상실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시인은 인간 스스로 창조한 물질 문명 앞에서 자연의 훼손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인간성마저 박탈당하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목표하는 것은 현대 문명에 대한 야유나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 문명 시대에 자연의 소중함과 사랑 ·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맥락 읽기>

1. 지금 성북동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 채석장이 생겨서 아주 시끄럽다.

☞ 돌산을 깍고 있다.

☞ 개발 사업을 하고 있다.

2. 화자는 어떤 사람일까? 어디 살고 있는 사람일까? 어디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까?

☞ 성북동에요, 성북동에 산지 꽤 되는 아저씨요.

3. 화자가 노래하는 대상은 뭐지?

☞ 성북동 산에 사는 비둘기요.

4. 그 성북동에 사는 비둘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시구는 ?

☞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 졌다/돌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콩알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 커녕/피난하듯 지붕 위에 올라 앉아”

☞ 그래서, 비둘기가 살 곳을 잃었어요, 삶의 보금자리를 빼앗겼어요.

5. 무엇 때문에?

☞ 성북동에 한창 진행 중인 개발사업 때문에요

6. 비둘기의 심정은 어떨까? 비둘기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는 시구를 찾아 이야기해 보자.

☞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 아침 구공탄 굴뚝연기에 향수를 느끼다가

☞ 구공탄 굴뚝의 따스한 온기에 잃어버린 보금자리를 떠올리고 평화롭던 그 때를 그리워 한다.

7. 그럼 이 일에 대해서 화자의 심정은 어떠한가 ?

☞ 비둘기가 참 불쌍하고 애처럽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비둘기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있어요.

8. 개발사업이 있기 전 성북동의 상황은 어땠을까? 상상력을 발휘해서 짐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짐작해 보자.

☞ 도시 변두리 지역의 아늑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 부자 동네는 아니어도 산이 있는 마을이라 아침마다 사람들이 등산도 하고 약수물도 뜨러 다니고 비둘기도 평화롭게 산에 살며 가끔씩 마을로도 내려오고 그랬을 것 같아요.

9. 비둘기와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변했나?

☞ 예전에는 아주 사이가 좋았는데 지금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되었어요.

10. 그래 그렇다면 지금은 동네 분위기가 옛날에 비해 어떻게 달라졌나? ☞ 많이 삭막해졌어요.

11. 아 ! 그럼 성북동에 진행 중인 개발사업으로 비둘기만 불쌍해진게 아니녜.

☞ 예 맞아요. 사람들에게도 별로 좋지 않은 변화가 생긴거죠.

12. 하지만 개발 사업이란 건 사람에게 유익한 거잖아 ?

☞ 건 그렇죠. 하지만 무차별적인 개발은 좋지 않아요.

13. 그럼 어떻게 해야 돼지 ?

☞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14. 왜?

☞ 그래야 인간에게도 좋거든요.

 

 

 

()의 감각(感覺)

- 김광섭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 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荒野)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 「현대문학」145호(1967년 1월호)

 

<핵심 정리>

1. 시작(詩作) 배경

이 시는 1965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1주일간 사경을 헤매다 무의식 혼돈세계에서 다시 소생한 체험을 구상화한 작품이다.

이산(怡山)은 죽음에의 체험을 통하여 인생관이 바뀌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시작(詩作) 태도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 󰡔생의 감각󰡕이 바로 그와 같은 변화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 이 작품에는 투병 생활에서 겪은 생명의 빛과 죽음의 그림자가 여러 사물을 빌어서 구상화되어 있다.

2. 성격 : 감각적, 상징적

3. 특징 : 의식의 세계와 죽음의 그림자가 여러 사물을 통하여 구상화됨

4. 시상의 전개

① 재생의 첫새벽에 본 인생론(1연)

②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깨달음(2연)

③ 절망의 체험(3연)

④ 극적인 소생의 과정에 대한 회상(4연)

4. 소재 : 생의 감각 (또는, 투병생활)

3. 주제 : 생명의 신비로운 부활(재생)

<시어의 상징 의미>

*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 육체적 고통까지 겹친 캄캄한 절망 의식

* 깨진 하늘 - 절망

* 뼈 - 의지.

