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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우, 극우(極右, Far-right politics), 분단 체제의 특수성, 극단적 기독교 우파, 급진적인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군비증축, 지역차별주의, 인종주의 성향 네오파시즘

Jobs 9 2023. 4. 1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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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우

- 극우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 하지만 미일에는 안 맞아

 

한국 극우 지향

- 해방 후 군권력, 검찰권력 카르텔 복귀 열망

-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관계가 없으며, 급진적인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우익인 동시에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군비증축, 지역차별주의, 인종주의 성향을 띠는 네오파시즘과 유사한 모습

- 스스로를 '중도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라고 모호하게 칭하는 경향이 있으나,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는 것 이외엔 기존 자유주의와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부족

- 한국 극우의 여러 가지 특징이 분단 체제의 특수성에 기인

 

기득권 아닌 사람이 극우인 이유

- 자유로부터의 도피

- 강력한 독재 기대길 원해

 


극우(極右,  Far-right politics)

또는 급진우파(急進右派, extreme right)는 극단적으로 우익적인 개인, 단체, 당파 세력을 가리킨다. 반대어는 극좌이다. 보통 극단적인 보수주의, 국수주의, 권위주의, 반평등주의, 인종주의적 성향을 띤다. 역사적으로는 20세기 유럽에서 큰 세력을 떨친 파시즘, 나치즘, 팔랑헤주의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된다.

한편 일부 자유방임경제, 경쟁 사회, 반공동체, 반집단주의의 사상적 경향을 보이는 분파도 있다. 그 예로, 아나키즘에 속하는 아나코-자본주의의 경우 국가의 기본적인 기능을 포함한 모든 것을 민영 기업과 시장 경제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극단화시킨 것으로서 극우 사상에 포함된다고 평가받는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도 경제 불균형과 빈부격차를 초래하여 사회적 평등을 기존의 민족주의적 극우보다 높은 수준으로 훼손하기 때문에, 너무 과격한 신자유주의 주장도 극우의 한 축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행동 특징
지역주의와 인종, 민족이라는 개념에 차별성을 두며 전체주의-파시즘적 특성을 보인다.

또한, 평등주의와 민주주의의 폐해인 중우주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이 때문에 민주적 절차보다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즉 극우가 가진 뚜렷한 행동 특성은 극좌와 마찬가지로 테러를 비롯한 폭력에 있다.

파시스트 성향을 띠지 않는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는, 경제적 자유를 위해 평등을 희생시키자는 측면에서 약소국을 착취하는 신제국주의와 연관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좌파적 정치 및 경제 모델이 실패하면서 보수파가 일반적인 우파보다는 극우적 성향을 띠는 경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극우
한국의 극우는 해방 정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처음 등장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했던 백의사, 이범석의 민족청년단,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등이 있었다. 하지만 해방 정국에서 남과 북이라는 이념이 다른 독립된 체재가 성립되었고 서로 무력의 수단인 군사력을 갖추었기에, 북한의 입장에서는 한국이라는 체제는 극우일 수밖에 없으며 그 역도 성립하는 특이한 관계가 성립한다. 나아가 분단 상황에서 대한민국 내에서 명확한 파시즘적 특성과 무력을 동반하지 않는 우파에 대해 극우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행동은 국가의 한국이라는 공동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동반시키는 양상을 보인다.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판하였다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 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 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 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주로 이승만 정부 또는 자유당을 옹호하고 동시에 진보 계열 정치인들을 테러했던 극우 정치 깡패들이 존재했으며, 제1공화국 정부에서는 이들을 방치하고, 동시에 이들의 활동을 독려 및 지원까지 해주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로는 전향 주사파 출신이 주축이 된 극단적 신자유주의 운동이라고 일부 분석가들에 의해 평가받는 뉴라이트 운동이 생겨났다. 대한민국의 사회학자 우석훈은 한국의 극우는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관계가 없으며, 급진적인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우익인 동시에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군비증축, 지역차별주의, 인종주의 성향을 띠는 네오파시즘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이들은 스스로를 '중도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라고 모호하게 칭하는 경향이 있으나,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는 것 이외엔 기존 자유주의와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정치학자 차상철은 현재 한국 극우의 여러 가지 특징이 분단 체제의 특수성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일부 언론[모호한 표현]에선 이들 절대다수가 넷우익에 속하며,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는 동시에 외부 세계에서 자신의 정치사상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하며, 몇몇 분석가들은 이들의 행동을 정치적 성향에 연관이 있다고 분석하지 않고 하나의 정신병적 반응이라 주장한다.

 

 

 

 

 

극좌, 극우

 

주로 평등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나라를 초월해 '공통적인 요소'가 많이 존재하는 극좌 정치와 달리, 극우 정치는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나라별 개별적 특성을 강조하는 내셔널리즘, 지역에 따라 다른 전통을 따르는 보수주의 특성상 국가마다 가치의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논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극우 정치는 나라별로 나누는 경향이 흔하나 극좌 정치는 그렇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경우 한반도 분단 이후 냉전 시기 對공산진영의 최전방이었기에 글로벌한 의미의 극좌 세력은 거의 힘을 못 쓴 반면, 매카시즘부터 극단적 민족주의까지 글로벌한 의미에서 극우에 가까운 정치 세력은 일정 비율 존재


