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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우, 극우(極右, Far-right politics), 분단 체제의 특수성, 급진적인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군비증축, 지역차별주의, 인종주의 성향 네오파시즘

Jobs9 2023. 4. 1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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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우

- 극우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 하지만 미일에는 안 맞아

 

한국 극우 지향

- 해방 후 군권력, 검찰권력 카르텔 복귀 열망

-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관계가 없으며, 급진적인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우익인 동시에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군비증축, 지역차별주의, 인종주의 성향을 띠는 네오파시즘과 유사한 모습

- 스스로를 '중도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라고 모호하게 칭하는 경향이 있으나,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는 것 이외엔 기존 자유주의와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부족

- 한국 극우의 여러 가지 특징이 분단 체제의 특수성에 기인

 

기득권 아닌 사람이 극우인 이유

- 자유로부터의 도피

- 강력한 독재 기대길 원해

 


극우(極右,  Far-right politics)

또는 급진우파(急進右派, extreme right)는 극단적으로 우익적인 개인, 단체, 당파 세력을 가리킨다. 반대어는 극좌이다. 보통 극단적인 보수주의, 국수주의, 권위주의, 반평등주의, 인종주의적 성향을 띤다. 역사적으로는 20세기 유럽에서 큰 세력을 떨친 파시즘, 나치즘, 팔랑헤주의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된다.

한편 일부 자유방임경제, 경쟁 사회, 반공동체, 반집단주의의 사상적 경향을 보이는 분파도 있다. 그 예로, 아나키즘에 속하는 아나코-자본주의의 경우 국가의 기본적인 기능을 포함한 모든 것을 민영 기업과 시장 경제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극단화시킨 것으로서 극우 사상에 포함된다고 평가받는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도 경제 불균형과 빈부격차를 초래하여 사회적 평등을 기존의 민족주의적 극우보다 높은 수준으로 훼손하기 때문에, 너무 과격한 신자유주의 주장도 극우의 한 축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행동 특징
지역주의와 인종, 민족이라는 개념에 차별성을 두며 전체주의-파시즘적 특성을 보인다.

또한, 평등주의와 민주주의의 폐해인 중우주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이 때문에 민주적 절차보다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즉 극우가 가진 뚜렷한 행동 특성은 극좌와 마찬가지로 테러를 비롯한 폭력에 있다.

파시스트 성향을 띠지 않는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는, 경제적 자유를 위해 평등을 희생시키자는 측면에서 약소국을 착취하는 신제국주의와 연관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좌파적 정치 및 경제 모델이 실패하면서 보수파가 일반적인 우파보다는 극우적 성향을 띠는 경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극우
한국의 극우는 해방 정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처음 등장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했던 백의사, 이범석의 민족청년단,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등이 있었다. 하지만 해방 정국에서 남과 북이라는 이념이 다른 독립된 체재가 성립되었고 서로 무력의 수단인 군사력을 갖추었기에, 북한의 입장에서는 한국이라는 체제는 극우일 수밖에 없으며 그 역도 성립하는 특이한 관계가 성립한다. 나아가 분단 상황에서 대한민국 내에서 명확한 파시즘적 특성과 무력을 동반하지 않는 우파에 대해 극우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행동은 국가의 한국이라는 공동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동반시키는 양상을 보인다.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판하였다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 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 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 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주로 이승만 정부 또는 자유당을 옹호하고 동시에 진보 계열 정치인들을 테러했던 극우 정치 깡패들이 존재했으며, 제1공화국 정부에서는 이들을 방치하고, 동시에 이들의 활동을 독려 및 지원까지 해주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로는 전향 주사파 출신이 주축이 된 극단적 신자유주의 운동이라고 일부 분석가들에 의해 평가받는 뉴라이트 운동이 생겨났다. 대한민국의 사회학자 우석훈은 한국의 극우는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관계가 없으며, 급진적인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우익인 동시에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군비증축, 지역차별주의, 인종주의 성향을 띠는 네오파시즘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이들은 스스로를 '중도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라고 모호하게 칭하는 경향이 있으나,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는 것 이외엔 기존 자유주의와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정치학자 차상철은 현재 한국 극우의 여러 가지 특징이 분단 체제의 특수성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일부 언론[모호한 표현]에선 이들 절대다수가 넷우익에 속하며,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는 동시에 외부 세계에서 자신의 정치사상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하며, 몇몇 분석가들은 이들의 행동을 정치적 성향에 연관이 있다고 분석하지 않고 하나의 정신병적 반응이라 주장한다.