* 푸른 빛 - 희망

* 흐린 강물 - 저승으로 흐르는 길

* 채송화 - 발랄한 생명체

 

<연구 문제>

1. 이 시에는 A: ‘깨진 하늘/장마/흐린 강물’, B: ‘무너짐/깨짐’과 같은 시어들이 등장한다. A와 B의 시어들이 각각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 A : 병고의 체험

B : 절망의 체험(삶의 비애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

2. 소생과 부활의 생명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어는 무엇인가? ☞ 채송화

3. ㉠에 담긴 의미를 30자 내외로 써 보라.

☞ 내가 존재함으로써만 세상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깨달음

4. ㉡을 두 어절의 산문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써 보라.

☞ 일깨워 주었다.

 

<감상의 길잡이>

여기서 생의 감각이란, 생에 대한 자각인 부활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시에는 인생론적인 면과 소생 과정의 극적인 면이 동시에 수용되고 있다. 시인은 부활의 시간적 출발점을 여명(黎明)으로 잡고 있다. 여명은 밤으로부터 아침으로 연결되는 과도기적 시간으로, 밤의 절망에서 아침의 희망에로의 전이를 상징한다.

1연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라는 청각과 시각의 표현을 통해 생명의 부활을 감각적으로 환기해 주고 있다.

2연에서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라고 하여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공동체적인 데서 서로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드러나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개체로서의 생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3연의 깨진 하늘/ 장마/ 흐린 강물로 표상되는 병고(病苦)의 체험과 무너짐/ 깨짐으로 인식되는 절망의 체험은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함께 깨달음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4연에서는 다시 절망의 끝에서 일어서려는 극복 의지와 함께 살아 있음에 대한 강렬한 생명 의식이 드러난다.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는나의 모습은 이 땅에 홀로 내던져진 존재로서 살다가 홀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단독자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확인인 것이다. 다만, ‘살아 있음의 시간이란,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는것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의 연속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고통과 절망으로 이어진 투병 체험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생명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독

- 김광섭

 

하나의 生存者로 태어나서 여기 누워 있나니

 

한 間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氣流의 波動도 있어

바다 깊은 그 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고달픈 고기와도 같다.

 

맑은 性 아름다운 꿈은 잠들다.

그리운 世界의 斷片은 아즐타.

오랜 世紀의 지층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神經도 없는 밤

時計야 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시원󰡕 2호, 1935.4) / - 시집 「憧憬」(1938) -

 

<핵심 정리>

1. 詩作 배경

매우 지적인 시다. 그러므로 이런 시는 서정 중심의 리드미컬한 시와는 달라서 매 행의 호흡이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음악성 중심으로는 역을 수 없는 주지시의 특징은 이런 데 있다.

자유를 잃고 외세의 지배를 받던 사회에서 모든 생활을 버리고 그날 그날 생존만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지성인의 자의식과 고민이 심각하게 표현되어 있다.

2. 시상의 전개

* 제1연(1행~6행) : 자유를 잃고 기류의 파동 속에 침전한 자아의 모습

* 제2연(7행~12행) : 무덤 상태에서의 자학적 모습

3. 주제 : 무위(無爲)와 침전(沈澱)의 삶에 대한 자의식

4. 시어의 상징 의미

* 생존자 - 생활자가 못되고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

* 무덤 - 아득한 공간의 기류 속에서 자아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곳

* 세계의 斷片은 아즐타 - 추억과 희망의 단편들조차도 아득하다

* 오랜 세기의 지층 - 오래된 비극적 세기의 쌓이고 쌓이는 역사의 지층

 