한국 극우들도 타국 극우와 마찬가지로 사회문화 이슈에서 일정 부분 내셔널리즘적(nationalist)이지만 소위 민족주의(ethno-nationalist)적 극단성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쉽게 '극우'로 불리는 어버이연합이나 태극기 집회 등의 수구 보수 세력은, 민족이나 인종적 극단성을 극우의 척도로 보는 전통적 좌우 스펙트럼의 개념 하에서 '극우'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다. 이는 이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숭배하고, 폭력성이나 배타주의를 보인다는 유사성을 취할지언정, 극단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인종주의적 배타성이라는 좁은 의미의 극우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당장 이웃 국가 여당인 중국의 공산당이나 일본의 자민당 같은 경우, 많은 서구 미디어에서 ethno-nationalism을 조장한다고 비판받거나 심지어 ultra-nationalism 성향을 보인다고까지 묘사되기도 하지만, 자민당처럼 주류 보수당인 국민의힘은 국민보수주의로만 묘사되지 ultra-nationalist로 묘사되는 경우는 아예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국내 극우 정당들도 외신에서 ultra-nationalism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극우 기준을 좀 더 폭넓게 잡을 경우, 이들은 특정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요소,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 옹호, 대한민국의 핵무장 지지 등 내셔널리즘적 성격이 한국 극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극우는 노골적으로 국내의 외국인에 대한 인종 청소나 혼혈 한국인에 대한 추방 혹은 이들의 2등 국민화를 지지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특히 레벤스라움과 같이 만주와 간도가 과거 우리 민족의 강역이었으니 한반도 통일을 넘어서 저 지역들을 무력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민족주의나 순혈주의 양태는 사실상 없고 약화된 민족주의가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이는 한국의 민족의식이 너무 공고하기 때문이다.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역사가 너무 오래되었다 보니 유럽이나 미국만큼 인종 문제를 겪을 일이 적고, 무엇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일제강점기 등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민족 개념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인 정서로 작용한다.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으로, 주로 자본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식민 통치를 당하면서 이들에게 대항하는 이념으로 피식민 국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저항적 민족주의가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이후의 역사 속에서, 우익은 민족주의를 국가의 정통성 부여 및 국민의 결속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 한편, 좌익은 독재를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대 논리 및 친북 유화적인 정치관의 입장에서 민족과 자주를 강조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미국식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에서 멀어진 우파와는 달리 좌파 계열의 민족주의가 오히려 훨씬 강고해졌다. 좌파가 통일에 대해 적극적인 이유 중 하나가 단일 민족국가에 대한 집착이다.

민족주의(ethno-nationalism)를 대신해 한국의 극우를 떠받치는 기둥은 극단적 반공주의와 극단적 기독교 근본주의, 그리고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이다. 한반도가 냉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극우의 결집은 민족주의적 담론 대신 반공주의적 담론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국가에 의해 조장되기도 하면서 현재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과거 기독교세가 강했던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세력이 전쟁으로 인해 남하하였고, 북한의 종교 탄압이 문제가 되면서 보수 기독교 또한 자연스럽게 반공주의에 힘을 실었으며, 이것이 극단적으로 변모하면서 극우로 발전했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제1세계 선진국에서 반드시 민족주의적이지 않더라도 권위주의적 보수주의는 종종 극우로 간주된다. 

이러한 측면 때문에 현재까지도 한 쪽에서는 반공주의에 기반한 극단성과 혐오에 기반한 배타성, 군대식 전체주의 문화와 민주적 질서에 대한 불신/불복 등을 이유로 이들을 '극우'로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민족주의와 파시즘에 입각한 엄밀한 의미를 들며 극우가 아니라고 하는 상황이다. 이는 '극우'의 뜻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 

 

 

정치 분야


해방 후 한반도의 남북 분단으로 체제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대한민국은 생존과 결집을 위해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걸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는 민족의 순수성과 연결되고,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독재정치를 정당화하는 등의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극단적 우파의 결집 또한 반공주의에 입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유럽 극우가 과거의 파시즘 전통에 입각해 이민자와 외국인을 위기이자 위협로 상정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극단적 행동을 벌인다면, 한국의 극우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반공주의에 입각해 북한의 공산주의와 이에 동조하(는 것으로 지목되)는 세력을 위협 요소로 상정해 극단적 행동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는 아래의 극우 예시로 올라와 있는 백의사나 서북청년회 등이 반공을 기치로 그 극단성을 드러냈다는 것에서부터, 오늘날 극우로 분류되는 집단이 심심치 않게 상대 진영을 '빨갱이'나 '종북 좌파', '공산주의자' 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까지의 맥락에 통한다. 이들이 흔히 '북침'이나 '북폭'을 주장하는 것 역시 공산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해 한민족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로서 인종적 순수성을 대체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이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한 강한 향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이들이 정치적/경제적 권능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지켜낸 인물로 여겨지기 때문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배타주의 역시 다른 국가의 극우와 비슷하게 나타나지만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이슬람이나 중국, 러시아 등 이념 지형의 바깥에 위치해 위협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국가에 대해서는 강한 배타성을 보이나, 한국과 동일한 이념 진영에 위치하고 외교적으로도 큰 연관이 있는 미국과 일본, 유럽에 대해서는 이러한 배타성이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미국과 관련 없는 사항으로 여는 극우 단체의 시위에 성조기가 단골로 등장하는 것 또한 기존 극우 개념에서의 민족주의적 배타성을 반공주의가 대체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성향의 경우 특히 박정희식의 국가 경영에 대한 강한 향수와 연결되는데,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를 토대로 한 강한 반공주의 성향 및 통치에 대한 선호, 경제적으로는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독재를 선호하는 경향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유신정권 시절인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보인 코포라티즘은 극우의 요소 중 하나이다. 