독일의 극우
독일의 극우는 역사적으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유명하며, 동시에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선거로 집권하였다. 아돌프 히틀러 정권은 장애인들과 유대인을 말살하는 강력한 인종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을 학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잔당들은 독일 우파당을 거쳐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을 형성하였으나 1952년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후에는 독일 제국당으로 넘어가다가 국가민주당의 일부가 되었다. 

동독 정권은 과거 반(反) 나치 파르티잔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 잔당들을 광범위하게 숙청했다. 서독 같은 경우는 1945년 패전 이후 연합군은 극우 이념을 엄금했지만, 일부 나치 동조자가 석방되거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 결국, 1947년 냉전이 시작되자 서독에 주둔했던 서방권 연합군들은 '군사작전역사부'라는 기관을 만들어 친(親) 나치 성향의 역사왜곡을 주도했다. 

1950년대부터 호황기를 누린 나라들 중 대표적인 서독은 1950년대부터 급진적인 다문화 정책을 실행해 왔다. 1960년대에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서독의 원조가 매우 심화되던 때로, 외노자들의 등장에 반대하는 인종주의자들이 독일 국가민주당을 창당했다. 1990년에 있던 독일 통일은 대량의 실업자들을 양산해 냈고, 급진적인 다문화 정책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그러한 상태를 악화시켰다. 이에 따라 외노자들에 대한 증오를 품은 네오나치가 대거 등장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제도권에 진입을 못하게 하고 있지만, 그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독일을 위한 대안이라는 반(反) 난민, 반(反) EU 극우 정당이 등장하면서 2017년 총선에서 94석으로 제3당에 오르기까지 했으나 계속되는 우경화로 베른트 루케와 프라우케 페트리가 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중 루케는 자유보수개혁당, 페트리는 파란당으로 넘어간다. 

이 밖에도 제3의 길, 우파당 등의 극우 정당이나, 2015년 이후 형성한 페기다 같은 극우 단체 등이 존재하며 이들 모두 네오나치 외에도 독일 국민주의, 반이민 등을 표방한다.

러시아의 극우
러시아에서 1910년대에 왕당파 형태로 나타났고, 1990년대에는 네오나치의 형태로 나타났다. 후자의 경우는 현재까지 이어져오지만, 전자의 경우에도 현재까지 이어져오나 그 활동력이 극히 미미한 상태이다.

소련 정부가 들어선 1921년에서 1989년까지 소련의 전 지역에서는 인종차별, 국수주의, 파시즘 찬양을 당국에서 엄격히 제재하여, 극우 정치사상을 따르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없었지만 타 지역에는 만주에 거주했던 어뤄쓰족들이 주도한 러시아 파시스트당 등 러시아계 파시스트 단체가 존재했었다. 이후 1990년에는 정치의 자유를 보장함에 따라 극우 정당의 설립도 허가되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경제는 급속히 피폐해져서, 1992년에는 1인당 명목 GDP가 약 500 달러(소련 시절의 22분의 1 수준)로 낮아졌다. 소련 시절에 보장되었던 여러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지고 경제난, 실업난이 심해지다 보니, 양극단에 선 정당의 지지도가 높아졌으며, 그 시기에 제일 큰 정치 세력이 바로 극우 정치 세력이다. 현존하는 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은 당명과 관계없이 나치즘과 파시즘을 지지하는 정당이다. 과거 소련 자유민주당으로 창당하여 야당 격을 맡았지만 지금은 극우 정당 중 하나로 불리며 현재 국가두마 의석수 대비 2020년 기준으로 제4당이다. 이들은 반공주의, 반민주주의 성향 그리고 인종주의 성향을 가졌지만, 과거의 소련, 러시아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후원하는 러시아 극우 스킨헤드들은 러시아 내에서 활동하는 유색인종들이나 유학생들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폭행하여, 수많은 폭력 사건을 일으켰다.