<감상의 길잡이>

일제의 모진 압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을 지켜온 김광섭은 창씨 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다 끝내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치하의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초기 대표작이자 출세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주지적 경향과 관념적 표현이 두드러지며,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이 겪는 자의식과 지적 고뇌가 심각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철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대 상황과 관련된 존재론적 성찰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그의 시대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한 칸 무덤’, ‘신경도 없는 밤’ 등으로 파악된 외부 현실 세계 속에서 화자는 ‘고단한 고기’처럼 누워 잠을 청하지만, ‘맑은 성 아름다운 꿈’은 멀기만 하고 ‘그리운 세계의 단편’만이 아스라한 추억처럼 떠오를 뿐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삶의 능동적 자유 의지를 상실하고 ‘아름다운 꿈’과 ‘그리운 세계’는 단절된 채, ‘고단한 고기’가 되어 ‘세기의 지층’에 이끌리며, ‘신경도 없는 밤’을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무덤’ 같은 현실 속에서 살아 가는 자신을 ‘시계’로 객관화하여 자신의 깨어 있음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지금 자신이 깨어 있는 것은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 과정에서 터득한 ‘오랜 세기의 지층(知層)’과 같은 관념적이고 표피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제 치하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맹목적으로 돌아가는 시계 바늘과 같은 것으로 인식한 자기비판적 성찰의 결과로, 시계처럼 사물화되어 맹목적 생존의 상태와 다를 바 없는 식민지 치하의 무의미한 삶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해바라기

- 김광섭

 

바람결보다 더 부드러운 은빛 날리는

가을 하늘 현란한 광채가 흘러

洋洋한 대기에 바다의 무늬가 인다.

 

한 마음에 담을 수 없는 천지의 감동 속에

찬연히 피어난 白日의 환상을 따라

달음치는 하루의 분방한 정념에 헌신된 모습

 

생의 근원을 향한 아폴로의 호탕한 눈동자같이

황색 꽃잎 금빛 가루로 겹겹이 단장한

아! 의욕의 씨 圓光에 묻힌 듯 향기에 익어 가니

 

한 줄기로 지향한 높다란 꼭대기의 환희에서

순간마다 이룩하는 태양의 축복을 받는 자

늠름한 잎사귀들 驚異를 담아 들고 찬양한다.

---시집 「해바라기」(1957)---

 

<핵심 정리>

1. 시작(詩作) 배경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자연의 배경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현상과 함께 어우러져 생명에 대한 강한 의욕을 느끼게 한다.순수 자연의 감각을 시각적 이미지로 잘 표현하고 있다.

2. 시상의 전개

* 제1연 : 해바라기의 배경 묘사(가을)

* 제2연 : 해바라기의 전체적인 인상

* 제3연 : 해바라기 씨가 묻힌 곳 노래

* 제4연 : 잎사귀들의 꽃 찬양

3. 주제 : 해바라기를 통해 보는 생명에 대한 강한 의욕

4. 제재 : 해바라기

5. 시어의 의미

* 백일의 환상 : 해바라기가 피어있는 모습

* 圓光 : 부처의 몸 뒤로 비치는 광명

 

 

 

마음

-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문장󰡕 5호, 1939.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개인의 내면 세계를 다루고 있는 순수 서정시에 속한다. 인간은 누구나 세속에 얽매여 마음의 안정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마음의 평화를 찾고 고결한 이상을 이루려 하는 것이 이 시의 모티브이다. 화자의 평온한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이며,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자.

또한, 이 시는 마음을 호수의 ‘물결’에 비유하여 작품 전체를 이끌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이 시를 이해하려면 물결의 다양한 성질을 알아야 한다. 물결은 외부 세계의 자극에 대해 민감하지만 스스로는 항상 잔잔해지려고 노력하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 ‘백조’와 ‘밤’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아야 이해가 가능하다.

1. 시작(詩作) 배경

이 시는 곱고 부드러운 격조와 적절한 은유로 아름다운 언어의 조화를 이룬다. 은유와 상징이 잘 구사되어 세련미와 함께 지적 관조도 보인다. 자기의 마음을 고요한 물결에 비유하여, 심리적 갈등과 함께 파문을 일으키기 쉬운 마음을 지키려는 경건한 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초기 작품에 속하는 이 시는 자기의 꿈을 잃지 않고 ‘밤마다 덮음’으로써 시인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지적 관조를 곱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격 : 관조적, 고백적

