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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소설가, 한강, 이상문학상,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흥, 1939년

Jobs9 2024. 10. 12.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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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한강

 

한승원


1939년 10월 13일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면 신상리
장흥중학교 (졸업)
장흥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 전문학사)
데뷔작
가증스런 바다 (1966)
최근작
사람의 길 (2023)
종교
불교


대한민국의 소설가.

1939년 10월 13일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면 신상리(現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 신덕마을에서 아버지 한용진(韓瑢鎭)과 어머니 박귀심(朴貴心) 사이에서 10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두 명과 형 한 명이 있었으며,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세 명 있었다. 장흥중학교와 장흥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6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가증스런 바다」가 입선하여 등단했으며, 이어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목선(木船)」이 당선되었다. 

1966년 장흥군 장동서초등학교 교사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1968년 광양중학교, 1969년 춘태여자고등학교 등에서 1979년까지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서울 생활을 했다가 1996년 고향인 장흥군에 낙향해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 중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강수연, 진영미 주연으로 1989년 영화화되었다. 



둘째인 고명딸은 역시 소설가인 한강이며, 부녀가 모두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훗날 한강은 202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첫째인 한규호도 신춘문예 등단 작가이며, 한동림이라는 필명을 쓰고 동화를 쓸 때는 본명을 쓴다. 차남인 한강인도 예술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만화작가로 활동중이다. 

 

 

 

중견작가 한승원씨는 지난해와 올해 가장 기쁜 사람이다. 세 자녀 중 큰아들과 딸이 지난해와 올해 서울신문 신춘 문예에 잇따라 당선돼 자기와 같이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됐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 문단에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딸이 모두 작가로 활동하는 '문인가족'이 등장 한 셈이다.

한씨의 딸 강(江. 24, 필명: 강 현)이 지난해 단편소설「붉은 닻」으로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온 후 지난 한해동안「야간열차」,「여수의 사랑」등 4편의 소설을 써내는 열정을 보이고 있고 올해는 큰아들 동림(東林. 26, 본명: 국인)이 또 동생처럼 서울신문 신춘문예에「변태시대」가 당선돼 작가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한씨는 지난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목선」이 당선, 등단한 이래 25년 동안 「불의 딸」,「아제 아제 바라아제」,「포구」,「갯비나리」, 그리고 최근의「동학제」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리얼리즘에 가장 충실한 작가이자 '한의 작가'라는 말을 들어온 한국문단의 중견이다. 

우리 문단에는 황순원·황동규, 김종해·김요일 부자나 김원일·김원우 형제, 김지원·김채원 자매처럼 문인형제, 자매 등 문인 가족들이 많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딸 등 세 사람이 '소설'이라는 같은 장르에, 그것도 등단 관문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신춘문예 관문을 통해 등단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니 지금까지는 없었다. 

"작가지망생들의 관심을 끄는 등용문인 만큼 집안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아이가 앞으로 작품을 얼마만큼 잘 쓸 것인지는 차치하고 일단 작가로서 거쳐야 할 어엿한 관문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대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한씨는, 그러나 한편 앞으로 자신과 똑같은 업고를 치러야 할 아이들이 안쓰럽다고 말한다. 마치 애비의 업고를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것이다. 두 아이가 작가로 데뷔한 것은 어쨌건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런 한씨가 그래도 올해 더욱 기쁜 것은 지난해 어려웠던 기억 때문이다. 지난해 딸 강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때 아들 동림씨는 탈락해 한씨는 딸의 당선과 아들의 탈락이라는 희비를 동시에 맛봐야 했다. 그래서 한씨는 올해 아들 동림씨 당선소식을 받자 그 동안 뭔가 막혔던 것이 일시에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작가로 재급나도 순서대로라면 좋았겠죠. 그런데 딸애가 먼저 당선되고 보니 입장이 아주 난처했어요. 딸은 이미 시단에 나온 시인인데 가족도 모르게 소설을 응모해 당선되고 보니 기쁘고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아들한테 안됐다는 생각도 들고‥‥"

그것은 딸 강씨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됐다는 게 기쁘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 시대가 '레이디 퍼스트 시대'라고는 하지만 레이디 퍼스트를 해야 할 때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교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풍습이 지켜져 오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같은 작가지망생인 오빠를 제치고 먼저 작가가 됐다는 게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오빠는 동국대 국문과, 자신은 연세대 국문과를 나와 똑같이 문학공부를 하면서 가족들도 모르게 소설을 써왔지만 자신은 이미 지난 1993년 계간「문학과 사회」겨울호로 등단한 시인이고 정작 드러내놓고 작가를 지망한 것은 오빠였기 때문이었다. 

"오빠의 격려가 글쓰는 데 큰 힘을 줬다"고 말하는 강씨는 그래서 지난해 당선된 기쁨을 내내 밝힐 수만은 없었다고 말한다.