물론 단순히 공산주의에 반대한다고 해서 무조건 극우라고 볼 수는 없다. 앞서 말하였듯 한국이 반공주의를 기치로 삼아온 것은, 유럽 극우가 지향하는 민족 개념의 모호함과는 달리 북한이 실질적 위협으로 작용해온 이상 실존적인 이유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다만 극우에 속하는 이들은 단순히 북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넘어, 반공주의에 기반해 국내에서도 극단적 배타성을 드러내고, 비뚤어진 국수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적 질서에 대한 불신과 반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위의 설명 또한 단순히 유럽의 극우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배타적 극단성이 대한민국에서는 권위주의적 반공주의에 기반한 극단성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설명에 불과하다. 

 

 

1960년대 이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극우'로 지목할 수 있는 세력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45년의 해방정국이다.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이루어졌고, 반공주의를 기치로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해 반대 진영 정치인 및 정치세력에 대해 백색테러를 가하는 것이 활동의 주였으며, 일부는 파시즘과의 연계성도 보였다. 이 시기 극우로 지목되는 단체로는 백의사와 서북청년단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월남한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어서, 후술할 기독교 우파와도 접점이 존재한다.  

6.25 이후로는 주로 이승만 정부나 자유당을 옹호하면서 진보계열 정치인을 백색테러한 정치깡패 또한 극우로 지목된다. 다만 이들의 극우성에 대해서는 이념적인 측면보다는 독재적 권력의 옹호를 위해 폭력을 동원함으로서 반동적인 행태를 보여왔다는 것이 주목된다. 이들은 4.19 혁명으로 지지기반을 잃고 5.16 군사혁명으로 숙청되면서 세력을 잃었다. 이 이후 뚜렷하게 극우로 지목되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후에도 공권력이나 사조직 등을 동원해 물리력을 행사함으로서 독재적 권력을 옹호한 사람들이 존재했으나, 이 시기의 극우가 뚜렷하지 않은 것은 이미 극우의 조건으로서 기능하는 민족주의나 반공주의가 일부의 생존논리나 대항논리를 넘어선 국가적 헤게모니로 대한민국 안에서 자리잡았기 때문에, 극우가 발호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념 노선에서 이전과 거의 동일하였던 신군부 시기를 넘어, 민주화의 결실을 이룬 문민정부는 물론, 어느 정도 기존 보수 세력에 유화적이었던 김대중 정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었다. 

 

 

2000년대~ 2010년대 후반


그러나 2000년대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이들에 충격이 가해짐은 물론, 민주당계 정당이 과거 보수 세력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보수 세력 사이에 '여론전에 밀렸다'는 위기의식이 공유되기 시작했고, 이는 이전까지 투표로 이야기하던 보수 성향의 인물들이 사회 전반으로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극단적 우파의 결집 또한 시작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첫째 부류는 이른바 '아스팔트 우파'로 불리는 이들로서, 반공주의와 군사정권 시기 이념에 대한 강한 향수를 지닌 이들을 중심으로, 햇볕정책 등의 대북 유화 정책이나 민주당계 정당의 정치 행위에 대해 '빨갱이'나 '종북'이라 지칭하고 강한 반감을 드러내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민주당계 정당의 정치 활동에 대한 극렬한 반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했던 이들이다. 2000년대 이전부터도 독립신문이나 국민행동본부처럼 여론전과 직접행동을 동원한 활동은 어느 정도 존재해 왔으나, 이러한 극우 활동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6년에 이른바 '가스통 할배'로 지칭되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창설되고, 이들에 의한 폭력적 시위가 부각되면서부터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성향은 철저하게 반북 반공주의이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삼성과 전경련이 이들을 지원하는 등, 사실상 정권을 비호하기 위한 단체로 이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 또한 존재한다.

둘째 부류는 좌파 운동권 중 90년대 이후 동구권의 멸망을 바라보며 보수로 전향하였거나, 민주당계 반공주의자 중 주류 정치에 편입되지 못한 불만을 가지고 전향하면서, 전향자로서의 입장을 반전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논리를 동원하면서 생겨난, 이른바 뉴라이트가 극단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경우 과거부터 가지고 있었던 전체주의적 성향과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이념의 토대로 하면서도, 자신이 떠나온 좌파 세력의 핵심 논리 중 하나인 민족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엿보이는데, 이는 친대기업적 관치경제를 옹호하는 경제 분야에서의 극단적 자유주의,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권위주의 군사정권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까지도 찬양하는 극단성,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옹호,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이를 박정희와 연결지으면서도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조롱하는 것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지점들이 모든 뉴라이트 인사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사상이 극단화되면서 이승만-박정희가 내세웠던 반공주의와도 연결되었다.