4. 경향 : 낭만주의적 경향

5. 심상 : 시각적 심상

6. 율조 : 3음보와 4음보

7. 어조 : 부드러운 여성적 어조

8. 특징 : ① 적절한 은유와 상징 사용

② 솔직하고 소박한 표현

9. 시상의 전개

* 제1연 : 고요한 물결같은 내 마음 - 마음의 본래 상태

* 제2연 : 나에게 영향을 주는 뭇사람들 - 속세의 현실적 상황

* 제3연 : 마음이 조용해지는 밤 - 밤과 마음의 평온

* 제4연 : 밤마다 꿈을 덮는 나(주제연) - 마음의 평화 갈망

10. 제재 : 물결(마음)

11. 주제 : 고요한 마음에 대한 동경 (마음의 평화)

 

<시어의 상징 의미>

* 고요한 물결 - 잔잔한 이미지를 주지만 다른 사물에 영향을 받기 쉬운 존재

* 돌을 던지는 사람 - 이권을 빼앗거나 엿보는 사람

* 노래를 부르는 사람 - 유혹하는 사람

* 숲 - 환경

* 백조 - 희망과 이상

* 물가 - 마음

* 꿈 - 번거로운 망념(妄念)들을 갈아 앉히고 백조를 기다리는 꿈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다고 보고 있는지 50자 내외로 쓰라.

󰄆 고요한 물결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굳세지 못하고 나약하게 보고 있다.

2. 이 시의 제2연에서 운율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 두 가지를 쓰라.

󰄆 3음보의 율격, 동일한 음운의 반복

3. 이 시에서 시인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시어는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서 추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음 시를 참고하여 설명해 보라.

󰄆 백조, 순결과 평화의 경지(맑고 깨끗한 시심)

양은 흰 종이에 입술을 댄다.

어느 날 흰 종이에 시를 쓰려다가

우연히 흰 종이에 입술을 댄 나는

나도 흰 종이에 입술로 시를 쓰고 싶었다. ― 김광섭 ‘백지’

 

<감상의 길잡이>

우리는 이 시에서 조용한 관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나 할까사념(邪念)이 없이 고요한 심경으로 시심이 찾아들기를 기다리는 시인의 자세가 경건하게 느껴진다.

4연으로 된 이 시는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시인 자시의 내면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특히, 무형(無形)의 마음을 유형(有形)물결에 비유하여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주변의 현실에 의해서 마음의 평화가 깨지기 쉬운데 자연을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고, 순결한 마음 또는 순수한 시심이 깃들기를 기다린다는 것이 이 시의 핵심 내용이다.

1연은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나의 마음은 본래는 물결처럼 고요하나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물결의 원관념은 마음이다. ‘바람구름은 외부의 자극을 뜻하는 것으로 세속적인 인간사(人間事)에 해당한다. ‘그림자는 마음의 흔들림을 상징한다.

2연은 화자의 주변에서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세 사람을 예시하였다. ‘돌을 던지는 사람은 충격을 가하여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이고, ‘고기를 낚는 사람은 나로부터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이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달콤한 말로 나를 유혹하는 사람이다. 세속적 욕망과 이해 관계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연에서 시의 화자는 이러한 세속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싶어한다. 그래서 혼자 있을 수 있는 밤이면,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로 번거로운 마음을 잠재운다. 자연 친화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은 번잡한 세속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뜻하고, ‘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자연으로, 세속적인 사람, 즉 돌을 던지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과 대립적인 심상으로 쓰였다.

4연에서 시의 화자는 마음 속에 백조를 맞이하려고 한다. ‘백조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나 평화로운 마음 속에만 깃들일 수 있는 깨끗하고 맑은 시심(詩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터이다.

 

 

 

비 개인 여름 아침

- 김광섭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시집 󰡔동경(憧憬)󰡕, 1938)

 

<핵심 정리>

1. 주제 : 여름 자연의 아름다운 정취

2. 시작(詩作) 배경

 

5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지만, 산뜻한 여름 감각이 유감없이 표현되어 담담한 한 폭의 수채화를 대하는 느낌이다. 비가 개인 날의 유난히 맑은 하늘, 녹음은 짙어 새로이 윤기가 흐른다. 물속을 들여다 보니 맑은 하늘이 내려와 잠겨 있고, 짙푸른 녹음이 그림처럼 곱게 배경을 이루고 있다. 금붕어도 신이 나서 멋지게 헤엄치며 놀고 있다. 그것을 지은이는 무슨 색지를 펴놓고 금붕어가 시를 쓴다고 표현했다. 아름다운 것은 역시 시의 최대의 매력이요, 기쁨이다. 이 시를 읽으면 시적인 매력과 기쁨이 어떠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다. 자연의 맑고 깨끗한 풍경을 속이 들여다 보이도록 선명한 이미를 구사해 놓았으며, 티없이 맑은 정서를 나타내 보였다.