동림씨 또한 경쟁자(?)인 동생이 먼저 당선된 후 '드러낼 수 없는 좌절감'으로 지난해 내내 번민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온 그는 졸업하던 해인 1991년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 응모, 최종심까지 올라갔으나 아깝게 탈락한 적이 있었다.

동림씨는 지난해 자신의 탈락 함께 '동생 당선'이란 소식을 듣고 나서 아득해 보이기만 하는 '문학의 길'을 포기할 생각까지 할만큼 좌절했다고 술회한다. 남도 아닌 동생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아무리 동생이라 지만(어쩌면 동생이었기 때문에 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생의 당선을 축하하면서도 좌절을 맛봐야 했던 동림씨는 그러나 지난 한해 동안 자신의 가슴에 맺혔던 좌절감과 응어리(?)를 올해 당선소식으로 일거에 해소해 버렸다. 자신도 기뻤지만 정작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기뻐했다고 말한다.

이들 '한 가족 세 작가'의 신춘 문예 당선작품을 보면 세태의 변천과 함께 한국문학의 흐름도 일부 감지할 수 있어 흥미롭다. 1968년 한씨의 데뷔작「목선」은 전형적인 리얼리즘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닷가 민중들의 험한 세상살이와 그들을 감싸고도는 침울함이 한씨의 투박한 언어로 잘 형상화돼 있다.

단편「목선」은 바람난 아네 에게 버림받은 주인공이 과부 양산댁의 배를 빌릴 생각으로 그녀의 채취선 에서 머슴을 살면서 일어나는 갖가지 갈등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한씨는 이 작품에서 남편과 아내를 잃은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일으키는 온갖 허욕과 대립을 등장인물들의 짙은 패배감에 실어냈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나 지난해 딸 강의 당선작「붉은 닻」은 바닷가에서 장승처럼 서성이는 아버지의 잔흔에 갈등하는 일가족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학교가 헐린 뒤 남아 있는 문방구점에 기대어 사는 어머니와 두 아들의 이야기 등 작품을 읽다 보면 근대화의 과정에서 상처를 입으면서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우리 가족들의 현주소를 더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와 딸의 데뷔작이 본질적으로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아들 동림의 올해 당선작「변태시대」는 소설 형식에 있어서 부터 약간 파격을 겪는다.

호모들이 자주 모이는 허름한 극장 안에서 주인공이 변태인간인 여장남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만삭인 그의 아내는 우연히 최루탄이 폭력처럼 난무하는 거리에서 겪게 되는 일을 내용으로 다룬 소설이다. 무차별적인 폭력 앞에 노출된 변태사회와 각종 변태가 난무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주인공의 혐오감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글쓰기 스타일이나 버릇, 작품의 주제도 곰곰이 짚어 보면 재미있다. 한씨는"아직은 아이들의 작품세계가 똑 부러지게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동림의 경우는 대체로 '사회의 어두움' 같은 것을 작품 주제로 주로 삼고 있고 딸 강은 지금은 여행을 주제로 많이 삼는 것 같다"고 말한다.

글쓰는 버릇 또한 상반된다. '완벽주의자' 인 아들 동림씨는 그의 성격처럼 글을 쓰고 나서 추고가 거의 없을 만큼 문장 하나 하나에 완벽을 기하는 스타일이다. 때문에 마침표를 찍으면 그것으로 작품이 끝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중간에 문장이 한번 막히면 많이 방황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씨는 아들을 '고생스럽게 쓰는 형'이라고 말한다. 과작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딸 강씨는 작품을 일사천리로 끝내놓고 수정, 가필하는 형이다. 한씨는 딸의 그런 버릇은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또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반면 말이 많아 언뜻 산만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많다는 것은 산문적이라는 뜻에서 한씨는 딸 강씨가 장편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말이 많은 만큼 작품의 완성도가 문제인데 아직까지는 별로 처지는 작품은 없는 것 같다는 게 아버지 한씨의 말이다. 지난해 문예중앙에 발표한「야간열차」나 리뷰 창간호에 실린 「여수의 사랑」등이 모두 단편인데도 원고 량이 150매∼200매나 될 만큼 길다. 

어떤 스타일이 작가로서 바람직한가는 작가의 체질이나 버릇의 문제일 뿐 글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작가로서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느냐에 달려있는 문제이므로 아버지인 자신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한씨가 가끔 깜짝 놀라는 것은 두 아이가 다루는 작품의 내용이 한씨 자신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한씨가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신선한 감각을 배울 정도란다.