이들 모두 200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이유로 그 힘을 얻은 것은 확실하다. 노무현 정부 전후로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던 사람 중 우파 또는 반공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음은 물론, 이명박 정부 초기 광우병 시위의 영향은 그 반대급부로 극우의 목소리 또한 커지는 효과를 낳았고, 이명박 정권 또한 여론전을 위해 이들을 활용하게 되며 조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의 뉴라이트 운동은 이들을 하나로 합치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이들이 사상적 측면에서 완전히 합쳐지는 계기가 된 것은 박근혜 정부의 출범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올드 라이트야 박정희에 대한 강한 향수가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박근혜에 대한 맹렬한 지지를 쏟을 수 있었겠지만, 이명박 정부 시기 형성된 뉴라이트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것 또한 박근혜였다. 이는 같은 보수라는 점을 떠나서, 뉴라이트가 박정희 시기의 경제적 성과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올드라이트의 반공주의적 성향과 뉴라이트의 유물론적 사고에 기반한 경제적 성과지상주의, 좌파적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이 결합되면서, 대한민국의 극우는 다른 선진국들의 극우들과는 정 반대로 사대주의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경제 성과 지상주의는 잘 사는 나라가 내 나라라는 인식으로, 북한에 대한 오랜 적개심은 한민족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자괴감과 염증으로 이어진 것이다. 자국가-자민족 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한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을 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족주의적 성향을 조롱하고, 미국의 주장이라면 한국에 손해가 된다해도 절대 거역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우방으로 여기는 일본에 대해서도 긍정을 넘어서 아예 일본 극우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부분도 있다. 이는 단순한 시장경제 지향성과 외교적 정치지향성을 넘어, 이들이 자신들의 순수성을 '자유주의 진영'과 '시장경제 체제'에서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극우는 미국식 극우, 특히 미국 대안우파의 마이너 카피가 되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 대안우파의 관점을 한국식으로 바꾼 것도 아니고 그냥 미국 대안우파 그 자체의 일부분인데 인종만 한국인이라고 보면 딱 들어맞는다. 이렇게 보면 한국 극우의 자국 혐오 및 백인우월주의, 일본인 및 한국 극우 자신들에 대한 명예 백인 취급이 어떤 심리에서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더 간단히 말하면 겉은 한국인인데 속은 미국 대안우파인 것이다.

더욱이 한국 보수가 박근혜의 탄핵이라는 사건으로 크게 휘청이면서 이들의 위기의식은 더욱더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탄핵이 진행되는 시점부터 친박 세력을 중심으로 '태극기 집회'가 형성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극우는 '탄핵무효'를 기치로 극도로 결집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탄핵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빨갱이' 세력의 준동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기존 언론에서 연이어 터져나오는 뉴스들이나 사법부의 법적 판단, 선거 결과 등에 대한 인지부조화로 극단적 음모론 주장들을 늘어놓는가 하면, 쿠데타 등의 극단적 방법을 호소하거나 아예 직접적으로 폭력적인 행동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선포된 2017년 3월에 일어난 이들의 폭력성은 이들이 인지부조화적 상황 앞에서 그 극단성을 유감없이 표출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이후 타격을 입어 쪼개진 보수 세력 중, 친박계 세력이 이들을 인수하여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는가 했지만, 이미 탄핵이란 사건으로 인해 친박 세력은 극우로서의 구심점마저 잃어가고 있으며, 21대 총선에서 단 한개의 의석조차 얻지 못하면서 정치 세력으로서는 와해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민사회 차원에서는 기독교 극우세력과 더불어 반공주의 성향과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만을 바탕으로 일정 정도의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 시민단체와 태극기 집회가 이어지다가 차기 대선이서 극우세력들을 업고 출마한 전 검찰총장 윤석열을 당선시켰고 정권이 바뀐 윤석열 정부 이후에도 정치유튜버를 중심으로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시기의 극우로 지목되는 일베저장소의 경우는 정치 성향으로서의 극우로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지점에 속한다. 이들이 비록 기존 극우 세력의 주장에 동조하기는 하지만 그 동력은 어떠한 정치적 지향성에 있다기보다 심리적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이들의 주장 또한 혐오라기보다는 냉소에 가까우며 이들이 추구하는 것 또한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사상적 순수성보다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비하와 조롱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외 논문에서도 극우, 대안 우파 인터넷 커뮤니티라고 언급된 바 있기에 일반적으로 한국 극우의 일부분이라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2020년대 이후
2020년대 이후 한국의 극우진영은 최소 50대 이상 중노년층으로 구성된 기존의 태극기 부대 극우층과 20대 남성을 중심으로 한 한국형 대안 우파로 분화되었다. 일제강점기를 미화하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을 비롯한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과 향수가 남아있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다문화주의 및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 사회보수주의, 애국, 반서방, 친중, 반일에 대한 반발심과 자국 혐오, 반중, 반북이 결집의 동력원이다. 새로이 등장한 한국형 대안 우파는 오프라인 시위보다는 인터넷으로 혐오 자료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유럽, 북미보단 일본의 넷 우익 모델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 극단주의


극단적 기독교 우파(개신교 우파)