 

<감상의 길잡이>

비록 5행의 짧은 소품이지만, ‘비 개인 여름 아침’을 한눈에 보여 주고 있다. 모더니즘의 기법으로 참신한 이미지를 제시하여 비 그친 뒤의 신선한 분위기까지 느끼게 해 주는 이 작품은 시인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어린 시절의 고향 세계이며, 일제 치하의 현실에서 그가 꿈 꾸는 이상 세계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일 것이다.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시집「겨울날」(창작과비평사刊·1975년) / 󰡔월간 중앙󰡕, 1969.11

 

<감상의 길잡이>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은 오염되어가는 지상의 문명을 고발한「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천상의 별을 노래한「저녁에」의 시인이기도 하다. 지상과 천상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의 세계에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 인간은 땅위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영어로 컨시더(consider)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별을 바라다본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의 바다든 삶의 바다든 별을 보고 건너갔다. 점성술과 항해술은 근본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천문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이 세상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 하늘의 별이요, 마음 속의 시(도덕률)」라는 칸트의 경이(驚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어둠이 와야 비로소 그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로 시작되는 그 詩題가「저녁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저녁에」의 시를 이끌어가는 언술은「별」(천상)도「나」(지상)도 아니다.「별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라는 언술의 주체는「나」가 아니라「별」이다. 나는「보다」의 목적어로 별의 피사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하나를 쳐다본다」의 다음 시구에서는 지상의 사람이, 그리고「나」가 언술의 주체로 바뀌어 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내려다 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리 언어로 표현할 때는 불가피하게 말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그 순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저녁에」의 경우도「별」이「나」보다 먼저 나와 있다. 즉 별이 먼저 나를 내려다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시선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이다. 첫행의 경우 시점과 발신자가 별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점의 거리를 결정하는「이」,「그」,「저」의 지시 대명사를 보면 별의 경우에는「저렇게 많은 것」이라고 되어 있고, 사람의 경우는「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점 거리가「저렇게(별)」보다「이렇게(사람)」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처럼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보고 남이 나를 본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격렬한 싸움인 것이며, 인간의 삶과 존재란 결국 이러한 눈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타자(他子)는 지옥」이란 말이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러한 눈싸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정다운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저렇게 많은 별중에」라고 불렸던 별이 나중에 오면「이렇게 정다운 별하나」로 바뀌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렇게에서 이렇게로 변화하게 만든 그 시점은 누구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저녁에」라는 시 읽기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답안을 퀴즈 문제처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펼쳐보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의 제목처럼「저녁」이라는 그 시간이다. 별이 나를 내려다본 것이나 내가 별을 쳐다본 것이나 그 이전에 저녁이 먼저 있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둠이라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내려다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저녁이란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하나와 나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異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너하나 나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라는 둘째연의 시구이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그 진부한 주제가 여전히 이 시에서 시효를 상실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그것이 시적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의 정반대 되는 것이 그 사라짐의 명제 속에 교차되어 있다. 그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이면서도 사라지는 시간과 장소는 빛과 어둠이라는 합칠 수 없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다시 분리될 때 나와 별은 사라진다. 이것이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김광섭은 한국의 시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멀고 먼 하늘에 자신의 별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천문학의 별을 배우기 전에 멍석 위에서 별하나 나하나를 외우던 한국의 어린이였다. 그러기 때문에 별의 패러독스는「타자(他子)는 지옥이다」가 아니라「타자(他子)는 정(情)이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은 윤회의 길고긴 시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나는 또하나의 저녁을 기다린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그렇게도 오래오래 남아있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마지막 그 시구이다. 그 시구가 화가와 만나면 한폭의 그림이 되고, 극작가와 만나면 한편의 드라마가, 그리고 춤추는 무희와 만나면 노래와 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는「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의 만남이 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의 하나와 마주보듯이 박모(薄暮)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상의 별하나와 만난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도 모르는 운명의 만남을…….