한씨는 지난해 말 대하장편소설「동학제」(고려원 펴냄)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한씨가 작품구상을 한 지 15년만에 내놓은 것으로 우리 역사와 소설작품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은 동학혁명 당시 바다를 생활근거지로 해서 사는 어민들을 위주로 동학혁명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 또한 한씨가 그의 작품 속에서 줄기차게 천착해온 바다사람들의 생활과 '한'의 문제를 담고 있다. 한씨는 지금까지 내놓은 40여권의 작품집 속에서 우리네 삶의 밑둥에서 똬리를 틀고 사는 시시때때로 머리를 드는 '차돌처럼 단단한 응어리'같은 '한'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 '한'을 병균처럼 품은 채 살아가지만 끝내 그 '한'을 풀어버리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한씨는 전남 장흥군의 조그만 섬 덕도 새터말에서 태어났다.

"방문을 열고 툇따루에 나서면 마당 앞 들판 양쪽에서 흘러내리는 산 능선 사이로 바다가 보였습니다. 뒤란 언덕에 오르면 바다가 더 환히 내려다 보였지요. 산에 소를 몰고 가도, 학교엘 가도 바다는 항상 지척에 있었습니다."

여름이나 겨울 아침의 바다는 은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정작 어린 그에게 바다는 신비스럽고 무서운 마녀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고 한씨는 회상한다.

어렸을 적의 그 같은 기억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은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 장흥의 섬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 지금은 서울 도봉산 밑 한적한 주택가에 살고 있지만 한씨는 고향에 얽힌 한과 추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 작품 속 이야기는 내가 살아오면서 겪고 보아온 모든 것들입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읽는 나이에 따라 서로 다른 느낌을 주듯이 고향에 대한 느낌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달라지더군요."

한씨는 그가 천착해온 '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한의 연속이라는 게 한씨의 생각이다. 때문에 사반 세기에 이르는 문학적 역정 속에서도 그는 한과 고향에 대한 집착을 고집스럽게 견지하고 있다.

한씨를 보면 언제나 '텁텁한 막걸리'가 생각난다. 아무리 양복을 맵시 있게 입어도 그의 몸에서부터 느껴지는 '텁텁함'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전라도사투리나 능변이 아닌 그의 말투에서도 그것이 느껴진다. 때문에 그에게 '세련됨'은 어울리지가 않는다.

그 같은 이유에서일까, 실제로 고등학교 때 문학 병을 앓은 후 그는 한때 도시적이고 사회 이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자기'가 아닌 것 같아 절망에 빠진 적이 있다고 술회한다.

그가 국악을 즐겨 듣고 집에 있을 때 늘상 한복을 입고 것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듣던 걸쭉한 육자배기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문학 병을 앓으면서 절망에 빠져있을 때 육자배기는 그의 절망의 출구였던 것이다.

작가로서 자기의식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고 회상하는 그는 그후 국악을 들으면서 문체도 바뀌었다고 말한다. 문체뿐 아니라 작가로서 제 모양과 색깔을 갖추게 됐다. 그는 그후 원형질 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계속 그의 작품 속에 담아냈다.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마치 무당이 굿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굿을 해야 몸이 안 아픈 무당처럼 작가도 자기 글에 미쳐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니까요."

무당이 굿을 해야 하듯이 피를 말리는 창작의 길을 가는 작가로서 한씨는 두 자녀의 앞날이 안쓰럽기만 하다. 소설 쓰기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한씨는 두 자녀가 국문과에 들어갔을 때 솔직히 둘 중 하나만 작가가 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한씨는 아이들이 자신처럼 문학의 길을 간 것을 순전히 집안 분위기 탓으로 돌린다. 아내가 그의 일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분위기를 만들어 줘 아이들도 자연히 따라하지 않았나 생각된다는 것이다.

책을 내고 상을 받고 신문에서 그와 그의 작품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아마 영광스럽게 생각, 남편의 일을 긍정적으로 봤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그의 아내가 평소 남편의 글쓰는 일에 '넌덜머리'를 냈다면 아이들도 피해 갔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들 동림씨도 "어려서부터 작품 쓸 때의 고통스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자라 작가에 대해 별 매력을 못 느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집안 분위기와 대학시절 문인과 선배들의 영향으로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됐다고 말한다.

글만 쓰고 살기 힘든 60∼80년대 어려운 시기에도 자신은 '글만 쓰고 살도록 행운'이 주어진 유복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는 한씨는 이제 두 자녀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한 지붕 세 작가'의 좌장이자 가장으로서 이제 막 문단에 얼굴을 들이민 자녀들에게 아버지인 자신을 뛰어넘는 작기가 돼주길 은근히 바라고 있다. 

문학적 성공과 함께 가정적으로도 큰 기복 없이 살아온 그는 지난해 전남 여천시 서초동 바닷가에 아파트 전세를 한 채 마련했다. 작업실인 것이다. 항상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아파트는 이제 세 사람이 글을 쓸 때마다 번갈아 가며 찾아가는 공동작업실이다. 요즘은 딸 강씨가 내려가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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