대한민국의 기독교 극우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 개신교가 보수성향을 추구하게 된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수 우파와 개신교의 연결은 근현대 대한민국 역사를 볼 때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한말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한국 개신교인 대부분은 신학적 보수주의자 혹은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또한 기독교가 개화사상에도 상호 영향을 끼쳤으며, 이로 인해 형성된 개화파가 대한민국 보수주의의 원류로 지목되고 있으니, 기독교, 사실상 개신교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에도 뿌리부터 상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도 있다. 거기에,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융성하던 기독교가 남북 분단으로 인해 직접적인 탄압을 받고 월남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에 대한 원한과 이로인한 반공주의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한미동맹을 종교적으로까지 확장, 대한민국을 개신교 국가를 건설한다는 이른바 기독교입국론까지 주장한 독실한 개신교인이었음은 물론, 박정희 정부에서도 개신교와 정부가 반공이라는 접점 하에 상호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잔재로 인해 개신교 주류는 강한 보수성을 지녔으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1980년대 이전까지 개신교는 성속이원론적 입장에서 정교분리를 받아들였고, 급성장 속에서 이렇다 할 정치적 메시지를 내비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미국의 방식에 더 가까웠다. 오히려, 1980년대까지는 진보적인 성향의 개신교인들의 민주화 활동으로 인해 개신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구분이 사라지고, 보수 개신교가 개신교의 주류로서 메시지를 내게 된 것은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등장으로 보수 개신교가 결집한 시점부터이고, 이것이 행동주의로 옮겨간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특히 2003년 3월의 구국기도회는, 본인들은 철저하게 '기도회' 형식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면면을 볼 때 철저하게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이 이후 보수 세력 내에서 힘을 얻은 개신교는 근본주의 신학에 입각해 반공주의와 반이슬람주의, 동성애 혐오(성소수자 탄압 및 탈동성애 운동 지지) 등을 주장하는 시민 세력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장로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더욱 강화된다. 에스더기도운동본부나 십알단 등의, 교회를 기반으로 한 극우적 개신교 활동단체들이 2010년대를 전후해 다수 등장했으며, 이를 계기로 개신교 우파는 훨씬 더 공격적인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들의 근본주의적 공격성은 종교의 가치를 넘어서 정교분리를 부정하고 개신교의 가치를 재해석하여 사회 전반에 강요하는 식의 정치 활동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건전한 우파의 가치를 넘어서고 공화주의,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반동주의적인 보수, 즉 극우적 형태를 띄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후로 이들은 구국기도회 등을 통해 태극기 집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며, 2019년 이후부터는 탄핵 이후 활동성이 크게 약화된 기존 아스팔트 극우를 대신하여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극우 정치집회의 주축으로 작용했다. 특히 정치목사 전광훈이 주도하는 사랑제일교회는 극심한 정치극단주의 + 제정일치(신권정치) + 매우 극단적인 미국 사대주의 성향을 띄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다만 보수진영 내에서 개신교가 어느 정도의 세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극우 개신교 세력 자체가 헤게모니를 이끌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대한민국이 어떠한 종교가 지배적 종교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상호간 견제에 의해 정교분리의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극우가 개신교와 연계된 반동성애·탈동성애 지지, 반이슬람, 차별금지법 등의 사안에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배경으로만 일부 남아있을 뿐 독자적 정치세력화에는 오랫동안 실패했다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더욱이 개신교 우파 세력이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집단 감염 사건을 일으키면서 이들이 非개신교인과 온건한 개신교인들의 마음을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문화적·민족적 순수성 중시

 

극단적 내셔널리즘(민족 우월주의, 환빠)


원래 전세계적으로 극우의 대표적인 정체성중 하나가 민족주의(ethno-nationalism)이기 때문에 환빠성 극우정당도 당연히 있다. 실제로 여러 정당이 등록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는 없다. 왜냐하면 환빠들은 우익 진영에서 별로 기를 못 쓰기 때문이다. 진영을 떠나서 일반인들은 억지스러운 환빠 사상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들은 제노포비아성 주장을 하지는 않지만 만주(간도), 연해주 등 고토 회복을 주장하고 역사 왜곡 문제를 일으킨다. 만약 이들이 극우의 실세로 등극한다면 파시스트 양상을 띌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가장 민족주의적 사회분위기가 강력했던 1980년대에도 이들은 주류가 아니었으며, 세대가 내려갈수록 탈민족주의화가 이루어지는 현 한국 사회에서 이들이 실세가 되기는 어렵다.

21세기 들어서 한국 극우파는 내셔널리즘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북한에 대한 동정을 유발할 수 있는 에스닉 내셔널리즘, 즉 한민족주의와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지만 여전히 군사독재 시기 극우민족주의를 계승한 정치 세력들도 존재한다. 한빠 일부 등은 한민족 우월주의와 반공주의를 결합하는 극우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핵나라당이나 가나반공정당코리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인종국민주의, 반이민, 다문화 반대운동[


인종국민주의의 경우 다문화 반대운동과 달리 인종이 같은 동북아시아인과의 혼혈에는 관용적이고, 그 외의 혼혈을 적대하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무슬림 난민, 아프리카 난민에 적대시한다는 점은 다문화 반대운동과 인종국민주의가 동일하다.

스탠포드 대학 교수이자 한국학자인 신기욱은 한국의 민족주의(Korean ethnic nationalism)을 인종국민주의(racial nationalism)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의 민족주의의 '민족'개념이 혈통 등으로 정의되는 측면에서 서구의 race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마이어스도 한국의 '민족주의'를 race-based nationalism이라고 지칭한 바 있다. 

경제 위기와 각박해진 사회 민심을 틈타 오프라인에서도 점점 목소리를 드높이기 시작한 다문화 반대 움직임도 과격할 경우 극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2013년엔 제노포비아 성향의 다문화 반대 운동단체에서 '국제녹색당'이라는 이름의 군소 정당을 인수하여 민족주의에 기반한 다문화 반대 정당으로 재편하려는 소동도 벌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2018년 제주 난민 사태 당시 예멘인들의 집단적인 난민 신청으로 그 이전까지 먼 유럽의 일로 여겨졌던 난민 이슈가 한국 사회의 논란으로 대두되었으며, 전 세계 20대 극우화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인 난민공포증을 이용하여 집권하려는 집단도 늘어나고 있다.