그리고 그렇게나 먼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사라진다해도 우리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시구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만나랴」라는 의문형으로 끝나있지만 그러한 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따의 몇광년의 먼 거리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마주 보는 시선을 어떤 시간도 멸하지 못한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수직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는 저녁의 시간……. 그 순 간의 만남을 영원한 순환의 시선으로 바꿔주는 것이야말로 시가 맡은 소중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이어령 교수>

 

 

 

()

- 김광섭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나의 만상(萬象)에 깃들이다.

(󰡔조광󰡕, 1937.6)

 

* 사화(詞華): 아름답게 수식한 시문(詩文), 또는 뛰어난 시문.

 

<감상의 길잡이>

이산(怡山)의 첫 시집 󰡔동경󰡕의 표제가 된 이 시는 앞의 <고독>과 같이 식민지 치하에서 괴로워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화자가 처해 있는 현실은 ‘이상’의 표상인 ‘별조차 떨어진 밤’이므로, 그는 ‘무거운 꿈’만 꾸게 될 뿐이다. 악몽(惡夢)처럼 괴롭기만 한 현실 속에서 화자는 ‘무엇이 나를 불러서 / 바람에 따라’ 간다고 하지만, 그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처럼 불분명하게 나타난 표현은 일제의 혹독한 검열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을 감으로써 ‘하나의 뚜렷한 형상이 / 나의 만상에 깃들이’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길이야말로 일제 치하에서 부단히 자신을 지키려 했던 자기 확인에 대한 노력이며, 암울한 시대에 처한 자신의 끊임없는 성찰 태도임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별조차 떨어진 밤’의 시대에 ‘사화(詞華)’ 같은 뛰어난 문장으로 자신의 고뇌를 표현한다 해도 그것은 그저 ‘무언의 고아가 될’ 뿐이며,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로 미래를 표현한다 해도 그것은 이루지 못할 ‘꿈이 되고 슬픔이 될’ 뿐이다.

 

 

 

()

- 김광섭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아름 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원 아니면 3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 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동아일보󰡕, 1969.5.3)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시를 써 온 노경의 시인이, 시인의 세계와 그 일생을 진지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화자가 생각하는 시인이란 존재는 ‘꽃’과 ‘사랑’으로 대유된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부귀 영화에 대해 온몸을 내던지지만, 시인은 오직 시 한 편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서 탄생시킨 시 한 편의 고료는 겨우 2, 3천원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의 부귀와는 분명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 시인의 타고난 천성(天性)이다. 한편, 시인은 ‘늙어서까지’ 시간과 정열을 아껴쓰는 부지런한 정진을 통해 일견 어리석고 궂은 것처럼 보이는 ‘비극적 사랑’을 평생 동안 고독하게 노래하는 사람들이며, 때로는 ‘술 한 잔’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인생의 긴 여정을 쓸쓸히 가는 사람들이다. 신명이 나지 않을 때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쌀알 만한’ 가치라도 있는 글감이라고 생각하면 놓치지 않고 그것을 작품화시킨다. 어떤 소재를 선택하든지 간에 시인은 그것과 혼연일체가 되어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살아 번득이는 하나의 위대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낸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이 흘러가도 시인의 정신은 한 편의 시로 남아 있음에 비해, 시인의 육신은 이미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이렇듯 김광섭은 시인을 세속적 욕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고독의 깊은 늪에서 평생을 자신과 싸우며 오직 시 한 편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거룩한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석상(石像)의 노래

- 김관식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시집 󰡔김관식 시선󰡕,1957)

 

* 어룽진 : 얼룩진.

* 동정 : 한복 저고리 깃에 꿰매어 다는 헝겊으로 대개 흰색이다.