이 밖에도 로디나 등의 극우 정당이 존재하며 드미트리 로고진이 이끄는 구 로디나는 과거 공정 러시아로 합당한 적이 있다.

미국의 극우
미국의 경우, 2차 대전 시기부터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반대하는 소규모 파시스트 집단들이 존재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해군 중령 출신인 조지 링컨 록웰은 미국의 다문화 정책과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1959년 미국 나치당을 창당했다. 동시에,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기병대 장교가 설립한 KKK란 극우 단체가 존재하며, 이들은 주로 미국 중부 지방과 남부 지방에서 활동하고 백인인종주의, 개신교 근본주의, 반천주교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네오나치만 한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헌법당과 미국 공화당 내에는 네오파시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동시에 자유당(Libertarian Party)에도 아나코-자본주의 성향의 극우들이 존재한다. 특히, 아나코-자본주의자들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는 나라이기도하다. 그러나, 보수양당제인 미국 정치 현실에서는 극단적인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을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은 티파티 운동, 그리고 공화당의 신보수주의의 패권주의와 제국주의 성향을 들어, 이 정치운동 및 이념을 극우 이념이라고 평가한다.

영국의 극우
영국에서는 1935년 파시즘 정당인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창당되었으나, 영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1940년 해산되었으며, 영국에서는 극우 파시스트들이 큰 힘을 갖지 못하였다.

오늘날 영국의 극우들은 국민주의 성향의 파시스트 극우, 유럽회의주의 극우, 백인 우월주의 극우로 크게 나뉜다.

2016년 브렉시트를 계기로 유럽에서 유럽 연합을 탈퇴하고 이민을 반대하는 극우 운동이 확산되었다.

현재 영국 극우 정당은 영국 독립당, 브리튼 국민당 등이 있다.

일본의 극우
일본에서 극우 운동과 사상은 일본 제국 시절 당시 일본 육군의 파벌이었던 황도파, 통제파와 파시스트였던 기타 잇키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황도 파는 반자본주의와 파시즘을 모토로 한 국가주의, 팽창주의를 기반으로 했고, 통제 파는 기존 일본식 자본주의 체제와 군주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를 온건적으로 실행해 나가자는 입장이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가 끝난 이후 극우 사상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이들의 사상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1940년 일본 정부는 근로국민당, 동방회를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켜 대정익찬회를 형성했으나 1945년 대정익찬회는 해산되고 사실상 일본 파시즘은 사라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부분의 극우 지지자들은 처벌을 면하여 일본 자유당에 입당하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들의 원로적 역할을 했던 정치인들이 극우 운동의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일본은 다름없이 극우에 대한 지지도가 상당히 높으며, 해당 단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좌익 인사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폭력단과 야쿠자와 유사한 단체를 가진 극우 단체도 존재한다. 정치권 내에서는 일본유신회라는 50석이 넘는 제3정당까지 존재한다. 대한민국과는 달리, 이들은 수많은 서클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다 똑같은 극우들로 보기 힘들며, 네오나치, 파시스트, 일본식 제국주의자, 민족아나키즘 등등으로 나뉜다. 넷우익이란 용어도 일본에서 처음 나타난 용어이며, 주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극우를 지칭한다. 일본의 지식계에서는 넷우익 들을 일종의 사회 낙오자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 극우들의 공통점은,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수구주의, 국수주의적이라는 점이 있다.