 

 

뉴라이트


뉴라이트 진영은 한국의 독특한 극우 정치세력으로 여겨진다. 소위 탈민족주의를 긍정하면서도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를 포함한 식민주의 유산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며, 탈민족주의 아젠다와 모순될 정도로 민족주의적이였던 반공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옹호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부라며 무조건적인 찬양을 하는 경향이 있다. 좌익 계열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 위안부 등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역사수정주의적 견해를 보이고 매카시즘적 성격이 짙다.


뉴라이트 등 일부 한국의 극우가 가진 성향은 제1세계의 국수주의/민족주의적 극우보다는 제3세계의 극우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그 비슷한 점이란, 사회문화적으로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일정 부분 내셔널리즘과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성향을 보이긴 하면서도, 선진국 내지는 열강에 대한 추앙을 하고 있으며, 자국의 이득보단 좋게 말해선 자국의 혁파, 나쁘게 말하자면 국가의 파괴를 추구하는 성향을 뜻한다. 중장년층 중에서 극우사상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아직 한국이 제3세계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 문화 및 체제였던 시기에 자란 사람들이었단 점도 주목할만하다. 이게 제3세계에선 열강에 기댄 쿠데타로 실현되지만, 한국의 경우엔 이미 국가가 굳건한 상황이기에 쿠데타로 이어지지 않을 뿐이다. 현 대한민국의 극우 사상 중 한 축인 뉴라이트가 극좌인 NL에서 시작됐단 점을 감안하면 서로 비슷한 모습이 보이는건 이상하지 않다.

다만 뉴라이트 진영의 임시정부 법통론 부정, 국가 내셔널리즘이나 건국절 옹호 자체만으로는 극우적 요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 내셔널리즘은 광의의 시민 내셔널리즘으로 분류되는데다가 건국절은 브라이언 마이어스 등 일부 좌익 학자들도 옹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극우로 간주되는 이유는 단순히 건국절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이승만에 대한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찬양과 당시 반공을 명분으로 내세운 독재, 학살에 대한 은폐 혹은 정당화를 목적으로 건국절을 밀기 때문이다.

 

 

종북주의 세력의 포함 여부


종북주의자들이나 반공을 전제하지 않은 급진적 민족주의 세력의 경우, 한국 특유의 정치 스펙트럼 분류상 극좌로 분류하는 경우가 주류적 견해다. 그러나, 서구적인 스펙트럼 기준에서는 이들도 극우라고 볼 만한 요소가 적지 않다.#### 애초에 북한 자체가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체제 등 극좌적인 모습도 있는 반면 초보수주의, 민족주의~울트라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극우 국가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종북이나 강성 좌익 민족주의 인사들 중에 혼혈, 다문화 등에 대해 경멸을 보이고 단일민족을 고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참고로 종북주의자들이나 탱키들은 북한보고 극우나 파쇼 운운이 반북 우파, 제국주의자 혹은 서구 네오콘의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서 북한을 악마화하기 위해 왜곡한 것이라는 식으로 반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북한을 극우라고 보는 대표적인 학자들인 브라이언 마이어스는 미국 녹색당을 지지하는 좌익 성향이고 Hillel Ticktin도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좌익 학자이다. 물론 종북주의자들이나 탱키들은 브라이언 마이어스가 그저 네오콘과 다를 바 없는 자유주의적 매파일 뿐이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브라이언 마이어스가 남한 정치 분석에 있어서는 상당히 편파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의 극우성에 대한 분석이 마냥 과장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괜히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북한학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북한이랑 종북주의자의 성향이 완전히 같은건 아니다.

 

 

 

조직 및 정당

 

미군정기 ~ 제1공화국 초기의 극우 정치단체
국민회(1945년)
대한민주청년동맹: 명목상 감찰부장을 맡은 김두한이 실질적 수장을 맡은 백색테러 단체로 1947년 정진룡 살해 사건으로 인한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해산되었다.
대한청년단
백의사
삼우회
서북청년회: 월남한 이북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한 극우 단체로 6.25 전쟁 당시까지 존속했었다.
조선민족청년단: 파시즘에 영향을 받았다.
제1공화국의 극우 정당/조직/단체
화랑동지회: 동대문파 수장 이정재가 수장으로 있었던 정치폭력단체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대한민국 엄마 부대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대한민국해병대전우회
박사모
대통령 탄핵무효 국민저항총궐기 운동본부
사랑제일교회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
자국민보호연대
가로세로연구소
신 남성연대
트루스포럼

 

 

극우 성향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 극우 성향 갤러리
국내야구 갤러리
국민의힘 비대위 마이너 갤러리
미국 정치 마이너 갤러리
보수정치 마이너 갤러리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코로나 바이러스 갤러리
부동산 스터디
일베저장소
진실의 눈과 머리
나무뉴스
다수의 극우 유튜버 채널

 

 

 

 

 

 

 

 

 

 

 

 

 

 

 



독일의 극우
독일의 극우는 역사적으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유명하며, 동시에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선거로 집권하였다. 아돌프 히틀러 정권은 장애인들과 유대인을 말살하는 강력한 인종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을 학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잔당들은 독일 우파당을 거쳐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을 형성하였으나 1952년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후에는 독일 제국당으로 넘어가다가 국가민주당의 일부가 되었다. 