 

<감상의 길잡이>

김관식은 한문과 동양의 고전에 능통하여 동양인의 서정 세계를 동양적 감성으로 구상화함으로써 특이한 시풍을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세련된 시어와 밝은 동양적 경지로 승화하려는 높은 정신의 추구를 엿볼 수 있으며, 서양 외래 사조를 배격하고 동양적 예지의 심오한 세계로 몰입하여 그 경지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세속적 생활 방식을 무시한 기행(奇行)으로 유명했던 그는 결국 가난과 질병으로 36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 시는 그러한 그의 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석상을 소재로 하여 한없는 그리움의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너무나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돌이 되었다는 이 시의 내용은 백제 가요 <정읍사>나 신라 시대에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 설화와 접맥되어 있다. 또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김소월의 <초혼>에서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그려져 있다.

이 시는 행이나 연 구분은 물론, 구두점까지도 철저히 배제시킨 산문시이다. 이러한 형식상 특성은 독자에게 거침없이 작품을 읽게 함으로써 그리움으로 인해 돌이 되었다는 작품의 내용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효과가 있다. 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첫 문장은 노을이 질 때부터 밤이 깊을 때까지 임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심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는 임이 화자 곁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떠났음을 알게 해 준다. 둘째 문장은 임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출렁이는 물결 소리’는 화자가 어느 바닷가에 서 있음을, ‘동정’은 화자가 여성임을 알게 해 준다. 셋째 문장은 극한적 절망 때문에 화자가 돌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임에 대한 하염없는 그리움과 눈썹 가장자리에 번지는 피눈물, 피눈물에 얼룩진 동정, 그리움을 전할 길 없는 답답한 마음, 맺힌 한으로 돋아난 혓바늘 등으로 말을 잃은 화자는 결국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는 절망의 극한 속에서 말문이 열리는 대신, 하늘을 우러러 돌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 ‘돌’은 임에 대한 화자의 사무친 그리움의 돌이며 슬픔과 한이 응결된 돌이다.

 

 

 

두천(東豆川)I

-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시집 󰡔동두천󰡕, 1979)

 

 

<감상의 길잡이>

김명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시적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추억이다. 그러나 그의 추억은 아름다운 과거보다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가깝고, 과거의 것이면서도 오늘 속에 선명하게 남아 그의 존재를 구속한다. 상처난 과거로서의 추억이라 하더라도 평생 동안 가슴에 묻어 두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치유하려 한다. 그의 얼룩진 추억은 6․25와 아버지라는 두 가지 어둠으로 대별된다. 전쟁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로서는 전쟁으로 훼손된 유년의 체험을 형상화하는 한편, 전쟁이라는 극한 공간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과거의 기억은 아버지로 상징된 절대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어둠은 그의 시를 공간적으로는 변두리 선호 경향을 드러내게 하며, 의식면에서는 서민 또는 하층 민중 지향적 경향을 띠게 하였다. 그의 초기시의 대표작인 <동두천>, <켄터키의 집>, <베트남>, <아우시비쯔>, <영동행각(嶺東行脚)> 등의 시편들이 모두 그 같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그가 대학을 마친 직후 동두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할 때 만났던 무수한 혼혈아들을 떠올리며 지은 작품으로, 동두천역 저탄더미에 내려 쌓이는 눈을 통해 혼혈아와 같은 소외된 인간의 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유년의 전후 폐허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된 허무 의식과 유신 체제라는 70년대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형성된 절망적 현실 의식이 작품에 투영됨으로써 이 시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도 캄캄한 어둠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의 시적 배경인 동두천은 우리 민족에게 일종의 상처와도 같은 도시이다. 동족 간의 비극적인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 군대가 아직까지 머무르고 있는 그 곳엔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약소 민족의 슬픔을 자신의 운명으로 안고 혼혈아라는 이름의 불행한 아이들이 태어난다. 시인은 그 도시에서, 그것도 떠나가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운명을 표상하는 기차역에서 저탄더미에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다 본다. 신호등이 바뀌자 서둘러 떠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인생도 저렇게 ‘어디론가 / 가고 있는 중’이라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혹시나 군중에서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처럼 ‘파묻혀 흐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눈이 아무리 깨끗하다 할지라도 ‘내리는 눈일 동안만’ 깨끗할 뿐, 떨어져 녹는 순간 석탄과 구분되지 않는 진창의 검은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발견한 그는 결국 제 아버지들을 따라 바다를 건너가게 될 혼혈아들의 운명이 바로 그와 동일함을 깨닫게 된다. 낯선 나라 험한 세상에서 그들이 어린 날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으로 떠나 보내야 하는 이 땅이야말로 절망적인 진창길임을 알고 있는 시인은 마침내 그들과 하나가 되어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흘러가게 하느냐’라고 부르짖는다. 여기서 ‘그리움’이란 좀더 순수하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이 ‘더럽다’는 것은 그 희망이 늘 우리를 배반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처음엔 ‘눈’처럼 순수했던 우리였지만, 그리움에 현혹되어 진흙탕의 눈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욕망에 이끌려 현실을 ‘신기루’처럼 여기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흘러가게 되는 막막한 존재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눈물’은 중의적 의미로, 눈이 녹은 물인 동시에 시인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다.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가 순수한 사람임을 알게 하는 행위이지만, 이 눈물도 역시 눈 녹은 물처럼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을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자신의 순수한 시가 맞이하게 될 운명도 결국 그와 같을 것임을 알고 있는 그는 마침내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현실의 진창까지도 다 건너야 비로소 순결한 새벽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순수한 눈이 녹아 떨어지는 이 진창과, 자신의 순수한 시가 미래를 두려워 하지 않고 끌어안아야 하는 그 어두움이야말로 새벽으로 상징된 순수한 인간적 삶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통과 의례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정념의 기