중국의 극우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붕괴된 후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공화주의와 극우적 사상이 혼합된 형태를 지향하는 정치운동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장제스는 중국식 국가주의와 유교적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한 파시즘을 지향했었다. 그는 1925년 당의 권좌를 잡은 후 1927년 중국 국민당 내의 중도 좌익을 숙청하여 당의 성격을 우익 성향으로 바꿨다. 국공 내전 시기에 국민당 내 극우들은 청방과 삼합회와 같은 조직폭력배를 고용하여, 점령지 내의 좌파 농민,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했다.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게 된 후, 극우 세력들은 타이완으로 피신하여, 타이완 원주민들과 한인의 차별 정책을 지지했다. 장제스가 사망하였던 1975년까지 이른바 '전시민주체제'라는 반독재체제를 유지하여 일인일파 독재체제를 완고히 다졌었다. 이후, 중화민국 내 극우는 대륙수복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반대파들을 공산주의로 몰아 학살했으나, 장제스가 죽고, 국제적으로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보도록 국제적인 인식이 바뀌고, 장징궈가 총통이 되고 민주화된 이후엔 사실상 대륙수복이 불가능하기에, 일부 온건우파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협력하는 친중노선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중화민국 내 극우는 민주진보당의 타이완 독립, 분리주의 노선에 반대하며, 동시에 장제스식 대륙 수복, 국수주의, 보수주의, 국가주의 성향 등 과거의 정책을 지지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정치 활동 면에서는 직접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중 중화통일촉진당이 있다.





프랑스 극우와 한국 극우는 자칭 ‘애국주의자’라는 점을 빼면 전혀 닮은 점이 없다. 프랑스 극우세력은 국민전선(FN)의 마린 르 펜이 이끌고 있지만, 한국의 극우세력은 정치적 실체가 불분명하다. 다음 달 7일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두고, 극우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좌우 연대 전선이 구축됐다. 거대여당인 사회당과 거대야당인 공화당이 르 펜의 집권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서 정파를 초월해, 역시 결선에 오른 에마뉘엘 마크롱 지지에 나섰다. 주목할 만한 점은, 거대 우파야당인 공화당이 극우 퇴출을 위해 자신들의 정적이라 할 사회당 내각 출신의 마크롱 후보에 힘을 실어줬다는 사실이다. 

반(反) 유럽연합(EU)과 반 세계화, 반 시장주의를 지향하는 르 펜은 EU 역내 노동력의 자유이동이 프랑스의 저임금과 고실업을 야기했다고 지적하며, EU 재협상과 탈퇴를 주장했다. 르 펜은 특히 은행가 출신의 마크롱이 수천 명의 삶을 망친 친(親) 시장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노동자 계급 유권자들을 공략했다. EU역내의 노동력 규제를 빼면, 르 펜의 주장은 1차 투표에서 19.58%의 높은 지지율을 얻어 4위를 차지한 급진좌파 ‘프랑스 앵수미즈(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장뤼크 멜랑숑 후보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유독 르 펜에 대한 거부권이 좌우 진영모두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뤄진 것은, 이민자들에 대한 그의 차별적 규제계획 탓이다. 이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공화국 정신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극우는 어떠한가? 한국의 극우세력은 군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유엔기와 이스라엘기까지 휘날리며 시위를 벌이지만, 구체적인 정치적 실체가 없고, 이렇다 할 정책방향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 세력의 지지를 받거나, 또는 이들을 대표한다는 정당의 대선 후보들은 어떠했는가? 한국적 정서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어떠한 정책을 내놓은 적이 없고, 재벌이 주로 지배하는 시장질서에 저항한 적도 없었으며, 비정규직의 저임금과 고실업에 대한 고민도 전혀 없었다. 미국, 유럽,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반대나 협정 철회를 주장한 적도 없었고, 농민과 중소기업들의 권익을 위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움직임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유신시절 흑백 TV에서 줄곧 음산하게 들었던 국영 방송국 아나운서의 ‘영혼 없는’ 목소리를 흉내 내어,  ‘좌파척결’이나 ‘종북척결’을 외쳐대다가 대선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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