동독 정권은 과거 반(反) 나치 파르티잔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 잔당들을 광범위하게 숙청했다. 서독 같은 경우는 1945년 패전 이후 연합군은 극우 이념을 엄금했지만, 일부 나치 동조자가 석방되거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 결국, 1947년 냉전이 시작되자 서독에 주둔했던 서방권 연합군들은 '군사작전역사부'라는 기관을 만들어 친(親) 나치 성향의 역사왜곡을 주도했다. 

1950년대부터 호황기를 누린 나라들 중 대표적인 서독은 1950년대부터 급진적인 다문화 정책을 실행해 왔다. 1960년대에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서독의 원조가 매우 심화되던 때로, 외노자들의 등장에 반대하는 인종주의자들이 독일 국가민주당을 창당했다. 1990년에 있던 독일 통일은 대량의 실업자들을 양산해 냈고, 급진적인 다문화 정책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그러한 상태를 악화시켰다. 이에 따라 외노자들에 대한 증오를 품은 네오나치가 대거 등장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제도권에 진입을 못하게 하고 있지만, 그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독일을 위한 대안이라는 반(反) 난민, 반(反) EU 극우 정당이 등장하면서 2017년 총선에서 94석으로 제3당에 오르기까지 했으나 계속되는 우경화로 베른트 루케와 프라우케 페트리가 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중 루케는 자유보수개혁당, 페트리는 파란당으로 넘어간다. 

이 밖에도 제3의 길, 우파당 등의 극우 정당이나, 2015년 이후 형성한 페기다 같은 극우 단체 등이 존재하며 이들 모두 네오나치 외에도 독일 국민주의, 반이민 등을 표방한다.

러시아의 극우
러시아에서 1910년대에 왕당파 형태로 나타났고, 1990년대에는 네오나치의 형태로 나타났다. 후자의 경우는 현재까지 이어져오지만, 전자의 경우에도 현재까지 이어져오나 그 활동력이 극히 미미한 상태이다.

소련 정부가 들어선 1921년에서 1989년까지 소련의 전 지역에서는 인종차별, 국수주의, 파시즘 찬양을 당국에서 엄격히 제재하여, 극우 정치사상을 따르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없었지만 타 지역에는 만주에 거주했던 어뤄쓰족들이 주도한 러시아 파시스트당 등 러시아계 파시스트 단체가 존재했었다. 이후 1990년에는 정치의 자유를 보장함에 따라 극우 정당의 설립도 허가되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경제는 급속히 피폐해져서, 1992년에는 1인당 명목 GDP가 약 500 달러(소련 시절의 22분의 1 수준)로 낮아졌다. 소련 시절에 보장되었던 여러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지고 경제난, 실업난이 심해지다 보니, 양극단에 선 정당의 지지도가 높아졌으며, 그 시기에 제일 큰 정치 세력이 바로 극우 정치 세력이다. 현존하는 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은 당명과 관계없이 나치즘과 파시즘을 지지하는 정당이다. 과거 소련 자유민주당으로 창당하여 야당 격을 맡았지만 지금은 극우 정당 중 하나로 불리며 현재 국가두마 의석수 대비 2020년 기준으로 제4당이다. 이들은 반공주의, 반민주주의 성향 그리고 인종주의 성향을 가졌지만, 과거의 소련, 러시아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후원하는 러시아 극우 스킨헤드들은 러시아 내에서 활동하는 유색인종들이나 유학생들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폭행하여, 수많은 폭력 사건을 일으켰다.

이 밖에도 로디나 등의 극우 정당이 존재하며 드미트리 로고진이 이끄는 구 로디나는 과거 공정 러시아로 합당한 적이 있다.

미국의 극우
미국의 경우, 2차 대전 시기부터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반대하는 소규모 파시스트 집단들이 존재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해군 중령 출신인 조지 링컨 록웰은 미국의 다문화 정책과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1959년 미국 나치당을 창당했다. 동시에,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기병대 장교가 설립한 KKK란 극우 단체가 존재하며, 이들은 주로 미국 중부 지방과 남부 지방에서 활동하고 백인인종주의, 개신교 근본주의, 반천주교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네오나치만 한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헌법당과 미국 공화당 내에는 네오파시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동시에 자유당(Libertarian Party)에도 아나코-자본주의 성향의 극우들이 존재한다. 특히, 아나코-자본주의자들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는 나라이기도하다. 그러나, 보수양당제인 미국 정치 현실에서는 극단적인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을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은 티파티 운동, 그리고 공화당의 신보수주의의 패권주의와 제국주의 성향을 들어, 이 정치운동 및 이념을 극우 이념이라고 평가한다.

영국의 극우
영국에서는 1935년 파시즘 정당인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창당되었으나, 영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1940년 해산되었으며, 영국에서는 극우 파시스트들이 큰 힘을 갖지 못하였다.

오늘날 영국의 극우들은 국민주의 성향의 파시스트 극우, 유럽회의주의 극우, 백인 우월주의 극우로 크게 나뉜다.

2016년 브렉시트를 계기로 유럽에서 유럽 연합을 탈퇴하고 이민을 반대하는 극우 운동이 확산되었다.

현재 영국 극우 정당은 영국 독립당, 브리튼 국민당 등이 있다.