-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 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시집 󰡔정념의 기󰡕,196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김남조의 시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는 ‘사랑’이다.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인간에 대한 긍정적 자세를 보이면서 사랑을 노래했고, 종교적인 사랑과 계율, 인내와 윤리 등을 시적으로 승화했다.

이 시에는 순수한 삶을 지향하는 종교적 희원이 담겨 있다. 인간적 고뇌, 비애, 고독 등을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한, 그의 시의 특징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시행을 자유롭게 배열하면서도 유연한 리듬을 살리고 있다.

성격 : 낭만적, 종교적, 애상적

심상 : 시각적 심상

어조 : 애상적 어조

특징 : 작자는 ()’에 자신의 마음을 합일(合一)시키고 있다.

애상적 정서를 밑바탕에 깔고, 비애를 극복하며 영혼을 구원받으려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구성 : - 고독한 자아(1)

- 고뇌, 번민하는 자아(2)

평온과 안정을 되찾은 자아(3)

- 후회 없는 순수한 삶에 대한 바람(4)

초월적 존재에 대한 희구(5)

- 울며 기도드리는 자아(6,7)

제재 : 기도

주제 : 순수한 삶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희원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기(旗)’가 표상하는 의미를 생각하여 화자가 궁극적으로 희구하는 바를 20자 내외로 쓰라.

☞ 순수한 삶과 절대자에의 완전한 귀의

2. 이 시의 바탕에 깔려 있는 정서를 25자 내외로 쓰라.

☞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애수와 비애

3. ‘기(旗)’는 화자의 마음과 합일시키고 있는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제1연과 제6연의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의 차이점을 한 문장으로 쓰라.

☞ 제1연은 화자가 깨달음을 얻기 전의 상태이며, 제6연은 화자가 깨달음을 얻은 후의 상태이다.

4. ㉠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시구를 찾아 쓰라. ☞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

 

<감상의 길잡이>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한 폭의 ()’에 비유하고 있다. 한 폭의 기()에 견주어질 수 있는 화자의 마음의 상태가 어떤 것일까가 궁금해진다. 문면(文面)으로 볼 때 화자인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견딜 수 없어 차분히 눈길을 걸으며 뉘우침비애의 감정을 다스리고 있다. 그러나 끝내 벗어날 길 없는 숙명과도 같은 인간의 굴레 때문에 그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시공속에서 혼자 울고 때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몸부림일 터이다. 그러나 화자의 이 괴로움을 보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5연의 내용으로 보건대 화자의 심적 갈등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이 없음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벗이 많이 있어도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만한 상대가 하나도 없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막막할까. 이 막막한 심정이 허공에 걸린 깃발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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