일본의 극우
일본에서 극우 운동과 사상은 일본 제국 시절 당시 일본 육군의 파벌이었던 황도파, 통제파와 파시스트였던 기타 잇키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황도 파는 반자본주의와 파시즘을 모토로 한 국가주의, 팽창주의를 기반으로 했고, 통제 파는 기존 일본식 자본주의 체제와 군주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를 온건적으로 실행해 나가자는 입장이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가 끝난 이후 극우 사상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이들의 사상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1940년 일본 정부는 근로국민당, 동방회를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켜 대정익찬회를 형성했으나 1945년 대정익찬회는 해산되고 사실상 일본 파시즘은 사라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부분의 극우 지지자들은 처벌을 면하여 일본 자유당에 입당하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들의 원로적 역할을 했던 정치인들이 극우 운동의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일본은 다름없이 극우에 대한 지지도가 상당히 높으며, 해당 단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좌익 인사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폭력단과 야쿠자와 유사한 단체를 가진 극우 단체도 존재한다. 정치권 내에서는 일본유신회라는 50석이 넘는 제3정당까지 존재한다. 대한민국과는 달리, 이들은 수많은 서클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다 똑같은 극우들로 보기 힘들며, 네오나치, 파시스트, 일본식 제국주의자, 민족아나키즘 등등으로 나뉜다. 넷우익이란 용어도 일본에서 처음 나타난 용어이며, 주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극우를 지칭한다. 일본의 지식계에서는 넷우익 들을 일종의 사회 낙오자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 극우들의 공통점은, 반민주주의, 반공주의, 수구주의, 국수주의적이라는 점이 있다.

중국의 극우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붕괴된 후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공화주의와 극우적 사상이 혼합된 형태를 지향하는 정치운동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장제스는 중국식 국가주의와 유교적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한 파시즘을 지향했었다. 그는 1925년 당의 권좌를 잡은 후 1927년 중국 국민당 내의 중도 좌익을 숙청하여 당의 성격을 우익 성향으로 바꿨다. 국공 내전 시기에 국민당 내 극우들은 청방과 삼합회와 같은 조직폭력배를 고용하여, 점령지 내의 좌파 농민,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했다.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게 된 후, 극우 세력들은 타이완으로 피신하여, 타이완 원주민들과 한인의 차별 정책을 지지했다. 장제스가 사망하였던 1975년까지 이른바 '전시민주체제'라는 반독재체제를 유지하여 일인일파 독재체제를 완고히 다졌었다. 이후, 중화민국 내 극우는 대륙수복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반대파들을 공산주의로 몰아 학살했으나, 장제스가 죽고, 국제적으로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보도록 국제적인 인식이 바뀌고, 장징궈가 총통이 되고 민주화된 이후엔 사실상 대륙수복이 불가능하기에, 일부 온건우파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협력하는 친중노선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중화민국 내 극우는 민주진보당의 타이완 독립, 분리주의 노선에 반대하며, 동시에 장제스식 대륙 수복, 국수주의, 보수주의, 국가주의 성향 등 과거의 정책을 지지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정치 활동 면에서는 직접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중 중화통일촉진당이 있다.





프랑스 극우와 한국 극우는 자칭 ‘애국주의자’라는 점을 빼면 전혀 닮은 점이 없다. 프랑스 극우세력은 국민전선(FN)의 마린 르 펜이 이끌고 있지만, 한국의 극우세력은 정치적 실체가 불분명하다. 다음 달 7일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두고, 극우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좌우 연대 전선이 구축됐다. 거대여당인 사회당과 거대야당인 공화당이 르 펜의 집권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서 정파를 초월해, 역시 결선에 오른 에마뉘엘 마크롱 지지에 나섰다. 주목할 만한 점은, 거대 우파야당인 공화당이 극우 퇴출을 위해 자신들의 정적이라 할 사회당 내각 출신의 마크롱 후보에 힘을 실어줬다는 사실이다. 

반(反) 유럽연합(EU)과 반 세계화, 반 시장주의를 지향하는 르 펜은 EU 역내 노동력의 자유이동이 프랑스의 저임금과 고실업을 야기했다고 지적하며, EU 재협상과 탈퇴를 주장했다. 르 펜은 특히 은행가 출신의 마크롱이 수천 명의 삶을 망친 친(親) 시장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노동자 계급 유권자들을 공략했다. EU역내의 노동력 규제를 빼면, 르 펜의 주장은 1차 투표에서 19.58%의 높은 지지율을 얻어 4위를 차지한 급진좌파 ‘프랑스 앵수미즈(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장뤼크 멜랑숑 후보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유독 르 펜에 대한 거부권이 좌우 진영모두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뤄진 것은, 이민자들에 대한 그의 차별적 규제계획 탓이다. 이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공화국 정신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극우는 어떠한가? 한국의 극우세력은 군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유엔기와 이스라엘기까지 휘날리며 시위를 벌이지만, 구체적인 정치적 실체가 없고, 이렇다 할 정책방향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 세력의 지지를 받거나, 또는 이들을 대표한다는 정당의 대선 후보들은 어떠했는가? 한국적 정서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어떠한 정책을 내놓은 적이 없고, 재벌이 주로 지배하는 시장질서에 저항한 적도 없었으며, 비정규직의 저임금과 고실업에 대한 고민도 전혀 없었다. 미국, 유럽,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반대나 협정 철회를 주장한 적도 없었고, 농민과 중소기업들의 권익을 위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움직임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유신시절 흑백 TV에서 줄곧 음산하게 들었던 국영 방송국 아나운서의 ‘영혼 없는’ 목소리를 흉내 내어,  ‘좌파척결’이나 ‘종북척결’을 외쳐대다가 대선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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